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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죽음
신 34:1-12
1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8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 설 교 >
느보산
신 34:1-7 / 장경동 목사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한 사람들이나 출애굽 후 40년을 광야에서 고생하던 사람들이나 별로 내 놓을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셔서 친히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렇듯, 내 놓을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는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셨기에, 현재의 축복 뿐 아니라, 장차 우리를 천국 본향으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생각도 마음도 말도 행동도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깝게 행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애굽의 역사를 알면 세계사, 가정사, 국가사와 개인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교훈이 되고 미래의 지침서가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대 최고의 나라(애굽)에 젖 붙여서 생성해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당대 최고의 나라, 애굽에 붙여 거기서 민족을 생성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라는 것은 꼭 손해가 아니고,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2. 한 달이면 충분히 갈수 있는 길(출애굽해서 가나안땅까지)을 불순종으로 인해 40년 이라는 세월을 방황하게 됩니다. 국가나 개인이나 속 차리면 쉽게 될 것을 속 못 차리면 오랜 기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3. 사람이 준비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아무리 부르짖어도 쓰임받지 못합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교육받는데 40년, 광야에서 적응하고, 연단 받는데 40년, 출애굽 후의 대장정에서 40년, 그리고 나서 지금 120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준비되지 않으면, 출애굽도, 하나님의 기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전능함을 나타낼 사람이 준비되기 전에는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말을 바꾸면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이 쓰시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준비만 되면, 하나님은 바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모세는 죽을 때 120세 였으나,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수명이 120세입니다. 창 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시편 90:10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당시도 지금처럼 사람이 70-80살 정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몸 관리를 잘해서 120세에도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힘이 없어 가나안에 못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모세가 지금 느보산에 올라가 가나안 땅을 바라봅니다. 창 34:1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여기서, 모세의 위대함을 깨닫게 됩니다.
1)느보산에 선 모세는 후계자를 잘 키운 사람입니다.
성경 인물 3만여 명중에 후계자를 잘 키운 사람은 엘리야와 엘리사, 예수님과 열두제자, 본문의 모세와 여호수아입니다. 후계자를 잘 키운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역사는 마라톤도 아니고, 단거리 경주도 아닙니다. 역사는 계주(이어 달리기)입니다. 바톤을 이어 잘 뛰어야 하는 계주입니다. 한국교회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교회를 대를 이어 잘 이끌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을 보면, 후계자를 잘 키운 사람들은 항상 제자들을 끼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 스승의 모습을 그대로 본받아 행하였습니다.
2) 느보산에 선 모세는 “하는 즐거움”과 “보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왕의 실수가 뭡니까? 자기가 하는 것은 잘하는데 다윗이 잘하는 꼴은 못 보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모세처럼 “보는 즐거움”을 알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보는 즐거움을 알려면 굉장히 성숙해야 하고 그 속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 민족이 후계자를 잘 키우지 못함은 “배신”때문이며, 이 민족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사랑”입니다.
3)느보산에 선 모세는 개인사나 국가사나 “매사를 끊어보지 않고 통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인생을 통으로 보는 사람은 “재앙도 은혜이며, 채찍도 은혜”라고 봅니다. 모세가 들어가지 못한 가나안은 “천국의 상징”이지 “천국”이 아닙니다. 들어가서도 일곱 족속들을 다 멸해야만 하는 그리고, 계속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가라” 하시고 “서라” 하십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때를 맞춰 일을 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세처럼,매사를 끊어보지 말고 통으로 보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모세는 자신의 사명이 가나안 입구 즉, 느보산까지 임을 스스로 알았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은총”인 것을 모세는 알았습니다. 부족한 나를 키워서 하나님이 쓰신 것처럼 부족한 여호수아도 하나님이 키워서 쓰신다고 하는 사실을 모세는 알았습니다. 모세가 위대한 것은 이런 것들 때문입니다. “주여! 내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나로 하여금 가정사나 인생사에서 축복의 대[代]를 잘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모세가 본 땅
신 34:1-8 / 김경호 목사
모세가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 올랐습니다. 지금 동쪽 끝에 서서 사방을 봅니다. 눈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갈 가나안 땅이 펼쳐집니다.
단까지 이르는 길르앗 지방 온 땅(북쪽 경계),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서쪽 경계), 온 유다 땅과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에서 소알까지(남쪽 경계)의 땅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바로 모세가 본 땅의 이 경계가 수 백년 후에 이스라엘의 전성기에 나타난 다윗-솔로몬 시대의 영역이 됩니다. 지금 모세는 단지 바라보기만 할 뿐이지만 후세에 그것은 역사 안에 현실화된 영토가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단지 바라볼 뿐이고, 단지 꿈꾸는 것에 불과 할지 모르나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 어디까지 내다보느냐? 어떤 꿈을 꾸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는 만큼 우리의 경계를 정해주시고, 꿈꾸는 만큼 눈앞에 현실이 되게 하시고, 기도하는 만큼 이루어 주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성서는 계속해서 놀라운 증언을 합니다. “이것은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이다”(4절)라고 하십니다. 이 땅은 단지 모세 개인이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본 것이 아닙니다. 그의 조상으로부터 가지고 있던 꿈의 땅입니다. 그들이 신앙의 눈으로 보아왔던 땅입니다. 사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남긴 유산은 뭐가 있겠습니까? 그 후손이 다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였는데, 그들의 유일한 유산은 바로 이 “꿈” 입니다. 그들은 “희망”을 유산으로 남겨 주었습니다.
모세는 간절히 그 땅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구 했습니다. “하나님, 부디 저를 건너가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저쪽 아름다운 땅과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신 3,25).” 모세가 거기서 살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곳을, 그렇게 바라고 그리며 여기까지 온 가나안 땅-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이제 눈앞에 두었으니 보게 해달라고 간구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모세의 간구를 들어주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네게 족하니, 이일 때문에 더 이상 내게 말하지 말아라”(26절)라고 잘라 말씀 하셨습니다.
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가는 미스테리입니다. 신명기는 백성의 죄 때문에 “너희 때문에”(1,37; 3,26; 4,21-22) 못 들어갔다고 대속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에는 선언적인 해석만 나오지만 민수기는 구체적인 사건과 관련하여 죄를 말합니다.
민수기 20장에는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서 절망하고 원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바위에서 물이 솟구치게 하는 기적으로 그 백성을 구하셨는데 그 때,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야 할 텐데 백성들이 미운 마음에서 “너희 반역자들은 들어라. 우리가 이 바위에서 너희 마실 물을 나오게 하랴?”하고 바위를 쳤다는 것입니다. 이 죄 때문에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민수기 32장에 가나안을 정탐 하고 돌아온 후, 그들이 통곡하며 우리가 저렇게 크고 강성한 민족 가운데 들어가 맞아 죽게 되었다며 절망 했을 때,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며 그때 성인이었던 20세 이상의 사람은 누구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만을 예외로 하신 것을 보면 아마 모세도 그 때 같이 절망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 모세도 물론 20세 이상에 해당하니 가나안에 들어 갈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백성이던, 모세자신이던 누구의 죄 때문이라기 보다는 ‘새 땅은 새 세대의 몫이다. 아무리 공이 많아도 지나간 세대(그 당시 20세 이상)는 새 땅 가나안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곳에서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언급이 많은데 이것은 모세 뿐 만이 아니고 가나안으로 향하는 중도에서 숨을 거두어야 했던 모든 사람들을 대신한다고 보아야 겠습니다. 모세는 광야 시대의 상징이고 대표자입니다. 가나안을 바라보고도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든 세대들의 한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공이 많더라도 가나안 땅은 그 땅을 맞이할 새 세대의 몫이라는 메시지 아닐까요?
모세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는 “나는 이 땅에서 죽을 것이므로 요단강을 건너가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건너가서 그 좋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4,22)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저 요단강 건너편에...”등의 노래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들은 단지 장례식 찬송이거나, 실제의 요단강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찬송들은 모세로 대표되는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의 한과 그리움이 서린 찬송들이고 그들의 심정으로 불러야할 찬송이며, 오늘 우리 시대에 우리가 세워야할, 비록 우리의 몫이 아니라 우리의 손에 주어지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요단강 건너편 세상, 전혀 새로운 세상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염원의 찬송이어야 할 것입니다.
신명기는 전체가 모세의 설교 형식으로 짜여있습니다. 특히 요단강을 건너기전에 모세가 그 백성들을 모아놓고 눈앞에 보이는 가나안 땅에 대해 말합니다. 가운데에 삽입된 법률자료(신 12-26장)를 빼면 신명기 앞뒤의 설교의 주제는 “가나안 땅의 신앙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설교가 말하는 새 땅의 의미를 보겠습니다.
첫째,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몸소 돌보시는 땅”(신 11,12) 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집트에서는 발로 물을 댓지만 가나안 땅은 골짜기와 산에 하나님께서 직접 비를 내려 돌보시는 땅이라고 추켜올립니다. 저는 이집트와 이스라엘 지역을 다 가보았습니다만 객관적으로 볼 때, 이집트는 가나안에 비해 비교도 되지 않는 곡창지대고 풍요한 땅입니다. 가나안에서 발로 물을 대지 않는 것은 사실인데,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댈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신앙적인 눈으로 본 것입니다.
둘째,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신 땅”이라고 합니다. 가나안에서 너희가 좋은 집을 짓고 거기서 살지라도 소양이 늘고 재산이 늘지라도(8,12)... 그것으로 교만한 생각이 들어 “이 재물은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모은 것이다”(17)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상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그것이 사실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이 쉬는 동안 그는 일했고, 부지런히 노력해서 자신의 능력과 손으로 재산을 모은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된 것이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 없는 사람의 생각이며, 하나님 앞에서 큰 교만이며, 하나님을 버린 행위이고 이것은 스스로 망하는 길(19)이라고 합니다. 신명기 저자는 계속해서 “내가 착하기 때문에 주께서 나를 이끌어 들여 이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9,4)고 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나의 공으로 된 것이 아니다.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 주신 땅임을 강조합니다.
셋째, 가나안 땅은 “알지 못하는 방법”, “알지 못하는 은혜”로 주신 땅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너희도 알지 못하고, 너희 조상도 알지 못했던 만나”(8,3)를 먹이셨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지금 눈앞에 있는 가나안은 그들이 알지 못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땅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상상치 못한 곳에서 옵니다. 우리가 예상치 못한 곳, 우리가 간구하고 기도하지 못한 길로,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다른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신도 많고 주도 많으나 주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 주님이시다”(10, 17)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떤 배타적인 신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의 깊이 속에서 나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관연 하나님, 그분만을 하나님으로 알고 주님으로 신뢰합니까? 그 분 아닌 어떤 것들에 더욱 믿음을 두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닌 것에 마음을 빼앗기며 달려가는 삶이 아닙니까?
뒷 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신 34:1-8 / 홍문수 목사
한 해의 마지막인 송년주일입니다. 연말이 되면 늘 느끼는 바입니다만 세월이 정말 빠릅니다. 「2004」란 숫자를 낯설어하면서 한 해를 시작하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52주가 다 흘러 오늘 송년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친숙해진 2004년이란 연도를 사용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세월이 빨리 흘러가다 보면 한 해가 끝나듯이 우리 인생도 언젠가 끝나겠지 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면 저절로 마음의 옷깃이 여며집니다.
왜 우리에게 연도수가 중요하고, 연말연시가 중요한가? 어찌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연도가 바뀐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금년에 떠오르던 해는 내년에도 무심하게 떠오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도수가 바뀌는 것을 중요시 여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분주한 일상의 삶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던 우리에게 인생을 생각하고 정리함으로 신앙과 인생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연말이 있고 송년주일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교훈적입니다. 당연하지만 때때로 잊고 사는 인생의 진리, 언젠가 인생에도 끝이 있고 떠날 날이 있음을 다시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말씀 중심으로 인생을 ‘떠나는 연습’을 한번 해볼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떠남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떠나기 전에 보다 아름다운 인생을 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언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떠날 날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날을 기억하기에 어떻게 하면 인생을 더 아름답고 멋지게 살아갈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간 여러분에게 모세의 마지막 떠나는 모습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기에 저는 떠나가는 모세를 가리켜 이렇게 불러봅니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정말 부러운 모습입니다. 외람되지만 “아, 나도 저렇게 살다가 저렇게 가면 좋겠다!” 이런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도 모세처럼 남은 생애 열심히 살다가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이며 천국으로 떠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봉독한 신명기는 모세가 쓴 책입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다섯 권의 책이 모세의 저작입니다. 그래서 이를 통틀어 ‘모세오경’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좀 이상하죠? 본문 34장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모세의 임종 사건입니다. 모세가 어떻게 자기 죽는 장면을 썼느냐? 이겁니다. 이런 의문은 이렇게 정리하면 풀립니다. 앞에 33장까지는 모세가 직접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34장은 아마 여호수아나 다른 사람이 기록해서 덧붙여놓은 것으로 짐작됩니다. 어쨌든 마지막 모세의 임종 장면은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살다가 어떻게 떠나가야 하는지 그 모델을 제시해 줍니다. 이제 본문을 중심으로 모세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을 얼른 읽어봐도 떠나가는 모세의 뒷모습은 한 마디로 장관입니다. 마치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해처럼, 혹은 장엄한 교향악의 피날레처럼 아름다운 대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120년 생애를 마치고, 출애굽 이후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고별 설교를 마친 후 느보산(山) 최정상인 비스가봉(峰)에 올라가 있습니다. 거기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바라본 후 임종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한편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있습니다. 물론 모세가 실수한 것도 있지만 그래도 충성을 다한 그인데 하나님이 어쩌면 그토록 매정하게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게 훌쩍 불러 가시나? 그런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이고 얕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사랑하시고 그를 충분히 축복하시고 상을 주십니다. 그러면서 모세 개인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이뤄 가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생각은 접고 본문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모세는 아름다운 영혼의 모습으로 떠났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이 세상을 떠나는 임종의 순간은 하나님을 뵙는 날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 살 동안에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육안으로 만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고전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 ”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뵙는 그 순간을 위해 준비해야 됩니다. 마치 시집 갈 날을 잡아 놓은 신부처럼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면 즉시 천국 갈 수 있지만, 시간을 두고 성화의 길을 걷게 되는 겁니다. 마치 안경알을 닦듯이 우리의 영혼을 맑고 투명하게 갈고 닦으며 수련을 해야 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여러분, 모세의 모습을 보십시오. 떠나가는 그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7절.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 하였더라” 그가 육신적으로 강건했다는 겁니다. 혹자는 이 말씀을 보면서 “아, 저 정도면 더 살 수도 있었을 텐데 ... ” 하면서 아쉬워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충분히 자기 수명을 살고도 건강한 모습으로 따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겁니까?
