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룰(Rule).
나는 재앙을 불러들였고, 그리하여 모래와 피로 숨이 막혔다. 불행은 나의 신이었다.
-‘쟝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의 <서시>
그가 죽은 후 그는 내 앞으로 자신의 친필 유서를 남겼다.
나의 모든 것을 나의 친구이자 나의 神이었던 박희태에게로......
단 몇 줄의 까만 글자만이 하얀 백지를 장식하고 있다.
난 그가 죽은 지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유서를 손에 쥔 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들여다보고 있다.
내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그의 유서는 날이 갈수록 종이 귀퉁이가 닳아갔고, 연달아 접은 자리는 손끝으로만 건드려도 힘없이 나가떨어질 것 같다.
몇 분을 그 것을 붙들고 들여다 보았을까?
내 머릿속은 조금 전 해야 할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랍장 한 구석에 박혀있는 그의 유서가 생각나자 해야 할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그 자리에 앉아 내내 그 것만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모든 것, 그 놈의 모든 것, 그 자식의 모든 것, 그 새끼의 모든 것, 그 나쁜 놈의 모든 것.......
당장이라도 내 마음은 그의 유서를 찢어 발겨 쓰레기통에 넣어 버리고 싶어했지만 내 손은그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 방 어디에선가 그가 보고 있을 것이다.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눈동자를 부릅 뜨고 바라본다.
하지만 그는 어느 곳에도 없다.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천장 구석, 화장실, 베란다, 쇼파. 책상 밑, 탁자 밑, 씽크대 밑, 세탁기 안, 선반 아래, 서제 구석......
어디에도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없다.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다.
그는 내 등뒤에 붙어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항상 감시하 듯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자신이 쓴 유서를 얼마나 없애버리고 싶어하는지 내 등뒤를 거머리처럼 딱 붙어 있는 그는 알 것이다.
나는 그의 유서를 원래 있던 책상 서랍 안으로 곱게 접어 밀어넣었다.
나의 모든 것을 나의 친구이자 나의 神이었던 박희태에게로......
그가 죽은 지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난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이 무엇인지, 그 모든 것을 내가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내 아버지는 용접공이었다.
지금은 작은 지방 도시에서 5년 전 재혼한 여자와 철물점을 운영하고 있지만 내가 어렸을 때 나의 아버지의 직업은 비릿한 쇠냄새 풀풀 풍기고 다니는 평범한 용접공이었다.
내가 죽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초등학교 5학년인 그 해 여름이었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인부들과 일에 대한 회포를 풀 겸 아버지는 종종 무리지어 공장 근처 대폿집으로 가 밥도 먹고, 술을 마시곤 하였는데 그는 아버지가 단골인 대폿집을 싼 값으로 사버린 여자 주인의 아들이었다.
당시 어린 내 눈으로 봐도 대폿집 여자 주인은 평생 직업이 술집 작부라는 것을 보여주 듯 색기와 요염미를 풀풀 풍기고 다녔다.
눈두덩은 누군가에게 얻어 맞은 것처럼 파란색으로 진하게 칠해져 있었고, 입술은 지나치게 두툼하고 새빨개 언제든지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네 아낙들과는 다르게 화려한 꽃무늬의 한복을 입고 다닌다거나 지나치게 짧은 치마나 바지를 입고 다니면서 손님을 끌어보려 애를 썼고, 단골이나 처음보는 남자들이 가게에 발을 들여놓기만 해도 농익은 자태를 드러내며 진한 애교를 부려댔다.
그는 작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그의 이름은 '하진‘이다.
작부인 어머니의 성씨가 하씨인지, 아니면 친아버지의 성씨가 하씨인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그가 나에게 자신에게는 아버지가 여러 명이었고, 친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작부인 어머니의 성씨는 인륜을 끊어버린 이 후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여자들 틈에서 어린 시절부터 자라왔으니 엄마의 젖냄새보다는 술냄새와 여자들이 풍겨대는 살콤한 지분냄새에 더 익숙해져 있었다.
여자들 틈바구니에서 자라와서 그런지 어린 시절 그는 남자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곱상하고, 단아한 자태를 풍겼다.
