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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7일 연중 제19주일 제1독서 <주님께서는 저희의 적들을 처벌하신 그 방법으로, 저희를 당신께 부르시고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제2독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복음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의 묵상 연중 제19주일 2016년 8월 7일. - 서 공석 신부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은 지극히 높고 엄하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감히 부를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율법을 주고, 그것을 철저히 지킬 것을 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율법 준수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하느님이 엄하게 벌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인권(人權)을 소중히 생각하는 민주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과거 로마제국과 중세 봉건사회에서 통용되던 신앙언어를 절대적인 언어로 생각하고 하느님을 높고, 두려운 분으로 상상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분이 주신 계명을 잘 지키고, 그분에게 제물을 잘 바쳐서, 그분으로부터 은총을 얻어 우리가 잘 살수 있다고 상상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직도 그렇게만 믿고 있다면, 오늘 복음의 말씀,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는 말씀은 하나의 허사(虛辭), 곧 의미없는 말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대조되는, 엄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베푸셨고, 자녀가 부모로부터 인간다운 삶을 배워서 사람이 되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을 배우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호세아예언서는 하느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11,1). 자상하게 우리를 위해 배려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초기신앙공동체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는, 우리의 생명을 베푸신 분, 우리를 자상하게 돌보시는 분이라는 고백과 더불어, 우리가 그분의 베푸심과 돌보심을 배워서 실천하며 살겠다는 결의(決意)를 담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이미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이 끝난 후에 우리가 갈 내세(來世)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현세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내세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함께 계심을 받아들여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있습니다. 하느님을 높고, 두려운 분이라 믿으면,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또 불안하게 하는 하느님일 것입니다. 군복무를 하는 사람에게 군 지휘관은 높고 두렵습니다. 판결을 받기 위해 법정(法廷)에 선 사람에게 재판장은 높고 두렵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예수님은 그분을 두려운 분이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당신의 나라를 기꺼이 주는 분이라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에 대한 그 시대 유대인들의 편견을 넘어 그들이 하느님을 올바로 체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으면, 우리는 그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불러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분이지만, 우리가 그분이 하시는 일을 배워 실현하며 살 때, 우리 삶의 원천으로 확인되는 분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하면서 된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자기가 가진 것으로 서열이 정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자기가 가진 것을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신 것이라 생각하며, 그것을 자기 주변에 베풀어서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체험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모습입니다. 종은 주인을 주목하고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합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예수님에게 주목하고 그분이 가르친 하느님의 일, 곧 섬김을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이 일을 맡긴 관리인에다 신앙인을 비유하면서, 하느님은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재물이나 지위를 얻으면, 그것을 자기에게 주어진 특권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웃 앞에 우월감을 가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질서에서는 다릅니다. 재물과 지위는 그것을 가진 사람이 마음껏 누리고 행세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인은 하느님이 자기에게 베푸셨기에 다른 형제자매들을 위해 자기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물은 이웃을 위해 베풀어야 하고, 지위는 이웃을 위해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이 아버지이신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도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하느님과 교섭하여 자기 한 사람 잘 될 길을 찾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녀 된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많이 바치는 자에게 축복해주는 이 세상의 탐관오리(貪官汚吏)가 아닙니다. 공양미 삼백 석을 받고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해준 심청전의 용왕도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베풀듯이, 대가 없이 당신의 나라를 기꺼이 주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인과응보의 원리를 따라 베풀지 않습니다. 성공한 자녀를 사랑하고 실패한 자녀를 소홀히 하지도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 모두를 사랑하고 돌보아 주며, 자녀 모두가 훌륭히 살 것을 원합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모두 당신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아서, 은혜로우신 당신의 생명을 살 것을 원하십니다. 자녀는 부모의 생명을 연장하여 삽니다. 부모의 모습을 역사 안에 지속시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역사 안에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실현합니다. 가진 것을 이웃에게 베풀면서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신앙인은 ‘기꺼이 베푸시는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기에, 그분의 베푸심을 당당하게 실천하면서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과 그분의 질서가 자기 주변에 실현되는 사실을 기뻐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충실과 불충실의 경계선