그런데 모세에게 있어 이보다 더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인격과 영혼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10절(하). “ ...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 ” 그의 영혼이 얼마나 투명하고 맑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깊은 기도 생활을 통해 그의 영혼은 하나님을 깊이 만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민12:3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민수기를 모세가 썼지만 이것은 모세 자신의 자화자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겁니다. 그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온유한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본래는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죠. 그가 40세 때 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때려죽이기도 했습니다. 성급하고 과격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계속 낮아지고 낮아져서 겸손하고 온유한 인격자가 된 것입니다.
흔히 그런 말을 하죠.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맞습니다. 육신적으로 보면 지당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좀 다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원죄의 모습을 갖고 옵니다. 그러다가 세상에서 실컷 죄를 짓고 죄만 잔뜩 늘여 갖고 떠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으로 왔다가 의인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받고, 예수 십자가 보혈로 씻음 받은 모습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특별히 주님의 거룩한 형상으로 변화 받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4:16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모쪼록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매일 매일 한 해 한 해 지나면서 우리 영혼의 모습이 더욱 더 주님의 형상으로 성화되고 아름답게 가꿔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세처럼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나 뵙기 바랍니다.
2. 모세는 아름다운 나그네의 모습으로 떠났습니다.
얼른 보면 모세에게 상당한 아쉬움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40년 동안 고생고생 했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니까 그런 생각을 할 만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전혀 섭섭해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인생이 나그네임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5절.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 ” 이 말은 모세가 하나님이 미리 예언하신 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다는 뜻도 되지만,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죽었다는 뜻도 됩니다. 군소리 하지 않고 발버둥치지 않고 순종함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만큼 충성하다 부르시면 순종하고 떠나야 할 존재들입니다. 나그네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잠시 맡은 일을 하다 떠나는 청지기입니다. 모세도 인간이었기에 나름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싶은 소원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자신의 성취를 확인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곧 후손들이 걱정됐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순히 순종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주신 몫을 다했고, 또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광야 40년도 모세가 많은 일들을 감당하고 기적도 행했지만 모두 하나님의 권능이요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모세는 다만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위대해 보여도 나그네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면 떠나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주권 하에 하나님의 역사가 이뤄져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죽을 때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이 직접 그의 장례를 치러주신 것입니다. 아마 천사를 시켰겠죠. 아스라엘 백성들이 무덤의 위치를 알았다면 아마 그들의 습성 상 무덤을 숭배하고 난리가 났겠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겁니다. 인간은 아무리 위대해도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혹시 이런 식으로 말씀을 드리니까 우리 인생을 너무 왜소하게 느끼실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치 점과 같이 짧은 인생, 스쳐지나가는 청지기요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 점들이 이어져 선명한 선을 만들어갑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는 점과 같이 작은 일을 하고 떠나가지만 하나님은 우리 각각을 기억하시고 합당한 하늘의 영광과 상을 예비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습니다. 흔히 세상 떠날 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후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떠난 후 가족이나 공동체의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모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이 예비되어 있고, 내가 떠난 후에도 모든 일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인간은 그저 도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떠나가면 다른 도구를 들어 사용하실 겁니다. 모세는 그런 이치를 알았기에 여호수아에게 안수함으로 인계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나갑니다. 9절.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정말 모세가 떠났어도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한편 하나님은 모세에게 큰 영광과 상을 주셨습니다. 10절(상).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 ” 이것은 그의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그를 가리켜 예수님을 예표하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변화산 위에서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되실 때 누가 나타났습니까? 모세와 엘리야!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세를 구약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에게 주어질 하늘의 영광과 상이 얼마나 놀라운 것일지 짐작이 갑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믿는 성도가 세상을 떠나는 것은 이 세상 나들이를 끝마치고 천국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련 없이 기쁨으로 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가 있습니다. 한번 소개해 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마더 테레사의 에피소드입니다. 1997년 테레사의 소천 직전 의사들이 그대로 두면 동맥이 막혀 큰일이라고 치료받을 것 권유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제 나이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갈 때가 됐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강제로 마취 주사를 놓고 수술을 합니다. 그런데 폐렴에 걸려 산소 호흡기까지 달게 됩니다. 그때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답니다. “제발 호흡기를 떼 주세요. 사람은 때가 되면 죽는 법입니다. 호흡기 비용으로 한 사람이라도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세요.” 생명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므로 우리가 목숨을 일부러 단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신앙은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이야기도 우리에게 감동적입니다. 그는 젊디젊은 나이에 순교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예루살렘 교회 일곱 집사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므로 아직 더 남아서 주를 위해 귀한 일을 많이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그는 그것을 알고 순종한 것입니다. 그는 돌에 맞아 죽어갔지만 그 영혼을 받아줄 것을 기도하고 천사처럼 하늘나라로 올라갑니다. 그가 간 후 오히려 그로 인해 하나님은 위대한 바울 사도를 탄생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 도구들을 각각 사용하시며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각각에게 하늘의 영광과 상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에 충성과 최선을 다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아멘’ 하면서 훨훨 날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부족했지만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당당히 천국에 들어가기를 소원합니다.
3. 모세는 아름다운 이별의 모습으로 떠났습니다.
모세가 떠나갈 때, 그리고 떠난 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백성들이 슬피 울며 애도하였습니다. 8절.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맞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여러분, 모세와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성경을 통해 쭉 정리해 보십시오.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습니까? 백성들의 반역과 핍박, 심지어 모세를 죽이려고 달려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끊임없이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면서 고운 정도 미운 정도 깊이 들었습니다. 그도 떠날 때 백성들과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웠을 겁니다. 백성들도 떠나가는 모세의 모습을 보면서 울며불며 30일 동안이나 애곡합니다. 아름다운 이별의 장면입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처럼 우리 인생은 이 세상에 각각 와서 살다가 언젠가는 각각 떠나갑니다. 모세처럼 ... 그러나 함께 살 동안 사랑했던 추억들이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떠나는 사람, 보내는 사람에게 눈물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재회의 약속이 있기에 또한 ‘미소가 섞인 눈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아름다운 생애를 마치고 천국에 입성하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인간을 사랑했던 그 위대한 신앙 선배를 향해 눈물 섞인, 그리고 미소가 섞인 기립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한번 그려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성경 보면 그런 장면이 여럿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만 더 소개해봅니다. ‘밀레도 항구의 이별’입니다. 사도행전 20장입니다. 선교 여행 중인 사도 바울은 급히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이제 가면 핍박자들에게 붙잡혀 죽을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 항구로 불러 고별 설교를 하고 작별합니다. 행20: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하나님을 뜻을 따라 가기에 붙잡을 수 없는 사람, 그러나 이별의 아픔이 있기에 눈물로 얼싸안고 떠나고 보내는 사람들!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이렇게 감동적인 모습으로 장식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천국에서 재회하는 기쁨은 그럴수록 더욱 감동적일 겁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모세의 마지막 따나가는 뒷모습이 ... 저는 정말 부럽습니다. “아! 나도 저렇게 살다가 저렇게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에 솟구치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한 해를 뒤로 하고 떠나가는 나의 뒷모습이 어떤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그것이 장차 하나님이 부르실 때 떠나갈 ‘나의 뒷모습’에 대한 예고편인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만족하십니까? 모세 같은, 아니 비슷하게나마 아름다운 뒷모습입니까? 그렇다면 더 아름답게 가꾸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혹시 나 자신조차 안타깝게 여길 만큼 부족한 모습입니까? 그래도 아직은 괜찮습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에게 시간을 더 주셨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있고, 남은 생애가 있습니다. 부디 한 해를 뒤로 하고 또 다른 한 해를 향해 나아가는 송년의 계절에 뒷모습이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 하리라 새롭게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명이 능력을 가져온다
신 34:1-8, 행 20:22-24 / 민경설 목사
지구상에 60억이란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철학을 갖고 삽니다. 인간이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그가 갖고있는 철학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복된 철학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인생이라 하여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인생항로가 처음부터 잘못 된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복된 인생철학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바른 인생관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복된 인생관을 가지려면 먼저 나는 스스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믿어야 하며 내가 태어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이땅에 보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인생관을 세우는데 첫 번째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반드시 그분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땅이 종착역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 때 믿음있고 겸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만물도, 어떤 인간도 모두 주신자에게 정확히 돌아가야 합니다. [롬11: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땅에 나를 보내신 뜻대로 살다가 때가 되면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주시고 때가 되어 돌아가는 데는 반드시 보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사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나를 보내신 뜻이 사명입니다. [계4:11]"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이 땅에서 죄짓고 타락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뜻을 모르고 제멋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죄’는(헬, 하말티어:ἁμαρτια) ‘과녁을 빗나가다’ 라는 뜻으로 과녁을 못 맞춘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는 알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잘못된 사명으로 살아가는 가롯 유다에게 [마26:24]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한번 태어난 인간의 삶은 영원한 것이기에 뜻을 모르고 사는 자는 지옥에서 영원하므로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명대로 사는 자가 축복입니다.
불행한 사람은 불행해서 슬픈 것이 아니고 사명을 찾지 못해서 불행해 지고 슬픈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깨닫는 자는 길이 보이며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또한 사명을 깨달은 사람은 만족하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수가 있습니다. 본문에는 모세가 사명을 마치고 느보산 기슭에서 마지막 삶을 마치는 것과 또 사명을 위해서 목숨도 아끼지 않은 사도 바울의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딤후4: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사도 바울은 사명대로 살아가면서 목숨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누구에게도 있습니다. 성공적 삶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얼마나 감당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어떻게 깨닫는지 그 원리를 알아보겠습니다.
1. 사명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사명은 창조주의 의도에 의한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삶의 목적을 자기가 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창조주만이 만드신 이유를 알기 때문입니다.
[행20:24]"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명은 내가 하고싶어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 받는 것입니다.
인간이 실패하고 어려워지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복은 주님이 주시는 사명대로 살아갈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의 길을 가는 자만이 어려워도 기쁨이 있고 의미가 있고 행복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복도 삶의 의미도 가치도 모르겠다는 사람은 먼저 기도하며 사명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사명을 찾는 원리는
첫째,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이 있는가 입니다.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합니다. 영광이 드러난다는 뜻은 그 사람이 하는 일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둘째, 그 일을 하면 할수록 구원이 일어납니다. 그 일을 할수록 영적으로 자유롭습니다.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은 그 일을 하는데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고 죄를 멀리하게 됩니다. 그 일을 하면서 죄 짓는 일은 사명이 아닙니다.
셋째, 그 일의 가치가 영원성과 연결됩니다. 죽음 저편까지 연결 되야 합니다. 그 가치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사명이 아닙니다. 어떠한 일을 해도 영원을 사랑하며 영원한 하나님과 함께 가는 일입니다.
넷째, 그 일을 하면 할수록 더 은혜로 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과 영원을 사모하며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은 사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어서 그 삶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2. 사명은 목숨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명은 목숨걸고 그 일을 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행20:24]"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명은 목숨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명은 내 목숨보다 더 귀중한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찾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모든 불행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장 큰 불행은 목숨이 죽을까봐 하는 두려움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롬16:3]"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몸을 위하여 자기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여기서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바울의 사역에 동역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바울을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성경에 기록될 만큼 최고의 복된 자가 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인간은 어찌하든지 한번 태어나면 한번은 죽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사명을 발견한자는 이 세상에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3. 사명은 능력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능력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하는 자는 능력이 없게 됩니다.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한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갈 수 있도록 존재하는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원칙적으로 사명 없는 자는 능력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능력이 없고 힘이 없는 자는 목숨 걸고 일할 사명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어떤 일에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신34:7]“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모세가 120세에 별세할 때까지 눈이 흐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그 머나먼 광야에서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며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가 죽을 때까지 눈이 흐리지 않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도 그리던 가나안 땅이 바라보이는 느보산 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쉽게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 바위를 두 번 쳐서 가나안에 못 들어갔다고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거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곳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라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4. 사명은 그 사람에게 꼭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어 보내시기로 작정하실 때부터 그 사명은 우리에게 맞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의미와 보람은 내게 주신사명에 있습니다.