나는 처음에 녀석이 여자아이인 줄 알고 있었지만 남자아이라는 사실을 알고 곱상한 외모가 눈에 먼저 들어와서 그런지 심하게 놀라며 강제로 그의 바지를 벗겨 성기가 달렸는지를 확인했다.
녀석의 성기는 내 것보다 훨씬 컸다.
내가 놀란데에는 그 아이가 남자아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 때문이 아니라 곱상한 얼굴에 아래에 달려있는 성기는 끔찍한 흉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강제로 바지를 벗긴 데에 대한 복수인지 수치심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인지 어린 시절 그는 곱상한 외모와는 다르게 자존심이 강하고, 난폭한 녀석이었다.
놈은 허락도 없이 자신의 바지를 벗겨 본 나의 따귀를 사정없이 때렸고, 녀석도 나의 바지를 강제로 벗겨 성기를 눈으로 확인했다.
적대감과 뭉개진 자존심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던 그의 어린 눈빛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그 때가 엊그제 바로 일어난 일같다.
5월 5일.
어린이 날이다.
나에게는 나의 딸아이가 태어난 생일이라는 점이 더 중요한 날이다.
딸아이를 만나기로 한 곳은 잠실의 롯데월드이다.
딸 아이는 한 달 전부터 자신의 생일에 롯데월드에 데려다 달라고 심심하지 않게 졸라댔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유치원에 다녀와서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에게 전화를 걸어 롯데월드에 같이 가자고 졸라댔다.
딸 아이 생일 날 아내는 그 날도 미대 진학을 앞둔 아이를 봐줘야 한다며 자신은 빠지겠노라고 말을 했지만 영리한 딸아이는 아내가 동행하지 않으면 자신도 가지 않을 것이라 협박을 했다.
그래서 아내 역시도 마지 못해 동행을 하게 된것이다.
잠실역 3번 출구쪽 롯데백화점 트레비 분수에서 12시에 만나기로 한 나는 조금 일찍 나와 기다리고 있다.
그 전에 백화점에서 딸아이의 어린이 선물 겸 생일 선물을 골라야 했다.
아동복에서부터 장난감, 문구류, 신발 등 국적을 막론하고 다양하게 전시되어 지나가는 아이들 손님들의 이목을 잔뜩 끌고 있다.
어린이 날이라라는 명성 덕분인지 백화점 어린이 코너에는 넘쳐나는 아이들 때문에 발 디딜 틈고 없이 분주했다.
원하는 장남감을 사주지 않는다고 백화점 바닥에 등을 붙인 채 크게 울고 있는 남자아이, 난감해 하는 아이 엄마는 남자 아이를 아무렇게나 버려두고 그냥 가는 척한다.
아빠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잠을 자고 있는 여자 아이, 여자 아이의 언니로 보이는 아이는 꼭 딸아이 나이 또래로 보이는데 화사한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젊은 부부, 백화점 장난감 내부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동요, 장난감이 움직이는 건조한 기계 소리, 백화점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방불케했다.
내가 걸음을 멈춘 곳은 아동복코너에서 였다.
젊은 엄마, 조금 나이 든 엄마를 가리지 않고 아동복 코너에도 많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몰려들어 있다.
나는 어느 마네킹이 입고 있는 청원피스를 바라보고 있다.
손으로 만져보았다.
보드라운 감촉이 손끝으로 묻어났다.
나는 대범하게 손 전체를 청원피스 원단에 맡겼다.
나를 발견한 여자 점원이 다가와 살가운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찾으시는 것 있으세요?
살가운 웃음을 띠며 접근한 여 점원은 약간 둥글고,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는 그리 크지 않는 키를 소유한 여자였다.
통통한 것이 어느 정도 매력이겠다 싶은 여자 점원은 입가에서 살가운 웃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만진 원피스를 바라보며 깜찍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간접적으로 마음에 드느냐고 물은 것이다.
나는 웃음을 지으며 다른 것들도 조금 더 보고싶다며 옷이 진열된 곳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다.
시원한 연두색 칼라의 원피스를 집었다.
가격은 10만원이 조금 넘었다.
딸 아이가 이 옷을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여름 휴가라도 떠난다면 귀엽겠다고 생각했다.
여점원은 언제 왔는지 다시 다가와 여전히 살가운 웃음을 내지었다.
