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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죽음
신 34:1-12
1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8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신 34:1-12 / [모세의 죽음] 그 뒤로 모세가 모압 평원에서 느보 산지로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에 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이르자 여호와께서 그 앞으로 펼쳐진 온 땅을 모세에게 보여주셨다. 요단강 동쪽의 길르앗 지역과 거기서 북쪽으로 단 지파에 이르는 전지역과 2) 거기서 요단강 서쪽으로 납달리 지파의 온 지역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온 지역과 지중해에까지 이르는 유다 지파의 온 땅과 3) 거기서 남쪽으로 펼쳐진 메마른 네겝 지역과 종려나무의 성읍인 여리고에서부터 사해 남단의 소알 성읍에 이르기까지 요단강 계곡의 온 주변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셨다. 4) 그리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면서 그들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이다. 내가 그 땅을 네게 보여주기는 하였지만 네가 직접 그 땅에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5) 이리하여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종 모세가 모압 땅에서 죽어 6) 모압 땅의 벧브올 맞은편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으나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은 지금껏 아무도 모른다. 7) 모세는 죽을 때 나이가 120세였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눈도 흐리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다. 8)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평원에서 모세를 위하여 슬퍼하며 30일 동안 애곡하였다. 9) 이제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의 영도자가 되었다.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안수를 받고 그의 후계자가 된 다음부터 지혜의 영이 충만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에게 순종하며 여호와께서 이미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신 일을 그대로 다 수행하였다. 10) 그 뒤에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서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한 명도 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여호와께서 친히 얼굴을 대면하여 사귀신 예언자였다. 11) 그가 애굽에서 바로와 그의 대신들과 그의 온 백성에게 여호와의 권능을 보여줄 때에 행한 것과 같이 놀라운 이적과 기사들을 행한 예언자는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12) 온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그토록 엄청나고 두려운 일들을 행한 예언자는 그 후 한 명도 없었다.
모세는 사명을 완전하게 끝내고 최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화를 한번 낸 것 때문에 가나안에 못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느보 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부름 받은 모세의 마지막은 아름답습니다.
가장 높은 산에서(1-4) 느보 산에서 제일 높은 비스가 꼭대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길르앗 온 땅을 보여주십니다. 동쪽은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의 땅이었으나 이스라엘이 차지했습니다. 서쪽은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 그리고 지중해를 보여주십니다. 남쪽으로는 사막이 있는 네겝을 보고, 여리고 골짜기 평지 종려의 성읍 여리고까지입니다. 소알은 작다는 뜻의 사해 바로 옆 지역입니다. 동쪽에서부터 서쪽까지 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롯이 떠나고 난 뒤에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이 땅을 네게 주리라”라고 했는데 바로 그 땅을 본 것입니다(창 13:14-16).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이 400년이 지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세의 장례(5-8) 모세는 백이십 세까지 살았고, 눈이 흐리지 않았으며 기력이 쇠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하나님 앞으로 갔습니다. 그가 묻힌 곳은 아무도 모릅니다. 만약 모세의 무덤을 알았다면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 모세의 묘에 숭배하는 사람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모세의 장례는 30일 동안 애곡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모세의 삶은 하나님께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아름답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후계자 여호수아(9-12)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하면 모세의 영감을 받아서 백성을 잘 이끌어 갈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안수를 해주었습니다. 안수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수시키는 것으로 나와 함께 했던 하나님이 너와도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안수받은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영을 충만하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할 수 있도록 지도력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모세 이후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시내 산에서 80일 동안 깊은 교제를 한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당신의 마지막 순간은 어떤 모습이기를 원합니까? 모세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게 부름 받기 위해, 오늘도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 먼저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를 배우는 방법은 바로 기록된 말씀을 받아 섭취하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셔서 살아 역사하게 만드시는 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지식적으로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그 말씀에 대한 묵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며 성령께서 그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게 만드시도록 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계속해서 맴돌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 설 교 >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18) 느보산에서
신 34:1-8 / 이동원 목사
1963년 11월 22일 미국 텍사스 달라스의 도심에서 저 유명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자의 탄환을 맞고 죽어갈 때 거의 같은 시각에 또 한 사람이 영국 런던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죽음의 소식은 케네디의 죽음으로 많이 알려지지 못했지만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사상가요 변증가요 나르니아 연대기의 작가인 옥스포드 교수 C.S. 루이스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 3년 전에 그의 나이 50대 말에 만나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었던 아내의 죽음으로 그녀와 먼저 가슴 아픈 이별을 해야 한 했었습니다. 영국인 루이스가 미국 여인 조이 그래샴을 만나고 사랑에 빠졌을 때 그녀는 이미 악성 골수암을 앓고 있었습니다. 루이스 교수는 그녀의 병을 알고도 정식으로 결혼 프로포즈를 합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름답고 고통스런 시한부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58세에 결혼하여 4년간의 부부 생활을 통한 사랑을 나누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그녀가 그의 곁을 떠났을 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45세였습니다. 그녀가 죽은 후 루이스 교수는 ‘헤아려 본 슬픔’이라는 책을 남깁니다. 그리고 이 아름답고 눈물겨운 사랑의 이야기는 ‘새도우랜드’(shadowlands)라는 영화로 만들어 집니다. 그리고 루이스 교수는 “죽음의 사별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지만 그 고통은 바로 우리가 누려온 행복의 일부분이다”는 유명한 고백을 남깁니다.
누구나 죽습니다. 죽음에서 예외인 인생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문제는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느냐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의 지도자인 모세가 그 백성을 약속의 땅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느보산까지 인도한 후 임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 편 비스가 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땅을 단(이스라엘 최 북단)까지 보이시고” 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이 보이는 이 지점 느보산까지 도달한 것입니다.(성경 지도) 느보산(시야가 산)은 모압땅 아바림 산맥중 최고로 높은 해발 835m에 위치한 산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를 ‘비스가’(히브리 말로 ‘꼭대기’라는 뜻)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기원후 4세기부터 이곳에는 모세 기념 교회가 세워져 있었고, 여러번 파괴되었지만 1932년에 복원된 프란치스칸 교회가 지금도 이 곳에서 성지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 마당에는 모세가 전한 복음을 상징하는 놋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고 이 교회 마당에서 날이 맑은 날이면 한 눈에 가나안 땅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리더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백성들과 죽음으로 작별을 고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지도자 모세의 죽음을 통해 성도의 죽음의 의미를 질문하고자 합니다. *성도에게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죽음은 삶의 영욕을 결산하는 순간입니다.
누구도 완전한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구나의 인생에도 ‘성공과 실패’, ‘영광과 치욕’이 공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한국인의 치명적 약점의 하나는 어떤 사람이 한 가지를 잘 하면 모든 것을 잘하는 사람으로, 또 반대로 한 가지를 잘 못하면 마치 모든 것을 잘못하는 사람인 것처럼 평가하려는 흑백 논리적 사고의 틀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칭찬할 때는 거의 신화적 수준으로 칭송하다가 뭘 하나 잘못하면 그 순간 죽어 마땅한 인생으로 매장해 버립니다. 그러나 이 땅에 완벽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것은 잘하고 어떤 것은 잘못할 수 있는, 어떤 때는 잘하다가도 또 어떤 때는 잘 못하는 두 가지 가능성을 언제나 갖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잘 할 때 오히려 우리의 이웃들을 조심하도록 경고해주고, 잘 못할 때 오히려 그를 북돋아 주는 격려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분명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흠 없는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죽음의 순간이 바로 이런 그의 인생을 결산하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모세의 죽음을 보도하는 장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백성을 약속의 땅이 보이는 지점까지 인도했지만 그는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까. 4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참, 안타까운 일 아닙니까? 한때 한 순간의 결정적인 혈기, 반석을 두 번이나 지팡이로 때린 그 실수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얼마나 후회하였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백성을 거기까지 인도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 백성의 리더로서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또한 그의 믿음의 영광스런 결과였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모세의 믿음을 결산하면서 더 이상 모세의 이런 실수를 거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그 백성을 인도하는 사명을 완수한 것만을 기록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실수의 가능성에 긴장하고 살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인생을 사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죽음의 순간 우리는 영욕을 초월한 후회 없는 인생이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죽음은 하늘의 위로를 경험하는 때입니다.
저는 본문에서 성경이 모세의 죽음을 결코 부정적으로 그리려고 시도하지 않았다고 확신합니다. 본문의 의도는 다분히 그의 죽음이 영광의 죽음이었음을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우선 마지막 구절 8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일을 애곡하니라” 아론이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30일간 곧 한 달간의 장례를 통하여 그에 대한 백성들의 최고의 존경과 애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7절입니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우리는 나이가 연로하신 어르신네들 중 열심히 운동하시는 분들을 봅니다. 저는 그분들이 소원하시는 것이 꼭 장수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를 살더라도 건강하게 사시다 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모세는 120세가 되어도 시력이 저하되지 않는 건강함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20세를 채웠습니다. 창6:3에 보면 노아의 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이 인간의 수명을 120세로 고정하신 것을 볼수 있습니다. 지금도 의학자들은 인간이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건강의 조건을 만족시키면 능히 120세를 살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저는 모세의 이런 말년의 모습은 평생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한 당신의 종에게 베푸신 하늘의 위로였다고 믿습니다. 어떤 옛 설교자는 이를 가르쳐 ‘석양의 은총’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마치 시편 23편의 고백처럼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만찬) 기름을 머리에 부으시는 위로인 것입니다. 인생은 결코 죽음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또 죽음으로 가는 길이 고통만이라고 가정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죽음의 길은 세상이 모르는 하늘의 위로가 함께 하는 길인 것입니다. 설교의 왕자로 불려진 스펄전 목사님도 말년에 지병으로 많은 고생을 하시며 요양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찾아가 “많이 아프시지요?”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 아파요. 많이 아파요. 그러나 이 나를 아프게 하는 고통보다도 주님은 더 가까이 저와 함께 하십니다. 그 분이 오늘도 저의 위로요 기쁨이요 희망이십니다. 그래서 견딜 수 있고요. 승리할 것이에요” 한때 살 소망까지 포기하고픈 어려움을 경험한 바울도 고후1:5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루이스 교수도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 간 후 같은 고백을 합니다. 자신은 인생에서 두 번 중요한 선택을 했는데 소년 시절-안전을 선택했고, 노년에 그의 아내를 맞이하며 또 한번 선택을 했는데 이번에는 고난을 선택했다고 그런데 그 고난이 자신에게 기대하지 않은 위로를 동시에 주었다고 말입니다. 고난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길이라면 하늘의 위로를 경험하는 우리의 인생이 되도록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임종의 길에서 이런 위로의 은혜를 경험하시려면 위로 받기에 합당한 성도의 자리에 평생을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정상적인 성도라면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죽음은 하늘의 위로를 경험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3. 죽음은 인생의 주인을 높이는 시간입니다.
본문이 모세의 죽음을 보도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사건 하나를 지적합니다. 5-6절입니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벳부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더라” 그가 장사지낸 무덤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설명이 시도되어 왔습니다만 가장 유력한 신학적인 설명은 이렇습니다. 모세가 워낙 출중한 지도자여서 하나님은 그가 우상화되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위대성은 모세 자신의 위대성이라기보다 모세를 그렇게 사용하신 하나님의 위대성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의 증언처럼 아무리 모세가 위대했어도 그는 결국 ‘여호와의 종’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주인은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이 그의 평생을 인도하셨다면 이제는 인생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죽음은 바로 이런 인생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높이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위대한 종교 개혁자 존 칼빈이 제네바에서 죽었을 때 그가 섬겼던 제네바 도시 전체가 울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유언을 따라 그의 장례는 단순한 예배만으로 종료되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 “장례를 검소하게 하고,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을 가급적 남기지 말라”고 유언했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그 후 이것을 너무 아쉽게 생각하는 칼빈의 제자중의 하나가 무덤 앞 돌 하나를 설치하고 이니셜로 JC를 새겨 놓았습니다. 이것은 존 칼빈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의 평생의 주인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기도 합니다. 오늘 날 그의 무덤을 방문하는 우리는 그의 겸손한 무덤 앞에서 더 큰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의 아름다운 마지막은 그의 평생의 삶의 고백에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그의 인생의 좌우명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였습니다. 그는 그의 인생의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서 평생을 살고자 했고, 그의 겸손한 죽음으로 다시 한번 그의 주되신 하나님을 높이고자 한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 설교를 C.S.루이스 교수의 죽음과 그의 아내의 죽음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의 책 ‘헤아려 본 슬픔’ 마지막 단원에서 루이스 교수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묵상을 단테의 신곡의 한 부분을 인용하여 끝맺고 있습니다. “단테는 그리워하던 뻬아트리체를 만나 신 앞까지 함께 갔으나 홀연히 뻬아트리체는 사라지고 그녀가 영원의 자리에 올랐음을 통보받는다. 단테는 비로소 실망을 떨치고 뻬아트리체와 함께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한다”고. 그리고 뻬아트리체처럼 그녀가 남긴 마지막 미소는 이제 나를 향한 미소가 아니었다고, 그것은 그녀의 주님이신 그분을 향한 미소였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아내가 마지막 남은 숨결로 고백한 말을 회상하는 것으로 이 책을 마무리합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롭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이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주인되신 하나님의 평화의 품으로 인도하셨다면 이제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닌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진실로 사랑했던 사랑의 주인,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높이셔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어느 날 우리의 죽음의 날에 진실로 우리의 주인을 높여 드리기 위해서 오늘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의 남은 날을 창조자요 구원자이신 우리 주 하나님을 참으로 높이는 인생을 살아가도록 기도하십시다.
