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있느냐
창3;9-21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동산 나무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시며 찾으셨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절박한 상황에 부딪히면
먼저 자신이 숨을 만한 안전한 곳을 찾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결코 하나님의 본래 뜻이 아니었습니다.
죄로 인해 파괴된 인간 심성의 일그러진 모습일 뿐입니다.
범죄한 인간의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던
순수하고 순결한 모습의 자아를 범죄함으로 잃어버렸습니다.
죄지은 영혼에 대한 자기 상실의 모습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한 우리의 자아상입니다.
하나님에게로 나아감으로 다시 회복되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첫째로;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9-13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첫 음성입니다.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반성과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이 음성은 전인류를 거쳐 각 개인에게 메아리치는 음성입니다.
이 음성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심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 상태인지
아니면 그 말씀을 이탈하여 죄인된 상태인지를 물으시는 심문입니다.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소원과 하나님을 찾는 인간의 소원은
다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아담의 영적상태에 관하였고
아담의 답은 육적상태에 관하였습니다.
저들은 고의적으로 회피하고 체면적인 말로
근본적인 죄문제를 숨기려했습니다.
이런 구실과 변명과 속임수는 사람에게는 통하나
하나님께는 결코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과가 아니라 원인에 대해 근본적인 것을 물으셨습니다.
아담은 죄에 대한 고민과 행위에 대한 수치감도 없고
다만 그 죄를 가리우려는 욕망만 드러낸 냉담한 표현이었습니다.
아담은 처음에 죄를 가리웠고(10절)
그 죄가 명백히 지적되자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하고
나아가 하와를 주신 하나님께 전가했습니다.
아담은 아내에 대한 감사함을 모르고 책임전가의 구실로 삼았습니다.
범죄자의 심리입니다.
어느 무명작가의 오래전 글입니다.
나는 젊을 때 세계를 바꾸려 했지만
그러지 못해 나의 조국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아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이라도 바꾸려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중년을 지나는 나이가 되자 마지막으로 가정을 바꾸려 했지만
이루지 못했고 결국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나 자신을 바꾸는 일을 했다면
나의 가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가정의 변화는 마을을 변화시켰을 것이며
마을의 변화는 나의 조국까지 변화시켜 세계에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기보다 먼저 나를 바꾸고 나의 생각을 바꿔보세요.
마치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기 시작해
작은 도로에서 큰 도로를 이루어 가는 것처럼 내가 나를 바꾸면
영향의 폭이 점점 넓어져 세상까지 바꾸게 됩니다.
언제나 내가 문제이고 죄인입니다.
상황이 아니라 내가 바뀌면 새로운 세상과 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자격 없는 나를 지금도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모든 위선과 죄악의 가면을 벗고 마음을 찢고 회개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최고의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둘째로;해결하시는 하나님 이 십니다
본문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의 판결입니다.
심문은 남자에게서 시작했으나
판결은 뱀에서 시작하여 거슬러 올라갑니다.
판결의 내용은 뱀에게는 저주이며
여자에게는 해산의 산고와 남편에게 복종과
남자에게는 생계의 고통이었고
그리고 남녀에게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결은 종국적이거나 절망적인 것은 아니고
여기서 메시야를 통한 구원이 예언됩니다.
뱀에게는 심문은 없고 판결을 내린 이유는
뱀과 마귀와 사탄에게는 회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타락은 모든 동물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나 뱀은 특히 저주를 받았습니다.
배로 다니고 흙을 먹는 저주였습니다.
흙은 저주와 굴욕의 상징입니다. “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는 말씀은
뱀과 인간의 원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뱀을 보면 혐오감을 느끼며 그 머리를 쳐 죽이려하고
뱀은 사람을 만나면 그 발 또는 몸을 뭅니다.
이 말씀은 최초의 복음(Primus evangelium)이라 부릅니다.
메시야와 사탄 간의 투쟁사이고
구체적으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거기서 사탄은 여인의 후손인 그리스도를(갈3:16,19)
못 박았고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대속으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심판하시면서 거기에서
구원받을 길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고난 후에 영광이고 십자가 후에
부활이고 실패같은 승리와 성공인 것입니다.
사람 앞에 서기만 하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잘 타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런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그는 친구도 없고
남의 집에도 가지 못하고 늘 외롭게 지냈습니다.
그는 "이렇게 소심하게 살면서
평생을 나약하게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한 번 뿐인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과감하게 자신을 알리기로 결심했습니다.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미소를 머금고 인사부터 하고는
상대편을 칭찬하기 시작했습니다. “
당신은 멋있는 분이군요.
참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런 말에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행복해 했고 좋아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모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영국의 달변가이며 시인이며 극작가인 버나드 쇼입니다.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면 나 자신이 달라집니다.
최초의 복음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최고로 행복한 존재입니다.
이 감격과 기쁨을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고 표현하고 전파하여
모두를 구원하고 행복한 존재로 만드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그 은혜와 감격으로
평생을 감사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셋째로; 축복하시는 하나님이 십니다
본문 20-21절“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은 심판하시면서
범죄한 아담부부에게 은혜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분노에서의 형벌이 아니라
공의의 조치였던 것을 말합니다.
하와는 생명으로 번역됩니다.
하와는 좁게는 전 인류의 어미이고 넓게는 전 생물의 어미가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만든 무화과나무 잎의 옷은
햇빛에 곧 말라 부서져서 몸을 가리우지 못합니다.
이런 인위적인 옷 대신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죽옷으로 그들의 나체를 가리워주셨습니다.
인간은 인위적 방법으로 죄의 수치를 가리우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대속으로만 죄의 수치에서 완전히 회복됩니다.
가죽옷은 동물을 죽여만든 것으로 세상 죄를 지고가신 어린 양(요1:29)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속죄를 예언하고
인간은 그리스도를 옷입듯함으로(롬13:14)
죄의 수치를 완전히 가리웁니다.
칼빈은 가죽옷을 입히심으로 이 옷을 볼 때마다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경계시키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고
영생과 천국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축복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축복을 받은 자는 현세와 내세에서 최고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결론으로;
인생에는 상징적으로 세가지의 ‘그 날’이 있습니다.
1)누구의 인생이든 비 내리는 날이 있습니다.
실패와 배신과 좌절과 병고와 고난과 절망의 비입니다.
실로 고통스러운 시기이지만 이상한 것은
인생의 고통스러운 비를 맞을 때
비로소 연약한 나를 알고 이웃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2)누구의 인생이든 햇빛 비치는 날이 있습니다.
썰물이 있으면 곧 밀물 때가 옵니다.
동트는 새벽과 영혼에 햇빛이 비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 날에는 노래하며 사는 것입니다.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받은 바 축복을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신나게 사명 감당하며 사는 것입니다.
3)누구의 인생이든 그물 잡아 당기는 날이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그물을 던진 사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내 인생의 역사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또 얼마 동안은 좋은 물고기와 나쁜 고기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구별하지 말고 그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심판 때가 있습니다. 종말이 오면 다 드러납니다.
그럴 듯하게 보일지라도 마지막 순간에는 있는 그대로 드러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남은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한 현자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
할 일이 있거든 지금 하십시오”.
저주 받고 지옥 가야 할 사람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축복 받은 성도답게 살고
축복의 유통자(창12:2)로 사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에 “
내가 여기 있나이다”(사6:8)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찾아오시며 해결하시며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삶의 자리에서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