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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의 시선] ‘이게 나다, DNA’ 주신 조상님 감사합니다
출처 THEAsiaN : http://kor.theasian.asia/archives/344493
“(필자의) 먼 조상은 첩첩산중 영월에 살던 중인계급이었다. 그는 어느 날 버려진 시신을 발견했다. 그 시신은 삼촌에게 살해당한 왕이라고 했다. 조선조 단종이었다. 모두들 눈치를 보며 그 시신을 방치했다. 그걸 건드리는 순간 역적으로 간주되는 시대였다. 조상은 아들과 함께 단종을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주고 영혼을 위로해 주었다. 역적이 되는 순간이었다.”(사진은 영월군 영흥리 엄흥도 정려각).
자라면서 나는 위축 되고 주눅든 적이 많았다. 부자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와는 다른 별종의 인간 같았다. 어려서 공부하고 싶었던 어머니는 대학 나온 여자들만 보면 부러워하면서 움츠러들었다. 회사원인 아버지도 삶에 찌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어쩌면 밤에 마시는 소주잔에 눈물을 타서 마셨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상하게 뒤틀린 성격이 형성됐던 것 같다. 나는 부조리한 현실과 마주쳤을 때 인내하고 속으로 삭이지 못했다. 불만을 터뜨리고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 덤벼들기도 했다. 수없이 매도 자초했다. 나이 들어 돌이켜 보면 참 미숙하고 얼굴이 붉어지는 어리석은 짓이 많았다.
20대 중반 육군 중위 때 장교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다가 사고를 친 적이 있다. 양손을 허리에 얹은 대령이 식당 문 앞에서 장교들을 엄한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그 눈에서 나오는 레이저를 맞은 초급장교들이 기가 죽어 슬금슬금 피해 가고 있었다. 그 대령은 사령부 내의 군기를 잡는 호랑이 같은 인사참모였다. 그와 눈길이 부딪치면 눈을 깔아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서서 그 눈빛을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나는 눈빛으로 “나는 나다. 너는 뭐냐”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중위라는 계급은 가벼웠다. 그러나 나는 계급이 낮으면 낮은 대로 당당하고 싶었다. 대령의 눈빛이 ‘너 어디 한번 두고 보자’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날 오후 사령부의 전 장교와 하사관은 단독군장 하고 집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나 한 사람 때문에 전체가 피곤해진 것이다. 괜한 오기를 부려 한동안 고생 좀 했다.
몇년 후 그 부대에 있으면서 또 다른 사고를 쳤다. 사령부 안에는 잘 손질된 넓은 잔디밭과 테니스장이 있었다. 병사들의 땀 흘린 수고로 만들어진 시설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군단장 한 사람만을 위해 그 잘 조성된 공원이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일반 장교나 병사 그 누구도 잔디밭 벤치에 앉아서 쉬는 걸 보지 못했다. 테니스장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여름날 오후 퇴근 시간이 됐다. 육군 대위인 나는 테니스 채를 들고 테니스장으로 갔다. 군단장이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수행 비서실장과 전속부관이 군단장 옆에 긴장한 채 서 있었다. 나는 데리고 간 중위 계급장의 법무장교와 옆 코트에서 테니스를 치기 시작했다. 굳이 그 자리에서 운동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런 시설들을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 행동이었다.
군단장 수행 비서실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가지고 있는 수첩에 내가 적히는 느낌이었다. 그 다음 날이었다. 전 장교의 테니스 금지명령이 내려왔다. 나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나는 부대가 왜 장군 한 사람만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업무 외에는 장군도 귀족이 아니라 한 사람의 자연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없으면 없는 대로 못 배웠으면 못 배운 대로 못생겼으면 못생긴 대로 ‘이게 나다’ 하고 당당하게 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나 같은 존재는 세상에서 말하는 출세 내지 성공은 하기 힘들 것이라는 걸 일찍 깨달았다. 내 주제를 알았다고 할까. 하나님은 묘한 것 같다. 내 의지와는 달리 이상한 자리에 나를 데려다 놓기도 하고 보호해 주기도 했다.