그리고 사명이 끝나면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이 우리인생의 최고의 복입니다. 사명을 발견하면 인생의 방황은 끝이 납니다. 타락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죄악이 끝이 납니다. 또한 사명 있는 자는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발견하지 못한 자는 사명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맞는지를 말씀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어떠한 일을 해도 사명 갖고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의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나 바울은 참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참 복되고 의미 있는 삶을 산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② 요르단 편: 느보산에 올라보니
신 34:1-8 / 김흥규 목사
<국경을 넘으며 겪은 작은 불편>
이스라엘에서 요르단으로 넘어갈 때에는 조금 고생을 했습니다. 두 나라 출입국 관리소의 무성의와 요르단 쪽에서 우리를 마중 나오기로 한 가이드의 연착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출국수속을 밟을 때 말을 잘못 알아듣고 왼쪽이 아닌 오른쪽 창구로 가서 한참을 대기해도 누구 하나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좀 이상하다 싶어서 창문을 두드리고 물어보니 그제야 건너편 쪽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부주의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스라엘 쪽 직원의 작은 친절이 아쉬웠습니다. 요르단의 입국은 더 힘들었습니다. 아주 심한 황사가 불어 닥치고 있어서 빨리 건물이나 차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 날 따라 요르단에 입국하는 이들이 우리 외에 많지 않았지만 직원들이 늑장을 부리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한 참을 모래바람을 맞으며 창구밖에서 서성거리는데 직원이 창문을 열 고 묻기에 성지순례객이라고 답했습니다. 우리를 맞으러 온 가이드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요르단 입국수속은 가이드가 다 알아서 처리한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우리의 여권을 다 주고 가이드의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주었습니다. 가이드가 늦게 오는 바람에 한 4-50분간 황사를 맞으며 밖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침내 요르단 현지 가이드와 한국인 가이드가 나타났습니다. 조그만 접촉 사고가 있어서 늦었다는 변명을 했지만 왠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버스로 옮겨 탔는데 이 또한 실망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대형 벤츠 버스를 타고 넉넉하게 여행을 했는데 요르단에서는 우리 18명이 간신히 탈 정도는 물론이고 복도에까지 짐을 실어야 할 정도로 비좁았습니다. 당연히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한국에다가 전화해서 불평했습니다. 그랬더니 내일부터는 크고 좋은 버스로 바꾸어준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퍽 실망스러웠지만 그 덕분에 회사측에서 사과하는 뜻으로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최고급 양갈비 요리를 대접받을 수 있었습니다. 비싼 경비를 내고 여행을 할 때 때로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 때 너그러운 마음으로 잘 이해하는 아량도 필요하지만 우리처럼 정당한 항의를 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버스 문제는 처음 이스라엘에 가서도 해결되지 않아 여행사 지사장이 호텔에 찾아와 저에게 사과를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어쨌거나 4월 27일 주일 저녁 7시쯤에 우리는 요르단의 국경지대인 아카바(Aqaba)로 이동해서 Days Inn이라는 허름한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우리를 안내하게 될 가이드는 현지 여행사의 오경환 과장이었습니다. 입국 수속과 버스 문제에서부터 우리를 조금 실망시켰기에 조금 거리감이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친해졌습니다. 30대 초반이 총각이었지만 해외 지사에서 꽤 오랫동안 근무했기 때문에 아는 것이 많았고 믿음도 괜찮은 청년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권사님이고 아버지는 집사님으로서 믿음 좋고 피아노 잘 치는 며느릿감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요르단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접하고 저녁 식사를 한 뒤 우리는 이도희 장로님 방에 모여서 주일 저녁 예배를 드렸습니다. 모두들 피곤해보였지만 얼굴 표정은 흡족해보였습니다. 무엇보다 출입국 수속에서 조금 고생을 했고 버스나 숙소 문제에도 적이 실망스러웠지만 성지에 와서 호강할 수는 없지 않느냐 하며 위로했습니다. 너무 편하고 호화롭게 여행하는 것보다 때로 고생도 해봐야지만 성지순례의 추억이 되지 않겠느냐며 좋게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에돔족속의 수도 페트라를 보다>
요르단은 이스라엘에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나라로서 이스라엘과 영토분쟁이 많았던 나라입니다. 양국은 일부 영토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오늘까지 공존해오고 있습니다. 동예루살렘 지역도 본래는 요르단 영토였으나 1967년의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다고 합니다. 요단강이라는 이름도 본래는 요르단강이라고 해야 옳지요. 그래서 본래 이 지역을 식민통치하던 영국인들이 처음에 이 나라에 '요단 강 저편'이라는 뜻의 ‘Transjordan’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1923년에 팔레스타인으로부터 분할되었으며 1946년에 ‘The Hashemite Kingdom of Jordan’(셈족속 요르단 왕국)이라는 국명으로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었습니다. 북쪽으로는 시리아, 북동쪽으로는 이라크, 서쪽으로는 이스라엘, 동쪽과 남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접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항상 영토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해주지요. 요르단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축출당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전사들을 ‘검은 9월단’(Black September)이라고 부릅니다. 중동의 호전적인 국가들 틈바구니에 끼여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주 특별한 외교정책이 필요했을 듯싶습니다. 때로 아랍인들의 철천지원수인 이스라엘의 힘을 빌리기도 하고 반(反)이스라엘 진영에 가담하기도 하고 줄타기 전략은 오늘까지 계속된다고 합니다. 공식적인 이슬람 국가이지만 비교적 온건하고 개방적인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보기 드물게 순박해보였습니다. 국토의 9/10 정도가 사막지대라고 하는데 차를 타고 이동할 때 차창 밖으로 흔히 보이는 풍경이 황량한 사막이었습니다. 전체 인구 550만 명 중에 상당수가 수도인 암만, 즉 요르단 계곡 위의 북서쪽 평원에 밀집되어 있습니다.
4월 28일(월)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는 그 유명한 페트라(Petra)로 이동했습니다. 차창밖으로 싯누런 바윗돌로 이루어진 야산과 더불어 막막한 사막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간간히 유목하는 베두인들의 천막과 양떼와 염소떼가 점점이 보였습니다. 중간에 잠시 내려 멀리 아론의 무덤이 있다는 호르산을 보았습니다(민 20: 22-29, 33: 38). 사실 고대 요르단 지역은 에돔 족속과 암몬, 모압 족속의 본거지였기 때문에 광야 생활 말기에 아론이 죽은 호르산이 저기라는 확신이 금방 왔습니다. 무엇보다도 민수기 20장의 말씀을 보면 가데스 바네아 지역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 지역을 통과하길 원했지만 에돔 왕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페트라가 고대 에돔 족속들의 수도였는데 성경은 이 기사가 끝나자마자 호르산에서 죽어 장사 지낸 아론의 이야기를 언급합니다. 페트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호르산을 멀리 바라보면서 직접 가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우리 일정에는 빠져 있었습니다.
마침내 페트라에 도착하니 수많은 관광객들로 북적되고 있었습니다. 페트라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주전 3세기부터 주후 1세기까지 나바테아 족속들(Nabataeans)이 옛 에돔 땅 안에 거대한 암석을 깎아서 기기묘묘한 무덤과 신전들을 만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무역 도시를 형성했던 곳입니다. 나바테아인들은 주전 6세기 경 본래 살던 아라비아 북동쪽으로부터 이 지역으로 와서 토착 에돔족속들을 몰아내고 당대 최고의 상업도시를 조성했던 국제 무역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페트라가 동 아시아와 아라비아로부터 지중해에 이르는 양념과 향료의 무역로임을 발견하고 2-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도시를 조성하는데 용수의 확보와 통제가 관건이었으므로 시크(Siq, 페트라로 들어가는 3km 정도 되는 깊은 협곡의 바위틈)가 시작되는 입구에서부터 매우 정교한 수로 시설을 갖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후 106년에 로마에 정복당한 나바테아인들은 역사 속에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다가 주후 4세기와 8세기경에 일어난 지진으로 완전히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졌습니다. 페트라가 세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1812년 8월 불란서 군대의 스위스 출신 연대장의 아들인 탐험가 부르크하르트(Johann L. Burckhardt)가 이 지역을 현대 서양인으로서는 최초로 방문한 후부터였습니다.
우리는 매표소 근처에서부터 말을 타고 한 7분 정도 가서 페트라의 입구인 협곡 바위틈 시크에 도착했습니다. 청명한 날씨에 난생 처음 해보는 승마였는데 기분이 삼삼했습니다. 우리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거대한 바위틈으로 들어갔습니다. Bab el-Siq로 알려진, 페트라로 들어가는 전주곡에 해당되는 이 협곡은 참 감질 나는 길이었습니다. 좌우로 절벽처럼 깎아지른 바위가 거대한 틈을 만들어 생긴 이 도로 바위벽에 나바테아인들이 새겨 만든 갖가지 조형물들, 특히 신상들의 흔적과 그 신상들을 모시기 위해 파놓은 벽감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울긋불긋한 바위벽이 갖가지 자연스러운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특히 코끼리 형상이 잊히지 않습니다. 실로 난공불락의 요새 중에 요새로서 시크에다가 돌문을 만들어 닫아놓으면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천혜의 바위성벽이었습니다. 배수가 잘되도록 주후 1세기경에 만든 도로는 오늘의 눈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과학적이었습니다.
도보와 마차 혹은 낙타만이 허용되는 시크길은 점점 좁아지다가 넓어지다가 하다가 갑자기 넓게 개방된 큰 마당이 나타났습니다. 거기에 놀라자빠질 만큼 거대한 연분홍색의 2층 구조물이 나타났습니다. 페트라라는 도시에 들어가서 최초로 만나는, 여러 신전들 중에 가장 잘 알려진 ‘보고’(Treasury), 더 정확히 말해서 ‘파라오의 보고’(Treasury of the Paraoh)라는 뜻을 가진 카스네 엘-파로운(Khasneh el-Faroun)였습니다. 보고라는 이름은 주전 1세기에 베두인 원주민들이 이 건축물이 그 석실 안에 보물을 숨긴 위대한 마법사의 마술적인 작품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6개의 고린도식 기둥과 갖가지 인물상들과 동물상들이 조각된 근동 지방의 헬레니즘 건축양식입니다. 거대한 절벽을 통째로 깎아서 만든 참으로 진기한 건축물이었습니다. 나바테아 왕족의 궁전 혹은 왕묘, 혹은 신전으로 알려져 있으나 어는 것이 맞는지 혼동이 왔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엄청난 보고 안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 유명한 영화 '인디아나 존스'가 바로 여기에서 촬영했다고 하니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카스네 앞에서 우리는 단체 사진을 찍은 뒤 페트라 안으로 계속 들어갔습니다. 크게 개방된 하늘 아래 사방에는 넓은 바위산이 연이어 있었는데 대부분 내부를 깎아 시신을 안치한 석실묘였습니다. 여러 군데의 제법 큰 석실들을 둘러 본 뒤 우리는 어느새 야외극장에 까지 다다랐습니다. 주후 1세기 경 나바테아인들이 로마 양식을 따라 산허리를 깎아서 만든 노천극장이었습니다. 약 7천 명 정도나 수용할 수 있다니 나바테아인들의 건축기술에 입이 절로 벌어졌습니다. 실로 페트라는 기적에 가까운 고대 도시였습니다. 여건이 허락된다면 1박 하면서 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음이 내내 유감이었습니다. 페트라를 나오면서 우리는 수학여행을 나온 요르단 여고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무슬림들과 달리 참으로 재기발랄하고 귀여운 학생들이었습니다. 이래저래 요르단은 열린 이슬람 나라라는 인식이 깊어졌습니다.
<아직도 흐르는 므리바 모세의 샘>
오전 내내 페트라 유적지를 돌아본 우리는 근처의 요르단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너무 많이 걸어서 다들 시장했던지 게 눈 감추듯 잘 먹었습니다. 처음에는 현지식에 거부감을 보이던 분들이 날이 갈수록 잘 적응하는 모습이 뚜렷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모세의 샘이 있다는 근처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도시 한 가운데 여러 상점들 틈바구니 속에 있어서 의아했습니다. 그것도 노천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건물 안에 샘이 있었습니다.
민수기 20장은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밟을 수 없는 이유를 므리바 물 사건과 연계시킵니다. 하나님은 물이 없어 불평하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위에다 대고 그냥 말만 하라고 했는데 모세는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혈기를 부리며 두 번씩이나 지팡이로 바위를 내리쳤습니다. 그것도 기적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닌 자기와 아론인양 만용을 부렸습니다. 이내 물이 펑펑 솟아 회중과 짐승들이 해갈할 수 있었지만 모세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가나안 진입이 금지 된 것이었지요. 정말 거기에는 모세가 내리쳤던 바위돌과 아주 흡사한 바위가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밑으로 아주 맑고 시원한 샘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본래 이 바위 밑에 졸졸졸 생수가 흐르고 있었는데 모세가 이를 발견했을 뿐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 그런 천연 샘물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민수기 20장을 보면 므리바 샘 사건이 일어난 바로 직후에 에돔 족속들이 이스라엘이 자기 마을을 통과하는 것을 거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페트라가 고대 에돔 족속의 수도였다는 사실과 그 페트라 근처에 므리바 샘이 있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성경 기록과 합치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는 성지 곳곳을 다니면서 이와 같이 성서 속의 사건들이 현장과 정확하게 부합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의 샘 위에 놓여 있는 바위 주변에서 우리는 그 옛날의 이야기를 상상하면서 손을 잡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나운 모습이며, 누나 미리암이 죽은 뒤 상심한 나머지 백성들에게 환멸감을 느꼈을 법한 모세의 모습이 아른거렸습니다.
<국제 무역로 왕의 대로를 보다>
모세의 샘을 구경한 후 우리는 그 날 최종 목적지인 암만에 가기 전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버스 차창을 통하여 아니면 잠시 내려서 조망했을 뿐 직접 현장에 가지는 못했기에 한국에 돌아와 기억을 되살리기가 몹시 어려웠습니다. 중요한 것은 요르단이 에돔 족속들뿐만 아니라 암몬과 모압 족속들의 본거지였다는 사실입니다.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의 후손들이었고 암몬과 모압은 모두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후손들이었습니다. 롯의 두 딸이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으로 남편을 잃자 씨를 이어갈 방법이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롯이 만취하도록 만든 뒤 두 딸이 차례로 아버지와 동침해서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큰 딸이 낳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라는 뜻을 가진 '모압’, 작은 딸이 낳은 아들이 '내 백성의 아들'이라는 뜻의 '벤암미' 즉 암몬 자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창 19:30-38). 윤리적으로 보면 많이 부끄러운 이야기이지요.
출애굽과 관계하여 모압 지역은 '모압 평지'라고 해서 모압 북쪽의 여리고 맞은 평지를 일컬었으며 그 유명한 느보산이 있었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아모리 족속이 지배하던 이 땅은 르우벤 지파에게 분배되었습니다(민 32:38). 열왕기하 3:4절에 보면 모압 왕 메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암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조공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모압 일대에 풍부한 목초지가 널려 있다는 지리적 조건과 무관치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다윗의 증조모인 룻이 모압 여인이며 모압의 들판이 룻기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암몬 지역 역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암몬 자손의 땅을 지나 여러 중요 도시들을 점령했던 곳이었습니다(민 21:24-35; 신 2:19-37). 암몬은 무엇보다도 수도였던 랍바로 유명합니다. 다윗의 부하인 요압과 온 이스라엘 군대가 암몬과 전투를 하면서 랍바 성을 포위하고 있었을 때 그 유명한 밧세바와의 간음을 저지릅니다(삼하 11:1). 그러므로 우리아 장군은 다름 아닌 랍바성을 공격하다가 전사했지요. 결국 랍바는 요압 장군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삼하 12:26-31). 그 이전과 이후에도 암몬과 이스라엘은 서로가 적수가 되어서 많은 전쟁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특히 솔로몬 왕이 암몬 여인을 후궁으로 취해서 암몬인들의 가증한 신 몰렉, 즉 밀곰을 쫓고 예루살렘 근처 실로암에 몰렉을 위한 산당을 짓기도 했습니다(왕상 11:1, 5, 7). 솔로몬이 암몬 여인 나아마와 혼인하여 낳은 아들이 르호보암이었습니다(왕상 14:21). 이렇게 고대 이스라엘이 항상 접전을 해야 했던 에돔과 모압과 암몬이 요르단 지역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요르단은 유대-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성지인 것입니다.
