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잔다르크 조선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 |
김마리아(金瑪利亞:1892~1944)의 집안은 한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명문가로 개화운동과 애국운동, 특히 항일구국운동에서 단연 돋보이는 집안이었다.
마리아의 큰삼촌 김윤오(金允五)는 고향인 소래마을에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를 세웠고 애국계몽운동기에는 서북학회 임원으로 활약하면서 개화교육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큰 뜻을 가지고 조상 대대로 살던 고향을 떠나 서울로 거처를 옮긴 후 세브란스병원 앞에 김형제상회를 차리고 장사를 했다. 상회는 항일운동의 연락 장소가 됐고 또한 독립운동자금의 조달처가 됐다.
막내삼촌 김필순(金弼淳)은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했는데 그는 민족 지도자 안창호와 결의형 제간이었고 |
노백린, 김규식, 최광옥, 유동열, 이동휘, 이갑 등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동지관계에있었다.또 고모 김구례(金求禮)는 상해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서병호(徐丙浩)의 부인이며 또 다른 고모 김순애(金淳愛)도 일찍이 북경으로 유학 갔다가 상해에서 독립 운동을 하면서 3·1운동이 일어나기 2주일 전에 동지인 김규식과 결혼식을 올렸다.
셋째 고모 필례(弼禮)는 ywca의 창설자 중 한 사람으로 최영욱(崔永旭)과 결혼해 정신여학교를 발전시킨 여성교육자였다. 그의 큰언니 김함라(金涵羅)는 신학박사 남궁혁(南宮赫)의 부인이었고 둘째 언니 김미렴(金美艶)은 의사 방합신(方合信)의 부인으로 평생을 여성교육에 이바지한 사람이다.
이처럼 김마리아의 집안사람들은 한결같이 한국사회를 근대화시키고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섰던 민족지도자들이었다. 남달리 의지가 강하고 정의감이 넘치며 총명했던 김마리아에게 이같은 가족 배경은 그녀를 민족과 나라를 구할 구원(久遠)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i 남다른 환경에서 교육받고 성장한 김마리아 i
김마리아는 산수가 수려한 황해도 소래마을(黃海道長淵郡大救面松川里)에서 1892년 6월 18일 아버지 김윤방(金允邦)과 어머니 김몽은(金蒙恩) 사이의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김마리아의 집안이 소래 마을에 뿌리내린 것은 서울에서 판서까지 지낸 고조부 때부터였다. 꼿꼿한 성품을지닌 고조부는 조선조 말기 문란하고 부패한 정치에 염증을 느껴 관직을 떠나 조부의 3형제와 함께 소래로 내려와 가축 사육과 땅 개간을 통해 큰 부자가 된 인물이다.
마리아의 아버지는 생활 걱정 없이 한학을 수학해 한학자가 됐다. 그녀의 아버지는 완고한 일반 유생들과는 달리 새로운 개화 문명에 남다른 관심과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만주에서 기독교를 전래한 독실한 의주 청년 서상륜(徐相崙)이 소래로 와서 기독교를 몰래 전파하자 마리아의 아버지는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온 가족이 뒤를 이어 모두 기독교인이 됐다. 또한 개화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그의 아버지는 마을에 신식 학교를 설립하고 교회를 짓는 등 개화운동에 앞장섰다.
그의 어머니도 성격이 개방적이고 활달해 개화운동에 공감, 세 딸들을 모두 학교에 보내 신교육을 받게 했다. 이렇듯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천진난만하게 자라나던 마리아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철이 들어가던 열세 살 때 어머니마저 명을 다했다. 마리아의 어머니는 임종하기 직전 마리아의 두 언니에게 부모 없이 자라야 하는 막내딸의 장래를 다음과 같이 부탁하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오늘날의 세상은 옛날과 달라 여자도 반드시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하니 마리아는 외국 유학까지 보내어 꼭 큰 인물로 키워주기 바란다.”
