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계서원(滄溪書院)
종 목 : 지방문화재자료 제36호(전북)
명 칭 : 창계서원(滄溪書院)
지정일 : 1984. 04. 01 지정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장수읍 선창리 566-1(양선길 33-6)
창계서원 전경
어느덧 장수군문화재 답사도 반환점을 돌아서 희망이 보는구나 지나온 몇 개월동안
내고향 長水의 문화를 나름대로 많이 알고 배운것 같다 참으로 알면 알수록 깊이있는 고을이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배움의 끝은 알수 없듯이 무궁무진하다 앞으로 기회 닿은대로 몇 번이고
더 찿아보고픈 장수의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양선마을 창계서원을 몇 번 찿아
본적이있다 그러나 지금과는 상황이 조금은 다르다 그때는 목적없이 놀러 갔다면 지금은 목적이
뚜렷한 답사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장수군에서 제일 오래된 서원(書院) 향토문화 보존상 꼭 필요하다고 인정되어 지방문화재
자료 제36호로 지난 1984년4월1일에 지정된 장수읍 선창리 양선마을 창계서원을 답사할까 한다
장수읍 선창리 양선마을은 장수읍 북쪽방향으로 천천. 전주방향 13번 국도 도로변에 위치해있다
장수 버스터미널 기준으로 약 2㎞쯤에 있다 장수농협 하나로마트앞 읍,의 유일한 로타리 돌아서
천천. 전주 방향으로 가다보면 소나무 가로수길이 눈에뛴다 장수읍 가로수는 늘푸른 소나무다
어찌보면 당연한듯하다 장수는 절개를 상징한 논개의 고을이다 또한 청렴의 대명사 황정승도
장수와 인연이 많은 곳이다 아마도 이런 연유의 가로수길 아닐지 감히 생각해본다.
찬란한 장수의 문화유산 너와 나 우리 모두에게 귀중하고 소중한 보물이다
왼쪽으로 장수의료원과 장수읍사무소가 있고 오른쪽으론 테니스장, 축구장, 궁도장, 종합체육의
메카 장수공설운동장이 있다 직진하여 자가용 기준으로 2분정도 가다보면 오른쪽에 아담하고
한적한 전형적인 시골마을 양선마을이 나온다 우회전하면 마을입구에 마을회관이 있다
창계서원을 가려면 이 곳에 주차해야 한다 동네 도로가 비좁아 차를 가지고 가는것보다 이 곳
회관앞에 주차하고 걸어서 5분정도 가면된다.
창계서원이 있는 양선마을은 행정구역상 전북 장수군 장수읍 선창리이다
선창리는 음선마을과 양선마을 근로자아파트(행정구역 개편으로 남선창이라함)세마을을 합쳐서
선창리라 부른다 양선마을 입구에 아주 오래된 정자나무가 마을의 역사를 말해준듯 하는구나
정자나무 아래에 잘 지어진 정각이 있다 아무리 더운 여름날에도 이 마을 정각은 에어콘보다
더 시원한 바람이 일어 주민들의 아지트가 될 것이다
덥다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유원지 찿지말고 이 곳의 양선 정각으로 막걸리 한병 들고와
어르신들과 옛이야기 나누면서 더운 여름을 이기는 방법도 좋은 생각이라고 사료한다
이 마을은 모퉁이에 있는 “모랭잇들” 싸리재 북쪽에 “밤나뭇골” “복골” 남쪽 길가의 선챙이 방죽
샘이있는 골짜기엔 “시암골” 마을 뒷쪽으로 “토끼봉”이 있다 양선은 토끼봉 산자락에 뿌리박은
청정의 마을로 포근하며 평화롭게 보인다.
