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제목: 열반 / 사진: 박초월 / 장소: 삼각산 도선사 미소부처님 석불상>
치즈버거 하나를 먹고 싶은 사람이 한 개를 맛있게 먹으면 행복하다. 더블 치즈버거를 먹으면 더 행복하다. 일정한 양의 욕구를 가지고 있을 때 그 욕구가 충족되면 행복하고, 어느 한계까지는 더 많이 충족시킬수록 더 행복하다. 그런데 우리에게 가능한 재화와 서비스의 양은 한정 되어 있기 때문에 욕구 충족량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과 경쟁해야 하고 또 그 과정 에서 서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된다. 게다가 인간의 욕구는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욕구가 충족되면 충족될수록 우리는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원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행복해지겠다고 점점 더 많은 욕구를 충족하려는 노력은 현명 치 못하다.
한편 동일한 수준의 만족량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일때 위의 공식에 따라 욕구를 줄여 나가면 전과 같은 수준으로 계속 행복할 수 있다. 더블 치즈버거 살 돈이 없으면 치즈버거 하나만 원하면 된다. 적게 원하면 적은 양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경험상 이것이 현명한 길이라는 점을 안다. 그런데 누군가 깨달아 열반에 든 이가 욕구의 양을 극도로 줄여 거의 0에 가까이 갔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행복의 양은 어떻게 될까? 내가 이런 질문을 하면 언제나 “위의 공식에 의하면 그 행복량은 무한대에 다가가게 됩니다.”라고 답하는 학생이 있다. 그러면 나는 다음과 같이 한 마디 더하며 학생들과 함께 웃는다.
“그래서 우리가 그림이나 조각에서 보는 모든 부처가 무한히 행복한 듯 신비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러나 함께 웃는 것도 잠시, 내 코멘트에 반대하는 학생이 손을 든다.
생존을 위해 기본적으로 충족시켜야 할 생리적 욕구조차도 모두 버려야 깨달을 수 있습니까? 깨달은 사람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는 말입니까?
따지기 좋아하는 미국 학생이 당연히 제기할 만한 질문이다. 그러면 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집 착이란 실은 지나친 욕망(excessive desire,craving) 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마르면 물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는 단순한 것들까지 집착으로 인한 행위들로 분류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여 준다. 그러나 학생들이 이 답변에 흡족해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언제나 한술 더 떠서 내게 도전한다.
불교에서 깨달으려는 욕구는 물 마시고, 밥 먹는 것과 같은 단순한 욕구가 아니지 않습니까? 생사生死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다시는 윤회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는, 정말로 굉장한 업적을 성취하려는 엄청난 욕구입니다. 깨달음을 원한다면 이런 굉장한 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텐데,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누구나 욕망과 집착을 줄여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데는 별로 이의가 없다. 그렇다 보니 내가 불교철학을 강의할 때마다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로 훈련된 미국 학생들은 꼭 한 번 위와 같이 묻는다. 나는 학생들을 위해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준다.
깨달음은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야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깨달음에 집착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1. 깨달음에 집착하면, 이 집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깨달음이 불가능하다.
2. 깨달음에 집착하지 않으면, 깨달으려고 노력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이번 에세이의 제목으로 정한 ‘깨달음의 패러독스 (paradox) ’다. 논리적으로 이 렇게 귀결될 수밖에 없어 보이는 패러독스를 깨지 못한다면 깨달음은 결국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동아시아 선문 전통에서는 의외로 해결이 쉽다. 임제의 할과 덕산의 방으로 따끔하게 야단쳐서 이런 쓸데없는 논리적 사변일랑 집어치우고, 경전 부지런히 읽고 참선 수행 열심히 해서 단박에 깨치라고 독려하면 됐다. 그러나 이것은 선사의 절대적인 권위가 인정되고 그의 고함이나 몽둥이질 같은 비정상적인 교수법조차 허용되던 동아시아의 옛날 낭만적 이야기다. 21 세기 미국의 대학 강의실에서 교수가 학생들에게 고함치고 몽둥이질했다가는 파직은 물론 경찰에 체포되고 신문사와 방송국에서 당장 달려올 것이다. 그래서 비록 내가 할과 방을 흉내 내며 학생들과 한바탕 배를 잡고 웃지만, 좀 더 현대적이고 세련된 방법으로, 즉 ˙좋은 말로’ 위의 패러독스 해결을 시도한다.
달라이 라마는 한 강연에서 깨달으려는 집착은 좋은 집착이니 반드시 가져야만 할 집착이라고 강조한다. 지나가면서 간단히 한 말이어서 이 문제와 관련된 그의 논의를 더 들을 기회는 없었는데, 그의 주장에 대해서는 ‘그러면 좋은 집착과 그렇지 못한 집착을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이냐?’는 질문이 곧 제기된다. 깨달음을 위해 도움이 되는 집착은 좋은 집착이고, 그 반대의 집착은 나쁜 집착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깨달음은 좋은 집착에 의해 가능하고, 좋은 집착은 깨달음에 의해 가능하다는 말이 되어 순환논법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좋든 나쁘든 집 착은 집착이다. 그리고 또 위에서 지적 했듯이 깨달으려는 집착은 정말로 엄청난 집착이다.
학생들과 나는 다양한 각도에서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으며 함께 이 패러독스를 해결하려 시도한다. 여러 차례 대화와 토론이 오고 간다. 그러다가 결국 깨달음을 위해 도움이 될 습관을 충분히 익힌 다음에는 깨닫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처음에 가졌던 집착을 이제 의식의 표면에서 지워 버리면 된다는 결론으로 이끌어진다. 나는 이 과정을 단계별로 정리해 주곤 한다.
1. 수행자가 고해에서 벗어나고자 깨달으려는 강한 욕구와 집착에 사로잡혀 있다.
2. 깨닫기 위해 경전 공부와 참선 수행에 강한 집념(집착) 으로 용맹정진한다.
3. 오랫동안 정진하다보니 몸과 마음에 자연스럽게 공부와 수행의 습관이 배어든다.
4. 깨닫겠다는 의식적인 욕구는 점차 잦아들어 나중에는 이런 욕구를 전혀 의식하지도 않게 된다. 그래서 아무런 집착도 없이 공부와 수행을 계속한다.
5. 심신心身에 밴 공부와 수행은 자연스럽게 수행자를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논리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깨달음의 패러독스가 공부와 수행의 과정에서는 전혀 일어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 학생들과 내가 도달한 결론이다. 다시 말해 논리적으로는 풀 수 없는 패러독스가 실제의 수행 도량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실제로 임제와 덕산의 할방喝棒 교수법이 보여주고 있는 점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고함과 몽둥이로 깨달음에 도움이 안 되는 질문과 사변을 당장 내려놓으라며 단박에 깨침으로 이끌고자 했고, 우리는 현대적 인 방식으로, 즉 좋은 말로 논리적 패러독스가 자연스럽게 사라져 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불자라면 내려놓을 집착은 내려놓아야 하고, 사라질 사변은 사라지게 해야 하며, 멈출 생각은 멈추어야 지혜롭다고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더 밝히지만, 이 글에서는 깨달음과 열반을 구별하지 않는 종래의 방식에 따라 ‘깨달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엄밀히 말해 ‘깨달음의 패러독스’는‘열반의 패러독스’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 (저자: 홍창성)에서 발췌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