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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노래, 노래가 있는 시 ⑩ / 휴전선 토끼 노루 어이 그 아픔 알리오, 유경환 시, 박판길 곡 <유월 나비>
못가는 고향 땅 두고 할아버님 세상 떠나 흰 나비 넋으로 나네 시인 유경환 님이 시를 짓고, 작곡가 박판길 님이 곡을 붙인 <유월 나비>는 한상억 시, 최영섭 곡의 <그리운 금강산>과 한명희 시, 장일남 곡 <비목>처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그린 국내에 몇 안되는 가곡 중에 한 곡이다. 두 분은 스승과 제자 사이로 작곡가 박판길 님이 경복고 재직 시절 학생이었던 유경환 님과 만났다고 하는데, 이후 두 분은 예술의 동반자로써 한국 문학사와 음악사에 길이 남을 주옥 같은 명시와 명작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그 중 <유월 나비>는 피난민이었던 나의 가족사와도 닮아있어 언제 들어도 가슴 뭉클해지는 곡이다. 시의 배경이 되는 임진강은 가까운 개성에 사셨던 우리 부모님이 남쪽으로 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넘어야 했던 첫번 째 강이요, 젊은 날 아버님의 추억이 서려있는 강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6.25 전쟁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던 지금은 한반도의 서쪽을 동서로 가로 지르는 국경 아닌 국경선이 되어버린 임진강 강가에서, 아버님이 전사하셨다는 그곳에서 하얀 솜털에 쌓여 날아가는 민들레 꽃씨를 바라보며 고향 땅을 그리다 세상을 떠나신 할아버님의 넋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아픔을 치유해 줄 자유롭고 통일된 조국을 꿈꾼다. 시곡도 장중하지만 전쟁을 통해 한민족이 겪어야했던 극악한 슬픔과 강물에 의지해 애써 슬픔을 가누는 비장함이 담긴 선율과 바리톤의 묵직한 음색은 과연 전쟁이 남긴 상처를 보듬어주는 명곡 중에 명곡이라고 할 수 있다. ▽ 애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임진강. 임진강과 한강이 여기에서 만나 조강祖江을 통해 서해바다로 흘러든다. 아버님께서는 저 강을 헤엄쳐 남하를 하셨다. 잊혀진 전쟁,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슬픈 이야기 한국전쟁 Korean War. 6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군사적 대치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3년여에 걸친 오랜 전쟁으로 전 국토를 초토화 시키며 한국군과 유엔군, 민간인을 포함하여 300여만명의 사상자와 1000여만명의 이산가족을 남긴 채 대리인들 끼리의 어정쩡한 휴전협정으로 잠시 멈춰버린 동존상잔의 비극 6.25.
6.25를 경험한 세대치고 아픔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고향집을 지키겠노라고 고집하시는 부모님을 남겨두고 정처없는 피난길을 떠나야했던 우리 부모님은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입버릇처럼 그 날의 일들을 되뇌이시곤 하셨고, 종전 무렵에 태어난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부모님의 쓰라린 가슴이 되어 똑 같은 이야기를 듣고 또 들어드리는 일 뿐이었다.
