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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믿음의 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靑野
날짜 | 전선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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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2일 |
미국 남부동맹,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 항 앞바다의 섬터 요새를 공격. 요새 사령관 리처드 앤더슨 소령, 남군 지휘관 피에르 C. 보우리가드 준장. 보우리가드 준장은 앤더슨 소령의 육군사관학교 제자였음. 오후 3500여발의 포탄을 두들겨 맞은 앤더슨 소령이 남군에 항복함. 이 당시 앤더슨 소령의 요청으로 항복의 의사로 북군이 예포를 발사하다가 오발로 2명의 병사 사망. 미국 남북 전쟁(Civil War) 발발 | |
4월 15일 |
링컨 대통령, 3개월 계약 기간의 지원병 소집 공고. 3개월이면 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 |
4월 20일 | 로버트 E. 리 대령, 북부연방군 사직서 제출 후 남부연맹에 합류 | |
7월 17일 | < 동부 전선 > 쉐넌도어 계곡 전투 |
쉐난도우 계곡의 남군 존스턴군, 보우리가드의 증원 요청을 받고 북군의 페터슨을 견제할 1개 기병사단만 남겨놓은 채 전군이 매너서스로 기동 개시. 이 기동은 7월 21일에 완료됨. |
7월 18일 | < 동부 전선 > 제1차 불런 전투 |
매너서스의 블랙번에서 섬터 요새 이후 최초로 교전. 북군 패배. 남군 롱스트리트 지휘, 북군 타일러 지휘 |
7월 21일 | < 동부 전선 > 제1차 불런 전투 |
남군 사령관 존스턴, 실제 작전 지휘는 보우리가드, 북군 총지휘관 맥도웰. 북군 대패. |
날짜 | 전선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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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5일 | < 서부 전선 > | 북군 그랜트, 미시시피 강변의 포트 헨리 공격 개시 |
2월 6일 | < 서부 전선 > | 북군 그랜트, 미시시피 강변의 포트 헨리 함락 |
2월 12일 | < 서부 전선 > | 북군 그랜트, 미시시피 강변의 포트 도넬슨 공격 개시. 이날 공격은 탐색전 규모 |
2월 14일 | < 서부 전선 > |
북군 그랜트에 보명 1만 명과 포트 제독 휘하의 소함대가 증원됨. 이날 북군은 점령에 실패했으나, 불리함을 깨달은 남군은 철수를 도모 |
2월 15일 | < 서부 전선 > |
남군 포트 도넬슨 수비대 일부는 탈출. 남군 수비대장 버크너와 1만 2천 남군은 그랜트에게 무조건 항복 |
2월 28일 | < 서부 전선 > |
테네시 주 주도인 내쉬빌에서 남군 철수. 포트 헨리와 포트 도넬슨 함락으로 테네시 방면의 남군은 분단되어 각개 격파의 위험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내쉬빌을 포기하게 됨. 북군은 이로써 켄터키 주와 테네시 주를 통제하게 됨 |
3월 8일 |
남부연맹의 철갑선 메리맥 호가 햄프턴 정박지의 북군 해군 함대 기습. 북군 해군 프리킷 3척 침몰, 250명 사살 | |
3월 9일 |
북군 해군도 철갑선 모니터 호를 동원하여 메리멕 호와 격전. 그러나 승부는 나지 않았음. 이 전투 후 세계는 목조 군함 대신 철갑선 건조에 나서게 됨 | |
3월 11일 | < 동부 전선 > 쉐넌도어 계곡 전투 |
남군의 스톤월 잭슨, 북군의 압력으로 세넌도오 계곡의 전초기지인 윈체스터에서 철수하여 45마일 남쪽의 마운트 잭슨으로 이동. 당시 병력은 보병 3,600명, 포병 600명 |
