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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사모]한국사를사랑하는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나도사랑을했으면
이 름 ㅁㅁ
제 목 고려와 송의 힘의 차이
고려는 어떠한 나라였나? - 우리가 잘못알고 있던 고려를 다시 본다
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고려만한 나라도 극히 드물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영문 표기식 KOREA 그 어원이 바로 한국 중세사를 장식한 고려이다. (그런데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해서 국호를 고려라고 한 점을 보면 코리아의 어원은 고구려라 볼 수도 있다)
우리에게 고려는 어떤 나라인가? 만주와 대륙을 지배한 고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에 비해 고려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관심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흔히 고려하면 무신정변, 대몽항쟁, 공민왕의 개혁, 위화도 회군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것은 고려란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고려는 과연 어떤 국가였을까? 필자는 고려 관련 개설서를 읽어본 결과 고려가 고구려, 발해에 못지 않은 자랑스런 우리의 역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영토면에서는 고구려, 발해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외교적 측면에서 보면 고려를 따라올 나라는 없다. 지금부터 필자는 고려가 어떠한 나라였는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1. 군사 + 외교 강국 고려
고려가 군사강국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고려에 대한 무지에서 온 글이다. 고려는 당대 중원을 차지한 송과 비교해볼 때 국력면에서 송보다 앞선 국가였다. 고려는 국초에 광군 30만명을 운용하였다. 구당서를 보면 고구려 전성시 강병 30만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고려가 광군 30만명을 운용하였다는 건 고려가 기본적으로 군사적 능력을 갖춘 강국이었음을 뜻한다.
고려는 당시 동아시아 패자 거란족의 요나라의 침입에 맞서 무려 3번이나 그들을 물리치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강동 6주를 얻어냈다. 같은 시기 송나라가 거란족에게 연전연패하고, 나라를 보존하고자 전연의 맹을 맺어 거란족에게 공물을 바쳐 나라를 보존한 것과는 완전히 처지가 다르다.
고려는 중기에 별무반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족을 토벌하여 저 멀리 송화강 유역까지 진출(윤관 장군의 동북 9성) 하였다. 이렇듯 고려는 국가 시스템이 대군을 운용한 군사 강국이었다. 오죽하면 송나라가 같이 힘을 합쳐 금을 치자고 부탁을 할 정도일까?
고려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송이 고려 사신의 대우이다.송은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로 대우하였다. 이전의 중국왕조와 이후의 중국 왕조가 이웃 나라 사신을 조공사로 대우한 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조공사라는 것은 이웃 나라가 자기네 중국보다 딸린 나라, 즉 중국 특유의 중화사상이 깔려있다. 그런데 그런 중국왕조가 고려를 국신사로 대우한 건 고려가 적어도 자기들과 대등한 국가임을 그들 스스로가 인정한 것이다.
십팔사략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요나라 안에서 금나라가 나타나 요의 천조제가 정신없이 쫓겨 다닐 무렵, 송나라에 고려 사신이 와서 "우리나라에는 의원이 적으니 송나라 의원을 좀 파견해 주시오." 하고 요청하였다. 휘종은 두 사람의 의원을 보냈다.그 의원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고려의 진정한 뜻은 실은 의원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송)가 여진과 동맹하여 거란을 멸망시키려는 것을 알고, '거란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좋소. 중국을 위해 충분히 개봉을 수비해 줄 것이오. 여진은 이리와도 같이 야만적인 나라이므로 그들과 교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오. 급히 여진에 대한 방비를 굳게 단속하는 것이 현명한 계책이오.'라며 충고를 해주었습니다."하므로 휘종은 몹시 불쾌해했다.
이 일화를 보면 당시 고려에 대해 우리는 두가지를 알 수 있다. 하나는 당시 국제정세를 읽을 줄 아는 고려의 탁월한 외교적 안목과 다른 하나는 당시 송과의 대등한 관계 속에서 송에게 충고를 한 것이다. 송은 고려의 충고를 무시하고 금에게서 연운 16주를 받는 대가로 금과 함께 요를 치지만, 금나라와 이래저래 얽히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아 송나라는 의리없는 나라가 되고 금나라는 송을 쳐서 송나라 황제 휘종 부자를 잡아 금으로 끌로 가고, 송을 남으로 밀어낸다.