[말씀자료 : 신대원 요셉신부-[편 집:원근식요아킴] 사실 충실과 불충실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충실(充實)이란 열매가 허실(虛實) 없이 꽉 찬 상태를 말하고 불충실(不充實)이란 열매가 맺긴 했지만 빈 쭉정이라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충실(忠實)이라는 것인데, 충직하고 성실하다는 뜻이며, 불충실(不忠實)이란 충직하지도 성실하지도 않다는 말이다. 이 두 가지 의미는 결국 뜻이 똑같다. 충실은 사람으로 해야 할 도리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고, 불충실은 탐욕이나 허영, 기만이나 사기 같은 처세술에 능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충실하려면 몇 가지 사실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첫째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루카 12,33). 둘째는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루카 12,35). 셋째는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 가진 것이란 재물은 물론이고 지식과 마음 태도까지도 포함된다. 재물을 가진 사람은 재물이 없는 사람과 나누고, 지식을 가진 사람은 지식이 부족한 사람과 나누며, 마음이 넉넉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배려할 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총애를 받든지 수모를 당하든지 거기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언제나 주님께서 부르시면 따를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사람만이 진실로 충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현실은 안타깝다. 재물을 가진 사람은 재물을 가진 사람대로, 지식을 가진 사람은 지식을 가진 사람대로 그렇지 못한 이웃과 나눌 생각은 하지 않고 저마다 자신들의 안위와 영달을 꿈꾸며 더 많은 탐욕을 일삼고 있으니 개탄할 일이 아닌가. 최근 어느 연구소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종교에 귀의한 자든 아니든 현실적으로 인생에서 가장 의지할 만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1위가 돈, 2위가 권력이나 학벌, 3위가 신(神)이라는 응답이 나왔다. 그만큼 돈이나 권력 등 세속적 힘을 얼마만큼 가졌느냐에 따라 삶의 성공도가 판가름 나고, 그 성공도에 따라 삶의 충실도가 정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 씁쓸해하지 않을 수 없다. 가지지 못한 자들은 결국 충직하지도 성실하지도 못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힘없는 자들은 현실에서 도태되고 말아야 할 대상자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어떠한가. 한 조사에 근거하면, 가톨릭 신자들 역시 겉으로는 하느님께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심으로는 돈이나 권력, 명예 따위를 하느님보다 우선순위에 놓고 있다. 하느님과 세상의 것을 저울질하다가 결국 최종적으로는 세상의 것을 선택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뜻이다. 어떤 사제의 고백처럼, 이 시대에 성지 순례자는 많은데 진정으로 목숨을 바칠 순교자는 보이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더 따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예수님 생각은 우리 뜻과는 사뭇 다르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재산을 그에 맡길 것이다"(루카 12,43-44).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루카 12,47). 오늘날 세상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재벌가, 위정자, 지식인들은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자신들 이익만을 챙기는 것을 충실이라 여긴다. 힘없는 국민들이나 주변의 약자들은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사실 충실과 불충실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만큼이나 가깝다. 그러니 주님께 모든 것을 걸고 주님 말씀에 따라 살고자 나선 교회 공동체마저 세상의 시류(時流)에 편승하려 든다면 과연 하느님 일꾼으로서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감히 주님께 고백할 수 있겠는가.............◆
허리에 띠를 매고 -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큰 사랑입니다. 주인이 오히려 종에게 시중을 드는 역설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사랑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이태리 밀라노의 대성당에는 문이 셋이 있는데 첫째 문은 아치로 되어 있고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둘째 문은 십자가형으로 되어있는데 “모든 고통도 잠깐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셋째 문에는 “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 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즐거움도 잠깐이고 고통도 잠깐인데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고, 세례를 통하여 초자연적인 생명으로 새로 태어나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죄의 용서를 받은 것이고, 영원한 생명, 곧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여기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잘 가꾸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은혜가 아무리 풍요롭다 해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준비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루카12,3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어떤 것을 시작하기 전에 몸을 살핀다는 것입니다. 중동 사람들의 옷을 보면 통으로 짠 긴 옷입니다. 평상시에는 띠를 매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을 제대로 하려고 한다면 띠를 매고 몸을 단정하게 합니다. 거추장스런 것은 정리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띠를 맨다는 것은 우리 신앙 상태를 다시 추스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한 순간에 일시적으로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한 순간의 마음을 가지고 영생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기도하며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매일이 은총의 기회입니다.
