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강 정철과 강아아씨 묘
송강보는 조선가사문학의 대가였던 정철이 낚시하며 유유자적 시를 썼던 곳이었으며, 송강마을은 정철이 시묘살이를 했던 마을이다. 송강고개 방향으로 100m쯤 올라 우측의 임도 같은 묘소 길로 들어서면 송강을 사모했던 강아아씨의 묘를 만날 수 있다. 강아아씨묘 옆에는 송강의 바로 위의 형 정황의 묘와 그의 딸이며 선조의 후궁이었던 정귀인의 묘가 있다. 정철의 조카였던 정귀인은 자녀를 두지 못하고 병으로 23세에 돌아가셨다. 묘지명을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최립이 지었다고 한다. (행주대첩 초건비도 최립이 지었다.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정철의 큰형 부부와 부모님이 묻혀 계시고 그 묘소 아래 송강의 초장지가 있다.
송강 정철은 돈령부 판관을 지낸 정유침의 아들로 을사사화에 부친과 형이 연루되기 전까지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우암 송시열의 주선으로 손자 정양이 1665년 충북 진천으로 이장할 때까지 송강은 부모 묘 앞에 71여 년간 묻혀 계셨다. 진천으로 묘가 옮겨지면서 강아 아씨와는 그렇게 멀리 이별하게 되었다.
자미화, 그대 이름은 강아
강아와 정철의 사랑이 원조교제? 천만에
오마이뉴스 기사 등록 : 2000.12.05. 16:31
글 : 송복남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펴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거리에 가득 찬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리라'
송강 정철의 '자미화'라는 시다. 얼마나 미모가 뛰어나기에 거리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말라는 내용을 시에 담아 남겼을까. 어쩌면 이 시를 지은 정철의 속마음에는 이 여인에 대한 예찬과 질투가 함께 들어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너무나 고와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혹, 그랬다간 민들레 홀씨처럼 훌쩍 떠나버릴 지도 모를 그래서, 시속에 우려와 경고를 섞어 노래한 것인지도...
이토록 정철이 시에 담아 극찬을 한 주인공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 시는 정철이 1582년 9월, 전라도 관찰사로 있다 도승지에 임명되어 한양의 임지로 떠나며 지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이 시는 누군가와 헤어지며 지어진 별곡이라는 얘기다. 정철의 주특기인 별곡 말이다. 자미화는 백일홍을 가리킨다. 백일홍의 미색이야 누군들 모를까. 그렇다면 이 백일홍에 비견되어진 여인은 누굴까.
바로 이 여인의 묘가 고양시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고양시 신원동 송강마을이라는 곳에 가면 이 여인의 봉분을 볼 수 있다. 그 사연 때문인지 봉분의 오롯함이 주는 맛은 남다르다. 이름하여 강아(江娥) 아씨.
이 봉분이 처음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4년 한성대 정후수 교수에 의해서였다. 정철 문중에서는 오래 전부터 강아 아씨와 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지금은 강아 아씨의 묘비문과 묘 정비가 이루어져 제대로 된 봉분의 형태를 하고 있다.
강아와 정철의 만남은 어쩌면 우연일 수도 필연일 수도 있다. 강아가 정철을 만난 건 1581년, 16세의 꽃 같은 나이였다. 그러나 당시 정철의 나이 46세. 16세의 처녀와 46세의 중년남자의 만남은 지금으로 말하면 원조교제의 의혹을 받기에 충분하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데 하물며 나이가 무슨 장애가 될것이겠냐마는 요즘 눈으로 보면 어쨌든 수상쩍을 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사랑에는 방식이 있는 아닐까. 아마 강아와 정철의 사랑방식이 요즘 식으로 이루어졌다면 그건 분명 원조교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조교제를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기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소위 70년대 '아저씨'영화로 분류되는 '별들의 고향' 같은 영화도 10대와 중년남자의 사랑 얘기다. 그러나 그걸 원조교제로 보는 사람은 없다.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강아와 정철의 사랑얘기가 원조교제가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해두어야겠다.
강아가 정철을 만난 것은 남원에서였다. 강원도관찰사로 있다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의 신분에 비해 당시 강아의 신분은 기생이었고 이름도 자미였다. 당시 풍류객들이야 기생과 시, 여행을 빼면 별로 할 얘기가 없다. 정철 역시 당대 둘째가라면 서러울 풍류객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자미와 정철의 만남은 1년을 넘기지 못한다. 다음해인 1582년 9월 정철은 도승지로 임명되어 한양으로 떠나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안정된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둘의 교제는 그게 전부이다.
