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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 23일. 삼성 라이온스와 SK 와이번스의 시즌 5차전이 열리는 인천 문학구장. 앞선 두 경기에서 연달아 삼성에 패한 SK가 선발 김영수를 앞세워 설욕을 다짐한다. 그러나 이날도 9회까지 삼성에 4대 9로 뒤지며 홈 3연패를 눈앞에 두는데. 이때 패색이 짙은 SK가 한 투수를 마운드에 올렸다. 이 정도 점수 차면 패전처리 투수로 봐도 무방할 터.
“어, 이상훈 아니야?” 관중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젠 마무리가 아니라 패전처리로 나서네.” 어느 관중의 말대로 이상훈은 전날에도 팀이 1대 3으로 뒤지는 8회에 출전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상훈에게 ‘마운드에 몇 번째로 오르는 투수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 투수의 보직이란 ‘직무’에 해당하는 것이지 ‘직급’이 아니었다. 33살의 왼손투수에게 야구란 자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묵묵히 마운드에 오른 이상훈이 3타자를 상대로 삼진 1개를 잡으며 이닝을 마무리했다. 시즌 초반 블론세이브를 3개나 기록하며 주변의 우려를 샀던 이상훈은 5월 중순이 지나며 서서히 제 기량을 되찾고 있었다.
하지만 마운드를 내려오는 이상훈의 표정에서 기쁜 기색이란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량은 회복되고 있지만 가슴에 생긴 도넛 구멍만 한 상실감은 되레 커지고 있었다. 관중석을 쭉 훑어본 이상훈의 입에서 외마디 말이 새어나왔다.
“여기까지.”
그리고 열흘 뒤. 이상훈은 충격적인 은퇴 선언을 한다. 공 1개 던지지 않고서도 연봉 6억 원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음에도 그는 미련 없이 시즌 중 은퇴를 선언하며 조용히 그라운드에서 사라졌다.
당시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많은 이들이 “역시 야생마”다운 선택이라고 입을 모았다. ‘야생마’ 이상훈(39).
1993년 LG 트윈스에 입단한 이상훈은 가장 성공한 왼손 선발투수와 마무리로 1990년대 LG 신바람 야구를 이끌었다. 1994년 LG의 마지막 우승도 그해 18승을 올리며 호투한 이상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이후 이상훈은 야생마처럼 한곳에 안주하지 않고 한국선수로는 최초로 일본과 미국프로야구를 밟는 신기원을 이뤘다. 2002년 기적 같던 LG의 한국시리즈 행을 이끈 이도 다름 아닌 이상훈이었다.
그러나 이상훈은 야구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야구선수임과 동시에 가장 비밀에 싸인 투수이기도 하다. 그의 야구인생을 관통하는 방황과 도전. 그리고 갑작스런 은퇴를 둘러싼 논란들에 대해 그는 아직 단 한 번도 입을 연 적이 없다.
<박동희의 Mr.베이스볼>에서는 한국프로야구 사에서 전설로 기억될, 현역시절보다 은퇴 뒤가 더 아름다운 이상훈의 야구인생을 돌아보고자 한다. 야구선수 이상훈을 넘어 인간 이상훈과 만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전설이 된 그라운드의 야생마, LG 투수 이상훈’ 편은 3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2편에 이어)
1998년 4월 25일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에 2년간 임대료 2억 엔, 계약금 5천만 엔, 연봉 8천만 엔을 받는 조건으로 입단했다. 선동열, 이종범에 이어 주니치 유니폼을 입은 세 번째 한국선수가 됐다.
입단식을 4월 25일에 했으니 몸 상태가 정상이었겠나. 1군 등록도 5월이 넘어서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데뷔전에서 모도키 다이스케에게 초구 홈런을 맞고 말았다. 얼마 있다가 2군에 내려갔지만, 오히려 몸을 만들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여담인데 어째서 선수명을 ‘삼손 리’로 등록한 건가.