준비된 삶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에페6,14-15).하고 말하였습니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라!” 우리가 신앙을 추스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는 곧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7장17절에는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 후서 3장 16절에서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성찰하는 삶이 준비된 삶입니다. 우리가 매일 거울을 보고 몸단장을 하듯이 하느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그에 걸 맞는 삶을 다져가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영혼을 비추는 거울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말씀에 비추어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야 합니다.
주님께서 ‘용서하라!’ 하였으면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하라’ 하였으면 사랑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라’. ‘자선을 베풀어라.’ 하였으면 선을 행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거울을 보고 얼굴에 흉한 것이 묻은 것을 알았는데 그냥 다니십니까? 아니잖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에 마음을 비추어 고칠 것은 고쳐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사람은 다른 어떤 이론이나 유혹에도 당당히 물리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분명하게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게 됩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우왕좌왕 흔들리고 맙니다. 말씀대로 행하기를 주저합니다. 그렇게 하면 불이익이 올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춰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고1,22-25). 그러므로 여러분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함으로써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등불을 켜 놓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등불을 지속적으로 켜 놓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죠? 예, 기름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그 기름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름은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이 불타오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많은 분들이 영적인 체험을 하고 차원 높은 신앙생활을 하길 원하면서도 정작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는 데에는 소홀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지 않고는 결코 지속적인 열심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기름이 없으면 불이 꺼집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으로 함께하지 않으면 신앙이 쉽게 흔들리고 결국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기를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말씀을 들으십시오!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지혜와 명예와 성공, 부와 영원한 생명의 길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에로 가는 길에서 겪는 아픔의 위로와 힘이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하여 위로와 기쁨, 평화와 영생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 중에도 큰 희망을 주는 말씀은 ‘깨어 있는 종들에게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깨어 준비하는 사람에게 천국에서 그만한 환대를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주님 앞에 나갔을 때 세상의 삶에서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내일은 착실하게 준비한 사람에게만 찾아온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주인이 밖에 나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종은 마땅히 주인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혹 주인이 더디 오려니 생각하고 나태하게 지냈다면 그는 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 종은 주인이 언제 오든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준비한다는 것은 깨어 있는 것이요, 깨어 있다는 것은 곧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더 많은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인의 눈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5-6).