당시 관아에는 객지에서 관리를 하는 벼슬아치에게 아내를 대신할 수 있는 여인을 공급하는 기생제도가 있었다. 자미의 임무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 1년 동안 강아는 정철을 위무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그리고 정철은 자미화 어쩌구 하는 시 한 토막을 남기고 훌쩍 떠나 버렸다.
여기서 얘기가 끝났다면 우리는 강아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강아와 정철의 남원생활을 월탄 박종화는 '자고가는 저 구름아'라는 소설에서 지고순결하게 묘사하고 있다. 1년 동안 정철은 자미의 몸을 건드리지 않았다. 오로지 사랑의 마음으로 자미를 대했고, 자미 역시 지성으로 정철을 모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때부터 자미를 강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강(江)은 정철의 호 송강의 '강'자를 따온 것이고 아(娥)는 자미의 뛰어난 미모를 비유해 붙여진 것이었다.
강아와 정철의 재회는 남원에서 헤어지고 근 10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졌다. 그것도 정철의 유배지에서. 정철은 1591년 6월 명천의 유배를 시작으로 진부를 거쳐 평안도 강계로 유배지를 옮겨 다니게 된다. 정철과의 재회에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은 강아였다.
천리길을 마다않고 정철이 있는 강계로 강아가 찾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해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5월에 정철은 유배지에서 선조의 부름을 받는다. 그리고 그해 9월 정철은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배를 타고 충청도로 향한다.
이때 강아는 정철에게 같이 가게 해줄 것을 요청하지만 거절 당한다. 왜군이 우글거리는 전쟁터로 가는 길에 아녀자를 데려갈 수는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런 사실로 보아 남원에서의 만남 이후 강아가 정철을 다시 만나 보낸 기간이 약 1년여 가까이 되지 않나 싶다. 이 재회가 이승에서 만난 강아와 정철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전라도 지역에 내려가 있던 정철은 다음해 1593년 1월 다시 북쪽의 조정으로 돌아온다. 1월 8일 평양성 함락작전이 펼쳐졌고, 선조는 의주를 떠나 곡산을 거쳐 정주에 이르러 있었을 때이다. 1월이면 강아는 왜장 고니시의 품안에 있을 때이다. 정철을 지아비처럼 섬기던 여인이 왜장의 품안에서 놀아나다니?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도체찰사를 맡아 남으로 내려가는 정철에게 동행을 거절당한 강아는 정철이 있는 남으로 내려가다 왜군에게 잡히는 신세가 된다. 이때 의병장 이량을 만나게 되는데 그로부터 왜군의 군사정보를 빼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이것이 강아가 당시 왜군 주력부대의 수장인 고니시에게 몸을 맡기게 된 사연이다. 논개와 비슷한 이야기구조이지만 여기서는 정철과의 애뜻한 사랑얘기가 주가 된다.
정철은 1593년 5월 중국 명나라로 사은사로 갔다가 12월, 돌아오자마자 그 달 18일 강화에서 죽음을 맡는다. 장사는 다음해 2월 부모의 묘가 있는 고양시 신원동 송강마을에서 지내졌다. 그때 정철의 나이 58세요 강아의 나이 28세였다.
그리고 어느 해부턴가 정철의 묘에는 계절에 따라 들꽃다발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곤 하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 눈에 가끔 띄는 사람은 고운 자태의 비구니였다. 그녀는 묘소를 어루만지기도 하고 정성껏 주위의 잡풀을 뽑곤 사라졌다.
언제부터 누구의 입에서였는지는 몰라도 비구니의 법명은 소심(素心)이요, 정철을 사모하던 강아 아씨라는 말이 전해졌다. 왜장 고니시에게 더럽혀진 몸을 정철에게 사죄하기 위해 강아가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던 것이다.
속세와의 인연을 뒤로하는 출가승의 신분이라지만 그래도 차마 잊지 못할 속세의 인연 하나, 강아 아씨 소심은 끝내 정철을 잊지 못하고 정철의 근처 절에 있으면서, 계절마다 묘를 돌보는 것으로 못다 이룬 사랑을 달래고 있었다. 그 뒤 강아 아씨 소심은 결국 송강마을에 돌아와 살다 이승을 하직했고, 정철의 선영에 묻히게 되었다.
이 얘기의 대부분은 월탄 박종화의 '자고 가는 저 구름아'라는 소설에 나오는 것들이다. 문헌의 출처는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지만 문중에서는 오래 전부터 구전되어 오고 있으며 현재 강아 아씨의 묘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이는 사실로 보여진다.