눈에 보이나 건너지 말라
신 34:1-7 / 강문호 목사
■ 어느 택시 기사의 고백입니다. 어느 날 택시에 손님이 지갑을 떨어 뜨리고 내렸습니다. 열어보니 100만원짜리 수표 8장과 10만원짜리 수표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현금까지 모두 1,260만원이었습니다. 기사는 즉각 경찰서로 달렸습니다. 그러나 경찰서 앞에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택시에서 하루 종일 고생하여도 10만원 벌기가 힘든 데 엄청난 돈이라 하루만 더 세어 보고 경찰에 갖다 주고 싶어졌습니다. 장롱속에 감추어 두고 세어 보고 또 세어 보았습니다. 만져 보고 또 만져 보았습니다. 매일 운전하고 들어와서 만지고 또 만져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 들었습니다. 경찰만 보아도 자기도 모르게 떨리면서 브레이크에 발이 갔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말대로였습니다. 잠 자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이불을 덮고 자도 덜덜 떨리기도 하였습니다. 아내가 남편과 의논없이 목사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상담하던 중에 남편은 모든 것을 털어 놓았습니다. 지갑을 목사님에게 드렸습니다. 경찰서에 갖다 주고 싶어도 시간적으로 늦어서 불안하였다는 것입니다. 마침 수사 과장이 그 교회 성도였기에 목사님이 그에게 전달하면서 사정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눈에는 보이나 가지지 말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보이지만 가지지 말아야 할 것으로 지구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덴에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
그러나 선악과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였습니다. 그래서 하와가 따먹고 아담도 같이 먹었습니다. 보기만 하여야 하지 따먹으면 안 되는 것이 선악과였고 선악과로 인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보인다고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 이후 모세에게도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하였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200명 가량을 인도하였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모세의 오직 목표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 목표 가나안을 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였습니다.
“가나안으로 가자.”
그러나 하나님께서 느보산에서 모세에게 가나안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보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현대판 선악과도 여기 저기 많이 있습니다. 모세가 위대한 영적 삶을 살아간 자취를 보면 그 흔적을 존경스럽게 보게 됩니다.
1. 좋은 곳이지만 살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아들을 낳으면 모조리 죽여야 했던 비극적인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부모를 잘 만나 죽지 않았습니다. 나일강 물위에 놓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나 미리암이 모세를 지켰습니다. 완전히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바로왕의 공주가 목욕을 하러 나와서 모세를 보았습니다. 궁중으로 데려다가 길렀습니다. 모세는 궁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궁중에서 40년 살았습니다. 애급의 모든 학문을 다 익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애급의 최고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40살에 그는 궁중에서 나왔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히 11:24)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이지만 거절하였습니다. 좋은 곳이지만 살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을 보기만 하고 건너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애급에서부터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좋은 곳이지만 살지 말고 떠나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나는 요즈음 헨리 나우웬을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 교수는 예일 대학교에서 신학적 심리학을 가르친 교수입니다. 1980년에는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남미 선교를 하였습니다. 1990년에 들어서면서 그는 카나다 라르쉬 공동체 데이브레이크에 들어가서 장애인들을 돌보면서 살았습니다.
헨리 나우웬 교수님은 그 좋은 교수 자리를 버리고 장애인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보람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 때 장애인 아담 아네트(Adam Arnett)를 무척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장애인이 1996년 2월 34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때 책을 한 권 저술하였습니다.
<아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탈고한 후 그 해 9월 할 일을 다 하였다는 듯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친구들이 나우웬에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지금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학에서 수많은 학생들에게 영감을 주면 큰 일을 할 수 있는 데 왜 이런 곳에 있는가?”
이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다. 더 체계적으로 일할 수 있다. 더 큰 섬김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과연 주님께 어떻게 살아 드려야 할 것인가 고민하였다.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원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였다.”
대학교수가 되는 길은 경쟁이 심한 길입니다. 그러나 대학 교수를 버리고 장애인을 도우러 가는 길은 경쟁자가 한 명도 없는 길이었습니다. 좋은 곳을 떠난 모세처럼 좋은 곳을 떠나 봉사로 살다가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가장 좋은 곳이지만 그 곳에서 살지 않고 버린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천국을 떠나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의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가를 알려주는 유머가 있습니다. 어느 부자가 평생 모은 금은 패물을 한 자루 짊어지고 천국으로 들어 가려고 하였습니다. 천국 문에서 힘들게 한 자루 메고 온 부자에게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부자가 대답하였습니다.
“금은 패물입니다.”
천국문에 있던 베드로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런 것들은 천국에서는 도로 포장 재료입니다.”
그런 천국을 떠나 이 땅에 오셔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는 데 머리 둘 곳이 없이 사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모세는 좋은 곳 궁중이지만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모세를 크게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 장로님들과 함께 월남 관광하였던 것이 늘 생각납니다. 너무나 은혜로웠고 유익하였고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월남 대통령 호치민 궁을 가보고 놀랐습니다. 평생 옷이 세벌이었습니다. 평상복 한 벌, 군대를 시찰할 때 입었던 군복 한 벌, 그리고 대통령으로서 예식을 행할 때 입었던 예복 한 벌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지방에 출장을 갈 때에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에게 신경쓰게 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형이 죽었습니다.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의 시간은 공적인 시간인 데 사적으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누릴 수 있으나 누리지 않은 분입니다. 대통령궁이 헐어도 고치지 못 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출장간 틈을 이용하여 수리하곤 하였습니다. 정말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나도 유명한 목사가 아니라 존경받는 목사가 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좋은 곳이지만 궁중에서 살지 않고 포기하였습니다.
2. 맛있는 것이지만 먹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맛있는 음식이지만 금한 것이 있습니다. 만나만 먹으며, 부추 마늘 파 수박은 먹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 배경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왔습니다. 물이 없었습니다. 농사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200만명입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 주셨습니다. 하루 하루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나만 먹기 지루하였습니다. 한 가지 음식을 40년을 먹기란 고역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부흥강사님을 모셨습니다.
“음식을 어떻게 대접할가요?” 그의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아무 것이나 좋습니다. 그러나 매끼 다른 것으로 주세요.”
3일 식사도 같은 음식이 싫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추 마늘 파 외 수박이 먹고 싶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먹으려고 하다 보면 오아시스에 머믈러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200만명이 먹게 농사를 지으려면 집단 농장이 됩니다. 엄청난 시설을 하여야 합니다. 그들은 떠나지 못 하고 머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 예수님을 보내어 온 세상을 구원시키시려고 하시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모세는 맛있는 것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맛을 찾아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기도 합니다. 산속이고 바닷가이든지 맛있는 집은 손님들이 바글바글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먹지 말아야 할 선악과였습니다. 모세는 먹고 싶은 음식을 거절하였습니다.
훈련받은 말이나 훈련받은 개는 주인이 먹으라고 하기 전에는 결코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훈련받은 개를 3일 굶깁니다. 그리고 그 앞에 맛있는 고기 덩어리를 던집니다. 그러면 개는 가만히 보고만 있습니다. 주인 눈치만 봅니다. 주인이 “먹어!”라는 명령을 기다립니다.
훈련받는 동물도 아무 것이나 먹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술 담배 그리고 마약을 금하여야 합니다. 호화스러운 음식도 절제하여야 합니다.
모세는 좋은 곳이지만 살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좋은 것이지만 먹지 않았습니다. 금욕할 줄 알았습니다.
3. 가고 싶은 곳이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모세의 평생 소원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느보산에서 가나안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저도 느보산에서 가나안을 내려다 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모세는 120세인데 눈의 기력이 쇠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입니다. 위에 단부터 밑에 브엘쉐바까지 240km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모세는 그 전체를 느보산에서 내려다 보았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가고 싶었던 가나안 땅을 통째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눈으로 보고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있습니다.
좋은 곳이지만 하나님이 금하시는 곳이 있습니다. 편한대로 살지 말고 필요한 대로 살아야 합니다. 가고 싶은 곳에 가지 말고 가야할 곳에 가야 합니다.
모세는 오직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기에 가나안을 보기만 하고 가지는 못하였습니다.
한국 사람으로서 김연아를 알지 못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계적으로도 김 연아는 인기절정입니다. 그런데 빙상에서 그가 쇼를 하는 시간은 겨우 4분 9초입니다. 빙판위에서 4분 9초 연기하려고 14년 동안 하루 5시간 이상 연습을 하였습니다. 한번 공중에서 돌면 세바퀴 도는 묘기를 합니다. 한 바퀴 도는 연습을 하는 데 엉덩방아를 평균 1,000번 찧어야 합니다. 그리고 연습비는 10억이 듭니다. 3바퀴니까 30억 가량 들었다는 것입니다. 김연아는 평생을 스케이트로 살았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 전문 분야에 10,000 시간 이상을 투자하였습니다. 오직 그것만 생각하였습니다. 먹을 것을 다 먹지 않았습니다. 가고 싶은 곳에 다 가지 않았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지 않았습니다. 절제하였습니다. 가고 싶은 곳이라고 다 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 1;1-3)
모세는 평생을 가나안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 가나안을 앞에 두고 보기만 하고 가지 못 하였습니다. 그 심정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번역하여 출판한 미드라쉬에 모세 이야기가 재미있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천사를 통해 하나님이 자기를 데려가시려는 계획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원을 그려놓고 그 원 밖으로 나가지 않고 515번 기도했습니다. 하늘에 모세의 기도소리가 상달되자 하늘에서는 비상에 걸렸습니다. 하나님 귀에 모세의 기도가 들리지 않도록 문을 잠그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그렇게 간절하게 그리고 그렇게 끈기있게 기도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천사들에게 모세를 데려오라고 했더니 천사들은 그렇게 기도하는 모세를 데려올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하나님은 모세와 타협을 하셨습니다.
“네 장례에 내가 꼭 참석할 터이니 너는 내게 오기를 두려워 말아라.”
모세는 하나님의 이 약속을 받고 기도를 포기하였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접었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교회 부흥회에 갔습니다.
손목이 없는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말하는 데 기가 막힌 이야기였습니다. 목사가 되기 전에 사업가였습니다. 잘 나가는 유능한 사업가였습니다. 가정도 사업도 모두가 원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노름을 좋아 하였습니다. 그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화투장이 손에 착착 붙어 다녔다고 합니다.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기 도박단에 걸렸습니다. 재산을 모두 잃었습니다. 사업터도 다 날렸습니다.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아내가 말려도 말려도 듣지 않다가 결국은 거지가 되었습니다. 아내는 견디다 못 해 두 자녀와 남편을 두고 가출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술을 정신없이 퍼마셨습니다.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도끼로 자기 한쪽 손목을 잘라 버렸습니다.
“이 손이 내 인생을 망쳤다. 다시는 노름을 하지 않으리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손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자 마음을 지켜야 했습니다. 인생이 비참하였습니다. 자살시도를 하였습니다. 이 때 전도를 받아 교회 다니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학교에 지원하였습니다. 목사가 되었습니다.
손목을 자를 정도의 결심도 마음을 잡지 못하였지만 성령의 능력은 온통 자기를 사로 잡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좋아 보이는 곳이 보여도 가지 말아야 합니다. 노름장이나 유흥장에는 아예 가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는 가나안을 평생 그리면서도 보면서도 가지 않았습니다. 금할 것을 엄격히 금하였습니다.
결국 모세는 느보산위에서 죽었습니다.
모세 죽음은 세 가지 신비를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신비 묘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기라성같은 사람의 묘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치룬 장례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신 34:5-6)
모세같이 훌륭한 사람의 묘를 오늘까지 모른다는 것은 신비중에 신비입니다. 만일 모세 묘가 있다면 성지 순례 코스가 될 것입니다. 유명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 묘도 성지순례중에 성지 순례지입니다.
“오늘까지”
이 말에 대한 해석이 분명합니다. 오늘까지 아는 모세묘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그 때도 몰랐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신비 120세의 신비
모세 당시 광야는 모든 면에서 살기 어려웠습니다. 환경이 열악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주 강건한 사람이 80살정도까지 살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당시 수명에 대하여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편 90편은 모세가 쓴 시편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6)
보통 70-80살 살때 모세는 120살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눈의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여 망원경으로 보는 것처럼 가나안 땅 240 km를 한 눈에 다 보았습니다.