따님이신가봐요. 이제 곧 여름인데 참 시원하게 보이죠? 현재 이 상품이 가장 잘 나가구요, 또 이 것두요.
여자 점원은 맞은 편이 자리한 노란색 스커트와 동일한 색상의 후드티를 들어보였다.
한 벌이예요. 이 것도 요즘 잘 나가는 상품이예요.
연노란색이 앙증맞아서 여자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상품인데 입혀놓으면 아주 예뻐요.
사람들로 버글거리는 백화점에서 여자 점원의 입모양과 말소리밖에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가 손에 든 연두색의 원피스와 함께 노란색 한 벌짜리를 딸아이의 새침하고 통통한 얼굴을 떠올리며 두 옷을 한 참 번갈아 보았다.
어느 것을 입어도 잘 어울릴 것 같다.
나는 두 벌 다 포장을 해달라고 부탁하며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점원은 인파가 붐비는 와중에도 익숙한 손놀림으로 내가 산 상품을 포장했다.
나는 딸 아이의 옷 두벌을 사고, 레이스가 예쁜 양말 한 켤레와 130센티미터짜리 소꿉놀이 세트를 사 딸아이와 만나기로 한 드레비 분수로 향했다.
이리저리 둘러본 끝에 한참만에 딸아이와 아내를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근처 패스트푸드 점에서 햄버거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많이 기다렸니?”
햄버거를 먹다말고 딸 아이는 소스를 입가에 묻힌 채 팔딱 뛰어와 내 품에 안겼다.
“어이구, 우리 세연이. 아빠가 안 본 사이에 많이 컸네.”
나는 딸 아이의 실크보다 더 보드라운 볼을 만졌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딸 아이에게 뽀뽀를 해달라며 볼을 내밀자 딸 아이가 내민 촉촉한 입술이 내 뺨에 묻어났다.
나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내도 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좋아하지도 않은 인스턴트 커피를 시간 떼우려고 마시고 있었다.
주문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커피에는 옅은 김이 천천히 오르다 사라졌다.
나는 딸아이에게 주어야 할 선물을 아내에게 내밀었다.
아내는 쇼핑백을 열어보고는 이게 뭐냐고 물었다.
“세연이 옷이랑 장난감.“
세연이를 옆에 앉히고 나는 아내를 마주보았다.
“왜 이런데서 이런 걸 먹고 있어? 먹으려면 백화점 식당가에나 가지.”
“세연이가 먹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아내는 짧게 대답을 하고 앞에 높인 커피를 홀짝거렸다.
나와 함께 살던 때보다 부쩍 살이 빠져 있었다.
목선이 더욱 가늘어지고, 얼굴이 더욱 갸름해졌다.
"아빠 햄버거 맛있어. 아빠도 먹어. 자 아.“
세연이는 자신이 먹던 햄버거 한쪽을 내 입술로 들이미었다.
새콤한 소스 냄새와 더블어 마요네스 냄새, 고기 냄새가 코밑으로 올라왔다.
먹기 싫었지만 세연이를 위해 나는 한 입 베어물고 미소를 지었다.
아내는 세연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냅킨으로 닦아주었다.
“우리 세연이 생일인데 뭐 먹고 싶은거 없어? 아빠가 오늘 맛있거 다 사줄게.”
아내와의 사이에서 흐르는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고 싶다.
“세연이 랍스타 먹고 싶은데. 이따만한 가제.”
세연이는 햄버거를 든 손을 최대 올릴 수 있는 만큼 올려 동그라미를 그려보였다.
“세연아. 랍스타는 얼마 전 엄마랑 먹었잖아.”
아내가 참견을 했다.
“그래도 또 먹고 싶은데?”
“잘 먹지도 못하면서. 안돼.”
“싫어. 랍스타 아니면 다른 것도 안 먹을거야.”
어린 세연이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왜 그래? 저번에 먹었다고 이번에도 먹지 말라는 법 있어? 세연아. 아빠가 하늘만큼 땅만큼 큰 랍스타 사줄게. 울지마. 뚝.”
랍스타를 사준다는 말에 세연이는 지었던 울상을 금세 풀고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이따만한 랍스타 라는 말을 반복했다.
오늘 아내는 칠흑같이 까만 브이넥 셔츠를 입었다.