또 문중에서는 제사 때 강아 아씨의 묘에 물림상으로 제를 올리고 있다. 어쨌든 강아와 정철의 이런 사랑얘기라면 훔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더군다나 요즘 같은 세태 속에서라면...
덧붙이는 글 | 송복남 기자는 시사월간지 GYpeople의 편집장으로 있으며 우리나라설화와 전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철을 사랑한 의기(義妓) 강아의 사랑과 한
글 : 제이풍수사
글 작성일 : 2022. 11. 3.
1. 강아와 정철의 만남과 이별
1) l58l년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던 정철은 남원의 광한루를 신화적 공간으로 만들면서 오작교 등의 이름을 붙였고, 자미(紫薇)라는 어린 기생의 머리를 얹어주었다. 자미는 배롱나무를 가리키며, 여름날에 백일 동안이나 빨간 꽃을 피워 열녀나 충신의 묘 앞에 주로 심는다, 꽃도 예쁘지만 매끄러운 줄기가 구불구불 뻗어 관상수로 격이 높고 나무의 꽃말은 ‘떠나간 벗을 그리워한다.’이다. 정철이 그녀를 사랑하자 남원 사람들은 정철의 호인 ‘송강’에서 이름을 따와 ‘강아(江娥)’라고 불렀다. 그런데 1582년 9월 도승지로 임명된 정철은 한양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그때까지 노류장화로 실컷 즐기고선 혼자만 쏙 빠져나가는 암체 족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벼슬아치에게 기생은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어 정철의 아래의 시를 강아에게 지어주며 아쉬움을 대신했다.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가 곱게 펴 一園春色紫薇花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纔看佳人勝玉釵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莫向長安樓上望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모두 네 모습 사랑하리라 滿街爭是戀芳華
2) 강아는 첫사랑에 대한 인연을 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애꿎은 정철이 피해를 입는다는 게 괴롭고 서글펐다. 그래서 10년 동안이나 정철을 만나지 못하다가 그가 강계로 귀양을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수천 리 길을 달려가 잠깐 만난 뒤 또 다시 헤어졌다. 한양으로 내려갔던 강아는 임진왜란 중 다시 강계를 찾았으나 그때는 귀양에서 풀려난 정철이 강계를 떠난 뒤였다. 정철이 평양을 향해 떠났다는 말을 들은 강아는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왜적에게 붙잡혔다. 궁지에 몰렸을 때 정철의 제자인 이량(李亮)을 만났고, 그의 권유로 자신의 몸을 바쳐 일본군 대장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유혹해 조선군이 평양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웠다. 고니시에게 몸을 더럽힌 강아는 더 이상 정철을 섬길 수 없자, 소심(素心)이란 여승이 되어 남은 생애를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은 정철의 한을 푸는데 바쳤다. 강아의 사랑은 오직 한 남자를 향한 정절 그것이었다. 그 후로 정권이 바뀌어 정철의 신원(伸寃)이 이루어지자 송강 마을을 찾아와 어깨조차 다독거려주지 않던 정철의 묘를 돌보다 그곳에서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정철의 가혹함을 원망하며 그녀를 정철의 묘 근처에 묻어주었다.
2. 홀로 외로운 강아의 무덤
1)고양의 송강마을
1)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송강 마을은 장의동, 지실마을에 이어 정철에게 세 번째 고향이다. 그곳에는 부모의 묘가 있어 정철이 6년간이나 시묘를 살았고, 그리고 많은 시간을 보내며 시작(詩作)에 몰두한 곳이라 곳곳에 그가 머물던 자취를 돌아보게 한다. 현재 송강 마을은 화산(華山) 자락에 20여 채의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대개는 규모가 큰 갈비음식점이다. 마을 입구에는 고장의 자랑거리가 된 ‘송강정철시비’가 우뚝 서있고, 마을 안쪽에는 산을 배경으로 정갈한 한옥의 모습인 송강문학관이 있다. 그곳에는 현재 송강 고개, 송강 저수지, 송강 낚시터 등 정철의 호를 딴 지명들이 남아있고, 송강문학관의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 소리는 시작(詩作)에 몰두했던 문인의 자취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하지만진천에 있는 정송강사와 달리 고양의 송강문학관은 운영이 초라하다. 정철 가족의 족보와 정기명에게 보낸 편지가 전시되어 있을 뿐 그 외에 문학작품, 친필, 유품 등 정철과 직접 연관이 있는 자료는 없다. 1570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정철은 신원동의 화산에 묘를 썼고, 3년이 지나 모친이 또 사망하자 쌍분으로 모신 뒤 여막을 짓고서 효의 근본을 실천했다. 그가 시묘를 살던 여막은 아직도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현재 연일 정씨 선산에는 정철의 부모 묘, 셋째 형인 정황(鄭滉)의 묘 그리고 장자인 정기명과 장손인 장운의 묘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 하지만 부친의 묘 아래에 있던 정철의 묘는 1665년 충북 진천으로 이장되어 현재는 빈터로 남아있다.