‘삼손’이란 등록 명은 주니치에서 지은 건데…. (밝게 웃으며) 사연이 있다. 나와 (이)종범이가 함께 출전한다 치면 전광판에 ‘이(李)-이(李)’가 뜬다. 그럼 누가 나고, 누가 종범인지 헷갈릴 수 있었다. 그 바람에 내 등록 명을 다른 것으로 쓰기로 했는데 처음에는 ‘라이언’이 유력한 후보였다. 왜 내 머리가 사자 갈기 같지 않나(웃음). 그러다 좀 이상하다 싶었던지 구단에서 “한국에 있을 때부터 쓰던 ‘삼손’이란 별명을 다시 쓰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래 “마음대로 하시라”고 했다(웃음). 그렇게 탄생한 등록 명이 ‘삼손 리’다. 일본야구팬들이 내 얼굴은 알아도 ‘이상훈’이란 이름을 모르는 이유다(웃음).
주니치 돌풍을 이끈 ‘나고야 3총사’
LG 시절 타석에 선 이상훈. 공교롭게도 그는 투수도
타석에 서야 하는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주니치로 임대됐다
선동열, 이종범, 이상훈 3명의 선수가 한 팀에서 뛴 까닭일까. 당시 일본 언론에서 ‘나고야 3총사’라 부르며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일본선수들은 죄다 개인플레이다. 선후배 관계 같은 게 있긴 하지만 우리처럼 끈끈한 건 없다. 하루는 다쓰나미 가즈요시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무슨?“상훈과 종범은 선배를 모실 줄 아는 이들”이라고.
선배를 모실 줄 아는 이들?당시 라커룸이 왼쪽부터 동열이 형, 종범이, 나 이런 순서로 붙어 있었다. 일본선수들이 보기엔 우리 쪽 라커룸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루는 동열이 형 스파이크를 닦아 드리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다쓰나미가 신기했던 모양이다. 또 내가 닦는 걸 “괜찮다”면서 만류하는 동열이 형을 보고 어떤 면에선 부러웠던 것 같다(웃음).
일본선수들과는 잘 어울렸나.다 친하게 지낼 순 없었겠지. 하지만, 모나지 않게 두루두루 잘 지냈다. 특히나 투수조 가운데는 야마모토 마사히로와 오치아이 야수조 중에선 포수 나카무라 다케시와 무척 잘 어울렸다. 우리 셋이 휴식일에 일본선수들한테 “한잔할래?” 하면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도망가던 기억이 난다.
왜 도망을….왜긴. 폭탄주 마시게 한다고 도망가는 거지(웃음).
한국선수도 일본에선 외국인선수다. 누가 아니라나. 1997시즌 2군에 있다가 1군으로 오른 적이 있다. 선발로 나가면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성적은 냈다. 그렇게 5경기 정도 잘 던지다가 갑자기 2군행 통보를 받았다. 2군에 있던 이마나카 신지를 1군에 올려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당시 나 말고 다른 백인용병도 있었다. 2군행을 지시하려면 나보다 성적이 떨어지는 그 선수를 내려 보내는 게 상식이었다. 게다가 이마나카가 2군에서 훈련을 열심히 했느냐? 아니다.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타격훈련 도중 라커룸으로 들어가 짐을 싸 그냥 밖으로 나가버렸다. 도저히 이대론 팀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당신의 이탈로 팀 전체가 발칵 뒤집혔을 것 같다.그랬지 않았을까(웃음). 그날 밤 종범이와 동열이 형과 만났다. 특히나 동열이 형은 날 보고선 따끔하게 야단을 치시면서 달래주셨다. 만약 그때 동열이 형이 진심으로 조언해주지 않았다면 난 거기서 선수생활이 끝났을 수도 있다.
다시 팀에 들어갔나.그렇게 박차고 나왔는데 이대로는 못 들어가겠더라고. 그래 코칭스태프에 내 의사를 확실히 전달했다. “만약 올 시즌 날 1군에 올리면 야구를 접겠다”고. 코칭스태프에서 내 뜻을 받아들여 그해 다시는 1군에 올리지 않았다.
일본프로야구 진출 첫 시즌은 훈련부족으로 2군에
있어야 했다. 어느 누구도 그가 2년 차 때
어떤 반격을 할지 상상하지 못했다.