고려의 충고를 듣지 않은 송은 결국 금에게 밀려 황제가 잡혀가고 많은 땅을 잃게 되자 고려에 사신을 보내 같이 금을 치자고 했으나 송의 군사력이 형편없음과 고려의 국내 사정(이자겸의 반란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으로 고려는 이를 거절하게 된다.
아무튼 위의 사실을 미루어보아 고려는 군사적으로, 외교적으로 강국이었다 볼 수 있지 않을까?
2. 해상강국 고려
고려시대는 해상교역이 활발한 시대이다. 고려는 반도라는 이점을 최대한 살려 해상 무역을 통해 막대한 국익을 챙겼다. 고려는 공무역 외의 사무역도 크게 활기를 띄웠다. 그래서 고려 수도 개경에는 송상(宋商)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상인들이 내왕하였는데, 그 개경에 이르는 예성강 입구에 벽란도(碧瀾渡)가 자리하고 있어, 국제교역항으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송을 비롯한 외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여, 고려의 국명이 서양에 알려져 "Corea"라는 호칭을 얻기에 이르렀다. 고려시기에는 중국대륙에 여러 왕조가 성쇠를 겪어, 고려는 여러 나라와 교역하였는데, 나라마다 교역하는 방법이나 물품, 그리고 거래 장소와 통로가 상이하였다.
첫 민족통일국가인 고려는 해양경영을 비롯해 활발한 대외교류활동을 통해 만방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력을 키워나갔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서구인들의 뇌리에는 우리나라가 ‘코레아’(고려)란 이름으로 각인되게 되었다. 1224년 프랑스 루이 9세가 원나라에 파견한 사신 루브룩이 그의 여행기에서 ‘섬의 정부 카우레’라고 한마디 한 것이 서구에 알려진 한국의 첫 소식이자 이름이며, 그 후 페르시아의 역사가 라시둣 딘이 세계통사격인 <집사>(1307~11년)에서 고려를 ‘카올리’라고 지칭함으로써 ‘코레아’라는 이름이 서구에 퍼지게 되었다.
고려는 우수한 해운수단을 이용해 대외무역을 적극 추진했다. 태조 왕건은 무역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 한다는 중상주의를 표방하고, 15대 숙종은 “사농공상에 종사하는 백성이 각기 그 생업을 잘 닦으면 실로 나라의 근본이 된다’고 하면서 상업을 적극 권장했다. 그리하여 고려는 전례없는 상업의 중흥기를 맞았다. 도시와 지방은 물론, 지역 사찰까지도 상업에 종사해 부를 축적했다. 개경의 시전과 관영상점은 외국으로 보내는 공무역이나 사무역 상품의 공급기지와 외래 상인들의 거래처 역할을 담당했다. 개경에는 신분에 따라 유숙하는 영빈관이니 청하관이니 하는 외국인 전용 숙소가 10여 곳이나 있어 한꺼번에 수백명의 외국 사신이나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개경과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는 국제무역항으로서 세계 각국에서 온 여러 인종들이 일년 내내 붐비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겨울철에 열리는 팔관회에 참석해서는 공물을 바치고 문물을 교환하며 함께 주연을 베풀기도 했다.
고려는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가들과 변하는 정세에 따라 능동적으로, 그리고 자주적으로 사신을 통한 공무역과 상인을 통한 사무역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최대의 이익을 취하는 실리적 무역정책을 추구했다. 이웃 일본과는 김해에 설치한 동남해도부서를 매개로 접촉과 교역을 진행했다. 997년 고려는 세 통의 서한을 보내 통상을 요구했지만 내치에 여념이 없던 일본으로서는 응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500척의 전함으로 공격을 준비하자 일본쪽은 방어진을 구축하고 버티려했으나 결국 고려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일본인들이 진봉선(공물을 바치는 배)에 상품을 싣고 김해에 와서 공물을 바치려고 하자, 조정에서는 위신을 고려해 공물을 세자에게는 허용하나 왕에게는 불허하고, 비밀 누출을 우려해 해로로만 개경에 오도록 했다. 이렇게 눈치를 보며 수동적이던 일본은 13세기 말엽부터 돌연 해적을 보내 노략질을 일삼게 된다. 이어 두 차례 시도한 여·몽 연합군의 원정 등 일련의 혼란 속에서 양국간의 공무역은 주춤해졌으나 사무역은 여전히 활기를 띠고 있었다.
