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을 낳으리니(2)
마 1:18-25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 설 교 >
임마누엘 성탄
마 1:18-23 / 김광선 목사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에게 천사가 나타나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지상에서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800년 전에 당시 이스라엘은 둘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같은 민족이면서 남과 북으로 나누어졌듯이요.
북은 이스라엘이라 불렀고, 남은 유다라 이름했습니다.
북쪽은 이스라엘은 우리나라 사정과 비슷했습니다.
김일성, 김정일같은 악한 왕들이 계속 나와 백성들이 북한처럼 굶주리고 있는데도 전쟁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북한이 소련과 중공을 등에 없고 6.25전쟁을 일으켜 남쪽을 침략했듯이 북이스라엘은 아람이나 모압이나 암몬, 에돔등 주변 강대국을 등에 업고 남쪽을 침략해 왔습니다.
더구나 북이스라엘은 10지파가 뭉쳐 한 나라를 이루었고, 남쪽 유다는 겨우 2지파로 구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날 북이스라엘은 강대국 아람을 동원하여 남쪽 유다를 진격해 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유대왕 아하스는 기절초풍하고 말았습니다.
마치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이 소련제 탱크와 장갑차를 몰고 남쪽으로 쳐 내려오는데 남한은 겨우 총과 수류탄 밖에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남침의 소식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과 남한 백성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부산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이사야서 7장 2절에 보면 남침을 소식을 들은 아하스 왕과 백성의 마음이 마치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고 했습니다.
델리에 여름 우기철이 되면 비바람이 심합니다.
얼마나 바람이 심한지 가로수가 뽑히고 나무가지가 뿌러져 길 가에 널려집니다.
그럴 정도로 아하스왕과 유대 백성들은 혼비백산했습니다.
아하스 왕으로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승산이 없는 싸움입니다.
죽을 판입니다.
나라가 망할 판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선지자 이사야가 아하스 왕에게로 나아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아무 염려 말라. 네 눈에 그들이 소련이나 중공처럼 크게 보이느냐?
내 눈에는 힘도 없고 툭치면 부러질 타다 남은 두 부지깽이처럼 보인다.
내가 도와 줄테니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데도 아하스 왕은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당장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중무장한 강력한 연합군이 눈 앞에 쳐들어 오고 있으니까요.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연약한 기독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내 앞에 놓여 있는 근심거리 걱정거리 절망과 고통의 문제는 산더미같이 크게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작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내 자신의 능력과 방법을 더 의지하게 되고, 힘 있는 사람, 권력있는 사람. 돈 있는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평생 그렇게 살아가다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능력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실패한 그리스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불안에 떨고 있는 아하스에게 하나님은 다시 묻습니다.
"너는 안심하라는 내 말이 믿어지지 않으냐.
나 보다 더 아람의 연합군이 더 크게 보이느냐?
그렇다면 너와 네 백성을 구원해 주겠다는 내 말이 사실인 것을 보여 줄테니 너는 내게 징조를 구하라"
이사야 7장 12절에 보면 아하스 왕은 대답하기를,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고 했습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징조를 주시겠다는데 아하스는 구하지 않는 것일까요?
여기 아하스 왕의 불신앙이 다시 드러납니다.
"하나님, 징조를 구해서 뭐합니까?
구해보나 마나 지금 다 끝난 일인데요"란 말입니다.
백만 대군이 지금 눈 앞에 쳐들어 오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막아요?
절망과 원망의 하소연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불신앙적인 아하스를 다시 끌어 안습니다.
"너를 구해 준다는 내 말을 안 믿겠다는 것이지,
그럼 내가 친히 징조를 주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은 800년 후에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사건을 아하스에게 미리 말씀하십니다.
지금 쳐들어 내려오고 있는 강력한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과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은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지금 쳐내려 오고 있는 아람과 이스라엘의 연합군과 싸워 이기는 것과 처녀가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채 아이를 낳는 것과 어느쪽이 더 어렵겠느냐?
어느 쪽이 더 불가능하게 보이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느쪽이 더 불가능하게 보입니까?
전쟁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아무리 강해도 내 힘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혹 전략을 잘 세우면 이길 수도 있습니다.
잘 하면 휴전할 수도 있고요.
그러나 처녀가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채 임신해서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적 능력에 속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새 우주를 창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하스에게 하나님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갖게 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쳐들어 오고 있는 연합군으로부터 지켜 줄테니 안심하라"는 Good News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기적을 통해 구원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기쁜 소식입니다.
불가능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모순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질병과 공포가 가득한 세상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하는 그 초자연적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너를 구원해 주겠다"는 것이 성탄의 기쁜 메시지인 것입니다.
왜 행복하고 영생해야할 인간은 이토록 얼룩진 세상에서 절망하고 고통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요?
그 근본적인 원인을 성경은 "죄" 때문이라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마치 암세포가 사람 몸에 퍼져 사람을 죽이듯이 인간의 죄가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것이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삶이 바로 죄악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면 자유스럽고 행복할 것 같지만 그것은 결국 죽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오직 "처녀를 잉태케 하는 그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때로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마치 강력한 연합군을 맞이해서 절망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하스와도 같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강합니까?
거기 비해 신자는 얼마나 초라하게 보입니까?
권력을 잡고 세상을 뒤 흔들고 있는 사람들,
거대한 공룡처럼 돈의 흐름을 잡고 있는 사람들,
주식을 조작해 수 백억 원을 주무르는 능력있는 사람들,
년말에 1조원의 술을 마셔대며 마음껏 즐기는 한국남자들,
법도 없이 살아가는 조폭들 ...
이런 사회 속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존재가 도대체 뭡니까?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집니까?
마치 세상의 낙오자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힘없이 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예수 믿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고 우리에게 징조를 주시는 것입니다.
"보라 ! 처녀가 아이를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하리라.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증거를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는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같이 강대한 세상을 크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정복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마치 하나님처럼 타다남은 부지깽이 정도로 우습게 보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기 예수로 오신 성탄의 기쁜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을 이 지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로, 가장 고상한 일로, 전 생애를 다 걸고 투자하고 믿어도 결코 후회함이 없는 지상 최대의 행복과 영광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여러분!
우리 앞에 지금 놓여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아직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습니까?
아람과 이스라엘의 백만 연합군이 쳐들어 내려오는 것과 같은 큰 문제입니까?
자녀문제입니까?
직장문제입니까?
사업문제입니까?
죄와 질병과 죽음의 문제입니까?
아하스 왕처럼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리라 고 했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내려오신 날입니다.
죄와 사망과 슬픔과 고통을 몰아내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능력으로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우리에게는 징조가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징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징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처녀를 잉태케 하는 그 신적 능력으로 여러분들을 영원토록 돌아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성탄의 참된 의미
마 1:18-23 / 최낙중 목사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하시던 날 하늘의 허다한 천군과 천사가 동원되어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 가서 보라는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왜 하늘의 천군천사가 동원되고 이땅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이 오면 서로 축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바로 성탄의 의미가 크기 때문입니다.
성탄이란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그런 일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과 20절 말씀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20절 하반절에 보면,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성령이란 거룩한 영, 주의 영, 하나님의 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임하니 그 성령의 임함과 함께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서 이 땅에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몸에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기 전, 성부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데 삼위일체라는 말이 성경에 직접 나타난 곳은 없지만 하나님이 복수 명사로 나타난 곳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6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우리라는 복수 명사를 쓴 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함께 우리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이것이 큰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아담과 하와를 만드실 때는 어린아이로 만들지 않고 노인으로 만들지 않고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청년, 장년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담과 하와에게서 자녀가 태어날 때는 어린아이로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자녀가 태어났는데 모두가 부정모혈을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라는 밭에 아버지의 씨가 떨어져서 자녀가 생산되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제 성씨가 최씨인데 최씨를 내가 골라잡아 최씨가 된 것이 아니고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김씨 할까 박씨 할까 이씨가 좋을까 정씨가 좋을까, 아니야 뭐니 뭐니해도 최씨가 제일이야. 난 최씨할래.
최씨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김씨밭에 최씨 떨어져서 내가 태어나 최씨가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씨,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영이 마리아의 몸에 임하므로 그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이 잉태되어서 왔기 때문에 그분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씨를 받았으면 사람의 아들인데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태어났기에 그를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대 성인 중 하나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석가모니나 공자나 마호메트나 이런 사람들처럼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아담의 혈통으로 태어나서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입니다.
죄인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마치 망망한 바다에 배가 파선되어서 사람들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그 중에 어떤 헤엄 잘치는 사람이 자기와 남을 함께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도 남도 아무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긴급 전화를 받아 헬리콥터가 와서 밧줄을 내려 준다든지 해서 어떤 다른 사람이 그를 건져주어야 구원받는 것이지 자기 스스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아담 이후에 모든 사람이 죄로 타락했기 때문에 죄인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고 죄 없는 의인만이 죄인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들로 이 땅에 오셔야 그 분만이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천하인간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그래서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나이다. 우리 예수님은 요 17장에서 아버지와 예수님을 동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빌 2:6절 말씀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했습니다. 히 1:2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로 창조주였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왔기 때문에 이 일은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두번째 성탄의 의미는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누구의 몸을 빌어 이 땅에 탄생하셨습니까?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거처 삼고 그의 태를 빌어 이 땅에 탄생했습니다. 마리아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눅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사벳이라고 하는 여인이 나이 많은 상태에서 예수님의 길잡이로 나타날 세례 요한을 잉태한지 육개월이 되는 어느 날 천사 가브리엘이 나사렛 동네에서 살고있는 마리아에게 나타납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는도다. 처녀가 놀라서 이게 무슨 인사인고 할 때, 천사가 다시 말합니다.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의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게 할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처녀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오니 어찌 이런 임신이 된다는 말입니까?
사내를 알지 못한다는 말은 남녀지간에 성관계를 한 일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동정녀 마리아는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과 약혼관계에 있었지만 아직 동거하지 않고 정절을 지키며 지내고 있는데 그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는 천사의 말을 들을 때 그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은 자기의 생각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어떤 일을 하시겠다고 할 때는 순종하게 되어있습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비록 내가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해서 동네 사람들로부터 부정한 사람이라고 비방을 받을지라도 나의 약혼자 요셉에게 버림을 받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는 일을 나를 통해서 이루신다면 저는 순종하겠습니다. 믿음없이는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다릅니다. 의로운 사람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깨끗한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두번째로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시 92:12절에 보면,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게 되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발육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약 5:16절에는 하나님은 의인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의로운 고넬료 이야기입니다. 그는 로마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매일 기도하는데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 하는 말이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기억하심 바 되었으니 너는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는 사람을 청하여 말을 들어라 하니 바로 순종합니다. 베드로가 오기 전에 자기 가족과 일가 친척, 친구들을 다 불러모았습니다. 베드로가 올 때에 엎드려 절하자, 베드로가 말합니다. 나도 사람이오. 일어나시오. 왠일로 나를 불렀습니까? 여차여차해서 불렀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할 때 그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이 고넬료에게 임하고 일가친척, 친구, 전 가족에게 임하매 유태인으로서 예수 믿는 베드로와 함께 그도 로마사람이지만 주안의 한 형제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했으니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을 복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의롭게 살지를 못합니다. 세상 물결을 따라 살아갑니다. 창세기 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땅위에 사람들이 번성할 때부터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경제가 성장하고 살기가 편안해지면서부터 그들의 관심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파는데 정신을 다 쏟았습니다. 얼른 생각하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게 무슨 죄인가 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죄가 아니라, 목적을 거기에 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왜 사는가? 먹기 위해 살고, 왜 사는가? 돈 벌기 위해서 살고, 왜 사는가?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 산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하마르티아, 즉 목표에서 빗나가버린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라고 우리 인생을 지었건만 하나님 섬기지 않고 경제성장하고 살기 편해지면서 죄악의 길로 치달았습니다.
여러분, 동성연애 사건이 창세기 6장에서부터 등장합니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음행의 죄를 범하는 일, 온통 세상 사람들이 죄악으로 타락해 가는데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딸들을 보고, 자기 좋아하는 사람마다 아내를 삼는지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까지도 타락했습니다. 음행의 죄악이 만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들을 홍수로 심판할 것을 계획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저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데 의로운 노아에게 하나님이 명령을 내립니다. 앞으로 1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이 땅을 홍수로 심판할 터이니 너는 너희 가족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잣나무로 배를 지어라. 하나님 명령에 순종합니다. 배가 완성되었습니다. 가족이 그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때에 40주야,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지고 땅에서 창수가 솟아나면서 천지는 개벽하고 모든 사람이 홍수 심판으로 죽게 되었을 때, 의로운 노아와 그 가족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섞어 살고 있지만 불의한 자와 의로운 자를 똑같이 대하지 않습니다.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분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경외하지 않는 자를 분별할 날을 반드시 하나님이 정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는가?
의로운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통해서 그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마리아가 의로운 사람이었고,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요셉이었다면 어떤 태도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약혼녀가 임신을 했다. 누구의 아이일까? 궁금합니다. 부정한 여자라면 더 이상 상관하지 말아야지. 고민하고 있을 때 천사가 요셉이 잠자고 있을 때 꿈에 나타나 하는 말이, 요셉아, 네 아내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아라. 그에게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니, 아들을 낳을 것이라.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일러줍니다. 요셉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마 1:19절에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불의한 사람 같으면 남의 죄를 들추어 공개적으로 크게 떠들고 다니면서 그 여자 나쁜 여자, 나하고 약혼관계에 있었는데 부정한 여자, 하고 떠들어댔을 텐데,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만히 끊고자 했다. 내 가슴이 쓰리고 아프지만 없는 것으로 하겠다 하고 정리하려 했습니다.
여러분, 누가 부정한 일이나 잘못한 일이 드러났을 때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나쁜 사람이라고 정죄하고 다니는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사랑은 허물을 가려주고 덮어주고 감싸주고, 그리고 자기가 대신 짐을 지는, 내가 비록 수치를 당하고 고난을 당해도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지 않겠다고 하는 이게 바로 의로운 요셉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남을 이해하려 하고, 용서하려 하고, 감싸려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 큰 일을 이루시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의로운 마리아와 의로운 요셉을 통해서 이땅에 탄생하셨습니다. 여기 보면 24-25절에서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젊은 요셉, 그의 아내 마리아가 자기 아들을 갖기 전에 누군가 다른 분의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을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해서는 그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는 절제를 보이면서 의로움을 끝까지 지킨 요셉이었습니다.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로운 사람,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할 수 있어야 되고, 자기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수치와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은혜 받았다 자랑하는 사람은 많아도 말없이 십자가 지는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그러나 수치와 고난은 십자가의 내용인데 이런 십자가를 달게 지려는 요셉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누군가의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 하나님이 원하시니 수치와 고난을 각오한 그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데 예수님이 탄생하고 난 이후에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육남매 이상의 자녀가 생산됩니다. 예수님의 친동생 사형제가 있었고, 그 누이들이라고 복수를 쓴 걸 보면 두 명 이상의 누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친동생 가운데 야고보는 신약성경의 야고보서를 쓰는 큰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이 땅에 탄생케 했던 마리아는 훗날 모든 사람들이 저를 복된 여인으로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받고 버림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큰 회사에서 유능한 일꾼을 들어쓰고 상당한 보수를 사례하는데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고 외면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쓰임받는 자가 복있는 사람인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평생 살면서 의로운 요셉처럼 의로운 마리아처럼 바르게 사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복 주실줄로 믿습니다.
세번째, 성탄의 참된 의미는 선지자로 하신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22-23절 말씀에 보면,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의 탄생은 갑작스럽게 되어진 일이 아니고 예수님의 탄생 600년전 이사야라는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사 7:14절 말씀에 보면, 보라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 예언했는데 그 처녀가 바로 마리아입니다.
미가서 5:2절에 그는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 탄생할 것이다 하고 예언했는데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어두움을 밝히는 빛으로 나타날 것이라. 천하만민의 구주로 오셨습니다. 암 3:7절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을 일컬어 모세의 글과 선지자의 글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모세의 글은 율법이요 선지자는 모두 예언자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모두 예언의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3절 말씀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된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하였습니다.
복 받을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이고, 말씀을 듣는 사람이고, 들은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이니 이런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거룩하게 지키라. 여호와의 평강이 너희를 주장할 것이라. 사 58:14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라.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줄 것이라. 말 3:10절의 말씀입니다.
주안에서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엡 6:1절 이하의 약속입니다.
믿음으로 구하라. 받으리라. 너희가 지금까지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내 이름으로 구하면 시행하리니 그리고 너희가 받을 것이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24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지 아니하고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주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좋으신 너희 천부께서 밤낮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느냐? 기도하면 응답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듣기만 하지말고 들은 말씀을 실천에 옮겨보십시오. 주의 성령이 함께 할 것이고 복이 임할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네가 먼저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선지자고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상대적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면 자기도 함께 아프게 되어 있고,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면 자기도 함께 즐겁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돌보는 너그러운 마음과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갖고 살아야 됩니다.
그냥 자기만 알고 그렇게 살면 평안이 없고 결국은 왕따가 되는 것입니다. 버림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인생을 살아야 나를 돕는 사람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뉴욕의 어떤 공동묘지 관리인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수년동안 매주마다 한 이름을 밝히지 않은 부인으로부터 5달러의 돈이 오고, 편지의 내용은 우리 아들의 무덤에 신선한 꽃다발을 갖다 놓아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이 관리인이 몇년동안 그 일을 계속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공동묘지에 한 부인이 병약한 몸으로 차안에 앉아 있다가 기사의 부축을 받고 겨우 바깥으로 나오는데 몸이 아주 연약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슴에는 꽃다발이 크게 안겨 있었습니다. 그 관리인을 찾아와서 하는 말이 제가 몇해동안 계속해서 편지와 함께 우편환으로 5달러씩을 보낸 아담스부인입니다. 제가 오늘 직접 오게 된 것은 나의 담당 의사가 하는 말이 몇 주를 못 넘길 것 같다고 해서 세상 떠나기 전에 내 사랑하는 아들의 무덤에 내가 손수 꽃다발을 갖다 놓고 싶어서 왔다고 얘기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관리인이, 저는 매주 부인이 보내준 돈을 가지고 꽃을 사서 무덤 앞에 갖다 놓을 때마다 부인에 대해서 유감스럽게 생각해왔습니다. 부인이 깜짝 놀라며 뭐가 유감이었습니까? 하고 묻자, 관리인이 말합니다. 꽃은 불과 몇 시간도 안돼서 다 시들어버리고 다음날이면 썩어 냄새가 나는데 이 공동묘지에 누구 한 사람도 그 꽃을 가까이 하고 향기 맡는 사람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냄새를 맡습니까? 좋아합니까? 그것은 부인의 생각일 뿐이고 죽은 사람은 꽃 냄새 못 맡습니다. 저는 교회 나가는 신자인데 전 가끔씩 공립병원에 입원한 사람들 가운데 소외된 사람들에게 꽃을 사다 준 일이 있습니다. 제가 꽃을 그들에게 갖다주면 환하게 웃고, 냄새맡고, 기뻐하는 모습을 봅니다. 부인께서도 매주마다 이제는 공동묘지에 꽃을 가져오지 말고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꽃을 한번 갖다 줘보십시오.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삼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 부인이 직접 운전을 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공동묘지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당신이 한 말이 맞았습니다. 제가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꽃을 갖다 주었더니 그들이 너무 너무 좋아하더군요. 좋아하는 그들의 얼굴표정을 바라볼 때 내 마음도 기뻤습니다. 내 마음이 편안해 졌습니다. 그러면서 신경성 질환도 떠나고 몸이 이렇게 건강하게 회복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남을 기쁘게 했더니 자기 마음이 기뻐졌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웃음을 주었더니 자기도 웃음이 나오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병이 떠나고 몇 주일을 넘길 수 없다던 의사의 말은 거짓말이 되어버리고 성경말씀대로 살았더니 복이 임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남을 좀 대접할 줄 아십시오. 누가 여러분을 무시했습니까? 당신이 누군가를 무시한 결과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귀하게 여깁니까?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귀하게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주라. 좀 주라.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고, 도와주고, 구제도 좀 해주고, 봉사해 주고, 수고도 좀 해주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도와줄텐데. 내가 너를 도와줄 때는 누르고 되어 흔들어서 안겨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왜 호화스러운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고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셨겠습니까? 호화로운 호텔에서 중상모략하고 음란한 죄짓는 곳에 주님은 오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비록 차가운 마굿간이지만 그곳엔 권모술수가 없고 거기에 순수함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된다고 하는 순수한 헌신의 마음이 있는 그곳에 주님은 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어디에 임합니까? 하나님의 복이 누구에게 임합니까? 순수한 마음, 깨끗한 마음, 겸손한 마음, 그리고 성경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들, 그곳에 주의 평강이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네번째, 성탄의 참된 의미는 임마누엘에 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받아 누려야할 최고의 복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신 그 예수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영원한 생명, 평강의 왕, 전능자, 그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복입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멀리 계시다, 예수님이 저 하나님 우편에만 계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머리로만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2000년전 베들레헴에 오셨고,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으며, 사십일 동안 계시다가 승천하셨다, 그것만 압니다. 예수님을 머리속에 담지 말고 마음속에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니고, 경험적으로 알아야 되는 것이며, 믿는다는 말은 단순히 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교제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내 마음속에 성전삼고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에 계신 하나님, 임마누엘입니다.
나의 마음에 성전 삼고 주님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한 수치와 고난과 죽음이 객관적 사건이 아니고 나의 주관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질 때, 구원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순간에 나의 죄는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그의 저주받음이 나의 복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으며, 그의 희생으로, 그가 흘린 피로 나의 죄는 이미 사해졌으니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인데 그 구원이 언제 이루어지는가? 머리속에 있는 예수님이 아니고 내 마음에 구원의 주님으로, 왕으로 모실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주님은 내 안에 있을 때 정죄함이 없고 바로 그 곳에 주님의 다스림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입니다. 우리집 거실에 작은 수족관이 하나 있는데, 수족관안에는 수초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 수초들이 전부 햇빛이 있는 창을 향해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면서 식물도 햇빛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햇빛이 있는 곳에 얼굴을 내미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은 해라는 말씀이 시 84:11절에 나옵니다. 말라기 4:2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는 치료하는 광선이라고 나와있고, 요 1:9절에는 예수님이 참된 생명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빛이 있는 곳에 내 마음과 정성을 쏟고 나아가면 그 빛이 우리에게 비쳐지고 그 빛은 생명의 빛이요 치료의 광선이요, 우리에게 무한한 에너지가 되고, 밝음이 되는 능력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해 같은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데 내 마음이 어두워질 수 있습니까? 해가 없으니까 어두운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이 없으니까 어둡지, 빛을 발하는 해가 내 속에 있는데 내가 어둡다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어둡다는 것은 내 마음에 예수님이 없고, 문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빛되신 예수님을 모셔들이면 그 마음이 밝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빛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그 빛되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십시오. 영접하십시오. 모시고 사십시오.
