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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무엘상 23:1-5
"1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 2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3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4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5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내용분해 : A. 다윗이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의 타작 마당을 탈취한다는 소식을 들음(1절)
B. 다윗이 여호와께 이차에 걸쳐 그일라 출전 여부를 물음(2-4절)
1. 다윗이 여호와께 기도하니 여호와께서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하심 (2절)
2. 다윗의 사람들은 그일라 구원을 위한 출전을 반대함(3절)
3. 다윗이 다시 여호와께 기도하니 승리를 약속해 주심 (4절)
C.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블레셋을 무찌르고 그들의 가축올 끌어와 그일라를 구원함(5절)
오늘도 행복한 주일 아침입니다. 새 날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그건 은혜가 은혜인줄 모르고, 우리가 은혜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해서 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은혜 안에 있음을 느껴야 합니다. 은혜를 받고있고,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함의 비밀이며, 형통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다함께,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오늘 이시간 마음껏 누려 보십시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오늘 아침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사무엘상 23:1-5절 말씀으로 다윗의 그일라 거민 구원 사건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서 제3부 19:18-31:13절은 하나님께서 실패로 치닫는 사울의 왕정 체제하에서 미리 앞날을 위하여, 신정 왕국에 합당한 왕으로 예비하신 다윗의 시련과 사울 왕가의 몰락에 대하여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전반부 19:18-27:12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 왕 다윗의 시련, 곧 다윗의 도피 생활에 대하여 보도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도피 생활은 B.C. 1020-1010년까지 대략 10년간 계속되는데, 3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제1기는 B. C. 1020-1018년까지 약3년 동안으로 기브아 자기 집에서, 헤렛 수풀에 이르기까지의 기간(19:18-22:23), 제2기는 B. C. 1017-1015 년까지 약3년 동안으로, 그일라에서 십 황무지까지의 기간입니다(23:1-26:25). 그리고 제3기는 B.C. 1014-1010년까지 약4년 동안으로 블레셋으로 망명하였던 시기입니다 (27:1-12).
이러한 맥락하에 다윗의 도피 생활 제2기에 해당하는 23:1-26:25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데, 먼저 23:1-14의 두 문단에서는, 다윗이 블레셋의 습격을 받은 그일라를 구원한 사실과, 사울의 추격 소식을 들은 다윗이 하나님의 계시로 그일라 거민들이 자신을 배반할 것 이라는 사실을 알고 황무지로 피신한 사실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이어 23:15-29의 문단에서는 다윗과 요나단의 마지막 만남과 십 사람들의 밀고로 다윗이 절체 절명의 위기에 봉착하였으나, 블레셋의 이스라엘 침공 소식을 듣고 사울이 철군함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난 사실에 대하여 다룹니다. 이어 24:1-22 의 두 문단에서는,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두 번의 사건 중, 첫 번째로서 그 유명한 엔게디 사건에 대하여 다룹니다. 다음으로 25:1-44의 네 문단에서는 일종의 삽입 기사로서, 사무엘의 죽음과 소위 나발 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에 대하여 다루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26:1-25 의 두 문단에서는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두 번의 사건 중, 두 번째로서 하길라 사건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도피 생활에 나타난 도피 경로를 정리하면, 헤렛 수풀→ 그일라→ 십→ 마온(아라바) → 엔게디→하길라(십)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도피 생활 제2기는 사울의 추격을 피하기에만 급급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제1기 때와는 달리, 다윗이 자신을 추격하는 사울의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주고 나아가 도피 생활 중에서나마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의 도움으로 백성들에게 신망을 얻는 몇몇 중요한 일을 하는 등, 하나님께 대한 신앙도 완전히 회복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몇 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먼저는 그일라 사람들이 자신들을 블레셋의 침략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구원하여 준 다윗을, 사울에게 밀고한 사실과 그에 대한 다윗의 반응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에게 밀고한 것은 아마도 사울이 다윗을 도운 놉 제사장과 그 땅의 거민들을 몰살시킨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그일라 거민들의 처신은 은혜를 원수로 갚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 자신들의 안위만을 염려하는 파렴치한 행위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일라 거민들을 비난하거나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일라 거민들이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알고도 결코 어떠한 보복도 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그일라를 떠났습니다. 이는 다윗이 그일라 사람들의 처지를 배려한 자비와 긍흘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자신의 보좌만을 지키기 위해 놉 사람들을 학살한 인본주의 왕 사울과 달리 하나님의 신정 왕국(神政王國)의 왕이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 실례라 할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자신의 택한 자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세심한 섭리에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십 (Ziph) 사람들은 다윗이 마온 황무지에 은신해 있을 때, 그 사실을 사울에게 밀고하였는데, 십은 유다 지파에 속한 곳으로 이들이 다윗을 밀고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이들은 이후에도 다시 한번 다윗을 밀고한 일이 있었습니다(26:1). 실로 다윗은 같은 지파 소속인 십 사람들에 의해 두 번씩이나 배신당하는 쓰라린 경험을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고향 사람들에 의해 두 번씩이나 배척받은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마 13:53-58 ; 눅4:16-30). 이때 다윗이 당한 쓰라린 고통은 시편 54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여튼 다윗은 십 사람들의 밀고로 절체 절명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데, 다윗은 더 이상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체포가 시간 문제라고 여겨질 때, 사울에게는 블레셋의 침공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사울은 다윗 체포를 포기하고 철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구원이 절묘한 방법으로 정확한 타이밍을 맞추어 임한 것입니다. 블레셋의 이스라엘 침공은 그 자체가 초자연적인 사건은 아닙니다. 또한 블레셋이 위기에 처한 다윗을 돕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도 아닙니다. 블레셋은 다만 자신들의 탐욕스런 욕구에 따라, 이스라엘을 침공 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의 이스라엘 침공 배후에는, 하나님 자신의 택한 사람인 다윗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세심한 섭리가 개입되어 있었는데, 즉 하나님은 블레셋의 탐욕을 자극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하도록 하심으로써, 위기에 처한 다윗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구원과 보호는 우리가 전혀 예기치 못한 놀라운 방법으로 이루어지며, 그 시기 또한 정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기에 처할 때에라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며 소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자신을 핍박하는 사울에 대한 다윗의 대조되는 반응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다윗은 사울의 집요한 추적과 그로 인한 절박한 위기에 처하면서도 사울을 두 번씩이나 살려주었습니다. 