세 번째 신비 시체의 신비
모세 시체에 대하여 성경은 언급하여 주고 있습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유 9)
<모세 승천기>라는 외경 이야기를 유다가 인용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모세가 죽었습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를 장례 지캐려고 할 때 마귀가 와서 시체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사망 권세는 자기의 권세이기에 시신은 마귀 자기들의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모세의 시체를 놓고 마귀와 천사장 미가엘이 싸웠습니다. 서로 차지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천사장이 모세 시체를 장례지냈습니다. 그래서 모세 장례는 하나님이 치루시게 되는 신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을 보고도 가지 못하였습니다. 가고 싶은 곳에 다 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나는 청장년 30여명을 이끌고 우리 선교지에 갔습니다. 3박 4일 일정이었습니다. 교회를 건축한 곳마다 다니면서 봉헌 예배를 드리는 빡빡한 일정이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반 나절은 골프 대회 시간을 넣었습니다. 그 곳은 아주 싼 가격으로 골프를 치기에 보통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골프장에 안 가겠습니다.”
“왜요?”
“골프의 장점은 재미있다입니다. 단점은 너무 재미있다입니다. 한번도 골프를 친 적이 없는 데 이 곳에서 골프 비용이 싸다고 골프를 치면 한국에 가서도 치고 싶을 것입니다. 아예 안 가겠습니다.”
그리고 혼자 호텔에 남아서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래서 94권 책이 출판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좋은 곳을 보고 살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좋은 음식을 알고도 먹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평생 가고 싶은 곳도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에서 모든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돈을 바라 보고 돈은 갖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행복을 바라보고 행복은 갖지 않고 불행을 택할 때도 있어야 합니다.
가나안은 바라보고 가나안으로 가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라
신 34:1-12 / 인명진 목사(갈릴리교회)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속도 많이 상하시고 고생도 많이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셔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40여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별의별 속을 다 썩으시고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얼마나 속을 썩으시고 고생을 하셨는가 하는 것은 출애굽기를 비롯해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실 때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것은 아니고 모세라는 지도자를 세우셔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모세는 대단한 사람이었고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신명기 34장 10절 이하에 모세가 죽은 후에 모세에 대한 평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을 때 하는 것은 절절하지 않습니다. 공정한 평가가 되지 못합니다. 적어도 그가 그 자리를 떠난 후에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야 그 사람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나올 수 있습니다. 오늘 11절 이하의 모세의 평가는 모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내려진 평가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리고 모세 이후에 그만한 지도자가 나오지 않았다. 모세는 하나님과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었다. 이적과 기사와 권능과 큰 위엄을 행하던 사람이었다. 이스라엘 역사에 아니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모세는 그 어떤 사람과도 견줄 수 없는 위대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모세에 대한 성경의 평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신명기 34장에 보면 이와 같이 위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거두어가시겠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죽게 되었다, 하나님이 모세를 데려가신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입니다. 평범한 한 인간이 죽는다는 것도 대단한 일인데 하물며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인 모세를 죽게 하신다는 것은 보통 심상한 일이 아닙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보통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특이한 사건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도대체 왜 그 시점에서 모세를 죽게 하셨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첫째 모세는 아직 젊은 나이였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때 모세의 나이가 120세로 요즘 기준으로 하면 많이 산 나이이긴 하지만 당시의 기준으로는 죽을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75세를, 이삭은 180세를 살았고 야곱도 147세를 살았습니다. 당시의 기준으로는 120세는 젊은 나이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한창 살아야 할 나이에 왜 모세를 죽게 하신 것일까요? 그렇다고 모세에게 건강상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을 보면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은 모세를 죽게 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모세가 해야 할 일을 다 마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서 죽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상황이 그렇습니다. 모세가 죽은 때는 출애굽이 진행되던 때였습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40여년의 광야생활을 했지만 그들의 최종목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인데 아직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모세가 해야 할 일이 잔뜩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일은 지금까지 모세가 한 일보다 훨씬 더 큰일이었습니다. 모세의 지도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였습니다. 모세가 해야 할 일을 다 끝낸 상황에서 모세를 죽게 했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모세가 꼭 필요한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죽게 하신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세상에서도 전쟁 중에 있는 장수를 죽이는 것은 물론이고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한창 중요한 시기에 모세를 죽이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한 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이라는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실 때 모세로는 부족하다,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이다, 더 유능한 지도자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셨는데 그 사람을 찾았다면 모세를 죽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은 모세 대신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어디를 보거나 모세와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모세보다 모자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설사 이 모든 이유가 아니라도 하나님이 모세를 죽게 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이 너무하신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모세가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던 모세를 안 하겠다고 그렇게 발버둥 치던 모세를 하나님께서 억지로 부르셨고 바로에게 보내 큰 싸움을 하게 하셨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기는 하였지만 그 후에도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애굽을 탈출하자마자 홍해바다에 맞닥뜨렸습니다.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옵니다. 이때 철없는 백성들은 모세에게 묘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곳까지 끌고와서 죽이려고 하는가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그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없이 끝없이 모세에게 반항하고 모세에게 대들고 숱하게 속을 썩였습니다. 모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철없는 이스라엘 백성들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 금송아지가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낸 신이라고 절을 했습니다. 물이 없다고 배가 고프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먹여 주시니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고 심지어는 부추가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철없는 백성들뿐만 아니라 그의 형 아론까지 여동생 미리암까지 모세의 속을 썩였습니다. 40년 동안 모세는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 계명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주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고 자신들의 인생은 인생이고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모세는 참으로 많은 속을 썩었고 어찌할 수 없는 곤경 속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일편단심 한 가지 목표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소망만을 바라보고 40여년을 그 모진 시련과 고통을 다 겪었습니다. 그 결과 드디어 요단강만 건너면 꿈에도 그리던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한 번이라도 밟아보게 해주셔야 합니다. 인정상으로라도 그래야 합니다. 모세가 얼마나 그리워하던 땅이었는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난과 고생을 했는데, 그동안 얼마나 들어가고 싶어 했던 땅인데 모세에게 한 번만이라도 들어가게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해도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그동안 공을 생각해서 그동안 고생한 것을 생각해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이 이렇게 인정사정 없이 모세의 생명을 빼앗으시는데 당사자인 모세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반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반항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원망하지는 않더라도 한번쯤 사정을 하거나 떼를 써보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제발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게 해주십시오. 일 년 만이라도 단 몇 달만이라도 가나안 땅을 밟아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모세가 그런 사정을 한 일체의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도 바울도 그의 몸의 가시 때문에 세 번이나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한 번도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죽어야겠다고 하시니 모세는 알겠다고 한 것입니다.
왜일까요? 무엇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역사와 신앙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의 열쇠를 찾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을 거슬러 신명기 31장 20절 말씀을 보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날에 대해서 예측하신 것입니다. 틀림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먹고 배부르고 살찌게 되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하는 일이 일어날 것을 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그냥 내버려 두면 멸망하고 말텐데 무슨 방도를 찾아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걱정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날에 대해서 진지하게 의논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수 있을까 의논하는 중에 모세가 여기서 죽어야 한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말고 여기서 죽어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을 차려서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모세가 “알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기꺼이 여기에서 죽겠습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런 결정을 내린 하나님도 대단한 분이지만 이와 같은 하나님의 결정에 “예”라고 대답한 모세도 위대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모세가 죽어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을 차릴 것으로 생각하신 것일까요? 모세가 죽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애굽에서 나와서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 지워지지 않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바로와 싸워서 이기고 애굽을 탈출했던 것, 도도히 흐르는 홍해를 육지처럼 건널 수 있었던 것, 바위에서 물이 나오고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온 이 모든 것이 다 모세가 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세가 있어서 가능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것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단지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셨던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모세만 보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모든 것을 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물이 안 나와도 먹을 것이 없어도 어려운 일 당할 때마다 모세가 다 해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모세만 바라보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가까이 하지 않고 모세만 가깝게 볼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가 없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의 모든 일도 하나님이 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없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구나 이 모든 것이 모세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있는 한은 모세를 바라보고 모세가 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가 한 것으로 생각하니 여기서 죽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모세는 “네.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모세는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가르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신명기를 통해서 성경의 역사를 통해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가르침을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제든 모세가 말씀을 가르쳐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제든 또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소중하고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가 죽어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네가 가르쳐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 말씀인지 깨닫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때 잘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 하고 후회할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 곁에 남아서 아무리 좋은 설교를 하더라도 귀중한 것을 모르고 무심할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산 사람의 말보다 죽은 사람의 말이 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한 말을 제자들이 다 소홀히 여겼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들었더라도 제자들의 마지막 모습이 그토록 초라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40년이나 지난 후에 예수님이 가르쳐준 말씀이 생각나기 시작했습니다. 살아있었을 때는 아무런 감동도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이 지난 뒤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록한 것이 사복음서입니다.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좋아서 그 자리에서 받아적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은 지 40년 만에 기록한 것이 지금 읽는 성경입니다.
제가 정년보다 조금 일찍 은퇴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수요예배였습니다. 수요예배에 40-50명 나오면 제가 집에 돌아가서 울었습니다. 수요일에 공부했던 내용이 ‘한국교회를 새롭게’란 제목으로 출판되어 수천 수만 권의 책이 나갔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적으로 읽히고 있습니다. 또 ‘죽음 그 마지막 성장과 축복’도 책으로 만들어져 수만 권이 나갔습니다. 수요일에 가르친 성경이 신통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책으로 만들어보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나와야 할 사람들은 나오지 않는 것이 저를 얼마나 섭섭하게 했는지 모릅니다.
재미있는 것은 20년 전에 제가 첫 번째 낸 설교집이 ‘갈릴리에서 만나자’라는 설교집인데 요새 그 설교집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제가 한 설교집을 100부씩 떡판으로 만드는데 지금은 사가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저는 확신하기를 제가 죽은 후에 이 설교집을 많은 사람들이 찾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제 그만 이야기해도 된다. 듣지 않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수요예배 때문에 조기은퇴를 결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가르친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생각하고 다시 소중하게 여기게 하기 위해서 모세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여길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때서야 모세가 한 이야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모세가 죽은 후 모세율법을 금과옥조처럼 수천 년을 읽고 또 읽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는 죽을 나이가 아닌 120세 젊은 나이에 조기은퇴한 것입니다. 저는 이때 모세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모세가 스스로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거가 모세의 무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없어진 후에야 이스라엘 백성은 홀연히 정신이 나서 이 모든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후회하면 모세를 위하여 30일을 울었다고 했습니다. 30일을 애곡하며 울었지만 모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모압평야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음소리만 메아리쳤습니다. 그 이스라엘의 울음소리가 지금도 우리 귀에 생생히 들려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모세를 위해 애곡하며 울면 어떻겠습니까? 모세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말씀을 다시 마음에 새기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모세의 간절한 사랑을 다시 한번 새기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독교가 인류 역사에 기여한 것들
신명기 34:1-6 / 김영준 목사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가서 숨을 거둘 때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갈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다고 했습니다. 과거 40년 동안 걸어 온 광야를 되돌아보지 않고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 차지할 땅을 바라보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먼 광야 길을 걸어서 요단강 어귀까지 올 수 있었던 것만 해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 길을 거치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목적지는 광야길이 아니고 가나안 땅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걸어온 땅을 되돌아보지 않고 장차 들어갈 땅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난 수천 년 동안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여러 가지 기여한 바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과거를 되돌아보는 백성이 아니고 천성을 향해 가는 백성들이기 때문에 천성을 바라봅니다. 그 동안 우리가 남긴 업적이 있다면 그것은 사실 부차적인 것이고 우리는 천성을 향해 앞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 경험을 자세하게 서술했습니다. 그들이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실수를 했고 하나님이 어떤 역사를 행하셨는지 가감 없이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잘 한 것만 있는 게 아니고 잘못한 것도 많고 실수한 것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숨기지 않고 다 기록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도중에 주저앉지 않거나 기권하지 않고 요단강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기독교가 인류 역사에 무엇을 기여했는가를 논할 때 당연히 누가 반발하느냐? 비그리스도인들이 반발할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감수해야 됩니다. 그들은 우리의 신앙을 공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기독교의 공헌을 폄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기독교가 인류 역사에 기여한 바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비신자들과 대화할 때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변론할 수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당연히 기독교인이 아니에요. 그러나 수년전 뉴스위크 기자가 그를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기독교의 기여한 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달라이 라마는 다음과 같은 대답했습니다. ‘첫째로 교육의 발전에 공헌했다. 둘째로 자선사업과 인도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셋째로 인간을 치유하는 데에 기여했다. 매우 후한 발언을 한 것인데, 달라이 라마가 기독교에 대하여 편견을 갖고 있었다면 이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도 본인이 교회를 다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세상에 기여한 바가 별로 없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두 마음을 품은 것이고, 누워서 침 뱉기를 하는 것이고, 마음에 편견을 갖고 있는 때문입니다. 아마 본인 개인은 신앙인으로 세상에 기여한 바가 없을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 그동안 신실하게 살려고 애를 쓰고, 그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직접 만나보지도 못했으면서 피상적으로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식한 것이고 불공평한 것이고, 완악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할 때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고 교회를 다녀라.’고 하는데, 그건 일반적인 상식을 말하는 것이지 실제로 본보기가 될 만한 기독교인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안목이 좁고, 우리의 지식이 적고, 우리가 충분히 세상을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변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어느 시골 성당의 사제였지요. ‘이 사람이 신부님의 은촛대를 훔쳤습니까?’라는 경찰의 질문에 ‘형제여, 내가 다른 은촛대도 드렸는데 왜 그것은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까?’라고 장발장을 두둔해주는 것을 경험하고 강퍅했던 장발장이 변화하는 계기가 되지 않습니까. 물론 이것은 픽션이지만 실제로 이런 인물이 세상에 있느냐 하는 질문은 핵심을 비켜가는 것입니다. 빅터 휴고가 기독교 사상에 감화를 받고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미제라블은 기독교 정신을 반영한 것이고 기독교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영향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Ben Hur도 인기 영화였던 것뿐만이 아니고 위대한 문학작품이었는데, 그 작품이 말하고자 한 것도 기독교 정신입니다. 용서와 구원이라는 주제를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픽션일 뿐인데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냐 라고 묻는다면 그것 역시 핵심을 비켜가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정신을 제시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기독교가 아니라면 인류는 이처럼 원수를 용서한다든가, 절망에서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인류 역사에 기여한 바가 무엇이냐? 몇 가지 기독교만이 할 수 있었던 그것을 말씀드리면
첫째로 인간의 가치를 긍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를 긍정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셨다는 사실에서 인간은 죄인일지라도 구원할만한 가치가 있고, 찾을만한 가치가 있고, 살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와 어떻게 다르냐? 인본주의는 사람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가치를 부여하셨다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영향으로 천한 자 · 병든 자 · 가난한 자 · 여성 · 어린이 · 이방인 · 죄인, 모든 사람의 본질적인 가치를 긍정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군국주의라든가 전체주의는 기독교 사상과 맞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국군주의나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전체를 위하여 개인의 생명을 중요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군국주의에서는 천황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꽃다운 젊은이들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고 전체를 위해서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그들은 믿었습니다. 공산주의도 그랬지요. 혁명을 위해서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다,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 이것이 공산주의에요.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게 믿지 않고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목자가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하여 양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찾으러 간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우리가 우리 십자가를 지고 우리 자신을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지만 한 분만이 세상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희생 당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았으니 이들을 가게 하라’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예수님 한분이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평강을 얻고 구원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고 섬기려 오셨습니다. 여기에 기독교가 전파된 곳마다 인간을 귀중하게 여기는 사상이 발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여성과 어린이와 병자와 가난한 자와 죄인과 이방인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는 원동력을 제공했습니다. 빈민과 병자의 인권을 보호하게 되고 복지 · 박애 · 갱생 · 의료 이 모든 것이 발달할 수 있는 동기가 된 것입니다.