가슴 위가 시원하게 파여진 까만 브이넥 셔츠가 어쩐지 고혹적인 세련미라고 표현을 해도 무방할만큼 그녀의 취향과 멋을 더하고 있었다.
아내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어디서 떨어져 나온 원시인 같은 기분이 들었고, 한순간에 팍 늙어버린 남자가 된 기분이다.
패스트 푸드점은 앉을 자리도 없을 만큼 빼곡하게 사람들로 가득찼다.
간혹 빈자리가 눈에 들어오면 사람들은 낯선 사람이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엉덩이를 재빨리 붙이기 바빴다.
세원이는 햄버거 하나를 다 먹고, 콜라를 빨대로 빨아먹고 있다.
아내는 세원이의 콜라는 손에 들고 일어섰다.
그녀는 이제 그만 롯데월드 가자 라며 세원이의 손을 잡았고, 나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아빠 손 잡아줘.”
세원은 나머지 한 쪽 손을 내밀었다.
내가 잡은 세원이의 손은 햄버거의 소스 때문에 심하게 끈적거렸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비릿한 쇠냄새가 났 듯 세원이에게서는 느끼한 튀긴 고기 냄새가 풍겼다.
세원이 생일이자 어린이 날인 오늘은 롯데월드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자유 이용권 두 장을 끊는데 한 시간 반 정도가 소비되었고, 늦은 점심을 먹는 시간에도 한 시간동안이나 줄을 서서 기다려 먹어야 겨우 한 끼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많이 몰림에 따라 고달파진 사람들은 점원들과 안내원들이다.
몰려드는 사람들을 일일이 상대하자니 짜증이 심하게 날 것이다.
세원이가 먹고싶어한 일식 돈까스 집의 여자 점원은 힘든 얼굴을 한 채 한 껏 짜증 어린 얼굴로 손님들의 주문을 받았다.
롯데월드를 나와 나는 가족들과 늦은 점심이 소화가 되지 않아 한강으로 잠시 나들이를 갔다.
초여름이 다가오는 문턱이라지만 해가 져 가자 밖의 날씨는 상당히 쌀쌀했다.
나는 그녀에게 따끈한 캔 녹차를 내밀었고, 커피를 샀다.
세원이는 한강에서 산 나비 장난감에 팔려 이리저리 공원을 뛰어다니며 즐거워했다.
세원이가 막대를 잡고 이리저리 움직이면 나비 날개가 파닥거리면서 함께 같은 방향으로 가는 장난감이다.
아내가 녹차를 마시는 소리가 들린다.
당신을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어.
아내는 처음으로 나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롯데월드에 죽 있는 동안 아내는 내 존재를 아예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당신 아직도 하진형을 잊지 못하고 있잖아. 난 그 모습이 보기 싫어.
아내의 말에 나는 아무런 변명이나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씁쓸한 웃음만을 지어보였다.
어린이날의 여파를 알리 듯 한강 공원은 세원이 또래의 아이들로 넘쳐났고, 아이들 때문에 덩달아 신이 난 어른들은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나 혼자 당신과 함께 사는 것 같으면 당신의 존재가 빈껍데기라도 난 좋았을거야.
그런데 나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신과의 이혼을 결정할 수 밖에 없었어.
말 안해도 알겠지만.
차가워진 빈깡통을 그냥 옆에 놓았다.
알아. 잘한 결정이야. 당신의 결정은 탁월했어. 내가 당신 입장이었더라도 그랬을거야.
죽은 그, 하진과 나는 소꿉친구, 그녀와 하진은 같은 대학 같은 과 동기였다.
하지만 하진이 군재대를 하고 와 나이가 3살이나 더 많았으므로 그녀에게는 하진을 형이라 부르며 따라다녔다.
용접공인 아버지의 부탁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아버지가 풍기는 비릿하고 칼칼한 쇠냄새에 중독이 된 것인지 나는 금속공학를 다니고 있었고, 하진과 그녀는 미대의 서양학과를 재학중이었다.
대학 재학 시절 그녀는 하진의 몸에서 풍기는 그 어떤 마력에 이끌려 그를 따라다니게 되었다며 고백했다.
하진은 여자를 싫어한다.
여자가 가까이 왔다고 생각만해도 머리에 쥐가 내린다고 할 정도로 여자를 싫어했다.