버스를 타고 꽤 긴 거리를 옮겨 다니며 잠깐씩 멀리나마 조망을 했는데 '왕의 대로'(King's Highway)와 세례 요한의 순교 성지인 ‘마케루스’(Machaerus)가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정확히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지만 대관령처럼 꼬불꼬불한 산악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가 전망 좋은 한 지점에 내리니 저기 보이는 저 도로가 왕의 대로라고 했습니다. 민 20: 17절에 보면 가데스에 이른 모세가 에돔 왕에게 에돔 지역 통과를 허락해줄 것을 요구했을 때 에돔의 밭이나 포도원, 심지어 샘물조차도 마시지 않고 오로지 왕의 대로로만 똑바로 지나가겠다는 말을 합니다. 비록 에돔 지역을 통과하지는 못했지만 왕의 대로는 나중에 이스라엘이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 여리고까지 경유했던 유서 깊은 옛길이지요. 주전 2천 년 전에 만들어져 아브라함 시대 이전부터 '열왕의 길'로 불렸다니 얼마나 역사가 깊은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쪽으로 아카바 만에서부터 북쪽으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까지 쭉 뻗어 올라가 남북으로 종단하고 있는 대상들의 무역로였습니다. 멀리 아프리카로부터 터키와 아시아 유럽으로 까지 길을 이어주던 군사적 요로요 상업로였던 것이지요. 성서적으로 본다면 아카바→에돔→모압→암몬→길르앗→바산→다메섹→바벨론을 이어주던 간선도로이기도 했습니다. 왕의 대로를 타고 올라가면 숱한 문명 유적지를 훑어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저 먼발치에서 구경만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참수터로 알려진 마케루스 근처까지 가서 멀리 조망만 했습니다. 걸어서 한 10분이면 갈 수 있었는데 그냥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건축광으로 알려진 헤롯 임금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되었는데 그의 아들 헤롯 안디바가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고 그의 머리를 벤 곳이라고 합니다. 헤롯이 자신의 이모제(異母弟)였던 헤롯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자 세례 요한의 책망을 받았기에 헤로디아와 딸 살로메가 공모해서 벌인 살인극이었습니다(마 14: 1-12). 베다니 지역의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던 요한이 여기까지 끌려와 순교를 당했다는 사실을 잠시 연상해보니 서글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흰 돌의 도시 암만으로 가는 길>
이제 멀리 요르단의 수도 암만으로 가야했습니다. 차창밖에는 단조로운 사막 지대와 돌산이 계속되었습니다. 간간히 양과 염소가 뒤섞인 떼를 이끌고 가는 목녀(牧女)가 엿보였습니다. 목자하면 흔히 남성을 연상하지만 현지에 와보니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가이드가 들려주는 말 한마디가 기억에 남습니다. 양떼 틈바구니에 왜 염소를 섞어두는지 아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양이란 짐승이 워낙 어리석고 시력이 약해서 자기들끼리 내버려 두면 압사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즉각 교회 안에도 선량한 양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나운 염소가 함께 섞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늘 정신 차리고 기도하라는 주님의 특별한 뜻과 은혜 때문이지요.
몇 시간을 달려서 뉘엿뉘엿 해가 질 때 암만에 도착했습니다. 인구 2백만의 흰 돌로 된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숙소에 가기 전에 우리는 돈키호테라는 아랍 현지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양고기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단원들 가운데 양갈비가 먹고 싶다는 타령이 있었는데 여행사 측에서 특별 서비스를 제공한 것입니다. 요르단에 도착해서부터 버스가 워낙 작아서 짐을 차내 복도에까지 실어야 할 정도로 고생이 많았는데 여행사 측에서 사과의 뜻으로 한턱 푸짐하게 낸 것입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건너편에는 요르단 부부가 아이와 함께 외식을 나온 모습이 보였습니다. 서너 살 정도 되는 사내아이가 우리 쪽으로 아장아장 걸어오는 데 얼마나 귀여운지 몰랐습니다. 온 세상의 아이들은 누구든지 예쁜 것 같습니다. 처음 보는 외국인들일 터인데도 제가 오라고 했더니 제 품에 안겼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여러 권사님들이 돌아가며 안아주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아이의 부모님이 이 광경을 물끄러니 바라보면서 아무 제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기 엄마는 보수적인 무슬림인지 눈만 내놓은 채 온 몸을 검은 두건으로 가리고 있었습니다. 히잡을 쓴 것이지요. 식당에까지 와서 히잡을 쓴 그 여성이 음식을 어떻게 먹는가 유심히 보았습니다. 히잡 안으로 손을 넣어서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참 불편해 보였습니다.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하지 않을 요량으로 베일을 써야 한다니 참 이해하기 어려운 관습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다 먹지 않고 남길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양의 양갈비 요리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습니다. 고소한 맛이 입안에서 살살 녹는 일품요리를 포식했던 것이지요. 버스 때문에 불편했던 마음은 양고기와 더불어 눈 녹듯 해소되었습니다. 그 날 밤 우리는 암만의 Jerusalem Intercontinental Hotel에 투숙해서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4월 29일 화요일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기 위하여 식당으로 가다가 마산 합성교회의 구동태 감독님을 만났습니다. 교인들을 인솔하고 성지순례를 오셨는데 우리와는 반대로 이스라엘부터 먼저 갔다가 요르단을 거쳐 이집트로 나갈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참 좁은 법입니다.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달려가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으며 우리는 느보산에 올라갔습니다. 요르단에서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느보산이었습니다. 암만에서 남서쪽으로 한 25km를 달려가니 메데바(Medeba)라는 도시가 나오는데 그 근처에 해발 710m의 느보산의 시야가(Siyagha) 봉우리가 있었습니다. 느보산은 중동 지역의 여타 산들과 비슷하게 나무가 거의 없는 돌산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서남북 사방에 대한 전망은 그 어느 곳보다 뛰어난 명산이었습니다.
저는 신명기 34:1-12절 말씀을 가지고 모세의 최후에 대해서 설교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기대가 컸고 가슴이 설렜습니다. 모세는 120세였지만 안광이 빛났고 기력이 정정했습니다. 결코 죽을 몸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모세가 죽기를 원하셨습니다. 억울한 일입니다. 40년 동안 그토록 고생했는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그냥 바라보기만 한 채 죽으라니 참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느보산 정상에서 멀리 요단강 건너 편 가나안 땅을 보는 것으로 족했습니다.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남방과 종려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신 34:1-3). 느보산 정상에 와 보니 이 말씀이 그대로 체감되었습니다.
그 날 따라 날씨가 얼마나 청명한지 가시권이 엄청 넓었습니다. 멀리 사해의 반짝이는 물빛과 요단 강 건너 편 여리고 까지 눈에 들어왔습니다. 때로 예루살렘 지역의 감람산은 물론이고 헐몬산의 만년설까지 비록 막막할지언정 다 식별할 수 있을 정도라니 전망이 얼마나 좋은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왼쪽으로 사해와 오른쪽으로 요단강과 여리고 지역을 둘러보면서 잠시나마 깊은 감회에 빠졌습니다. 모세의 심정이 되어 본 것이지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서운하지만 자기의 소임을 다한 뒤 가나안 정복은 여호수아를 비롯한 신세대가 한다는 사실, 용납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정작 모세의 비범함은 가나안 입성 금지를 받아들였다는 사실보다 그의 신비한 죽음에 있습니다. 자연사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 정정한데 하나님께서 죽으라니 죽었습니다. 누구 말대로 모세는 하나님께서 안락사 시켰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느보산 어딘가에 모세가 죽어 묻혔을 텐데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하나의 전설로 회자되어 신격화되고 우상화될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것이지요.
초대 기독교인들은 모세의 묘지를 부지런히 찾아다니다가 4세기 말경 모세의 빈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거기에 모세를 기념하는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해가 갈수록 이 교회는 점점 커져서 비잔틴 시대에는 수도원과 세례소, 성물실, 성모 마리아 기념 채플 등의 부속 건물들을 지어 중동 성지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교회 단지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느보산 위의 모세 기념 교회는 페르샤인들과 7세기 아랍인들의 침략을 다 이겨내고 적어도 9세기 까지 약간의 변화만 겪은 채 그대로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 후 오랫동안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1930년대와 70년대 고고학자들의 발굴로 교회 터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날 이 교회는 모세 기념교회(Memorial Church of Moses)로 복원되었는데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관리하고 있었으며 특히 총천연색의 자연석을 촘촘히 박아 만든 모자이크가 유명했습니다. 비잔틴 시대의 유물로 보이는 4세기 교회의 아름다운 모자이크 바닥의 보존 상태는 양호했습니다. 특히 세례소와 성모 마리아 기념 채플 바닥의 모자이크가 정교했습니다. 세례소의 모자이크는 기하학적 장식에 둘러싸인 채 농부들, 사냥꾼들, 각종 새들과 짐승들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채플은 두 마당과 번제물을 바친 제단을 가진 예루살렘 성전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느보산의 모세 기념 교회 앞 정원에는 모세의 놋뱀 이야기를 연상하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지오바니 판토니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모세의 지팡이와 십자가를 복합해서 형상화한 철기둥 위에 구리뱀을 감아 놓았습니다. 민수기 21:4-9절에 보면 에돔 땅 호르산 근처에서 직선으로 가지 못하고 우회해서 행진을 하게 되자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쏟아 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뱀을 푸셔서 숱한 사람들이 죽어 넘어지자 모세가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구리로 불뱀 형상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산다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됩니다(요 3:14).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장대 위에 높이 달린 놋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듯이 죄와 죽음의 불뱀에 물린 인생들이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면 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높이가 근 10m 이상 되는 놋뱀과 십자가를 합친 이 조형물은 볼수록 많은 의미를 품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조형물 아래에서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구리 뱀 사건도 요르단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니 새삼 성경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현장의 지리와 합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탄했습니다. 이 밖에도 가톨릭교회에서 세운 석상 조형물이 느보산 입구에 자리 잡고 있으나 자세히 설명할 수 없음이 유감입니다. 다만 여러 사람들의 얼굴 모습을 조각으로 표현해놓은 것이 인상 깊었는데 아래쪽의 불평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꼭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처럼 느껴졌습니다. 시간만 넉넉하면 느보산에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었습니다. 아니, 느보산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거쳐 온 모든 성지가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몇 주 몇 달 동안 있으면서 천천히 음미해보고 싶었으나 짧은 시간에 많은 곳들을 둘러봐야 했기에 언제나 아쉬웠습니다. 그 날 오후 우리는 이스라엘로 넘어가야 했기에 시간이 없었습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우리는 느보산을 떠나 요단강으로 향했습니다.
<요단강물에 손과 머리를 적시며>
성지에 가기 전 저는 요단강은 이스라엘쪽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르단에서 간다니 이상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 가보니 요단강은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소문에 듣던 대로 폭이 크지 않은 흙탕물이었습니다. 발원지인 헐몬산에서는 기가 막히게 맑은 샘물이지만 하류로 흐를수록 탁류가 되었습니다. 군사 요새를 방불케 하는 요단강쪽으로 가니 강 건너 편에 이스라엘 군인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부흥회를 하는지 북소리와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요르단 쪽에서도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훨씬 여유가 있고 편해 보였습니다. 주변에는 희랍 정교회가 서 있었고 요단강 현장에서 세례 받은 이들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대개 정교회 사제들이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요단강을 그냥 스쳐지나 갈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요단강물을 손에 적시니 교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머리에 요단강물을 적셔주기를 원했습니다. 저 한 사람을 제외한 17명 모두에게 재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물론 이미 세례를 다 받았기 때문에 비록 요단강 성수라고 할지라도 또 다시 머리에 끼얹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그냥 의미부여를 하기 위해서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순간 이 요단강 성수를 물통에 담아서 한국으로 돌아가 세례 베풀 때 쓸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금방 부질없다는 판단이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세례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이지요. 천 번 만 번 세례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마음의 세례를 먼저 받지 않으면 부질없는 일입니다. 세례는 내적 구원과 성결의 외적 표시(sign)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예수께서 세례 받으셨던 그 요단강 지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고 혹시 정확히 그 지점이라고 할지라도 그 때 그 물은 흐르고 흘러 증발해서 어디론가 사라졌고 계속 새로운 물이 흐르기 때문에 요단강물이라고 해서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지이기 때문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룩한 곳은 어디인지 성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성지 전역을 돌아다닐 때마다 하나의 확신으로 제 마음을 때리고 또 때렸습니다. 요단강을 떠날 때 요르단을 떠날 때도 되었습니다. 2박 3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요르단과 사람들은 푸근했습니다. 뭔지 모를 정감이 갔습니다. 우리의 가이드인 오경환 과장님과 현지인 가이드를 따라 국경 검문소로 갔습니다. 소문에 듣던 것과는 달리 요르단을 출국하는 것이나 이스라엘 입국도 그리 엄격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이 여성들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우리가 워낙 선량하게 보여서 그런지 쉽게 통과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에 입국할 때 허리가 아픈 황정순 권사님이 찬 복대가 문제였습니다. 복대에 달린 자석이 보안 검색에 걸려 잠시 대기 명령이 떨어졌지만 이내 해결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점심시간이 넘어서 이스라엘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벌거벗은 느보산에서 나와 세상을 보았다>
요르단에서는 페트라와 모세의 므리바 샘, 느보산이 좋았습니다. 특히 느보산에 올라갔을 때 모세의 비장함에 휩싸였습니다. 시내산과 마찬가지로 느보산 역시 민둥산이었습니다. 나무나 숲이 전혀 없어서 숨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방이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늘 아래 하나도 숨김없이 나의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모세도 그랬고 저도 그랬습니다. 느보산에 올라보니 먼저 내 자신이 발가벗겨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 다음에 느보산은 전망이 기막혔습니다. 중동의 야산들이 대개 그렇듯이 전투 지휘를 하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동서남북의 지형지물들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모세가 그토록 숙망했던 가나안 땅이 보였습니다. 요르단 지경임에도 요단강 건너편의 이스라엘 도시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나만 밝히 드러나는 장소가 아니라 세상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관조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요르단의 에돔과 모압, 암몬 족속들의 지역에 비해 요단강 건너편의 이스라엘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느보산에 올라보니 이것이 보였습니다.