영화 <트래픽>을 보면 마약의 문제를 의논하기 위하여 미국의 대표와 멕시코의 대표가 서로 만나서 의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미국으로 들어가는 마약의 대부분이 멕시코를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이에요. 미국 대표가 멕시코 대표에게 물어보기를 ‘멕시코에서는 마약 중독자들을 위한 어떤 대책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멕시코 대표가 대답하기를 ‘그런 대책은 없습니다. 마약 중독자가 죽으면 그만큼 문제가 적어지니까.’ 이 말을 듣고 미국 대표가 뭐라고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합니다. 비록 마약 중독자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책임이 있지만 그들을 버릴 수 없기에 건지기를 도모해야 되지 않느냐, 이것은 지극히 기독교적인 사상이에요.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물건을 버립니다. 쓰지 않는 물건을 버립니다. 그걸 쓰레기라고 합니다. 하도 많은 물건을 버리기 때문에 종량제를 실시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쓰지 않는 물건뿐만 아니라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마저도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이라도 버리지 않으시고, 병자라고 버리지 않으시고, 몸을 버린 여자라고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사람을 버리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사상이 발달한 국가일수록 한 사람, 한 사람을 귀중히 여기고 건지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상이에요.
수년 전 TV에서 샤이암 쌍둥이 분리수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샤이암 쌍둥이란 몸이 붙어서 엄마 뱃속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이 아이가 어느 나라 출신이었는지는 분명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동남아시아 어느 국가였던 것 같습니다. 이 샤이암 쌍둥이의 몸통이 붙어 있어요. 그런데 서구의 의료진이 이 쌍둥이를 데리고 가서 분리수술을 해 주는데 허리와 장이 붙어 있기 때문에 분리를 할 경우 항문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아이에게는 인조 항문을 만들어주어야 되는 아주 어렵고 시간이 많이 드는 수술을 수십 명의 의료진이 달라붙어서 이 수술을 실시해서 성공을 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샤이암 쌍둥이가 태어난 본국에서는 왜 이런 수술을 시도하지 않고 서구의 의료진이 그를 데려다가 이 어려운 수술을 해 주었을까? 본국은 후진국이고 서구의 의료진은 선진국이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하는 것은 흡족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쌍둥이가 태어난 본국 사람들은 이것이 그 아이들의 숙명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숙명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서구 의료진은 이게 숙명이 아니고 고칠 수 있다, 고쳐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기독교적인 사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병자들을 보실 때 한 번도 이것은 너의 운명이다, 이것은 너의 숙명이라고 지나치지 않고 일일이 다 고쳐주신 거예요. 예수님이 병자뿐만이 아니고 인간에게 얼마만큼의 가치를 부여하셨는가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인류 역사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기독교는 존재의 가치를 긍정했습니다. 인간의 존재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의 존재가치를 긍정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하니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느니라’ 여기에도 ‘버릴 것이 없느니라’는 말이에요. 신앙의 목적은 무엇을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없애기 위한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욕망이든, 번민이든, 이것을 부인하고 지우기 위한 것이 신앙의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이 ‘나의 온 것은 너희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니라’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은 ‘포도주가 없으면 물을 마셔라’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주시고 더 나은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이 어두운 상태에서 ‘빛이 있으라’고 하셨더니 빛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 I am that I am’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어주셨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이든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든 모든 존재가 귀중하고 그것을 우리가 긍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창조적이고,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뿌리를 내린 나라에서는 필연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모든 면에 일컬어 발전이 가능한 것입니다. 과학·기술·경제·의학·탐구 이 모든 것에 필연적으로 발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아마 세상사람 중에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마는 동네 어느 집에 잔치가 열리면 동네 사람들이 다 잔치 떡을 얻어먹는 것처럼, 기독교가 세상에 끼친 혜택을 비그리스도인들도 얻어먹습니다. 다만 그 혜택이 어디서 왔는지 본인이 알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천국은 반죽에 누룩을 넣는 것과 같아서 누룩을 넣으면 반죽 전체를 부풀린다고 하셨고 천국은 겨자와 같아서 겨자씨는 지극히 작은 것이로되 땅에 심으면 큰 나무가 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사상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역할과 또한 자신의 믿음에 대한 자존감을 되찾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인류에 주신 사랑은 한이 없습니다. 한이 없는 사랑과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도 경험했고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 전해야 될 사명이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것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느보산의 감격
신명기 34:1-8 / 박용덕 목사(남가주빛내리교회)
예배는 살아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살아 있는 예배란 감격이 있는 예배를 말합니다. 누구든지 감격이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평탄하지는 않았지만 행복한 인생을 산 인물이었습니다. 돈이 있어 행복함이 아니라 권세가 있어 행복함이 아니라 사명자로 살았기에 행복해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 역시 생각해 보면 제 생애가 그렇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고,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 먹고 잘 살아서가 아니라 아무짝에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임에도 하나님께서 사명자로 불러 주셔서 오늘날 까지 사명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알 것은 사명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혹 세상적으로는 실패의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을지라도 거기서도 감사하고 감격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모세는 평생의 숙원이었던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보 산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모세는 무엇이 그리 감격스러웠을까요?
1.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느보 산에서나마 볼 수 있었기에 감격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40여 년 전에 모세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너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약속 하신 적이 있습니다.
출 6:8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은 이제 그 약속을 잊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줄 가나안 땅을 모세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는 대체적으로 온전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20장에 나오는 므리바 물 사건에서 큰 실수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백성들이 하도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불신하며 “물이 없어 죽을 지경이다. 우리를 죽이려고 이곳으로 이끌고 왔느냐?”며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 때 모세는 속상한 마음에 하나님께서는 “바위에게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고 하셨지만,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물을 내랴”하면서 지팡이를 바위로 두 번 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때 저들에게 물을 주시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마치 자기의 능력으로 물을 낼 수 있는 듯이 말한 모세에게 “너는 이제 이 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선포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선포하심을 따라 모세는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 산에서 가나안 땅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을 향해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됨을 보고 감사, 감격하였던 것입니다.
신 34: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오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감사하고 행복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신실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진정 영적인 지도자답게 자기는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곳에서 누릴 은혜 생각하며 감사할 뿐만 아니라, 그래도 나름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을 보여 주고 떠날 수 있음에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 역시 영적인 지도자나 믿는 자로 살아간다면, 성도들이나 자녀들에게 모세처럼 무언가를 보여 줄 것이 있어야 합니다. 과연 오늘 우리들이 자녀들에게 보여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매일 싸우고, 다투고, 시기하고, 비방하는 것만 보여 주지 말고, 올바른 교회생활, 믿음생활, 기도생활, 예배생활, 선교하고 헌신하는 일, 충성심 등을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2. 모세는 자기의 사명을 다 이루었다는 사실 때문에 감격하였다.
느보산에 오른 모세는 또한 무엇보다는 한 평생 사명자로 살다가 아름다운 퇴장을 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감격하였습니다. 사실 모세는 느보산까지가 자기 사명의 종착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전에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그 사실을 통보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 32:49):"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모세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느보 산에 오르게 하셨을 때, 가나안 땅에 비록 들어갈 수 없었음에도 실망이나 낙심이나 원망이 아니라 아름다운 퇴장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모세는 원망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동안 부족한 자기를 써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그 사명 잘 감당하다가 하나님께 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도 속상해 하기 보다는 기쁨으로 여호수아를 불러 안수하고 이스라엘 백성들 곁을 떠나기 위해 마음의 정리를 하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사실 우리도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부르실 때 구질구질하지 말아야 합니다. 좀 더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매 달리기보다 기쁨으로 달려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웃으며 눈감는 연습, 믿음 안에서 아름답게 퇴장할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저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기도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성도들에게 어떤 문제라도 생기면 모두가 기도가 부족한 저의 책임으로 느껴지면서 회개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제 모습을 떠 올리며 모세의 목회를 생각해 봅니다. 모세는 광야 40년 동안 200만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야 하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영적으로 미숙하여 원망과 불평도 많고 심지어는 모세에게 돌을 던지려는 사람까지 있었으니 그가 얼마나 많이 기도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모세를 보면 그는 기도꾼 이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지금도 200만 인구를 이끌고 갔던 모세를 생각하면서 그가 흘렸을 기도의 눈물과 그의 무릎이 다 닳아 낙타 무릎이 되었을 장면을 떠 올려 봅니다.
바라기는 정말 우리들 역시 사명을 감당하되, 더욱 엎드려 기도로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감격할 수 있기 되기를 소망합니다.
특히 모세는 건강한 가운데 사명을 마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고 감격하였습니다.
(신34:7):"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명을 감당하며 부지런히 사는 자들에게 건강의 복을 주십니다. 병들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사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뛰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은 대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적 사명이고, 둘째는 신앙적 사명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도외시 하는 삶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세상 사람들 속에 들어가 그들 가운데서 거룩한 모습을 보임으로 세상을 바꾸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신앙적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분은 가족 구원의 사명이 있을 수 있고, 어떤 분은 교회 부흥이나 건축의 사명을 가진 분도 있으며, 또한 어떤 분들은 100명을 전도해야만 하는 사명, 선교에 헌신 하는 사명, 교회에서 신앙 교육에 헌신하는 사명, 새벽 기도의 사명, 중보기도의 사명, 사업을 통한 하나님 사업의 사명 등 다양한 사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3. 모세는 가나안 땅보다 더 좋은 하늘나라를 믿음으로 보았기에 감격하였다.
우리는 흔히 가나안 땅을 천국의 그림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림자보다는 실체가 더 좋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그토록 느보산에서 감사하고 감격할 수 있었던 것도, 예전의 믿음의 선조들이 그러하였듯이 그림자 천국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됨을 확신하며 감사하고 감격하였습니다.
(히11:16):"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 하셨느니라"
사실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보이는 것을 쫓는 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쫓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당장 손에 쥔 것이 없을지라도, 이 땅에서 많은 것을 소유하지 못했을지라도 감사하고 감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감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욕을 먹고 얻어터지고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하늘 우편에 서신 인자를 보았기에 웃으며 눈을 감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데려 가고자 하실 때에 그 역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참 소망이 있는 것을 알았기에, 하나님이 부르실 때 얼마나 감격이 넘쳤으면 오히려 백성들을 축복하며 마지막을 장식했겠습니까? 정말 모세는 인생을 멋지게 산 인물이었습니다.
(신33:1):"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 "
흔히 부자가 되려면 흔히 세 가지가 갖추어 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세 가지를 살펴보면 “1)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라. 2)이웃을 축복해주라. 3) 부지런 하라.”는 것입니다.