예수님은 마굿간에 오셨습니다. 우리 마음이 마굿간처럼, 겸손하고 순진하고 정직하고, 화려한 모습은 없어도 하나님의 뜻이면 순종하고 복종하겠다는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은 그 곳에 탄생한 것처럼 그런 자의 마음속에 임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성탄의 참된 의미가 무엇입니까?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을 들어서 일하십니다. 말 잘하는 사람 통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똑똑한 사람 통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 수치를 다하고 고난이 와도 그 길가겠다. 요셉과 같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의로운 사람되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의 의미, 반드시 예언은 이루어진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성령충만 주시고, 말씀대로 살면 들어와도 나가도 복 받게 하겠다는 그 약속은 영원히 유예합니다. 그리고 성탄의 의미, 하나님을 멀리 계신 분으로 믿지 말고, 너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믿으라.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겁날 것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 셋방에서 살아도 천국입니다. 주님이 없으면 호화판에 살아도 지옥생활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 분과 더불어 사십시오. 마음의 천국을 이루십시오. 그래야 영원한 천국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 1:18-23 / 조재진 목사
요즘에는 불신자들이 성탄절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12월이 되기도 전부터 백화점에서 성탄절이 시작됩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화려하게 장식되고 크리스마스 용품이 진열됩니다. 거리에는 캐롤송이 울려 퍼집니다. 개그맨들도 캐롤송을 부르고 음반을 내지요. 마치 온 세상이 성탄절 분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많은 청소년들은 성탄절을 "X-mas" 소위 "끝내주는 날"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고 3학생들이 시험의 압박에서 해방되고, 방학이 시작되고, 그리고 회사원들은 망년회 분위기를 한껏 즐길 수 있는 시즌이기 때문에 성탄절이 그들에겐 그렇게 끝내주는 날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성탄절 어디에도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에서 예수님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 없는 성탄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빛과 소금이라는 잡지에 난 통계에 의하면 64.5%의 어린이들이 성탄절을 산타클로스의 생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또 성탄절에 연상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카드, 트리, 루돌프 사슴, 선물, 캐롤송 등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성탄절이 예수 탄생과 연관된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정말 성탄절이 너무 심각하게 왜곡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산타클로스와 성탄절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산타클로스가 마치 성탄절의 주인공인 것처럼 등장하는 것은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업성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인간을 파멸로 이끌어 가는 사탄의 악한 전략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성탄절에 산타클로스를 없애고 예수님을 되찾아야 합니다. 왜곡된 성탄절을 바로 잡고 진정한 성탄의 의미를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성탄절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말합니까? 왜 이 땅에 성탄의 사건이 필요한 것입니까? 첫 번째 성탄절에 일어난 사건을 성경에 따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 성령으로 잉태될 것에 말합니다. 너무 놀란 마리아는 이 엄청난 일을 의논하기 위해 자기 사촌인 엘리사벳을 찾게 되지요. 사촌 엘리사벳도 도무지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나이에 임신이 되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이 낳을 증거 중의 하나가 바로 엘리사벳이 임신한 것"이라고 한 말을 확인하러 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요셉도 이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침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 마리아가 결혼하기도 전에 임신했다는 이 일이 그를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그는 몹시 고민스러워 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 천사가 나타나서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다." 어떻게 그 아이가 잉태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태어날 아기의 이름도 아예 미리 가르쳐줍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요셉은 그 때에서야 비로소 마리아를 집에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성탄의 사건을 마리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천사를 만나고 고민하며 엘리사벳을 만납니다. 이에 비해 마태복음은 요셉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태어날 아기가 누구인지 그 이름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되는지를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요셉에게 들려준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는 성탄의 본래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전해준 메시지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마리아에게 수태된 아이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는 것, 둘째는 두려워 말고 마리아를 데려오라는 것, 그리고 셋째는 마리아가 낳을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어준 이름 "예수"
사실 예수라는 이름은 특별한 이름은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 많이 있었던 흔한 이름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나라로 말하자면 "철수" "영희" 등과 같은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 라는 이름이 바로 히브리말로는 "여호수아"이고 헬라어로는 "예수"입니다. 스룹 바벨과 함께 제 2의 성전을 지은 제사장의 이름도 여호수아입니다. 그는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짓고 성전의 제사를 회복한 사람입니다. 당시에 수많은 "여호수아", 수많은 "예수"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런 "예수"라는 이름이 많은 이유는 그들의 메시야 신앙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경의 약속대로 이 땅에 메시야가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낳은 아들 중에 혹시 메시야가 오지 않을까? 라는 소망을 담아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예수"라고 많이 지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되시는 예수님은 당시 보통 사람의 규례대로 부모가 자기들의 소망을 담아 지은 그런 이름이 아닙니다. 부모들이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보통 자녀들은 낳은 후에 이름을 짓지만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은 아예 태어나기도 전에 그 이름을 미리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기의 이름을 짓는 권한을 행사하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의미 깊은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그리고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올 것임에 대해 미리 예언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사야7:14에 의하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라고 동정녀를 통해 오실 것을 미리 예언했습니다. 또 이사야 9:6에서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사 9:6) 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유일하게 미리 예언하시고 그 예언의 성취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또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이름을 지어주시고 그 이름의 의미까지 풀어서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 고 설명까지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놀라운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지으신 능력있는 구원자의 이름입니다.
성 베르날로는 예수의 이름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혀에 꿀 송이처럼 달고, 예수 그 이름은 귀에 아름다운 멜로디로 울리고, 예수 그 이름은 마음에는 기쁨이 솟아나게 하는 이름이다." 그런가하면 우리와 이 땅에서 함께 한평생을 뇌성마비로 살아온 시인 송명희 씨는 예수의 이름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 내게 있는 귀한 비밀이라..." 소아마비로, 뇌성마비로 평생을 고통 당하면서도 예수가 그 속에 비밀이 되었단 말입니다. 예수가 그의 인생에 감동이 되었단 말입니다. 예수가 그 인생에 임마누엘로 능력이 되었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직접 그 이름을 지으시고 태어나기도 전에 그 이름을 지어주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탄생의 초자연성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을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직접 그 지으신 이유는 바로 예수 탄생의 초자연성을 알려주기 위합니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 "모노게네(monogene)"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출생방식을 인간적인 생리 방식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독특한 방법, 곧 하나님의 초자연성에 의해서 출생하게 하신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방법에 대해 성경은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요, 다른 하나는 동정녀의 몸을 빌어 태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잉태에는 보통 사람들의 잉태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는 과정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 성령의 권능,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어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하나님의 천사가 요셉보다 먼저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이런 놀라운 메시지를 들려주었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2-33) 놀란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라고 반문합니다. 이 때 천사가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1:35)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라고 할 때 이 "덮다" 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드러내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된 경우가 여러 번 있습니다. 창세기1:2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실 때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운행하다" 라는 단어가 바로 "덮다"라는 의미를 가진 "메라헤퍼트"(희랍어로는"에피스키아조") 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성령이 공허(수면)를 덮으셨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우주가 창조되었습니다. 또 이 단어는 어미 새가 알을 까기 위해서, 혹은 돌보기 위해서 "계속해서 알을 품고 있는 상태" 나 또 새끼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새끼 위를 계속해서 너풀거리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신32:11).
보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이신 성령께서 공허(수면) 중에 운행(덮어줌)함으로 우주의 맥박이 뛰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덮으심"을 통해 일어난 것입니다.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은 한 시골 처녀 마리아를 덮어주심(품어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잉태된 것입니다. 또 이 단어는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구름이 성막을 덮었을 경우에도 사용되었습니다.(출40:34-35). 또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보호를 나타낼 때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시91:4) 라고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덮으심의 결과 이스라엘은 광야의 위험과 적들의 위험에서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잉태는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이 마리아를 덮으신 결과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개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덮으실 때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덮는 역사가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한국 땅에 하나님의 능력이 덮으심으로 통일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병든 자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덮이면 질병이 떠나갈 줄 믿습니다. 실패한 자들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성령이 품으시는 역사를 체험하기 바랍니다.
예수 탄생의 중요한 목적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하나님이 직접 예수라고 지은 두 번째 이유는 예수 탄생의 초자연적인 목적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 성탄의 목적성을 확실하게 하는 이름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성경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합니다. 죄에서 구원받은 것은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입니다. 롬3:10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기"(롬3:23)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르는 사람들은 인정하든 하지 않든 죄의 종입니다. 엡2:1에 보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라고 말합니다. 죄의 종이 된 것 만이 아니라 죄로 그 영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죄는 인간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6;23) 그리고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라고 말합니다. 죄는 숨겨두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죄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읭 심판대에 서야하고 지옥으로 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죄에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다보면 흔히 사람들은 "나는 죄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죄가 너무 많아서 교회에 못나간다"고 말합니다. 죄에 대한 기준이 제 각각입니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이 쉽게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면서 잘 짓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짓말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거짓말 같은 정도는 별로 죄라고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얀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시커먼 거짓말 등으로 거짓말을 구분합니다. 선한 거짓말도 있는 것처럼 꾸밉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거짓말을 잘하는 것을 지혜롭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이런 것은 동양 문화의 특색입니다. 동양문화는 이중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내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의리를 지키고 정직해야 됩니다. 그러나 내 가족이나 내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거짓말 잘 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거짓말이 죄라는 의식이 별로 없습니다. 수없이 거짓말을 하면서도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짓 증거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거짓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기준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는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죄를 씻어줄 곳이 있습니까?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멕베드"를 보면 던컨 왕을 죽인 멕베드가 자기 손에 묻은 피의 흔적을 보면서 외쳐대는 소리가 있습니다. "오 아라비아의 향수로도 내 죄를 씻을 수 없다는 말인가! 나의 죄는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구나." 한번 죄를 지어버리면 다시 돌이켜지지 않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깊이 고민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는 것 외에는 죄를 사하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마 다른 방법이 있었으면 우리 하나님은 필시 그 방법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두 팔을 스스로 묶으시고 사랑하는 아들이 그 모진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외쳐대는 그 고통의 소리를 다 들으셔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 때문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우리에게 너무나 감격스러운 날입니다. 예수님 이 땅에 오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드러난 날입니다. 얼마나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지, 우리들을 죄가운데, 마귀의 손에 그냥 둘 수 없어서 그의 외 아들을 보낸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람들은 좋은 것을 좋아합니다. 귀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같이 있고 싶어합니다. 나쁜 것을 싫어하고 추잡한 것은 멀리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못나도 내 자식이면 그 자식의 실패와 아픔을 그냥 가슴에 품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낸 것도 바로 이 사랑 때문입니다. 이 사랑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6-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믿습니까? 인생을 가장 불행케 하는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주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예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 탄생은 우리의 구원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본문 23에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아예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 말고 또 다른 이름을 주셨습니다. 보십시오 성경은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라고 말합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다른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 계시는 분으로 인식되어졌습니다. 하나님은 휘장을 너머에 계신 분이십니다. 일년에 한 차례씩 대 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뿌리며 휘장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러 가야 했습니다. 늘 하나님은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를 연 성탄절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완전히 깨드린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분으로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구체적인 하나님으로, 알 수 없는 분이 아니라 그 분의 사랑을 직접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총의 사건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함께 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 이 말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1:1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할렐루야! 눈으로 보이게, 손으로 만질 수 있게 오신 하나님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유고슬라비아에 한 십대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성경말씀을 들을 때마다 가슴에 불타는 갈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로 자원했습니다. 카톨릭신자였기 때문에 먼저 수녀가 되었지요. 그리고 인도 캘커타에 파송되었습니다. 그녀는 인도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길거리에서 오랜 병으로 사람들에게 버려진 채 누워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몸의 한 쪽은 썩어서 쥐들이 파먹고 있었습니다. 너무 참담한 모습에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마음속에 많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힘없는 여자인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냥 지나가려고 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네가 도와야 한다" "하나님 저는 못해요" "내가 도와도 못하겠느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가능하겠지요" 그녀는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여인을 들쳐업고는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돌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돌보아 주기 시작한 환자가 두 사람, 세 사람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그 도시의 행정관리를 찾아가서 숙소 곁에 있는 "비욘드 힌두 템플" 하나를 빌려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곳을 병원으로 만들어 수많은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어서 자원봉사자들 필요했고, 많은 예산도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약속처럼 늘 그와 함께 했습니다. 몇 년전 이 분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남기고 간 테레사 수녀이야깁니다. 그가 죽기전 영국의 BBS 방송에서 그녀가 일했던 캘커타의 병원을 취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기자가 그녀의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데레사 수녀님 힘들지 않으십니까?" 그랬더니 그 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힘들지요. 그러나 즐겁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테레사 수녀의 세 마디의 말이 우리 신앙생활에 중요한 핵심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믿음의 지키고 산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즐겁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의 시기를 지나는 것은 분명히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즐거울 수 있습니다. 정말 주님이 함께 한다는 확신만 가질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닥쳐와도 괜찮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은 임마누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 기자들을 한결같이 임마누엘의 사건으로 복음서를 마무리합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은 핍박의 시대를 살아가는 주의 제자들에게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라는 임마누엘의 약속으로 마태복음을 닫습니다. 마가복음은 "제자들의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라는 주님의 명령으로 끝을 맺습니다. 임마누엘은 세상을 이기는 성도의 능력입니다.
이제 2023년 성탄절을 보내면서 성탄의 깊은 신앙적인 의미를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성탄절은 하나님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예수, 그 분은 바로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 그 이름의 존귀성, 그 이름의 탁월성을 자랑하는 은총의 성탄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마 1:18-23 / 이수영 목사
오늘은 성탄주일입니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성탄절이 찾아왔습니다. 성탄절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합니다. 우리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성탄절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을 왜 좋아하며 또 왜 좋아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일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축하하는 절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의 의미는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라는 사건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며 즐겨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기사로서 너무나 우리에게 친숙한 오늘 본문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 대답을 우선 2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죄를 돌이켜 생각하지 않는 성탄절은 참 성탄절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성탄목에 왜 사과가 걸려 있습니까? 에덴동산에서의 인간의 첫 번째 죄를 말하는 선악과를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죄를 상징하는 사과 없이 장식된 성탄목은 아무리 많은 장식으로 화려하게 빛나도 성탄목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신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본문 22-23절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임마누엘" 즉 그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란 하나님을 떠나 그와 함께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구원이란 곧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임마누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를 통해, 그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의 에덴동산에서의 첫 범죄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에덴동산의 각종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 먹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창2:16).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금하시며 그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탄이 이렇게 속삭이며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 하와가 대답했습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3:2-3). 그러자 사탄은 말했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4-5). 그러자 하와의 눈에 그 나무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도 보이기 시작했으며 결국 그 유혹에 넘어가 그의 남편 아담과 함께 하나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께 범죄하고 말았습니다(창3:6). 사탄의 말대로 그들의 눈이 밝아지긴 했으나 그들이 알게 된 것은 자기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과 두려움이었습니다(창3:7).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고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창3:7-8).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창3:9). 그러자 아담이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는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하며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창3:11) 그러자 아담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하와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그러자 하와가 대답했습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죄가 무엇이며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인간의 첫 죄는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신 열매를 따먹은 죄입니다. 즉 불순종의 죄입니다. 첫 인간의 불순종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려는 교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보다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따르려는 뜻이 강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할 때에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던 선악과열매가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따르려는 뜻이 강해지는 순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도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까? 불신앙 때문입니다. 그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흔들리고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사탄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불신앙과 교만과 불순종이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죄의 본질입니다. 이 인간의 본질적 죄를 돌아보는 것이 성탄절에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본질적 죄에는 뒤따르는 것이 있습니다. 죄의 결과이기도 하고 파생적 죄이기도 합니다. 금단의 열매를 먹은 후 아담과 하와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이들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된 것입니다(창3:8).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습니다(창3:23). 하나님과 함께함이 없어진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의 잘못의 원인을 남에게서 찾으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창3:11) 하고 아담에게 물으셨을 때 아담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하와 또한 하나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물으시자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애초에 말씀하신 대로 그들이 죽게 된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는 에덴동산에서 그를 쫓아내시고 그들이 거기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창3:22-24). 이것이 죄의 결과이며 파생적 죄의 현상입니다. 성탄절은 우리에게 이러한 우리의 죄적 상태를 돌아보게 하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피하며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를 깨닫지도 인정하지도 않으며 모든 죄의 책임을 남과 하나님께 돌리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더더욱 생명으로부터 끊어진 죽음의 상태에 처해있는 것은 아닌가? 성탄목에 달린 사과를 바라보며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죄만 말하고 그 죄로부터의 구원을 말하지 않으면 성탄의 의미가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저 죄만 상기시키는 성탄절이라면 그것은 우울하고 두려운 성탄절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죄와 그로 인한 죽음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죄로부터의 구원과 영생의 소망을 알게 하고 확신케 하는 것이 성탄절입니다. 그 때문에 성탄절은 기쁘고 즐거운 성탄절, "Merry Christmas"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목에 사과뿐 아니라 장미와 빵과 촛불을 거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의 절망을 뚫고 생명을 피워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장미꽃과,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빵과,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과 진리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촛불로 장식되지 않은 성탄목은 성탄목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놀라운 선물이 주어졌음을 알리는 절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우리에게 가져온 선물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엡2:1-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그 크고 풍성하신 긍휼과 사랑과 은혜로 구원하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와 함께 하늘에 앉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에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선물을 기억하고 기뻐하며 감사하고 전하며 나누는 상징적 행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라는 일방적인 사건으로 끝나면 살아날 수 없습니다. 우리 쪽에서의 응답이 있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목적의 하나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 우리가 취할 응답적 행위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요일4:15에서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하는 믿음이 없는 성탄절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또 요한은 이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하는 믿음이 성탄절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이지만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최고의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의 진정한 의미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고백할 수 있어야 성탄절이 우리에게 진정 성탄절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 뿐 아니라 그 사랑 가운데 살며며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할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목적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압축하여 표현한 말이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한 것입니다.
다시 성탄절을 맞습니다. 이유도 모르고 성탄절을 맞으며 무의미하게 또는 주님께 욕되게 성탄절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성탄절의 의미를 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성탄절에 다시 한 번 우리의 죄를 깨닫고 자복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그 놀라운 속죄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절대적 순종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더욱 확실히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이 성탄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성탄에 쓰신 사람
마 1:18-25 / 김상복 목사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가장 소홀이 취급되는 분이 있다면 요셉입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양아버지로서 예수님을 양육하고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그는 잘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초기에 잠깐 등장한 이후로는 몇 세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사용하셨지만 설교에서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런 요셉이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제가 이번 성탄절을 앞두고 요셉에 대해 묵상을 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첫째로, 요셉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학자(大學者)나 제사장도 아니고,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도 아니며, 헤롯당원이나 열심당원도 아니고, 사해지역에서 금욕생활을 하며 메시아를 기다렸던 에센파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갈릴리 나사렛 작은 동네의 평범한 남자로서 목수 일을 착실히 한 사람이었습니다. 역사에 기록할 만한 이야기 거리라고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사람을 쓰십니다.
영어 찬송 가운데 ‘평범한 사람들’(Ordinary People)이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사람들을 사용하신다’(Ordinary people God uses)는 내용입니다. 요셉은 특별히 드러낼 만한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류역사상 평범한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많이 해왔습니다. 특별한 사람들은 역사에 기록되거나 매스컴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평생 TV에 등장하는 일이 드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경우를 보면,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부터 25장까지 무려 열세 장에 걸쳐 등장합니다. 야곱 역시 창세기에서 열두 장에 걸쳐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끼어있는 이삭은 단 두 장에 불과합니다. 이삭은 유명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무척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이삭이 없으면 아브라함과 야곱의 연결고리가 없어집니다. 연약한 고리 같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분이 저에게 6.25 당시의 사진 수십 장을 인터넷으로 보내주셨습니다.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된 거리와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피난길에 나선 사람들의 모습, 코 흘리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들이 담겨있었습니다. 그 아이들 중에 혹시 제가 있는지 찾아보았어요. 그 때 제가 그런 모습이었으니까요. 50년 전 한국의 모습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점점 그 기억을 잊고 있을 뿐 아니라 젊은 세대는 아예 알지도 못합니다. 사진을 보내주신 분에게 우리 교회 게시판에도 그 사진들을 올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면 지금의 모습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 이처럼 어려운 과정이 있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도록 하루 종일 수고했습니다. 과로로 40대가 요절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희생과 수고가 있었습니다. 대통령 한 사람 때문에, 정치인 한 사람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성장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기업의 사장 한 사람 때문도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꾸준히 자기 생명을 바쳐 일해 왔기 때문에 오늘이 있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뒷받침이 없다면 위대한 사람의 업적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위대한 역사는 평범한 사람들, 바로 여러분의 성실함 위에 이루어집니다.