마리아는 어린 시절 총명해 학교 성적이 늘 우수했는데 과묵하고 침착한 성품을 지닌 김마리아의 어린 시절 꿈은 장군이 되는 것이었다. 마리아는 부모 없는 고아가 됐지만 주변 가족들의 지극한 보살핌 속에서 구김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마리아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해에 삼촌들의 주선으로 소래를 떠나 서울로 와서 이화학당에 입학, 2주 정도 다니다가 연동에 있는 정신여학교로 옮겼다. 정신여학교의 규칙적인 학교생활, 엄숙한 기독교적 교풍 등은 그를 성숙시키는 새로운 경험들이 됐다. 정신여학교에는 언니와 고모들이 먼저 입학해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낯설지 않아 학교생활에 열중할 수 있었다.
i 민족의식의 성장과 구국독립운동에의 투신 i
마리아는 19세인 1910년 6월에 언니(함라)를 비롯한 22명 동급생들과 정신여학교 제 4회생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언니 함라와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부임한 김마리아는 그 해 8월 국권 상실로 인해 민족적 비분을 가슴에 안게 됐다. 그후 3년째 교편생활을 하던 1912년 가을, 모교 교장 루이스의 주선으로 일본 광도(廣島)로 유학을 떠났다.
“국권이 상실된 것은 민력이 부족한 때문이니 나라를 다시 찾는 길은 교육을 확대해 국민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굳게 믿었던 김마리아는 1년간의 일본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모교에서 봉직했다. 1915년 봄, 보다 적극적이고 수준 있는 교육을 받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유학 길에 올랐다. 마리아는 미국선교회에서 설립운영하는 동경여자학원 대학예과에 입학, 본격적인 학문 연마의 길에 들어섰다.
|
동경에는 고모인 김필례, 나혜석, 황애덕 등 명성있는 여자 유학생들이 꽤 여러 명 있었는데 이들은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지 발행, 토론회 개최 등 선각적인 활동을 펼쳤다.
김마리아는 1917년에 친목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남자유학생들과도 교유 2·8 독립 선언문했고 국가와 민족의 장래나 여성교육 등 폭넓은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
물론 조국 광복에 대한 신념도 보다 강하게 성장했다.졸업을 앞 둔 1918년, 세계 1차 대전이 끝나고 이어 국제연합이 결성됐다. 그리고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 자결론의 영향으로 독일치하 식민지 피압박민족의 해방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세계정세의 변화를 예의 주시하던 동경유학 한국학생들은 이런 상황을 우리나라 독립의기회로 삼기 위해 힘을 모아 비밀 모의에 들어갔다. 마침내 이들은 1919년 2월 8일, 동경 YMCA강당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김마리아는 황에스더 등의 여학생들과 함께 2·8독립선언식에 참여해 만세를 부르고 학교로돌아왔다. 귀교 후 그녀의 뒤를 쫓은 일경에게 체포돼 심문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전국의 부녀들을 각성시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귀국을 준비했다. 그러나 졸업을 바로 앞 둔 학생이 갑자기 귀국하기에는 마땅한 명분이 없었다. 김마리아가 고민을 하던 중 마침 모교 교장에게서 학교가 어려움에 처했으니 속히 귀국해 수습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게 됐다.이 편지는 귀국을 서두를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돼 주었다.
얇은 종이(미농지) 10여 장에 독립선언서를 베껴 오비(일본 여자 옷의 띠) 속에 숨긴 후 일본 여인으로 변장한 김마리아는 2월 17일 동경을 출발해 부산으로 밀입국하는데 성공했다. 귀국 길에는 김마리아의 정신여학교 후배이자 애국정신이 투철한 횡빈(橫賓)신학교 유학생 차경신(車敬信)이 동행했다.
마리아는 연고지인 광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탔는데 우연히 상해에서 독립 운동을 하고 있던 고모 김순애와 고모부 서병호를 만났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상해의 독립운동 근황을 알게 됐으며 그들도 마리아와 똑같은 목적으로 밀입국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독립을 눈앞에 둔 그들의 가슴은 벅찼다. 마리아는 동행한 차경신, 고모, 고모부와 대구까지 함께 왔고 거기에서부터 각자가 맡은 활동 지역을 향해 출발했다. 마리아의 활동 지역은 연고가 있는 호남과 서울 그리고 황해도였다.
마리아는 첫 임무 수행지인 광주로 갔다. 광주에는 수피아여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았던 관계로 학교, 교회, 병원 등에 많은 동지가 있었으며 작은 고모 김필례도 살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을 동원해 광주의 동지들에게 2·8독립선언문을 한 장씩 주고 독립 거사의 준비를 당부하고는 2월 21일 서울로 올라와 정신여학교를 찾았다. 정신에서 동창 장선희(張善禧)선생과 동지 규합을 의논하고 서울의 여교사와 간호원 등을 규합해 독립 운동에 대비할 것을 촉구했다.