영적 부자도 이 3단계 필요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1)성령 충만한 자로 살겠다. 2)많이 축복해 주라 3)부지런 하라” 등의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빵 가게 주인이 교회에 와서 큰 소리로 “빵 가게가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성도가 “하나님 저기 저 빵장사가 빵이나 좀 더 크게 만들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베풀 줄 모르는 자에게는 은혜도 축복도 기적도 멀 수밖에 없음을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모세는 느보 산까지 올라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비록 들어갈 수 없는 처지에 있었지만 진실된 마음으로 감사하고 감격해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고 감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깨달아 그 사랑에 감격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복 된 삶을 살게 하시려고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감사와 감격을 아는 자들에게 이 은혜를 주십니다. 바라기는 감사와 감격을 아는 자가 되어 항상 하나님이 존귀하게 쓰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에게 주신 비전에 헌신하는 중에 사명자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까지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느보 산에서 죽은 모세
신 34:1-12 / 김동호 목사
성경에 보면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 산에 올라가 가나안을 바라보고 죽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고 느보 산에서 죽게 하시는 하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 참으로 섭섭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불공평하시고 매정하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처신하신다면 누가 하나님을 믿고 평생을 헌신하며 살 것인가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모세는 일등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할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벗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에보면 모세가 므리바에서 반석을 두 번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지 아니하였기 때문(신 32: 51)이라고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것이 이해 되어지지 않았습니다. 분명 그것이 모세의 잘못이요 실수인 것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와 같은 실수와 잘못은 평생을 하나님께 헌신한 모세의 공적과 비교할 수 없고 므리바에서 실수한 그것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은 지나치신 처사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모세는 아무런 불평 없이 느보산으로 올라갑니다. 여호수아를 안수하고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소개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고 가나안을 한번 바라보고 죽습니다.
참으로 많은 생각과 기도 후에 비로소 저는 그와 같은 모세의 행동이 참으로 훌륭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까지 인도한 모세의 삶은 참으로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모세의 삶 모두를 다 합한 것 보다 묵묵히 느보 산에서 죽는 모세의 행동은 몇 배나 더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였다고 하여도 모세가 느보 산에서 죽지 아니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그는 절대로 가나안에서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워낙 큰 거목이었기 때문에 그 그늘이 너무 커서 누구도 그 뒤를 이어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세의 그늘을 없이하시기 위하여 모세를 느보 산에서 죽게 하신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스스로 자신의 그늘을 없이하였고 그 때문에 여호수아가 능히 모세의 뒤를 이어 훌륭한 백성의 지도자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나바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자기 밭은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던 사람으로서 교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어 교인들을 권면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권위자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으며 스데반이 순교할 때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회심하였다고 하여도 그와 같은 전과를 가지고 있었던 바울은 교회에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나바의 보증과 후원이 없었다면 바울은 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것은 둘째치고 자리도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선교사 된 것은 참으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바울은 바나바를 돕는 보조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바나바의 보조자가 된 것만도 사실은 대단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바울과 바나바의 이름을 쓸 때 언제나 바울보다 바나바의 이름을 먼저 쓰곤 하였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의 사역을 돕는자로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부터 갑자기 그 이름이 바뀝니다. 다시 말해서 바나바와 바울에서 바울과 바나바로 이름의 순서가 바뀝니다.
이름의 순서가 바뀌었다는 것은 바울의 역할이 바나바의 역할보다 앞서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더 두드러지게 되고 바울이 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바나바의 보조자가 아니라 바나바가 바울의 보조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바울을 바나바가 함께 계속하여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후에 마가 때문에 의견이 갈려 결국은 헤어지지만 분명한 것은 바울의 역할이 자신의 역할보다 더 중요해 졌기 때문에 그것을 시기하여 헤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의 보조자 역할을 잘 감당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바나바에게 있어서 중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복음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파되느냐 하는 것이었지 누가 더 높으냐 낮으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보다 바울을 더 좋아하고 바울의 역할이 자신의 역할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인정하고 바울과 함께 동행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바나바가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바나바는 신약의 모세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죽임으로 후배가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줄줄 알았던 참으로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모세와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와 같이 큰 일을 감당하는 사역자들은 세계 어느 교회보다도 많은 것이 우리 한국 교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 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부흥과 성장을 가져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출애굽 한 것 만큼이나 크고 기적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고 우리 한국 교회의 출애굽 역사에도 모세만큼이나 큰 일을 감당했던 훌륭한 사역자들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는 그 모세와 같은 사역자들이 느보 산에서 죽지 못하고 끝까지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모세들이 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한국 교회는 여호수아가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고 결국 가나안에 들어간 모세와 함께 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무엇보다도 자기를 부인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만 돌리는 훈련을 하여야만 합니다. 자기 혼자만 독주하는 것이 아니라 동역자를 세우고 후계자를 키우는 것을 연습하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조용히 느보 산에서 은퇴를 하고 기쁜 마음으로 여호수아를 축복하고 교회와 교인들 앞에서 세울 수 있는 지도자가 되기를 힘써야만 합니다.
정말 훌륭한 지도자란 자기 자신을 키우고 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훌륭한 지도자는 자기 자신을 키우고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후계자와 백성을 키우고 세우는 사람입니다. 정말 훌륭한 지도자는 성공하였을 때 자기의 왕국을 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대개 무너집니다.
저는 정치를 잘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두 분이 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였다고 생각하고 정치를 잘하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두 분 다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후계자를 잘 키우고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자기가 없으면 나라가 되지 않을 그런 나라를 만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그 두 분은 느보 산에 올라가지 못하고 끝까지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결과적으로 자신과 나라가 다 불행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가 되지만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들 대부분이 이와 같은 실수를 범했고 지금도 범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는 너무 스타가 많습니다. 물러서야 하고 은퇴하여야 할 시점에서도 물러설 수 없고 은퇴할 수 없는 아니 물러서지 않고 은퇴하지 않는 스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스스로 느보 산에서 죽지 못하여 자신을 교회의 유익으로 삼지 못하고 교회를 자신의 유익으로 삼게 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개인의 교회로 삼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생의 수고와 헌신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훗날 하나님 앞에 설 때 '내가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나님께 버림받을지도 모르는 불쌍하고 위태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개인적으로 한경직 목사님이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한경직 목사님이 목회적으로 완전한 분은 아니셨습니다. 목회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전혀 없는 그런 목회를 하신 분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정치와 사회에 대해서 선지자적인 감각이 좀 부족한 분이 아니었는가 생각됩니다. 독재자 전두환 대통령을 위한 기도회에서 그를 축복하는 듯한 기도를 하신 것은 참으로 후회스러운 일 중에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참으로 훌륭한 교회의 지도자이였습니다. 그분만큼 한국의 교회를 위하여 큰 일을 감당하신 분도 많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 한국 교회에 있어서 모세와 같은 분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경직 목사님을 생각할 때 정말 훌륭하시고 위대하시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정점에서의 은퇴입니다. 좋은 후계자를 세우시고 겸손하게 물러서실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훌륭하심은 당신이 목회 하실 때보다 후임이 목회 하실 때 교회가 더 성장하고 더 부흥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사님이 영락교회의 원로목사도 하시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만 당시로서는 그렇게 하신 것만으로도 최선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 10년 가까이 목사님을 가까이서 대할 수 있는 기회가 저에게는 있었습니다. 저는 한 목사님이 가나안에 들어가신 목사님이 아니라 느보 산에 올라가신 한국의 몇 안 되시는 훌륭한 목사님 중의 한 분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저를 키워주시고 저의 영적인 스승이 되시는 임택진 목사님도 존경을 합니다. 그 분도 은퇴가 정확하신 분이었습니다. 스스로 끝까지 가나안에 들어가시려고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식대로 느보 산에서 자신의 인생을 끝내시려고 노력하시는 분이십니다. 아직 살아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임 목사님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시게 되는 날 그 분에 대하여 느보 산에서 죽은 모세와 같으신 분이었다고 이야기 할 작정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일할 때가 교회와 세상의 정점이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마음의 한 구석에는 제가 10년 동안 섬겼던 동안교회가 제가 시무 하던 때가 교회의 정점이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마음이 있습니다. 제 후임자가 저보다 목회를 더 잘하여 교회가 계속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이 왠지 좀 마음에 좀 걸립니다. 그게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 같은 어리석은 자신과 싸우고 있습니다. 정말 훌륭한 지도자는 자신을 정점으로 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시무 하였을 때가 교회의 정점이었던 사람은 절대로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훌륭한 지도자는 자신을 정점으로 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섬기던 교회를 계속 정점으로 이끌어 나가는 발판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여호수아와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후계자로 세우는 사람입니다. 그와 같은 일을 위하여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부인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대신에 느보 산에 올라갈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저를 우리 한국 교회의 모세같은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평생을 기도하신 권사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교회 중등부때 저를 가르쳐 주신 분이신데 작년에 하나님 나라에 가셨습니다. 제가 목사가 될 것을 기도 중에 보신 분으로 저에게 신학을 하라고 권면하셨던 분이셨으며 제가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된 것을 누구보다도 기뻐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평생동안 저를 위하여 기도하신 분이십니다. 그 권사님은 제가 한국 교회의 모세 같은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모세 같은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와 같은 능력 있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정말 제가 욕심을 내고 싶은 부분은 모세의 능력이 아니라 모세의 자기 부인입니다. 느보 산에서 후계자 여호수아를 안수하고 백성들을 축복하고 죽을 수 있는 그 훌륭한 겸손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한국교회에 있는 원로와 공로제도를 없이하고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절대로 원로목사와 공로목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목사라는 직함 앞에 공로가 붙는다는 것은 비신학적이고 비성경적입니다. 그리고 원로목사는 목사를 느보 산에서 죽지 못하고 가나안에까지 들어가게 하는 좋지 못한 제도임으로 찬성하지 않습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신경을 쓰려면 은퇴 목사의 안정적인 노후생활과 경제생활이나 신경써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 여러분 모세와 같이 충성스러운 일꾼 되시기를 힘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모세와 같은 사람들이 되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발 느보 산에서 죽어 주십시오.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물러 설 줄 아는 사람, 죽어 줄 줄 아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욕심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젊은 집사님 한 분이 '자기가 죽으면 하나님 손해'라고 저에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장난끼가 발동한 제가 그 말을 받아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거 걱정되어서 아직도 못 죽었냐? 걱정말고 죽어라. 내가 이래봬도 장례 전문이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자기가 없으면 하나님 손해 보시고 높은 뜻 숭의교회가 잘못될까봐 걱정되시는 분 안 계십니까? 제가 이번 구정 때 별로 할 일이 없으니 잘 파묻어 드릴 터이니 염려말고 죽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오늘 모세와 같이 자기 자신을 느보 산에 장사 지내십시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십시다. 혹 앞으로 우리 높은 뜻 교회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면 느보 산에서 죽지 못한 유능한 모세가 그 어느 교회보다도 많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문제는 무능함에 잇는 것이 아니라 유능함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높은 뜻 숭의교회를 정말 좋은 교회로 후손들에게 물려주려면 죽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물러서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자신을 십자가 앞에 못 박으십시다.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십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 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아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큰 사람입니다. 모세는 느보 산에서 죽음으로 그 무덤도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10절에서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같이 느보 산에서 죽을 수 있음으로 모세와 같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큰 사람이라는 인정과 칭찬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모세의 최후
신 34:1-12 / 박덕기 목사
한 해의 시작이 엊그제 같은 데 벌써 또 결산의 달 12월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서머셋 모옴이 쓴 '총결산'이라는 수상록은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고 자신의 생애를 정리해 두기 위해서 썼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생의 매듭을 지어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매듭을 짓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리를 뜻하고, 따라서 반드시 반성과 평가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정리와 반성은 보다 나은 장래를 계획하고,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자기 향상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제 때에 매듭을 짓지 않고 닥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올바른 인생의 계획도 방향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매듭을 짓는 것은 과거의 정리보다 장래를 계획하는 데 더욱 큰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매듭을 짓는 데 있어서 시간이라는 단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달, 일년 혹은 공자처럼 십년을 단위로 정리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단위는 1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2001년이라고 하는 한 해의 매듭을 어떻게 짓고 다가오는 새 해를 맞이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도스토엡스키의 백치에 나오는 어떤 사형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사형수가 어떤 일로 사형을 언도받아 형장에 나가 총살되기 직전 특사가 내려 죽지 않았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살아난 사형수는 형장에서 가졌던 5분 동안 그가 마지막으로 하고자 생각하였던 3 가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는, 동료들과의 작별을 하는 데 2분을 할당하고, 둘째는 이 세상을 떠남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데 2분간을 할당하고, 셋째로는, 마지막으로 주위를 살펴보는 데 1분을 할당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한 해의 마지막 달에 와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는 금년의 시간을 어떤 일에 할당하여야 하겠습니까? 망년회 준비에 할당하여야 하겠습니까? 연말 연시의 들뜬 기분에 휩쓸려 보내 버릴 것입니까?
적어도 우리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 해를 결코 그렇게 마무리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일생을 회고해 보면서, 하나님께로 받은 지난날의 은혜를 감사하고, 또 다음 해에도 새롭게 내려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대망해야 할 것입니다.