특히 그는 지분 냄새를 풍기며 향수 냄새를 풍기는 여자를 싫어했다.
같은 과 여학생들 중에서는 공부보다는 남자를 꼬시는데 목적이 더 컸던 아이들도 많았는데 하진에게서 그런 여자애들은 인간말종 보다 더한 외계생명체라며 보는 앞에서 역겨워 한 적도 많다.
그는 같은 학과 내에서 사람들가 잘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하진은 미술 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학교 문학상을 한 번 수상하고, 군입대를 하기 전 심심해서 써놓은 소설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어 소설가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얻었지만 그는 그런 것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심하게 괴팍하고 꼬였고, 인간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놈이었다.
하진의 명성 때문에, 그의 깎아놓은 듯하게 매끄러운 얼굴상 때문에 그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했던 여성들은 많았다.
대놓고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싶다고 말한 여자들도 수도 없을 지경이다.
그에 비해 나는 평범하고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남자였다.
이상하게 다른 여자아이들은 무섭다고 접근도 하지 않는 하진의 등 뒤에 딱 달라 붙어 ‘형 형’하고 조금은 코맹맹이 소리로 애교를 부려대는 그녀를 어느 새 하진 그 놈이 이해 된 것이다.
우리 세 명은 늘 상 붙어있다시피 함께 했다.
그녀는 종종 새벽이나 밤 중에 맥주나 야참을 사들고 우리들에게 잘 왔다.
그러다 아침이 되면 우리 세명은 쓰린 속을 부여잡고 학교로 등교했다.
하진이 여자의 향수 냄새와 지분 냄새, 진한 화장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아는 그녀는 눈썹을 그리는 화장 말고는 얼굴에 손도 대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은 그녀가 화장을 한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런 그녀가 나와 결혼을 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의아해 하면서 놀랐다.
다들 하진과 결혼을 할 것이라 예상을 했다.
나 역시도 그녀가 하진과 결혼을 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나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먼저 고백을 한 것이다.
그것도 하진이 옆에 있는 곳에서.
그녀는 나를 만나고 싶어 하진에게 접근했다고 속시원히 털어놓았다.
100% 완벽해 보이는 남자는 여자를 부담스럽게 한다는 것이 그녀의 결론이다.
그녀는 내 평범한 이미지 속에서 자신을 매료시키는 그 무언가를 느꼈다고 했다.
“지금도 나에게 당신을 매료시키는 그 무언가가 있는거야?”
조용히 한강의 물살을 구경하고 있던 그녀는 내 질문에 고개를 확 바꿔 나를 본다.
“나와 결혼을 하기로 마음 먹은 그 날 밤 당신이 내게 한 말 있지.
지금 그 말이 생각나서 그래. 100% 완벽한 남자한테는 흥미가 없다고 했지.“
“지금도 그래.”
“당신을 매료 시키는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인가? 아니면 아직도 100% 완벽한 남자한테는 흥미가 없다는 말이야?”
“지금도 그렇다구.”
그녀는 어느 쪽으로 생각을 하든 마찬가지라는 뜻으로 들으라는 식이다.
나비 장난감을 한 참 가지고 놀던 세연이가 힘없이 뛰어왔다.
아이의 얼굴에는 고단한 흔적이 가득했다.
총명하게 빛이 났던 조금 전과는 달리 졸음을 가득 쥔 눈을 하고 그녀에게로 뛰어들었다.
“엄마 나 졸려.”
그녀는 세연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지금 졸리면 어떡하자는거야? 아빠가 너 그렇게 먹고싶다고 한 랍스타 사줄 건데.”
“랍스타 다음에 먹으면 안돼? 나 다리 아프고 잠이 와.”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간한 얼굴이 되어 나를 또 바라본다.
“세연아. 한 시간만 아빠 차 안에서 자자. 자고 일어나서 랍스타 먹으러 가자.”
세연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을 스르르 감으며 힘없이 축 늘어진 채 그녀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녹아가는 얼음과 같은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차가운 바람에 몸을 떨면서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는 검정 가디건을 자는 세연의 몸위에 덮었다.
자고 있는 딸의 얼굴을 사랑스러운 눈동자로 바라본다.