이 처럼 다윗이 원수인 사울을 거듭해서 살려준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가장 근본적 이유로서 신앙적인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즉 다윗은 그 자신이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비록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기는 하였으나, 그 역시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자이므로, 그의 최후까지도 하나님께 맡기기 위하여, 스스로 사울을 제거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정치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는 현직 왕을 죽임으로써 백성들에게 반역자라는 오명을 듣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 자신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또 이미 사울의 왕위가 폐위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로서, 자신을 죽이려 한, 패역한 왕 사울을 죽이고, 왕위에 오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 명분이야 어떻든 백성들은 그를 쿠데타를 일으켜 왕권을 차지한 왕으로 인식할 것이 자명한 이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일부는 사울 사후,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되었을 때, 다윗을 지지하지 아니하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북쪽 지파들의 왕으로 추대한 바 있습니다(삼하 2:8.9). 마지막으로 도의적인 측면에서 사울이 자신이 섬기던 왕이자 장인인 동시에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요나단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죽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한편 다윗에 대한 사울의 부당한 핍박과 이에 대한 다윗의 대조되는 대응은 영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와 성도에 대한 사단과 세상의 핍박과 그에 대한 성도의 자세를 축약하여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의 택한 자가 마침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천국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에 대한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울의 다윗 추격과 관련된 기사 중간에 삽입 내용처럼 들어간 나발 사건 (25장)에 대하여 살펴보면, 나발 사건은 다윗의 도피와 관계된다는 점에서 삽입 기사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급박하게 전개되는 사울의 추격과 다윗의 도피 기사를 다루는 중간에 하나의 에피소드 (episode) 형식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삽입 기사로 처리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서의 저자가 이 사건을 여기에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을 대적하고 멸시한 나발의 운명을 통해, 앞으로 나타날 사울의 운명을 암시하는 한편,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말을 통해, 다윗이 도피 생활중에 무죄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또한 다윗이 신앙적 위기를 맞아,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신앙적으로 더욱 성숙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러한 나발 사건은 인간의 죄악된 본성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그의 나라를 방해하고 파괴하려는 사단의 음모와 책동, 그리고 그 음모와 책동을 분쇄하고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끊임없이 계속됨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와 같은 영적 갈등과 대립에 있어 궁극적인 승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사단이 자신을 넘보지 못하도록 항상 경계하며 경건함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건,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할 때, 인간적인 계산법에 의존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그일라를 구원하기로 한 다윗의 결정에 대해, 그의 수하들이 보인 반응이 나옵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블레셋과 싸우는 일을 재고해 주도록 요청하였습니다. 이는 다윗 일행이 처한 당시의 형편이 도무지 블레셋과 싸울 형편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볼 때, 다윗의 수하들의 요구는 타당했습니다. 당시 그들은 사울에게 쫓기고 있었고, 블레셋 군대는 결코 만만치가 않은 강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겨우 육백여 명의 군사로 블레셋을 대적하여 싸운다는 것은 매우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계산법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면 언제나 수의 다수나 가능성 여부를 먼저 앞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수나 가능성에서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어떤 일에도 도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설령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여도 쉽게 나서지 못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지 못 하는데, 어떻게 불리한 일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이렇듯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하면 언제나 인간적인 계산법을 앞세우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이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실때, 날이 저물고 무리는 먹을 것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그들을 마을로 보내서 재주껏 식사를 해결하게 하자고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먹을 것을 무리에게 주라고 명하셨습니다(마 14:13-21).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명령에 대해 제자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그들의 수중에는 음식을 구입할 만한 돈이 없었고, 그들이 지닌 음식이라고는 고작해야 어린아이의 도시락인 오병이어가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 대다수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이들의 태도는 전혀 틀렸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계산법으로 볼 때, 오병이어로 성인 남자만 세더라도 오천명에 이르는 무리를 먹인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명령을 내리신 예수님께서 정신 이상자로 취급될 만한 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인간적인 계산법에 의존하였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뜻을 실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실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그를 온전히 의뢰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수많은 이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고도, 그의 능력을 의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주님은 겨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그 많은 무리들을 먹이고, 또한 남은 것을 열두 바구니나 거두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인간적인 계산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이루기 위해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수나 가능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계산법에 의존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수나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라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신앙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리 만무합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인간적인 계산법을 앞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적인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그 일을 추진하기 바랍니다. 그것이 성도의 바른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함께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참고 문헌>
"손에 잡히는 구약개론"IVP
"성경개관 구약편" 부흥과개혁사
"ESV스터디바이블" 부흥과개혁사
"위드바이블" 바이블넷
"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 제자원 바이블네트
"구약개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구약총론" 생명의말씀사
"두란노How주석시리즈"두란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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