2)송강 마을은 농촌의 정취가 아직 남아 사위가 고즈넉한데, 큰 음식점들이 들어서 옛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송강문학관을 지나 좌측의 산을 오르면 정철의 부모 묘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정유침은 마흔 살이 되도록 벼슬이 없다가 큰딸이 인종의 후궁에 간택되자 음보로 돈녕부 판관이 되었다. 하지만 당쟁에 휘말리면서 유배를 당하는 등 모진 시련을 겪었다. 묘비에는 '有明朝鮮贈議政府領議政迎昌府院君行敦寧判官鄭公惟沈之墓.贈貞敬夫人竹山安氏祔左'라고 씌어 있고, 묘역에는 상석과 문인석 그리고 망주석이 격식에 맞게 배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묘는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정철을 사랑했던 강아라는 기생의 무덤이다. 송강문학관에서 우측으로 난 산길을 오르면 바로 나타나는 작은 묘가 그녀의 것으로 본래 그곳에 있던 정철의 묘와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까이 있었다.
2) 홀로 있는 강아의 묘
1)마을 가운데를 지나 산 넘어 가는 오솔길 오른쪽 능선에 강아의 묘가 있다. 묘 앞에는 널찍한 상석이 바닥에 철석 놓여있고, 오른쪽에는 ‘義妓江娥墓’라고 쓴 사각형 묘비가 언밸런스한 모습으로 서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돌보지 않았던 묘지는 주변의 초목을 베어내 전망은 트여 보이나 봉분은 주저앉아 한쪽이 무너졌고 높이는 두자도 되지 못할 만큼 작아졌다. 보기가 참 안쓰럽다. 그것도 잔디가 모두 벗겨져 나가고 붉은 흙이 드러나 있어 슬프다 못해 서러운 모습으로 비춰진다. 정철의 묘는 사후 72년이 지나 진천으로 화려하게 이장되었다. 하지만 언덕을 너머에 있던 낭군만을 바라보던 강아는 아직도 함께 가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있다. 평생 동안 외줄타기로 한 남자만을 사랑한 대가가 이거란 말인가! 한이 되어 남았을까? 매년 4월이면 이름 모를 붉은 꽃이 마치 피를 토하듯 그녀의 무덤 위에 피어난다고 한다.
2)강아 묘는 사람을 울리지 않는다. 모든 사랑을 겸손하고 진실되게 만들고 인연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만든다. 강아의 묘를 바라보면 뜻 없는 눈물이 그렁그렁 눈에 맺히고 목이 멘다. 때때로 슬픔은 보석처럼 아름답다. 눈물이 말라버린 세대. 우린 너무 오랫동안 슬픔을 잊고 살지는 않았는가 싶다. 뼛속 깊이 사무치는 슬픔을 통해 삶의 본질이 드러나면서 잃었던 인성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강아는 살아서 이루지 못한 한을 안고 정철 대신 외롭게 고향을 지키고 있는데, 우측의 임방(壬方)과 을방(乙方)에서 도래한 물이 병방(丙方)으로 빠지는 수국에서 묘에는 축간 잠룡(丑艮潛龍)이 입수했고 묘의 좌향은 간좌곤향(艮坐坤向)이다.
3. 정철과 기생 진옥의 해후(정철과 진옥이 남긴 시조를 근거로 고제희 창작글)
(때는 조선 중엽, 평안도 강계 고을의 어느 술집이다. 허름한 초가집이 마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반 쯤 열려진 사립문 가론 “酒(주)” 자가 솟대 높이 펄럭인다. 앵두나무에 그늘 진 샘물 옆엔 장독대가 아담하고, 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보름달은 우물 속에 가득하다. 밟으면 삐걱대는 소리가 날 것만 같은 툇마루, 그 아래 댓돌에는 먼 길을 온 듯한 남자의 태사화(太史靴)와 여인의 나막신 한 쌍이 나란히 놓여있다. 창호지에 비친 등잔불은 소소한 바람에 깜박거리고 술상을 마주한 남녀의 그림자 또한 정답게 어른거린다. 지붕 뒤쪽에는 늙은 감나무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고, 잔가지에 붙은 이파리와 몇 개 남은 홍시가 둥지로 날아드는 까치의 날개 짓에 놀라 흔들거린다. 텅 빈 마당은 교교한 달빛이 밝기만 한데, 부엌에선 아직도 저녁연기가 훈훈히 새어 나온다. 방안에서 나누는 남녀의 나직막한 음성은 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에 섞여 분명치가 않다.)
