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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 여자의 조건 --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 / 마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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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마음속이 진실로 야해져서 그것이 겉으로까지 드러나게 되는 것은 어떤 심리적 메카니즘에 의해서일까? 나는 <야한 마음>을 유지시켜 주고, 그것이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창조적으로 가꾸는 데까지 발전하며, 따라서. 아름다운 사랑도 즐길 수 있도록 만드는 근본적 심리기제(心理機制)가 바로 <자기애(自己愛 : narcissism)>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나르시시즘을 일종의 변태심리로 보아, 이성과의 성적 접촉이 불가능할 때 할수없이 그 대용품으로 이용하게 되는 변칙적 성애(性愛)의 일종으로 보았다.
그러나 나는 나르시시즘을 좀 더 폭넓게 수용하여, 자기 자신의 아이덴티티 (identity : 주체적 자아) 를 확보하고 스스로의 굳건한 가치관을 갖게 만들어 주는 모든 노력의 근원이라고 보고 싶다. 흔히 <저 잘난 맛에 산다>고들 하는데, 남이 뭐라고 하든지 저 잘난 맛에 살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주체적 삶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야한 여자는 자기 자신을 미적(美的)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는 여자다. 말하자면 누구를 위해서 화장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화장하는 여자는 야한 여자가 아니다. 스스로 제멋에 겨워 화장하고 몸을 꾸밀 때, 그 여자는 애인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 또 굳이 화장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누군가와 사랑을 할 때, 나르시시즘을 스스로의 즐거움으로 간직하고 있는 여자 (또는 남자) 는 그 사람과 헤어져도 그리 큰 상처를 받지 않는다. 서로 원수가 되어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도 친구로서의 우정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지극히 변덕스러운 측면을 지니고 있다. 만날 때는 서로 좋아서 날뛰지만 헤어질 때는 금세 사랑이 증오로 바뀌어 원수가 된다. 그러므로 <사랑의 기술>은 <헤어짐의 기술>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나는 나의 모든 청춘을 바쳐 너를 위해 헌신했는데, 이제 와서 날 버린다니 웬 말이냐]라고 말하며 복수의 칼을 가는 여자는 사랑의 기술이 없는 여자다. 그녀에게는 나르시시즘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없어지고 상대방만이 존재하며, 그 상대방에게 모든 부담과 책임을 떠넘기려 하게 된다.
옛부터 우리나라에서 <부부유별(夫婦有別)>을 남녀간의 결혼생활의 지표로 삼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별(別)>이란, 남녀 각자가 따로따로 홀로 선다는 뜻이다. 각자의 고유한 영역을 지키며 상대방에게 간섭도 부담도 주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각자의 마음속에 나르시시즘적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나르시시즘은 자칫 이기적 자기중심주의나 자기도취로 오해받을 여지가 있지만, 건전한 나르시시즘은 상대방에게 사랑의 책임을 전가시키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사랑의 장애요소인 <부담감>을 없애 주어 더욱 돈독한 애정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르트르와 시몬느 보봐르가 평생 동안 연인 사이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각자가 진정한 나르시시스트, 즉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각자의 고유한 가치관과 <저 잘난 맛>을 가지고 있는 사람 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희생적인 내조>와 복종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다가 만약 그 여자에게 싫증이 나서 그 여자를 <버리게> 되는 경우가 생기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그 여자에게서 독한 저주와 욕설을 들을 것이 뻔하다. 사랑은 결코 소유나 복종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문제다.
사랑은 각자의 나르시시즘을 바탕으로 거기에 부수되어 이루어지는 일종의 즐거운 놀이(game)일 뿐이다. 그 놀이는 오래 계속될 수도 있고 금방 끝날 수도 있다. 예컨대 당구나 볼링 등의 놀이가 끝난 뒤에 어떤 복수심이나 적개심이 생겨날 수 없듯이, 사랑의 끝남에도 그런 <놀이 정신>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혼자서 극장에도 못 가고 술집에도 못 가고 옷가게에도 못 간다. 특히 여자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구두 하나를 사러 가도 꼭 친구를 데리고 간다. "이 구두가 좀 큰 것 같은데, 네 생각엔 어떠니 ?" 하고 물어봤을 때, 친구가 자기가 신을 구두도 아니므로 그저 건성으로 "큰 게 오히려 편하지 뭐" 하면 안심하고, 또 거꾸로 "이 구두는 예쁘긴 한데 너무 꽉 조이는데" 라고 말했을 때 친구가 "구두는 신다 보면 늘어나더라" 라고 건성으로 대답해 주어도 안심한다. 언제나 타인의 눈에 맞추어 자기자신의 선택을 결정하는 것, 이것은 이타주의적 우애정신의 발로가 아니요 다만 이기적 책임전가심리일 뿐이다.