2월 26일에는 천도교본부와 보성사를 찾아가 사장 이종일(李鐘一) 등을 만났고 거국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킬 적기가 왔음을 알리면서 모든 준비를 갖추고 속히 궐기할 것을 간곡히 권했다. 이종일은 그의 비망록에서 이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김마리아의 애국열에 감격해 우리들도 이미 계획을 준비, 실천중이며 또 지난 갑인년(1914) 이래 비밀리에 민중을 규합 궐기케 함으로써 일제의 질곡을 벗어나려는 모색을 하고 있다.”
이종일의 말을 들은 김마리아는 너무도 감동했고“천도교의 원대한 이념에 감격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녀는 국내외의 민족이 일치단결해 거족적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하루 속히 방방곡곡에 알려야 했다. 어린 시절 행복하게 자랐던 고향 황해도로 가기 위해 경의선을 타고 봉산(鳳山) 누루지에 사는 동창 이선행(李善行)을 찾아갔는데 그날 놀랍게도 3·1운동이 일 어났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됐다.
i 항일여성단체의 조직과 활동 i
3·1운동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3월 2일 급히 상경했다. 그리고 정동교회로 달려가 동경유학생이었던 나혜석을 만나 오후 4시경 이화학당의 한 기숙사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정신여학교, 진명여학교 대표학생들과 황에스더, 박인덕 등이 모여 있었다. 이 자리에서 마리아는 조선의 독립운동에서 남학생들은 활발하게 운동하고 있으니 우리도 여성단체를 만들어 남자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남자단체의 활동이 어려울 때 여자단체가 대신 운동하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일을 도모하기 위해 3월 3일 모교 기숙사에서 황에스더를 만났고 그 이튿날 다시 이화학당을 찾아 단체조직 결성에 대한 구체적인 안을 논의했다.
마리아의 귀국 활동을 눈치 채고 줄곧 그를 뒤쫓던 일본 형사들은 3월 6일 정신여학교에서 그를 체포했다. 마리아는 종로 경찰서에 구금됐다가 그 이튿날 경무청으로 압송돼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왜경들은 그가 귀국 활동한 내용을 알아내려고 때리고 단근질을 했다. 고문 중 가장 괴로웠던 것은 대나무 자와 비슷한 것으로 머리를 일정한 간격으로 계속하여 탁탁 박자 맞추듯이 때려 머리 밑이 마치 묵처럼 흐물흐물해졌던 일이다.
마리아는 심한 고문을 받을수록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강렬해졌다. 왜경을 향해“독립 운동이 어째서 죄가 되느냐?”고 호통을 쳤으며 이러한 마리아를 향해 심문자들은‘지독한 계집년’등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
심한 고문을 받은 마리아는 결국 귀 뒤 뼈 속에 고름이 괴는 상악골 축농증에 걸렸고 이로 인해 평생을 고통당했다.
마리아는 보안법위반 혐의로 전격 기소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만5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8월 4일 증거불충분이란 명목으로 면소되어 그 이튿날 출감했다.
마리아는 출감 후 정신여학교에 살고 있던 교장 천미례(千禮) 부인의 이층 방에 머물면서 다시 모교의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오직 독립운동뿐이었다.
동지 장선희(張善禧) 교사를 통해 감옥에 있는 동안 여성들의 독립운동이 어떻게 추진되고 있었는지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장선희는 투옥된 애국지사의 옥바라지를 위해 정신여학교 동창 오현주, 이정숙 등과 비밀리에 혈성부인회를 조직해 활동했으며 이것을 발전시킨 애국부인회 의 재무위원으로 활약했던 관계로 |
여성들의 독립운동 근황을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성들의 독립 운동이 별로 활발치 못한 형편이었으므로 마리아는 이를 걱정했다. 그는 애국부인회를 명실상부한 전국적 규모로 확대시켜 여성항일운동을 적극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애국부인회의 간부들도 김마리아, 황에스더와 같이 능력 있는 여성계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애국부인회의 활동을 새롭게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데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리하여 애국부인회 간부들은 김마리아와 황에스더의 출감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10월 19일 천 부인의 집 2층에서 여성계 대표 18명이 모여 간단한 다과회를 열고는 곧장 애국부인회의 확장과 새로운 활동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김마리아가 회장으로 추대됐고 부회장에 이혜경(李惠卿), 총무에 황에스더, 재무부장에 장선희, 교제부장에 오현주(吳玄洲), 적십자부장에 이정숙(李貞淑)·윤진수(尹進遂), 결사대장에 김영순(金英順)·신의경(辛義卿) 등이 임명됐다. 이들은 대부분 정신여학교 출신들이었다.
