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자존은 어디에서 오는가 / 강경석
“오늘의 우리 문학은 민족문학으로서 현대적 성격을 갖추게 되었고 또 세계적 수준에 이르렀다는 자신을 가진다 하여 그것이 결코 자화자찬이 아닐 것을 믿는다.” 이 문장은 얼핏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소식이 전해진 뒤 쏟아져나온 수많은 논평 가운데 하나처럼 보이겠지만 소설가 염상섭이 1952년에 쓴 글(「한국의 현대문학」, 『문예』 1952년 5·6월 합본호, 11면)의 한 대목이다.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다 해도 휴전협정을 1년 남짓 앞둔 한국전쟁의 복판이었고 ‘제3차 세계대전’에 방불한 포성이 한반도를 이미 휩쓴 뒤였다. 한국문학의 “세계적 수준”을 논하기는커녕 제때 원고를 모으고 잡지를 인쇄하는 일조차 힘에 부치는 참담한 환경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럼에도 1919년 3·1운동을 분기로 하는 우리 ‘현대문학’이 고작 서른해 남짓을 통과한, 그것도 전란을 겪는 와중에 이만한 긍지와 자부심이 표명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보다 “일본의 통치하에서 일본문단의 영향은 받았을망정 일본문학과는 특립(特立,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립)한 한국문학을 가졌다는”(7면) 분명한 사실에 있었다. 그가 강조하듯 “문학이란 자기의 표현이요 생명의 호소며 부르짖음이거니 원래 모방이니 사대(事大)니 용허(容許, 허용)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같은 면)에 주어진 역사적 조건과 환경이 열악하면 열악한 대로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 나름의 고유한 창조력을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다. 염상섭은 한국문학이 그때까지 이룩한 성취를 “영양불량에 걸린 아이가 가지가지의 악조건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곤곤(困困, 몹시 어렵게)히 소복(蘇復, 회복)되고 간신히 육성하여온 것”(8면)이라는 통렬한 비유로 설명한 바 있다. 현실이 어떠한 악조건에 둘러싸여 있든 우리는 거기에서부터 적응의 길을 찾고 현상극복의 지혜를 단련할 수밖에 없으니 유리하든 불리하든 남다르게 주어진 현실 그 자체가 바로 남다른 창조력의 요람이자 토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해왔고 또 경험하고 있는 조건과의 대결 속에서 크든 작든 스스로 획득해낸 성취가 우리 자존의 유일한 근거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룬 성취와 한계를 새롭게 따져야 한다면 남의 나라나 타자의 시선에 기준을 맞춰놓은 채 피와 땀으로 쌓아올린 역사를 스스로 평가절하해왔던 것은 아닌지부터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정전(停戰)으로 성립된 한반도 분단체제 아래에서도 4월혁명과 6월항쟁 그리고 촛불혁명에 이르는 ‘한반도식 나라만들기’의 장구한 역사를 일궈냈고 그것이 염상섭 시대에 집합적 각성을 촉발했던 3·1운동에서 발원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이 글 앞머리의 인용문은 1952년에도 정당했고 지금도 여전히 정당하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소식은 어쩌면 뒤늦게 도착한 그리고 앞으로도 답지할 수많은 우리 바깥의 응답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김대중, 한강으로 이어지는 두번의 노벨상이 공히 많은 사람의 희생과 헌신으로 쟁취한 민주화의 역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 음미해볼 만하다. 한 사람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민주주의에 공헌함으로써, 다른 한 사람은 5·18광주 등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인간 존재를 탁월하게 문학화함으로써 그러한 성취를 이뤄냈다. 이는 우리가 너무나 많은 역사적 아픔과 상처를 견뎌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을 껴안은 채 딛고 일어섰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앞서 “모방이니 사대니”를 예거했지만 ‘눈떠보니 선진국’이라는 유행어가 가리키듯 이제 한국사회의 어느 면모를 보더라도 ‘추격국가 모델’은 더이상 지속가능한 비전이 아니다. 무엇보다 촛불민주주의를 통해 하나의 정점을 넘어선 시민적 긍지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의 자존을 무시로 짓밟는 저 집권세력의 퇴행적이고도 엽기적인 국정농단 행태가 한층 더 수치스럽고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것이지만 그 또한 머지않아 극복해내리라는 넉넉한 자신감도 생긴다. 그것은 물론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또 한번의 결정적 고비를 맞이한 우리 사회가 이 ‘나쁜 디딤돌’을 딛고도 한걸음 더 나아갈 지혜를 모아낼 수만 있다면 그 또한 세계적인 이바지가 아닐 수 없다.
국민들은 이미 윤석열정권과 그 호위세력에 파산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촛불혁명의 진행 가운데 ‘변칙적 막간극’으로 등장한 저들은 자신들이 바로 그 ‘변칙적 막간극’의 주인공들이기에 최소한의 가식조차 벗어던진 온갖 비합법과 비합리로 국민적 상식과 헌정질서에 도전하고 있다. 이만한 살림과 문화와 민주주의의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더이상의 파괴행위를 용납할 수는 없다. 대통령이 스스로 물러나든 국회가 임기단축 개헌을 이뤄내든 그것도 아니면 끝내 탄핵심판을 추진하든 최우선 과제는 결국 어떻게 하면 더 신속하고 질서있는, 그럼으로써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는 퇴진 절차를 만들어낼 것인가이다. 국민들이 결정을 내렸으니 정치권이 합당한 과정을 만들어내야 한다. 다만 대통령은 지난 11월 7일 대국민담화를 겸한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임기가 2027년 5월까지임을 못 박은데다 법치를 가장한 야권탄압과 시민을 향한 공권력 남용을 지속하고 있는 만큼 국민적 요구를 거부한 채 사실상 농성체제에 들어갈 공산이 크다. 거기에 결정적 균열을 내기 위해서는 우선 특검법 관철이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촛불시민들의 비상한 각오가 절실하다. 우리 각자의 자존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지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24년 겨울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강경석 문학평론가
2024. 11. 19.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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