1997시즌이 끝나고 임대선수로는 특이하게 연봉이 감액됐다.(허탈한 표정으로) 그해 시즌이 끝나고 주니치 프런트에서 연락이 왔다. “올해 부진했으니 다음 시즌 연봉은 1천만 엔이 깎인 7천만 엔으로 하자”고. 물론 팀 공헌도가 낮으면 연봉이야 당연히 깎는 것이겠지만, 난 임대선수였다. LG와 2년간 임대계약을 맺어놓고서 무슨 계약을 다시 하자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니치 프런트에 그대로 설명하지 그랬나.했지. 연봉 담당자에게 이런 비유까지 들었다. “자, 봐라. 여기 ‘이상훈’이라는 렌터카가 있다. 당신(주니치)네가 ‘LG’라는 렌터카 회사에 이상훈이라는 렌트카를 돈을 내고 빌렸는데 고장이 났다고 치자. 그럼 수리비를 이상훈이라는 렌트카에서 받아야하냐, 아니면 LG라는 렌터카 회사한테서 받아야 하겠느냐.‘
그러니 뭐라던가.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 10분 정도 대화하다가 “알았다. 생각대로 하시라”라고 말하고 나왔다.
혈행장애와 맞바꾼 부활
그때의 일로 오기가 생긴 것일까. 1998년 1승 평균자책 4.68이었던 성적이 이듬해인 1999년은 6승5패 3세이브 평균자책 2.83으로 눈에 띄게 좋아졌다.
데뷔 첫해가 끝나고 정말 열심히 운동했다. 오죽했으면 혈행장애가 생겼겠나.
혈행장애는 ‘동맥과 정맥, 모세 혈관의 혈류에 생기는 장애’다. 해당 부분에 통증과 마비 혹은 괴사를 수반하기도 하는 무서운 병이다. 특히나 야구선수들에겐 선수생활에 치명타가 될 수 있는 병인데.
지금 LG에 있는 다카하시 미치다케 투수코치가 당시 주니치 1군 불펜코치로 있었다. 사람도 무척 괜찮을뿐더러 뛰어난 지도자이기도 한데, 이분이 현역시절 혈행장애로 고생했단다. 어쨌거나 다카하시 코치와 시즌 후 마무리캠프부터 스프링캠프까지 ‘죽자 살자’ 훈련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몸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갔다. 덕분에 1998시즌엔 선발로 좋은 활약을 펼쳤다. (눈을 찡그리며 기억을 되살리다가) 아마 선발 10경기째 전후였을 거다. 완투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운뎃손가락이 ‘짜릿’하면서 감각이 사라졌다. ‘딱’ 직구 던질 타이밍인데 손끝 마비 때문에 변화구를 던졌다가 두들겨 맞았다. 이상하다 싶어 병원에 갔더니 (짧게 숨을 토하며) ‘혈행장애’라고 했다. 사실 시범경기 때부터 가운뎃손가락이 좋지 않아 걱정했는데 기어이 일이 터지고 셈이었다.
수술로도 완치할 수 있지 않나.
보통 혈행장애는 겨드랑이 쪽 혈관이 막힌단다. 개중엔 손끝이나 팔이 저린 이들도 있고. 난 그 가운데 손끝이 저리고 마비되는 경우였다. 손가락을 X-레이로 찍었더니 다른 부분은 모두 하얀데 확실히 막힌 혈관 부위만 새까맸다. 의사가 “수술을 할 순 있지만, 3개월 정도가 흐르고 나서 혹여 다른 부위에 (혈행장애가) 재발할 수 있다”고 했다. 만약 수술을 했는데 더욱더 투구에 지장을 주는 곳에서 재발했다고 생각해봐라. 그건 야구를 그만둬야 한다는 뜻이다. 심사숙고 끝에 호시노 센이치 주니치 감독에게 혈행장애 사실을 알렸다.
그때부터 선발에서 중간계투로 보직이 바뀐 건가.