애국부인회의 새 출발은 활기찼다. 국내 13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본부와 지부의 규칙도 새로 마련했으며 인장도 새로 도안해 만들었다. 또 통신부를 두어 상해 임시 정부와 국내 각 지방과의 연락을 취하되 임시 정부와의 연락은 모두 본부를 경유케 했다. 김마리아를 중심으로 재정비되고 강화된 애국부인회는 그 기구가 날로 확장됐으며 회원수도 증가했다.
미주와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애국부인회와도 긴밀한 연락을 가져 임시정부로 전달할 2천원의 군자금을 송금받았다. 국내외에서 모집해 상해임정에 보낸 군자금만도 활동 한 달 만인 11월까지 6천원이나 됐으니 그들의 활동이 얼마나 활발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직과 활동의 확항일여성단체 대한 애국부인회 임원 모습(중앙 원:회장 김마리아)대는 일제의 감시 그물망에 쉽게 걸릴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대구지부장 이금례의 활동이 경북경찰부의 일제 앞잡이 조선인 형사(유근수)에게 발각됐다. 그 형사는 교제부장인 오현주의 남편 스승이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심한 오현주 남편에게 오현주를 움직여 애국부인회의 조직 규모와 활약내용을 탐지해낸 것이다.
11월 말경부터 김마리아를 비롯한 애국부인회 관련인들이 경북경찰부 제3부에 의해 모조리 검거됐고 애국부인회의 방대한 활약규모가 세상에 모두 밝혀지게 됐다. 경찰부에서는 만일 이것이 발각되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고 말했다. 결국 김마리아는 세 번째 체포 구금을 당하게 됐다.
마리아는 경찰의 고문과 검사들의 모욕적 심문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한 태도를 견지했다. 검사의 서릿발 같은 심문에도 그는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답변했다.
“한국 사람으로 한국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도 활동하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서기를 알 뿐이오. 일본 연호는 모르오.”
김마리아는 진정 용기 있는 애국자였다. 그의 강렬한 항일정신과 태도는 더욱 심한 고문을 유발시켰고 결국 폐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투옥생활을 해야 했다. 2차 투옥 때 악랄한 고문으로 상악골에 고름이 차는 메스토이병에 걸렸는데 3차 검거 때의 고문으로 병세가 더 악화돼 감옥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병인이 되고 말았다. 모교의 천부인과 대구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1920년 5월 22일에 병보석을 받고 세브란스병원에 입원과 동시에 대수술을 받았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병보석중인 6월에 재판이 열렸는데 일본재판장(五味逸平)은 처음에 5년의 중형을 구형했고 다시 3년을 판결했다.
대구재판정에 출두할 때 김마리아의 형상은 영락없는‘산송장’이었다. 그녀는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장(애스립)과 청년들의 부축을 받고 등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채 사람들이 떠메고 나오다시피 해서 재판정에 나왔다. 온 전신에 담요를 두르고 있었고 핏기 없는 백짓장 같은 얼굴에는 하얀 수건을 덮어 놓아 아래턱만 겨우 보였다. 또한 허옇게 변해버린 두 손이 담요 밖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이런 마리아를 본 방청석 부인들은 훌쩍훌쩍 흐느껴 법정 안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너무나 애처로워 눈물을 쏟으면서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 보호인에게 금가락지를 뽑아주며 치료비에 보태달라고 부탁하는 부인도 있었고 현금을 내놓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김마리아는 재판 후 10월에 한양병원에 다시 입원해 2차 대수술을 받았고 그 이듬해 4월에 퇴원해 성북동에서 김근포(金槿圃)라는 가명으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병세 악화로 다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고 그러던 중 상해임시정부에서 밀파된 윤응념(선교사 맥큔의 제자) 지사의 권고와 도움을 받아 상해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게 됐다. 6월 29일 마리아는 오후 4시경 퇴원을 할 때 얼 굴을 양산으로 가리고 준비된 인력거에 올라탔다. 그 인력거가 어느 중국요리집 앞에 머물자 마리아는 황급히 요리점 안으로 들어가 중국인 옷으로 변장하고는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같은 날 30일새벽 1시에 동행 몇 사람과 서울을 떠나 자동차로 인천에 도착했다.