느보산에 올라보니 이와 같이 자신도 밝히 드러나고 세상도 밝히 드러나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 미련 없이 버릴 것은 버리고 지족(知足), 자기 분수를 지키며 만족하는 삶, 이것이 느보산이 가르쳐 준 교훈입니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신 34:5-6).
이스라엘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관문
신 34:3-4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의 내용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집트의 압제와 학정 아래서 중노동에 시달리다 해방되어 40년간 광야를 지나는 고난의 행군 끝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른 이스라엘 민족이 그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관문인 여리고 성을 공략하여 성공한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여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입니다. 고고학적 조사는 이 도시가 주전 약 팔천년쯤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리고는 광야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로서 대단히 비옥한 지역에 건설되었습니다. 신34:3에서도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벽도시로서 잘 조직되고 번영하던 도시였습니다. 여리고는 방어체제가 뛰어난 성벽도시였습니다. 성벽의 어떤 곳은 그 두께가 무려 6미터 이상이었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신 9:1). 성만 크고 견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곳 주민들도 모두 신장이 장대하고 강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를 그들 앞에서 메뚜기 같다고 생각했습니다(민 13:28-33). 그래서 여리고는 공략불가의 성으로 여겨졌고 막강한 군사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여리고가 이스라엘 백성의 진군소식을 듣고는 단단히 방어태세에 돌입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여호수아 6장 첫 머리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리고성이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무너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백성이 초인적인 지략과 전투력을 발휘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한 것이라고는 그 여리고 성 주위를 빙빙 돈 것뿐이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순종한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바로 6:3-5에서 듣는 대로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했습니다(수6:10). 백성이 그 지시대로 했을 때 실제로 여리고 성의 성벽이 무너지며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하는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본문 20-21절을 봅니다: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는 일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은 단지 말없이 성벽주위를 도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명령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본문 17-19절에 있는 대로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명령도 순종했습니다. 물론 이 명령에 대한 이스라엘의 순종은 완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곧 뒤따르는 7:1이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아간이라고 하는 자가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훔친 것이었습니다(7:21). 그러나 이 사실을 뒤집어 보면 아간 한 사람 빼고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자세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불가능할 것 같던 여리고 성 함락이라는 기적을 얻어내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결단과 희생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데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한 일이라고는 그 성 주위를 돈 것밖에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보기에 따라서는 상당한 자기희생을 치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슨 희생입니까? 그 부자 도성 여리고에서 물건 하나에도 손을 대지 않은 것입니다. 좋은 물건 하나라도 갖고 싶은 마음을 포기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전투를 해서 승리를 거두면 패자의 도성을 맘껏 노략질하는 것은 승자의 권리였습니다. 물건도 빼앗고 싶은 대로 빼앗고 사람을 죽이거나 자기 노예로 삼는 것도 자유였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에는 얼마나 탐나는 것들이 많았겠습니까? 게다가 이스라엘은 사십년간을 광야에서 이동하며 지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려주셔서 굶지는 않았지만 무슨 호의호식을 해보았겠습니까? 사십년간 광야에서 땀과 흙먼지에 찌들대로 찌들었을 이스라엘 백성의 옷차림은 보나마나 거지떼들의 그것에 흡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종려나무 우거진 여리고 성에 들어와서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와 이백 세겔 되는 은덩이와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를 보고 눈이 뒤집힐 사람이 어찌 아간 한 사람뿐이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사람 아간 말고는 아무도 그 넘쳐나는 온갖 진귀한 물건들에 손 댈 생각을 안 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인 것입니다. 놀라운 자기포기인 것입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섭기까지 한 백성입니다. 그 무서운 정신력과 규율을 지닌 백성 앞에서 어떤 민족이 감히 상대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여리고 성 공략에 나선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또 다른 형태의 자기희생, 자기포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리고 성 주위를 빙빙 돈 일입니다. 사실 그 크고 견고한 여리고 성을 공격해야 할 군사들에게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하루에 한 번씩 성 주위를 돌기만 하고 일곱 번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제사장들의 나팔 소리에 맞추어 소리만 지르라는 명령은 받아들이기도 이해하기도 힘든 것입니다. 제정신으로는 그대로 따라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합리적으로는 수용이 되지 않을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그 말씀대로 행한 것은 엄청난 자기포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성적 사고의 희생이고 합리적 판단의 포기인 것입니다. 인간적인 모든 경험과 지식을 내던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 것입니다. 사람을 신뢰하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사람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역사를 목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만이 가졌던 힘이었습니다.
오늘은 삼일절 기념주일입니다. 기독교 고유의 절기가 아닌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날을 교회가 특별히 기념하며 지키는 것은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백성으로 믿기 때문이며 우리의 해방과 주권국가로서의 독립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존재 자체를 하나님의 역사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은 1910년 한일합병에 의해 나라를 완전히 잃기 전인 1905년 을사보호늑약의 체결로 외교권을 강탈당한 직후부터 의병을 조직하여 맹렬히 독립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병력과 무장과 훈련에 있어서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압도적으로 우월했던 일본 군대와 경찰의 가혹한 공격과 진압으로 많은 희생자만 내고 말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의 종료 후 패전국들의 식민지 처리문제와 관련하여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고무된 애국지사들이 1919년 3월 3일에 예정된 고종황제의 장례식에 참례하러 전국에서 서울로 사람들이 모여오는 것을 이용하여 대규모 비폭력 군중시위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3월 1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서울과 주요 지방도시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군중시위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시위는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지만 일제의 무자비한 무력진압으로 그 목적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독립운동은 보다 조직적인 무력항전으로 나아가기도 했고 임시정부를 세우는 방향으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역량으로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절대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해방과 독립은 일본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다른 강대국들의 힘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옛 이스라엘 앞의 여리고 성같이 크고 견고하며 공격불가였던 일본제국이 무너진 것을 교회는 우리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로 보기 때문에 오늘을 삼일절 기념주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해방과 독립을 하나님의 역사로 본다면 우리는 또한 여리고 성을 공략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준 믿음과 순종, 자기희생과 자기포기를 함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의 생각과 계산과 판단을 더 앞세우며, 자기의 편안함과 이익과 탐욕을 포기할 줄 모르고서는 우리나라가 부강하고 번영하며 우리 민족이 행복하게 평화를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이 번영하기 위해서는 결단하고 희생할 줄 아는 지도자와 국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여호수아와 그를 믿고 따른 이스라엘 백성 같이 되어야 합니다. 지도자와 국민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와 이백 세겔 되는 은덩이와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앞에서도 눈이 뒤집히지 않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22일 목요일에 사학법 재개정을 위한 한국교회 총궐기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삼일절을 앞두고 88년 전 일제의 탄압에 맞서 우리 선조들이 궐기하던 심정으로 모였습니다. 일제보다 더 악랄하게 사립학교를 옥죄고 기독교의 선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한 세력과 그들이 개정한 사악한 법을 무너뜨리기 위해 교회가 일어난 것입니다. 150명에 달하는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삭발까지 단행하며 사학법의 재개정을 요구했지만 여리고 성처럼 완강하고 요지부동으로 이를 무시하며 외면하는 정부와 여당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떠들고 시위 좀 한다고 저 완악한 정부여당이 사학법을 개정할 것 같으냐?”고 부정적으로 말하거나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여당의원들은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했던 것처럼 사학법에 관해 논의를 하자면 회의도 열지 않고 도망 다니기 바쁘다고 합니다. 교회지도자들이 국회로 예방을 해도 만나주지도 않고 문도 열어주지 않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일어서서 싸우는 것입니다. 저들이 아무리 사학법 재개정의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여실 것이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신 여리고 성의 역사를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으로 기적 같은 승리를 얻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기 때문입니다. 지난 목요일에도 가두시위와 집회 신청을 냈지만 그날 경찰의 강경한 대처로 우리는 국회나 청와대는 고사하고 시청 앞까지도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소수로 제한된 시위대와, 차도가 아닌 인도를 통한 시위와, 침묵의 행진과, 인권위원회 건물 앞까지만 진출하는 것이 경찰과의 줄다리기 협상 끝에 겨우 허락되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행진했습니다. 여리고 성을 도는 이스라엘 백성의 심정을 안고 행진한 것입니다. 마스크를 쓰고 침묵하며 행진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했던 것처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침묵시위 끝에 인권위원회 건물 앞에서는 마스크를 벗고 다함께 사학법 재개정을 촉구하는 구호를 힘껏 외친 후 기도하고 마쳤습니다. 제사장들의 나팔소리에 맞추어 이스라엘 백성이 외쳤듯이 외친 것입니다. 그리고 개정사학법이 무너지는 일은 하나님의 손에 의탁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만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무너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정사학법은 가나안 족속들처럼 하나님께 맞서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의 자유와 선교의 자유를 말살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우상도 함께 섬기도록 강요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도록 맡기신 사유재산을 강탈하려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 백성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려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법은 서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법을 만든 자들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두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그의 부르심을 따라 우리는 일어나 싸워야 합니다.
이번 기도회에서도 100여명의 교회지도자들이 또 삭발을 했습니다. 우리 교인 중에서도 원로장로님 한 분과 여집사님 한 분과 교역자 열다섯 분이 삭발에 동참했습니다. 기독교인이 삭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교인들 앞에 서야 하고 강단에 서야 하며 예전을 집례해야 할 교역자가 삭발하는 것은 많은 불편과 볼썽사나움과 부끄러움을 감내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대의를 위해 체면과 보기 좋은 외모를 얼마간 포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분들이 삭발하는 동안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서글픈 현실 때문에 쉬지 않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얼마나 마음으로 이들을 고마워하며 자랑스러워했는지 모릅니다. 한국의 어머니교회의 젊은 교역자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어려운 결단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감사했던 것입니다. 또 수많은 우리 교우들이 그날뿐 아니라 매주 목요일 기도회에 참석해서 뜨겁게 기도의 손길을 모아주셨음에 얼마나 감사하며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삼일구국운동은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복지국가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치르는 첫 전쟁입니다. 개정사학법이 무너지며 이 가나안 복지국가로의 진입의 관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새롭게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Ⅲ
신 34:4-12 / 정언용 목사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이스라엘은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척박하기 그지없는 땅이었습니다. 먼지만 풀풀 거리는 전혀 쓸모 없는 땅이었는데, 이제는 그 땅이 점차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쓸모 없는 가나안 땅을 오늘날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뀌기까지는 하나님께서 다음의 몇 가지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키부츠를 통해서 축복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화시킨 단체는 바로 이스라엘의 [키부츠]입니다. 키부츠란 말은 히브리말로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키부츠라는 말은 우리말로 하면 [협업농장]을 말합니다. 키부츠의 역사는 약 90년 정도입니다. 키부츠에서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키부츠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개인의 사유재산을 모두 포기해야 합니다. 현재 키부츠는 약 270개 정도가 269 (98년 현재)개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이 키부츠에 들어가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전체 인구의 2%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100명중에 2명 정도에 해당하는 인구인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키부츠의 인구는 이스라엘 전체 인구의 5%를 넘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의 인구가 이스라엘 사회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해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2%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지만 이들이 이스라엘 사회를 엄청나게 변화시켜서 실제적인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셨습니다. 키부츠에 속한 사람들의 땀과 수고를 통해서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 키부츠의 일차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버려진 땅을 어떻게 개척하느냐?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네겝과, 엔게디 광야 같은 버려진 땅을 어떻게 비옥하게 만드느냐? 가 이 키부츠의 목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키부츠 농장은 사람이 거의 살 수 없는 지역에 세워집니다. 황폐하고 쓸모 없는 땅 위에 키부츠 농장을 세우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농장이나 공장을 만들게 될 때에는 교통이 좋고, 입지 조건이 좋은 곳을 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키부츠는 쓸모 없는 광야와 같은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전혀 살 수 없는 불모지나 혹은 쓸모 없는 땅에 세워지게 됩니다. 나쁜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겠다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면 사해 근처에 가면 [엔게디]라는 광야가 있습니다. [엔게디]라고 하면 그 곳은 다윗이 사울의 칼을 피해 몸을 숨겼던 광야지역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이곳은 바로 사해 옆에 있는데, 사해는 우리가 잘아 는 대로 워낙 짠 바다이기 때문에 사해 곁에 있는 모든 지역은 모두가 소금으로 절어 있는 지역입니다. 그래서 물이 있더라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 바로 사해 근처의 땅입니다. 토양 자체가 염분으로 찌들었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인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의 사람들이 엔게디 광야를 찾아가서 거기에 키부츠를 만들었습니다. 약 1950년경부터 키부츠를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에 그 지역에 들어온 사람들은 몇 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염분이 가득한 땅에 물을 끌어들여서 계속 소금기를 씻어내는 일만 했습니다. 염분으로 인해서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까 물을 끌어대어서 토양의 염기를 씻어내는 일을 반복한 것입니다. 왜 사서 고생을 할까? 우리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 고생을 몇 년 동안 계속하고 난 후에 비로소 그 땅에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의 엔게디 광야는 광야가 아닙니다. 그 넓은 광야가 변하여서 놀랍게도 쓸모 없는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현재 엔게디는 옛날 버려진 쓸모 없는 땅이 아니라 숲이 울창하고, 새들이 지저귀는 아름다운 지역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처럼 쓸모 없는 이스라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어 나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통해서 바꾸었습니까? 이스라엘의 키부츠를 통해서 축복하신 것입니다. 키부츠의 정신을 통해서 축복하신 것입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곳, 남들이 일하기 싫어하는 곳, 아직도 개발되지 않은 미개척지만 찾아다니면서 그 곳에다가 키부츠를 세우고 그 키부츠를 통해서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의 축복은 바로 이런 키부츠의 정신을 통해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버려진 땅을 개척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 가는 축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을 살리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키부츠의 정신을 가지고 남이 하지 않는 일을 자신의 자리에서 말없이 이루어 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아직 남이 이루어놓지 않은 일에 매달려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사람들이 한국을 살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살리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숨어서 말없이 봉사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서 말없이 숨어서 일하는 사람들이 오늘의 교회를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그냥 앉아 있으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성도 여러분에게 가득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적절한 사람을 택하셔서 축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로 하여금 가나안 땅까지 인도할 수 있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모세의 나이가 120세가 되었어도 시력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체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더 이상의 일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있는 능력이나 힘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역할은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데 있지 않고,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임무가 어디까지인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임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이 보이는 곳까지 인도하는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여호수아를 불러서 그에게 안수하고 모세는 느보산에서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후진에게 길을 열어주고 자신은 과감하게 물러난 것입니다. 