세상에 한 가지 확실한 것과 한 가지 불확실 한 것이 있는데 확실한 것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이요, 불확실한 것은 그 죽는 날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심판의 주님께서 오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오신다는 것이 긴장을 더해 주기도 하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은 준비할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후회하지 말고 기회를 만들어 사랑을 실천하고, 용서와 화해를 미루지 않기 바랍니다. 이웃을 위한 희생을 감당하며 자선을 베푸는 일, 이 모든 것이 천상에 보화를 쌓는 일이니 만큼 생각으로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는 가운데 행복한 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리가 쭉 찢어집니다. 그럼 반대로 황새가 뱁새를 따라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땐 속이 터집니다.@@@ 뱁새는 뱁새고 황새는 황새입니다. 욕심 부리지 말고, 또한 상대를 인정해 주고 배려하면서 각자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탈랜트대로 최선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믿음과 반대되는 말은 무엇일까요? 배반, 배신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배반과 배신은 대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땅에서 구원해 주신 하느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우상을 섬겼고,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해서 팔아 넘겼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배반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을 사기꾼이라고 부릅니다. 배반을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박해와 고문은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교회는 순교를 믿음의 가장 큰 척도로 생각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은 신앙의 별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믿음에 대한 아름다운 글을 남겨 주셨습니다. 대학로에는 함석헌 선생님의 시비(詩碑)가 있습니다. 대학로에 갈 기회가 있으면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말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원하십니다. 믿음은 또한 행동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친 것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성모님께서도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믿음을 드러냈고,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셨고, 그 믿음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전의 아픈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1986년 저는 군종병으로 근무하였습니다. 군종 신부님께서는 2박3일 군종신부님 회의가 있으셔서 출장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청소를 깨끗이 하고, 신부님이 없는 동안에는 부대에서 지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라고 대답은 하였지만 제게는 다른 마음이 생겼습니다. ‘신부님이 출장을 가시면 마음껏 놀아야지. 친구들을 불러다 술도 마셔야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막 파티를 시작하려는 순간입니다. 신부님께서는 모임이 취소되어서 다시 성당으로 오셨습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그대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흐르는 물이 썩지 않듯이 함께 나누는 사람은 결코 신앙이 시들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는 늘 깨어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름철에 홍수로 인한 피해가 예상되지만 우리는 늘 피해를 입고 나서야 대책을 세우곤 합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라는 말이 있듯이 신앙도 건강할 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받은 만큼 베풀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 중에 하나가 암입니다. 이 암은 자기는 영양분을 받으면서 다른 세포에게 영양분을 주지 않는 세포 때문에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혼자 비대해지고, 다른 세포들의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몸의 균형을 깨뜨린다고 합니다. 자기가 받은 만큼 베풀 줄 아는 신앙인은 결코 그 신앙이 시들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의 꽃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면서 그리스도의 삶을 전하면서 활짝 피어있는지, 아니면 어느덧 나의 게으름과 나의 욕심과 나의 이기심으로 시들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물속에 있다 보니 세상의 삶과 닮아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속에서 두려움 때문에 긴장을 하면 숨을 몰아쉬게 되어 허파 속의 공기가 다 빠져나가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몸이 차분히 가라앉지 않고 붕 뜨게 되고 시야는 매우 좁아져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공기는 충분히 있으니 한숨을 내쉬듯 끝까지 숨을 내뱉는 연습을 합니다. 물속에서 내 안에 있는 숨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내뱉는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이 가슴으로만 숨을 빨리 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죽으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숨을 끝까지 다 내뱉으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몸이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아름다운 산호초와 물고기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시야가 넓어지면서 바다 속의 평화로움과 만나게 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옆에는 항상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믿기만 한다면 산소가 다 떨어져도 마스크가 벗겨져도 발이 산호에 끼어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두려움에 당황하니까 사고가 생기는 것입니다. 즐기려면 두려움을 없애야하고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믿어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들 작은 양떼야,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양떼는 목자가 있습니다. 목자는 푸른 풀밭으로 양떼를 이끌 책임이 있습니다. 주님은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냥 믿기만 하면 영원한 행복의 나라로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우리를 챙겨야합니다. 더 산소를 많이 들이마시기 위해 숨을 가쁘게 쉬는 것과 같습니다. 두려움은 다 내어주지 못하게 하고 더 챙기려고만 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하나 알려주십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남은 것을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을 팔아서라도 내 안의 것을 빼어내라는 것입니다. 돈은 마치 산소처럼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피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더라도 피는 돌지 않아도 썩고 죽지 않으면 새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아무리 산소를 많이 들이마시려고 하더라도 몇 분을 버틸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 때는 숨을 배로 쉽니다. 끝까지 들이마시고 끝까지 편안하게 내뱉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 무언가를 잃지 않으려고 숨을 가슴으로만 쉬게 됩니다. 긴장이 되면 가슴으로만 빠르게 숨을 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배가 차가워지게 되고 몸에 이상이 오게 됩니다. 돈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자꾸 움켜쥐려고 하는 것이 두려움이고 그 두려움 때문에 세상을 즐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에게 부족함 없이 채워줄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계산하지 말고 믿어야합니다. 우리는 매일 새들까지도 먹이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이들입니다.