(고개를 끄덕이며) 전반기 선발로 좋은 성적을 냈지만 어쩌겠나. 고통을 참고 던지다가 다시 직구 타이밍에 변화구를 던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찾아오면…. 호시노 감독이 내 상태를 확인하고 중간계투로 보직을 바꿨다.
그 후로도 혈행장애는 계속 됐나.
날씨와 바이오리듬에 따라 혈행장애가 ‘나타났다, 괜찮았다’를 반복했다.
당신은 1993년 프로데뷔 후 2004년 은퇴할 때까지 한 시즌도 거르지 않고 마운드에 올랐다. 잔부상은 있었어도 큰 부상은 없는 편이었는데. 그 이면을 들춰보면 이런 ‘종합병동’도 없다는 생각이다.
(빙그레 웃으며) 그런가. 일본에선 혈행장애, 한국 있을 땐 허리와 척추 그리고 습관성 어깨탈구로 고생을 좀 했다. 특히나 1999시즌 때는 양쪽 어깨에 테이핑하고 던질 정도로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참, 그러고 보면 어디 하나 정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도 한 시즌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마운드에 올랐으니 성공한, 아니 성실한 투수 아니었나(웃음).
11년 만에 주니치를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끈 삼손
LG 시절 이상훈은 화려한 이면에 무수히 많은 부상의
고통을 안고 살았다
일본야구를 실제 경험해보니 어떻던가.우리가 흔히 ‘야구는 어디나 다 똑같다’고 하지만, 확실히 일본야구는 한국야구와 다른 점이 많았다. 일단 섬세하다.
요즘 한국야구도 일본 못지않은 ‘현미경 야구’를 구사한다. 하지만, 당시는 일본야구의 ‘데이터 야구’는 우리에겐 생소한 존재였다.(고개를 끄덕이며) 하기야. 하지만, 역시 야구도 사람이 하는 거다. 일본 선수들 가운데서도 데이터 안 보는 이들이 있다. 한번은 전력분석 미팅을 하는데 동료 투수가 날 ‘툭’ 치더니 “삼손, 저게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어?” 했다. “글쎄”라고 했더니 “그렇지. 도통 뭔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지? 나도 그래” 하면서 웃었다.
당시 주니치엔 한국야구팬들에게도 낯익은 이들이 많이 있었다. 호시노 감독은 어땠나.호시노? 진짜 열혈남아다. 주니치가 나고야 돔 이전 나고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쓸 때까지만 해도 선수들이 불성실한 경기를 하면 호시노 감독이 펀치를 날렸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있을 땐 선수들 때리는 건 못 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은 많이 봤다(웃음).
지금은 시카고 커브스에서 뛰는 후쿠도메 고스케는 당신의 입단 동기다.당시 후쿠도메는 아직 신인 티가 많이 나는 선수였다. 타격이면 타격, 수비면 수비 어느 하나 구단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후쿠도메가 데뷔 초 유격수를 봤는데 어깨가 약해 1루 송구가 원활하지 않았다. 우익수를 맡으면 잘하겠지 했지만, 이번엔 만세를 부르게 일쑤였다. 그랬던 선수가 지금은 천문학적인 돈을 받고 빅리그에 입성했으니(웃음).
일본에서 뛰는 한국선수들을 만나면 꼭 빼놓지 않는 말이 있다. “일본야구팬들은 야구를 신처럼 대한다”고.나도 처음에는 일본야구팬들의 그런 자세를 보며 ‘어, 왜들 이러지’할 정도로 부담스러워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아, 일본야구팬들이 이렇게 야구를 대하니까 일본야구가 존중받고 선수들이 프로의식을 갖고 뛰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씁쓸한 표정으로) 일본은 다른 건 모르겠지만, 누가 올라가면 최소한 그걸 보고 배는 아파할지 몰라도 끌어내리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1999년 전반기는 선발로, 후반기부터는 중간계투로 뛰며 센트럴리그 주니치 돌풍의 주역이 됐다.