진옥: (술잔에 술을 따른다) 나리, 지난 일은 덮어두시고 오늘 밤은 어둠을 밝혀 인생의 덧없음이나 얘기하시죠. (호족반 위에는 술이 담긴 호리병이 놓여있고, 그 옆에는 여인이 동네를 몇 바퀴나 쫓아다니며 기필코 잡아 올린 암탉이 두 다리를 쫙 벌린 채 나자빠져 있다. 종지에는 간장이 찰랑거린다)
정철: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지그시 감는다) 언제인가 그랬지. 암행어사가 되어 자네 집을 찾았을 때가 생각나는군. 그 때만 하여도 자네의 얼굴은 참으로 고왔지. 경국지색이란 말은 아마도 자네를 두고 한 말이었을 걸세.(다시 눈을 감으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진옥: 아이, 나리도 참. 잘 해 드린 것도 없는데 천한 것을 잊지 않고 다시 찾아 오셨으니 정말로 고맙습니다. 세상에 귀한 것도 많으나 남여의 정분 또한 잘만 가꾸면 금은보화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여인이 닭살을 발라내더니 간장에 찍어 권한다)
정철: (술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언제던가? 그러니까 내가 1562년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야. 관북지방으로 암행감찰을 나가던 차에 여기를 들렸지. 아, 그 때만 해도 세상은 부러울 것이 없었고 인생도 자신 만만했는데…. (빈번한 유배 생활로 정철은 많이도 늙어 보였다)
진옥: 호호, 나리처럼 패기있고 호방한 사내는 처음이었어요. 스스로 정진사(鄭進士)라고 소개하셔서 저는 정말로 진사인 줄 알았어요. 어명을 받들고 암행감찰을 나온 어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그 날 밤, 나리는 고을 군수와 함께 총석정에 올라 진탕하게 노셨지요. 두주불사로 술을 마시고는 허리가 부러지도록 저를 껴안고 잠자리에 들었지요. 그 날로 저는 죽는 줄만 알았어요. 왠 남자가 그렇게도 힘이 솟는대요. 호호.(진옥의 웃음에 교태가 자르르 흐른다)
정철: 허허, 그랬던가. 그 때처럼 내 마음이 사로잡혀 보기도 처음일세. 몇 일을 더 묵고 싶었지만 어명을 받고 암행감찰을 나가던 신분이라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지. 헤어지면서 내가 뭐라고 했는지 생각나는가?(정철의 얼굴에 잠시 아쉬운 빛이 내비치더니 술잔을 들어 진옥에게 권한다)
진옥: (황공스러운 듯 술잔을 옆으로 비켜 술을 받는다) “십 년 후에는 감사가 되어 다시 오리라.” 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제 대답은 사실 괜히 해 본 말이었어요. 서운했다면 용서하세요. 그렇지만 암행어사라면 당연히 신분을 숨긴다고 들었어요. 헤어진 옷에 갓도 찢어지고 잠은 주막에서 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나리는 어사 신분에 맞지 않게 사또를 부추기더니 보란 듯이 광란의 밤을 보냈어요. 그러니 어떻게 나리를 어사라고 생각 들겠어요. 기껏해야 고관대작의 개망나니 아들이나 사또의 약점을 잡고 행패를 부리는 건달로만 알았지요. 지난 일이지만 죄송해요.
정철: 그래서 “감사는 귀하고 높은 벼슬입니다. 그러니 그 보다는 찰방(察訪)이 얻기 쉽고 빨리 올 수 있을 겁니다.”하며 되바라지게 쏘아 댔구먼.
진옥: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진옥이 눈을 찡긋하며 치마를 살짝 들썩인다. 여인의 살 냄새가 정철의 코로 뜨겁게 파고든다)
정철: 허허. 죽고 사는 일은 하늘의 뜻이거늘 어찌 내가 자네의 생사를 주관하겠는가. 그러고 보니, 시상이 하나 떠오르네. (술잔을 든 정철이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십 년 전의 약속이/ 감사냐 찰방이냐 였는데/
비록 내 말이 맞기는 했으나/ 모두가 귀밑털이 반백으로 세었네
진옥: 나리의 시재(詩才)는 참으로 천하의 으뜸입니다. 비록 일연탁생(부부의 인연)의 맹세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죽도록 모셔도 후회가 없을 분입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진옥은 호기심이 가득하여 술상 앞으로 바짝 다가앉는다.)