결국 두려움이 인생을 경직되게 만들고 병들게 만들고 즐기지 못하게 만드는데 그 두려움은 믿지 못하는 교만으로부터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트 오브 더 씨(In the Heart of the Sea)’라는 영화는 두려움이 무엇으로부터 시작되고 또 무엇으로 나타나며 그러면 삶이 어떻게 되는가를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위대한 소솔 ‘모비딕’의 소재가 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와 권력을 이용해 낙하산으로 선장이 되어 가문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고래 잡는 배를 탄 한 사람과 농민 출신으로 신분상승을 통해 선장을 해 보려는 야망을 지닌 일등 항해사의 갈등을 배경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1800년대 고래 기름으로 불을 밝힐 수 있음을 알게 된 후 전 유럽은 고래잡이 열풍이 불었습니다. 그래서 씨가 말라가는 고래를 찾아 두 야망을 품은 이들은 여럿의 선원들을 이끌고 아주 먼 곳까지 갑니다. 이 둘은 서로의 야망 속에서 질투하고 미워하며 누가 서로 많은 고래를 포획하느냐 경쟁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배를 공격하는 거대한 고래가 산다는 곳까지 위험을 감수하고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그 고래는 이 배들을 난파시키고 작은 보트에서 보잘 것 없이 바다에 표류하는 신세를 만들어버립니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어 먼저 죽은 사람의 인육을 먹어가면서까지 연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깨닫습니다. 결국 가문의 명예를 지키지 못하는 안 되는 두려움을 가진 선장은 그것 때문에 탐욕을 부리게 되었고 자연의 섭리 앞에 굴복하여 바다 위에서 죽을 운명만 기다려야 하는 초라한 신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일등 항해사 또한 선장이 되고 싶은 탐욕으로 그 큰 고래를 화나게 하여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더 이상 고래를 향해 작살을 던질 수 없게 됩니다. 이들은 죽기 직전에 기적적으로 구조되었고 이젠 땅 위에서 두려움 없이 살아갑니다. 고래잡이 산업의 하락을 막기 위해 괴물 고래가 존재한다는 것을 감추려고 하는 이들 앞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포기하며 당당히 진실을 밝힙니다. 자유로워 진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겸손해 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두려움으로 자기만을 챙기려고 하는 것을 잠자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 없이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을 깨어있는 삶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그리고 그 깨어있는 종들이란 자신의 믿음으로 두려움 없이 나눌 줄 아는 이들입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것을 이웃을 위해 내어주어야 하는 의무를 지닌 집사들입니다. 내 것을 먼저 챙기다가는 노아의 홍수 때처럼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두려움으로 세상을 한 번 즐겨보지도 못하고 죽게 되는 이들입니다.
금융위기 당시 세계 94위 갑부였던 독일 아돌프 메클레(74세) 회장은 재산이 몇 조대로 떨어져서 달리는 기차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는 몇 십조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재산이 얼마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느냐 안 받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과 자연에 해를 입히고 그 벌을 받고야 맙니다. 지금 온난화도 인간의 이기주의가 자연을 훼손하여 벌을 받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팔아서라도 내어줄 줄 아는 사람으로 변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즐기지도 못하고 구원받지도 못합니다. 이 연습을 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도 두렵다면, 오늘 복음말씀으로 치자면 깨어있지는 못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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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우 여러분, 말씀을 들으십시오!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지혜와 명예와 성공, 부와 영원한 생명의 길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에로 가는 길에서 겪는 아픔의 위로와 힘이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하여 위로와 기쁨, 평화와 영생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