1-3절에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남방과 종려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 까지 보이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장면은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를 비스가산 꼭대기에 오르게 하신 다음,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게 될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를 바라보게 하시는 광경입니다. 가나안 땅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약속하셨던 땅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대망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430년 동안이나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왔던 지도자 모세에게 있어서의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또 달리 몽매에도 잊을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멀리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모세의 머리 속에는 지난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갔을 것입니다. 애굽의 왕궁에서 40년 동안 호의호식하면서 자라던 일, 민정을 시찰하다가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하는 애굽인을 보고 참을 수 없어 그를 쳐죽였던 일, 그 일이 탄로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쳤던 일, 그곳에서 미디안 제사장 딸 십보라와 결혼을 하고 40년동안 양치기 생활을 했던 일, 그러다가 어느 날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지팡이 하나를 들고 애굽왕 바로에게 도전했던 일, 열 가지 재앙들, 홍해를 건넜던 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리 방황하였던 일, 때로는 물이 없다고, 때로는 양식이 없다고, 때로는 고기가 먹고 싶다고 원망 불평을 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죽이려고까지 했던 일 등등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할 때마다 모세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조금만 더 참자. 그러면 우리는 곧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될 것이며, 그 땅에 우리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 잘 공경하면서 축복 받고 살아보자' 이렇게 그 날이 오기를 40년 동안 오매불망 학수고대 해 왔던 모세였을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그 한이 맺히고 피가 맺힌 꿈이 거의 다 이루어져 가나안 복지를 코앞에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모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아마도 우리들 같은 보통 사람이었더라면 틀림없이 '하나님 세상에 그럴 수가 있습니까? 바로 저 땅에서 태평 성세를 누리고자 이 엄청난 고난의 언덕길을 넘어 왔는데, 왜 건너가지 못한단 말씀입니까? 하나님 해도 너무 하십니다' 하면서 크게 원망했을 법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모세의 신앙 인격으로 볼 때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생전에 저 가나안 복지를 보고 죽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을 것 같아요.
5절에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모세를 가리켜 '여호와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일생을 여호와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일생을 착하고 충직스럽게 종노릇을 해 온 모세와 그 주인된 하나님과의 마지막 결산의 순간을 그린 내용입니다. 일생을 여호와의 종으로 충성한 모세, 그 모세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으로 바라보게 해주신 것으로만 대가를 치르어 주셨습니다. 인간적인 계산 방법과 철저한 보상 심리에 맞춰 살고 있는 수치 밝은 현대인의 이치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 시간 조용히 눈을 감고 한 해 동안의 생활을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곧잘 우리 자신을 가리켜 주님의 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일년 동안 충실한 주님의 종노릇을 했는가? 말씀 사역의 종, 교회에서 맡긴 직분의 종, 헌신의 종노릇을 충실히 하였는가? 아니면 주님의 종으로서의 삶보단 도리어 물질의 종, 사업의 종, 육신과 정욕의 종으로 전락되어 부끄러운 종살이를 해 오지는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 시간 악하고 게으르고 불충한 종의 생활을 청산하고, 이후에 에는 여호와 하나님께 더욱 칭찬 받는 종이 될 것을 굳게 다짐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모세가 죽어 장사되었는데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모세는 그들의 위대한 영도자요 해방자였습니다. 그러한 모세의 무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코 소홀히 했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세의 묘를 아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같기만 합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많은 주석가들은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사람들이 모세의 묘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의 시신을 천사장 미가엘을 시켜 장사지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근거를 유다서를 통하여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유다서 1:9에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 마귀와 변론할 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지자들 중에 뛰어난 모세를 인간들이 숭배하거나 제사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모세의 시신을 친히 간수하셨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흉계는 모세의 시신을 공개하여 그를 우상처럼 섬기게 하려 들었고, 반대로 천사장 미가엘은 모세의 시체를 사람들이 절대로 찾지 못하도록 감추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제네바에 있는 칼빈의 무덤에 가 보면 그 유명한 종교 개혁가의 무덤에 J. C라고 하는 두 글자만 남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안내자의 설명이 없으면 아무도 칼빈의 묘를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우상 숭배를 극도로 미워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우상처럼 숭배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위해서는 그의 시체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 모세의 묘를 아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방부제로 처리하여 금수산 국회 의사당 안에 모셔 놓고 사후에까지 두고두고 숭배하도록 한 김일성이의 시체와는 얼마나 대조적인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킨 그 위대한 지도자의 무덤까지 알 수 없도록 하신 일은,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로만 돌려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혹 우리가 금년에 주님과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일한 것이 많을지라도 감추어지고 잊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8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맞도록 모세를 위하여 30일을 애곡하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창세이후 모세만큼 위대한 지도자가 없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30일 동안이나 애곡을 했습니다. 고 다그 함마슐드 유엔 사무총장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너 태어날 때 모든 사람이 기뻐하고, 너 세상을 떠날 때 모든 사람이 울어 주는 사람이 되라' 김일성이처럼 죽을 때 '축 사망'이라는 소리를 듣도록 살아서도 안되겠지만, 우리가 죽을 때 누가 별로 슬퍼하지도 않고 아쉬워하지도 않게 인생을 살아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에 온 교회가 그의 믿음, 그의 사랑, 그의 희생, 그의 덕행을 기억하며 아쉬워하고 이별의 슬픔을 금치 못하여 애곡하는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내평 교회 서집사-목회자에 대한 따뜻한 마음, 후한 인심-장레식 설교를 눈물로 준비. 아들의 은행 취직?)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나의 말엔 주가 주신 진리로/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 주소서/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두 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나학수 목사-목사에게 설교 자료를 남겨 달라!
백성들이 통곡하며 슬피 울었던 눈물의 뒤에는 다시 위대한 지도자를 주시는 축복이 따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위대한 인물이 죽으면 곧잘 큰 별이 하나 떨어져 잃어버렸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죽음과 함께 중단되는 법이 없습니다. 다른 일군을 세워 하나님의 뜻을 계속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 대신 또 다른 위대한 지도자 여호수아가 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죽기 전에 그의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택하시고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셨으므로, 모세는 이 일에도 순종하여 죽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대권을 모두 인수 인계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 자신은 비록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실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믿음으로 바라 본 것입니다.
이렇듯 모세는 죽었지만 그가 이끌어 온 가나안 행군은 중단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모세가 이루지 못한 가나안 정복의 꿈을 실현시키고야 말았습니다. 인간 모세는 갔지만 그가 이끌어 온 가나안 정복의 행군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끝나도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믿는 믿음이, 자손만대에 이어지게 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모세의 종말이 주는 복음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상징합니다.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는 이스라엘을 가나안까지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가나안까지 데리고 들어 갈 수는 없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누구입니까 ? 히브리어로 여호수아는 헬라어로 예수라는 뜻과 꼭 같습니다. 구원자라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율법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오직 율법은 천국의 문턱까지만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안내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실로 천국은 모든 율법을 완성시키고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을 가지고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 주변에 율법적이고 자신의 신망과 덕을 앞세워 자신 있게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공로나 행위로 천국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생들에게는 실로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영적인 진리가 모세와 여호수아의 교체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본문 외에서 모세의 인물됨과 신앙의 발자취를 좀더 살펴보면
1.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같은 인물입니다.
1)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의 시련은, 예수님께서 유대 광야에서 40일간 시험을 받으신 일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연단 받지 않고 쓰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떤 연단을 받았으며, 연단을 받은 기간은 얼마나 됩니까?
2)모세는 장인의 양을 치던 목자였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목자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양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여러분이 돌보고 있는 양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구역 예배 인도자인 구역장, 교사 여러분은 얼마나 충성된 목자였습니까?
3)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했습니다.
모세는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자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영혼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금년 한 해 동안 몇 사람의 영혼을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까?
4)모세는 시내 산에서 내려 올 때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내려 올 때나 회막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나올 때 그 얼굴에 신비한 광채가 났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변화산에서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얼굴, 우리의 표정, 우리의 언행에서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고 있는 가요?
2. 모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했고, 믿음으로 모세는 고난의 길을 택하였고, 믿음으로 모세는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보이지 않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했고, 믿음으로 모세는 유월절 피를 뿌리는 예를 정했고, 믿음으로 모세는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만사를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행동하고 믿음으로 해결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만사를 믿음으로 했습니까? 믿음으로 말을 했습니까? 믿음으로 생각을 했습니까? 믿음으로 주님의 일을 했습니까? 믿음으로 사업을 했습니까? 믿음으로 자녀들을 양육했습니까? 믿음으로 앞날의 계획과 설계를 했습니까?
3. 모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어려울 때마다 기도했으며, 모세가 기도할 때에 승리가 있었습니다. 홍해를 가를 때, 반석에서 생수를 낼 때,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모세는 기도했습니다. 문제 앞에서 걱정과 한숨 대신, 주님을 부르는 간절한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한 해 동안 여러분의 기도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4. 모세는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젊었을 때의 모세는 애굽인을 쳐 죽일만큼 혈기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일에 모세는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변화요 놀라운 성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혈기는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펄펄 살아 있지는 않습니까? 평신도 때나 교회의 중직자 때나 여전하지는 않습니까?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또 한 해가 막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해가 되면 우리들의 나이테는 하나 더 그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생활 가운데 어느덧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때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순간 순간을, 하루하루를, 한 해 한 해를 후회 없이 살아야 됩니다. 모세는 그야말로 후회 없는 충성된 삶을 살았습니다.
다음은 김준곤 목사님의 칼럼중 시간에 관한 글입니다. "시간은 돈이나 목숨이나 달란트와 함께 하나님의 위탁물이다. 시간은 돈이라는 말이 있거니와 사실 시간은 생명이다. 황금같은 시간이라 하기보다 생명같은 시간들이다. 시간은 영원을 심는 밭이다. 얼마나 소중한 주님을 위한 시간들을 사탄과 죽음과 죄를 위해 강간당하고 강도 당하며 살았는가. 탕자의 시간은 사기당한 시간, 불모의 적자 시간이었으나 새로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시간은 없다. 악마는 선을 내일부터 하라 하지만, 성도의 실천적 시간은 지금 여기다. 갚아야 할 빚이 있으면 지금 갚고, 십일조 시간도 지금 재정 상황인 것이다. A. A. 하아디는 10만불 부채 중에서 십일조를 시작했다. 빚 먼저 갚고 십일조 하라고 비난했지만 도둑질한 빚, 즉 십일조부터 갚았더니 다른 모든 부채를 다 갚고 백만장자가 됐다. 전도할 시간, 성경 공부 시간, 사랑할 시간, 회개할 시간은 지금 내가 처한 이 시간이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할 시간, 충성할 시간도 모두가 다 지금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금년도 얼마 남지 않는 이 때 아무쪼록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되시기 바라고, 언젠가 여러분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 올 때 모세의 최후와 같은, 후회없는 것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
신 34:1-12 / 성홍모목사
가을이 깊어가고 이제는 제법 추운 날씨로 바뀌었습니다. 찬바람이 불고 아침저녁으로는 두터운 옷을 입어야 할 것 같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신명기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모세 오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신명기라는 말은 '율법을 반복하고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히브리 성경에는 책의 제목이 없었습니다. 책을 구별할 때 첫 번에 나오는 두어 단어를 가지고 책을 구분하였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엘레 하데바림'이라고 하여 "이는 ....말씀이니라"는 뜻입니다. 신1:1의 말씀이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서술적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히브리 성경은 "이는 말씀이니라" 해놓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헬라어로 번역된 공인 성경에서 비로소 책의 제목을 붙이어 "듀테로미온"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제2의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신명기는 율법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지 다시 새로운 율법을 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모압 평원에서 시내산에 맺은 언약을 다시 한번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의 신명기라는 말에서 신이란 한문 글자는 하나님을 말하는 신(神)이나 믿으라는 신(信)이 아니라, 납신(申) 자인데 이 말은 거듭 말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더욱 자세히 설명해주는 책이라는 말입니다.
신명기는 모세의 마지막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최후의 통첩을 받았습니다. 네가 가던 길을 스톱하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그 자리에서 하차하라고 하십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당연히 올 것이 왔다고 하지만 황당하게 들릴 것입니다. 민수기 27:12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이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라고 했습니다. 아바림 산이라는 지명이 어떤 산을 가리키는지 사실 알 수는 없습니다. 사해 건너에는 하도 산들이 많기 때문에 아바림이라는 말은 모압의 여러 산들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꼭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혈기를 내므로 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진노하셔서 가나안 땅을 보기만 하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사건은 신 광야의 므리바라는 곳에서 일어난 것인데, 백성들이 물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었습니다. 온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에게로 몰려들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그런데 그 때에 하나님이 약속하여 주시는데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보장하여 주셨으니 모세와 아론은 백성들을 다 모으고 외쳤습니다. "반역하는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하시던 방법으로는 지팡이를 들거나 치라는 것인데, 이번에는 반석에게 명령만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치명적인 오점을 숨기지 않고 가감 없이 기록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20:12)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의 생명을 거의 마칠 무렵에 하나님께 간곡하게 기도하였습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그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같은 제목으로 다시 말하지 말라고 거절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른 방향으로 기도를 들어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아바림산이 아니라 느보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 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게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여주셨습니다. 길르앗이라는 곳은 요단강 동쪽의 점령한 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길르앗의 온 땅과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여주셨습니다.