지금은 주니치의 확실한 마무리지만 당시 이와세 히토키는 중간계투 가운데 가장 먼저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였다. 그때도 잘 던졌느냐고? 누구? 이와세? 그럼 최고였지. 하지만, 그런 이와세가 6회에 오를 정도면 당시 주니치 불펜이 얼마나 강했는지 상상이 될 거다. 당신도 기억하리라 본다. (눈을 가늘게 뜨며) 6회 이와세가 나오면 7회는 오치아이 에이지, 8회 나 그리고 9회를 선동열(현 삼성감독) 선배가 매조지 했다. 참, 그때 정말 주니치 마운드는 최강이었다.
주니치의 노장투수 야마모토는 한국선수들과 가장
절친한 선수였다
‘나고야 3총사’의 맹활약으로 1998시즌 센트럴리그 우승은 주니치의 차지였다. 기쁨을 나누기에도 모자를 시간. 갑자기 당신의 미국진출 소식이 들렸다.센트럴리그 우승을 확정한 날. 도쿄 진구 구장에서 우승파티를 했다. 물론 우리 ‘3총사’끼리 축하주를 한잔 더 했고. 호텔에 들어오는데 동이 트고 있었다. 그때 문득 LG에 있을 때 플로리다 교육리그를 다녀왔던 선수들이 미국야구를 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그 발표들을 들으며 어떤 다짐을 했는지 떠올렸다. (담담한 어조로) 아마 호텔에 누워 그런 생각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아, 내가 일본에서 할 건 다 했구나. 이제 미국에 가야지. 그동안 미뤘던 나와의 약속을 지켜야지.’ 그 길로 벌떡 일어나 친하게 지낸 기자 형한테 전화했다.
상의하려고?아니. “형, 저 미국 갑니다”라고 했다. 새벽에 잘 자고 있던 그 기자 형이 “헉! 뭐? 뭐라고?” 하면서 놀라서 깼지 뭔가(웃음)
“이제는 미국행이다.”
주니치에선 선동열의 은퇴를 대비해 당신을 ‘포스트 선동열’로 지목해 2000시즌부터 마무리를 맡기려 했다. 시즌 중에도 당신에게 마무리를 맡기곤 했다.
내가 1998시즌에 마무리를 한 건 ‘마무리 수업’이라기보다 동열이 형이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는 바람에 잠시 대신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엔 항상 동열이 형이 나왔다. 주니치에서 날 ‘포스트 선동열’로 준비했느냐? 글쎄. 구단이 어떤 생각을 했느냐까지는 잘 모르겠다.
미국행을 선언했을 때 주니치의 반응은 어땠나.
지금 생각해도 고맙고 미안하다. 어쩌면 주니치 입장에선 내가 잔칫날에 찬물 끼얹은 셈이 아니었겠나. 그래도 주니치 쪽에서는 나를 이해해주고 내 마음을 돌리려 무진 애를 썼다. 이토 오사무 주니치 대표가 3번이나 날 만나 “삼손, 당신의 꿈은 알았는데 너무 꿈만 좇지 마라. 현실을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다.”라고 말하며 설득했다.
호시노 감독도 미국행을 말렸나.
그렇지 않았다. “삼손, 좋아. 남자는 꿈을 가져야 해”하면서 격려해줬다.
그해 다이에 호크스와의 일본시리즈에서 당시 객관적인 전력은 주니치가 앞선다는 평이 많았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일본시리즈에 임하는 주니치 팀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뭐랄까. 시범경기에 나서는 느낌이랄까. 일본은 일본시리즈보다 리그우승을 더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다. 가뜩이나 주니치의 우승은 11년 만의 쾌거였다. 그래서인지 일본시리즈가 시작될 때는 이미 잔치는 끝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일본시리즈는 보너스 게임 같은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만약 주니치가 우승했다면 미국으로 출발하는 당신의 어깨가 한결 가벼웠을 텐데.
그랬을 거다. 지금도 아쉬운 건 그해 일본시리즈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정규시즌이 끝나고 일본시리즈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일본시리즈를 대비해 캠프에서 공을 던지며 컨디션을 조절하고 있는데 갑자기 근육통이 찾아왔다.
일본시리즈를 앞두고 근육통이라.
