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네가 그랬지
바다는 썰물 때보다 밀물 때가 더 쓸쓸하다고
오지 않는 사람 기다리는 게 정말 쓸쓸하다고
나는 그 뜻도 모르고 네 손을 놓아주었지
그리고 다시 여름이 왔다
해는 뜨겁고 바다는 즐거운데
나는 빈 배로 바다에 매어 있고
기다리는 바다에는 갈매기만 남았다
-『경북매일/이성혁의 열린 시세상』2023.04.18. -
‘빈 배’가 되어 “바다에 매어 있”기 전에는 모른다. “오지 않는 사람 기다리는” 일의 쓸쓸함을. 그래서 시인은 떠나는 너를 붙잡지 않고 “손을 놓아주었”던 것이다. 이별이란 무엇인지는, 자신이 홀로 된 후 새삼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알게 된다. 이에 반해 세계는 쓸쓸한 자신보다 더욱 ‘뜨겁고’ ‘즐거운’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도. 다만 ‘나’의 주변을 맴도는 것은 시인처럼 외로운 갈매기뿐이다.
가슴에 구멍을 뚫으면 피리가 되지
몇 개를 막으면 노래가 되지
노래에 구멍을 뚫으면 춤이 되지
자면서도 멈출 수 없는 춤
떼 지어 다녀도 늘 혼자인 춤
구멍이 다 막히는 날
노래도 춤도 다 막히고,
막이 내리지
다음 공연은 아직 미정
-『경북매일/이성혁의 열린 시세상』2024.04.19. -
마음을 콕 찌르는 시다. 노래는 가슴에 뚫린 “구멍 몇 개를 막으면”서 피리처럼 발현되고, 그 “노래에 구멍을 뚫으면 춤이” 된다. 뚫림은 고통스럽지만 막힌 가슴에 예술의 숨통을 튼다. 하여, 뚫림과 막힘의 변주를 통해 다채롭게 이루어지는 노래와 춤-“구멍이 다 막”힌다면 공연될 수 없는-은 고통과 자유를 모두 품고 있다. 그리고 잠이 들어도 가슴속 노래는 사라지지 않기에, 춤은 “자면서도 멈출 수 없”다.
언 살 수면을 찢어 늪은
새들의 비상구(非常口)를 만들어 놓았다
출렁이는 상처를 밟고 새들이 힘차게 작별한 뒤에도
늪은 밑바닥까지 울던 새들의 발소리 기억하며
겨우내 상처를 열어 두었다
고향을 힘차게 떠난 우리는 언제
어머니 상처에 돌아갈 수 있을까
-『경북매일/이성혁의 열린 시세상』2023.04.20. -
시인은 어머니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저 겨울의 언 우포늪에 뚫려 있는 ‘비상구’에서 깨닫는다. 그 ‘비상구’는 새들이 비상할 수 있도록 어머니가 자신의 몸에 스스로 만든 상처다. 자식들은 이 어머니의 “출렁이는 상처를 밟고” 비로소 자립하여 고향을 떠나 하늘을 날 수 있다. 더 나아가 어머니는 추위를 무릅쓰고 “겨우내 상처를 열어”두기도 한다. 새들이 하늘을 날다 돌아와 지친 몸을 기댈 수 있도록.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경북매일/이성혁의 열린 시세상』2023.04.21. -
술병처럼 자식에게 자신을 따라주다가 “속을 비워”가는 존재가 있다. 아버지다. 아버지는 가부장으로서 가족의 독재자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경우 자식을 위해 살다가 결국 쓰레기장에 ‘빈 병’처럼 굴러다니는 처지에 놓인다. 시인은 후자의 측면에 대해 말해준다. 자식들은 몰랐지만, 어느새 늙어버린 아버지는 ‘빈 소주병’이 되어 “마루 끝에 쪼그려 앉”아 ‘흐느끼’곤 한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