통일이 되면 꼭 한번 찾아보라고 아버님께서 생전에 그려주신 "개성 시가도". 남대문 오른 쪽으로 "선죽동 323번지"라고 쓴 아버님의 고향집이 있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다리가 늘 자랑하시던 선죽교이다. 탯줄에 매달려 목격했던 전쟁, 그 참혹한 기억들 그러나 어쩌랴!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새벽.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포성소리를 시작으로 정처없는 피난민이 되어 전쟁터를 전전해야 했던 우리 부모님으로 부터 귀가 아프도록 들어야 했던 그놈에 전쟁. 전쟁. 전쟁, 탯줄에 매달려 목격했던 그 참혹한 전쟁의 기억들은 아픈 시가 되어 나의 첫번 째 시집 《아침몰이》에 이렇게 담겨있다. 호국의 달 6월을 맞아, 이땅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산화한 호국영령과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유명을 달리한 원혼들의 명복을 빌며...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 피난민.2 동이 틀 무렵 난산하는 산모의 외마디 소리를 들었다 삼신할미도 얼굴을 가리고 돌아서고 버림받는 아이의 저주스러운 울음소리만 어슴프레한 동녘을 찢고 있었다
날이 훤하게 밝도록 하혈은 그칠 줄 몰랐다 마을 한가운데 둥구나무가 불타고 물고기를 방생하던 맑은 시냇물엔 시뻘건 핏물이 흘러 한번도 죄를 지어보지 않은 촌로의 흰 옷자락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 해 겨울, 한강 - 피난민.5
성한 사람들은 얼음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떼놈들에게 쫓기던 발걸음을 멈추고 이쪽 강둑에서 바라보는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어
지고 온 등짐도 내던지고 병든 영감도 자식새끼마저도 솜이불에 말아 오물처럼 버려두고
악귀들만 서성대던 그 해 겨울 유난히 추웠던 강변엔 소담한 눈발만 다름없이 날리고 철길에서 - 피난민.6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따뜻한 밥 한 술 내어줄 마음씨 좋은 부잣집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쇠죽 끓인 따뜻한 아궁이 옆에서 새우잠을 청할 수도 있을 거야
남으로 가는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나그네의 지친 몸을 실어다 줄 기차를 탈 수도 있을 거야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철길 옆에 조그만 움막을 짓고 주인 없는 논밭에 곡식이랑 채소도 심어 먹으며 돌아갈 그날을 기다릴 수도 있을 거야
난민촌에서 - 피난민.7
가물거리는 등잔불 아래 열꽃을 앓던 한 아이가 죽는다 울부짖는 어미의 품에서 아비는 아직 식지 않은 주검을 빼앗아 거적에 말아들고 문 밖으로 나선다 때는 엄동 전선은 쫓기는 중 부질없이 함박눈은 내리고 아이를 가슴에 묻은 어미의 외마디 울음소리만 찢어진 천막틈 사이로 빠져나가 눈 속에 묻히고 있을 뿐 세상은 아이의 잠처럼 고요하다 누구도 울어줄 힘이 없었으므로 아무도 살아있지 않았으므로 부음訃音 - 피난민.8
천신만고 끝에 난리통을 빠져나온 노파 한 분이 가는 숨 몰아쉬며 들려주더이다 너희 할아버지는 신유년 사월 스무여드렛날 돌아가셨다 비행기에서 불이 막 쏟아지는데 제 목숨 챙기기 바빠서 아무도 불타는 집에서 너희 할아버지를 끄집어낼 엄두를 못냈다 그래 늙은이들 몇몇이 타다 만 시신을 수습해서 송악산 기슭에 묻었다 흙가루만 겨우겨우 덮었는데 솔가지를 꺽어 표는 해두었다
흘러오는 피 - 피난민.9
구호미 두어 말에 치마끈을 풀어준 그 어미의 자식은 잡종이다
이국병사의 반질반질한 성욕과 춥고 허기진 뱃가죽이 시퍼런 별빛이 뜨는 난민촌 뒷산에서 혹은 콘세트 막사에서 물물교환 되어지고 그리하여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던 느끼한 버터조각의 영양분과 달콤한 카라멜의 맛과 창백한 얼굴을 화사하게 감추어주던 코티분 지꾸 아는가 혼혈들이여 너와 내 살 속에 유전하여 오는 저 소리 없는 지배 통증없는 식민지를
비원悲願 - 피난민.13
새장에 갇혀 퍼덕이다 부러진 날개에 꼬깃꼬깃한 노친네의 향수를 본다
꼭 한번 찾아가 보거라 내친 걸음 들러가도 좋을 지척에 고향을 묻어두고 침침하여 가는 시력으로 쓰다듬는 북녘산천
머잖아 북행열차를 타리라고 낯모르는 철둑길을 따라 떠내려온 유월의 새벽길은 날마다 무너지는 꿈 속에서 포성으로 울리고
귀향하는 철새를 좇아 온밤을 솟구쳐 오르다 퍼렇게 멍들어 깨어나는 이제 버릴 것은 버린 나이 어슴프레 저승도 볼 나이
바람 좋은 날망에 나를 묻어주거라 거적처럼 걸치고 살아온 허망한 날들을 묻고 구름처럼 훌훌 떠나가리라고 이미 텃새가 되어버린 자식의 품에 안겨 울고있는 목소리
- 차승열 제1시집 《아침몰이》,동천사, '96.6.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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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글 감명깊게 봅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답글을 이제서야 보게 되었네요.
어찌 저 혼자만의 이야기일려고요
아직도 써야할 이야기가 많은데
필력이 따라주질 못해서 그냥 가슴에 담고 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