일본시리즈 1차전을 열리는 후쿠오카에 도착해 이틀 동안 주사를 맞는 등 별 수를 다 썼지만, 부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3차전이 열리는 나고야에 왔을 땐 거의 팔을 들 수 없는 상태까지 갔다. (한숨을 내쉬며) 아쉽게도 그 때문에 일본시리즈 마운드에 오르지도, 팀에 도움이 되지도 못했다.
‘꿈의 구장’을 달리는 야생마
일본시리즈가 끝난 다음 본격적인 미국진출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는 1997년 때와는 달리 매우 순조롭게 진행됐다.‘IMG’라는 세계적인 스포츠매니지먼트사와 에이전트 계약을 맺은 게 주효했다. 그쪽에서 알아서 미국행을 진행한 까닭에 별 어려움 없이 미국진출을 진행할 수 있었다. 게다가 주니치에서 나올 때는 FA(자유계약선수) 신분이었기에 포스팅을 거칠 필요가 없었다.
2000년 2월 보스턴과 2년간 335만 달러(옵션 보너스 제외)를 받는 조건으로 미국진출에 성공했다. 공교롭게도 결국 둥지는 보스턴에 튼 셈인데.원래는 시애틀과도 이야기가 오갔다. 하지만, 에이전트들은 원래 몸값을 높게 부르는 곳과 계약을 주선하지 않나. 사실 난 어느 팀에 가든 상관없었다.
미 메이저리그 명문구단에 입단한 감정이 어땠을까 싶다.만약 지금 입단했다면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했겠지. 하지만, 난 당시 그저 하루하루 온 힘을 다하는 선수였고 무엇보다 당시 보스턴은 월드시리즈 우승을 갈망하는 팀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당시 ‘밤비노의 저주’라는 것 때문에 보스턴이 몇 십 년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못한다고 알려졌을 때 아닌가.
보스턴 스프링캠프에 참가하는 마음이 묘했을 것 같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미 메이저리그 그라운드 아닌가.보스턴 스프링캠프는 2년 내내 참가했다. 그 통에 매니 라미레스, 페드로 마르티네스 등 이름난 선수들과 함께 뛰었지.
당시 보스턴 구성원들이 쟁쟁했다.페드로, 매니를 제외하고도 노마 가르시아파라, 데릭 로 등 좋은 선수들이 많았다. 당시 보스턴에서 함께 뛰던 (김)선우가 무척 잘 던졌다. 하지만 원체 투수진이 좋다 보니 빅리그 출전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았다. 뭐, 로드 벡이 중간에서 뛸 정도였다면 말 다 한 거 아니냐.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의 이상훈
그런 막강한 투수진을 뚫고 2000년 6월 30일(한국시간) 볼티모어 오리올스전에 한국인 선수로는 박찬호, 조진호, 김병현에 이어 4번째, 한국프로야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는 쾌거를 달성한다. 쾌거…. (한참 생각하다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지금부터 내 이야기를 잘 들어봐라.
으음.메이저리그에는 ‘3일 빅리그’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3일만 빅리그를 경험하고 다시 마이너리그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마침 그때 페드로가 어깨부상으로 DL(Disabled List, 부상자명단)에 오르며 마이너리그에서 한 명이 올라올 기회가 생겼다. 당연히 내가 뛰던 트리플A 포터킷 레드삭스에 소식이 전해졌다. 그런데 투수들이 하나같이 영 빅리그에 가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왜냐? 어차피 ‘3일 빅리그’니까.
듣고 보니 그렇겠다.그러다 어디로 원정경기를 갔다. 마이너리그에서 원정경기를 가려면 새벽 5시에 일어나 일반인처럼 보딩패스 다 거친 뒤 몇 번이고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어쨌든 원정지에 도착해서 이제 좀 쉬려고 하는데 포터킷 관계자가 나보고 “Hey, Sang Lee. You Big League! (어이, 생 리. 메이저리그로 가라)”라고 하지 뭔가.