정철: 나는 아니꼬운 것을 보고는 도저히 못 참는 성질이야. 명종 임금은 나를 보고 ‘백관들 가운데 우뚝 솟은 관리요, 궁전의 호랑이다’라고까지 말했지. 조정이 동서로 갈려 박 터지게 싸우자 나는 서인(西人)의 우두머리가 됐지. 그리고 꼴같잖고 돼 먹지 않은 동인 놈들을 모조리 조정에서 쫒아 내려고 했지.
진옥: 저도 소문을 들었어요. 이발과 논쟁을 벌이던 중 그가 대들자 그의 얼굴에다 침까지 뱉었다면서요. 점잖은 선비로서 너무 경박하게 행동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1997년 여름의 일입니다. 신한국당에서 대통령에 출마할 후보를 경선으로 뽑았는데 이회창씨가 당선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도 치루기 전에 황낙주라는 의원은 그의 부인을 ‘영부인’이라 불렀어요. 늙은 나이에 체면을 잃어 세상의 비웃음을 샀어요. 역사는 한 인간의 가치를 가장 적고 추한 것에서 찾아 내 그를 오래도록 기억합니다. 유방백세 유취만년(流芳百世 遺臭萬年, 꽃다운 이름은 백 년을 가고, 더러운 이름은 만 년을 간다)이란 말은 그래서 생긴 겁니다. 따라서 아무리 큰일을 했어도 작은 것을 소흘리하면 모두가 빛을 잃고 말아요.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 김대중씨 역시 그랬어요, 대통령에 오른 뒤, 햇볕정책으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지만 아들들이 뇌물 비리로 감옥을 가자 무력한 통치자로 낙인찍힐 지경이었지요. 공인은 자기뿐만 아니라 주변도 엄정히 관리해야 해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하잖아요.
정철: (멋쩍어 머리를 긁적이자, 비듬이 술상에 눈발이 되어 떨어진다.) 허허. 그런 사실까지 알고 있었나. 임금이 눈이 어둡고 마음이 바르지 못해 동인들을 조정에 세우자, 나는 벼슬을 버리고는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갔어. 아무리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해도 화병이 생겨 죽을 지경이었어. 너무 힘들고 괴로웠지. 그래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담아 ‘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 같은 가사를 많이 지었지. 후세 사람들이 모두 가사문학의 백미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불후의 명작들이야. 하모!.
진옥: (눈을 훑기며) 세상에서는 나리를 대 시인이며 풍류가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틀렸어요. 오히려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이고 변덕도 심한 모순투성이 인물에 가까워요. 그리고 나리가 지은 가사들은 유유자적하며 자연을 벗 삼아 부른 노래라기보다는 오히려 벼슬길에 대한 한과 향수를 달래는 넋두리에 불과해요.
정철: (진옥이 자기를 기회주의적 위선자로 낙인찍어 독설을 퍼붓자 속이 타는 지 술잔을 급히 털어 넣고서 진옥에게 술잔을 넘긴다) 허허. 성미 하나는 옛날과 추호도 변함이 없구먼. 혹시 자네는 벌 띠가 아닌가?
진옥: 나리, 벌 띠가 어디 있어요? 혹시 치매에 걸리지 않았어요? 치매는 무서운 질병이어요, 만약 계단에서 엎어졌을 때, 내려가다 엎어졌는지 혹은 올라가다 엎어졌는지 생각나지 않으면 중증이어요,
정철: 됐네, 됐네. 하도 쏘기만 하니까 해 본 말일세. 그렇지만 그 가사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네. 생각해 보게. 모두가 한문으로 지은 글만 선비의 글로 여기던 시절이 아닌가. 한글로 지었으니 창작성도 돋보이고 또 백성들도 쉽게 뜻을 알아 한글의 보급에도 크게 기여를 하였네. 한글은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 타 만든 소리글자로 매우 과학적이며 위대한 문자야. 이 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보물로 인정받을 날이 올 걸세. 선각자는 앞을 내다보며 살아야 하고 어려울 때일수록 자기의 본분을 지켜야 해. 그래야만 잘 되었을 때 그 잘된 것이 더욱 빛나는 법이야. 만약 어렵다고 해 본분을 지키지 못하면 잘 된 후에도 그 빛을 잃어. 사람이 명성은 쌓기는 어려워도 허물기는 순식간이지. 그렇지 않은가?