30대 중반 대통령 직속기구에서 일하게 됐다. 내가 있는 부서를 만든 사람은 권력 실세였다. 모두들 그를 두려워하고 그에게 아부하기도 했다. 그곳 사람들은 야당기질인 내가 있을 곳이 아닌데 이상하다고 했다. 나도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메마르고 무거운 공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그곳에서 근무하는 여직원 몇 명이 내게 와서 하소연 했다.
권력 실세인 분이 성추행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일단 사실을 확인했다. 여직원들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나는 한밤중에 권력 실세에게 올리는 글을 썼다. 원고지 위에 그의 행태를 자필로 낱낱이 썼다. 권력을 가지고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 글을 청와대로 보냈다. 이틀 후 위에서 당장 나를 파면하라고 명령이 내려왔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성추행 한 그가 파면당해야지 왜 내가 나가야 하나 생각하고 의아해 했다.
나는 사회 적응력이 없는 바보였다. 세상에 적응하고 잘해보려고 해도 되지 않았다. 남은 나 보고 튀는 행동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의 입장에서는 그런 건 아니었다. 어쩌면 그런 유전자를 가진 조상탓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먼 조상은 첩첩산중 영월에 살던 중인계급이었다. 그는 어느 날 버려진 시신을 발견했다. 그 시신은 삼촌에게 살해당한 왕이라고 했다. 조선조 단종이었다. 모두들 눈치를 보며 그 시신을 방치했다. 그걸 건드리는 순간 역적으로 간주되는 시대였다.
조상은 아들과 함께 단종을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주고 영혼을 위로해 주었다. 역적이 되는 순간이었다. 엄한 처벌이 다가오고 있었다. 조상은 여덟자로 된 간단한 글을 써 왕실에 보냈다.
‘선한 일을 했다고 처벌한다면 달게 받겠소. 해보시오’
조상은 가족을 데리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2백년을 숨어 살았다. 나는 조상으로 부터 ‘이게 나다’라는 정신을 받은 것 같다. 없어도 못나도 배우지 못해도 당당하게 살라는 거 아닐까.
엄상익 변호사, 칼럼니스트
빛명상
복을 주는 조상,
화를 주는 조상
죽은 사람의 마음은 단지 육체가 없을 뿐 산 사람과 똑같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으면 감사를 표하고 답례를 한다. 반면 괴롭거나 힘이 들 때는 가까운 가족에게 그 고통을 호소하고 도움을 달라고 청한다. 죽은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돌아가신 선조가 밝고 좋은 곳으로 갔다면 후손을 도와 잘되게 도와준다. 흔히들 ‘조상이 돌봤다’는 표현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반면 그 마음이 어둡고 불편하다면 그 고통을 살아 있는 후손들에게 전달한다. 이런 경우 후손은 알 수 없는 우환이나 어려움, 고난을 겪게 된다. 일이 될 듯 될 듯하다가 이루어지지 않고, 무언가 모를 답답함 혹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고통 받기도 한다.
