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서 시인
전남 해남 출생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2019년 《시산맥》 등단 .제4회 시산맥 창작기금 수혜
시집 『야간개장 동물원』
바이킹의 감정
정점과 정점 사이 공중 놀이가 있다 머물 수도 내릴
수 없는 즐거운 한때만 있을 뿐인데 하필 산 위에 배
를 만들어 놓고 요람을 기억하게 할까
한번쯤 배로 하늘을 비행하고 싶다고 산경을 향해
울며 웃으며 노를 저어 본다 목선木船은 공기의 파도를
벗어나 하늘에 닿으려 하고 움츠러진 뱃속은 내장끼
리 움켜쥔다
산 중턱을 넘어간 멀미 나는 목선, 정점에서 울렁거
렸던 때가 고작 놀이의 지난날이었다니, 입장권을 손
에 쥐고 행성 혹은 행선지를 만날 것도 같다 잠깐의
공중 왕복 사이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는 어디까지 흘
러갔을까
운행運行이 있고, 머리카락이 날리고, 연인의 입맞춤
이 있고, 흐린 하늘에 구름기형이 한창이다 폐장시간
을 향해 밀려 나가는 풍선들이 파랗다
오래전 어느 행성에서 뚝 떨어진 이후 파장의 시간
처럼 이 놀이의 시간 밖으로 밀려 나가는 것은 아닌지
즐거운 고통이 온통 빠져나간다 방전된 몸으로 또
어느 파도의 정점을 향해 서 있다는 생각이다 양팔로
노를 젓고 그저 잠깐의 환호에 허우적거렸고, 난폭한
조타수도 없는 어지러운 배 한 척에서 방금 내렸을 뿐
인데 멀미의 뒤끝은 양수 속에서 놀았던 나를 닮은 놀
이공원이다
낱말 퍼즐게임
우리 두 사람은 H열 좌석에 앉았다 그도 나도 한韓이
나 홍洪이 아니다 좌석의 엉덩이 자국은 이름을 기억하
지 않으니까
나의 첫 낱말풀이는 G열 왼쪽
첫 번째 칸에서 시작한다
저기 D열의 가운데 남자는 머리가 솟았으니 고高, 뒤
쪽 F열의 남자는 등받이를 발로 쳐대니 굽은 다리 장張
이 분명하다 중간에 낀 E열의 여자는 팝콘을 한 주먹
씩 입속에 넣으니 권拳인데, 주먹이 가득 찼다는 뜻일까
아니면 주먹을 부른다는 뜻일까 두 갈래로 땋은 머리
B열의 왼쪽과 투블럭컷 머리 오른쪽과 입맞춤을 하니
호好가 맞다
눈동자를 굴리는 스크린은 우리 눈을 구슬처럼 가지
고 논다 일방적으로 이렇게 많은 말을 한마디 대꾸도
없이 들은 적 없다
누군가의 머리와 나의 꼬리가 만난다 각각 생각이
다른 세로의 첫 글자와 가로의 첫 글자는 닮았지만 끝
내 연결 안 되는 좌석이 있다
비어 있는 번호, 도무지 풀리지 않는 퍼즐 판, 빈 의
자에 구름처럼 가볍게 기대고 싶을 때가 있지만 한 조
각 퍼즐 속에 꽉 끼워져야 한다
가로와 세로로 이어지는 오후의 낱말을 따라가다 보
면 비상구는 이쪽입니다 사람들이 좌석번호를 지우고
쏟아져 나온다
야간개장 동물원
밤하늘엔 야생 동물들이 갇혀 있다
다시는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을 것처럼 높이 걸려
있다
먹이사슬이 없어 푸른 불꽃을 먹고
처녀 사육사가 별의 촛불을 하나씩 켜면
동물원 야간개장을 시작한다
낮에는 잠을 자다가
밤에만 나타나는 동물들
계절마다 우리 밖으로 튀어나온 숲
동물들이 나란히 거리 한복판을 우르르 지나간다
가로수에서 별의 열매를 따 먹는다
그 열매에서 사자와 독수리, 황소와 전갈을 낳는다
양 떼를 몰고 가는 유목인이 치는 별점
대륙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별자리들의 틈을 메운다
동물을 숭배하는 습관이 있었다
얼굴을 핥거나 밭을 갈지는 않지만 좌표 없는 우리와
달이 열두 개 떠 있는 별자리에서
동물 울음소리가 들린다
지상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누구도 키우지 않는 동물 한 마리
망원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별 하나에 끈을 묶고 사는 동물
서로 흩어져서 환하게 밝아오면