진옥: 옳으신 말씀이여요. 자, 어서 술이나 더 드시지요. 모두가 허망한 인생이고 제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는 뒤죽박죽 세상이여요.
정철: 나에게 황금시절이 있었다면 아마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던 시절일거야. 미개한 백성들이 불쌍해 ‘관동별곡’을 지었고, 그 노래를 기생을 통해 유행시켰어. 노래가 널리 퍼지자 백성들의 마음도 많이 순화되었지. 지금 와 다시 읽어보아도 금강산의 절경과 관동팔경의 승경(勝景)을 너무나 잘 표현한 거야. 길에 얽힌 고사(故事)와 인생의 회한까지 노래했으니 당연히 가사문학의 백미일 거야.(다리를 풀고 자세를 느긋이 고쳐 잡는다)
진옥: 나리, 그렇지 않아요. 선정으로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할 목민관이라면 당연히 빠른 일정을 택하여 부임해야 했어요. 그런대도 나리는 오랜만에 찾아온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 일부러 먼 길을 택했으니, 사치스런 정치인이 유람한 것에 지나지 않아요. 시인이 아닌 정치가로 볼 때, 나리의 마음에는 진실로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충신연군(忠臣戀君)이 있었는지 의심스러워요.
정철: (자세를 바로 앉으며 수염을 쓰다듬는다) 허허. 내가 지어 퍼뜨린 훈민가도 있지 않는가. 백성들이 이해하기도 쉽고 그래서 거친 마음들도 많이 순화시켰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을 걸세.
진옥: (손을 내 저으며) 거짓말도 성심성의껏 해야 통하는 법이지요. 300년이 흐른 뒤에 신응조(申應朝)라는 사람이 강원도를 갔데요. 그런데 그 노래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더래요.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가 노래를 알고 있는 늙은 기생을 찾아가 다시 유행시켰다고 합니다. 노래가 오래도록 전해지지 못한 것을 각박한 민심 탓으로 돌리면 잘못입니다. 나리의 뜻이 아마도 민심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정철: (말이 딸리자, 정철은 화제를 노련하게 돌린다) 자, 이제 부질없는 인간 사를 버려두고 그대와 함께 술이나 마셔 만고의 시름을 잊고 싶네.(정철이 ‘장진주사’를 허무와 적막에 휩싸여 읊는다)
한 잔 멋세 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산가지 꺾어 수 놓고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줄이어 매어가나/ 유소보장에 만인이 우러보나(생략)
진옥: (감격에 겨워) 나리는 역시 호방하고 풍류를 아는 분입니다. 비록 전원을 즐기고 사람을 사귀기보다는 술을 핑계 삼아 세상에서 몸을 보전하셨지만 그래도 나리만한 어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정철: 하하. 이제야 자네가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는구먼. 이항복은 나를 가리켜, ‘반쯤 취했을 때 손뼉을 치며 얘기하는 것을 보면 신선과 같다.’라고 했지. 자, 술이나 따라보게.(진옥이 술병을 들더니 잔에 가득 따른다)
진옥: 그런데 나리,(닭살을 큼직하게 발라낸 진옥이 술을 털어 넣은 정철의 입에 황급히 넣어준다. 흐뭇한 정철의 눈빛은 어느 새 여인의 살 냄새를 집요하게 쫒는다)가을이 되니 외롭고 또 뭔가를 속절없이 기다리는 내가 싫어요. 더 괴롭기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거여요.
정철: 세상 사람들은 알건 모르건 뭔가를 찾아 모두가 목말라 하고 있지. 특히 사십 고개를 넘은 여자라면 응당 더 심하지. 자네는 그것이 뭔지를 아는가?
진옥: 글쎄요. 모르겠어요. 가르쳐 주세요.
정철: 아마도 ‘자기’일 거야. 주기만 하고 살아온 자신을 가엾게 생각하는 또 다른 자기일거야.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은 ‘자기’를 막연히 다시 찾고 싶은 거지.(술잔을 든 정철이 또 다시 한 수를 읊는다)
밤이 되니 차가운 빗물 대나무를 울리고/ 가을이 되니 풀벌레 소리 가깝게 들리네/ 가는 세월을 어찌 잡겠는가/ 머리에 쌓이는 눈 어쩔 수 없네
진옥: 삶이란 결국 뜬 구름과 같다고 했어요.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나고 죽고 가고 오는 것 역시 그와 같은 거고요.