3월 12일 | < 동부 전선 > 쉐넌도어 계곡 전투 |
쉐넌도어 계곡 전투. 북군 뱅크스 휘하의 쉴즈 사단이 윈체스터 점령. 뱅크스는 잭슨 장군과 남군이 완전히 철수하였다고 오판 |
3월 23일 | < 동부 전선 > 쉐넌도어 계곡 전투 |
남군 잭슨 장군, 다시 북상하여 윈체스트 남쪽의 컨스타운을 공격. 그러나 압도적 병력 차이로 공격 실패. 그러나 북군은 잭슨의 공격에 놀라 맥클랜란에 보내려던 증원군 일부를 쉐넌도어 계곡으로 보내고, 맥도웰 장군의 군단은 워싱턴에 잔류시키는 결과를 초래. 잭슨은 전투에서 패하고 전략적 승리를 쟁취. |
4월 1일 | < 동부 전선 > 반도 전역 |
북군 포토맥군 사령관 매클랙란이 알렉산드리아를 출발. 목표는 리치먼드. 소위 "반도 전역(Peninsula Campaign)". 매클렌란의 작전 지역이 요크 강과 제임스 강 사이의 반도였기 때문. 포트 먼로에 상륙 후 요크타운을 향해 진격, 이들 북군을 상대한 남군은 총사령관 존스턴이 지휘하였으며, 북군과 가장 먼저 대치한 것은 매그루더 사단이었다. |
4월 6일 | < 서부 전선 > |
샤일로 전투 1일째. 포트 도넬슨 함락 후 피츠버그 랜딩에 주둔한 북군의 그랜트를 남군이 기습공격. 남군은 보우리가드와 존스턴이 지휘. 교통요충지인 코린스를 지키기위한 선제 공격으로, 전투는 샤일로 교회에서 가장 큰 격전을 치룸. 이날 남군 사령관 앨버트 존스턴 전사 |
4월 7일 | < 서부 전선 > |
샤일로 전투 2일째. 그랜트가 지휘하는 테네시 군, 뷰엘이 지휘하는 오하이오 군이 남군에 반격 개시. 이날 남군은 패배하여 물러남. 같은 날, 존 포프가 이끄는 북군이 미주리 주 뉴마드리드 근처의 요새섬 "넘버10" 점령. 이로써 북군은 멤피스까지 미시시피 강 통제가 가능 |
4월 17일 | < 동부 전선 > 쉐넌도어 계곡 전투 |
뱅크스, 계곡 남쪽으로 잭슨을 추적하기 시작하여 해리슨버그까지 진출. |
4월 24일 | 북부 해군 패러컷 제독이 지휘하는 함대가 뉴올리언즈에 대해 공격 개시 | |
4월 25일 | < 서부 전선 > | 서부군 사령관 할렉이 그랜트를 시기하여 군단장 직에서 해임. |
4월 29일 |
뉴올리언즈, 패러컷 제독에 항복. 이로써 북군은 미시시피 강을 따라 남부 어디로든지 진출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남부를 동서로 분단시키게 되었다 | |
5월 30일 | < 서부 전선 > | 북군, 코린스 점령 |
5월 3일 | < 동부 전선 > 반도 전역 |
한 달에 걸친 맥클렉란의 공격 준비를 알고 있는 존스턴은 기만 포격 후 전군 철수 |
5월 5일 | < 동부 전선 > 반도 전역 |
요크타운 북방 8마일 지점, 윌리암스버그에서 남북군 전투. 북군 패배 |
5월 8일 | < 동부 전선 > 쉐넌도어 계곡 전투 |
리치먼드로 이동하는 것처럼 기만한 잭슨이 맥도웰 군단을 격파 |
5월 24일 | < 동부 전선 > 쉐넌도어 계곡 전투 |
잭슨, 뱅크스의 후위 부대 기습. 뱅크스는 잭슨의 의도를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덫을 빠져나와 후퇴하던 중. 잭슨은 이 전투로 프랭크 로얄 점령 |
5월 27일 | < 동부 전선 > 반도 전역 |
매클렐란 휘하의 포터 장군이 지휘하는 1사단이 하노버 코트 하우스 공격. 이 전투에서 북군이 승리. |
5월 30일 | < 동부 전선 > 쉐넌도어 계곡 전투 |
잭슨군, 하퍼스페리 근처까지 진격. 그러나 이 순간 잭슨은 후퇴를 시작. 목표는 포트 리퍼블릭 |
< 동부 전선 > 반도 전역 |
남군의 존스턴 사령관, 세븐 파이즌의 북군 4군단 공격 개시. 북군 4군단은 섬너가 지휘 중. 혼전 중 남군 사령관 존스턴이 중상을 입음 | |
6월 1일 | < 동부 전선 > 반도 전역 |
남부연맹의 제프 데이비스 대통령, 중상을 입은 존스턴의 후임으로 리 장군을 남군 최고 사령관에 임명. |
6월 8일 | < 동부 전선 > 쉐넌도어 계곡 전투 |
북군의 프레몬트군이 크로스키스(Corss Keys)의 남군 이월 사단 공격 |
6월 9일 | < 동부 전선 > 쉐넌도어 계곡 전투 |