따라서 나의 뿌리가 되는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비록 돌아가셨지만 이분들과 나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계속 연결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육체가 사라져도 그 안에 담겨 있던 마음은 영원히 죽지 않고 존재한다. 그리고 그 돌아간 마음이 살아 있는 후손들과 계속해서 파장을 주고받는 것이다. 부모의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자식의 마음 또한 편할 수 없고, 자식이 편하지 않은데 부모라고 해서 마음이 좋을 리 없는 이치와 같다. 다시 말해 돌아가신 선조들의 마음은 우리의 현실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에너지를 주고받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뿌리가 건강해야 가지와 잎사귀도 건강하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하고 물질문명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해도 이 근본의 우주 섭리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우리 조상들이 설, 추석과 같은 큰 명절, 그리고 그분의 기일까지 합쳐 최소 일 년에 세 번은 돌아가신 조상을 생각하고 그분들께 감사하는 시간을 갖는 풍습을 만들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요즘 세태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설날과 추석이 지닌 본래의 아름다운 뜻을 잃어버리고 이를 장기 휴가나 해외여행의 기회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입시생을 둔 가정에서는 자녀가 명절을 쇠지 않고 공부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 후손들이 설, 추석은 연중 휴가정도로, 제사는 무의미한 관습 정도로 인식한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후손을 둔 선조는 외롭고 허무한 영혼이 되어 결국 후손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매년 잊지 않고 일 년에 두 번, 설과 추석에 돌아가신 선조들의 마음을 빛(VIIT)으로 정화하는 시간을 가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빛(VIIT)을 받으면 마음이 정화되듯 돌아가신 분들의 마음도 빛(VIIT)을 받으면 밝고 가벼워진다. 그리고 그 결과 그 후손들의 삶 또한 밝고 행복하게 바뀐다. 빛(VIIT)으로 선조들의 마음을 정화하는 과정에서 반짝이는 반딧불과 같은 모습의 선조들의 마음을 보았다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얼굴을 알 수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큰절을 하고 사라지는 꿈, 이전에는 때가 묻어 시커먼 옷을 입고 계시던 분이 이제는 환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나타나시는 꿈을 꾸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을 통해 현실이 바뀐다는 점이다. 뿌리가 건강해지면서 시들었던 잎사귀에도 생기가 도는 것이다. 무언가 모르게 어렵고 풀리지 않던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이유를 알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몸이 건강해지기도 한다. 간절하게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거나 마음이 편안하고 개운해지며, 친척과 가족 간에 화합하는 것도 모두 선조 정화를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혜택이다.
출처 : ‘빛명상’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행복순환의 법칙
초판 1쇄 발행 2009/09/14
2021/06/01 초판 45쇄 P. 222-224
죽은 자와 산자의 주고받음
영적인 존재가 단지 몇몇 특수한 병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우리 모두는 알게 모르게 영 혹은 신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많은 삶들이 이를 모른 채 넘어가지만 짐작하는 것보다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 영적인 존재와의 관계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아왔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고 고통도 기쁨도 없다고들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죽음은 육체와 마음(영혼)이 분리되는 현상인데 육체로부터 벗어난 마음은 일종의 에너지 혹은 파장의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사람은 부모로부터 몸을 얻지만 마음, 즉 영혼은 우주의 근원, ‘빛viit’ 으로부터 온 것이다. 죽음이 일어나고 육체가 땅으로 돌아가면 마음도 원래 온 곳, 마음의 고향, 우주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이다. 그러나 살아서 이를 알지 못하고 마음이 갈 길을 알지 못하면 죽어서도 그 길을 몰라 헤매게 된다. 이것은 아이가 길을 잃고 미아가 되는 것과 같다.
이 미아와 같은 슬픈 마음들을 주위에서 종종 만나게 된다. 대형 교통사고와 같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혹은 젊고 이상이 높았지만 그 뜻을 온전히 펼치지 못하고 억울함을 안고 죽은 마음이 그러하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여학교의 교장으로 계시는 한 회원이 꼭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다며 나를 찾았다. 자신이 부임해 있는 학교에 때 아닌 귀신소동이 일어나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들까지 공포에 떨고 있다는 것이다. 학습 분위기가 엉망이 된 것은 물론 학부모들의 항의도 이만 저만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 귀신 소동의 발단은 도서관이었다. 늦게 자율학습을 하고 돌아가는 아이들 사이에서 언제부터인가 도서관에 귀신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직접 귀신의 모습을 보았다는 목격자에는 당직 선생님 몇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고 그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게 되자 학교 측은 아예 도서관을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학교 운동장 한 켠에 있는 백년 된 커다란 느티나무에서 이상한 울음소리 같은 것이 난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 나무가 바로 마주보이는 기숙사 학생들이 공포에 질려있었다. 밤이 되면 그 소리가 커진다는 이야기에 보다 못한 교장 선생님이 직접 당직으로 남아 지켜보기로 했다.