아무리 눈이 밝은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렇게 넓은 땅을 다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리고 맞은편에 비스가 산꼭대기에 서보니 그렇게 모든 지역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눈을 크게 하시고 산을 더욱 높게 하셨는지 가나안의 모든 땅을 보여주셨습니다. 아직 남달리 지파가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은 자세히도 설명하시면서 저 지역은 납달리지파는 갈릴리 지역에 살 것이며,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중앙 고원지대에 살 것이며, 유다 지파는 가장 남쪽에 살 것이라고 가나안 땅을 자세하게 보여주셨다고 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들에 더욱 넘치도록 능히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빈기도가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허공을 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더 좋은 것으로 들어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허락하시지 않았지만 다른 것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바로 그렇습니다. 다른 것으로 주시는 것도 놀라우신 은혜입니다.
여기서 모세의 수고를 그만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는데 수고를 그치고 쉬라고 하십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이 수고스럽습니다. 죽음이란 참된 안식이요, 쉼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모세의 사명과 그의 수명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입니다. 모세는 그가 죽을 때 나이 120세였지만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건강한 분이었고, 아직도 지도자로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은 여호수아에게 그 책임을 맡기고 있습니다. 모세가 연로하신 몸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복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사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모세는 무사 출신이 아니었으며, 단지 양을 치는 목자 출신이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들어가야 하고 사라져야 하고 여호수아가 등장해야 하고, 그가 가나안을 점령해야만 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이제는 되었다, 그만 하라는 말씀을 은혜로 들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는 우리를 가나안 땅 앞에까지 인도하는 사명이지만 마지막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요단강을 건너게 하는 이는 복음의 상징인 여호수아에게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율법과 은혜를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봅니다. 율법의 한계와 효용은 광야 교회 생활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이는 오직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인데, 예수아 예수로 그 이름이 같은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은 이끌어들인 인도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전 세계 인류를 구원하신 구세주가 되십니다.
가을이 되면 추수를 하게 되고 산과 들은 단풍으로 물들고 신속하게 겨울로 접어들게 됩니다. 따뜻한 남쪽 나라로 돌아가는 철새들을 보거나 낙엽이 뒹굴고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보노라면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됩니다. 가을이 되면 많은 분들은 우리와 운명을 달리하고 세상을 떠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되어 기온이 급변하면 많은 분들이 돌아가십니다. 저 분은 몇 살에 돌아가시는데 지금 나는 몇 살인가? 저분은 무엇을 하시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저분은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가셨는데 지금 내가 죽으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이러한 깊은 질문이 있어야 성숙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 사람을 시간의 존재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영혼이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지만 이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에 시간의 지배를 받아야만 합니다. 시간의 특성이란 빨리 지나간다는 말입니다. 인생은 그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죽음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음도 잘 맞이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죽는다는 것이야 잘 알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을 잘 준비하여야 합니다. 대 전도자 빌리그레엄 목사님은 "당신을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나는 사는 것을 두려워한다"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인간은 책임적인 존재입니다. 천국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삶을 어떻게 살아갔느냐 하는 것으로 달려 있습니다.
눅12:47-48에는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으로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많이 내어놓으라고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받으신 분들입니까? 우리는 정말 많이 받으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20세기 최고의 심리학자요 정신 분석학의 권위자인 [에리히 프롬] 은 "To Have or To Be" "소유냐 삶이냐?" 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이 출간될 당시 그의 나이 77세였으니 이 책에서 말하려는 사상적인 체계는 가장 완숙한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책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인간 생존의 양식을 첫째로 "소유의 양식"과 둘째로 "존재의 양식"으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소유 양식"은 현대 산업 사회와 극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주도적인 존재 양식인데, 이런 삶의 태도는 현대 사회의 모든 침략적인 죄악과 범죄의 원인이 되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를 좀 깊이 진단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소유 양식을 가지고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라면 그는 언제나 빈곤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나의 지금 가진 것으로도 충분히 부요를 누리고 있다고 감사하며, 그 중에서 적은 것을 구별하여 보다 어려운 이웃과 나누면서 살아간다면 그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될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단호하게 말하는데, "소유 양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인간관계는 살아있는 관계가 아니라 죽은 관계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현대 물질 문명과 소비 지상주의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소유하고 소비하고 또 소유하고, 과소비하고 돌아서기 무섭게 과도한 욕심으로 움켜잡으려고 합니다. 그는 소유양식에 의존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인류가 계속적으로 생존하고 평화와 안정을 찾으려 한다면 인간의 생존 양식을 소유 지향에서 존재 지향으로 즉 존재의 양식으로 전환시키는 길밖에 없습니다. "소유"는 언제나 물질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존재"는 경험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존재의 양식은 나누어주고, 공유하고, 희생하려는 의지로 설명할 수 있고, 삶의 능동성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제발 "소유 양식"으로 살아가지 말고 사랑하며 믿어주며, 희생하려는 "존재 양식"으로 살아가면서 번득이는 비전과 창조적인 행위로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하고, 사람 살만한 사회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즈베키스탄에 가면 다니엘의 무덤이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모슬램 교도들인데 이라크에서 다니엘의 무덤을 우즈베키스탄으로 옮겨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무덤을 돌면서 소원을 빌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백성들의 소원이나 들어주는 신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묘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두루 살펴보고 모압 땅에서 죽었는데 골자기에 장사되었다고 하지만 그의 묘를 아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유다서에 보면 모세의 시신을 놓고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장 마가엘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와 다투어 변론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말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무덤도 없이 장례를 지낼 수 있느냐, 모세의 무덤을 공개하자"고 한 것 같습니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모세의 무덤을 확보한다면 하나님 믿는 종교가 아니라 모세 한 사람을 숭배하는 모세교를 만들 수 있고,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는 모세교로 전락할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미가엘은 악한 마귀에게 책망하였습니다.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하시면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우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시신을 감추시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상이 될만한 것들이 좀 있었습니다.
그 중에 놋뱀도 하나라고 봅니다. 옛날 모세가 만든 놋뱀인데 그것을 쳐다보면 불뱀에 물렸어도 나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것을 가루로 만들고는 느후스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놋조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주 중요한 법궤도 감추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모든 전쟁터에 끌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도 없어졌고, 모세도 없어지고 엘리야도 사라지고 마지막 우리 주님도 육신을 남기지 않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역사상 모세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으며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신적으로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0절 말씀에 "그 후에는 이스라엘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라고 했습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 이 말은 후에 메시아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신18:15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이 말씀은 장차 메시아를 보내어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중보적인 위치에 서 있었다고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로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자로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보여주셨고 구원하시는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옛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리"라고 하셨습니다. 갈3:16에 보면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세례요한에게 물었습니다. 요한 자신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요1:20-21)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선지자"는 율법에서 말하는 모세가 예언한 "나와 같은 선지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1:45)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오시리라고 약속하신 그 선지자이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시기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5:46)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외쳤습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행3:22) 바로 이렇게 모세와 같은 선지자, 모세가 말한 나와 같은 선지자는 메시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기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의 종, 즉 사환으로 충성하였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충성을 다하였다고 하셨습니다. (히3:5-6)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모세를 비교한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모세를 통하여 장차 우리 구주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와 같이 사역하실 것을 예표로 보여주셨습니다.
톰슨 바이블은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연구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그리스도는 모두 어린 시절에 각별한 보호를 받았습니다. 바로의 박해와 헤롯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모세와 그리스도는 모두 악의 우두머리와 싸웠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박수와 술객들과 싸웠고, 예수님은 악한 영 마귀와 싸웠습니다. 모세와 그리스는 다같이 40일간 금식하였습니다. 모세와 그리스도는 다같이 바다를 제어하셨습니다. 모세는 바다를 갈라지게 하였고, 우리 주님은 바다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모세와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을 먹이셨습니다. 모세는 만나로, 예수님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 4천명을 먹이셨습니다. 모세와 그리스도는 모두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모세와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의 불평을 참아냈습니다. 모세와 그리스도는 모두 가정에서 신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모세와 그리스도는 다같이 중보의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모세와 그리스도는 다같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였습니다. 모세와 그리스도에게는 모두 돕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모세와 그리스도는 다같이 기념일을 제정하셨습니다. 모세는 유월절을 제정하고 예수님은 유월절의 성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유형을 따라 우리 주님이 사역하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많은 공통점들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오직 사명으로 살았던 사람이었고, 오직 엎드려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대면하였던 사람, 백성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멜빌 콕스는 아프리카 라이베리아로 간 첫 번째 감리교 선교사였습니다. 1833년 당시에 '백인의 무덤'이라고 알려져 있던 서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만류하였습니다. 그가 웨슬리안 대학에서 설교를 마치고 내려올 때 한 사람이 다가와서 "관을 준비해 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묘비에 글을 써넣어 주십시오. "천명이 쓰러져도 좋으리. 아프리카가 돌아온다면" 멜빌콕스는 아프리카로 들어간지 5개월도 채 못되어 순교하였습니다. 그도 예수님처럼 33세에 하늘나라에 올라갔습니다. 이러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세계는 복음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잠시 왔다 가는 인생인데, 우리의 건강을 다하여, 우리의 물질을 다하여, 우리의 생명을 다하여 헌신하다가 하나님 앞에 서야겠습니다. 우리의 한계를 아는 것도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할 수 있다는 믿음이어야 끝까지 쓰임을 받고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선을 다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인생매듭을 잘 지은 사람
신 34:1-12 / 오정호 목사
예수믿는 교사들이 결성한 기독교사연합모임에서 만든 『기독교사의 30가지 지침』이라는 내용을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복음, 사랑, 정의, 회복 네 가지 핵심가치(4 core values)를 지향하는 ‘좋은 교사운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이 네가지 가치를 마음에 담아서 고민하고,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가운데 기독교사연합모임은 건강한 단체로 성장하였습니다.
성장하는 교회, 단체, 개인이 있다면 그것은 우연히 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도움들 중 하나는 신앙의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역사(Church History)를 통하여 후대에게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도 하시지만, 우리에게 역할모범(役割模範/role model)을 선물로 주셔서 그들의 삶을 본받을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연말을 맞이하면서 인생매듭을 잘 지은 한 사람을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그는“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모세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計數)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맘을 얻게 하소서”(시편 90:12). 모세는 평소 기도할 때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 직분, 인생을 어떻게 하면 최선을 다하여 활용하고 주님을 섬기는 축복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세의 마지막 생애를 통해 2003년을 어떤 마음과 믿음으로 잘 마무리 할 수 있는지 또한 2004년 새해를 어떻게 지혜롭게 열어갈지 그 비결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모세는 주님의 다스림에 활짝 열려 있는 사람이었습니다(5절).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5절). 하나님은 당신의 종 모세를 높은 산에 오르게 하사 약속의 땅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1-3절). 모세는 출애굽의 영광을 체험하고 40년동안 광야에서 불순종한 백성들을 이끌면서 지도자로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어려움들을 다 겪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모세에게 약속의 땅을 보여주셨지만 그 땅에 들어가지는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억울함과 섭섭함, 분노가 가슴 가득 차올랐을 겁니다. 사명을 다한 후 축복의 장소에서 빠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육신적인 면에서도 전혀 쇠약하지 않았던(7절) 모세는 그 억울함과 섭섭함을 주님 앞에 다 토로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는 침묵합니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땅에서 죽어”(5절).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위대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내가 가고 싶은 곳에 어디든지 가고, 멈추고 싶다면 멈추고, 하고 싶은 일만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목에 멍에가 지워지듯이 가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환경을 핑계 대거나 자책하거나 심지어는 주님 앞에서 원망하고 싶은 일도 생깁니다. 모세는 이 일생일대의 순간에 여호와의 말씀을 택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자신을 복종시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의 신앙의 위대한 점입니다.
모세를 수식하는 수식어로 ‘여호와의 종’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고, 여호와의 뜻을 내 뜻보다 앞세우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복할 때 여호와의 종으로 쓰임 받습니다. 인간으로서 모세의 위대한 점은 여호와의 종의 위치를 이탈하지 않은데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 힘이 있으면 기고만장(氣高萬丈)하지만,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힘겨워 합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인생의 매듭, 한해의 매듭을 잘 짓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으로 서야합니다. 여호와의 종의 모습을 회복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통치를 진심으로 즐거워합니까?
둘째, 모세는 주님이 쓰시는 도구로 자신을 즐거이 내어드렸습니다(10-12절).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10-12절). 주어진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즐겨 사용하셔서 모세가 능동적으로 쓰임 받은 그의 일대기가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성경과 교회사를 통해 여러 종류의 사람이 구름처럼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육체의 정욕과 탐욕의 도구로 쓰임 받은 부정적인 반면교사(反面敎師)뿐 아니라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할 모범적인 신앙의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신앙적인 사람들은 정의와 사랑, 복음의 도구로 그들의 삶을 주님께 내어드렸습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의 삶을 강압적으로 다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의지적인 결단을 통해 주님 앞에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자신을 하나님의 의와 사랑의 도구로, 복음과 은혜의 도구로 내어 드립시다. 우리가 자신을 은혜의 도구로 드렸기 때문에 도리어 어려운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자신들의 몸을 의의 도구로 내어 놓을 때 오히려 고난과 핍박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했지만 기쁘게 그것을 감당했습니다(사도행전 5:41).