심히 병약했기 때문에 여기서 일주일을 머물렀고 7월 6~7일경 중국인 목선을 타고 중국 산동성의 위해위(威海衛)에 도착했다. 망명에 성공한 1주일 후 서울에서는 마리아가 사라진 것을 알고 전국에 수배령을 내리는 소동이 일어났다. 일제의 마수를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됐으나 병쇠해 곧장 상해로 갈 수가 없었다. 도착 2주일 가량이 지난 8월 3~4일경 고모부(서병호)가 임시정부의 영접 대표로 와서 안내해 8월10일경 상해에 당도했다. 이후 11월까지 고모들과 척숙(戚叔)들의 간병을 받고야 겨우 건강을 회복한 김마리아를 위해 상해 도착 3개월만인 11월 25일에 비로소 환영회가 개최됐다.
1922년 2월 18일 그녀는 제10회 의정원회의에서 황해도 대의원에 임명됐으나 의원활동은 거의하지 않았다. 대신 독립구국운동은 실력양성운동이 우선돼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남경(南京) 금릉(金陵)대학에입학해학업에정진했다. 당시 국외 독립운동계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었고 독립운동가들 간에 많은 갈등이있었다.
독립운동계를 통합하고 미래지향적 방향을 세우기 위해 임시정부에서는 1923년 1월 31일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했다. 독립운동계의 통합을 목적으로 모인 각계각층 대표들은 연일 열띤 토의를 벌였다. 국민대표회의의 제 36일째인 1923년 3월 8일에도 시국문제 토의는 계속됐다. 이자리에서 김마리아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연설을 해 주목을 끌었다.
“국내의 일반 인민은 상해에서 정부가 설립됐다는 말을 듣고 소수인의 조직이거나 인물의 선불선을 불구하고 다 기뻐해 금전도 아끼지 않고 적의 악형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설혹 외지에서 정부를 반대하던 자라도 국내에 들어와 금전을 모집할 때는 정부 이름을 파는 것을 보면 국내동포들은 정부를 믿는다는 증거다. 정부를 안 팔면 밥도 못 얻어먹는다. 적은 가끔 정부 몰락을 선전해도 인민들은 믿지 않는다. 임시정부가 소수로 구성 운용됨은 혁명 시에 가히 면할 수 없는 일이다. 인물은 변경할 수도 있다. 수만의 유혈로 성립돼 다수 인민이 복종하고 5년의 역사를 가진 정부를 만일 말살하면 소수는 만족할지 모르나 다수는 싫어하고 외국인은 의혹한다. 잘못된 것 있으면 개조하자.”
김마리아는 국민대표회의가 가야 할 방향이 다수 국민의 의견을 모아 설립된 임시정부의 부족한 점을 개선 보완하여 독립운동의 중심체가 돼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i 미국유학 길에 오른 김마리아와 계속되는 독립운동 i
참 자주독립은 실력양성에 있다’는 마리아의 신념은 그녀를 상해에만 묶어둘 수가 없었다. 새로운 천지에서 마음껏 더 배우기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끝나갈 무렵인 1923년 6월 21일 중국인 여권을 가지고 미국유학 길에 올랐다. 멀미로 고생하는 등 고단한 뱃길 여행 끝에 김마리아는 7월12일 국민회와 대한여자애국단 대표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고단한 몸을 잠시 쉬고는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해 교포들이 집거하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여러곳을 다니면서 독립운동계의 형편과 실력 양성이 바로 독립운동임을 알리는 힘찬 연설을 해 교포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감동을 주었다.
같은 해 8월 중순에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해 학비를 마련하고자 필사원, 가정부, 도서관서기, 공장 노동자 등으로 1년간 일했고 1924년 9월에 미주리 주 팍 빌에 있는 팍대학 문학부 3학년에 입학해 2년간 수학, 평생교사자격증까지 취득했다. 1927년에는 시카고대학 대학원에 연구학생으로진학해 1년간 사회학을 공부했고 그 해 말 뉴욕의 콜롬비아대학 사범대학원에 입학 허가를 받고 뉴욕으로 떠났다. 학기가 시작되려면 아직 한학기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뉴욕 대도시에서 뜻밖에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옛 동지들과 마주쳤다.