북군 쉴즈 사단, 포트 리퍼블릭의 잭슨군 공격 개시. 북군 패배로 후퇴. 잭슨은 전투 후 리치먼드로 급행. 리치먼드 상황 악화 |
6월 12일 | < 동부 전선 > 반도 전역 |
남군 기병여단장 젭 스튜어트가 이끄는 남군 기병대가 북군의 후방으로 침투. (~6월 14일) |
6월 25일 | < 동부 전선 > 반도 전역 |
북군3군단(군단장 하인첼만) 소속 후커 사단이 남북군 중간지대의 남군을 공격하여 숲 지역 점령 |
6월 26일 | < 동부 전선 > 반도 전역 |
남군, 북군에 대해 반격 개시. 남군은 치카호미니 강을 도하, 미케닉스빌로 진격. 제일 먼저 전투를 개시한 부대는 남군의 A.P.힐 |
6월 27일 | < 동부 전선 > 반도 전역 |
게인스 밀에서 남북군 전투. 북군 패배. 북군 철수 시작. |
6월 29일 | < 동부 전선 > 반도 전역 |
남군의 매그루더 장군, 새비지에서 북군의 섬너와 교전. 남군 패배. |
6월 30일 | < 동부 전선 > 반도 전역 |
북군의 맥클렉란, 화이트오크스스웜프 강 남쪽에 도착. 글렌데일에서 남북군 교전. 북군의 최종 집결지는 제임스 강 |
7월 1일 | < 동부 전선 > 반도 전역 |
제임스강의 멜번 힐에서 최후의 교전. 남군은 격퇴당했고, 북군은 다음 날 제임스 강변의 버클리로 철수. |
7월 11일 | 서부지역 사령관이었던 할렉이 북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됨 | |
7월 26일 |
북부, 존 포프를 지휘관으로 버지니아군 창설(리가 이끄는 북버지니아군과 다르다). 할렉과 포프의 등용은 매클랠란을 불신하기 시작한 링컨의 작품이다 | |
7월 17일 | < 동부 전선 > 제2차 불런 전투 |
남군 사령관 리, 잭슨 군을 고든스빌로 급파. 이 곳은 세넌도어 계곡과 리치먼드를 연결하는 철도교차지. 27일에는 A.P.힐 사단으로 증원 |
7월 29일 | < 동부 전선 > 2차 불런 전투 |
포프의 버지니아군이 컬페퍼로 이동. 리치먼드 20마일 지점까지 접근. |
8월 18일 | < 동부 전선 > 2차 불런 전투 |
북군 기병대가 래피드 도섭지의 남군 기병대(젭 스튜어트 지휘)를 급습. 이 전투에서 리의 중요한 문서가 탈취되어 리는 급히 래퍼해녹 강을 건너 철수 |
8월 29일 | < 동부 전선 > 2차 불런 전투 |
개시. 잭슨 군을 포프가 선제 공격하였으나, 북군 패배 |
9월 1일 | < 동부 전선 > 2차 불런 전투 |
종료. 북군은 워싱턴 방면으로 철수. |
9월 6일 | < 동부 전선 > 앤티텀 전투 |
리, 4만 병력으로 해리슨버그를 목표로 매릴랜드로 진격. 리의 목표는 남부의 독립을 포함한 휴전 협상 테이블로 북부를 끌어내는 것. 잭슨은 하퍼스페리로 향하고, 리 자신은 메릴랜드 주 헤이스거타운으로 이동 |
9월 13일 | < 동부 전선 > 앤티텀 전투 |
리의 작전명령서가 북군 매클레란의 손에 들어감. 그러나 매클렐란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이 사실을 안 리는 샤프스퍼그로 이동 |
9월 15일 | < 동부 전선 > 앤티텀 전투 |
하퍼스페리를 점령한 잭슨이 A.P.힐의 사단을 남겨두고 자신은 리에게 합류 |
9월 17일 | < 동부 전선 > 앤티텀 전투 |
새벽 6시, 남군 좌익(후드 지휘)을 북군(후커와 맨스필드)이 선제 공격함으로써 전투 개시 |
9월 18일 | < 동부 전선 > 앤티텀 전투 |
매클렐란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가운데, 리는 안전하게 철수 완료. |
9월 22일 |
링컨, 노예해방 예비선언’ 발표. 이것은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의 여러 주가 연방에 복귀하지 않으면 노예해방을 선언하겠다는 경고. 그러나 노예주로서 연방에 남아있던 주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이 선언은 명분 없는 전쟁이었던 남북 전쟁에 도덕적 이상을 부여하였고, 유럽 열강이 남부연맹의 독립을 승인하려던 움직임을 차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효력 발생은 1863년 1월 1일부터. | |
