사람은 살다보면 참으로 묘한 구석이 있다. 망각의 그림자속에 어눌하게 살다가도 어떤 기억들이 불현듯 떠오르거나 재현되면 당황하는 우리들은 스스로의 나약함에 자지러지게 놀라나 보다.
경상도쪽에 접한 지리산자락의 한 귀퉁이에 자리한 청학동...그곳은 어느덧 유명해진 관광지이다. 시원스레 달리던 고속도로를 벗어나 구비진 강물을 옆에 끼고 국도를 지나고 몇개의 수원지를 지나 잘 닦여진 지방도를 통과하며 산속으로 들어가길 한참만에야 도착한 청학동은 이미 날이 어두워진 관계로 다음날 아침에 들러보기로 하고 식사부터 하기로 했다.
지리산 흑염소 한마리를 통째로 먹으며 주인장의 구수한 입담을 들어보니 원래 청학동이란 도교사상의 이상향...유토피아와 관련이 된다고 한다. 조선조 유학자가 그리던 도교 전설의 성지 그곳은 하늘아래 위치한 곳으로 지기와 천기가 교차하며 별들의 정기가 내리비치는 곳이라 했다는 데 ... 그러한 곳으로 가장 근사한 조건을 갖춘곳이 청학동이라한다. 그러나 최근엔 부동산 투기바람이 불어와 많이 번잡해지고 살기가 나빠졌다고 한다. 번잡한 사람의 왕래가 많아지고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상가에 밀려 전보다 못하다고 한다.
늦은 저녁을 먹고나니 어느덧 하늘은 깜깜하다. 숙소로 예정된 산장으로 다시 이동을 해서 가니 산장이름이 털보네 OK산장이라나...사장님의 얼굴에 난 수염에는 따스함과 너그러움이 묻어있는듯하다. 식당에서 진한 매실주스를 마시고는 각자의 방으로 가서보니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그 흔한 TV와 라디오가 하나 없고 전화기 마저 없다. 깨끗하게 정리된 방에는 경대와 침대만이 덩그러이 놓여있고 욕실마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건만 낯익은 무언가가 없다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주변을 자세히 보니 벽면 한귀퉁이에 적힌 알림판에는 주인의 배려가 눈에 들어왔다. 도시의 문명에서 벗어나 진정한 휴식을 취하라고 문명의 이기를 치웠단다.
어느덧 전화와 방송매체에 익숙해진 나의 습관들... 밤낮으로 정보에 접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습관...그런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테라스로 나가보니 마당의 보안등하나외엔 모든 것이 어둠이다. 하늘엔 많은 별들이 보이고 앞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와 풀벌레 소리는 나만의 공간에서 맴돌며 작은 협주곡이 되어 포근히 감싸온다.
어둠의 공간을 무언가가 지나친다. 박쥐 한마리가 날아다닌다. 오랜만에 보는 박쥐의 날개짓은 두려움이 아니라 신비로움을 준다.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났던 별과 박쥐...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되살아난다. 참으로 오래도록 바라만 보다 잠자리에 들었다.
산속의 아침은 빠르게 시작된다. 도시보다도 이른 아침에 창밖을 보니 어제는 볼수 없었던 개울과 절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개울엔 산장 주인이 기른다는 거위와 오리, 백조,기러기 그리고 원앙이 한쌍씩이 한가로이 노닌다. 짝을 이룬 그네들의 한가로움이 나를 느긋하게 만듬을 느끼며 쳐다보니 멀리 바위틈에서 서성이는 족제비도 보인다.
아침식사후에 올라간 청학동은 한산했다. 이른 아침인지 사람도 번잡하지 않고 조용하기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마을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동행했던 일행이 마을을 둘러보고는 왜 이곳이 그리 유명한지 모르겠다며 의문을 제기한다.
청학동이 알려진 것은 70년대 말이다. 당시의 어지러운 국내정치상황에서 어느날 한방송국의 기자가 흥분해서 지리산내에 전통방식으로 살아가는 마을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아이들은 외지사람을 처음으로 대하고...그러나 실상은 50년대 말에 몇사람이 유교적 삶을 지향하여 가족과 함께 옛방식으로 살자며 산으로 들어왔고 20년여를 외부와 단절되어 살았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40년정도를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을을 가옥과 배치는 너무나 현대적이고 엉성하다. 대충이어진 기둥과 들보...나왕과 니기다...간간이 보이는 합판들...그리고 진흙 보다는 콘크리트가 섞인 한옥아닌 한옥들...그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원주민 보다 많아진 외부의 상인들에 누가 누구인지를 구분하기는 어렵다. 단지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쓴 남정네들이 오가며 때로는 운전하는 하는 모습이 보일 뿐...
마을 어귀의 회관과 상점엔 청학동 서당이란 글귀가 자주 보이길래 한 상점에 들러 책한권을 사며 몇마디 물어보니 최근엔 서당이 유명하단다. 사연인즉 도시의 부모들이 방학이면 한자교육시킨다며 아이들을 보내와서 넘친단다.
청학동까지 불어닦친 과외열풍은 아닌가 의구심이 일어남은 왜일까?
청학동이 상혼에 멍들어간다 하더라도 원주민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유교적 가치관을 고수하며 이상향에서 살려던 그들의 원의를 바꾼 것은 도회지사람들의 비뚤어진 호기심 때문이니까....
기억의 저편에서 감추어졌던 영상이 하나 둘 떠오른다. 망각이란 이름하에 떠밀려진 기억의 편린들이 한마둘 떠오르고 그것들이 영화의 한 장면들 처럼 스쳐지나감에 괴로움과 허탈감이 밀려들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편안한 휴식을 취할수 있던 털보네 산장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