와, 날아갈 듯이 기뻤겠다. 좋긴. 어차피 ‘3일 빅리그’인데. 마침 승격소식을 들은 날 경기가 야간경기라 잠을 거의 못 잔 상태로 새벽에 일어나 아침 7시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에 갔다. 거기서 한 시간 정도 기다리다가 시카고 가는 비행기를 타고, 시카고에서 한 시간 정도 다시 기다리다가 보스턴행 비행기로 갈아탔다. 보스턴 홈경기가 오후 7시부터 시작되는데 우여곡절 끝에 펜웨이파크에 도착하고 시계를 보니까 7시 30분이었다.
무척 피곤했겠다.클럽하우스에 들어가 너무 피곤해서 샤워라도 해야겠다 싶어 팀 관계자에게 잠시 씻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더니 대뜸 고개를 젓지 뭔가.
왜?지미 윌리엄스 보스턴 감독이 내 투구를 보고 싶어 하니까 어서 옷 갈아입고 몸을 풀라는 게 이유였다.
샤워를 몇 시간 동안 하는 것도 아니고.내 말이. 다시 “샤워, 플리즈”했는데도 단호히 “노우”하더라. 그래 유니폼을 갈아입고 더그아웃에 갔다. 노마, 패드로 등 뭐 보스턴 선수들은 죄다 있기에 노마 보고는 “헤이, 노마”하고 인사하고 피디(페드로의 애칭)에게도 “헤이, 프랜드”했더니 피디가 다릴 벌리고 엉덩이를 흔들면서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는 거다(웃음). 그래 나도 “오케이, 오케이” 해줬지. 아, 그런데 이거 비행기를 두 번이나 탔으니 얼마나 피곤하고 어지러워. 어디 가서 쉬고 싶은데 나보곤 불펜으로 가라지. 졸래졸래 불펜으로 가려는데 뒤에서 누가 날 잡더라고.
뒤에서? 아니 어째서?(고갤 끄덕이며) “지금 1아웃이니까 3아웃 되면 가라”고(웃음).
아….3아웃 돼서 졸래졸래 불펜으로 가는데 이번에도 뒤에서 날 부르고 난리가 난 거야.
이번엔 왜?지금 가는 곳은 우리 불펜이 아니라 볼티모어 불펜이라고. 팬웨이파크 우익수 폴대 옆에 홈과 원정 불펜이 같이 붙어 있기에 헷갈릴 수밖에 없다(웃음).
이런.4회인가에 불펜으로 가서 2이닝 정도 경기를 잘 봤다. 그러다 7회 말이 끝난 다음 불펜 전화벨이 울렸다. 속으로 ‘설마 내가 나갈까?’ 했는데 설마가 사람 잡았다. (혀를 차며) 이야, 그날 비행기는 두 번 탔지, 비행기 기다린 시간만도 엄청나지. 그런데 날 호출하더라고.
눈도장을 확실히 찍어야 하는 순간인데, 빅리그 데뷔전치고는 환경이 너무 가혹했다.그러게 말이다. 다음 타자 제프 코나인에게 좌월 솔로 홈런을 맞고 다음 타자에게도 안타를 허용하지 않았나. 그래도 경기가 끝나고 이제는 호텔에서 푹 쉴 수 있다는 생각에 그나마 마음이 진정됐다. 그런데.
그런데?보스턴 선수들이 갑자기 양복을 입기 시작하는 거다. ‘어, 이거 뭐지’ 하는 순간에 팀 관계자가 “시카고 원정경기 가야 하니까 바로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알고 보니 그날이 전반기 보스턴의 마지막의 홈경기였다. 팀 관계자에 “에이, 나 지금 시카고에서 오는 길인데” 할 수도 없고(웃음).
하루에 비행기를 3번 타게 됐다.그래도 시카고 호텔에 도착하니까 독방이더라. 마이너리그는 보통 2명이 한방을 쓰는데 얼마나 편하냐. 다음날 일어나 포수 제이슨 베리텍과 함께 경기장에 왔는데 윌리엄스 감독이 날 부르더니….
“마이너리그로 가라”든가?어쩌겠나. 다시 포터켓에 오니까 선수들이 배를 잡고 놀리고(웃음).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한참을 혼자 웃다가 웃음을 ‘뚝’ 그치며) 도착하자마자 다시 비행기 타고 원정경기를 떠났다는 거 아니냐.