미국의 공영방송 PBS에서 방송하는 어느 분의 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웬만큼 유명한 사람은 이름만 들어도 다 압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제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뉴욕대학의 어느 물리학 교수였습니다. 그의 인터뷰를 30분 동안 들으면서 저는 놀랐습니다. ‘평범한 한 대학 교수가 자기 연구실에서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물리학의 세계를 혼자서 연구하고 또 연구하며 수십 년을 공부해왔기 때문에 미국이 이렇게 발전하고 있구나!’ 평범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은 기회였습니다. 이름도 빛도 없이 연구만 하는 그 교수처럼 곳곳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사람들을 쓰시고 그들의 수고를 통해서 역사를 변화시키십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맡은 일이 중요합니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키우고 공부 시키느라 고생을 많이 합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이들이 공부하고 돌아올 때까지 밤잠을 설치며 기다립니다. 우리 학생들에게 공부를 너무 많이 시킨다고 불평도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 젊은이들이 지금 세계 젊은이들과 경쟁에서 앞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수고 없이 이 나라가 잘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같이 평범한 사람을 쓰십니다. 여러분이 하는 작은 일들이 중요한 일들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둘째로, 요셉은 또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19절에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Joseph, being a just man)(KJV) 했습니다. 만일 요셉을 'a righteous man' 이라고 했다면 제 마음이 무거웠을 텐데 'a just man' 이라는 표현에 위로를 받습니다. 이 두 단어의 의미에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a righteous man’이란 ‘언제나 옳은 사람’을 일컫습니다. 제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바로 이런 완벽한 사람입니다. 항상 옳은 사람은 겁나는 사람이에요. 그들은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옳은 사람 옆에서 산다면 무척 힘들 것 같습니다. 반면에 ‘a just man’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오,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저는 저 죄인 같지 않고, 십일조도 잘 했습니다. 사탕 한 알도 십분의 일로 나누어 드렸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요셉은 야단법석하지 않고 바르게 살아보려 했던 사람입니다. 자기 일에 대한 대가를 받는 만큼 성실하게 목수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무던하게 사는 평범한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요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부족하면 어려움이 생깁니다.
셋째로, 요셉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요셉이었다면 아마 불평을 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왜 하필 제 약혼자를 임신시키셨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가슴이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만났을 때 “저 사람은 착한 사람이다. 그의 가슴 속에 악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모두 우리 가슴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죄성이 들어있기 때문에 완전히 착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다나엘처럼 내 속에 악의가 없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제 가슴에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착한 사람은 겁이 없고 두려움과 걱정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좋게 해석하고 좋게 해결하려 합니다. 사람은 착한 마음을 통해 착하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착한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어야 될 것이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가슴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마음이 착하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어떤 분쟁과 오해와 불화를 일으킬지 불안합니다. 요셉은 약혼자가 임신을 했으니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요셉이 “저를(마리아를) 드러내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착한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온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일을 조용히 처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잘못했거든 조용히 찾아가서 1대 1로 대화하라. 안 되면 두 세 사람이 같이 가서 대화를 하라. 그래도 정 안되면 그 때는 터뜨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 모르게 다 조사해놓고 하루아침에 터뜨려버립니다. 이번 황 교수 줄기세포 사건도 그렇지 않습니까? 전 세계에 다 터뜨렸습니다. 착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평범하더라도 바르게 살려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요셉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가슴 속에 부르짖는 기도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착하게 해주옵소서. 내 속에는 죄성이 있고 아직도 나쁜 습관이 남아있지만 성령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주셔서 사람들이 나 때문에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일이 없도록 나를 착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착한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넷째로, 요셉은 좋은 가문의 후손입니다. 20절에 보면 천사가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고 불렀습니다. 요셉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다윗은 요셉보다 1천 년 앞선 조상입니다. 좋은 가문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가 유명한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다윗에게는 여러 형들이 있었으나 막내 다윗 한 사람으로 인해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는 말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자손”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족보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 사람들은 모두 왕의 후손이더군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만왕의 왕의 후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당대가 아브라함과 다윗처럼 좋은 신앙의 가문의 조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부모들이 예수를 믿지 않아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가문이 못되었다면 여러분부터라도 신앙의 선조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몇 대 후손들로부터 하나님을 믿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셉과 같이 쓰임을 받는 사람, 평범하지만 바르고 착하게 사는 사람, 남의 문제를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라 숨겨주려고 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의 가문이 이제부터 좋은 가문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문에서 신앙의 1대인 분들은 손을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다윗의 가문, 아브라함의 가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평범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을 알고 여러분 자신이 좋은 가문의 출발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섯째로, 요셉은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겸손하게 무엇이든지 순종하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요셉의 경우라면 참 힘들었을 것 같아요. ‘하필이면 왜 저를 택하셨나요? 주여, 다른 사람을 택하시옵소서!’ 이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순종했습니다. “네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오라!” 데려왔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세상의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과 지시라면 언제나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자기 욕심과 주장과 원하는 것을 모두 내려놓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언제든지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용하시고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요셉은 자제력이 있었습니다. 25절에 보면 요셉이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혼부부가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은 것은 보통 자제력이 아닙니다. 성령님이나 천사가 예수가 태어나기 전까지 동침하지 말라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제하고 아기를 낳기까지 자제했다고 했습니다. 절제(self-control)는 성령의 열매 중 마지막 열매로, 자기를 억제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죄성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의 말과 행동과 표정 등은 그냥 두면 감당을 못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태도와 표정과 행동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철저히 걸러내어 절제되고 통제된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하고 결정해야 성숙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요셉과 같은 사람입니다.
자기 원하는 대로, 자기 성격과 기분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누가 못합니까? 죄성을 가진 사람은 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자제하고 절제하며 다듬어진 인생을 살아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게 되기를 원합니다.
요셉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을 쓰십니다. 요셉은 또한 의로운 사람입니다. 누가 알아줘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바르게 살려고 한 사람입니다. 요셉은 착한 사람이요. 남의 문제를 지적해내기보다는 덮어주려는 사람입니다. 좋은 가문을 가진 사람입니다. 순종하고 자제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평범한 사람을 선택해서 예수님의 양아버지를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을 쓰십니다. 여러분을 쓰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평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요셉처럼 쓰임 받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누구와 함께 하는가
마 1:18-25 / 민경설목사
우리가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친구 따라서 어렵게도 될 수 있고 잘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강남은 멀고 힘든 곳이지만 친구와 함께 가기 때문에 그곳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삶의 결과도 달라집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항상 누군가와 어울리고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누구와 함께 하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욥1:21]"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인간은 누구도 혼자 태어나 혼자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은 누구도 누군가와 끊임없이 함께 어울리고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에 인간의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말하고 누구와 함께 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성패를 좌우할 뿐 아니라 영원한 세계 죽음저 편까지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잘나고 못난 것이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그 사람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최고 경전인 ‘금강경’에 “인간이 불행한 것은 미운 사람을 너무 자주 만나서 그렇고 인간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인간의 복된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함께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1: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1: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를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복’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복을 말합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 없는 만남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훌륭하게 조건을 갖춘 자라도 하나님 없는 인간끼리의 만남은 결국은 실패하고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족하고 못났다 하더라도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복을 받아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가 되면 자신도 잘되고 남도 잘되게 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핵 문리학자인 ‘스티븐 호킹’박사도 ‘헬렌 켈러’도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복을 받아 인류에 커다란 업적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는 자는 누구와 같이 해도 불행해집니다.
임마누엘의 복, 즉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의 복은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1:19~20]"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요셉은 하나님을 만난 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므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좋을 때도 그리고 어려울 때도 우리를 최고의 복된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 만해도 역사 하십니다. 그러므로 긍적적이고 소망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2.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는 복을 받습니다.
[마28: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세상사람들과는 우리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동행하시며 죽음 저편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인간의 죽음 앞에는 물질도 친구도 명예도 가족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와 함께 하십니까? 예수를 만나 임마누엘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은 모두가 적신으로 태어나 적신으로 돌아갑니다. 모두가 떠나고 다 버려도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영원까지 동행하십니다. 모두가 임마누엘의 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 아 멘 -
예수 - 임마누엘
마 1:18-25 / 이동원 목사
존 올트버그는 그의 저서 “이성을 넘어선 사랑”(Love beyond Reason)에서 기독교 철학자 키엘케골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영광의 하나님이 유한하고 평범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진리를 어느 농촌 소녀와의 사랑에 빠진 왕의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천한 소녀를 사랑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왕가의 혈통도 없었고 공식적인 교육을 받은 일도 없고 그녀는 누더기같은 옷을 걸치고 농촌의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녀와 설명할수 없는 사랑에 빠진 왕은 이 사랑의 마음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으로서는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문제였습니다. 왕의 자문관들은 정 그렇다면 명령을 내려 그녀를 왕비로 삼으시라고 건의하였습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왕으로서 그렇게 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강요된 순종으로 얻은 사랑이 진정한 사랑인지를 왕은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또 어떤 참모는 그러면 그 소녀의 지위를 먼저 격상시켜 벼슬을 내리고 선물을 하사하시어 공주들이 입는 옷과 보석으로 치장한 다음 그녀를 궁중으로 데려 오라고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녀가 정말 마음으로 왕을 사랑하는 것이지 그녀가 얻은 지위와 보석 때문에 왕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인지 어떻게 구별할수 있는지가 왕의 고민이었습니다.---그래서 왕은 마침내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왕은 잠시 왕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농부가 되어 그가 사랑하는 소녀가 살고 있는 곳으로 가서 농부로 살며 그녀가 입고 있는 동일한 누더기를 입고 동일한 음식을 먹고 동일한 오두막집에서 살아가며 그녀의 사랑을 얻기로 한 것입니다.”
키엘케골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사건이 바로 성육신(incarnation)의 사건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비슷하게 교회 강단에서 더욱 자주 사용된 비유가 있다면 개미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개미떼들이 절벽을 행해 무리를 지어 가는 모습을 관찰하던 학자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 앞에 기다리는 위기를 경고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만일 개미가 되어 그들에게 이 위기의 소식을 전달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고--“ 그래서 동일한 이유로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피할수 없이 직면해야 하는 심판의 소식을 경고하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나님이 인간이 되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신의 사건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마태복음에서 천사는 요셉에게 그와 정혼한 여인 마리아를 통해 인간으로 오실 하나님-그의 이름이 두 가지로 불리어 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두개의 이름은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오신 그분의 두 가지 각각의 다른 사명을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들인 것입니다. 이 두개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첫째 이름은 예수입니다.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그리스어)의 히브리 단어는 여호수아(Joshua) 혹은 예수아(Yeshua)입니다. 그 뜻은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매우 광범한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모든 유형의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구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천사가 전달한 구원의 의미는 일상적인 구원 혹은 구출이상의 보다 근본적인 인간 존재의 구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구원(곧 가난으로부터의--)도 아니고 정치적인 구원(억압으로부터의--)도 아니고, 사회적인 구원(불평등으로부터의--)도 아닌 죄로부터의 구원인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바로 구원으로서 그가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사명이 바로 구원이심을 나태내는 것입니다.
그의 생애의 절정인 십자가는 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속죄의 죽음 곧 대속의 죽음이셨던 것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고 그 결과로 영원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피할수 없었던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로 그 생명을 우리가 죽을 자리, 우리가 형벌 받을 그 자리에 내놓으신 것입니다. 마가10:45의 말씀처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한 것입니다. 이 예수를 믿고 아는 것이 바로 새 인생의 시작인 것입니다. 나르니아의 연대기의 작가 C.S. 루이스 교수가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서 전달하려한 핵심적인 메시지도 바로 그것입니다. 나르니아의 중심 캐럭터인 사자 아슬란은 에드먼드의 죄를 대신하여 돌탁자에서 죽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활과 함께 나르니아의 모든 죽었던 것들은 새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나르니아에는 크리스마스가 찾아오고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옵니다.
로이 레신(Roy Lessin)이라는 분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글을 남긴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로이 레신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지식이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육가를 보내셨을 것이다./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건강이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사를 보내셨을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업가를 보내셨을 것이다./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즐거움이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연예인을 보내셨을 것이다./그러나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죄 사함이었다.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세주를 보내주신 것이다.” 바로 그분의 이름이 예수, 예수아이시고 그가 오신 날이 크리스마스인 것입니다.
둘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여기서 천사는 요셉에게 메시아로 오실 그분의 또 다른 이름 하나를 계시하십니다. 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가 메시아의 구원의 역할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임마누엘은 동행의 역할을 나타내는 이름인 것입니다. 임(im)은 함께, 마누(manu)는 우리와, 엘(El)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고 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평생에 동행하시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본래 이 말씀은 이사야 7장에서 유대왕 아하스의 때 북방 베가 왕과 아람왕의 공격으로 온 백성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때 하나님께서 특별한 징조로 그 백성과 함께 하실 것을 언약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들이 주의 백성이라고 해서 그의 임재를 항상 자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임재를 자각하지 못해도 그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야곱처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과연 여기 계셨거늘 우리가 깨닫지 못하였도다”고. 그리고 또한 우리는 마침내 엠마오 길의 두 제자들처럼 두 눈이 밝아져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 길에 함께 하신 줄 저희가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 식탁에도 함께 하신 줄 저희가 미쳐 몰랐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이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소명을 받고 제자의 길을 두려워하며 가야하는 제자들에게 임마누엘의 약속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마태28:20절입니다.“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C.S.루이스 교수가 ‘말과 소년의 모험’에서 소년 샤스타를 돕는 아슬란의 역할을 그리면서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가 바로 이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소년 샤스타가 계곡과 무덤과 사막을 지나 산길을 오르며 이제는 결정적인 위험을 벗어난 것을 느끼고 있었을때 이 소년은 자기 옆에 따뜻한 입김으로 함께 하는 신비로운 임재를 느끼며 “내 옆에 있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때 그 음성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와 아라비스가 만나도록 한 사자가 바로 나였다. 죽은 자의 무덤에서 지내던 밤 너를 위로하던 고양이도 나였다. 네가 자는 동안 승냥이를 쫓아버린 사자도 바로 나였다. 네가 늦지 않고 루운왕에게 이르도록 너의 말들이 최선을 다해 달리도록 뒤에서 뒤쫓던 사자도 바로 나였다.--그러나 소년은 이번에 단도직입적으로 이 그림자에게 다시 묻습니다.--당신은 도대체 누구이십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자’, ‘나는 스스로 있는자’ ‘나는 스스로 있는자’ 세 번씩 들려오는 그의 음성은 처음에는 땅이 흔들리도록 다음에는 크고 명확하고 밝은 음성으로 그리고 세 번째는 조용히 따뜻하게 속삭이는 음성이었지만 그 음성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바람잎에 스치는 나뭇잎의 속삭임처럼 들려왔다. 그리고 조금전까지 그가 나를 해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깨끗이 사라지고 새롭고 전혀 다른 두려움으로 내 온 몸은 떨려 왔다. 동시에 기쁨이 벅차게 밀려 왔다.” 이것이 바로 루이스 교수가 묘사하고자 한 임마누엘의 경험이 아니겠습니까? 이 임마누엘의 주인이 바로 성탄절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장애인들의 인생 이야기를 담은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암 치료를 하며 몇 달 동안 병원에 누워있던 한 여인이 휠 체어를 타고 병실에 자주 방문하는 한 청년의 도움을 받아 병원옆 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장애 어린이들의 육상 경기를 구경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장거리 달리기 경기가 진행중이었는데 갑자기 나이가 한 50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가죽신발에 치마를 입고 손엔 큰 지갑까지 들고 갑자기 경기장 트랙옆으로 달려나가 트랙 바로 바깥에서 자기 딸과 함께 달리며 딸을 응원하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눈에 들어 왔다고 합니다. “영아야, 멈추면 안돼, 달려야 해, 달려 달려.” 그 소녀는 비틀거리며 달리고 있었고 자주 넘어졌고 우승할 가망은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그녀의 엄마가 원하는 것은 단지 완주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달려 나가 달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 소녀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세도 바로 잡혔고 균형감각과 인내심, 리듬이 다시 살아난 듯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소녀는 완주했고 소녀가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그녀는 엄마 품으로 달려들더니 무너지듯 안겼습니다.
이 가슴 뭉클한 장면을 보고 병실로 돌아온 이 분은 그날 밤 감동적인 한 장의 편지를 자기 아들에게 써내려가기 시작합니다. 그가 낮에 보았던 장애 아동들의 경기 이야기 그리고 딸과 함께 달리던 엄마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편지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상황은 다르지만 지금까지 나도 너의 곁에서 함께 달리며 너를 응원하는 인생을 살아왔지만 이제 엄마도 장애인이 된 지금 이제는 너의 경기를 관전하는 구경꾼의 자리에 서게 된 내 자신의 모습을 내내 그려보고 있었단다. 그리고 아무래도 오래 살지 못할 내 병을 내가 알기에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엄마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엄마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달려야 할 네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아, 그때 엄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나는 네가 여전히 네 곁에서 너와 함께 달리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으면 한다. ‘달려라, 나의 소중한 아들아, 포기하지 말고 달려라 달려’-나는 여전히 그렇게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의 힘도 너 자신의 힘도 미치지 못하고 네가 넘어져 있다면 그 때 엄마는 하늘나라에서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주님,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주님이 가서 일으켜 주셔요. 주님이 함께 해 주셔요‘라고. 그리고 그때에도 너와 함께 하는 주님을 의지하고 엄마의 기도를 의지하고 나는 네가 인생의 경주를 완주해 줄 것을 믿는다. ’아들아, 일어나 달려라.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거야, 주님과 함께 달리는 거야. 아들아, 임마누엘, 파이팅‘--기도로 함께 달리는 엄마가.
사랑하는 여러분, 이 예수로 오신 하나님, 임마누엘로 오신 하나님을 만나는 성탄이 되시기를 빕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요셉의 신앙
마 1:18-25 / 최성규 목사
20세기 마지막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언젠가부터 상업적 목적에 의해 밝혀진 화려한 조명과 우스꽝스런 캐롤송, 그리고 낯뜨거운 카드를 통해 성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성탄절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12월과 성탄절에, 정작 주인공 되신 아기 예수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카드와 선물은 오고 가는데, 아기 예수의 사랑과 영광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심지어, 성도들조차도 성탄의 참된 의미와 그 사랑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잘못된 현실 가운데 우리는 과연 어떤 신앙의 자세로 성탄을 기다리고, 맞이해야 할까요? 누구보다도 아기 예수를 기다린 사람이며, 누구보다도 성탄의 기쁨과 영광을 아는 사람인 요셉의 신앙을 살펴봄으로, 우리가 어떻게 성탄을 준비하고 맞이해야 할 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요셉은 의롭다 칭함 받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마 1:19)고 증거합니다. 이렇게 요셉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 두 가지 삶의 모습을 통해 성탄의 메시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요셉은 하나님 말씀의 근본 정신인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당시 율법은 정혼한 여자가 부정한 임신을 하면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율법에 정통하다는 바리새인들 같으면, 아마도 마리아를 정죄하고 죽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율법을 어기지 않는 범위에서 사랑으로 용서하려고 했습니다. 성경은 요셉이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마 1:1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요셉의 이웃사랑(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과 말씀사랑(끊고자 하여)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의로움"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을 사용하여 이웃의 허물을 드러내고,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성탄의 참 정신은 인류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은 우리의 죄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2월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는 전도가 더 많이 실천되어져야 하는 달입니다.
다음으로 요셉은 아기 예수를 믿고, 순결한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성탄에 있어서 가장 큰 기적은 동정녀 마리아가 잉태한 것이 아니라, 요셉이 그러함을 믿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한 남자로서 정혼녀가 동정녀 잉태를 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이런 일이 바로 "나에게" 일어났을 때, 우리는 정혼녀의 말과 주의 사자의 말씀을 듣고 단번에 행동을 취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요셉은 말씀을 믿고, 마리아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마 1:25). 이러한 요셉의 믿음이 결국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요셉처럼 성탄을 진심으로 기다리며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성결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의 크리스마스는 점점 술과 육체의 정욕으로 타락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요셉과 같이 몸도 마음도 영혼도 순결하여, 아기 예수를 사모하고 기다리는 성탄 문화를 만들어 갑시다(마 5:8).
둘째, 요셉은 순종하는 신앙의 사람입니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서 즉시 마리아를 데리고 올 정도로 순종적인 사람입니다.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마 1:24).
그러면, 요셉은 어떻게 하나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신앙인이 되었을까요?
첫 번째로 그는 평소에 작은 말씀 하나라도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누가복음은 요셉을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살았던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2:22, 23, 24). 두 번째로 요셉은 하나님의 음성에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주의 사자가 말할 때마다(네 번),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인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평소에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요셉이 자신의 삶의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결혼, 애굽으로의 이주, 그리고 나사렛에 오기까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두려워 할 때면,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을 주셔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평안을 누리나, 말씀을 떠나면 결국 근심과 걱정만 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성탄의 거룩한 역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말씀대로 산다고 이 사회는 변하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면, 내가 변하고, 가정이 변하며, 결국에는 사회도 변화됩니다. 실례로 나아만의 순종은 자신을 변화시켰고, 노아와 요셉의 순종은 인류 역사를 변화시켰습니다. 즉, 요셉의 순종을 통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류에 구원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작은 순종은 기적을 만들고, 그 기적은 이 땅에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룩할 것입니다.
셋째, 요셉은 경건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경건이란 단순히 윤리나 신앙적인 규범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신실하고도 실제적인 "헌신"입니다.
요셉은 경건의 모양뿐만 아니라, 경건의 능력까지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경건한 신앙을 유지하려면 세상에서 멀어져야 한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참된 경건은 삶 속에서 그 모양이 보여지고, 그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셉의 경건은 남편과 아버지라는 삶의 자리에서 증거 되었습니다. 즉, 요셉은 사람들의 몰이해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아기와 마리아를 보호하고 사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은 자신의 가정에 메시아가 태어났음에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이와 같이 요셉처럼 어떤 자리에 있든 아주 작은 것부터 경건의 모양과 능력을 훈련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삶 속에 아기 예수의 영광과 존귀가 드러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거룩한 성탄을 맞이한 요셉의 경건이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12월은 언젠가부터 온 가족이 흩어져서 동료나 친구들과 먹고 마시는 달이 되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가족 모임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성탄의 의미가 변질되고 퇴색한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 가족은 아기 예수를 맞이하기 위해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요셉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경건한 삶의 모습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한 동방 박사들처럼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가장 귀한 것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사모하고 기다린 사람들만이 아기 예수를 뵙고 경배 드렸던 것처럼(시므온, 안나), 20세기 마지막 올 성탄은 우리 모두가 준비된 가정으로 아기 예수께 나와 경배하는 영광스러운 날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요셉의 신앙은 아기 예수를 맞이하기 위해서 순결하고 경건하게 기다린 신앙입니다. 2000년 전 아기 예수는 그 신앙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요셉의 신앙을 본받아, 거룩한 성탄을 기다리고, 사모하여서, 아기 예수의 영광과 존귀를 누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됩시다.