한국교회는 그동안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고 가르쳐왔습니다. 물론입니다. 예수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복의 개념에 대한 관점이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믿고 나서 누려야 할 최대 최상의 복은 주님을 닮아가는 복입니다. (로마서8:29) 주님의 인격과 성품이 성도인 우리 자신속에 녹아 존재해야합니다. 과연 우리자신이 원하는 복과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복과 일치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교회 오면 주님을 더욱 닮기를 소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자신의 몸을 주님의 도구로 드릴 때 그에게 주어진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한 고난과 예수의 흔적이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주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결단할 때 우리는 격조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로마서 6:12-13).
셋째, 모세는 영적인 세대계승을 위해 다음세대를 믿음의 세대로 세우고 축복했습니다(9절).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按手)하였으므로”(9절). 안수에는 사랑의 의미와 함께 직분을 수행하고 믿음을 계승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할 때 여호수아의 세대가 부흥되기를 기도했을 겁니다. 자신의 세대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다할지라도, 여호수아세대는 믿음의 세대로 영적 세대계승을 할 수 있도록 간절히 안수했을 겁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안수하고 그의 사명을 일깨워주었습니다(신명기 31:7-8). 달리 표현하면 모세는 영적인 세대계승에 온 마음을 모아 다음세대를 믿음의 세대로 세우기에 힘썼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세대를 믿음으로 세우기로 작정하고 축복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신명기 33:1). 모세는 온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이름을 부르면서 축복하였습니다(신명기 33장). 우리가 맡은 사명을 잘 매듭짓기 위해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부모가 자녀를, 순장이 순원을, 우리 국민이 대한민국을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믿고 나서 내가 누리고 받은 것을 이야기하는 단계를 뛰어 넘어서서, 자신이 주님을 향하여 이웃을 향하여 주고 나누고 축복한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려보아야 합니다(사도행전 20:35/ 데살로니가전서2:8). 우리 각자의 삶의 대차대조표를 기록하고 작성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나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로남 믿음의 가족 여러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모세의 일대기를 믿음의 눈으로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복 하는 여호와의 종 된 모습을 회복합시다.
우리자신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의와 사랑의 도구로, 복음과 은혜의 도구로 쓰임받기를 마음에 결단하고 내어드리는 격조 있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다음세대를 믿음의 세대로 세우기에 힘쓰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함으로 영적인 세대계승을 이루어가는, 인생의 매듭 한해의 매듭을 잘 짓는 성도들이 다 됩시다.
느보산에 올라
신 34:1-12 / 이대성 목사 / 큰빛광성교회
제가 34장 1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느보산에 올라’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느보산에 올라” 이 제목은 저의 아버님 설교집의 표지 제목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혹시 전에 느보산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제가 만약에 ‘설악산에 올라, 북한산에 올라, 하다 못해 정발산에 올라’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린다면 여러분은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들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설악산에 대해서, 북한산에 대해서, 정발산에는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읽은 느보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동안 성경을 통해서 시내산, 모리아산, 아니 겟세마네 동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지만 느보산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느보산은 죽음을 목전에 둔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다 보면서 최후를 맞이한 곳입니다. 우리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최후를 맞이한 바로 그 느보산이 지금 현재 나와 과연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저는 감사하게도 성지순례 때 실제로 느보산에 올라갔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처럼 가나안 땅을 바라다보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때 제가 하나님께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 아십니까?
“하나님 참으로 너무하십니다. 궁궐에서 잘 있었던 모세를 40년 동안이나 미디안 광야에서 고생시키시고,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지도자로 세우시고는 그것도 모자라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모진 고초를 겪게 하시더니,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는 지금 이 순간, 모세로 하여금 느보산에 올라 그 땅을 바라보게만 하십니까?
하지만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이라면 모세처럼 저도 순종하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앞으로 제 앞에 전개될 목회자의 길이 비록 고독한 광야의 길이라 할지라도, 험난한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면 온전히 순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느보산에 올라 최후를 맞이하는 모세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를 확실히 깨닫게 되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과연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습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하나님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 신명기 34장 10절 말씀입니다.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여러분? 이 말씀 한 구절만 보더라도 모세만큼 위대한 선지자는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무엇이 모세로 하여금 이토록 위대한 선지자로 칭송받게 했을까요? 그는 하나님과 늘 대면하면서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대면이 뭡니까? 'Face to Face'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한다는 것은 웬만큼 친하지 않고서는 엄청 힘든 일입니다. 한마디로 고역입니다. 아니 이 보다 더한 고문은 없습니다.
제가 10 여년전 예수전도단에서 훈련받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듣기’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리더 분께서 갑자기 둘 씩 짝을 지으라고 하시더니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때 처음 느꼈던 그 당혹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저는 단 몇 초도 견디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횟수가 거듭될수록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눈을 응시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한 번 해볼까요? 지금 좌우에 둘씩 둘씩 한 번 짝을 지어봅시다. 그리고는 상대방의 눈을 한 동안 바라봅시다. 이성끼리는 손을 내미시고, 동성끼리는 손을 맞잡아도 상관없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진지하게 이렇게 말합시다. 왼쪽 분이“하나님은 형제님(자매님)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오른쪽 분이 “저 또한 형제님(자매님)을 사랑합니다.” 여기에서의 한 동안 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란 10초 이상의 시간을 말합니다. 최소한 10초 이상 서로를 바라봅시다.
여러분? 한 번 해봅시다. 자 준비됐나요? “집사님~ 시작도 하기 전에 눈부터 내리깔지 마세요!” (시작) 어떻습니까? 상대방을 한 동안 바라다본다는 것이 꽤 힘들지요? 이제 서로 서로에게 사랑 표현도 합시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게 모세와 하나님은 서로 대면하는 사이가 되었을까요? 어떻게 모세는 날마다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저는 모세가 하나님과 만나는 수많은 장면들 중에서 특별히 출애굽기 3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과 만나는 장면을 무척 좋아합니다. 33장 11절 상반절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와 대화를 나누시는 데 마치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과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서로 친구관계이면 이것이 가능합니다. 서로 친하면 친할수록 이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서로 진정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언제까지라도 상대방만을 바라보고 싶어집니다.
갑자기 연애편지의 이런 글귀가 떠오릅니다. “나는 당신의 영원한 바보이고 싶습니다. 추신: 여기서 바보는 바라보고 있어도 계속 보고 싶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여러분? 그러다가 바보에서 여보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보’ 여전히 보고 싶은 사람! 멋있죠? 이거 제가 다 지어낸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약에 오면 우리들과 친구 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더욱 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부터 15절 말씀입니다. 제가 읽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사랑하는 큰빛광성교회 성도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은 진정 친구가 필요하실까요? 하나님은 친구가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과 같은 그런 친구는 필요치 않으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혼자서도 완전히 만족하시고 행복하신 유일신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친구가 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친구가 되시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시고, 친구 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가 되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숨김없이, 진실하고 가깝게, 하나님과 깊은 사귐과 만남을 가져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의 신앙이 더 이상 서먹서먹한 구경꾼의 신앙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방관자의 신앙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더 이상 들러리 꾼으로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여러분? 이제 모세처럼 하나님과 늘 대면하는 하나님의 친구가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하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친구 되신 하나님을 만날 때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욥의 이 고백이 하나님을 대면하는 저와 여러분의 진실된 고백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을 행한 자였습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을 행한 자” 여러분? 신명기 34장 11절과 12절을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 그것을 행한 자더라.”
그렇습니다. 모세는 진정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한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능력이 어디서 왔습니까? 누구로부터 왔습니까? 그 능력의 주관자가 누구이십니까?
“여호와께서....”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보내시고 행하게 하시므로, 모세는 그 이적과 기사와 권능과 위엄을 행한 것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세처럼 하나님을 대면하는 삶을 사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권능을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 하반절 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과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을 영어로 표현해보면 우리는 더욱 더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여러분? everything과 nothing의 기준이 누구입니까? 'Jesus Christ'입니다. 내가 예수 안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능력의 근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니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이 시간,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면 능치 못함이 없음을 믿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기에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과 17절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여러분? 보혜사란 the Counselor 즉 변호자, 위로자, 중보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보혜사라니요? 그렇다는 얘기는 원조 보혜사가 있다는 말 아닙니까? 음식점에만 원조가 있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에도 원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조 보혜사가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원조 보혜사인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러분? 오직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가 무엇을 받는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권능 즉 권세와 능력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디까지 이르러 무엇이 된다고 했습니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즉,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답은 나왔습니다.
모세처럼 권능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됩니다. 성령 충만함은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성령을 사모하며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면 됩니다.
사도행전 1장 14절과 4장 31절 말씀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예레미야 33장 2절과 3절 말씀입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간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을 때에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까지도 밝히 보여주실 줄로 믿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오직 나의 신, 즉 성령으로 되느니라.”
사랑하는 큰빛광성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 모세처럼 권능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성령 충만함을 사모하며 전혀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기도에 힘이 있습니다. 기도에 능이 있습니다. 전혀 기도에 힘쓸 때에 하나님께서는 성령 충만함을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실 줄로 믿습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나는 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으십니다.” 사람의 능력과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바로 그것까지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만 한하면 능치 못함이 없음을 믿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진정 내 능력, 내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게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서 좋은 것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입니다. 제가 누가복음 11장 13절 말씀을 읽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사랑하는 큰빛광성교회 성도여러분? 날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에 오순절 다락방에 임했던 성령 충만함을 경험함으로, 모세처럼 능력의 사람, 권능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저와 여러분이 다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하나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한 자였습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하나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한 자” 신명기 34장 5절부터 8절까지를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맟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여러분? 성경에서 순종의 사람 삼총사를 들라면 저는 세례요한과 스데반과 모세를 들고 싶습니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순종의 사람이자 또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그만 허무하게 죽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들의 죽음이 세상적으로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먼저 메시야의 오심을 전하기 위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광야에서 큰소리로 외쳤던 세례요한의 죽음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어이가 없습니다. 마가복음 6장 17절에서 29절까지를 보면 세례요한은 헤로디아라는 계집아이의 말 한 마디에 그만 목이 잘리우고야 맙니다.
여러분?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얘깁니까? 세례요한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예비하는 자로 삼으신 선지자 중의 선지자 였습니다. 그런 그가 계집아이의 말 한마디에 그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또한, 주님 가신 그 길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을 산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데반의 죽음 또한 너무나도 가슴이 아픕니다. 스데반은 단지 복음을 제시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돌팔매질을 당할 절대 절명의 위기에 처하고야 맙니다. 이는 정말이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열심히 정성을 다해 설교했지만 베드로처럼 수 백명, 수 천명이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단 한 명도 회개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스데반이 그토록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피를 토하며 말씀을 선포했지만 저들은 오히려 이를 갈며 스데반을 향하여 돌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스데반은 진정 저들의 돌팔매질 속에서 그렇게 죽어간 한 사람의 이단자에 불과했습니까?
오늘 본문말씀에 나오는 모세의 죽음은 더더욱 가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느보산에 올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바라다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어때? 참 보기 좋지? 근데 모세야....넌 못 들어가!”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누구 약 올리는 겁니까?
막말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실컷 잘 부려먹고는 모른 체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야말로 ‘토사구팽’의 원조가 아니고 뭡니까? 결국 모세는 그렇게도 들어가기를 소원했던 가나안 땅을 바라다만 보면서 그렇게 거기서 죽음을 맞고 있습니다. 그런데 7절 말씀을 보면 더더욱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비록 모세의 나이 일백이십 세이지만 아직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도 않은 건강한 상태였음에도 하나님께서는 모세더러 죽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토록 잔인한 하나님이셨습니까? 이처럼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자신의 뜻만 내세우시는 그런 하나님이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렇다 치고, 이러함에도 왜 모세는, 왜 세례요한은, 왜 스데반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냥 그렇게 죽음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똑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생을 넘어서 펼쳐져 있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겪었던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완전 종결시켜 주시는 곳,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한 은혜를 주시는 곳, 기갈이 없고 목마름도 없고 오직 생명수가 넘쳐흐르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처음부터 순종의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혈기 왕성한 교만한 자였습니다. 그만 분을 못 이겨 동족을 핍박하는 애굽 사람을 살인했던 살인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이스라엘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이렇게까지 기도합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출애굽기 32장 32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모세의 3232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3232’ 죄송합니다만 화토판에서는 이런 것을 뭐라고 한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또이 또이’
출애굽기 32장 32절 말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이렇게까지 기도할 수 있습니까? 지금 모세가 뭐라고 기도합니까?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지금 모세의 기도는 자기 목숨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맞바꾸겠다는 정도의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이미 죽으면 영원한 하늘나라가 예비 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확실히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지금 모세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하늘나라 못가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제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신다해도 저 이스라엘백성들의 죄만 용서해 주신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대단한 기도입니까? 이렇게까지 기도했던 모세였기에 지금 이생의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다 한들, 그것이 그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큰빛광성교회 성도여러분? 날마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 성령 충만한 능력의 사람, 권능의 사람이 되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순종의 사람 세례요한처럼 스데반처럼 아니, 느보산에 올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순종하며 죽음을 받아들였던 모세처럼,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한 걸음 한 걸음씩 시온 성을 향해 기뻐 찬송하며 담대히 나아가는 십자가 군병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