더군다나 성경에는 모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왜 모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했을까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웅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때문에 만약에 모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되면 아마도 모세는 죽어서 까지도 마치 우상처럼 백성들의 섬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봐 두려워서 이스라엘은 모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기꺼이 따랐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 인물이지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기 위해서 산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과감하게 모든 것을 뒤로하고 여호수아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아브라함과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역사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쓸모 없는 이스라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수상을 지낸 [벤규리온]이라는 사람입니다. 벤규리온은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는데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벤규리온은 이스라엘의 초대수상으로 13년 동안 일했습니다. 그리고 77세에 은퇴를 했습니다. 그는 수상직에서 물러나자 마자 그 다음날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네겝 황무지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키부츠 농장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수상을 지냈다고 해서 키부츠에서 남다른 대접을 받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키부츠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똑같이 먹고, 똑같이 땅을 파면서 땀을 흘리고, 함께 먹고 뒹굴면서 지냈습니다. 그는 10년 동안 키부츠에서 일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밴규리온은 죽은 후에 저금통장 하나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후손들을 위한 땅 한 평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은퇴한 후에 네겝 광야에서 살던 조그만 오두막집 한 채 만을 남기고 세상을 뜬것입니다. 그는 유언을 통해서 자신이 살던 오두막집조차도 키부츠에 돌려주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세상에 물질을 남긴 대신에 위대한 믿음과 정신을 남겼습니다. 그는 공수래 공수거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은 네겝 지역에 있는 벤규리온이 살던 오두막집과 키부츠를 보면서 [나도 이 다음에 크면 벤규리온과 같은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다고 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젊은이들의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을 함으로서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어 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적절한 인물을 택하셔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의 광야는 바로 벤규리온과 같은 인물을 통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불러 주셨을까? 나를 통해서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일까? 모세는 과감하게 여호수아에게 모든 것을 물려줌으로써 자신이 해야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정리함으로써 오히려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벤규리온 같은 분은 은퇴 후에도 노후의 편안한 삶을 모두 버리고 키부츠의 일원이 되어 마지막 기력을 다하는 순간까지 땀을 흘리며 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벤규리온은 마침내 쓸모 없는 이스라엘의 광야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이런 인물들을 통해서 역사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오늘날의 축복을 누리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이런 인물들을 시시 적절하게 불러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축복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쓸모 없는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귀한 역사가 오늘 여기 앉아있는 여러분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축복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어떤 축복을 예비하셨느냐? 그 축복은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땅 가운데에는 그 동안 전혀 쓸모 없는 땅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있었습니다. 그 곳이 바로 사해(死海)바다 입니다. 죽을 死/ 바다 海 자를 쓰지 않습니까? 말 그대로 죽은 바다라는 말입니다. 그 동안 사해는 전혀 쓸모 없는 바다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바다를 죽은 바다로 생각했기 때문에, 사해 다 라고 이름지은 것입니다. 이 바다에는 생명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염도가 일반 바다에 비해서 7-8배 정도가 높습니다. 때문에 사해에 들어가면 사람이 둥둥 뜹니다. 베개 하나만 있으면 바닷물 위해서 드러누워서 신문을 읽을 수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염도가 높으니 어떻게 생명체가 살 수 있겠습니까? 사해에서 낚시를 해서 고기를 잡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로 생각하면 됩니다. 사해에는 살아있는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해근처에서 고기를 잡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북쪽에서부터 흘러오는 요단 강물은 이 사해로 흘러 들어옵니다. 그런데 요단 강에서 살던 고기들이 멋도 모르고 강을 따라 내려오다가 사해로 흘러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눈치가 빠른 고기들은 요단강을 따라 내려오다가 사해로 들어가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얼른 유턴을 해서 다시 요단강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런데 어벙한 고기들은 미처 유턴을 하지 못하고 사해로 휩쓸려 들어갑니다. 민물에서 염분이 보통 바다보다도 7-8배나 높은 사해에 들어왔으니 고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기가 짠물을 먹고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단강과 사해가 만나는 지점에는 어벙한 물고기들이 기절을 해서, 하얀 배를 드러내 놓고 물에 떠올라 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단강과 사해가 만나는 지점에는 아랍 사람들의 마을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기절해서 물에 떠오르는 어벙한 물고기만 잡아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사해는 물고기 한 마리조차 없는 전혀 쓸모 없는 바다였습니다. 그래서 사해라고 이름지은 것입니다. 죽은 바다, 생명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쓸모 없는 바다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는 사해라는 말은 없습니다. 사해라는 말 대신에 신명기 3:17절에 보면 [염해(鹽海)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금 바다라는 말입니다. 염해라고 하는 말 가운데에는 그 바다 가운데 뭔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죽은 바다가 아니라 뭔가가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동안에는 죽은 바다라고만 생각했던 사해 바닷물 속에는 수많은 광물질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해 바다 근처에는 많은 공장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광물질을 추출하는 공장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자면 광물질 가운데에는 [브로마인]이라는 광물질이 있습니다. 이것은 페인트나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한 물질입니다. 그런데 사해 바다에는 이 브로마인이란 광물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세계에서 쓰고 있는 브로마인의 26%가 바로 이 사해바다로 부터 추출된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도 사해바다로부터 이 물질을 수입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해 바다 속에 얼마만큼의 브로마인이 포함되어 있느냐? 세계 사람들이 현재의 양대로 쓴다고 하면 무려 100년 동안 쓸 수 있는 브로마인의 양이 이 사해 바다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해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소금은 무궁무진하고, 마그네슘과 같은 광물질도 엄청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기다가 사해 바닷물은 나이가 들어서 통증이 생기는 사람들에게 효능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피부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이 사해 바다에서 목욕을 하면 아주 큰 효과 있다고 하여, 사해바다는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떠올랐습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 사해 근처의 공기는 다른 곳보다도 공기 중의 산소 함유량이 약 10%정도 더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어디든지 세계에 있는 공기는 다 비슷한데 유독 이 사해 바다 근처의 공기에는 다른 곳보다 약 10% 정도의 산소가 더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사해의 갯벌은 너무나 유명해졌습니다. 성지 순례에 오는 사람들은 사해에 가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갯벌 진흙을 몸에 바릅니다. 얼굴까지 새까맣게 바르고 장난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요즘 화장품 가운데에는 진흙 팩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제가 한번 집에서 해봤습니다. 집사님 중에 한 분이 사해에서 나온 화장품이라고 진흙 팩을 여러 개 가져 오셔서 우리 리더모임을 하는데 주셨습니다. 그래서 궁금해서 한번 저희 집사람더러 해봐달라고 했습니다. 얼굴에 진흙을 발랐는데 얼마나 시원한지요! 염기가 있어서 그런지 얼굴이 막 따끔따끔합니다. 그래도 얼굴이 매끄러워진다고 하니까 참고했죠! 그런데 다른 팩들은 잡아떼면 딱 떨어지잖아요! 이 진흙 팩은 떨어지지를 않아요! 꼭 물로 씻어야 합니다. 한번하고 났더니 며칠 동안은 얼굴이 깨끗했습니다. 그래서 한번 사해에서 나오는 진흙 맛을 봤습니다. 세계의 사람들이 바로 이 사해에서 나오는 갯벌로 피부화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을 두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겉으로 보면 그 땅은 쓸모 없는 땅이 이었기 때문에 광야 혹은 사해라는 명칭을 붙여 놓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미처 깨닫지 못한 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그 땅을 두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쓸모 없는 땅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실 때에는 미리 축복의 내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 축복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땀을 흘리는 우리의 노력과 수고를 통해서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약속해 주셨다고 해서 그 축복이 가만히 앉아있는 우리에게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축복을 얻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수고와 땀이 있어야 하는지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너무도 잘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 축복에 대한 약속을 3000년이란 긴 시간 동안 간직하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 약속은 이제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점차 광야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쓸모 없는 땅이 점차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굳게 믿읍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영혼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축복은 하늘의 영원한 축복입니다.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가나안 땅에 대한 축복을 주셨지만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가나안 땅에 대한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 약속을 얻기까지는 수많은 눈물과 고통이 뒤따랐던 것처럼 우리들도 하늘의 영원한 축복을 얻기까지에는 이 땅 위에서 많은 고통과 고난이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땀흘리고 수고하고 고난을 당한 날 수 만큼 우리를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에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신명기 34:5-7(27:12-14)
오늘 송구영신 주일을 맞이하여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드리고자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송구영신 주일날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와 현재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며 여호와 이레 새해에도 우리를 위해 은혜와 축복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에벤에셀]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계시니 두
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새해에도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을 기대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여러분은 영적으로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1)아직도 이집트에 계십니까?
아직도 이집트에서 종살이 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죄와 사탄에게 시달리고 있다면 영적으로 출애굽 하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바로 왕의 종살이를
400-430년 간 했습니다.
수백 년 간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나쁜 유전이 사라지고 나쁜 유전자가 제거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혈압, 당뇨 등 나쁜 질병이 유전 된다고 하는데 하나
님께서 나쁜 유전자를 좋은 유전자로 바꿔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담으로부터 유전 된 죄의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와
병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2)아직도 홍해 바다 가에 서 계십니까?
홍해바다를 통과해야만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바다에 길을 내주신 것처럼 여러분 앞에 있는 장애물을 제거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
로 축원합니다.
3)아직도 광야에 머물러 계십니까?
광야에서 계속 계시면 광야에서 죽습니다.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출애굽 1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 만 제외하고 40년 광야 생활에서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의 무덤이 광야였습니다. 부정적인 10명의 정탐 군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4)시내 산에 계속 머물러 있어도 안 됩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서 십계명을 받았다고 해서 시내 산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형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를 만든 것처럼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배반 할 수가 있습니다.
5)엘림에 계속 머물러도 안 됩니다.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여정에 이스라엘 백성들이오아시스 [엘림]에 가보니 12샘과 종려나무 70주가 있어 안성맞춤 이었지만 엘림은 가나안 땅이 아닙니다. 엘림이
좋다고 엘림에 안주하면 안 됩니다. 엘림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해 가야합니다.
6)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도 안 됩니다(민21:4-6)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 뱀에 물려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사탄에게 영적으로 물리면 광야에서 죽습니다. 사탄 옛 뱀(에덴동산의 뱀)에게 물리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으면 살게 됩니다.
7)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아말렉 족속과, 바산 왕 옥과(민수기21장) 미디안 족속과 싸워 승리한 것처럼(민31장) 영적인 전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하시기
를 축원합니다.
8)요단강을 건너시기를 축원합니다.
요단 강 가에 서 있기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단강을 건너가서 여리고 성을 정복하고 아이 성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지파별로 가나안 땅을 분배를 받은 것처럼 새해에는 7가지를 정복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을 [갈렙]처럼 개인적으로 받으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
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는 120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압 땅 아바림 산(느보 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본 후에 죽어 모압 땅 골짜기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모세가 120
세에도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형 아론처럼 요단강도 건너지 못하고 죽으면 안타깝습니다. 요셉과 모세는 죽어서라도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 땅과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여러분과 저의 이름이 하나님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을 정복한 것처럼 새해에는 무엇을 정복해야 할까요?
영적으로 실질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우상을 배격해야합니다. 2)사탄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합니다. 3)병마를 물리쳐야합니다. 영육 간에 건강하셔야 합
니다. 4)적그리스도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해야합니다. 5)이단을 배격하고 물리쳐야합니다. 6)혈기와 욕심을 없애고 영과 정신과 육신에 해로운 것은 끊어야합니다.
7)십계명을 어기면 안 됩니다.
그러면 다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고 축복해 주시고 지켜주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신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운행하시고 역사하셔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새해에도 여호와 이레로 준비해 주셔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여호수아를 따른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 따라가면 됩니다.
이스라엘을 이끌어 낸 사람
신 34:9-12 / 김삼환 목사
하나님은 이 땅위에 무한히 넓고 큰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늘과 하늘 아래 땅 그리고 땅 아래, 모든 우주의 많고 많은 생명과 신비한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시고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복을 주시고 모든 만물을 맡기셨습니다. 인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만물을 관리하고 다스리며 보존하고, 모든 만물을 잘 가꾸는 청지기요 정원사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일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워주셔서 하나님이 만드신 이 모든 만물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 큰 권세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만물이 잘 되는 것을 이제 인간으로 말미암아 이 땅을 잘 되게 하시고 또한 모든 파괴한 것도 인간이 잘못되면 하나님께서 는 언제나 자연에게도 같은 재앙을 내려서 심판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키를 맡기셨습니다. 호텔에 주인 사장이 있지만 방문을 여는 것은 평범한 여직원이 마스터키를 가지고 전체 호텔 문을 열 수 있듯이, 하나님은 이 우주만물의 주인이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마스터키를 맡겨서 모두를 관리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잘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하면 이 세상은 아름다운 에덴동산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고 이 세상을 잘 꾸밀 수 있는 것은 여러분과 저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모든 일을 하게 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재쳐놓고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 없이 일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귀히 여기십니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서, 사람의 가정에서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나시며, 사람이 먹고 마시며 사람이 입는 의식주를 예수님은 그대로 입고 먹으며 주무시면서 사람과 똑같이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섬기고 사람을 위해 살다가 세례를 받을 때도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에게 세례를 받으시며, 마지막에는 십자가 위에 사람을 위해서 생명을 버려 피 흘려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사람을 떠나는 일이 일절 없습니다. 항상 주님께서는 사람을 귀히 여기십니다. 사람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위해 죽으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사람이 참 귀합니다. 성령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성령님은 오셔서 더구나 내 안에 오십니다. 사람을 위해서, 사람이 사람답게 잘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도와주시고 권고해 주시며, 이해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며 능력을 주시는 것이 성령이십니다. 구약에 성부 하나님도 사람을 떠나지 않고 항상 그 백성을 위해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함께하시며, 그 백성의 모든 움직임을 관찰하십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위해서 지음 받고 쓰임 받으며 택함 받아 여기까지왔습니다. 전에 우리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역사적인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러나 성경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일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잘 섬기되 항상 사람을 주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울 왕을 세울 때도 사람을 통해서, 다윗을 세울 때도 사람을 통해서, 솔로몬을 세울 때도 사람을 통해서 늘 일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구를 쓰시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사람, 하나님이 쓰는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들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정을 축복할 때, 우리나라를 축복할 때, 우리 기업을 축복할 때 항상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고 구원하시며 축복하여 주십니다. 어떤 가정에는 아버지를 통하여 은혜를 주시고 전 가정을 축복하십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가 그 가정의 모세입니다. 어떤 가정은 어머니를 통해서, 어떤 가정은 형을 통해서, 어떤 가정은 동생을 통해서 은혜를 주십니다. 룻이라고 하는 사람의 가정은 며느리를 통하여 온 가정에 은혜를 주십니다. 그 가정에는 다른 분은 복이 없습니다. 며느리를 통해서... 그럼 며느리를 따라가야 됩니다. 며느리로 말미암아 그 가정에 은혜를 주십니다. 요셉같은 사람은 열 두형제 가운데 열 한째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 가정을 구원하시고 민족을 구원하십니다. 막내라고 형들은 무시했습니다. ‘이 자식! 저리가~’ 하고 얼마나 미워합니까?