- 기 도 -
날마다 말씀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20세기 마지막 성탄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의롭고, 순종하며, 경건한 요셉의 신앙이 우리의 신앙이 되게 해 주옵소서. 그럼으로 말미암아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성탄문화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임마누엘, 예수
마 1:!8-25 / 조재진목사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믿어보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태복음 1장은 결코 쉽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렵게 마음을 먹고 마태복음을 열었는데 그 처음이 족보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족보를 몇 줄 읽다가 성경을 덮어 버린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족보만 몇 번 읽었다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족보보다 더 어려운 부분이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또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게 됩니다. ‘성경이 허무맹랑한 이야기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도신경 중에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라는 부분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잉태, 동정녀 탄생
‘예수 그리스도 슈퍼스타’ 라는 뮤지컬이 있습니다. 이 뮤지컬은 현대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예수의 삶을 락 뮤직과 현대 무용으로 표현하면서 예수님의 삶도 현대적인 감각으로, 젊은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들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상당히 위험한 생각들도 여기에 담고 있습니다. 그 중의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향해 외치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서 신화를 벗겨라” 예수님의 신화를 벗겨라는 말은 예수님의 생애가운데 신화적인 요소가 많이 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로빈슨 이라는 신학자는 그리스도의 역사는 초역사적이며 또한 성경의 언어는 신화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오늘날 현실속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중에서 성령잉태설과 동정녀 탄생의 교리는 사람들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늘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이라든지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불제자였던 예수”등 뉴에이지 운동을 표방하고 있는 ‘정신세계사’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이 예수님 성령잉태설과 동정녀탄생을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고대 바벨론이나 수메르, 아카디아의 설화, 그리고 그리스 로마신화에 보면 접신하여 잉태된 아이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석가모니가 태어날 때도 그의 어미니 뱃속에 흰 코끼리가 들어왔다든지 사람이 죽으면 개도 되고 소도된다는 식의 윤회설에 의한 잉태를 말하면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나의 신화나 이야기 거리로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믿음이 없는 신학자들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 봐라 고대 근동에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느냐 예수님의 탄생이야기도 그런 것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단지 인간의 이성과 자연과학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예수님의 사건을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황된 이야기나 신화로 치부해 버립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려는 이런 시도들은 많은 분야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진화론자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않고 창조 사건을 진화론으로 대치하려고 도전해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과 죄사함의 은총은 ‘휴머니즘’으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죄사함보다 봉사정신, 인간애, 사해동포주의 등의 이야기를 합니다. 심지어 종교적인 체험을 어떤 곳에서는 최면술로 대신하고 성령의 임하심을 무슨 ‘기 훈련’으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불가능하다고 하나님도 못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악한 불신앙적인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의 사건은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분명한 사실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누가복음1:1에 보면 누가는 로마 황실의 익명의 사람에게 누가복음을 기록하여 보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그는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사건은 신화가 아니라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가 되고 일꾼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누가는 지금까지 자기가 지켜본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요즘 유전공학에서 인간 복제를 말할 때 이것은 정상적인 남여의 결합을 통하지 않고도 단지 세포의 핵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사람을 복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모자라는 인간의 과학도 시험관 아기라든지 복제인간을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낼 때 성령으로 잉태하게 하고 동정녀의 몸을 빌어 나게 했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 쉬운 일 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꾸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라고 묻기 때문에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인간으로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으로 가능해진 잉태의 사건이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낳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는 100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삼손도 원래 잉태하지 못하던 그의 어머니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낳은 것입니다. 사무엘도 그렇지요.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라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오히려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성령의 잉태하게 하셨고 동정녀의 몸을 빌어 태어나게 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너무 중요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왜 예수님의 성령잉태와 동정녀 탄생이 그토록 중요합니까? 다시 묻는다면 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오셔야 했습니까? 여기에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석가의 탄생 설화를 보면 석가가 어머니의 옆구리를 통해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석가가 어머니의 옆구리에서 나와야 하는지를 묻는다면 사실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도 알에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알에서 태어나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말해야 특별하기 때문에 그렇게 신화화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의 몸을 입고 와야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냥 특별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야 합니까? 왜 동정녀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와야 합니까? 성경은 적어도 두가지 중요한 이유를 말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와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을 구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해서 천국가게 할 수 없습니다.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내가 내 자녀를 사랑하지만 자녀대신에 죽을 수 있지만 내가 죽는다고 내 자녀가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 죄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만이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석가는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공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 분들은 훌륭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자기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사람은 구원자가 아닙니다. 제가 언제가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만 손명준이라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서울에서 목회할 때 그 교회에 잠깐 잠깐 나온 분이십니다. 이 분이 한국에서 60평생을 불교를 믿고 살았습니다. 절에서 병도 고치고, 절에 나가서 마음의 평안도 얻었다고 했습니다. 열심있는 불자였습니다. 둘째 아들이 결혼을 했는데 하필 예수믿는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결혼식을 하고 시집에 들어온 이 둘째 며느리에게 말했습니다. ‘한 집안에 두 종교를 가지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런데 내가 너를 따라 교회에 가는 것이 옳겠느냐? 아니면 네가 이 집에 며느리로 들어왔는데 나를 따라 절에 다니는 것이 좋겠느냐?’ 결국 며느리를 설득해서 절에 다니게 만든 할머니입니다. 대단하지요. 그런데 이 분이 미국에 있는 큰 아들네에 가서 손자들을 봐주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 할머니가 미국에 가니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절에 다닌 이 분이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한국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 교회에 나간 것이지요. 그러다가 이 할머니가 진짜 예수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고 진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할머니가 한국에 왔다가 제가 목회하던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리고 학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학습문답을 하기 위해 제가 개인적으로 만나 그 분의 믿음을 확인했는데, 이 할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옛날에 열심히 절에 다녔습니다. 절에 다니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저는 분명히 알았습니다. 석가모니는 사람이지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저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고 동정녀의 몸을 빌어 태어난 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설교를 통해 예수님의 인간적인 기원에 대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족보이야기는 예수님의 육신적인 혈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을 따라 육신적인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신적인 기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기원은 바로 성령으로 잉태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지만 실상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18절을 같이 읽어보십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몸을 입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죄많은 인간이었다면 인간이 태어나는 필수적인 과정을 통해서 태어나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몸을 입고 오셔야 했기 때문에 성령으로 잉태해야 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여러군데서 밝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0:30에 보면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라고 말했고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빌립이 예수님에게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옵소서”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문제는 죄 문제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동정녀의 몸을 빌어 오신 것은 예수님이 죄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땅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죄문제입니다. 사실 이 땅의 문제는 정치문제도 경제문제도 아닙니다. 과학의 문제도 아니고 문화의 문제도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죄문제입니다. 정치자체는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정친인들이 죄의 유혹을 받게 되면서 정치는 타락해집니다. 경제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돈없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단지 돈이 잘못되게 사용되어 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경제인들이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과학이 발달합니다. 그러나 그 과학의 발달이 죄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자연 생태계도 인간의 죄문제로 인해 오염되고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다 죄아래 있습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이 땅에 죽음이 왔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먹는 문제가 아닙니다. 죄문제입니다. 직장문제도 아닙니다. 집문제도 아닙니다. 이 세상이 혼란 스러운 것은 죄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가장 큰 문제가 죄문제라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죄를 해결함 받을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죄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죄아래 있으면서 어떻게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구원자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를 해결하려면 죄없는 몸으로 와야 했습니다. 아담의 후손, 즉 모든 사람들처럼 죄의 몸으로 오면 세상의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동정녀의 몸을 빌어야 했습니다. 동정녀탄생은 예수님이 죄없다는 말입니다. 벧전2:22-23에 의하면 예수님은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죄가 없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구약에 보면 사람들은 자기가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일시적인 방편으로 하나님앞에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들이 자기 대신 하나님 앞에 대신 드린 제물인 어린 양은 언제나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제물이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조건입니다. 흠있거나 상한 것은 것은 죄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고 깨끗한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서 거룩한 대속 제물로 드리신 예수님은 죄가 없어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죄의 역사를 뛰어넘어야 했습니다. 아담의 자손이 아니라 여자의 자손으로 이 땅에 와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창3:15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마귀의 유혹을 받아 죄를 범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기서 너의 후손은 마귀를 말하는 것이고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마귀를 꺾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다 해결하셨습니다.
미국 미시간에 살던 유명한 의사요 전도자였던 디한 박사는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묵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곱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필연적인 진리를 증언했습니다. ‘첫째 우리 모든 인간은 아담안에서 태어나며 따라서 아담의 죄는 모든 후손에게 영향을 미쳤다 두 번째 죄의 값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에게 영적으로, 육적으로 죽음이 찾아왔다 세 번째 인간의 생명은 피안에 있다. 피가 육체의 생명 그 자체이다. 넷째로 죄가 바로 인간의 이 피를 오염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유전에 의해서 타락한 피를 가지고 태어난다. 다섯째 따라서 하나님이 보내 주시는 구세주는 거룩하고 죄없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셔야 한다. 여섯째 구세주는 아담의 후손이 되어서는 안되며 아담의 타락한 피를 갖지 않은 자로 오셔야 한다. 일곱 번째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필연성을 초래했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합니다. 죄가 피를 통해 유전한다는 말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필연적인 진리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름 예수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고 동정녀의 몸을 빌어 태어나야했던 중요한 이유는 그 이름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주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육신의 아버지 요셉이 지은 것이 아니고 어머니 마리아가 지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어떻게 지어 주었습니까? 21절을 보십시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리라”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말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름은 중요합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 그냥 지어주지 않습니다. 부모의 소망을 담아 부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이름에 운명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소위 ‘성명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까지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 이름도 중요합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나라 ‘조’, 있을 ‘재’, 그리고 진동할 ‘진’입니다. ‘나라에 진동이 있을 놈’이라는 말이지요. 저도 이름처럼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날 아기를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예수”라고 지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구원자로 이 땅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요즘 자칭 ‘예수’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별히 한국에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 거짓말쟁이요, 악한 사단의 하수인에 불과합니다.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4:12절에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얻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직접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임마누엘의 의미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성령으로 잉태하고 동정녀의 몸을 빌어 오신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하시면서 이사야서7:14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른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계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라는 말의 의미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구원자만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간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구원받은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참 좋습니다. 주님은 마치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수해현장을 시찰하려 나오듯이 그렇게 잠깐 얼굴만 비치고 생색을 내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예 우리 가운데 집을 짓고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고통의 현장에, 우리의 아픔의 현장에 주님은 함께 거하십니다. 잠시 얼굴만 비추고 가실 분이 아닙니다. 주일날 예배 드릴 때만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예 우리의 삶에 자리를 펴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우리에게 은총의 절기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이 성탄의 절기에 다시한번 예수님을 묵상하고 그 분을 새롭게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에 저는 c국에 다녀왔습니다.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화요일에 도착하자마자 신학교에 가서 강의했습니다. 강의 마치고 집에 오니까 11시가 되었습니다. 그 이튿날도 신학교에서 하루종일 강의하고 저녁 먹을 시간에 어느 곳에 가서 18명 세례식을 했습니다. 저녁강의를 마치고 9시에 또 다른 곳에 가서 2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목요일에는 오후까지 강의하고 저녁에는 2-3시간 차를 타고 농촌으로 가서 그날 저녁과 그 이튿날 오전에 부흥회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그날 금요일 저녁 10시 까지 강의했습니다. 어제 토요일 오전에 또 한곳에 가서 교회 개척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비행기타고 부산으로 온 것입니다.
참으로 바쁘게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저는 중국교회 성도들을 만나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목말라 있었습니다. 제가 두시간 세시간 설교하고 강의해도 꼼짝하지 않습니다. 조는 사람도 없습니다. 농촌지역에 가서 부흥회 할 때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와서 서서 말씀을 듣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열광하고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고 예수님 때문에 감격해 했습니다. 예수님 이야기에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저는 우리들이 다시 예수님을 그렇게 열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무슨 사역을 하거나 교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거나 무슨 명분을 따지지 말고 정말 예수님 그 분이 너무 좋아서 다른 것은 다 양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용서해주시고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 나의 신앙의 전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쳤습니까? 마음이 메말라 갑니까? 다시 이 성탄의 절기, 은혜의 절기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분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임마누엘, 예수!, 성탄절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구원자요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소원
마 1:18-25 / 박지온 목사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소원이라는 제목을 삼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계속 이어서 마태복음서에 강해를 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을 깨닫고 성경에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아주 중요한 바탕부터 이렇게 지금 만들어 간다면 좀 이상하지만 준비를 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 어떤 그 중요한 바탕에서 꼭 세 가지를 먼저 명심해야 된다 그랬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것이 못 믿어지게 된다면 여러분 신앙생활에 진짜 한번 돌아봐야 됩니다. 여러분과 제게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완벽하신 인도 속에 지금 서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대로 뭐 제가 엿장수 마음대로 그런 소리를 했습니다 만은, 못 믿을 때에 별별 생각이 다 나더라 구요. 그런데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여러분과 저를 선택하시면서 절대 적인 주권으로 인도하실 때에 감정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 아니고 뭐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말씀의 절대적인 인도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인도를 합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로 그렇다면 이제 논리적인 기교라 그랬죠.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주권 배경으로 해서 말씀으로 구체적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여러분을 어떻게 하느냐 선택했습니다. 계획했다! 이것입니다. 계획했다! 그랬습니다. 이 자리에 여러분 잠깐 오셨다. 한번 축하를 드렸는데, 그냥 축하드린 것이 아닙니다. 너무 위대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옛날에 우리 기도할 때에, 만에 하나 천에 하나 하나님이 나를 택하시고 그게 이런 배경입니다. 어쩌다가 여러분이 여기에 선택을 받아 이 자리에 앉았습니까! 더군다나 송현교회 이 자리에 앉았습니까! 더군다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표에 궁극적인 그 역사 속에 우리를 세우셔서 세계복음화라는 이 사실을 말하면서 여기 앉았습니까! 진짜 축하드립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역사예요.
이 사실이 이해가 된다! 그러면 그 다음에 모든 문제가 여기서 다 풀어져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다 풀어져 나가는데... 그래서 그 조금 그 이렇게 말하니까 저도 뭐 어릴 때부터도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 막 의문이 생겨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 그러면 진작 하루라도 일찍 선택해서 진작 나를 고쳐주시지, 이제 와 가지고 가로 늦게 이제 나를 왜 이렇게 하느냐? 이런 말이 많이 나와요. 뭐, 조금 진작 고치고 진작 은혜 주시면 좋을 텐데... 왜?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도저히 이 뭔가 할 수 없는 이런 엄청난 어려운 환경에서 나를 선택해 가지고 고생하게 만드느냐?
그래서 그 절대주권에 있어서 여러분과 저를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은혜라는 것에 눈이 안 뜨여지면 그 다음 것은 이 누려지질 않아요. 그 다음에 원망이 나오고 막 이런 것이 나오죠. 혹시 이 순간도 이걸 믿는다 그러면서 내가 원망이 나오고 불평이 나온다! 그러면 그건 안 믿는 겁니다. 안 믿게 되고 이것을 절대로 믿게 되는 배경은 하나님이 은혜 주셔야 됩니다. 은혜 아니고는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런 배경에서 도대체 그러면 절대주권 속에서 나를 선택해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도하시고 말씀을 따라 인도함을 받게 되는데, 지금 누린다는 배경이 도대체 어떤 배경이냐? 그래서 많은 경우 여기서부터 틀려 나가요. 우리가 기본부터 틀려 나가기 때문에 신앙 생활이 어려워진다기보다도 안 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성경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거든요.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는 것이 여기서 따라 나오는 겁니다.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랬을 때에 대강 우리는 뭐냐하면, 예수 믿었다! 영접했다고 하는 그것으로서 진짜 누려야 될 실체를 누리지 못하고 뭘 하느냐 하면요.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는 사실을 누리는 초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잘 이해를 하셔야 돼요. 그러면 모든 것을 더 한다! 물질도, 경제도, 내가 지금 현재 건강도! 이런 것들을, 뭔가 그것부터 이 전재가 안 된 상황에서 그것부터 내게 더하리라는 이 상황을 누림으로 우리가 착각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걸 열심히 누리려고 애쓰는 것이 바로 종교 생활에 빠지는 문제가 옵니다. 거기서 빚나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구해도 그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나무라 안 그랬습니까! 비유를 첫 번부터 한 겁니다. 가시나무가 아무리 무화과나무 열매를 맺고 싶어도 그건 맺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이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살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가는 축복 속에서 내게 사실적일 만한 영육간에 그 축복이라는, 소위 말하는 우리가 그런 어떤 우리가 바라는 축복을 누리고 싶어도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근원적인 것이 안 되면...
그러면 가시나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무화과 열매를 못 맺습니다. 가시나무는 아무리 애를 써도 가시나무 열매밖에 안 맺어요. 그래서 너희가 뭐가 되었느냐? 무슨 나무가 되었느냐? 이게 중요한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도대체 지금 뭘 바라고 뭘 요구하고 있느냐? 이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뭐가 되어 있느냐? 지금 그러면, 그 다음에는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따라 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그걸 좀 구체적으로 성경에 말씀 속에서 밝혀 주셨어요. 그 말씀이 바로 마태복음 1장 21절입니다.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다같이 21절 시작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 다음에 22절에는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것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고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그 다음에 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일에 구체적으로 이 땅에 실행하는 과정 속에서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처녀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셨다! 그 이름이 예수다. 그리고 이 예수를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이루신 직책이, 그걸 이룰 수 있도록 하신 직책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직책이 메시야 직책을 완성했다! 그 이야기가 성경에 지금 기록입니다.
그런데 먼저 뭐냐하면 그 죄를 해결하시고 그 직책을 이루시기 전에 여러분과 제게 하나님이 중요한 선언을 하신 것이 있어요. 21절에 보면 뭐라고 그랬냐 하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러면 왜? 이 예수를 보내고, 왜? 이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소원과 하나님의 계획이 뭐냐? 그러면 "이는" 그 이유를 말하죠. "이는 그가" 뭐라 그랬습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 그랬습니다. 여기 죄에서 구원하기 이전에 뭘 강조를 하느냐 하면, 자기 백성 삼아주셨다. 이걸 가지고 우리는 뭐냐? 은혜라 그랬습니다. 여기 자기 백성 그럴 때에 이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이 창세 전에 여러분과 저를 자기 백성으로 계획 하셨다! 이 말입니다. 이걸 잘 알아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 뭔가 이 칼빈주의에서도 뭐라 그러냐 하면요. 여러분과 제가 무조건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아무것도 우리는 듣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 그러니까 예수께서 말씀한 것처럼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수도 없고 듣지도 못한다. 행할 수도 없다.' 그 이유가 뭐냐? 바로 그 이유를 말하면서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너희는 마귀의 자녀' 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러분 뭐 내가 왜, 전도가 안 되느냐? 해야 되느냐? 안 해야 되느냐? 이것 갈등 이전입니다. 이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뭡니까? 할 수도 없어요. 하지를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귀의 자녀들은 그게 이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직접적인 진단이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안 되는데 왜, 안 되느냐? 그걸 고민하는 경우가 문제가 아니고 뭐냐? 정말 진짜 계속 안 되고, 계속 뭔가 불안하고, 계속해서 염려스럽고 이러면요. 진짜 여러분 신분이 문제거든요. 된다, 안 된다! 이전에 되든, 안 되든 상관없이 전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안이 오고, 감사가 오고, 그리스도 메시지들을 때마다 새 힘이 나고, 그건 된다, 안 된다! 상관이 없습니다.
먼저 이 사실 자체를 우리가 누려야 되는데, 그것도 그걸 누린다! 그럴 때에 그 다음에 누린다는 배경도 이상하게 이게 문제예요. 바로 지금 우리가 이해되어야 될 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자기 백성 삼으셨다! 그래서 완전 타락해서,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전혀 없어요. 이때에 두 번째로 칼빈주의에서 중요하게 그게 성경 전체 해석에 5대 교리인데요. 바탕이 나오는 것이 뭐냐하면, 전적으로 우리에게 전혀 무능한 이런 백성들이 이런 그 사실들을 앞에다 놓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어떻게 했느냐? 무조건 선택했다! 그랬습니다. 무조건! 이것이 하나님 계획이거든요.
그러니 무조건 선택했다는 이 말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무조건 은혜 주셨다! 그 말입니다. 이걸 가지고 우리는 은혜 받았다고 그러는 겁니다. 여러분과 제가 할 만한 자리에서 뭘 했다! 그건 은혜라고 말할 게 없어요. 나와 여러분 전혀 아무것도, 이 자리에 앉는다는 사실 조차조 상상도 못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앉혀 놓았어요. 무조건 선택입니다. 이걸 가지고 은혜!
여러분 예정교리가 이해가 되어야 은혜라는 사실이 이해가 됩니다. 나와 우리의 신분과 상관없어요. 하나님이 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이것이 조금만 이해되면요. 여기서부터 찬양이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분 선택교리에서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교리에서 에베소서 1장 쭉 나가면요. 여러분 선택하고, 여러분 앉혀놓고, 이렇게 축복주신 그런 배경에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고, 하나님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영광 돌리게 하고 이런 배경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들은 이야기입니다 만은, 어떤 이야기냐 하면, 사람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여러분과 저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뭐냐? 하나님을 영광 돌리기 위해서... 부르신 목적이 뭐냐? 바로 이것이거든요. 그런 배경이 이 배경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말이 아니고 여러분과 제가 은혜를 받게 되면, 말하자면 이 축복 속에 서게 되는 그 순간!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에 우리의 입에서는 감사밖에 나올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그런 것을 구체적으로 붙잡지 못하면 주변 환경이 보여지게 됩니다. 앉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아, 나는 왜 이러냐! 나는 왜 이렇게 어려우냐?' 그것이 보여지게 되는 사실은, 문제는 말하자면 근본 해결책을 놓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보여지게 되면 여러분 어떤 상황에 있던지, 그것 때문에 이 자리에 서게 될 수 있었던 핵심이 될 수 있어요. 환경조차도 뭐가? 감사가 되는 겁니다. 아니면 뭔가 영원한 멸망이라는 것! 이것이 이제 이어지는데 이런 배경에서 바로 먼저 하나님께서 뭐 죄를 해결했다!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러분과 저를 세웁니다. 전혀 우리에게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걸 가지고 은혜라 그랬습니다. 은혜라!