양선마을의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정황상으로 보아 다음과 같다
현 장수읍 소재지 인근에 하맛거리(말에서 내려 걸어가야하는 거리)에 필자는 추측건데
장수향교 입구에 하마비가 있다 그 부근으로 추측한다 최씨, 배씨, 김씨 세집이 터를 잡고
살았는데 땅속에서 물이 계속 흘러서 살기에는 부적합하였다
(예전부터 집에서 물이나면 후손이 망한다는 설) 그리하여 조선말쯤에 살기좋은 터를 찿아서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최씨는 음선으로 배씨와 김씨는 양선으로 이주해서 살게 되었다
양선은 배씨와 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김씨는 손이 번창하지 못하였다 반면 배씨는 자손이
번창했다 배(船) 있으면 선창(船艙)이 있어야 한다는 원리로 배씨의 孫이 번창하면서 양지쪽
터에있는 배씨(裵氏)마을 이라고해서 양선(陽船)이라 불리워졌다
그러나 언제부터이지 배선(船)이 아닌 먼저선(先)으로 바뀌었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다시말해
원래 선자가 한문으로 배선(船) 이나 뚜렷한 이유없이 먼저선(先)로 바뀌었다 양선마을은 현재
약 30여 가구가 살고있는 마을이며 사시사철 양지 바른곳에 위치 하고있어 풍수적으로 보면
비전문가인 필자가 보아도 명당 인듯하다.
양선마을 전경
서원(書院)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거나 석학이나 충절로 죽은 사람을
배향하던 곳이다 이곳 창계서원은 1695년(숙종21)에 사당으로 창건해서 익성공 황희를
배향하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 자연 손실되어 훗날 1815년(순조15)에 지방 유림들에 의하여
확장을 해서 이 자리에 중건공사를 했다 최초의 이름인 창계사당이란 이름을 창계서원이라
개명하고 이 때부터 기존 황희선생외 外 세분을 추가로 배향하여 모셨다 훗날 고종5년(1868)
대원군의 전국서원 철폐령에 의해 없어졌다가 1958년 장수지방 유림들에 의해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또한 1955년 복원설도 있다 양지 바른곳에 가을햇쌀 비추어 찬란히 빛나는
창계서원에 도착했다.
건물앞 오른쪽에는 이 서원을 알리는 안내 표지판이 있고 들어가는 정문은 3칸의 솟을대문으로
되어있다 정문 입구에 숭앙문(崇仰門)아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崇仰”이란 거룩하게 우러러
본다는 뜻이다 입구에서 풍기듯 거룩한 분들이 모셔져 있다는걸 알수있다 또한 이 대문의
상량을 보면 단기 4323년(서기1990년) 8월19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솟을대문은
최근에 만들었음을 말한다.
창계서원 입구 솟을대문(숭앙문-1990년 세움)
이 곳은 흙과 돌을 혼합하여 기와를 올리는 바깥쪽 외담과 안쪽 내담으로 되어 있으며
안쪽 내담은 상현재 뒤쪽에서 창계사 들어가는 경계선이다 정문은 잠궈져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왼쪽으로 협문이 있다 협문을 통하여 서원안에 들어서면 상현재 앞마당 우측으로
비석이 있는데 滄溪書院廟庭碑(창계서원묘정비) 쓰여있다 묘정비는 사원이나 향교뜰에 세운
비석을 말한다 정문의 첫 번째 건물을 상현재라 한다 정면3칸 측면2칸으로 지어져 있으며
팔작지붕(위쪽은 세모꼴 아래쪽 네모꼴 지붕)이다 상현(尙賢)은 어진사람을 존경한다는 뜻이다
이 곳에서는 유림의 회의 및 강학 공간으로 사용했다 상현재 뒤쪽으로 창계사로 들어가는
작은문이 있다 문열고 들어서면 정면3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책을 엎어논 형상)으로 되어있다
이곳 창계사(滄溪祠)는 다섯분의 어진사람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방촌 황희선생을 주벽으로
하여 열성공 췌부 황수신, 뇌계 유호인, 송탄 장응두 4현을 모시고 있었으나 훗날 지방 유림들의
건의에 의해서 1968년 무명재 강백진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그래서 현재는 오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향사일은 매년 음력(9월 10일) 이고 제품(祭品)은
4변(籩)4두(豆)이며 유물은 황희의 영정 등이 남아있다.