나중에는 애굽에 팔아 먹습니다.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막내를 통해 일하십니다. 그럴 때는 온 집안이 막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를 따라 가야 합니다. 야곱도 나중에 안 따라 가려고 했습니다. ‘여기 약속의 땅에 살아야지 내가 어떻게 애굽에 가냐’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서 ‘야곱아 너 막내아들 통하여 너희 가정과 인류를 모두 구원하려고 하는데 아들을 따라 가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교인들은 ‘난 아들 안 따라 갑니다. 난 끝까지 우리 둘이만 살 것입니다.’ 그렇게 결단을 내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딸에게로 가라.’ 하면 딸에게로 가고 ‘아들에게로 가라!’ 하면 아들에게로 가고 ‘사돈집에 가라!’ 하면 사돈집에 가고, 어디든 가라고 하는 데로 가야지 자기 혼자 ‘나 안가겠습니다. 나는 이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누구를 통해서 일하시든지 따라가야 할 사람은 따라가야 하고 도와줘야 할 사람은 도와줘야 하며, 협조할 데는 협조해야 하고 순종하면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칙대로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다윗도 보십시오. 여덟 형제 가운데 막내아들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형들한테 전쟁터에 음식을 가져가니까 형이 ‘너 왜 왔느냐? 양 먹이는 주제에 양이나 먹이지 네가 전쟁에 뭐 하러 왔느냐’고 막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니까 ‘내가 왜 오면 안 됩니까? 나라가 위기에 빠졌는데 내가 오면 안 됩니까?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는데, 나는 양을 먹이다가 사자와 곰도 싸워서 이겼는데 이 골리앗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막내 아들이지만 하나님이 그 막내를 통하여 가정만 아니라 온 나라를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역사하는 곳으로 늘 따라가고 순종하며, 협조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사사기 11장에 보면 기생의 아들이 있습니다. ‘입다’라고 하는 사람인데 여러 여자를 만나가지고 아기를 낳았는데 기생을 만나서 낳으니까 더구나 신분이 낮습니다. 형제들이 동네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남의 나라로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위기를 당하니 도무지 나라를 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쫓아낸 이 기생의 아들 입다를 찾아가서 ‘어쨌든 이 나라를 건져 달라.’고 합니다. ‘필요없다고 나를 기생의 아들이라고 멸시하더니 나 안 간다.’고 하니까 ‘네가 우리나라를 건져만 주면 우리나라의 지도자가 된다.’합니다. 그래서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주고 입다는 사사가 됩니다. 성경에는 누구를 통해서, 어떤 때는 기생 라합을 통해서도 온 가족이나 나라를 건지시기도 하시고, 누구를 통해서 일하실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세우시는 곳으로 따라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나라를 세우실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어느 가정을 쓰실지 모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쓰신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건져냅니다. 국가도 그렇습니다. 국가도 나라가 되고 싶다고 해서 큰 나라가 되는 게 아닙니다. 예레미야서에 있는 대로 하나님은 토기장이입니다. 하나님이 어느 나라는 큰 나라로 만들고 어떤 나라는 작은 나라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모두 좌우하십니다. 큰 나라를 자기가 되고 싶어서 큰 나라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의지 안하고 애굽을 자꾸 의지하니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제 이 세계는 바벨론이 통치하니까 너희들은 바벨론하고 손잡아라. 바벨론하고 함께 살아라. 바벨론을 의지해라.’ 하지만 시드기야나 여호야김, 여호야긴 왕들이 도무지 선지자의 말을 안 듣습니다. ‘우리는 애굽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에 애굽을 의지하겠다. 아니야 앞으로 바벨론 시대가 되는거야.’ 하고 아무리 말을 해도 안 듣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애굽 군사하고 힘을 합해서 바벨론을 자꾸 공격하며, 바벨론에 구테타를 일으키니까 바벨론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은 전쟁을 통하여 애굽을 물리치고 세계를 통일한 다음에 바로 제일 미운 나라 유대나라를 그대로 느부갓네살이 들어와 공격을 해 이스라엘을 BC 586년에 완전히 끝장내 버립니다. 줄을 잘 타야 됩니다. 중요합니다. 가정이나 기업을 해도 기업 선택을 잘해서 위치를 잘 선정하고 사업을 잘 해야 하듯이, 국가도 손을 잡아야 될 나라를 잘 잡아야지 안 그러면 망합니다. 하나님이 쓰는 나라와 자꾸 부딪히고 그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합니다. 로마는 BC 7세기부터 지중해 안에 시작이 되어서 BC2세기경에는 전 세계를 로마가 통치를 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이스라엘은 이미 로마의 지배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한 번도 로마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니까 ‘로마 없어져라.’ 그러면 없어질텐데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로마 총독하고 부딪히지 않고 예루살렘에도 로마 총독이 있으며, 가이사랴에도 총독이 있었고 군인들이 모두 와있어도 한 번도 예수님은 그 나라와 부딪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회사에 가면 회사의 순리대로 따라야 되고 교회에 가면 그 교회를 순리대로 따라야 되며, 결혼해서 어느 집에 시집을 가면 그 시집 식구들 순리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자꾸 부딪히고 친정에 와서 울며 그런 건 쫓아내 버려야 됩니다. 그래야 인간이 됩니다. 어디 가서 자꾸 부딪히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꾸 로마하고 부딪힙니다. 예수님도 그러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결국 로마 총독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지만 로마를 물리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로마를 멸하자 해도 예수님은 ‘그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것이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때가 아닌 것을 우리가 하려고 하면 그것에 무리가 오고 부작용이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서도 유대인들은 로마와 계속 싸우며 쿠데타를 일으켜서 계속 투쟁하니까 로마가 AD 70년에는 ‘티토’라는 장군을 통해서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모두 잡아가고 유대인들은 세계로 흩어지며, 그 이후로 1900년 만에 다시 회복되지 않습니까? 1948년 독립하기까지 그렇게 오랜 세월을 유리방황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이 AD 70년에 망했는데 망해도 끝까지 남은 1,000명이 ‘마사다’라는 곳으로 갑니다. 마사다는 이 지상에 있는 나라 가운데는 제일의 요새입니다. 이런 요새가 없습니다. 밑에 사해 바다가 있는데서 해발 400미터가 올라와 있는데 밑에서도 물이 안 나는데, 400미터에 컵과 같이 떠 있는 그곳에 물이 나옵니다. 1000명이 거기서 3년을 버팁니다. 로마의 한 군단이 왔는데도 이걸 못 이겨냅니다. 전 로마 별의별 특수부대가 와도 이 마사다를 점령 못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북쪽으로부터 수 만 수 십만 인원을 동원해서 흙을 쌓아 올라가면서 같이 올라가도록 해서 이렇게 공격을 합니다. 안 그러면 군인의 힘으로는 아무리 많이 와도 공격이 안 됩니다. 돌 하나만 던져도 모두 죽는 절벽으로 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컵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1000명이 3년을 버텨도 로마가 못 이기다가 나중에 북쪽으로 모두 쌓아 올라올 때 내일이면 이제 이스라엘이 모두 죽으니까 그날 저녁에 10명을 뽑아가지고 1,000명을 죽입니다. 자기들이 결의합니다. 우리가 로마에 죽는 것보다는 우리가 자살하자 하고 회의를 해서 하나님을 골똘히 믿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기도하고 성경만 읽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1000명중 10 명을 뽑아가지고 1000명을 먼저 다 죽이고 10명은 또 1명이 남아가지고 죽이는데 이걸 누가 알았습니까? 모두 죽는 사이에 여자 한 명이 애기 둘을 데리고 숨습니다. 안 죽습니다. 모두 자진해서 죽는데 이 여자는 남아서 생생하게 그걸 모두 보고 로마군이 들어온 다음에 어떻게 죽었는지를 세계적인 유대인 학자, 거기 같이 따라온 요세비우스라고 하는 학자한테 알려서 지금 이것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섭리하는 대로 따라가야 됩니다.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기도만 하고 세상의 흐름을 안 따라 가면 안 됩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과 나 사이만 열어야 되겠다.’ 하고 기도원에 가 밤낮으로 산에 가서 기도하면서 인간관계는 다 막아버리는 분이 계십니다. ‘모두 죄인들, 나쁜 놈들, 하나님 없는 사람들’ 하지만 하나님 없는 사람도 만나야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사업도 사람, 국가도 사람, 정치도 사람, 행복도 사람을 통해서 행복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행복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전도도 사람을 통해서 전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음부에 내려가서 너무 지옥에 와서 고통스러우니까 아브라함 보고 ‘아브라함이시여 나사로를 보내서 우리 집에 애들이 4형제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데 애들한테 전도해서 이런 곳에 안 오도록 해주십시오.’ 하니까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살아 있는 사람은 사람이 전도해야지 귀신이 나와서 전도하면 보기에는 전도하면 될 것 같지만 귀신이라고 안 믿는다.’라고 합니다. 사람의 문제는 사람을 통해서 해결해야지 천사를 통해서, 귀신을 통해서 해결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사람에게 맞추는 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해야 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오늘 모세라고 하는 분은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통하여 민족을 건지시려고 준비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태어날 때도 레위지파에서 태어나게 하십니다. 환난을 인해 살 수 없어서 나일강에 빠뜨렸는데 거기에 바로왕의 딸이 나와서 목욕하다가 집으로 데려가서 왕궁에서 큽니다. 이 배후에는 누가 계십니까? 모든 사람이 하는 일 배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모든 발걸음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하나 행동과 삶 위에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섭리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기까지 온 것다 보면 여러분은 신앙이란 말이 무슨 말이냐? ‘아~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있다. 이런 것 하나하나 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여러분이 믿어져야 됩니다. 모세는 드디어 왕궁에서 천문학을 배우고 군사학을 배우며, 정치학을 배우고 경제학을 배워서 앞으로의 훌륭한 세계적인 지도자의 훈련을 받습니다. 사람은 그 실력만 가지고는 안 되니까 하나님은 어디로 보내십니까? 저 광야로 보내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을 치면서 별의별 외롭고 험하며, 고통당하는 훈련을 시키십니다. 그 배후에도... 여러분이 난데없이 하루 아침에 어려운 것도 그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걸 믿어야 합니다. 좋다고 기뻐하지 말고 나쁘다고 낙심하지 말며, 우리의 모든 발걸음에는 하나님 섭리가 있습니다. 나이가 80이 되어서 인생 끝났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서 ‘너는 애굽으로 가라. 내 백성을 이끌어 내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애굽으로 가서 지팡이 하나만 잡고 힘없이 건넜지만, 하나님이 그 지팡이에 능력을 주시고 그 발걸음에 능력을 주셔서 그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내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에도 이런 하나님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세밀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여러분의 길도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계획하시며, 앞으로 크게 들어 쓰실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유명한 세르반테스도 말하기를 ‘로마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랬습니다. 하루아침에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되어서도 안 되고 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것은 이런 과정과 훈련과 섭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주의 재림이 가까웠다 해서 어떤 분들은 ‘세상 되는 것 보니까 주의 재림이다.’ 하고 모두 모여서 산으로 가서 기도도 하고 흰옷 입으며, ‘주님께서 지리산으로 먼저 오시지 않냐?’ 하고 산위에 가는 분들도 많다고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나라가 어수선할 때일수록 그런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자기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충실하게 자기 삶을 살면서 천국을 준비해야지, 이건 모두 무시하고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떠나며, 모두 산에 올라가 있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성경에 있는 대로 지붕위에 있는 사람은 내려오지 말고 밭에 있는 사람은 들어가지 말며 내 할 일을 다 하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중국에 있는 어떤 활 명궁 중국 전체에 제일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제일 처음에는 활 연습을 이렇게 합니다. 벼룩을 실에 달아 앞에 놓고 쏘았습니다. 얼마나 작게 보이는지 그러나 쏘고 쏘고 하루에 600발씩 3년을 쏘았는데 나중에는 벼룩이 말만하게 크게 보이더랍니다. 그리고 십년을 계속해서 노력했는데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일이 처음에는 그렇게 작게 보여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끊임없는 경건과 믿음으로 나아가면 여러분도 좋은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하나하나 착실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성실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우연하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기초가 너무 부족하고 특별히 어린 청소년들이 기초가 부족합니다. 철저하게 학교 교육의 기초를 잘 닦아야 되고 가정교육을 잘 해야하며, 윤리 도덕 인격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를 잘 닦아야 됩니다. 그래야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은 그저 무시하고 나중에 무슨 큰 일을 할 줄 아는데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건달들이 너무 많습니다. 기초를 닦지 못해서 전혀 준비하지 못하고 중년이 되어가지고 타락하고 길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마 세계에 우리나라같이 건달들이, 사기꾼이 많은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기초를 안 닦아서입니다.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자기 잠자는 방도 깨끗하게 정돈할 줄 알아야 하고 자기 입는 옷도 깨끗하게 빨아서 입으며, 자기 얼굴 하나도 깨끗하게 돌보고 자기 신발하나도 깨끗하게 닦으며,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적은 것 하나도 소중히 여겨야 나중에 나라를 맡기면 나라 살림도 소중하게 잘 관리할 수 있습니다. 자기 방 하나도 깨끗하게 해야 나중에 나라 살림을 맡기면 살림도 깨끗하게 정돈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장 하나, 성적표 하나도 잘 관리하고 중고등학교 교과서 하나도 버리지 않으며, 잘 관리해야 나중에 큰 사람이 됩니다.