결국 본의의 귀로 직접 그 소리를 듣게 된 교장 선생님은 문제를 더 이상 쉬쉬 하거나 학생들을 처벌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다 못해 무당을 불러 굿을 해 보았다. 무당은 원한에 맺힌 처녀의 혼령이 붙어 생긴 일이니 크게 굿을 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굿을 해도 그 때만 잠사일 뿐 얼마 지나면 다시 소리가 나고 또 굿을 하는 일이 서너 차례 반복되었다. 그것도 새로 굿을 할 때는 이전보다 더 크고 성대하게 해주어야 했다. 견디다 못해 나무를 베어버리기로 했는데 나무를 베고 난 둥치에서 여전히 소리가 계속 난다는 것이다.
살아서 풀지 못한 일오 한이 맺혀 죽은 자의 파장이 자신의 아픔을 호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직접 그 귀신이 나타났다는 느티나무 그루터기와 도서관을 찾아가 우주의 에너지 초광력을 보냈다. 이 빛(VIIT)'을 받아 마음의 응어리를 풀고 원래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더 이상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주변의 에너지를 정화해야했었기에 작은 광력씰 하나를 붙여주고 돌아왔다. 광력씰은 한동안 ‘빛(VIIT)’과 교류하는 안테나 역할을 하여 나쁜 파장이 침입하는 것을 물리치는 방패막이 역할을 할 것이었다. 한동안 학생들을 괴롭혔던 여고괴담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학교의 여학생들이 고마움의 인사로 한가득 몰려와 내게 사인을 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잠시 머쓱했던 기억이 난다.
또 한 번은 낙태로 인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하고 사라진 태아 영가가 그 어머니의 딸에게 붙어 크게 괴롭히는 경우를 보았다. 어린 영가를 향해 ‘너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 어서 빛을 따라 가거라’ 하였더니 징징거리며 떼를 쓰기도 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알아달라며 울고 보채면서 끈질기게 버티다가 결국 떠났다. 이러한 어린 영가들의 억울함은 가장 한스럽게 들려온다. 제대로 한 번 태어나 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낙태된 태아들의 영들이 보내는 파장이 한데 뭉쳐 괴질을 일으키고 세상에 어려움을 더하고 있음을 가끔 명상 중에 느낄 때가 있다.
이처럼 죽어서도 자신이 돌아갈 고향으로 갈 줄 모르고 한과 집착으로 고통받는 마음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며 평소 자신과 가까웠던 사람 혹은 파장이 맞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한다. 그러나 육체가 없고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원인 모를 우환, 관재구설수, 가족 간의 불화, 비명황사와도 같이 산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위령을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산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달래듯, 죽은 사람의 마음도 본래의 맑고 밝은 모습을 찾아 우주의 근원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또한 위령을 통해 산 사람의 삶이 죽은 자의 마음으로 인해 탁해지거나 불행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위령은 누군가에게 배워서, 혹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닌, 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이기에 하는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가족을 돌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위령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문화, 종교, 풍습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행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제사 혹은 추석, 설날과 같은 명절도 죽은 자들을 기리고 생각하며 그 분들의 마음을 위해 우리의 정성과 마음을 전하기 위해 생긴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위령의 의미는 이 과정을 통해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경천(敬天)과 겸손의 마음을 되새기는 것이다. 조상을 생각하며 그 분들의 마음을 위해 진심을 보내는 것은 현실 속에서 감사와 겸손의 마음을 갖고 주어진 삶을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다짐과도 같다.