상현재(尙賢齋)
● 창계서원(滄溪書院)
창 건 : 최초창건 1695년, 중건 1815년, 복원 1958년
위 치 : 장수읍 선창리 양선마을 회관 100m 지점
건 물 : 입 구 - 3문(솟을대문)-숭앙문(崇仰門)이란 현판있음, 외삼문
상현재(尙賢齋) : 강당(회합, 강학 공간), 정면3칸 측면2칸 팔작지붕
협 문(夾 門) : 창계서원 좌측의 옆문
창계사(滄溪祠) : 오현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 정면3칸, 측면2칸
향 사(享 祀) : 매년 음력 9월 10일에 봉행(奉行)한다
제 품(祭 品) : 4변(籩) 4두(豆)이다
유 물(遺 物) : 황희의 영정 등 다수
오 현(五 賢) : 방촌 황희, 췌부 황수신, 뇌계 유호인, 송탄 장응두, 무명재 강백진
필자는 장수의 창계서원을 답사하면서 궁금한 것이 있다.
궁금증 1
서원 입구의 안내판에 씌여진 글씨와 문화재청 자료의 글씨는 "創溪書院"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각종 인터넷 포털싸이트를 비롯해 역사관련 사전 몇군데서 "滄溪書院"으로 쓰여져 있다
이 곳의 사당의 현판도"滄溪祠"로 쓰여있으며 창계서원 앞 마당에 묘정비도 滄溪書院 으로
적혀있다 창(滄)과 창(創) 이 문제로다 차갑다 또는 바다를 뜻하는 창(滄)이 올바른 표기법 인지
아니면 비롯하다는 뜻의 창(創)이 맞는지 헤깔린다 장소는 하나이나 한자 표기는 각기 다르니
참으로 답답하다 장수 계남사시는 박수섭(장수향교 전교) 어르신은 바다(滄)이 맞다고 확신한다
물론 사견이다 한문 한글자가 대단한것 처럼 말할수 있으나 매우 중요하다고 사료한다
맨처음 창계서원 지을때 왜 “창계서원” 이라고 이름을 지었는지 유추해 볼때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하루빨리 연구 검토하여 한글자로 통일함이 후손들의 할 일이 아닐까 한다.
궁금증 2
왜 창계서원 이라 이름을 붙였는지 궁금하다 예를들어 우리나라 최초의서원 경북영주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있다 소수(紹修)라함은 무너진 학문을 다시 닦게하라는 뜻으로 이름하였고
장수 계남의 화산사는 동네 이름이다 산서의 압계서원은 서원앞 냇가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한다
필자는 우리 장수군 최초의 서원 창계서원도 이름의 유래를 찿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창계서원 일까? 필자 나름으로 공부하고자 장수군의 어르신들 증언을 듣고 자료를 찿아서
백방으로 노력은 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했다 개인의 뜻을 말함은 신중을 기해야 하므로
이쯤에서 필자의 주장은 그만할까 한다 빠른 시일내 장수군 관계자와 문화재청 또는 이에 관계된
모든 분들이 머리 맞대고 논의 하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내고장의 소중한 문화는 특정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의 것 이다 관심갖고 후손 천년만년 길이길이 물려주자 현재 창계서원의
모든 관리는 양선마을 배종수(군 공무원)부친이신 배윤찬 선생님이 하고 계신다.
창계서원의 이모저모
장수군에 문화재등록 되어 있는 서원은 네 군데 이다 이곳 창계서원을 비롯하여 월강사, 화산사
압계서원이 있다 네 군데 답사를 마치면서 개인적으로 많은것을 느끼었다 예전에는 사당 또는
서원이라 함은 관련된 문중과 유림들만의 공간인줄 알고 살아왔다 그러나 답사후 깨우쳤다
문중도, 유림들도 아닌 우리들의 공간이다 훌륭한 선친들을 모시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조상없는 후손은 없다 성씨가 똑같아야만 조상이 아니다 모두의 조상이다.
장수군내 서원
* 월 강 사(장계면 월강리 도장마을) - 지방 문화재자료 31호
* 화 산 사(계남면 화음리 화산마을) - 지방 문화재자료 34호
* 압계서원(산서면 학선리 구암마을) - 지방 문화제자료 35호
* 창계서원(장수읍 선창리 양선마을) - 지방 문화재자료 36호
* 도암서원(장계면 송천리 서변마을) - 문화재 등록 안됨
* 사동서원(산서면 사상리 사창마을) - 문화재 등록 안됨
* 용 암 사(천천면 춘송리 장항마을) - 문화재 등록 안됨
~ 장수에서 호롱불 최 용 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