세상에서 자기 걸어온 길을 하나 하나 소중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다른 나라 가정에 가 보면 전부 집안에 옛날 것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자기 어렸을 때를 전체로 그런 걸 진열을 합니다. 우리나라 가정에 가 보면 대통령하고 찍은 거나 걸어 놓고 장관하고 찍은 것, 화려한 것만 갖다 놓고 자기 어렸을 때 찍은 것 하나 없습니다. 결혼사진 그런 것 갖다 걸어 놓아야 됩니다. 보면 창피하지만 그래도 그런걸 갖다 걸어 놓아야 보기 좋습니다. 저도 그런 것 보면 너무 창피해서 ‘아유~ 내가 이럴 때가 있었나?’ 해도 그런 사진이 너무너무 나를 보여주니까 참 좋습니다. 아이들하고 어렸을 때의 그런 사진들을 많이 갖다 걸어 놓으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하나하나를 잘 정리해서 충실하게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그런 것 하나 하나 버리지 않고 잘 간직하십시오. 저는 결혼식에 입었던 옷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20년 된 구두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누가 가져가기 전에는 제가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도 개척하고 크게 우리교회가 부흥할 줄을 몰랐지만, 주보 하나도, 인쇄물 하나도 제가 소중
하게 전부 그때 제 손으로 전부 등사해서 나눠주었습니다. 전부 그것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은 모르지만 우리교회도 몇 백 명 될지 어떻게 아냐 하고 그런 마음으로 준비해 놓았습니다. 소중하게 준비해 두었습니다. 우리교회 수많은 이 행사, 전부 비디오로 되어 있습니다. 몇 십 년 전 것도 전부 되어 있고 지금은 CD로 해서 하나 하나 자료를 모두 남겼습니다. 예배시간, 모든 집회 다 있습니다. 어느 시간에 누가 졸았는지 다 나오는 겁니다. 교회 조직 전부 다 세밀하게 해 놓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축복은 하루아침에 오는 게 아닙니다. 좋은 날이 하루아침에 오는 게 아닙니다. 나라의 문제가 어느 누가 도와주어서 좋은 날이 오겠다 그런게 아닙니다. 우리 온 국민이 제 자리에 돌아가고 우리 모든 삶이 제 자리에서 충실하게 성실하게 살 때 모두 모세같이 될 수 있고 다윗같이 될 수 있습니다.
유명한 윈스턴 처칠은 회고록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나중에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총리께서는 어떻게 이렇게 지식이 해박합니까? 어떻게 이렇게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그럴 때 처칠이 말하기를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깡패들하고 모여서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때려가지고 돈 빼앗고 그런 일만 했습니다. 하루는 책을 읽고 가는 옥스퍼드 대학생 놈을 붙잡아다가 때렸더니 팍 쓰러져서 피를 토합니다. 그래서 가! 라고 하니까 가는데 바로 일어서더니만 그대로 책을 펴고 읽으면서 갑니다. 너무 너무 도전을 받아 아~ 나도 공부해야 되겠다 하고 어머니한테 졸라서 책을 800권을 사가지고 모조리 다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자기의 삶에 최선을 다해서 항상 책보고 노력하며 끊임없이 지식 있는, 막 신문이나 보고 떠들어 대지 말고 정말 실력 있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모세는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그 고난 속에서 위대한 인물로 태어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자체가 힘든 세상에 우리는 삽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어디서나 너무 힘이 듭니다. 더구나 지도자가 되는 길은 말할 수 없이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성공하고 돈을 벌고 잘 산다고 하는 자체가 몇백배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 삶은 쉽지 않습니다. 이 힘든 세상을 살면서 모든 일에 적응하고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조금 어렵다 해서 ‘나 이것 못한다.’ 춥다고 해서 ‘못한다,’ ‘기분 나빠서 못한다. 안한다.’ 자꾸 어려운 일을 피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어떤 어려움도 적응해야 되고 감당해야 되며, 참아야 되고 이겨야 되며, 고난을 당한 사람이 큰 일을 합니다.
저는 시골에서 병아리를 오래 먹여보고 전도사로 있을 때에도 병아리를 늘 먹이는데 닭은, 모든 새들은 봄에 새끼를 낳습니다. 꿩, 닭, 참새, 제비, 비둘기, 종달새 모든 새들은 다 봄에 알을 낳습니다.
닭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새들은 일찍이 태어나니까 너무 춥습니다. 병아리도 4월, 5월에 깨어난 것 20일만 되면 바로 깨어나는데 병아리 되면 얼마나 추운지 모릅니다. 바람이 막 불면 봄이 얼마나 춥습니까? 그런데 태어나서 살기 어려우니 ‘엄마! 추워.’ 하면 어미가 품어주고 힘들게 자랍니다.
그러나 그 병아리는 9월 10월만 되면 벌써 알을 낳습니다. 잘 자랍니다. 또한 어떤 닭은 늦게 출발합니다. 그래서 7, 8월에 병아리가 깨어나는데 이것은 태어나서는 고생을 안 합니다. 날씨가 따뜻하니까 너무 좋습니다. 그러나 초가을에 추위가 오면 그 닭은 겨울을 거의 보내지 못합니다. 제가 많이 보았습니다. 모두 죽습니다. 왜냐하면 추위 없이 지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어려서부터 그냥 아무 추위 없이 7, 8월에 태어난 애들은 환난 시험당하면 모두 자살해 죽습니다. ‘못 산다.’고 하고 죽습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눈물 흘리고 수고하며, 고생하면서 큰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 흘린 눈물 때문에 지도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고, 자신이 배고팠던 것 때문에 오히려 나중에 커서 많은 국민의 배고픈 것을 해결해 줍니다. 남의 입장도 잘 알고 자기가 고생해 봤으니까 억울한 일 당하고 별의별일 다 당했으니까 훌륭한 필요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어제 책을 읽었습니다. 미국의 11명의 지도자에 대해 ‘위대한 대통령은 무엇이 다른가?’라는 제목으로 나온 책입니다. 프레드 그린슈타인이라고 하는 분이 지은 책인데 아이젠하워도 나오고 트루먼도 나오며, 레이건도 나오는데 최근의 대통령인 빌 클린턴 대통령에 대해서도 나옵니다. 저는 그전에 책을 봐도 그런 걸 못 보았습니다. 클린턴에 대해서 자세히 나옵니다. 태어나기 석 달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십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어머니는 간호조무사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못보고 자랍니다. 아버지는 외판원이었습니다.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4 살 때 어머니가 재혼을 했는데, 자동차 외판원을 하는 분으로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매일 집에 들어와서 집을 부수고 애들을 때리며 자기 어머니를 짐승 패듯이 두들겨 패는데 클린턴이 그걸 본 것입니다. 계속 봅니다. 그런데 클린턴이 14살 때 드디어 술 취해서 자기 어머니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막아냅니다. 그래서 술이 취해서 힘이 없으니까 아버지하고 협상을 합니다. 다시 때리면 가만히 안두겠다고. 이래서 이 아버지가 클린턴의 말을 듣고 더 이상 어머니를 때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를 지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클린턴의 어머니는 이 아버지하고 헤어지고 새로 결혼을 합니다. 세 번째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도 또 돌아가십니다. 아주 너무 어려운 가운데서 하나만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청소년 때를 말로 다할 수 없이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런데도 고등학교 1, 2학년에 이미 반장을 하고 학생회장을 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은 그 지역 조지타운에 아칸소에 있는 조지타운 종합대학교에 들어가서 장학금을 받아서 공부를 잘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려운 가운데서도 교회를 끊임없이 잘 다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잘하기 때문입니다. 그 가정에 말할 수 없는 상처를 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으면서 믿음으로 이겨냅니다. 소망을 가집니다. 이 마을 이름이 호프입니다. 희망을 가지고... 그래서 성격이 그렇게 맑습니다. 밝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여기서 성가대도 17년을 합니다. 사람이 그러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데 한 결 같이 자기 자리를 지켜나갑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이기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만이 이런 세계적인 지도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장학금을 받아서 옥스퍼드에 유학 가서 옥스퍼드를 졸업합니다. 그 다음에 다시 와서 예일대학, 최고만 다닙니다. 제일 지옥 같은 집에서 제일 최고만 나옵니다. 예일대학에서 로(law) 스쿨에서 법률을 해 아칸소로 돌아와 아칸소 그 큰 주에서 검찰총장이 됩니다. 30대에 검찰총장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주지사에 나와서 주지사가 되고 처음에는 비딱했습니다. 주지사 처음 되어서는 전부 그런 비딱한 세대들로만 형성되어서 힐러리도 화장 하나 안하고 반항적으로 늘 같이 그랬다고 합니다. 자기 가정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된 것을 알고, 예수 믿으면 빨리 돌아서지 않습니까? 탁 돌아서서 바꿉니다. 그래서 좋은 옷을 입고 국민들 위해서 희망을 심어주고 해서 재선됩니다. 주지사에 재선되고 그 다음 사십대 초반에 미국 대통령에 출마를 해서 대통령이 되어 대통령도 두 번 연임합니다. 나라 경제를 일으키고 국제 관계를 세계와의 관계를 너무 너무 잘 합니다. 하나만, 르윈스키와만 문제가 있고 그 외에는 모두를 잘합니다. 그래서 미국 국민이 얼마나 이 클린턴을 좋아하는지 그 부인이 뉴욕 상원의원으로 나왔는데도 되고, 앞으로 그 부인이 대통령도 될 수 있답니다. 왜 그렇습니까? 클린턴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클린턴의 부인도 대통령을 시켜, 클린턴에 대한 그런 향수를 아직도 전 국민이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어려운 이 비극의 가정에서 어떻게 이런 인물이 태어날 수 있습니까? 아이젠하워나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루즈벨트나 모두 어려운 걸 이겨서 나라 건지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어서 여러분 하나만 잘 살고... 아닙니다. 우리교회나 저도 개인적으로 이 교계나 연합 사업이나 대학에 그런 말 듣고 뭐 하러 합니까? 여러분! 우리가 축복받아서 하나님을 위해서 말도 들어야 되고 일도 해야 되며, 나라를 위해서 나서서 나라를 건지는 일에 참여해야지 가만히 있으면 됩니까? 오늘 우리는 남, 북의 문제가 극도로 어려운 때를 당했습니다. 전쟁 중에도, 6.25사변에도 이 나라를 지켜주신 하나님, 미국이라는 나라를 통하여 이 나라를 건져 주셨습니다. 우리는 미국 덕을 너무 많이 보았어요. 우리나라같이 미국 덕을 많이 본 나라는 없습니다. 일제 해방도 우리가 한 게 아닙니다. 미국을 통해서 해방시켜가지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해방된 다음에도 미국이, 6.25사변 이후에도 미국이 와서 우리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어서 우리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며 우리 교육, 사회, 가정, 스포츠 우리의 모든 문화를 모두 미국이 만들어 주었습니다. 올림픽을 할 때는 미국함대가 와 지키면서 올림픽 잘 마치도록 해주며, 만 사 만 사 억 만 사가 저들이 도와서 우리나라가 복 받은 것입니다. 미국과 자꾸 부딪히고 욕하면 좋아하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남북관계도 극히 어려워지고.. 핵실험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저가 유일하게 러시아에 1992년에 가서 그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현장을 가 보았습니다. 체르노빌이 1986년 4월 26일 1시 23분에 이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을 하였습니다. 발전소 하나가 폭발을 하니 그 피해가 얼마나 큰지, 공군이 동원되어서 비행기를 가지고 발전소를 핵이니까 그걸 덮었는데, 저 높은데서 그냥 모래를 떨어뜨려가지고 그걸 덮었습니다. 공군 조종사 3000명이 완전방독면, 방사능을 막아내는 옷을 모두 입고 갔어도 모두 죽었습니다. 이건 그 나라 장관이 그 때 공산주의 때입니다. 그 나라 부통령이 우리한테 직접 이야기 하였습니다. 모두 죽었습니다. 방사능이 얼마나 무서운지 경상북도보다도 더 큰 땅이 6년, 10년 동안 저주를 받아서 풀 한포기 안 나고 거기 있는 물고기, 짐승, 물, 생명은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사람이 60만이 모두 죽고 몇 백 만 명이 그 이후로 생명을 계속 잃었습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 사람들이 우리를 사람들이 갇혀 있는 그 깊은 곳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저는 멋도 모르고 그 옆에까지 차를 타고 갔지 뭡니까? 지나놓고 보니 제가 왜 갔나 싶습니다. 데려가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 옆을 자동차지만 그냥 싹 지나갔습니다. 무서운 곳을 지나갔습니다. 6년이 지났는데도 그렇게 무섭습니다.
북한이 지금 핵실험을 저렇게 하면 만약에 저 사람들 실수도 잘하는데 미사일 쏘다가도 떨어지고 는데, 원래 사람이 사는데는 실험을 하면 안 됩니다. 미국 같은 나라도 완전히 사방 몇 백 킬로미터를 아무도 없는데 가서 그것도 최고의 기술로 깊은 바다 속에서 해야 되는데 여기서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지하수라든지 모든 오염이 전부 될 수 있고 조금만 누출이 되면 생명의 피해가 있는데 우리는 이럴 때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우리가 바로 서고 회개하며, 기도하고 나라를 건지는 일에 모세와 같이 나서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내가 노인인데 뭐, 나야 무슨 소용이 있냐?’ 나라가 어려울 때는 나라를 위해서 일해야 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이든지 그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그 시대에 우리가 순종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도 그냥 자기 혼자 살려고 하면 살 수 있습니까? 출애굽 할 때는 같이 백성이 움직여야 사는 것이지 애굽 말만 듣고 애굽에 남으면 모두 망합니다. 모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함께 따라가서 나라를 건져내고 민족을 살리는 우리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는데 다시 한번 긍휼을 베풀어 주시도록 모세가 아말렉을 향하여 손을 들듯이 우리 모두 기도의 손을 들고 회개의 손을 들며 민족을 구원해 내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