한여름밤의 꿈 같던 빅리그
이상훈이 외국에 간 동안 LG팬들은 그를 그리워했다
‘3일 빅리그’로 다시 마이너리그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해 메이저리그에서 11이닝 4실점으로 평균자책점 3.06을 기록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성적인데.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그걸 판단하는 건 구단의 몫 아니겠나. 어쩌면 (김)병현이 말이 맞는지 모른다.
무슨?“메이저리그는 몸값이 비싼 선수와 백인 그리고 빅리그 경험자들을 우선해 기용한다”는….
아까 페드로 이야기를 잠시 했는데 실제로 그는 어떤 선수인가.페드로? 완전 우주인이지(웃음).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메이저리그에 로저 클레먼스 같은 유형의 투수는 많다. 물론 클레멘스가 정말 대단한 투수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같은 투수 처지에서 볼 때 클레멘스보단 페드로 같은 투수가 확실히 희귀하다.
어떤 면에서 희귀하다는 뜻인가.페드로는 TV에서 보기에도 그렇지만 직접 뒤에서, 옆에서 보면 ‘세상에 이렇게 공이 가는 선수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이건 뭐 공이 뱀이야 뱀. 홈플레이트 앞에서 공이 ‘막’ 꿈틀거린다. 게다가 마운드에서의 깡다구도 남다르다. 완전 독종이다. 독종(웃음).
당신도 한국 최고의 왼손투수였다. 일본에서도 검증된.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난 평범한 투수”라는 것이다. 이건 겸손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껏 난 한 번도 자신을 ‘최고’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타자를 상대할 때도 ‘그래 칠 테면 쳐 봐!’ 하는 식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마운드에서 당신은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 투구를 했다. 게다가 보기엔 항상 ‘최고’ 다란 자세로 마운드를 지배했다. 물론 ‘최고’라는 생각은 늘 했다. 하지만, 그건 내 투구가 ‘최고’라는 게 아니라 ‘최고의 야수’들과 함께 한다는 뜻이었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는데.
2003년 LG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뭔가.마무리 투수가 언제 가장 희열을 느끼는지 아나.
세이브에 성공했을 때 아니겠나.구체적으로 말하면 잠실구장 3만 관중 앞에서, 그것도 9회 1, 2점 상황에 등판해 통쾌하게 마무리를 지을 때. 위기를 자초했어도 그 위기를 스스로 잘 막을 때. 실책과 실책이 이어지며 경기가 꼬이는데도 오히려 야수를 감싸주고 그 상황을 막을 때. 그럴 때 마무리 투수는 희열을 느낀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일부러라도 희열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는 거다. 그것도 혼자만의 희열이 아니라 팀원 전체의 희열을. 그렇다면, 그 희열을 느끼려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나.
말해달라.준비다. 선수는 자신의 플레이를 최상으로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 정신 각오만 대단하고 준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찾아오는 건 부상뿐이다. 진정한 프로는 부상당하지 않고 자기 것을 계속 이어가는 선수다. (비장한 표정으로) 팬들은 LG 선수들에게 그렇게 물어볼지 모른다. “당신들은 온 힘을 다하고 있느냐”고.
2001시즌을 끝으로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LG로 돌아왔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 바란다. 그러니까.
<전설이 된 그라운드의 야생마, LG 투수 이상훈> PLUS 편을 기대해주십시오. 2002년 LG의 한국시리즈행을 이끌었던 이상훈이 2003년 어째서 LG를 떠나 SK에서 은퇴해야했는지가 이어집니다.
첫댓글 아.. 이상훈 ㅠㅠ
삼손 형님...그립습니다...ㅠㅠ 물론 ‘최고’라는 생각은 늘 했다. 하지만, 그건 내 투구가 ‘최고’라는 게 아니라 ‘최고의 야수’들과 함께 한다는 뜻...정말 그립습니다...캬~~~
아씨... 눈물 날라고 해요... ㅠㅠㅠㅠㅠㅠㅠ
휴....
진짜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