잠시동안 나는 그녀와 이혼을 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여느 부부와 다름없는 다정함으로 잔디 위에 앉아 있는 우리 두사람을 그 누가 감히 이혼한 부부라고 생각하겠는가?
잠시동안 나는 죽은 그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는 위암으로 죽었다.
암세포는 빠른 속도로 그의 위장을 갉아먹으면서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가 고통을 호소하고 쓰러졌을 때 암은 중기가 도달해 있었다고 한다.
술집 작부 모친과 연을 끊은 후 그는 나 외의 사람들은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다.
불규칙한 식사습관, 거의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지낼 때도 있었다.
빈 속에 들어간 것은 음식이 아닌 술이었다.
몇 년 동안 밥을 먹는 것처럼 마셔온 술이 원인이 되어 대학 재학 시절에는 위장에 구멍, 위궤양천공이 생겼었다.
그 것으로 인해 그는 위장의 반쯤을 도려내고 말았다.
위궤양 천공을 치료를 한 지 10년만에 그것은 암이라는 병이 생겼다.
그는 수술받기를 거부했다.
수술받을 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심심풀이로 한다는 문학상 도전과 미술상 도전으로 많은 상금을 받았고, 그로인해 많은 돈을 벌었다.
그가 벌어들인 돈은 수술비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암 중기는 꾸준한 약물치료와 수술만 잘 하면 쾌유가 되는 병이다.
시대가 차츰 빠른 속도로 변하고, 예전에는 없었던 병들이 속속 등장함에 따라 의학발전도 자연적으로 이루어졌고, 옛날에는 걸리면 100% 죽는 병으로 알았던 암이라는 것이 지금 이 시대에는 보통 평범한 병과 마찬가지로 인식이 되어버렸다.
암 중기를 그대로 키워 말기로 만들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는 차츰차츰 말라가고 있었고, 피부에는 윤기가 돌지 않았다.
눈밑은 사자(死者)의 눈처럼 궹하니 뚫려 있었고, 다크서클은 그의 뺨을 곧 파고들 듯 광활하게 퍼져나갔다.
그는 방사선 치료도 거부를 한 채 출가한 스님의 몰골처럼 득도를 하려는 자세와 표정으로 하루 종일 앉아 햇빛도 쬐려하지 않았다.
등은 새우의 등처럼 굽어있고, 숨 쉬는 것을 망각한 듯 호흡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위암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술을 원했다.
술은 안된다고 충고하던 젊은 간호사의 뺨을 때렸고, 그를 말리던 남자 의사들에 의해 그는 정신병동으로 수감되어버렸었다.
나는 그에게 생수통을 내밀었다.
그는 처음에 그것이 단순한 생수인 줄 알고 외면했다.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내가 그에게 생수를 내밀리 없다는 것을 알았다.
황급히 생수뚜껑을 따서 아무데나 던져버리고 무섭게 그것을 입안으로 가져가 목구멍을 움직였다.
생수 통안에 있는 소주들은 폭포수처럼 시원하게 그의 목구멍 아래로 넘어갔고, 벌컥거리며 개걸스럽게 마셔대는 그의 몰골을 보자 이제 이 생은 마지막 이라는 예감이 불현듯 스쳐지나갔다.
왜 그토록 그는 술을 원했을까?
술 때문에 생긴 병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 그는 술을 원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는 술을 원했던 것이 아닌 이 생을 끊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도구를 원했던 것같다.
내가 내민 생수 병안에 있는 술로 인해 그의 증세는 더욱 악화되어갔고, 위청소를 하며 그를 살리기 위해서인지 병원 안의 내과의들은 견습생들까지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산소 호흡기를 끼고 숨을 할딱거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지금도 생각하면 알에서 갓 태어난 병아리 새끼의 처절한 몸부림을 연상케했다.
그는 힘겹게 할딱거리는 숨을 통해 의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했다.
의사는 비장한 표정으로 그에게 무엇이 필요하냐고 귀에 대고 물었다.
의사는 그의 입술 가까이로 귀를 대고 그가 하는 부탁을 듣고자 했다.
의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그의 주변으로 몰려든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을 모조리 내보냈다.
그도 다른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문 밖으로 나가려 했다.
“환자가 연필과 하얀 종이를 달라고 합니다.”