10월 8일 | < 서부 전선 > | 캔터키 주 페리빌을 침공한 남군의 브레그도 북군의 뷰엘이 격퇴 |
11월 5일 |
링컨, 매클렐란 해임. 매클레란은 그동안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지휘로 리의 군대를 격파하고 리치먼드를 점령하여 전쟁을 끝낼 기회를 스스로 놓쳐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 |
11월 24일 | < 동부 전선 >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
매클레란의 후임인 번사이드 북군 포토맥군 사령관이 13만여 명을 이끌고 리치먼드를 직접 공략할 계획(좌익은 프랭클린 지휘 하에 1군단과 6군단, 중앙은 후커의 3군단과 5군단, 우익은 섬너 지휘 하에 2군단과 9군단). 롱스트리트가 이끄는 남군도 준비 완료. |
12월 1일 | < 동부 전선 >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
엔티텀 전투 후에 세년도어 계곡으로 돌아간 잭슨이 프레데릭스버그로 합류. 남북군 주력 집결 완료 |
12월 11일 | < 동부 전선 >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
북군 드디어 공격 개시. 이날 하루 종일 프레데릭스버그 시에 대해 포격을 가하면서 6개의 주교를 래퍼해녹 강에 설치. 보병 간 전투는 없었음. |
12월 12일 | < 동부 전선 >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
북군 6개 군단, 래퍼해녹 강을 도하하여 시를 점령하고 교두보 확보 |
12월 13일 | < 동부 전선 >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
섬너 휘하의 2군단을 주공으로 북군 공격 개시. 그러나 돌담 장벽에 걸려 북군은 엄청난 피해만 입고 물러남. 북군 사상자 1만 2천여 명. 남군 사상자 5,400여 명 |
12월 14일 | < 동부 전선 >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
북군, 래퍼해녹 강을 건너 후퇴. |
12월 15일 | < 서부 전선 > | 남군 포레스트 기병대, 테네시 주의 그랜트의 보급기지 기습 |
12월 20일 | < 서부 전선 > |
남군 벤돈 기병대, 홀리 스프링의 그랜트 보급기지 기습. 10월 이후 빅스버그 공략을 준비하던 그랜트는 결국 이로 인해 테네시 주 북쪽으로 철수. 그러나 철수 과정에서 보급을 현지조달을 하여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훗날 "셔먼의 초토화 작전"의 기본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것은 20세기에 들어와 공군에 의한 전략 폭격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
12월 26일 | < 서부 전선 > 스톤스리버 전투 |
북군 로즈크렌스가 병력 4만 2천으로 머피르스브로를 점령하고 남군 브레그 군을 격파하기 위해 출동 |
12월 30일 | < 서부 전선 > 스톤스리버 전투 |
북군 로즈크렌스 군, 머피르스브로 북서 2마일 지점까지 진격 |
12월 31일 | < 서부 전선 > 스톤스리버 전투 |
남군, 로즈크렌스의 북군을 아침 식시 시간에 기습 공격. 북군은 최초 진지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밀려나게 됨 |
날짜 | 전선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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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 북부, 노예 해방 선언 효력 발생 | |