그러므로 야한 여자는 애인이 없어도 화장하고, 애인이 있어도 화장한다. 특히 혼자 있을 때나 외로울 때 더욱 더 거울을 들여다보며 화장을 바꾸고 헤어스타일을 바꿔 가며 스스로 <자기 연애>를 즐긴다. 또한 관능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혼자서 수십 명의 남자를 상대하기도 하고 기가 막힌 러브 스토리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여자는 남자의 간섭이나 주문 없이도 멋을 내고, 또 새로운 멋을 창조한다.
내가 지금까지 가장 이상형으로 삼았던 여자는 <내가 주문하거나 간청하지 않아도 스스로 항상 변화있는 관능미를 가꾸어 나가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런 여자는 드물었던 것 같다. 나는 특히 길게 길러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을 좋아하는데, 여간 보채지 않는 한 손톱을 자발적으로 길러 주는 여자는 드물었다. 또 그 긴 손톱은 언제나 나를 위한 것이었지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보기 흉해지게 마련이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또는 어떤 무생물이든 간에, 자꾸 관심을 가져줘야, 즉 사랑해 줘야 아름다워지고 생기가 난다. 자기의 마음이나 신체도 같다. 자꾸 바라보고 만지고 쓰다듬어 줘야 손도 손톱도 다리도 예뻐진다. 거울 속에 비춰진 자기 자신을 애인으로 삼아 끝없이 바라보고 사모하며 아름답게 만들려고 애쓰는 여자, 그런 여자가 진정으로 야한 여자요, 그 여자의 나르시시즘은 결국 스스로를 창조적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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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 여자는 나르시시스트이기도 하지만 또한 매저키스트이기도 하다. 여자는 음양(陰陽)이론으로 보면 음에 속하여, 수동적 포용력을 그 특성으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디스트인 남성은 양에 속하여 능동적 저돌성을 특성으로 한다. 그러므로 여성은 흔히 대지(大地)에 비유된다. 대지는 언제나 만물을 포용하고 길러내며 고요히 머물러 있는 특징을 지녔다. 대지의 반대인 하늘은 천둥 벼락이 칠 때도 있고 비바람이 몰아칠 때도 있어 변덕스럽고 경망스럽지만, 대지는 언제나 따사로운 포용력을 가지고 만물을 화육(和育)한다.
매저키스트는 학대받고 복종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이상(異常) 성욕자로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너무 좁은 의미로만 매저키즘을 이해한 탓이다. 매저키즘은 스스로의 <능동적 결정권을 포기할 때 얻어지는 포근한 안식감(安息感)이 가장 기본이 된다. 마치 수녀나 비구니가 신이나 부처에게 스스로의 운명과 모든 결정권을 맡기고 체념(諦念) 상태에 들어갈 때 느끼는 종교적 법열감(法悅感) 같은 것이 바로 매저키즘적 쾌감의 본질이다. <의지(意志)의 공동화(空洞化)>에 의한 일체의 부담감으로부터의 모면과 도피, 이것은 책임과 의무에 시달리는 새디스트가 지배를 통해서 얻는 쾌감보다 훨씬 더 지속적인 안락함을 보장해준다.
그래서 야한 여자는 오히려 유순하며 귀여운 백치미를 가지고 있다. 흔히 <야한 여자> 하면 겉보기가 화려하고 특히 색조화장을 통해 그로테스크한 느낌 (뾰족한 손톱을 가졌을 때 더욱 그런 오해를 받기 쉽다) 을 주기 때문에 기(氣)가 센 여자로 오인받을 수가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화장을 야하게 한 여자가 오히려 더 청순하고 맑은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화장을 안하고 바지에 운동화, 그리고 생머리로 다니는 여자가 일을 잘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여자들과 어울려 등산이나 여행을 한 경험에 비춰 보아도, 아무렇게나 걸치고 다니는 여자가 오히려 게으르고, 평소에 화려하게 차리고 화장을 많이 하고 다니는 여자가 더 부지런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화장에 신경을 안 쓰거나, 나아가 화장한 여자를 천박한 여자라고 비웃는 여성들일수록 더 게으르고 건방지다. 그들은 남성들을 너무나 선망하는 나머지 -- 이러한 심리를 프로이트식의 표현을 빌어 말한다면 남근숭배(男根崇拜:penis envy)라고 볼 수 있다 -- 여자가 가사 노동을 하거나 화장하는 것을 여간 억울해 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손톱 긴 여자가 더 부지런하고 여성의 성실한 자세를 간직하고 있다.