이러면 여기서 따라 오는 것이 뭐냐하면, 딱 여러 가지 말할 수 있는데 세 가지로 따라옵니다. 여러분 제가 이제부터 살게 되는 것은 한번 받아합시다. "오직 은혜로 산다" 왜 이것이 이해되면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하나님께서 이 축복 속에서 이미 여러분과 제게 모든 것을 주었어요. 그러면 뭐가 이해되느냐 하면요.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과 제게 주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로마서 8장 32절에 배경이거든요.
그러면 뭐냐하면요. 바로 이것을 붙잡고 조금만 이 복음을 붙잡고 기도하게 된다! 이 기도가 되는 거죠. 저절로... 그러면 학업의 문제, 그 다음 경제의 문제, 정치적인 모든 문제 이런 모든 문제들이 여기서부터 풀어지기 시작합니다. 풀어지기 시작해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런 배경에서 뭔가 내가 뭘 하겠다. 그래서 자존심 세우고, 뭘 세우고 필요 없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것을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누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러분과 제가 이미 받아놓았습니다. 우리가 받아놓은 사실을 확인하고 그걸 누려 가면 됩니다. 왜? 여러분과 저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뭘 했어요? 선택했다. 이 은혜라는 이 사실이 바로 이해가 되죠. 그러면 이제 그 은혜를 받게 되는 동시에 그때부터 뭐냐하면, 오직 믿음으로 그러니까 오직 우리의 삶은 은혜의 삶이 됩니다. 모든 문제 은혜 받으면 돼요. 그러니 문제 생길 때에 하나님 바라보면 됩니다. 우리도 모르게 그런 삶으로 이어가게 되는 거죠.
그래서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뭘 이룹니까? 축복을 이루어 주십니다. 선을 이루신다는 말은 축복을 이루신다는 말과 같이 연결되는 말이죠. 모든 것이 전부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왜? 하나님이 나와 여러분을 선택해서 그렇게 되도록 이미 벌써 확보해 놓았어요. 그러니까 모든 문제 당할지라도 우리가 염려할 필요가 없고 염려할 이유가 없는 것은, 그 모든 것이 합력해서 하나님의 계획 속에 뭐로? 축복 주시기 위한 과정일 뿐이지, 거기에 뭐 다른 염려가 나올 필요가 없다! 이겁니다.
그 다음에 바로 그렇게 말하면서 이어지는 하나님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설명을 했어요.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 이미 하나님께서 당신 자식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을 해서 하나님이 불렀습니다. 그러면 불러 놓았다고 그럴 때에 여러분 언제 불렀다! 그건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그런데 불러서 어떤 문제나 사건을 통해서도 누구를 깨닫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만듭니다. 이걸 가지고 불가항력적 은혜라 그럽니다.
여러분 아무리 거부해도 불렀다! 만들어 주십니다. 받아합시다. "어차피 될 것 믿자!" 자꾸 거부하지 말고 어차피 만들어 줄 것 항복하는 겁니다. 이것이 여러분과 제가 바로 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누리고 사는 가장 축복된 길입니다. 그러니 뭔가 내 생각은 아닌데 내 생각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 생각이 이런데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겁니다. 가장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생각이 가장 위대하고 축복된 역사로 우리를 인도하신 것을 믿는다! 그럴 때는 우리의 개개인이 모든 문제, 모든 사건 통해서 뭘 깨닫게 하시는 과정이냐?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따라, 때를 따라 이걸 자꾸 하나님의 시간표라고 그러죠. 그렇게 기어코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30절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뭐냐? "영화롭게 하리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 속에 여러분과 저를 세워 놓을 것입니다. 받아합시다. "어차피 나는 천국 가야할 사람이다! 이미 티켓은 받았다! 순종하자!" 어차피 갈 것! 그래서 이 일에 보증으로 예수를 보내셨다. 이 일에 보증으로 예수께서 보좌 우편에 가시니까! 누구를 보냈습니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이래도 뭔가 이 감사가 안 나온다 그러면 이 문제가 생기는 거죠. 이게 안 믿어지니까 그래요. 이게 다 마음에 조금만 믿으면... 그러니 여러분 한번 조금만 돌이켜 보세요. 우리가 선택을 받고 하나님 앞에 세워졌다는 사실들이 조금만 돌이켜 보면 이 사실이 너무 절실해요. 나는 너무 뭐 이걸, 이 말씀을 드리면서 느끼는 것은 내 지난 온 과정 속에서 전부 오늘에 나를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을 받아 누리는 것뿐이지, 내가 뭘 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이 자리에 섰을 때 그냥 하나님 앞에 감사 할 뿐입니다. 교만할 것도 없고, 자만할 것도 없고, 뭐 이렇다 할 것도 없고...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런 마음이 들기도 하고 뭔가 이 설교의 은혜를 받았다! 그럴 때에 내가 했다 싶으면 뭐가 나옵니까? 은혜다 싶으면 자꾸 '아, 잘한다! 나도 꽤 잘하는가 보지!' 이렇게 돌아갈 수 있지만, 이게 뭡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 주시기 위해서 나를 이 자리에 세우셔서 이루셨다! 그러면 영광이 누구한테 돌아갑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는 겁니다. 근본적인 이것이 안 되면 조금만 뭔가 여러분에게 조금만 어떤 시간이 와도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향이 아니고 전혀 자기중심의 방향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다음에 조금 설명을 더 하겠습니다만...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보면요. 받아합시다. "오직 믿음의 삶이다!" 은혜에 그것이 되면 비로소 믿음이라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뭐냐? 믿음이라는 것이...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으로 그러는데 도대체 뭐냐? 그래서 믿음으로의 삶이라 그럴 때에 에베소서 2장 8절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옛날에 부흥 사들이 이걸 많이 비유를 해 주었어요. 저도 뭐 그 산에 처음 가서 우리 산기도 할 때에 기관마다 가서 이런 걸 또 보여주고 했습니다 만은, 참 쉬우면서도 이해가 쉬워요.
이번에 류 목사님이 저기 Remnant 집회에서 우리 아이들한테 믿음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설명을 하더라 구요. 그래서 제가 그걸 한번 그대로 재현을 해 보면요.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했다는 것이 내가 오른손으로 신 목사님 손을 잡았습니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신 목사님은 나약한 인간입니다. 손을 잡았습니다. 이것이 여러분 선택이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어요. 잡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시간이 되고 때를 따라서 내가 잡아 놓았지 만은 이걸 모르니까! 별 짓을 다 하다가 하다가, 하다가 안 되어서 들어온 사람들 있거든요. 나중에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이제 그리스도 뿐이구나!' 하고 조금 깨달았을 때에 비로소 뭡니까? '주여 믿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믿습니다.' 하고 이 믿음이 왔을 때에 비로소 신 목사님 자신이 뭘 하느냐 하면요. 내 손을 잡습니다. 이 손을 잡는 것을 믿음이라 그럽니다. 믿음의 전재는 뭐냐하면, 이미 벌써 하나님이 계획하셔서 신 목사님 손을 내가 잡았습니다. 그러니 이걸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겠습니까!
그래서 이것이 이해되면 믿음의 손을 잡게 되는 순간, 순간 뭘 하느냐?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잡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비로소 감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또 무슨 생각을 하느냐? 손을 잡았는데도 살아 가보니 잘 안 되거든! 그러니 뭐 또 지 마음대로 살려고 하다가 손을 놓아버렸어요. 손을 놓았다는 말이죠. 그러니 놓고 살아가니 더 안 되거든! 역시 은혜를 받아야 되겠다! 또 붙잡았어요. 이게 믿음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손을 잡을 때마다 감사는 나오지 만은, 이게 안되면 나한테 잡혀 있어도 하나님 손에 잡혀 있어도 불평이 나오기 쉽다! 이겁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그 자체도 뭐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겁니다. 선물이라 그랬습니다. 이해되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미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에 의해서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도록 하나님이 당신이 나의 손을 하나님의 장중에 딱 붙잡았습니다. 뭐! 뺏어갈 수 없어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걸 잘 모르거든! 지 마음대로 하다가 '은혜 받아야 되겠다!' 그래서 조금 이해가 되면 또 이 손을 꾹 잡고 그렇게 되면 또 감사가 나오거든... 그러다가 좀 기분 나쁘고 이상하면 '치워 버려라!' 그러나 하나님은 놓지 않습니다. 이걸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 삼으셨다! 선택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나를 세우셨다. 이게 이해가 되는 동안에 믿음에 손을 잡은, 내가 잡는 손이 믿음에 손입니다. 이것조차도 은혜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때마다 우리 마음속에 뭐가 오느냐? 감사가 나옵니다. 감사가 나와요.
나는 치유의 배경이 믿음의 손을 잡는 순간, 순간마다 치유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감사가 나오잖아요. 안 그러면 감사가 안 나와요. 이 사실이 바로... 그래서 이제는 믿음 없이는 안 되겠다는 그런 마음이 늘 들죠. 그래서 9절 보면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믿음조차도 자기 스스로가 아닙니다. 믿음조차도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은혜로 인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방편이죠. 내 자신이 그 축복과 은혜를,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 그 축복과 은혜를 내가 누리는 손이 믿음의 손입니다.
내 개인에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잡아주는 전제가 없으면 도저히 올 수가 없어요. 그런 자리에 여러분과 제가 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래서 '축하합니다!' 그랬습니다. 진짜 한번 합시다. '축하합니다!' 옆에 사람보고 하세요. 나를 보고하지 마시고 '진짜 축하합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뭐 멋있다! 잠시죠. 이제는 하나님의 손을 놓고 살아 갈 수가 없어요. 가다가 얼마 안 있으면, 전부 항복하고 또 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울고 오던지, 웃으며 오던지, 안 그러면 반 이상하게 되어서 오던지! 일단 잡을 때마다 주여 감사합니다. 이 축복과 은혜를 감사합니다. 이 사실 자체가 여러분 정말 이해되어야 되죠.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말씀한 것이 이겁니다. 먼저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이 사실이 먼저 전제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전적인 타락입니다. 하나님이 속죄를 할 때에 그 칼빈주의에서 '제한 속죄!' 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무나 속죄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한 사람만 속죄해 준다! 그랬습니다.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속죄해 주면 그 속죄 받은 사람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아무리 거부해도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은혜를 주신다! 그랬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 안 받고는 못 살아요. 기어코 주십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주십니다.
그 다음에 한번 받았다. 하나님께서 한번 받았다! 영원토록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의 보증이 되셔서 누구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저 천국에 기업을 누리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기업은 이 땅에서 조금 받는 것 집 한 채다! 아니다! 이게 아닙니다. 엄청난... 그래서 늘 그런 말 안 합니까! 바울이 저 하늘에 갔다가, 모범으로 하늘에 갔다가 하늘에서 보석 돌멩이 하나만 가져왔다! 그러면 실감 있게 좀 전할 수 있는데, 그건 가져왔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거든... 돌멩이 가져왔다! 이것 가지고 서로 '우리 교회에 있다. 우리 교회에 돌멩이 있다!' 싸운다고 또 이것도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아예 중요한 것은 이 땅에 없어요. 원본도 없고, 성경에 원본도 없고 사본이 전부 쭉 전달되는 겁니다. 그 뭐 법궤문제 나와서 이게 내려오는 또 법궤다! 그래가지고 법궤 때문에 또 싸움이 얼마나 일어났는지! 그래서 우리 그 잘 아는 일본에서도 '법궤가 일본에 와 있다!' 그래가지고 또 이상한데로 흘러 가지고 다락방도 못하고 저렇게 나갔는데... 문제는 뭡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죠. 이것이 내 개개인에게 적용이 될 때에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잡습니다. 그 붙잡을 때에 우리 기쁨이 우리 마음이 얼마나 평안하고 감사하고...
그런데도 인간이 이상하죠. 조금만 뭐 이상하고 인간적으로 잘되고 좀 뭘 하면 그냥 홀딱 놓아 버려요. 지가 하면 될 줄 알고... 그러니 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여기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만 또 이상하면 어디로 갑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 또 잡고... 그래서 옛날에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그 찬송 많이 불렀죠. 이제는 그것을 나쁘다가 아니고 그걸 부를 마음이 없는 것은, 이제는 그런 것을 뛰어 넘었다! 그랬습니다. 내가 연약할 때마다, 부족할 때마다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올게 아니고 의지가 있는데 뭐! 그때마다 믿음의 손 붙잡고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비로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이 때부터 오는 것이 오직 성경으로 우리 삶이 뭘 믿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이 땅에 성취될 모든 말씀! 여러분 삶에서 성취될 모든 말씀으로 벌써 성경에 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이... 그래서 뭐 '박 목사가 어떻게 했으니...' 그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무렇게나가 아니고 성경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과 제가 거의 류 목사에 대해서, 전도 문제에 대해서 늘 자꾸 우리가 포인트를 두고 계속해서 교회에서 그런 방향에 전념하려고 하는 것은 성경이 그랬으니까! 그 이야기지, 만약에 '류 광 수가 어떻다!' 그러면 그때로부터 끝나는 겁니다.
아닙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선택해서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 것처럼,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내시겠다. 이게 성경에 하나님의 계획이요. 목적입니다. 소원이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일에 제자 키우려고 그러고, 그 다음에 뭐 확장 주교도 하고, 이 일에 우리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어 가려고 하고 이것이 바로 복음전파입니다. 그리고 세계 선교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또 중요한 말씀드리죠. 그러면 이것만해도 엄청난 역사가 나오는데 분명히 이렇게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뭐냐? 자기 백성을 어디에서?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과 연결이 되어야 돼요. 그러면 이제 누려야 될 것이 바로 뭐냐 하면요. 예수 그리스도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무도 해결하지 못하는 원죄에 빠진 여러분... 그 사단에 빠졌다는 문제가 이것은 도대체 기가 막히는 겁니다. 내 노력으로,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완전히 오직 하나님 이 외에는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이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게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의 손! 그러면 왜, 그렇게 하셨느냐? 여러분과 저를 원죄에서, 사단의 손아귀에서, 그 사단의 손아귀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원죄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이 직접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배하던 손을 거절하고 사단의 지배 속으로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지배 속에 빠져 나올 길이 인간에게는 없어요. 오직 한 분! 하나님 자신이 해 주셔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입니다. 그 오셔서 뭘 했느냐? 뭘 하나 해결해야 돼요. 그게 뭐냐하면요. 사단의 왕국으로 들어갔으니까! 왕의 직책을 가지고 사단의 왕국을 깨어야 돼요.
그 다음에 그 것이 바로 죄이기 때문에, 이 죄로 통해 저주가 왔으니까! 이 저주와 죄악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뭐냐?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오셔야 돼요. 그 다음에 이렇게 하는 배경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사단에 빠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야 돼요. 하나님 만날 길을 선지자 세 직분을 가지고 오셔야 돼요. 세 직분을 한 분이 가지고 오셨다! 이건 세상에는 아무도 없어요. 그 분이 한 분 누가?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한 분이 이 세 직분을 가지시고, 이 세 직분을 인간에게 적용시켜 나갈 수 있기 위해서 어디에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셔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십자가가 안 믿어지면, 하나님의 계획도 안 믿어집니다.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죽음의 사실이 안 믿어지면... 그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역사가 안 믿어지면, 성령이 여러분 지금 임재 하셔서 나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끌어 가시는 것이 안 믿어져요. 백 번, 천 번 그래도 이게 안 믿어집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고 이 사실을 믿으면, 그리고 이 사실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제 예수 그리스도 그러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분 아닙니까! 내 안에 영접하게 되는 순간에 성령으로 내 안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친히 내 안에 함께 계십니다. 고린도 전서 3장 16절입니다. 이걸 가지고 여러분과 저를 성전이라!
그래서 성전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계십니다. 앞으로 짖는 교회도 바로 이런 성전이 모델입니다. 우리가 큰 교회를 짓는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후손 만대에 하나님이 직접 오실 그리고 직접 오신 이 놀라운 축복을 우리 후손 만대에 우리 후손 자손들에게...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축복을 주시기 위한 보이는 기관으로 우리가 집을 짓는 것이지, 실제로는 여러분과 제게 실제로 뭡니까! 실제로 성령이 임하신 것으로 일이 이루어집니다.
이 사실이 된 자들이 모여서, 모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우리가 보이는 성전입니다. 이제 이 성전을 지어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없는 자들에게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 합니다. 전도의 삶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래서 아마 성전을 우리가 건축했다는 사건 이후에 성전을 건축했다고 그럴 때에 그런 생각도 해요. 우리가 이 대구를 살린다는 문제 뿐 아니고 정말 세계복음화에 세계복음화 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왜? 이러기 위해서 여러분과 저를 자기의 백성으로 먼저 선택했습니다. 이게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그때부터 뭐가 나오느냐?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자구나! 그래서 나온 게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붙잡고 여기에 조금만 우리가 누린다는 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누리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를 누리게 되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누린다는 원래의 개념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뭐냐? 하나님이 기도하게 되는 그 순간을 우리가 누리게 되는 사실과 연결되니까! 그때부터 일이 되어져요.
이번에 Remnant 집회에서 세계에 공부 잘 하는 사람들을 선택해 가지고 장학금을 전달했습니다. 누가 천만 원을 기탁을 했어요. 그 장학 위원으로 제가 또 같이 선발이 되어서 같이 이제 모여서 만나고 주는 과정에서, 미국에 가니까, 상당히 그 제도가 좋더라 구요.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에게 격려를 하기 위해서, 우리나라도 그런 게 있으면 참 좋겠다 싶어요. 공부 잘하는, 전국에 한 20% 정도가 여기 해당된다 그래요. 아주 그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그런데 그 대통령상을 받았는데, 그러니까 그 미국에 얼마나 많습니까! 대통령상을 받은 사람이... 미국에서 온 사람 중에 세 사람인가 네 사람 있었어요.
그 중에 한사람이 남자인데,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잘 할 수 있게 되었느냐?' 이러니까! 이야기가 너무 간단해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래요. 그러면서 뭔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 중학교, 고등학교, 이제 대학생인데... 중학교, 고등학교 때 너무 뭐 딴 생각나고 공부가 안되더랍니다. 안 되는데 그 Remnant 시간에 이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기도를 많이 한 것이 아니고, 이제 시간 들어가기 전에 한 2분, 3분! 그러니까 수업시작 전에 그 다음에 이제 개인적으로 공부할 때에 딱 앉아서 5분 동안! 이 그리스도 붙잡고 언약 붙잡고... 다른 기도 안 했데요. 기도하고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이상하게 막 집중이 되어서, 그 보면 대통령상을 받게 되는 그런 시간까지 갔습니다.
제가 새삼 이걸 말씀을 드리는 것은, 선택을 받았다. 다 준비해 놓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선택을 내가 뭘 누려라! 그럴 때에 뭘 이상한 것을 내가 결과를 더하실 것을 누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자체를 내가 누리게 되면, 평안이 먼저 옵니다. 그러면서 평안이 오면서 뭘 하느냐? 개인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더 잘 아시니까 필요한 것을 저절로 그냥 주시게 되어있어요. 그냥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자체를 먼저 누린다는 이 사실이 안 되고, 열리고 따라오는 부분을 먼저 잡으려고 애쓰는 겁니다. 이게 앞뒤가 바뀌었죠. 이걸 가지고 경상도 말로 '뒤꺼비가 되었다!' 그러는데 앞에 것이 뒤가 되고 뒤에 것이 앞이 되고...
오늘 여기에 오신 분들이요. 예수를 믿고 난 후에 막 어려움이 오고 이상한 것이 오니까! 왜? 나도 평안이 없고, 왜? 나도 가정에 해결해야 되고, 이런 것이 먼저 보여지게 되는 동안에는 불평이지! 다른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 축복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와 여러분을 세웠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만 이해되면 그것이 누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일이 이루어 진 것이 조금만 이해되면요.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너무 감사가! 이 자리만 아니고 조금만... 왜? 그래서 이 약속을 붙잡고 한번 상상해 보세요. 10년 후, 20년 후 어떻게 되겠어요. 조금씩 기도하면...
그래서 그 이번에 Remnant 집회에서 뭐냐하면, 기도를 많이 한다 생각하지 마라! 하루에 1분만해라! 워낙 애들이 기도 못하니까! 1분만 진짜 믿고 기도한다 그러면 10년 후 달라진다! 그랬습니다.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달라지는 겁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또 여러 학생들이 있는데, 그 중에 미래 지도자 훈련원에서 워낙 공부를 안 해 가지고 지금 미래 지도자 훈련까지, 말하자면 대안학교 아닙니까! 까지 왔다가 거기서 공부시키는 검정고시! 대학 검정고시 치고 해서 합격이 되어 가지고, 그리고 고신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우리 메시지 속에도 그런 말씀 드렸죠. 올 A학점을 받았어요. 와서 그 이야기거든요. 장학금을 받는 장소에서 어떻게 그렇게 되었느냐? 똑같은 이야기예요. 똑같은 이야기! 뭘 해달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미 엄청난 은혜를 이미 주셨고 받았습니다. 그 사실을 누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이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누려지는 것을 성경은 '누림이라!' 그랬습니다. 다 망하고 마음대로 사는 게 누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상한 우리 그 어떤 아줌마 한 분이 '밥도 안하고 마음대로 산다! 이래가지고 막 누림이다!' 그래가지고 한때 바람을 안 일으켰습니까! 그 지금 따로 모임하고 이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초기에 뭔가 여자 분들이 마음대로 '밥도 안 해주고 돌아 다녀도 괜찮다!' 이걸 누림이라고 착각하고... 돈을 바치니까! 돈이 좀 생기더라! 이게 아닙니다.
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참 나를 선택하신 이 축복의 역사! 바로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내가 지금 산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삶에 영원한 생명에 누구냐? 복 주실 분! 성령으로 지금 나를, 지금 나에게 아프다! 슬프다! 상관없이 성령이 함께 계셔서 지금 나를 인도하신다는 이 사실 조금만 깨닫게 되면 감사가 나옵니다. 받아 합시다. "아파도 성령이 인도하시고, 슬퍼도 성령이 인도하시고, 내가 어디 가든지 성령은 나와 함께 사실적으로 인도하신다!" 믿습니까! 다 된 것 아닙니까!