처녀 사육사가 듣는 사방 문 닫는 소리
야간개장 자유이용권을 목에 걸고
활활 타오르며 늙어가는 사파리에 간다
우크라이나
북반구의 찬 기류 속으로 수많은 길들이 생기고 있다
목적지 없는 발자국들은 양손의 짐보다 몸이 더 무
겁고 불꽃으로 날아온 공중좌표 따라 숨소리들이 힘
없이 부서져 내린다
곡식의 저장창고를 비워가는 사람들
빈 밭의 낙곡들은 입을 길게 내밀고 하늘로 날아오
르는 새들을 따라가고 싶을 것이다
살기 위해 떠나는 새들은 발자국이 없다
씨앗보다 총알이 더 많이 박힌 땅
입을 굳게 다문 곡식들은 새날의 종자가 될 수 있을까
깃털이 큰 새들은 평온한 땅을 찾아갈 것이고
깃털이 작은 새는 봄날을 기다릴 것이다
싸우는 자와 떠나는 자의 슬픔의 각은 같다
지상에서 한꺼번에 치른 장례들
추위가 몰아치면 달의 그늘에서 죽은 새의 모습이
보인다
아직 따뜻한 묘지들 먼 북반구 쪽의 하늘은 잿빛
날개의 끝을 따라가다 보면 그곳에는 아픈 식탁만
가득하다
오늘 우리의 저녁이 저들의 폐허 위에서 피어나는
것이라면
지상의 온기를 찾아 날아가는 새들은 어디쯤에서 쉬
고 있을까
사이다병
풀숲에 버려진 은하, 텅 비어 있다
몇 개의 별이 떨어져 나갔다
유일論은 김이 다 빠졌고 다중論은 짜릿하다
톡톡 터지던 기포들은 위성이었다
사라진 별은 돌아오지 않지만, 어느 은하는 날카로
운 문명들이 주인이고, 다른 별에서는 유리병 숲을 만
들어 간다
병뚜껑 열자마자 빈 병의 은하계
빅뱅 이후 쏟아지던 기포들은 다 어디로 갔나
누군가 마시고 던지지 않는 한, 별들은 그 자리에 있
을 테지만 깨진 목 부분으로 지구의 귀퉁이가 흘러 들
어간다 하늘의 별들이 지상에서 터지는 소리, 푸른 빈
병은 수많은 별로 나누어지고 다시 태어난다
녹슨 병따개 하나로 죽은 별들이 재채기한다
불꽃처럼 사방에 흩어지고
홀씨처럼 빈 병들을 옮겨 비행하고 싶은
위태로운 놀이터
기포 속 심장 하나 삼켰을 뿐인데
먼 곳에서 물이 있는 별을 발견했다고 소동이 일어
난다
실을 키우는 몸통이 있다는 사실
모든 저녁은 목초지에서 돌아온다
빈방 가득 빛이 없는 연료들
이불 속에 가득 찬 실뭉치에
따듯한 말이 들어 있긴 할까
양 떼는 웅성거리는 밤에 자라서
등과 불룩한 배는 누구의 몸 치수를 재는지
길게 풀어져 나온 실뭉치들로
엉킨 저녁 페이지를 넘긴다
그때 서로의 얼굴에서 터진 솔기 같은 표정이 적힌다
바깥과 안쪽 모서리에 상처가 난다
저녁을 다 감기 전에는 아침이 오지 않을 것이고
풀밭에 떠도는 말을 양 떼가 몰고 다닌다
두 번 다시 감을 수 없는 서로에게 묶인 실타래
양 떼의 울음으로 실은 풀어지고 초식동물의 잠은
감긴다
입구를 흔들면 저녁이 짧아진 양 떼들이
우르르 몰려 나갈 출구를 찾는다
양의 털실로 밤의 모서리를 접는다
아메리카노
물결이 만든 음악을 아시나요
가난을 감추기 위해 검은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에티
오피아
은밀한 신비감으로 뜨겁게 흔들고 나면
가야 할 원점을 잠시 잃는 도시가 있어요
북위 23.5도에서 남위 25.5도까지 햇빛이 꿈틀거려요
커피나무에서 햇볕에 그을린 아이들 손이 자라고
트리니티 대성당엔 아이들이 두 손 모으고 있어요
하루를 하루로 풀기 위해 아침을 마시지만
중독은 개기일식처럼 순간의 어둠이에요
수면을 깨뜨리고 길을 내어드린 몸속
되돌아올 수 없는 유일한 통로가
중독의 은신처이니까요
커피 속 캄캄하게
숨은 말들이 밖으로 한 모금씩 빠져나오면
그 많던 회오리도 한순간에 침묵하지요
복종은 나를 잊어야 완수하는 것
이 어둠의 끝은 쓴맛이 끝난 자리
이른 아침 때론 늦은 오후에 마시면
영혼까지 지배하는 이 힘을 어떻게 아이들은 이해할
까요
내 안으로 칩거할 수밖에 없는 뜨거운 감정
저항이 없는 두려운 중독을 에티오피아에서 퍼뜨렸
을까요
까만 어둠만 마셨을 뿐인데 밤새 하얘지는
아침의 기분은 아메리카노입니까
두 손이 나무 끝까지 자란 아이들이 잘 지내는지
아침마다 커피로 쓰디쓴 안부를 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