처음 이 ‘빛(VIIT)’ 을 사람들에게 전할 때에는 당장 눈앞에 닥친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안타까워 단번에 ‘빛(VIIT)’ 의 에너지를 통해 영의 파장을 쫒아버리거나 없애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순간의 고통만 수그러들게 할 뿐 결국은 교만한 마음을 키워주어 본연의 순수한 마음을 보는 데는 방해가 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위령을 하는 사람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마음에 대한 관조와 반성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위령은 단순히 잘 먹고 잘 살기위해, 혹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하는 의식이 아닌, 내 마음을 돌보는 과정, 순수의 마음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이 죽고 나면 자신이 살아서 배운 대로, 생각한 바대로 간다. 죽어서 천당에 간다고 생각한 사람은 천당으로, 극락에 간다고 배운 사람은 극락으로, 그것도 아니라면 무엇이든 자신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바대로 그 생각의 창조물 혹은 에너지의 응집체를 향해 갈 것이다. 그러나 그곳을 ‘빛(VIIT)’ 이라 할 수 없으며 다만 본래의 근원을 향해 가는 한 단계로 볼 수 있다. ‘빛(VIIT)’은 있는 그대로 이며 어떠한 관념이나 생각에 묶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민족과 종교와 국가를 초월하고 나와 남을 뛰어 넘는다. 그저 해가 저물면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듯 내가 원래 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죽은 이후의 세계를 생각하는 것은 종교적 · 철학적 · 사고 혹은 정신세계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하루하루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삶을 위해서임을 강조하고 싶다. 즉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우리의 실존을 위해 이 문제를 새겨본다는 뜻이다.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으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가는데 있어 이 죽음이라는 필연의 사건이 하나의 작은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출처 : 물음표(?) 2005/07/05 초판1쇄 P. 205 ~ 209
신과 인간의 관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영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 다만 그 차이가 살아있을 때처럼 돈이나 권력, 외모, 학력이 아닌 마음의 밝기로 구분된다. 살아있을 때 자신의 마음 한 번 돌보지 않고 욕심과 집착에 사로잡혀 있던 마음은 탁한 에너지로 남아 저급영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편 살아서 자신을 관조하고 반성하며 겸손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의 마음은 밝고 아름다우며 그 정도에 따라 고급 신의 영역에 닫를 수도 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를 부정할 필요도,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할 필요도 없다. 이성의 논리 혹은 과학으로 입증 할 수 없다고하여 이러한 세계를 부인하는 것은 인간의 지극한 교만심인 동시에 무지이다. 또한 이에 맹목적으로 메달려 모든 것을 바라기만 하는 것은 인간의 엄청난 특권인 행(行)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이다.
우주마음의 뜻에 따라 영과 신의 단게나 구분을 모두 뛰어넘는 것이 우리 마음 속 우주근원의 ‘빛(VIIT)’ 이다. ‘빛(VIIT)’ 은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이기 때문에 단계를 구분하지 않고 너와 나를 따로 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우주마음 안에 있다. 살아서 순수한 ‘빛(VIIT) ’의 마음이었던 사람은 죽은 뒤에도 그 ‘빛(VIIT)’ 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의 마음이 왔던 바로 그 곳이기 때문이다.
출처 : 물음표(?) 2005/07/05 초판1쇄 P. 209 ~ 210
영과의 대화 중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 특히 병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왜일까?’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특히 정신 질환자들을 보면 신(사람이 죽은 후 나타나는 영의 파장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낀다. 인간이 만든 상념의 파장이 뭉쳐 나쁜 기운이 되는데, 깨치지 못하고 죽은 영들이 그 기운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고 괴로움을 호소하기 위한 방법과 수단으로 자기의 일가를 중심으로 파장이 맞는 사람에게 그 영향을 끼친다. 그러면 그 사람은 평소와는 전혀 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마음 안에 딴 마음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번은 정말 귀신이라는 존재가 있는가 하여 실험을 해 보았다. 빙의가 된 환자에게 그 빙의 파장을 제거하면서, “네가 정말 이 사람 안에 머물고 있다면, 나와서 나에게 너의 존재를 확인시켜 보아라”고 했다. “나는 영매 체질이 아니라서 너를 볼 수 없고 인정도 할 수 없으니, 나와서 어떤 행동을 보여 보라”고 하였다. 그는 빙의가 된 그 사람의 입을 통하여 말했다. 무서워서 못 나가며, 자기가 누구이며, 왜 이렇게 ㄱ이란 선한 사람에게 붙어 있는지 그 이유를 말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자.