< 서부 전선 > 스톤스리버 전투 |
북군, 남군에 대해 반격 개시. 스톤스 리버 동쪽 고지 점령 성공 | |
1월 3일 | < 서부 전선 > 스톤스리버 전투 |
남군 반격 작전 실패. 브레그는 남군을 25마일 남쪽의 덕 리버 건너편으로 철수 |
4월 2일 |
남부연맹 수도 리치먼드에서 물가 상승에 분노한 아줌마들의 폭동 발생. 이 당시 남부의 물가는 월별로 100%인플레이션됨. 리치먼드 이후에도 오거스타, 콜럼버스, 모빌 등 6~7개 도시에서도 비슷한 폭동 발생 | |
7월 1일 | < 동부 전선 > 게티즈버그 전투 |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에서 조지 미드 장군이 이끄는 북군이 로버트 E. 리 장군이 이끄는 남군을 격파. 첫째 날인 이날, 뷰포드가 지휘하는 북군 기병대가 남군의 힐 군단 예하 히스 사단과 전투를 시작하면서 시작됨. |
7월 2일 | < 동부 전선 > 게티즈버그 전투 |
게티즈버그 전투 2일째 |
7월 3일 | < 동부 전선 > 게티즈버그 전투 |
게티즈버그 전투 마지막 날. 소위 "피켓의 돌격'. 남군이 패배하여 후퇴 시작. |
7월 4일 | < 서부 전선 > |
빅스버그, 북군의 그랜트에게 항복. 이로서 미시시피 강 북군이 완전히 통제하게 되어 남부는 동서로 분리되는 결과 초래. |
11월 19일 |
링컨, 게티즈버그 연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민주주의 이상을 함축한 연설로 유명 |
<위키백과사전>
게티즈버그 전투(Gettysburg, Battle of)
남부군의 리 장군
1863년 7월의 시작과 함께 북군에게는 승리의 여신이 미소를 지었고 남군에게는 멸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한발 닥아서게
되었다.
챈설러즈벌전투에서 패배한 북군에서는 후커의 사임을 받아들이고 미드(George G(ordon) Meade / 1815 ~ 1872)장군에게
포토맥군의 지휘를 맡겼다.
포토맥강에 진을 치고 있는 미드가 이끄는 북군을 공격하기 위해 남군의 리 장군은 먼저 병력의 일부를 전략상 요충지인
게티즈버그로 보내어 그곳을 점령하기로 했다.
그러나 게티즈버그를 수비하고 있던 포토맥군의 저항이 워낙 완강해서 남군의 전략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결국 리가 이끄는 남군 7만 5천 명과 미드가 지휘하는 북군 8만 8천 명이 7월 1일부터 3일까지 게티즈버그에서 미국의 운명을
걸고 일대 혼전을 치렀는데,
전투 첫날인 7월 1일, 북군에서는 스펜스 기관총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좋은 성과를 올렸고, 전투 둘째날인 7월 2일은
이곳저곳의 고지와 능선과 계곡을 먼저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이 치러졌다.
전투 3일 째인 7월 3일, 남군의 리장군은 총공격을 시도했지만 많은 사상자만 내고 실패하고 말았다. 7월 4일, 많은 전투력을
상실한 리는 북군이 공격해 올것으로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미드의 포토맥군은 공격해 오지 않았고, 그날 밤 폭우를
이용해서 리의 남군은 버지니아로 철수했고 미드는 철수하는 리를 공격하지 않았다.
게티즈버그에서 치런 3일간의 전투에서 북군은 약 2만 3천, 남군은 약 2만명의 사상자를 내어 남북전쟁기간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다.
남군의 리는 철벽장군 잭슨을 잃은 후 이를 대신할 만한 유능한 장군을 얻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패전의 원인이었고,
포토맥군의 사령관 미드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뛰어난 전술을 인정 받았으나 후퇴하는 리의 남군을 도망갈 수 있도록
방치했다는 비난도 동시에 받았다.