정철: (술잔을 단숨에 털어 넣고는 닭 살점을 입에 넣으며 오물거린다) 오늘 같은 밤이면 한무제가 지은 ‘추풍사(秋風辭)’가 생각나는구먼. 자네가 한 번 읊어보게나.
진옥: (감정이 복받치던지 아니면 인생이 슬픈지 옷고름을 담겨 눈부터 훔친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절하겠어요. 다만 목소리까지 늙어 민망합니다.(소리를 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 잡는데, 눈가에는 잔주름이 그득하다)
정철: 세월을 막을 장사가 어디에 있겠는가. 사람은 나이를 먹는대 따라 그 나름대로 멋도 우러나오는 법이라네. 요즘 TV를 보니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하더군, 맞는 말이야. 세상에는 육십 청춘도 있고, 스물 노인도 있는 법이니 결국 마음이 문제지? 그러니까 어서 읊어나 보게.
진옥: 예, 그럼. (거문고를 끌어당긴 진옥이 옷깃을 바로잡더니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윽고 고요히 줄을 튕겨 나간다. 옛날과 추호도 다름없는 음색으로 오히려 세월이 내려 앉아 형용하기 어렵도록 청아한 소리가 밤공기를 가른다)
가을바람 건듯부니 흰 구름이 날고/
초목은 시들어 떨어지는데 기러기는 남쪽으로 날아가네/
난은 수려하고 국화 향기 기득하니/ 가인을 생각하여 잊을 수가 없구나
다락 달린 배를 띄워 분하를 건너니/ 강 중간에 이르니 흰 물결이 이네
소고를 울리고 뱃노래를 부르니/ 즐거움이 지극하면 슬픔도 커지도다
젊음은 언제까지 일까? 늙음을 어찌하리
정철: (정신이 황홀해져 진옥의 손을 덥석 잡는다) 여보게, 자네는 선녀일세. 어디를 뜯어보아도 티끌하나 없는 소리라네. 특히 "즐거움이 지극하면 슬픔이 더 한다(歡樂極兮哀情多)"라는 구절은 마치 우리 처지를 두고 하는 말이 분명하네.(술을 연거푸 마신다)
진옥: 고맙습니다, 나리. 그런데 이토록 술을 많이 드시면 관직을 또 삭탈 당할까 봐 두렵습니다. 이제는 그만 드십시오.
정철: 무슨 소리야. 이제야 간에 기별이 갔구먼. 자네는 이태백이 한 말도 모르는가? ‘석 잔의 술에 큰 도에 통하고, 한 말의 술에 자연과 한 몸이 된다(三盃通大道一斗合自然)’라고 했지 않는가?
진옥: 소문에 선조 임금은 나리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보고,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라 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고 했다면서요.
정철: 그것은 왕세자의 책봉 문제 때문이야. 이산해와 함께 광해군을 옹립하자고 주장했는데, 이산해가 쌩까고 신성군을 옹립하는 바람에 그런 거야. 신성군을 예뻐한 선조는 속 좁게도 나만 미워한 거지. 그 바람에 나는 벼슬을 삭탈당하고 명천·진주·강계로 유배를 다녀야 했어. 아이, 짱 나.(술에 취한 정철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흔들거린다)
진옥: 인생은 유한한데 시름은 끝이 없고요, 백년도 못 살면서 천 년을 살 걱정을 하는 게 사람이라고 했어요.
정철:(얼굴에 홍조를 띠더니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진옥을 불렀다) 진옥아. 이제 푸념은 그만하고 내가 시조 한 수를 읊을 테니 그대는 이 노래에 화답을 해라.
진옥:예, 읊어보세요.
정철: 옥이 옥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 하니 진옥일시 분명하다/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
진옥:(정철의 시조창이 끝나자, 이번에는 진옥이 얼굴에 홍조를 띄며 받았다)
철이 철이라커늘 섭철(鍱鐵)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일시 분명하다/ 나에게 골풀무 있으니 녹여볼까 하노라
정철:(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여보게, 살송곳과 골풀무는 참 탁월한 비유일세. 그렇지 않은가?
진옥: 그래요, 나리. 그러니 이제 잠자리에 드시지요.(술상을 한쪽으로 치운 진옥이 이불과 요를 편다)
잠시 후, 사각 사각하며 여인의 옷 벗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불이 꺼진다. 집 멀리서는 부엉이가 울어대어 두 사람의 해후를 세상에서 가려준다.
"부엉, 부엉!"
강아아씨묘 위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