나는 귀신의 존재 유무를 확인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다가, 그 집 꼬마 아이가 먹고 난 빈 야쿠르트 통을 발견했다. 나는 그 신인지, 영인지, 파장인지, 귀신인지 간에 눈에 보이면 잡아서 야쿠르트 통에 봉한 후 과학적인 시험이나 증명을 해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으니 그럴 수도 없고, 그렇다고 4차원의 영매 체질이 될 수는 더욱 없는 일. 생각 끝에 빈 야쿠르트 통을 주며 “이것을 통하여 너의 존재를 나타내 보이면 너의 뜻을 들어주고 이곳을 떠나 빛(VIIT)의 세계로 가도록 배려해 주겠다”라고 말했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야쿠르트 통이 또르륵 또르륵 소리를 내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 빈 통은 부딪히지도 않고 의자와 탁자 모서리를 요리조리 피해 가며 눈 달린 것보다도 더 정확히 굴러 다녔다. 그 빈 야쿠르트 통은 2-3분간 그렇게 굴러다니다가 빙의가 된 그 사람 앞으로 또르륵 굴러갔다. 그러자 조금 전 큰 한숨을 푹 쉬었던 그가 이번에는 파르륵 떨며 기절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덜덜 떨고 있었다.
순간 나는 야쿠르트 통을 잡아다가 약속대로 “너의 집은 이 곳이 아니라 ‘영의 세계’이니 그리로 가서 마음을 닦고 맑게 하여 빛(VIIT)의 세계로 돌아가라”고 했다. 한동안 긴장과 침묵이 흘렀다. 자기는 떠나지만 다른 영이 또 온다고 했다. 자기가 오기 전에 있었던 다른 빙의도 어떤 보살이 천지신명께 간곡하게 빌고 또 빌어 영의 세계로 갔지만, 이내 자기가 이 집에 왔다고 했다.
빙의가 떠난 자리에 다른 빙의가 오면 더욱더 강한 영향을 준다고 했다. 때로는 좋은 영향도 주지만, 자신이 괴로울 땐 엄청난 재난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만약 그가 가더라도 그 집안에 빙의가 오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없어지지 않는 한 언젠가는 그 공백을 다른 빙의가 채우게 되며, 그렇게 해서 계속 지속된다고 했다. 순간 영 중에서도 ‘저급령’의 세계를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얼마 전에 건강한 사람으로 돌아왔다. 직장도 갖게 되었고 정상인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는 두 번 다시 나쁜 파장이 오지 않도록 정기적으로 초광력超光力을 받고 초광력超光力 봉입 주머니를 항상 지니면서 단단히 무장을 하고 있다. 초광력超光力 봉입 주머니는 TV채널이나 안테나와 같은 역할로, 그것을 통하여 항상 초광력超光力이 교류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가족 모두가 초광력超光力을 받고 열성적인 회원이 되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안 되는 이유를 잠깐이나마 언급했다. 그 밖에 나쁜 파장, 정신질환 계통의 병을 피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정통 신앙을 가지면 좋다. 정통 신앙은 공인된 종교,正道를 말한다.
2.원인에 대해 참회하고 새 삶을 향하면 좋다.
3.정도(正道)로 생활하고 적선, 반성, 정기적 치료를 통해 완화 내지 잠재우는 방법이 있으나 잠재 근성마저 제거하는 것은 다소 어렵다는 것을 자주보아 왔다.
4.수맥, 풍수, 기가 원인인 경우에는 그 원인을 제거하거나 간단한 조치만 하면 된다.
5. 굿, 비방, 부적 등의 무속적인 방법이 있다. 일시적으로 좋은 효과가 있으나, 저령에게 저항력이 생기면 이런 것에는 아랑곳 하지 않게 된다. 계속 더 강한 다른 영이 들어온다. 물론 제령 후 본인과 그 가족의 강력한 의지로 생활방식을 바꾸면 퇴치가 가능하다.
출처 ‘빛(VIIT)으로 오는 우주의 힘 초광력超光力’
1996.07.10. 초판 1쇄 P. 160~162
선조들에게서 이어진 마음이 우리안에 있습니다.
그 마음을 정화해주시는 우주마음과 학회장님께 공경과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빛의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조들의 마음을 정화하여야 할 이유를 알게 되어 감사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