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8일 은혜로운 실패
실패보다 더 가슴 아픈 건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과 희생을 알아주지 않는 것,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거다. 그때는 속상하고 아프지만 자신의 더 깊은 속내를 발견하고 자신의 ‘내적 인간’을(에페 3,16) 만나는 은혜로운 시간이 된다. 자기가 알아채지 못한 속내 또는 자신의 가려진 지향과 바람을 알게 되는 거다.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의심 없이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성인들 대부분은 실패한 사람들이다. 바오로 사도는 새로운 길, 즉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는 게 하느님께 충성하는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 길에서 그는 말에서 떨어졌고 바로 거기서 예수님을 만났다. 알폰소 성인도 변호사로서 충실하게 잘 살았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소하고 방황하는 과정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사제가 됐다. 하느님이 당신 사람들을 넘어뜨리신다고 하는데, 정말 그러시는지 알 길은 없지만 결과적으로 비참한 자신과 바로 그런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니까 그렇게 말해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사랑의 매라고나 할까.
그럴 때마다 뒤돌아본다. 왜 시작했고 또 무엇을 위해서 그랬고 무엇을 바라는지 말이다. 약하기는 해도 언제나 좋고 선한 것을 지향한다. 자녀와 가족 사랑, 사업 성공, 공동체의 발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내가 바라는 대로 잘되지 않는다. 열심히 했는데도 그런다. 하느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원망도 한다. 그럴 때마다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묵시 2,4-5).” 나쁜 의도는 분명히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내 사랑이 변질되거나 잊어버리게 된 거다. 살인과 도둑질을 하느님 뜻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하느님 뜻을 이룬다고,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세운 계획을 이루거나 성공시키기 위해 작은 이들의 희생을 당연한 거로 여기게 되곤 한다.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형에 처하는 거다. 거기서 넘어진다. 작은 이들의 울부짖음이 하늘에 닿은 것이다. 주님이 바오로 사도를 부르셨던 거처럼 나를 부르시는 거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
예리코의 앞 못 보는 거지는 예수님께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41).”라고 청했다. 그는 후천적으로 앞을 볼 수 없게 된 거였다. 그전에는 잘 보였다. 그런데 그게 그를 넘어지게 한 것 같다. 젊은 시절 혈기 왕성하고 모든 면에서 자신만만하던 때, 신앙도 그렇다고 여겼던 거 같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배가 부른 걸(로마 16,18) 하느님 뜻이라고 꿰맞췄다. 그런 마음에 십자가의 주님이 보였을 리가 없다. 자기 배가 아니라 하느님 뜻이고, 성공이 아니라 사랑임을 되새긴다. 매일 그리고 하루에 몇 번씩 나에게 말해줘야 한다, 잊어버리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게.
예수님, 그는 바람대로 다시 보게 돼서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쳤지만 아마 그는 끝까지 예수님 곁에 머물렀을 겁니다, 슬퍼하면서 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형을 받으셨음을 잊지 않고, 이 십자가의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주님의 길로 인도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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