생각해 보라. 아침마다 곱게 화장하려면 얼마나 <부지런해야>하겠는가? 여성의 자기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은 곧 여자로 태어난 기쁨을 긍정적으로 향유하는 심리이며, 이러한 마음씨는 섣불리 남녀평등을 주장하거나 남자에 대한 적개심을 갖는 것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남녀는 도저히 <평등>할 수 없다. 음과 양, 하늘과 땅이 각각의 소임과 특성을 가지고 있듯이 남자와 여자도 마찬가지다.
요즘 여성해방운동을 하는 여인들을 보면, 생머리에 헐렁한 바지, 그리고 화장기 없는 얼굴을 여성해방운동의 상징적 표상으로 내세우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여성으로서의 특권을 포기하고 오로지 남자처럼 되겠다는 심리의 표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네들의 마음속은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열등감과 그 열등감에 기인하는 남성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다. 선천적인 체질은 매저키스트로 태어났으면서, 의식적으로는 새디스트가 되고 싶어하는 데서 오는 양가감정(兩價感情)의 갈등은 그네들을 결국 사랑스럽지 못한 여인으로 만들어 버리고 스스로의 불행을 자초하게 하는 것이다.
매저키즘을 여성 특유의 특권으로 향수(享受)할 때, 남성혐오증은 불식될 수 있다. 사실 남성들이 여성보다 훨씬 더 불쌍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들은 화장도 못하고 (동물의 수컷들이 얼마나 화려한가를 한번 생각해 보라) 머리도 기르지 못하며 다양한 모드의 의상도 걸칠 수 없다. 남녀 누구나 생래적(生來的)으로 타고난 본능인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심리>를 그들은 남성으로서의 신성한 의무인 <노동>으로 대체해 버렸기 때문이다.
여자는 속상한 일이 생기면 미장원에도 가보고 야한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며 스트레스를 풀어 버릴 수도 있다. 그리고 남성들에게 위안을 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성은 그럴 수가 없다. 그저 술이나 퍼마시며 속을 버리고, 결국은 <무능한 남자> <꿋꿋하지 못한 남자>로 낙인찍혀 버리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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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다운 여자가 갖고 있는 매저키즘과 나르시시즘의 결합은 결국 여성의 아름다움을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의 원칙에 따라 가꿔 나가도록 만든다. 불편한 것은 모두 아름답다. 긴 손톱, 꽉 끼는 코르셋, 중국여인들의 전족, 뾰족구두, 무거운 장신구들이 다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의 원칙에 따라 고안된 것들이다. 중국의 <전족> 풍습은 꼭 남성우월주의의 산물만은 아니다. 전족은 여성들의 매저키스틱한 나르시시즘을 충족시켰으며 나아가 남녀간의 정겨운 성희(性戱)에 중요한 소도구로 이용되었다. 뾰족구두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이 야한 여성들은 뭐니뭐니 해도 뾰족구두가 가장 아름다운 구두요 색시한 구두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
손톱이 길면 손을 마음대로 놀릴 수 없고 억지로라도 손이 게을러지게 된다. 그러다보면 감미로운 권태감이 오고 거기서 관능적 상상력이 발동한다. 심심함과 권태감에서 오는 상상력의 유희는 문명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또 자기의 손톱을 가지고 만지작거리다 보면 미묘한 새도매저키즘(sado-masochism :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복합심리)을 경험할 수 있다. 일상 동작이 그리 불편한 것도 아니다. 글씨를 쓸 때나 젓가락질을 할 때나 어떤 비관습적인 손놀림을 하게 되어 그것이 미묘한 개성적 자부심과 쾌감을 가져다 준다.
손톱이 너무 길어 손가락으로 전화 다이얼을 돌리지 못하고 볼팬이나 연필로 다이얼을 돌리는 여자, 그런 여자를 상상할 때 나에게는 미묘한 관능적 상상력에 의한 쾌감이 온다. 노동은 노동이되 비일상적(非日常的)인 노동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남과 다른 행태(行態)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개별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뾰족구두도 마찬가지. 다리가 예뻐지고 싶은 여성은 송곳 같은 15센티미터 굽의 뾰족구두만 신고 다녀라 ! 그러면 항상 자신의 다리를 의식하게 되고, 발걸음을 조심하게 되며, 이러한 관심은 다리에 대한 사랑과 나르시시즘으로 이어져 다리를 아름다운 활기로 가득 차게한다.