바로 그 성령께서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이 목표하신, 기어코 귀중한 축복! 뭐, 성전건축 정도가 아닙니다. 이제 그 성전 건축하는데 먼저 뭐냐? '하나님 돈 주셔야 성전 건축하죠!' 계속 자꾸 이런 방향으로 나오더라 구요. 그래서 그 일 위해서 뭘 내가 기도하려고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그렇게 나오니까! 이래가지고 또 명단을 펴서 '하나님 또 축복하셔서 돈도 잘 벌게 하시고...' 이렇게 자꾸 돌아가서 접어놓아 버렸습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문제의 Key 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과 제가 어떤 문제가 생겼다는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 딱 잡을 때에 먼저 내 개인적으로 오는 것이 뭐냐? 하늘에 평안입니다. 안식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모든 문제 해결자다! 믿어진다는 것이 아니고, 믿는다가 아니고 믿어집니다. 저절로... 우리 안에서 그분에 축복과 은혜를 붙잡고 누리면 누릴수록 내가 어쩌다가 이 자리에 섰느냐? '축하합니다!' 라는 말이 이해가 되어요. 은혜를 받았다! 이해가 돼요. 참 이 자리에 앉았다. 위대한 축복의 자리다. 이해가 되어요. 이게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멍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돌이켜 기본부터 하나님 앞에 '주여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기도도 또 엉뚱하게 '주여, 내가 이걸 알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지 말고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워낙 머리가 둔해 가지고 깨닫지를 못하니까! 이것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아니면 깨달을 수 없으니까!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말씀을 깨닫게 하는 계시에 정신을 내게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목표와 계획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나님이 은혜 주옵소서!' 딱 붙잡으면, 그때부터 여러분 환경과 상관없이 자연적으로 깊은 뭐가 나와요? 미소가 나옵니다.
나는 그 치유 사명자 대회 가서 내가 다른 건 나는 할 것 없어요. 이걸 조금 더 강조를 해 주고 싶어요. 왜? 너무 애들이 현실적으로 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운데 다른 방법이 없어요. 이걸 현실적으로 못 보면 그에게는 감사라는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어려운 세대! 뭐 눈만 뜨면 이상한 소리 나오고, 뭐 이상한 말이 나오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여러분과 제게 이 축복을 다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확인하는 만큼 우리에게 평안과 함께 주께서 여러분에게 기도하시는 데로... '기도하신다!' 그럴 때에 내 마음대로 아니거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서 말씀이 성취되는 현실적인 체험들이 이제부터 날마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셉의 의
마 1:18-25 / 김흥규 목사
부모가 선교사인 어떤 어린 소년이 미국에 있는 기숙사제 학교에 다녔습니다. 부모를 떠나 낯선 외국에서 처음 맞게 될 성탄절이 가까워져 올 때 기숙사 학감이 소년의 방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제일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이니?"하고 물었을 때, 소년은 자기 바로 옆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아버지의 사진을 쳐다보면서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가장 바라는 소원은 저기 사진 액자 속에 들어 있는 우리 아빠가 제 앞으로 뛰어 나오는 일이에요." 이 어린 아이의 소원이 꼭 인류의 소원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염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일을 이루어주셨다고 믿습니다. 성탄절이 바로 이러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날입니다.
대강절은 성탄절 전의 4주간을 가리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의 오심을 고대하는 절기입니다. 대강절이 시작되면서 거리에도 크리스마스의 열기가 가득해집니다. 대강절을 기점으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가지가지의 아름다운 장식들이 온통 빌딩과 거리를 누비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대강절 기간은 'decoration season,' 즉 '장식 절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샤핑 몰은 물론이고 일반 가정과 교회에서도 형형색색의 장식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장식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로, 아무리 아름답고 빛나는 장식물이라고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일시적입니다. 다시 말해 길어야 한 두 달 정도 장식을 할 뿐, 나무에 매달아 놓았던 금속조각이나 갖가지 자질구레한 장신구들, 전구 등은 결국 해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아무리 훌륭한 장식을 만든다고 해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적인 장식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성탄절 장식이 우리의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장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리에 넘쳐나는 장식물들을 차분히 살펴보면 한결같이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정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모두 상업성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탄절 대목을 놓치지 않고 물건 하나라도 더 팔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둔 장삿속 장식물들이 많습니다.
대강절 기간 동안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장식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의 신앙과는 상관없이 그저 거리의 들뜬 분위기 때문에 장식하는 것은 또 하나의 공해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장식이 우리의 믿음과 경건을 표현하는 장식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부의 장식을 하기 전에 우리 내부부터 멋지게 장식해야 합니다. 마음의 장식을 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의 깊은 의미를 되새기면서 먼저 우리의 마음을 아름답고 빛나게 장식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을 도대체 어떻게 장식해야 할까요? 어떤 재료로 장식할까요?
대강절 기간 동안 저는 시리즈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마음 장식하기'라는 똑같은 제목으로 4주 연속설교를 하려는 것입니다. 앞으로 사 주 동안 저는 네 가지의 마음 장식자료를 여러분에게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이번 주에는 '요셉의 의로움'이라는 장식품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립니다. 다음 주일에는 '마리아의 믿음'이라는 장식재료를, 셋째 주일에는 '목자들의 기쁨'이라는 장식재료를, 그리고 대강절 마지막 주일에는 '동방박사들의 섬김'이라는 장식품을 각각 소개해드릴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면서 마음 장식을 예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요셉이 가졌던 의로움(righteousness)으로 장식을 해보세요. 금년 크리스마스가 훨씬 더 의미 깊고 축복된 절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의 의로움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본문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18절에 보면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정혼'이라는 말은 '서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는 뜻입니다. 우리 한국의 '약혼'과 매우 비슷합니다. 유대 관습에 따르면 일단 정혼할 경우 두 사람은 정식 부부는 아니었지만 서로 책임을 져주어야 할 준부부로 인정이 됩니다. 다시 말해 유대 사회에서 정혼한 남녀는 비록 정식 결혼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부부로 인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20절에 보면 요셉의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문제는 요셉이 마리아와 더불어 동거하기도 전에 아이를 가졌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마리아의 잉태는 순전히 성령으로 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나 마리아나 서로 육체적인 접촉이 전혀 없던 차에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인 뉴스였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수태 소식은 요셉이나 마리아나 두 사람 모두에게 엄청난 일이었지만, 이 사건을 전하는 마태와 누가에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누가 복음 1-2장을 보면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마리아입니다. 요셉은 단지 이름만 언급되는 정도로 끝이 납니다. 오직 마리아가 예수님 수태의 핵심인물로 부각될 뿐입니다.
반면에 마태 복음 2장에서는 마리아가 아니라 요셉이 명실상부한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것도 요셉의 꿈속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모두 세 차례나 나타나 요셉이 해야 할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지시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 지시 사항을 하나도 어김없이 세 차례 그대로 실천하는 순종의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마태의 의도대로 요셉에게 초점을 맞추어 봅시다. 자기의 약혼녀가 동거하기도 전에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요셉에게 매우 불쾌하고 혼란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누구의 아기인지 자초지종을 모르는 상태에서 요셉의 의심과 분노는 매우 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19절을 보세요.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도대체 요셉이 의롭다는 사실과 몰래 마리아와의 관계를 정리한다는 사실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 걸까요? 자기의 아이가 아닌 남의 아이를 가진 자신의 약혼녀를 생각할 때 분한 마음이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에 대한 실망을 세상 사람들에게 다 발설하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몰래 관계를 끊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신중한 행동이 요셉의 의로움으로부터 왔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떤 성격의 의로움일까요?
요셉은 인간적인 분노나 실망 때문에 마리아와 헤어지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요셉의 종교적인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신명기 22: 23-24을 보십시오.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통간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읍 중에 있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구약의 율법대로라면 마리아는 돌로 맞아 죽어야 하는 중죄인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율법 조항이 요셉이 아무리 마리아를 사랑했다고 할지라도 마리아와 결합할 수 없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율법적인 분위기로 볼 때 요셉은 마리아를 용서하고 말고 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율법을 지키려는 요셉의 의로움은 "저를 [즉,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사실]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라는 말씀에서 더욱 빛을 냅니다. 율법대로라면 요셉은 마리아를 돌에 맞아 죽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매정한 율법만의 길을 택하지 않고 더 한 층 나아가 자비의 길을 택했습니다. 마리아의 임신한 사실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그저 몰래 약혼 관계를 정리하려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제 요셉의 의로움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요셉은 독실한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마리아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했습니다. 이것을 증명하는 길은 마리아와 헤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에게 더 큰 고통이나 사회적 모욕을 주지 않기 위하여 남몰래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으려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의 의로움이 한 편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에 대한 자비와 긍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엄격하게 말한다면, 요셉은 실상 구약의 율법을 어긴 사람입니다. 마리아를 재판에 넘겨 큰 수치를 당하게 만들고 급기야 돌에 맞아 죽게 해야 하는 율법 조항을 어겼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법대로 하는 것만이 반드시 의로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 법은 어겼지만 그 행위는 의롭게 역사에 기록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치하에서 그 법은 어겼지만 그 삶과 행위는 의롭고 윤리적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셉의 의로움은 율법적 행위 그 이상의 자비를 포함한 의로움이었습니다.
결국 요셉은 마리아를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하나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속에서 나타나 모든 비밀을 알려 주었을 때 그는 마침내 처녀 수태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뱃속에 가진 아이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 메시아로서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22절에 보면 요셉이 잠에서 깨어나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 왔습니다. 모든 오해가 풀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요셉의 의로움과 신중함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요셉이 불의한 사람이었더라면 마리아를 통한 예수님 탄생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마리아의 인격 자체가 크게 훼손됨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한 사람 요셉이 의로우니 하나님의 위대한 독생자가 처녀의 태속에서 자라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세 시대의 터키에 매우 가난해서 배고픈 사람이 어떤 마을의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빵 한 조각만 손에 달랑 쥐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기완자(meatballs)를 굽고 있는 식당 옆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요리하는 고기가 바로 코앞에 있어서 맛있는 냄새가 이 사나이를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참다 못한 사나이는 빵 한 조각을 그 고기완자 위에 올려놓고 열심히 냄새가 빵에 스며들게 했습니다. 그런 뒤 냄새가 묻은 빵을 입에 대고 막 먹기 시작할 때 화가 난 주인이 이 사나이를 덥석 잡아 재판관에게 데려 갔습니다. 나스레딘 호드자(Nasreddin Hodja)라는 재판관에게 주인이 가난한 남자를 고발했습니다. "재판관님, 이 녀석이 제 허락도 없이 우리 식당에서 요리하는 고기의 냄새를 훔쳤습니다. 냄새를 훔친 벌로 돈을 변상 받도록 해주십시오." 잠시 동안 생각한 호드자는 자기 품안에 있던 지갑을 꺼내서 식당 주인 앞에 흔들었습니다. "재판관님,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지금 나는 자네한테 저 사나이 대신에 냄새 값을 지불하고 있는 중이야. 돈 소리 들었지? 자네가 돈 소리를 들은 것이 꼭 저 사내가 자네 음식 냄새를 맡은 것에 합한 거야."
유명한 터키의 재판관 호드자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냄새까지도 돈을 받으려고 했다는 이야기처럼 이 세상에는 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버는 일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옳지 못한 방법으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세상 속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떤 자세를 가지고 주님을 맞으시겠습니까? 불의함입니까? 의로움입니까? 선택하십시오.
지붕이나 집 앞을 현란하게 장식하기 이전에 마음을 장식합시다. 어떤 장식품으로요? 요셉이 가졌던 의로움으로 장식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성탄절은 아주 뜻 있고 행복한 메리 크리스마스가 될 것입니다. 아멘.
나눔을 실천하는 성탄절입니까
마 1:18-25 / 이일기 목사
성탄절을 전후하여 연말까지 우리들은 가끔씩 알고 지내는 사람들끼리 선물들을 주고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어서 좋고 받아서 좋고 그래서 선물이란 게 좋은 겁니다.
여러분은 선물을 받아보신 적이 있으시죠? 선물을 받을 때의 기분, 전혀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받았을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 선물의 내용물이 값진 것이기에 기쁜 것이 아니라 선물에 담긴 사랑과 정성의 마음이 값진 것이기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오 헨리(henry, O 1862~1910, 본명 윌리엄 시드니 포터,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스버러 출생)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내용인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제임스 딜링햄(짐으로 부르기도 함)과 부인 델라가 서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선물을 주고받는 내용입니다.
가장인 22살의 짐과 그의 부인 델라는 생활이 너무나 어려워 궁핍함을 늘 면치 못하고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대단한 자랑거리를 각 각 하나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짐은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고급 금시계였고 델라는 아름다운 금발머리였습니다. 이들 부부는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두고 서로가 선물을 하나씩 하기로 마음에 정하고 무엇으로 선물을 할까 고민하다가 남편인 짐은 금시계를 팔아 부인의 긴 금발머리에 어울리는 머리핀을 샀고 아내 델라는 그 긴 금발머리를 잘라 남편의 낡은 시계 줄 대신 백금 시계 줄을 샀습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서로가 주고받고 보니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서로가 소중한 것들을 팔아 상대방을 위하여 샀기 때문에 그들은 그날 저녁을 행복하게 먹게 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성도들은 모두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어떤 선물 말입니까? 구원의 은혜 말입니다.
엡 02:0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습니다. 구원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지요. 바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선물 이 선물되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이 세상에 보내주셨으니 우리는 그 은혜에 감격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성탄절은 어떻게 유래하였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일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입니다만(복음서) 그러나 예수님이 약 33년 동안 사시면서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였거나 기념할 것을 암시한 적은 한 번도 없으십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성탄절을 말한 곳은 성경에 없고 초대교회에서도 예수님의 성탄절을 한 번도 지키지 않았지요. 그렇다면 성경도 말하지 않고 예수님도 말씀하시지 않았으며 사도들도 가르치지 않고 초대교회도 지키지 아니한 성탄절을 왜 오늘 교회가 지키는가 라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유월절이나 오순절, 장막절처럼 명하신 절기가 아님에도 언제부터인가 기독교를 대표하는 절기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아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탄절의 유래를 살펴보는 것이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 등 여러 분야의 이단으로부터의 공세에서 답변할 근거를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실제 12월 25일 이 날에 분명히 태어나셨느냐고 물으면 아니다 라고 밖에 답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킵니까? 가장 유력한 12월 25일설은 고대 로마에서 지키던 동지 날을 채택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이교도들은 동지절(冬至節, 12월 24일∼1월 6일)을 하나의 대축제적인 명절로 지키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밤이 점점 길어지던 날이 끝나고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여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오르는 것을 희망으로 알고 기념하였습니다.
지금도 안식교에서는 12월 25일의 성탄절을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이교도에서 동지절의 태양 탄생일인 12월 25일을 도입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이런 동지에 관한 풍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각 국마다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12월 22일을 동지라 하여 팥죽을 쑤어 문설주에 바르고 먹는 등 악귀를 물리치려는 척사(斥邪)의 관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성탄절과 관련 된 전통 관습들은 이교도들의 한겨울에 벌이던 태양의식이 그리스도 탄생 기념과 합쳐서 생겨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고대 교회의 로마 주교들도 기독교가 이교도들을 정복했다는 의미에서 이교의 축제일인 동지절 중의 한 날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채택하여 336년에 콘스탄틴 황제가 성탄절로 기념하고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로마가 국교를 기독교로 받아들인 이후에 이교도들의 동지절을 성탄절로 선포하고 로마의 전국적인 휴일로 지키게 된 이 날을 교회가 교리적으로 지키기 시작하면서 그 후 동방교회로 퍼져나가 콘스탄티노플리스(379년), 갑바도기아(382년) 등에서 지키기 시작하여 현재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지키고 있는 성탄절은 미국적 문화를 그대로 본받은 것으로서 명칭도 그리스도를 예배한다는 Christ와 mass라는 말이 합해서 Christmas가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을 예고하고 가르치며 느끼고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막상 그 분이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요 01:11).
그러나 예수님의 오심을 직접적으로 준비했던 두 사람이 있으니 그들은 요셉과 마리아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정혼한 관계였는데 성경에서의 정혼이란 우리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약혼과 결혼의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된 개념입니다.
남녀가 정혼하면 그것이 법적인 부부로 인정이 되나 부부생활은 하지 않습니다. 부부생활은 정혼기간이 끝나고 난 뒤 신랑이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야 시작되는데 정혼하고 난 이후에 신랑의 능력과 여건이 마련되면 3개월 혹 1년 혹 1년이 넘어서 데리러 갑니다.
그리고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갈 때는 일반적으로 예고를 하지 않는다고 하죠. 그러므로 정혼한 이후에 신부는 신랑이 언제 데리러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풍습이 성경의 열 처녀 비유에(마 25장) 나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정혼한 사이로 법적으로는 남편과 아내였지만 부부생활은 없는 기간이었습니다. 아직도 요셉은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혼한 마리아가 요셉과 상관없이 잉태를 하게 되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같이 성경을 읽겠습니다.
마 0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정혼한 아내가 약혼자와 상관없이 잉태하였다면 율법에 의해서 여자는 돌에 맞아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무서운 율법사회에서 요셉에게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요셉은 냉철하게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와 정혼한 여인이 자신과 상관없이 잉태를 했기 때문에 조용히 문제를 처리하고자 구상을 하고 있는 것이죠. 정혼을 파기하려는 구상인데 수습이 잘 되면 마리아에게는 다행이겠지만 잘 못되면 목숨을 잃을 위기가 오게 되는 만큼 요셉이나 마리아에게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하니라.
이 말은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 아닙니까? 천사가 와서 이 말을 할 때 마리아는 어안이 없어서 놀랐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눅 0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그러나 이내 마리아는 이 놀라운 일이 자신의 행위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성령님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사실을 알고 심경을 고백합니다
눅 01: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요셉과 마리아는 제각기 천사의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으며 이어서 요셉은 마리아를 평안하게 집으로 데리고 옵니다.
요셉이 천사의 말을 믿고 순종하는 것도, 마리아가 잉태된 것도 다 성령님의 은혜에 의해 되어진 일이요 성령님께서 믿게 하시는 사역입니다.
성령님께서 요셉의 편견과 고집과 결단을 깨뜨리셨으며 마리아의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공포를 이기게 하신 분도 마리아의 의지가 아니라 바로 성령님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왕이나 선지자들이나 바리새인 같은 입으로만 요란했던 그런 사람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의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도 요셉과 마리아를 주목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고통을 알지 못했지만 천사가 그들에게 역사함으로 인해 요셉과 마리아는 고독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3. 이제 성탄절은 나눔을 실천하는 절기이어야 합니다.
요 0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선물로, 속죄의 제물로 주셨으며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사실을 깨닫고 로마서에서 이러한 반문을 하고 있습니다.
롬 0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은 예수님까지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면 그 밖의 모든 것 즉 예를 들면 지혜, 능력, 건강, 물질, 성공, 재능, 행복 등을 아낌없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지요. 그러면 성탄절은 어떤 날일까요?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 세상을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지상 최대의 선물을 주신 날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탄절을 어떻게 보내야 하며 성탄절의 참 된 정신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성탄절의 참 된 정신은 나눔에 있습니다. 우리끼리 잘 먹고 마시고 즐기고 기뻐하라고 성탄절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대가로서 예수님을 주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성탄절은 값으로는 환산할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을 주심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이 정신이 오늘의 우리 성탄절에도 회복되어야 하고 살아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맞이한 성탄절은 우리의 가장 값진 것을 나누는 절기임을 깨닫고 먼저 내가 가진 예수님의 생명을 이웃에게 나누어주십시오. 이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첫 성탄절 때 천사는 기쁜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눅 0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예수 생명, 예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성탄절의 참 된 나눔의 정신입니다. 또한 사랑도 나누고, 기쁨도 나누고, 은혜도 나누고, 물질도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정신이 들어가는 곳에는 반드시 나눔이 있기 마련입니다. 예루살렘교회를 보십시오.
예수님 정신이 가득 베어 있었기에 나눔을 실천하는 공동체로서의 놀라운 본을 보일 수가 있었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나누어주십시오. 내 가진 것을 움켜쥐고만 있지 말고 말입니다. 사람을 나누고, 눈물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고 외로움도 함께 나누세요. 성탄절의 참 된 정신은 우리 모두가 나눔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눔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어 주신 일인데 이 시간 나는 진정 무엇을 이웃과 함께 나누길 원합니까? 내가 나눌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길 원합니다.
결론으로 우리도 성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영국의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Fleming, Alexander,1881.8.6~1955.3.11]에 대해 들어보셨지요. 노벨 생리, 의학상(1945)을 수상한 세균학자입니다.
특별히 페니실린을 발견하여 인류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인데 하루는 사람들이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박사님께서 지금까지 발견한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4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페니실린일 것이라고 기대를 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이런 대답을 하였습니다.