빅스버그 회전(Vicksburg Campaign)
북군의 그랜트 장군
게티즈버그에서 폭우와 야음을 틈타 초라한 몰골로 남군이 후퇴했던 7월 4일,
북군의 장군 그랜트는 5개월 여의 긴 작전 끝에 미국의 남부 미시시피주 빅스버그에서 이곳을 수비하고 있던 남군의
펨버턴(John Clifford Pemberton / 1814 ~ 1881)장군과 그의 휘하 장병 약 3만 명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게티즈버그전투가 3일만에 끝난 것과는 달리 빅스버그 전투는 1863년 봄부터 산발적으로 양측이 팽팽히 맞서다가
그랜트의 치밀한 포위작전이 맞아 떨어저 결국 고립된 남군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항복함으로써 남북전쟁에서 또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그랜트는 명성을 얻고 이듬해 북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헨리 요새와 도넬슨 요새를 잃은 남부에서는 미시시피강 연안도시 멤피스와 뉴올리언스 중간지점에 위치한 빅스버그에 포대를
만들어 함대 침입에 대비하고 일대의 농가를 징발하여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여 육전에 대비했지만 데이비스 정부와 일선
지휘관들간에 의사 소통이 원할치 못한 것 등이 원인이 되어 결국 이 중요한 요새를 잃고 말았다.
어쨌거나 이후에도 서로가 승리를 주장한 전투가 몇 차례 있었지만 1863년 7월 4일을 고비로 전세는 북군에게 유리해 졌고,
11월 19일에는 이른 바 링컨의 게티즈버그연설이 있었다. 64년 그랜트는 북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포토맥군을 지휘하게 되었고
리는 남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서남부의 군사까지 지휘하게 되었다.
그랜트의 북군은 리치먼도 외각 11킬리미터 지점까지 진격, 리의 방어벽에 부닺쳐 리치먼드 점령에 실패하고 전쟁은 다시
지구전으로 돌입했다가 1865년 4월 3일 그랜트의 포토맥군은 리치먼드를 점령하고, 퇴각로가 막힌 리는 4월 9일 애퍼매턱스
코트하우스 근처에서 그랜트에게 품위를 지키며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한편 남쪽에서는 북군의 장군 셔먼이 북쪽으로 이동하여 노스캐롤라이나 주까지 들어가 4월 26일 J.E. 존스턴장군의 항복을
받았다. 이로써 1861년 4월 12일 섬터요새의 포격으로 시작된 미국의 남북전쟁은 만 4년 12일 만에 끝났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후 처리라는 더 복잡한 문제들, 이를테면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의 주를 다시 연방에 복귀시키는 일,
흑인노예의 해방과 그 처리문제, 전쟁으로 피폐된 국토의 재건 등이 남아 있었다.
<출처: 이길상의 세계사풀이>
그랜트 장군 국립기념관
승자와 패자
- 지도자와 리더의 그릇을 일깨워준 그랜트와 리
지도자의 그릇에는 국가이익과 포용이 들어 있어야 한다.
북군의 그란트(Grant)장군과 셔먼(Sherman) 장군은 1865년 봄 남부군의 수도 버지니나의 리치몬드(Richmond)를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4월 2일, 남부군이 리치몬드를 포기하고 후퇴하자 그란트 장군은 퇴로를 차단하고 남부군을 포위한 후에
로버트 리 장군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정중한 서신을 보냈다.
남부군의 리(Lee) 장군은 더 이상의 항전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장병들의 희생을 막고자 항복을 결심하였다.
1865년 4월 9일, 에포메톡스 군청 옆 농가에서 그란트 장군과 항복에 관한 회담을 가졌다.
남부군의 리 장군은 수려한 용모에 잿빛의 남부군 정장과 버지니아 군도를 차고 위용을 갖추고 참석했고, 반면에 그란트
장군은 꾸기 꾸기한 병사들의 작업복 차림이었다.
그란트 장군은 예를 갖추면서 옛날 같이 참전했던 맥시코 전투를 이야기 하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였다.
그란트 장군이 항복 조건을 써내려 갔다. 항복조건은 매우 관대한 것이었으며 남부군이나 남부 주민들의 위상을 고려하고,
미국 전체의 화합을 위해 전쟁에 대한 책임이나 남부군의 전범 처리에 대한 어떠한 문구도 없었다.
항복문서의 요지 중에 상대를 인정하고 배려하며 이해와 용서를 위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전 세계의 많은 전쟁 중에
지금까지 싸웠던 적을 배려하고 용서한 전례는 없을 것이다.