장신구도 마찬가지다. 손톱이 길면 손을 항상 의식하게 되어 결국 손을 사랑하게 되고 손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의 공급은 결국 손을 아름답게 만들 듯이, 귀걸이를 하게 되면 항상 귀를 의식하게 되어 귀를 아름답게 한다. 화장도 그렇고 의상도 그렇고, 모든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는 결국 끝없는 관심과 조심성, 그리고 애착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얼굴에 화장을 많이 한 여성 역시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게 되어 스스로의 얼굴에 <사랑의 원활한 공급>을 자연스럽게 이루어낸다.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는 모든 행동을 소극적 . 수동적으로 만들어 여성의 매저키즘 심리를 상승시킨다. 등에 단추가 달린 상의를 입은 여성은 스스로 단추를 잠글 수 없다. 그래서 항상 남성의 손을 빌어야 한다. 매우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미묘한 쾌감과 스릴이 따를것이 뻔하다. 이러한 <타인에게의 맡김>은 곧 자궁 속의 태아 상태로 되돌아가 포근한 안식과 무위(無爲)를 구하고자 하는 <자궁회귀본능>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데, 태아 상태로서의 우리는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었기에 편했고, 안락했기 때문이다. 남성 역시 자궁회귀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남성은 그만 <남권(男權)이라는 미끼에 걸려, 자궁회귀본능의 미적(美的) 표현인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와 <일부러 권태롭고 심심하고 무기력해지기> 원칙에 의한 쾌감의 획득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그래서 야한 여자는 매저키즘과 자궁회귀본능을 아름다움으로 연결시키고, 그 아름다움은 남성을 즐겁게 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즐기고자 하는 나르시시즘에 보다 더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더 스트레스가 많아져서 일찍 죽는다. 오래 그리고 건강하게 살고 싶어서라도, 모든 여성들은 이제부터라도 <야한 여자>로의 변신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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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지금까지 미(美)에 대하여 공부하고 생각한 것을 총정리하여 시(詩)로 만들어 본 것을 다음에 인용해 보기로 한다. 장르 명칭을 <시>라고 했지만 시라기보다는 <개성적인 멋과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한 상징적 헌장(憲章)>쯤으로 생각하고 읽어 주기 바란다.
[거꾸로인 것은 모두 아름답다. 고개 숙여 바짓가랑이 사이로 내다본 이 세상은 신기하리만치 아름다웠다. 나무들도 더 파랗고, 여인들도 다 예쁘다. 참 이상하다. 거꾸로인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다.
짝짝이인 것은 모두 아름답다. 사팔뜨기 여인의 눈은 섹시하다. 좌우의 길이가 다르게 커트한 <언밸런스 스타일>의 머리도 섹시하다. 손톱마다 다른 색깔의 매니큐어를 바른 여인, 특히 새끼손톱이나 엄지손톱을 다른 손톱보다 유난히 길게 기른 여인의 손도 섹시하다. 귀걸이를 한쪽만 달거나, 양쪽 귀에 서로 대조적으로 다른 모양의 귀걸이를 한 여인도 관능적이다. 왼발과 오른발의 구두를 각각 다른 색으로 신은 여인도 관능적으로 보인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은 모두 다 아름답다. 비수처럼 뾰족한 손톱, 송곳 같은 굽의 하이힐, 날카롭게 뻗은 고양이의 수염, 눈 가장자리로 길게 뻗어나간 푸른색의 아이라인 등등.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것은 모두 다 아름답다. 얼기설기 끈으로만 매어져 금방 흘러 내릴 것 같아 보이는 비키니 수영복, 또는 탱크 탑 스타일의 야회복. 당신이 눈물을 글썽거려 짙디짙은 눈화장이 곧 엉망으로 얼룩져 버릴 것만 같은 위기의 순간. 임자 있는 여자와의 데이트. 팬티 없이 바지만 입고 다닐 때의 기분.
불편한 것, 불편해 보이는 것, 아니 일부러 불편하게 한 것은 모두 아름답다. 엄청나게 길게 길러 휘어진 손톱 (그녀의 손이 감미로운 권태감으로 불편해 보인다), 무지무지하게 높은 굽의 하이힐, 너무 좁고 꽉 껴 걸어다니기도 불편할 정도의 초미니 타이트스커트, 팔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무거운 팔찌, 모가지가 기형적으로 가늘고 긴 여인, 그 여인의 목에 꽉 조이게 매어져 있어 목을 마음대로 돌릴 수 없을 만큼 무겁고 폭이 넓은 개목걸이, 두 발목 사이를 체인으로 이어 놓은 발찌.]
다소 과장적인 표현이 읽는 이의 눈을 거슬리게 할지도 모르겠으나 아무튼 현대의 미(美)는 인공적인 미요, 관능적인 미라는 것을 꼭 염두에 두어 두기 바란다. 결혼식 때 신부화장을 한 여성이 대개 아름다워 보이는 것같이, 현대 여성이 추구해야 할 아름다움은 <관능적 과장>과 <왜곡된 아름다움>인 것이다. 그래서 현대여성은 누구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이다.
(마광수 수필집 <사랑받지 못하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