나의 발견 중 가장 위대한 발견은 내가 죄인이요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우리 함께 성탄을 축하하며 경배드리는 날 이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란 사실, 나의 주님이란 사실을 아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정도에 머물 것이 아니라 나의 생명 되신 예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02장에 보면 동방박사들이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와서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의 경배는 의례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정성을 다한 경배였습니다. 그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라는 아주 값비싼 예물을 드리면서 경배했습니다(마 02:11).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카드, 선물, 트리, 루돌프 사슴, 산타클로스가 아닙니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세요. 예수님께 관심을 집중하세요. 예수님이 없는 성탄절은 불행이기에 오늘 우리의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다시 찾아오시고 우리는 영접하는 그러한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금 영적인 사건의 재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의로운 요셉이 맞은 첫 번 크리스마스
마 1:18-25 / 성홍모 목사
우리 주님이 탄생하신 날입니다. 12월 25일을 성탄절, 그리스도의 나신 날로 정한 사람은 주후 200년의 3세기 초엽에 로마의 감독이었다고 알려진 [히폴리투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과연 어느 날에 탄생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에서는 아무리 연구하고 계산해보고 찾아보아도 어느 달에 나셨는지, 어느 날에 나셨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은 정확하게 언제입니까? 날마다 365일 모든 날에 열려있습니다. 호적하던 때를 생각해보거나, 하늘에 별이 나타난 때를 찾아보거나, 천사가 나타난 때를 연구해보아도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 예수님의 탄생하신 날이었습니다. 로마의 히폴리투스 감독은 예수님이 수태된 때로부터 죽으실 때까지는 33년이라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은 몰라도, 죽으신 날은 정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유대력으로 니산월 14일이었으며 만월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태음력을 사용하기에 양력과는 맞지 않는데, 니산월은 그들의 민간력으로는 7월이었지만 양력으로는 3월과 4월에 걸쳐 있습니다. 히폴리투스 감독은 계산에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유대력의 니산월 14일은 로마력으로 3월25일이었는데, 예수님이 죽으신 날과 마리아가 임신한 날,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받은 날이 같은 날이라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없었던 날은 없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뱃속에 있는 9달을 계산하여 12월 25일이라고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동방 교회는 1월 6일을 지키느냐 하고 하면 동방교회는 니산월 14일이, 그들이 사용한 율리우스력에 따라 4월 6일이었기에 9개월을 합산하여 주니, 1월 6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방교회는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우리가 지키는 주현절입니다. 주현절은 동방교회는 성탄절로 지키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날이라고 말하고, 서방교회들은 동방박사들의 예방을 받은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는 몰라도 교회가 고심하고, 애쓴 흔적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오늘은 의로운 사람, 요셉이 맞이한 첫 번 크리스마스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양부가 된 요셉은 다윗의 가문이었고, 지금 나사렛에서 살지만 목수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특별한 사람도 아니었고, 존귀한 사람도 아니요, 유력한 인사도 아니었습니다. 아주 평범한 사람으로 하루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를 쓰면서 의롭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리아와 정혼한 사이였고, 이제 양가 부모님들의 허락만 떨어지면 결혼식을 올리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결혼식을 올리고 마리아와 함께 살면서 꿈을 키우고, 사랑을 더해가면서 힘있게 살아가려고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정혼한 마리아가 친척집에 다녀온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의 제사장 사가랴 집에 가서 그의 부인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과 같이 교통이 발달된 시대가 아니기에 힘들게 한번 가면 여러 날 묵어 오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마리아는 3개월간 머물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유대에서 돌아온 마리아의 몸이 좀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와 정혼한 마리아가 전과 같지 않고 이상합니다. 마리아의 배가 불러오는 것을 요셉이 눈치채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잘 먹어서 살이 찌는 것이라고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분명히 임신하였으니 배가 불러오는 것이요, 이것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혼전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임신하였다고 발설하고 다니면 마리아는 마을의 여러 사람들에게 맞아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혼전에 임신한 것이 신랑 될 사람과 관계를 가진 것이라고 하면 결혼하면 됩니다. 그러나 신랑 될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문제가 나도 심각해집니다.
요셉이 생각해보니 기가 막힙니다. 결혼식을 올린 것도 아닌데, 그렇게 정숙하고 믿음이 좋은 처녀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자신의 여인, 자기와 평생을 함께 길을 가자고 정혼한 여인, 나사렛에서 가장 현숙한 여인인데, 자기와 동침한 사실도 없는데 자기 여자의 몸에 아기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고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배신감에 사로잡혀 견딜 수 없었습니다. 유대의 법대로 하면 마리아는 어느 날 어디에서 남자와 관계를 가졌는지 임신시킨 남자를 대야 합니다. 이 때 마리아가 자기와 정혼한 마리아가 요셉이라고 지목하였는데, 자기가 아니라고 하면 마리아는 사실 여부를 따져보아 마리아의 과실로 드러나면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성윤리 하나만은 정말 철저하여 윤락여성이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시는 일에 있어서 순결한 처녀 마리아와 의로운 사람 요셉이라는 사람을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리아만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이 말없이 지켜주고 보호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이 생각합니다. 조용히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으면 그도 어디 가서 살고 자기도 남을 미워하거나 정죄할 것도 없습니다. 정말 요셉은 오늘의 가치관으로 보아도 존경받을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정말 성실한 사람이요, 신앙이 좋은 여성이었는데, 이렇게 되기까지는 말못할 사연이 있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마리아가 임신하였다고 떠들고 다닐 것도 아니고, 드러내지 말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놓고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말을 꺼내며, 무엇이라고 말해야 상처를 받지 않을 것인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밤에 천사가 요셉에게 현몽하였습니다. 꿈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마리아를 통해서 나실 아기의 이름이 예수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이며 "그는 자기 백성을 저희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인류의 구원자로 태어나시는 것을 알아들었습니다.
요셉은 이제 자기 부인에게서 태어나게될 아이는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이시며, 그는 하나님이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대사건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이사야 7:14에 예언하신 것처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그 말을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사8:10에 나타나는 말인데 그리스도의 사명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인류가 범죄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나 원수 되었을 때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류는 하나님의 품에 돌아오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가 낳은 아들로 소유하고 계시며, 우리도 역시 아들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고 보니, 하나님은 예수님을 아들로,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함께 공유하고 보니,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포드라는 분은 "하나님의 선물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 그것은 우리를 통해 당신 자신을 실현하시고 사물에 위압당하고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의 사고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Calculative thinking" 라고 해서 이것은 계산적이고 타산적이고 추리적인 생각입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사고입니다. 또 하나는 "Inspired thinking"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영감적인 직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서부터 오는 영적인 직감입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들을 계산적이고, 타산적인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영감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잠에 깨었습니다. 즉시 일어나 서둘러 주의 사자의 명을 따르고 있습니다. 서둘러 잔치하고,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아내를 데려왔지만,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자마자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집안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을 잘 사용하지 않는 가문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에서 잘 사용하는 이름이 예수 즉 여호수아였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은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듣기만 하여도 감사하고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설교 시간마다 예수만 외치고 예수님의 이름만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낮고 천한 마구간에 태어나신 것을 생각해보면 송구스럽고 민망한 마음이 들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시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은혜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시려고 친히 인간이 되셨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시고, 잃어버린 동전 하나 버리시지 않고 찾아 나서시고,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영혼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려고 주님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결혼식장에서 기뻐하는 신랑 신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딸을 키워 시집보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섭섭함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나신 날이라고 하여 성탄절을 마냥 즐거운 축제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날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스러운 보좌를 버리고 인간으로 좇아내는 아픔이 있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일이요 나에게 맡겨진 일이라고 하면 무엇이든지 순종하고 따라나가야 한다는 뜻에서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인간이 되시는 숭고한 헌신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사랑이 있기까지 말없이 헌신한 마리아와 요셉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을 사용하시느냐 하면 마리아와 같이 헌신적인 사람, 순종하는 사람, 자기의 소유를 말없이 내어놓는 사람, 요셉같이 의로운 사람, 성실한 사람 매사에 신중한 사람,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사용하셔서 인간을 구원하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시는 사람을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두고두고 요긴하게 그리고 때마다 일마다 쓰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눈높이를 낮추시는 하나님
마 1:18-25 / 김태환 목사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쓰면서 매우 의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 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 이유를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마태는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하나님의 오랜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자기 동족(同族) 유대인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모든 찬송가가 다 좋지만,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찬송이 몇 개 있습니다. 저는「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318장)」 이 찬송을 좋아합니다. 특히 이 찬송 2절 가사는 부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간절히 오라고 부르실 때에 우리는 지체하랴. 주님의 은혜를 왜 아니 받고 못 들은 체 하려나.”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그리고「저 장미꽃 위에 이슬(499장)」이 찬송도 좋아합니다. 이 찬송가는 3절 가사가 좋습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또「아침 해가 돋을 때(358장)」이 찬송도 좋습니다. “아침 해가 돋을 때 만물 신선하여라. 나도 세상 지낼 때 햇빛되게 하소서. 새로 오는 광음을 보람 있게 보내고, 주의 일을 행할 때 햇빛되게 하소서. 한번 가고 안 오는 빠른 광음 지날 때, 귀한 시간 바쳐서 햇빛되게 하소서. 밤낮 주를 위하여 몸과 맘을 드리고, 주의 사랑 나타내 햇빛되게 하소서.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 않고서, 어둔 세상 지낼 때 햇빛되게 하소서.” 여러분도, 이 찬송 좋아합니까? 그리고 또 좋아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248장)」입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어둡던 이 땅이 밝아 오네.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니, 시온의 영광이 비쳐오네. 보아라. 광야에 화초가 피고, 말랐던 시냇물 흘러 오네. 이 산과 저 산이 마주쳐 울려, 주 예수 은총을 찬송하네.”
특히 저는 이 찬송 2절 가사를 좋아합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네. 오래 전 선지자 꿈꾸던 복을, 만민이 다 같이 누리겠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신다!” “메시야가 오신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다(이사야 11:1)!” 그 선지자들의 꿈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모든 민족, 모든 족속, 모든 열방(列邦)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마태가 오늘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를 부른다면, 마태도 아마 248장 2절 가사를 제일 좋아할 것입니다.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그 약속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당연히 요셉이라는 청년입니다. 마태가 여기서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요셉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천사의 음성을 통해서 다시 확인되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Joseph son of David),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1:20).” 그리고 요셉이란 사람을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합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a righteous man)이었다고 합니다(19절). 이 말 속에 많은 내용이 함축(含蓄)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착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요셉이 올바른 일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좀 더 신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요셉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이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지 않았겠습니까? 존중할 뿐만 아니라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겠습니까?
현대어 성경에서는 이 말씀을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은 원칙대로만 사는 사람이었다.”고 번역했습니다. 원칙대로만 한다면 요셉은 약혼자 마리아와 파혼(破婚)을 해야 합니다. 자기는 마리아와 같이 잠을 잔 일도 없고, 성(性) 관계도 가진 일이 없었는데, 마리아의 배가 불러 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 때까지 요셉에게 말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누가 마리아를 비난(非難)할 수 있겠습니까? 아직 어린 나이에, 그녀에게 닥친 그 엄청난 일들을 어떻게 소화하고 받아들일 수 있단 말입니까? 글쎄, 이게 말이나 됩니까? 꿈인지, 생시인지, 마리아는 천사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누가복음은 마리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고, 마태복음은 요셉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도 흥미있는 일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누가복음 1:28).” 마리아는 이 인사부터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천사의 말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마리아여, 무서워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마리아는 천사가 하는 말을 다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뭐,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位)를 그에게 주고 말고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네가 수태(受胎)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하는 말만 크고 뚜렷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리아가 대뜸하는 말이 이 말 아니었습니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천사의 말을 정리하면 요점은 이런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것이다. 지금 성령의 능력이 너를 덮고 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는 것이다.”
천사가 계속해서 종알종알 말합니다. “네 친척 중에 엘리사벳이라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 그 사람이 아들을 낳을 걸 낳았느냐? 그렇게 나이가 많은데도 아들을 낳지 않았느냐? 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아들을 낳게 된 것이다. 너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누가복음 1:36-37).”
이 순간에 마리아의 믿음이 빛을 발합니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 그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은 그냥 읽고 지나갈 말씀이 아닙니다. 참 믿음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자기 이성(理性)과 지성(知性)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자기 경험(經驗)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에 대하여 그렇게 배우면서도 결코 믿음이 무엇인지 그 본질(本質)을 모르고 자꾸 믿음을 설명(說明)하려고 합니다. 믿음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그랬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한복음 20:25).” 사람들이 모두 그렇습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봐야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나서 사실을 사실이라고 믿는 이것은 당연한 일이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당연할 것이 아니라 이해도 되지 않고 설명도 되지 않는 일을 믿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를 내리지 않았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像)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證據)니, 선진(先進)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브리서 11:1-2).”
그렇다고 여기서 우리가 “아, 마리아는 참 믿음이 좋은 여자였구나! 나도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하겠구나!” 하고 지나가면 안 됩니다. 우리는 비록 성경에 나와 있지 않지만, 마리아의 고통과 아픔을 생각하고 함께 느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리아의 배가 점점 부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감추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감출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곧 약혼자 요셉도 이 사실을 알게 될텐데, 요셉에게 뭘,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나는 성령으로 아기를 가진 것이니까 나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하겠습니까? 나는 지금 하나님의 아기를 가진 것이니까 나를 이해해 달라고 하겠습니까?
다시 요셉에게로 말을 돌리겠습니다. 그는 갈릴리 나사렛에 살고 있었던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윗 왕가(王家)의 후손이었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특별한 대접을 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그 마을의 가난한 목수에 불과했습니다. 추측컨대, 요셉은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어쩌다가 나사렛으로 이사 와서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요셉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유일한 단서(端緖)는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원칙(原則)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결혼하기 전에 남자와 여자가 데이트 하는 관습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만, 그 때는 약혼하고 1년 간의 유예(猶豫) 기간을 두었습니다. 이 때는 서로에게 정결(貞潔)의 의무가 주어졌습니다. 이 의무를 지키지 못하면 파혼은 물론이고, 부정(不貞)한 사람은 돌로 맞아 죽는 혹독한 대가를 치뤄야 했습니다(신명기 22:23-24). 어느날 요셉은 마리아를 만납니다. 그 전부터 마리아의 신상(身上)에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요셉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것을 묻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마리아는 자기가 사랑하는 약혼자 요셉에게 그 사실을 어떻게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원칙대로 처리하는 사람이었던 요셉은 마리아와 파혼(破婚)을 하려고 했습니다. 19-20절 말씀을 NIV 성경에서 보면 그 뜻이 잘 나와 있습니다. “Joseph her husband was a righteous man and did not want to expose her to public disgrace, he had in mind to divorce her quietly.” 그 말대로, 요셉은 조용히 마리아와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요셉은 마리아를 염려합니다. 이 일이 커지면 마리아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그러면서 당하게 될 수치(disgrace)를 어떻게 감당할른지, 마리아가 당할 고통과 아픔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정말 멋있는 사람입니다. 시집 안간 자매들은 이런 요셉 같은 남가 있으면 더 볼 것 없이 결혼하십시오. 결코 후회 안 합니다. 그런데 요셉 같은 청년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셉이 원칙대로 하는 사람이었다고 해서 그를 율법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그를 부르든지 상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는 다릅니다. 바리새인들이야 말로 철저한 원칙주의자들이요,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을 지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 희생되든 상관 없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생명일지라도 그들은 율법만 지킬 수 있다면 상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매들은 이런 사람들을 만나거든 아무리 신앙이 좋게 보여도 결혼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과 명예를 끝까지 지켜주려고 하는 요셉의 사람됨을 보십시오.
그런 요셉에게 주의 사자(使者)가 꿈에 나타났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20-21절).” 또 주의 사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되어지고 있는 일들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하는 것이다. 성경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제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24-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꿈에서 깬 요셉을 상상해 보십시오. “흠, 마리아를 데려오라고?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아기 이름을 예수라고 하란 말이지……” 놀라운 것은 요셉이 주의 사자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지켜왔던 원칙을 스스로 깨뜨리고 주의 사자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요셉도 자기 이성과 지성과 경험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이야기를 통해 마태가 정작 하고 싶었던 것은 그렇게 해서 태어난 예수라는 아기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두 말을 합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출애굽기 3장에 있는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에 이르려 하노라……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애굽기 3:7-10).” 예전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내려 오셨습니다(had come down).” 그러나 그 때는 모세를 사용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죄로부터 고통 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다시 그 자신이 직접 내려 오셨습니다. 죄로 인한 인간의 고통을 친히 아시기 위해서 높고 높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우리가 사는 이 땅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요한복음 1:14).” 하나님께서 그의 거처(dwelling)을 우리 가운데로 옮기셨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와 함께 33년 간을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눈높이를 우리 수준에 맞추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교육학으로 유명한 피바디 교육대학(George Peabody College for Teachers)이 있습니다. 피바디 선생이 젊었을 때 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을 담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교과 계획에 따라 반 아이들에게 박물관을 구경시켜 줄 때가 되었습니다. 피바디 선생은 반 아이들에게 유물에 대해서 설명해주려면 미리 알아두어야 했기에 그 전날 사전 답사를 하였습니다. 하루종일 앉은뱅이처럼 쭈그린 채 박물관을 꼼꼼히 살폈습니다. 그렇게 메모를 하는 피바디 선생을 보고 박물관 직원은 그가 정말 앉은 뱅이인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나갈 때 보니까 멀쩡하게 걸어 나가거든요. 이를 보고 깜짝 놀란 직원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앉은뱅이인줄 알았습니다. 저는 선생님처럼 그렇게 무릎을 꿇고 다니면서 유물을 보시는 분은 처음 보았습니다." 이 말에 피바디 선생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일 우리 반 아이들을 이곳에 데려와 유물을 구경시켜 주려고 하는데, 우리 반 아이들은 어려서 키가 다 작습니다. 그래서 우리 반 아이들이 바라보는 그 눈높이에서 유물을 보았다가 아이들에게 설명해주려고 합니다.”
상대방을 이해(理解)하려고 하면 상대방에게 눈높이를 맞추어야 합니다. “이해하다”라는 뜻의 ‘understand” 는 “under(아래)” 와 “stand(서다)”라는 말의 합성어(合成語)라고 합니다. 그럴 듯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시려고 그렇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사실은 예수님에게 요셉의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그는 동정녀(童貞女, virgin)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그는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타락한 인간성(人間性)을 가져서는 안 되겠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가 그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를 자기 아들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 아이를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로 받아들였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아이를 통해서 몰락한 다윗 왕가(王家)를 일으키신다는 믿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 아이가 온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말씀의 초점을 여러분에게 돌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셨다는 사실은 죄로 인한 우리 인간성의 타락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최초로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야말로 여러분과 저의 인생에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귀중한 선물(the most precious gift)인 것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축복인 것을 믿으십시오.
준비된 탄생
마 1:18-25 / 박봉수 목사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성경 두 곳에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이고 다른 하나는 누가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두 기록은 관점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족보상의 아버지 요셉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데 비해서,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담겨져 있는 마태복음을 살펴보면 특별히 1:1-17까지 족보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언젠가 막 예수를 믿고 은혜의 생활을 시작한 분이 농담처럼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큰 맘 먹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을 보니까 ‘누가 누구를 낳고, 또 낳고, 또 낳고...’ 무슨 산부인과 기록 같더라는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재미도 없고 그래서 성경 읽기를 포기할까도 생각했던 적이 있었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말은 족보라고 하지만 모든 기록이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14대씩 세 번 그러니까 42대에 걸쳐 긴 세월 동안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것만 기록되어있습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기에 그것도 신약성경 제일 처음에 기록해 두었을까요? 이 기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오늘 본문 예수님의 탄생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위해 그 많은 탄생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 1장의 키 워드는 “낳다” 즉 “탄생”입니다. 수많은 탄생이 있었지만 그 많은 탄생은 단 하나의 탄생을 위한 준비였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탄생 그 하나를 위한 긴 준비의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와 보면 언뜻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요셉을 설득하시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인간으로 보내시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생각하셨습니다. 여인의 몸을 빌려서 성령으로 잉태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으로 마리아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가문에서 요셉을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을 했는데 결혼하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을 해야 했습니다. 당시 아내와 정혼한 뒤에 결혼 초야에 처녀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 내치는 것은 물론이고 죽여도 상관없을 정도로 법이 지엄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결혼 전에 임신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셉을 설득하시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요셉에게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이 그 계획 하에 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이 그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아기 예수가 태어나시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에도 친히 많은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정말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치밀하게 준비하셔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또한 아기 예수 탄생 당시에도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도록 철저하게 준비하셔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의 탄생은 갑작스런 일이 아니고, 즉흥적인 일이 아니고,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바로 준비된 탄생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준비하셨을까요?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오랜 세월 이 일을 준비하셨을까요? 왜 그렇게 정성들여 준비하셨을까요?
첫째, 우리를 구원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죄인은 반드시 죄 값으로 죽어야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죄인이라도 벌하실 수 없습니다. 죄인을 벌하실 수도 그냥 용서하실 수도 없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딜레마입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해결책이 바로 이것입니다. 외아들 예수를 인간이 되게 하셔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가 탄생하신 것입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A. Kierkegaard)는 이 세상의 종교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는 “사람은 신이다”(Man is God)라고 주장하는 종교입니다. 불교와 인도의 종교들과 같은 동양의 대부분의 종교가 이렇게 주장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이고, 또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범신론입니다. 사람의 간절한 소원일 수는 있으나 사실은 아닙니다.
둘은 “신이 신이다”(God is God)라고 주장하는 종교입니다. 대표적으로 이슬람교와 유대교와 같은 중동지방의 종교가 이렇게 주장합니다. 너무도 당연한 진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다면 인간은 이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할텐데 그럴 수 없으니 인간에게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 셋은 “신이 사람이다”(God is Man)라고 주장하는 종교입니다. 바로 우리 기독교가 이렇게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분이 예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바로 그 분이 아기 예수십니다. 주님이 이 땅에 탄생하신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오직 하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 탄생의 핵심 메시지는 저와 여러분의 구원입니다.
둘째,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 3:16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기 예수의 탄생은 가장 결정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수필 중의 한 토막이 생각납니다.
일찍 남편을 잃고 홀로 아들 둘을 키우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남의 식당일을 하면서 고된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겨우 셋방을 마련해서 먹는 일까지는 해결할 수 있었지만 아이들 공부시키는 데는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아이들 옷도 책도 제대로 사주지 못하고 심지어 점심 급식비도 줄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이 착하게 잘 자랐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굿굿하게 공부해서 둘 다 대학까지 마치고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 중 하나가 어머니의 그 사랑을 마음 깊이 감사하며 수필을 썼습니다.
초등학교 때 엄마가 하루 500원을 주시면 형하고 급식 대신 컵라면 한 개를 사서 점심을 때우곤 했답니다. 고생하시는 어머니 생신이 다가오자 가진 것은 없고 어떻게라도 어머니 생신을 축하는 해 드려야겠고... 그래서 형제가 점심을 굶고 그 돈을 모아 생일 케익을 준비하기로 했답니다. 하루, 이틀, 열흘 남짓을 굶고 생일 케익과 장미 한 송이를 준비했답니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그 생일 케익을 받아 드시고 한 없이 우셨답니다.