즉 “남부군의 장교와 병사들은 항복서명을 한 후 즉시 석방한다. 무기와 병기는 북군에게 인계한다. 장교는 허리에 찬 무기를
그대로 휴대해도 좋다. 말을 필요로 하는 장병은 지금가지 타고 다니던 말을 가져도 좋다."
(먼 길을 가고 농사에 필요하기 때문임)
패한 리 장군은 항복조건에 사의를 표하면서, 그란트 장군에게 부하들이 그 동안 너무 굶주렸음으로 식량을 지원해 주기를
요청했다.
그란트 장군은 북군에게도 부족한 식량을 남군에게 2만 5천 명 분을 즉각 지원하였다.
리 장군은 항복 후에 애마를 타고 남군 진영으로 돌아가자 북군진영에서는 승리의 기쁨에 모자를 던지고 환호했다. 그리고
대포를 쏘며 밴드가 울려 퍼졌다. 패장에 대한 예우다.
그란트 장군은 “전쟁은 이제 끝났다. 남부군도 이제는 우리 국민이다.”라는 연설을 하고 모두를 포용했다.
남부의 대통령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는 체포되지 않고 사면되었으며, 패장인 남부군 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은 대학의
총장으로 부임하였다. 전범의 수괴로 처벌되지 않았다. 미국의 미래를 위해 화해와 포용을 선택했다.
국가이익과 국가발전을 먼저 생각하고 결심한 그란트 장군과 링컨(Lincoln) 대통령의 판단이 오늘의 미국이라는 대국을
건설할 수 있는 기본 개념이자 정신이 되었다.
< 조 흥래 박사의 “미국 역사” 중에서 / 서경석>
링컨기념관과 링컨상
게티즈버그연설(Gettysburg Address)
워싱턴 D C에 있는 링컨기념관에 들어서면 정면에 링컨의 좌상이 있고 왼편 벽면에 유명한 게티즈버그연설 전문이 새겨저
있다.
남북전쟁의 결정적인 전투(1863. 7. 1~3)가 벌어졌던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가 국립묘지로 지정되고 그 개소식이 1863.
11월 19일에 있었다.
개소식 행사는 2시간 정도 진행되었고 그 중 1시간 이상을 당대의 최고 웅변가로 알려진 에드워드 에버렛이 장황하게
연설했다.
아무리 최고의 웅변가라하지만 참석했던 사람들은 지루함을 느꼈다.
이어서 계속된 링컨의 연설이 매우 길고 지루할 것으로 여겼던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2분 정도의 짤막한 연설로 끝나자
사람들은 우선 많은 박수를 보냈다.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할 것으로 여겼던 이 연설이 그뒤 민주주의의 표상으로 널리 인용되고 산문시의 걸작으로 찬사받게
되리라고는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몰랐다.
링컨의 이 연설문은 기차를 타고 행사장에 가는 동안 봉투 겉봉에 서둘러 썼다는 통설이 있으나 사실과는 다르고 링컨이
심사숙고하여 작성하였으며 거듭 수정함에 따라 5개의 사본이 전한다.
The Gettysburg Address by Abraham Lincoln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up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here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it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 not dedicate -- we can not consecrate -- we can not hallow 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have, thus far, so nobly carried on.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 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here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 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 that this nation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and that this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87년 전 우리 선조들은 자유라는 이념으로 이 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고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믿음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엄청난 내전에 휩싸여 자유와 평등을 바탕으로 세운 이 나라가 존립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내전의 격전지였던 바로 이곳에서 모였습니다.
우리는 격전지의 한 부분을 자유와 평등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영원한 안식처로 마련해주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이곳을 신성화할 수 없습니다. 죽기를
무릅쓰고 여기서 싸웠던 용사들이 이미 우리의 미약한 힘으로는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이곳을 신성화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말은 별로 오래 기억에 남지 않겠지만 그분들의 희생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우리는 그분들이 고귀하게 이루려다 못다 한 일을 완수하는 데 전념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남겨진
위대한 과제, 즉 명예롭게 죽어간 용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헌신했던 대의를 위해 우리도 더욱 헌신해야 한다는 것,
그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우리의 결의를 굳건히 다지는 것, 하느님의 가호 아래 이 나라가 자유롭게 다시
탄생하리라는 것, 그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세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