콜롬비아 대학교 대학원 졸업사진 |
김마리아의 가슴이 다시 용솟음쳤다. 이 귀중한 인재들과 다시 손잡고 조국광복운동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김마리아는 1928년 1월 1일 여성독립운동단체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같은 해 2월 12일 뉴욕 한인교회 온 벽을 태극기와 무궁화로 장식한 뒤 발회식을 거행했다.
근화회의 설립 목적은 재미한인의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출판강연 등으로 일제의 악랄한 식민통치의 실상을 미국 등 외국인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발회식에 참석한 내빈들은 조국과 멀리 떨어진 이국땅에서 이처럼 많은 무궁화를 대하게 되니 감개 무량하다는 감탄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28년 9월에 콜롬비아대학원에 입학한 그녀는 1929년 6월에 교육행정학석사를 받았다.
|
그는 대학원 과정에서 미국의 사범대학을 선구적으로 개혁하고 미국흑인에 대한 사회보장과 흑인교육지도자 양성 및 농촌교육에 권위가 있는 마벨 카니 교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제 침략자에게 박해받고 차별받고 있는 조국의 현실을 바꾸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김마리아에게 흑인문제를 주로 연구하는 카니 교수의 강의는 감명 깊게 다가왔다.
방학이면 학비를 벌어야 하는 어려움은 있었으나 미국생활에 많이 익숙해진 마리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사회 활동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유학생이나 교포사회에서는 김마리아를‘한국의 잔다르크’라고 하며 그녀에 대해 큰 기대를 보이는 이가 많았다.
그녀는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뉴욕신학교에 입학해 종교교육학을 공부했고, 흥사단에도 가입했으며 재미한국학생연맹의 부회장도 맡으면서 선교회에서 개최하는 각종 국제회의에 한국인 대표로 참여했다.
|
1931년 5월 그녀의 형기가 드디어 만료됐다. 이미 40세라는 초로의 나이에 들어선 때였다. 마리아는 조국으로 다시 돌아가 여성교육운동으로 사회발전에 기여하고 싶었다. 1932년 6월 23일 귀국을 위해 미국을 떠나 캐나다를 거쳐 7월 18일에 귀국의 간접 관문이라 할 일본 고베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일본 수상경찰이 마리아를 연행했고 14명의 경찰로부터 3회에 걸쳐 무려 9시간의 취조를 받았다. 일제는 마리아의 귀국을 진실로 두려워했던 것이다.
7월 20일 밤 가방 한 개만을 든 마리아는 일경의 감시 호위를 받으며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녀는 곧장 세브란스병원 구내의 고명우 박사 댁으로 들어갔다. 고박사는 병보석 후 세브란스에서 그녀의 치료를 전담했던 담당 의사로서 큰 삼촌 김윤오의 사위였다. 마리아는 귀국했지만 일제의 간섭과 감시로 인해 서울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가 없었다.
귀국 준비 과정에서부터 일제측은 원산의 마르다 윌슨여자신학교 마르다윌슨 여자 신학원에서 강의하는 김마리아의 모습 김마리아 어록비에서만 강의하도록 활동 반경을 제한했기 때문에 성경 강의와 교회전도 사업으로 여생을 보내야 했다.
일제 말기 국내 대부분의 지식인들과 교계까지도 일제에 굴복해 친일 행위를 했지만 김마리아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며 민족지도자로서 지조를 견지했다. 만년에 우연히 얻게 된 개구멍받이(버려진 것을 거두어 기른 아이) 김태국(金泰國)을 양자로 삼아 친아들처럼 돌보고 키우는 아름다운 모정의 면모를 보여 주기도 했다.
조국 광복 1년여를 남겨놓은 1944년 3월 13일, 고문 후유증이 심해진 김마리아는 마침내 영면했다.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화장 후, 대동강에 뿌려졌다.
그리고 1962년 김마리아는 건국훈장 독립장 에 추서됐다.
|
참고문헌 『정신백년사』정신여고, 1989 박용옥,『 한국 근대 여성운동사 연구』지식산업사, 1996 박용옥,『 김마리아: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4 『동아일보』,『 조선일보』, <김마리아 재판기록> 등
|
첫댓글 안중근 의사 모친은 조마리아 여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