그리고 그 수필에 이렇게 썼습니다. “열흘을 굶어 준비한다고 어머니의 그 희생을 어찌 갚을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의 그 크신 사랑 어찌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어찌 다 깨달을 것이며 어찌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때문에 당신의 외아들을 아낌없이 버리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픔을 참으시면서 그토록 오래 아들을 버리실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이 바로 아기 예수의 탄생입니다. 이 성탄을 보내며 “내가 너를 사랑한다!” 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그 크신 사랑 어찌 다 갚으리요” 고백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어떻게 준비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 탄생을 위해 준비하신 구체적인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다시금 뜨겁게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첫째,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요셉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2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찍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하신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대표적으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즉 사 7:14절 말씀을 예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가 잉태하게 될 것인데 바로 그 처녀가 지금 네가 정혼한 마리아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이미 오래 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일이 지금 네 여자를 통해서 이루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요셉은 이 예언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주님은 오래 전부터 말씀으로 준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요셉은 그 준비된 말씀을 통해서 지금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알았습니다. 준비된 말씀의 안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요한 칼빈은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이 성경 안에 다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이고,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등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성경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도 말씀으로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답답하십니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십니까? 말씀 앞으로 나가십시오.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기도 하며 말씀에 문을 두드려보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예비하신 길이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시 1:2절에 보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갈 길을 찾기 때문입니다. 실족하지 않고 가야할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복이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성령으로
오늘 본문 2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천사가 요셉에게 되어진 일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한 상태에서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벌써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너무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셉이 문제를 삼으면 마리아는 더 이상 살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어서 이 사실을 은밀히 덮고 조용히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으려 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었겠습니까?
이 때 천사가 나타나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마리아가 잉태하게 된 것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눅 1:35에 보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잉태될 과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눅 1:34절에 마리아가 천사에게 묻습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그렇습니다. 인간으로 불가능한 일을 성령으로는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의 성령으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준비하셨습니다.
어떤 분이 솔직하게 고백하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자기는 다른 것을 구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성령만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필요한 것은 따로 있었는데 성령 받고 전도만 하게 되고, 성령 받고 교회 봉사만 하게 되더랍니다.
그래서 야속한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성령은 적당히 주셔도 되니까 제 아이 문제부터 해결해 주십시오. 돈부터 많이 벌게 해 주시고, 건강부터 신경 좀 써주십시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이 다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우리에게 성령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눅 11:9-10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들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13절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자식이 무엇을 구하든지 그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먼저 가장 좋은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은 성령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입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 힘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가능케 해 주십니다.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준비시켜주십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성령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도 충만히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요셉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준비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24절을 보면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넣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말씀대로 순종하여서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이루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순종하여 하나님의 귀한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메시야의 아버지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대로 순종하며 나가는 사람들 그들이 주님의 귀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귀한 역사에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귀한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놀라운 사랑의 기적
마 1:18-25 / 이삼규 목사
미국 워싱턴대학의 토머스 홈스 교수가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에 변화를 가져오는 때를 조사했더니 가장 큰 변화가 오는 것은 배우자가 죽었을 때였습니다. 이 경우를 100으로 하고 그 밖의 다른 경우들을 점수화했는데 이혼의 경우가 73점, 임신했을 때가 40점, 집을 옮기거나 고쳤을 때가 25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크리스마스가 무려 12점이나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매년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는 마침 연말과 겹쳐 무엇인가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기 쉬운 때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직도 이 땅에는 예수님의 탄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예수 없는 크리스마스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만일 크리스마스를 즐거운 파티 기분으로만 넘긴다면 그것은 예수 탄생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나 자신에게도 긍정적인 변화를 주지 못하는 허망한 시간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낮은 데로 오신 그리스도의 성탄은 가장 놀라운 사랑의 기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네 복음서 가운데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마가나 요한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시작합니다. 이 한 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났어. 그리고 그의 사역이 시작되었지.”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 짧은 한 마디가 오히려 자세히 묘사하는 성탄기사보다 우리에게 더 큰 뜻을 전하고 있으며 예수 탄생 사실에 대해 더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섰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역시 예수님의 탄생 사건은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대신 다른 복음서에 나타난 성탄 기사 못지않게 중요한 말씀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줍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탄생 이야기를 생략한 것은 이미 다른 복음서에 사건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 반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요한이 증거 한 네 구절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드디어 우리와 함께 계시도다.”라는 것입니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적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기적이요, 사랑으로 충만한 기적입니다.
1. 이 기적은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윌리엄 말스톤(Dr. William Marston)이라고 하는 심리학 박사는 삼천 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사람들의 사는 목적이 94%가 결국 기다리는데 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기다립니다. 소식을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또 기회를 기다리고, 좀더 변화되기를 기다리고, 좀더 살기 좋은 세월을 기다리고……. 무엇인가를 기다리는데 세월과 마음들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성탄을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에게 갑자기 들이닥친 사건으로 풀어나갑니다. 어느 날 밤, 잠을 쫓으며 양을 지키던 당번 목자들에게 홀연히 주의 사자와 천사가 나타나 구주가 나셨음을 알립니다. 이들은 그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달려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합니다. 누구보다도 비천한 처지에 있었던 그들은 메시아를 손꼽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삶이 너무나 힘들고 고단하다 보니 간절히 바라보고 찾을 만큼 여유 있는 처지에 있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천사가 직접 그들을 찾아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추위에 떠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탄생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주님은 꼭 가난한 사람,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만을 위하여 오신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중산층이거나 그 이상의 계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동방에 살면서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상한 별을 하나 발견하고 그 별을 따라 베들레헴까지 찾아갔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꼭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만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중산층 또는 그 이상의 지식인들에게도 똑 같이 만나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동방박사처럼, 또는 목자들처럼 참되게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이상한 별을 보고 따라 나섰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길고 고된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간 사람은 동방박사 세 사람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갈구하지 않아도 값없이 은혜를 내려주시지만 때로는 스스로 그것을 구하고 찾도록 하시기도 합니다.
별은 캄캄한 밤에만 보입니다. 밤이 깊도록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진리가 보입니다. 밤이 지새도록 기도하는 신앙인들에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성탄절의 기적, 가장 놀라운 기적은 지금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시므온이나 안나라는 여선지자도 기다림으로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어서 가장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임마누엘은 왜 가장 놀라운 사랑의 기적일까요?
우리가 성탄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그 당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 직전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 까요? 아마도 터질 듯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말로 해서는 도무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들을 보다 못해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들과 살을 맞대고 함께 하시면서 그 사랑을 체험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으로 택한 것이 당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낸 사건입니다. 그 아들과 함께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모습을 닮은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극진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 사건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적입니다.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그리고 그 아기를 맞이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며, 그를 영접해 새 사람 되는 것 또한 기적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기적을 믿지 못합니다. 기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 중에 가장 귀중한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는 기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그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풀어주기 위해서 메시아가 오셨다고 외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인의 크리스마스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크리스마스는 너무나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보다 세상 사람들이 훨씬 먼저부터 성탄절이 다가옴을 알립니다. 물론 그들이 임마누엘의 기적을 믿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업적인 상술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임마누엘하신 아기 예수님은 쏙 빠지고 엉뚱한 산타클로즈와 사슴들이 끌어주는 썰매만 연상되는 것이 오늘날의 크리스마스 풍경입니다.
양을 치던 목자들은 아기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천사들의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만나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행동을 보고 역시 성탄의 첫 소식을 그들에게 전하길 잘했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찬양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고 기뻐하시며 또한 그렇게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내려 주신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참으로 사랑의 선물이기에 그 아기 예수님을 영접해드릴 때 내 안에서 기적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 기적을 기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만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은 가장 놀라운 사랑의 기적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친히 오셨을 까요?
3.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오늘날 현대인들은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하면 그냥 웃어버립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 하느냐며 빈정거리기 일쑤입니다. 그들은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이렇게 메마르고 권태로운 현대인의 생활을 단절하고 그 속에 뛰어 들어와 기적이 일어났다고 외쳐댑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오늘날 따분한 달동네에 사는 우리를 위하여 지극히 높으신 분이 나타났다고 해서 우리 중에 누가 눈 하나 깜짝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 교회는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구원의 주가 나셨다고 야단들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일찍 성탄절을 알리는 것은 아마도 구세군의 자선냄비일 것입니다.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셨다고 외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인의 크리스마스 메시지입니다.
이것을 못 믿으면 직접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라.”(눅 2:12)는 것입니다. 이 표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그 엄청난 기적의 사건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의 눈에는 그 표적이 어떻게 보여질 까요? “강보에 싸여 누인 아기”가 누구입니까? 그분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보내 주신 가장 놀라운 사랑의 선물입니다.
세상 어디서든지 기적이 일어났다면 그 밑거름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일어나는 가장 놀라운 사건입니다.
가장 놀라운 사랑의 기적
어떤 성탄절 이브였습니다. 한 병원에 자살미수 환자가 실려 응급실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사람은 놀랍게도 의사였습니다. 그는 아내와의 불화를 비관하여 술을 마시기 시작해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고 결국은 마약까지 손대게 되어 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 본 그는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사연을 알게 된 담당 의사는 그 병원에서 불치의 병에 걸려 시한부 생명을 살고 있는 한 어린 소년을 그에게 소개하였습니다. 그 소년은 비록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지만 언제나 기뻐하면서 절망하는 많은 환자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삶을 포기하려던 의사도 그 소년을 만나보고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소년에게 그렇게 기뻐할 수 있는 원인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년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을 받았답니다. 그것은 아기 예수님입니다. 이제 아기 예수님과 친구가 된 저는 새 생명을 얻었기에 한없이 기쁘기만 합니다. 죽기 전에 이 기쁨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해요. 선생님도 절망하지 말고 저를 따라 예수님을 향해 기도해 보시겠어요?”
그 의사와 소년의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의사에게 사랑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병에서 벗어나 다시 의사로 돌아가서 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해줄 뿐 아니라 그 후 그는 목사가 되어 뉴욕의 한 유명한 성공회 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많은 영혼을 치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기적이 일어났다면 그 기적의 밑거름은 사랑일 뿐입니다. 기적 중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은 임마누엘하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 기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금번 성탄을 맞이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기적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임마누엘
마 1:18-25 / 홍정길 목사
예수, 그 이름의 비밀을 아십니까? 성 베르날로는 예수의 이름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혀에 꿀 송이처럼 달고, 예수 그 이름은 귀에 아름다운 멜로디로 울리고, 예수 그 이름은 마음에는 기쁨이 솟아나게 하는 이름이다." 그런가하면 우리와 이 땅에서 함께 한평생을 뇌성마비로 살아온 시인 송명희는 예수의 이름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 내게 있는 귀한 비밀이라. 내 마음에 숨겨진 기쁨..." 여러분은 예수라는 이름을 부를 때, 무엇을 떠올리십니까? 그 이름이 내 삶 속에 어떻게 역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실제로 어떻게 역사하고 있습니까?
'예수' 이름을 작명하신 하나님
예수! 그 이름을 하나님께서 직접 작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그의 모친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그가 잉태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수태를 고지(告知)받고 금새 자기 사촌인 엘리사벳에게 가서 의논합니다. 왜냐하면 엘리사벳이 도무지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나이에 임신이 되었고,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이 낳을 증거 중의 하나가 바로 엘리사벳이 임신한 것"이라고 한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 좇아갔습니다. 이 사실이 마리아에 의해서 고백되어졌는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알려졌는지, 어떤 경로로 알려졌는지는 모르지만 요셉이 이 일을 알았습니다. 요셉은 침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늘 옳은 것을 숭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곤혹스럽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임신을 했다고 합니다. 몹시 고민스러웠습니다. 그가 고민할 때, 천사가 꿈에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그의 고민에 대한 답을 가르쳐줍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다." 어떻게 그 아이가 출생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름을 가르쳐줍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니라" 그래서 그는 마리아를 집에 데려왔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특별한 이름이 아니라 당시에 많이 있었던 흔한 이름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여호수아가 바로 예수입니다. 히브리말로는 '여호수아'이고 그리스말로는 '예수'였습니다. 마치 우리가 '북경'이라고 쓰는 단어를 영어권 사람들은 'Peking'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중국에 가면 '북경, Peking'이라고 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그들은 '베이징'이라고 해야 알아듣습니다. 똑같은 단어를 이처럼 나라마다, 언어마다 다르게 읽습니다. 여호수아,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단어가 신약성경이 기록되면서 헬라어로 '예수'라고 표기되었습니다.
예수, 그 이전에 여호수아가 있었습니다. 그도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성취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믿는 예수님과는 다릅니다. 여호수아는 얼마 있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는 구세주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이십니다. 스룹바벨이 제2성전을 지을 때 귀환한 동포들에 의해서 대제사장으로 선임되어 나간 사람의 이름도 여호수아(예수아)였습니다. 그는 헐어진 성전을 다시 짓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서 성전의 제사를 회복한 사람이지만 그는 인간의 모든 죄를 단번에 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다릅니다.
많은 여호수아가 있고 많은 예수가 있지만 이 예수만은 하나님께서 직접 이름을 지어주신 분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 땅에 왔지만 예수 그 분만 하나님께서 700년 전, 400년 전 계속해서 '내 아들을 한 아기로 이 세상 보낸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사 9:6) 그 분이 오신다고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유일하게 예언되어서 이 땅에 예언의 성취로 오신 아기입니다. 많은 이름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작명하시고 작명에서 끝나지 않고 '여호와는 구원'이라는 말의 뜻을 한층 더 깊이 풀어서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이라고 그 이름의 정확한 설명까지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중요한 두 가지 뜻을 붙잡아야 됩니다. 첫째로 '내가 어디에 소속된 사람인가?' 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자기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입니다.
제가 처음 외국 나들이할 때 설움이 참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국가에서 돈을 정식으로 $50 밖에 안바꿔줄 때도 있었고 조금 지나니까 $100 바꿔주었습니다. 여행비 $100을 가지고 어디에 가서 씁니까? 국가가 약하니까 한 달을 여행하고 40일을 여행하더라도 그냥 $100만 환전합니다. 그래서 돈을 암달러상에게서 바꿔서 팬티에 속주머니를 만들든지, 여러 곳에 숨겨 넣어 가지고 나오던 때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외국에 같이 가서 돈을 거두면 이상한 곳에서 돈이 나옵니다. 그럴 때가 있었습니다. 꿈같은 옛날 이야기입니다만 가난한 나라 백성의 설움이었습니다. 그것만해도 서러운데 입국대에 서서 korea라고 하면 열외로 비켜놓고 "당신 어디서 왔소? 지금 무슨 일 해요? 숙소는 어디요? 당신의 신원을 증명할 이 나라에 사는 사람은 누구입니까?"하고 꼬치꼬치 캐묻습니다. 처음에 나가면 도무지 말 소리도 안들리는데, 그 질문에 일일이 답변하면서 20분, 30분 지내고 나면 진이 빠집니다. 미국 갈 때마다 그렇게 미국 대사관에 줄서서 비자를 받곤 했습니다.
얼마 전에 희년 선교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서 병원을 개원하는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거기에서 네팔에서 온 사람들, 방글라데시에서 온 사람들, 인도네시아에서 온 사람들,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등 각 곳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날, 남의 나라에 와 있는 설움이 어떤 것인가 하는 간증을 들으면서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우리 민족이 이렇게 잔인한 민족인가 싶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울다가 끝났습니다.
언제 한번 브라질에 있는 우리 동포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유럽에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우리나라 사람이지만 브라질 여권을 가졌습니다. 비행기에서도 같이 재밌게 이야기하다가 저와 같이 줄서서 파리 공항에 들어가는데 저는 여권을 보이니까 그냥 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브라질 여권을 가진 그 사람은 세워놓고 옛날에 제가 당했던 그 고문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 친구 때문에 30분을 밖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분이 나와서 이야기하기를 자기들이 처음 브라질에 이민 갔을 때 브라질 여권 가지면 미국이나 유럽을 마음대로 다녔는데 이제는 국가가 어려우니까 이렇게 사람 값이 개값이 되었다고 한탄합니다. 역전이 되었지요. 한국 경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나라가 무너지면 내가 가진 모든 것, 같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나라 사람 아닌 또 다른 시민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분의 백성입니다. 그 분 왕국의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위치는 계속 바뀌어갈 것입니다. 계속 흔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것이 일시에 다 무너질 수 있다는 가능성도 한편으로 생각하며 살아야 됩니다. 그렇지만 어깨에 모든 정사가 걸려있는 분의 나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의 영원한 나라, 흔들림이 없는 나라, 완전한 그 나라의 백성이기도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세상 대한민국 백성으로 당하는 설움과 어려움에 손해가 있을지 몰라도 천국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과 기쁨과 하나님만이 주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그 풍요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내가 확고하게 입적되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내가 그의 백성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가슴에 품습니다. "예수!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입니다.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어떤 상태에서 어떤 방법으로 그 분의 백성이 되었단 말입니까? 그냥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구원을 받았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이집트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야 됩니다. 시작이 어디라고 말합니까? "저희 죄에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괴롭히는 것이 죄입니다. 죄는 어느 때든지 사람을 불행케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이 쉽게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며 잘 짓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거짓말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거짓말 같은 것은 죄로 안 여깁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혜롭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이것이 동양 문화의 특색인 것 같습니다. 둘로 구분합니다. 내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의리를 지키고 정직해야 됩니다. 그러나 내 가족이나 내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거짓말 잘 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제갈 양입니다. 그래서 동양에는 거짓말이 죄라는 의식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거짓말을 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벤처 기업하는 젊은 두 청년이 거짓부렁으로 만들어놓은 신화가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불행케 하고 있습니까? 다른 자식들은 밤잠을 자지 못하고 공부해서 대학에 입학했는데 거짓문서 만들고 법을 교묘히 속여서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상상해 보건대 지금 그 부모들은 원상복구 할 수 있다면 자기 머리털이라도 다 뽑고 싶을 거예요. 기가 막힐 것 아닙니까? 다시 벗어날 수 있다면 전 재산이라도 다 쓰고 싶어할 겁니다. 그것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서 또 거짓말하라면 열심히 할거예요. 거짓은 늘 거짓말로 포장되어야 진실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부모의 잘못된, 거짓된 판단으로 인생이 멋지게 준비되어져야될 때에 찌그러진 인생으로 평생동안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한번 지어버린 죄의 고통을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멕베드>를 보면 던컨 왕을 죽인 멕베드가 자기 손에 묻은 피의 흔적을 보면서 외쳐대는 소리가 있습니다. "어떤 것으로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구나." 한번 죄를 지어버리면 다시 돌이켜지지 않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들이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 주시옵소서."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는 것 외에는 죄를 사하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마 다른 방법이 있었으면 우리 하나님은 필시 그 방법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두 팔을 스스로 묶으시고 사랑하는 아들이 그 모진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외쳐대는 그 고통의 소리를 다 들으셨습니다. 죄는 우리 인생을 불행케 하는 원흉입니다. 그러나 그 죄는 하나님도 불행케 하는 원흉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알 때, 우리는 놀라운 감격을 가져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찾아오시고 만난 이유가 내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내 죄 때문이라는 사실, 내 잘남 때문이 아니라 내 못남 때문이라는 사실, 내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내 추잡함 때문이라는 사실, 내 영광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내 비천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것 좋아합니다. 귀한 것 좋아합니다. 그리고 같이 있고 싶어합니다. 나쁜 것 싫어합니다. 추잡한 것 멀리하고 싶습니다. 실패하고 못나고 추잡하고 더럽지만, 내 자식이면 그 자식의 실패와 아픔을 10배나 100배나 당하는 부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믿습니까? 인생을 가장 불행케 하는 죄에서 구원하셔서 참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 예수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으로 그 사역이 끝나지 않고 또 말씀하십니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땅에 오신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을 우리는 내 곁에 모시고 삽니다.
가난, 지겹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절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가난의 고통을 안다. 공중 나는 새도 깃들일 둥지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었지만 나는 머리 둘 곳이 없었던 생애를 살았다. 너는 아무리 못하더라도 집에서 태어났지만 나는 날 곳이 없어서 구유에서 태어났다. 가난, 그러면 내가 너 앞서 있다. 네 모든 가난의 행로를 내가 안다. 너와 함께 하겠다." 주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런가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의 때를 나는 안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 너와 함께 있는 나는 안다."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눈물의 아픔을 아시는 주님입니다. 또 친구의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을 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했던 제자 유다에게 노예 값도 못되는 개 값 같은 은 삼십 냥에 팔렸다. 네가 당한 그 배반의 아픔을 내가 안다. 나는 너의 임마누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 분이 임마누엘이십니다. 그 분 앞에 나 같은 것은 너무 죄를 많이 지어서 나올 수 없다구요? 그 이름이 예수입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십니다. 그 임마누엘이신 주님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그 분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겠다. 수고롭고 무거운 짐, 그 짐을 진 상태 그대로 나오라."(마 11:28)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의 백성 된 것도 알겠고 예수께서 죄 사해주신 은혜도 알아서 예수 그 이름을 크게 부를 수 있는 성도들이 계십니까? 그렇지만 그 구원이 지금 이 시간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명퇴 당해서 직장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증에 빠져있는 내게 임마누엘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고 싶으십니까? 여러분, 그 분 앞에 서십시오.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 분은 내 임마누엘로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만드시는 역전의 명수이십니다. 내가 당했던 손해와 내가 당했던 슬픔과 내가 당했던 멸시와 내가 당했던 좌절까지도 사용해서 그것 없이는 도무지 안될 것 같은 성공의 길로 인도하기를 기뻐하시는 나의 임마누엘이십니다. "할 수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내가 너의 임마누엘이라."(막 9:23)고 말합니다. 그 분은 마태복음의 마지막을 닫으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말씀했습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예수, 그 분은 바로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셨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 임마누엘로 오신 그 분을 향해서 나아가는 밤입니다. 그 분을 향해서 찬송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송명희 시인은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도무지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비밀이 되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소아마비로, 뇌성마비로 평생을 고통 당하면서도 예수가 그 속에 비밀이 되었단 말입니다. 예수가 그의 인생에 감동이 되었단 말입니다. 예수가 그 인생에 임마누엘로 능력이 되었단 말입니다. 예수! 임마누엘! 이 분 때문에 송명희가 하나님은 공평하시다고 노래합니다. 임마누엘이신 그 분을 찬양합시다. 그 분을 붙잡고 다시 일어납시다. 그 분의 백성 된 인생은 비밀을 가져야 됩니다. 그 분 때문에 도무지 사람들이 웃을 수 없을 때 웃습니다. 왜냐면 내 속에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설명은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화급할 때에 세상이 감당 못할 평화를 누립니다. 설명으로 안됩니다. 심리학자가 다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문자 그대로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그런 일 할 수 없는 인생들이 주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상상할 수 없는 사역을 펼칩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 그 이름 때문에, 그 비밀 때문입니다. 예수의 비밀이 모든 성도들에게 임마누엘로 역사하는 복된 성탄절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