의사는 나에게 마음의 준비를 철처하게 하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10분 정도가 지나자 의사는 그가 부탁을 했다는 대로 하얀 복사지 한 장과 검정 볼펜을 가지고 들어왔다.
의사는 그를 일으켰다.
여전히 숨을 힘겹게 할딱거리는 그는 다크서클이 뺨에까지 퍼진 궹한 눈을 나에게 보내며 볼펜을 쥐었었다.
나의 모든 것을 나의 친구이자 나의 神이었던 박희태에게로......
출근을 하려고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아침에 울린 갑작스런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 나는 그를 떠올렸다.
아내와 내가 이혼을 한 궁극적인 이유는 아침에 갑작스럽게 울린 초인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천천히 초인종이 울어대는 현관으로 다가갔다.
그가 그 때처럼 나에게 갑작스러운 키스를 한다고 해도 우리의 이 이상한 ‘우정’을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싸구려 어자 벨벳소재의 구두가 눈에 확 들어왔다.
노기로 충만된 얼굴을 내민 채 내 앞에 탐욕으로 일그러진 늙은 작부가 서 있었다.
왜 나를 찾아왔는지 나는 안다.
하진이 내 앞으로 남긴 돈들이 탐이 나서이다.
생모인 자신이 받아야 하는 것들을 하진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인 내가 받았다는 사실이 탐욕스러운 늙은 여우를 더욱 추하게 만들었다.
하진의 생모는 아직도 인정할 수 없다며 아들이 남긴 돈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반정도는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전처럼 나를 다그쳤다.
내가 목석같이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그녀는 부아가 잔뜩 난 얼굴로 씩씩거렸다.
그는 전처럼 내 멱살을 세게 움켜잡고 뺨을 때렸다.
그녀는 아들의 유산을 받을 자격이 아예 없다.
그가 지목한 그의 ‘모든 것’을 받을 권리가 있는 그녀가 아니라 나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이 위암에 걸려 죽을 위기에 걸렸다는 소리를 들어도 새 남자와 차린 살림 때문에 아들같은 것은 모른다고 내버려두었었다.
나는 그녀에게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경찰에 고소하여 더 엄중하게 다스려 달라고 말하겠다고 조용히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그녀는 잡았던 멱살을 놓고 새 남편의 사업이 망하게 생겼다며 거짓말로 호소를 하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등 뒤에 손을 댔다.
그녀가 죽은 하진의 생모인 점이 분명하다
남자와 돈을 급하게 밝히는 늙은 여우같은 여자라도, 하진을 내팽겨치고 작부 일에 매달렸다는 화려한 전적을 가졌더라도 그는 하진을 이 세상에 낳아준 여자인 사실은 분명하다.
나는 하진에게 받은 유산 10%만 그녀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그녀는 겨우 10%밖에 안 주냐며 눈가를 씰룩거렸지만 곧 그 눈길을 거두고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채 돌아갔다.
조용한 아침이다.
하진이 방문한 그 날 아침 역시도 조용했다.
다만 계절이 틀렸다.
그 때는 한겨울이었다.
부엌으로 천천히 건너갔다.
그가 아프리카를 다녀왔다는 허풍을 잔뜩 떨며 부엌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식탁에 놓인 귤을 까 먹고 있었고, 나는 그가 좋아하는 블루 마운틴 메이커의 커피를 끓이는 중이었다.
서재로 건너갔다.
미처 커튼을 거두지 않은 깜깜한 서재에는 조그맣게 새어오는 가느다란 빛줄기 사이로 먼지들이 떠 다니고 있다.
나는 서랍을 열었다.
그의 유서는 여전히 그 자리가 자신이 있어야 하는 자리라는 식으로 아무런 말 없이 놓여져 있다.
나는 늘 하는 일인 것처럼 그의 유서를 천천히 펴들었다.
나의 모든 것을 나의 친구이자 나의 神이었던 박희태에게로......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떠난 그의 바람.
죽은 그를 잊어버리도록 바라는 그녀의 바람.
죽은 그와 내가 잃어버린 그녀, 두 사람을 잊어버리고 싶은 나의 바람.
우리는 자신들이 지키기를 바라고 있는 규칙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
-end-
카페 게시글
두이노 성 안의 성(소설)
단편소설
그들만의 룰(Rule).
黑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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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1.03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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