고려의 대외무역활동에서 가장 비중이 큰 나라는 중국 송나라였다. 고려는 두 나라의 중간에 끼어있는 요나라나 거란과의 관계를 고려하면서 능란하게 송나라와의 교역을 유지해나갔다. 비록 초기에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국교가 일시 단절되기도 했지만, 곧 회복되어 11세기 약 100년 동안에 송나라로부터 상선만 90여 차례나 오갔으며, 상인들도 4500여 명이 내왕했다. 이들 상인은 대부분 남방에서 활동하는 사무역업자들로서, 그들을 통해 동남아와 대식(아랍)의 상인들이나 특산물이 고려에 들어왔으며, 고려의 물품이 중개되기도 하였다.
송나라에서 들여오는 상품은 비단, 금은공예품, 자기, 약재 등이며, 특히 불경과 유학서, 의학서 등 서적이 많았다. 고려에서 수출하는 상품은 나전칠기, 도자기, 옷감, 붓, 부채, 무기, 마구류 따위가 중심이었다. 송나라 수도 개봉에서는 고려의 비단과 도자기, 종이, 먹, 부채가 명물로 인기가 높았다. 송나라는 고려의 사신이나 상인을 위해 고려관을 따로 지어 편의를 보아주며 항상 융숭하게 접대했다. 이에 소식(蘇軾) 같은 문인은 접대 부담과 기밀 누설, 진서의 유출 등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고려와의 교역에서 송나라는 ‘조그마한 이익도 없는데 고려는 큰 이익을 얻는다’고 나무라기도 했다. 사실 고려는 대송 무역에서 여러 가지 특전을 누리고 있었다. 예컨대, 송나라가 일반 외국인들에게서는 상품가격의 15분의 1을 관세로 징수하나, 고려 상인들에게서는 그보다 싼 19분의 1을 받았다.
고려의 해양경영을 통한 교류망은 멀리 동남아와 대식까지 뻗어갔다. 장보고시대에 이미 신라 상선이 중국의 남단 광주까지 진출한 데 이어, 고려시대에는 그 이서의 동남아와 인도, 대식까지 내왕과 교류가 확대된 사실이 <고려사>를 비롯한 여러 사적에 기록되어 있다. 11세기 전반에 하선, 보나합 등의 회회족, 즉 아랍-무슬림 상인 수백명이 세 차례나 집단적으로 개경에 와서 수은, 몰약, 소목(蘇木:외과용 약재) 등 방물을 바치고 후대 속에 비단을 하사받았다. 25대 충렬왕 때는 인도 동해의 코로만델 해안에 있는 작은 나라 마팔아국(馬八兒國: 모바르) 의 왕자 패합리가 침향, 면포(일명 서양포) 등 공물을 보내왔다. 이에 앞서 충렬왕은 대신 채인규의 딸을 공녀로 원나라 승상 상가(桑哥)에게 시집보냈는데, 상가가 피살되자 원의 신속국인 이 마팔아국의 왕자에게 재가시켰던 것이다.
결국 고려와 인도양의 한 소국간에는 이렇게 정략적 혼인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밖에 고려는 오늘의 베트남이나 타이, 캄보디아 등 동남아 나라들과도 여러가지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주요 교역품이었던 청동거울에 새겨진 배 문양은 해상무역이 번창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는 문화와 예악이 융성하고 상선들이 끊임없이 출입하여 날마다 귀중한 보화가 항구로 들어오니 중국으로부터는 도움 받을 것이 없다’라고 한 11대 문종의 말은 고려의 당당한 자신감과 활기찬 기상을 말해주고 있다.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왕을 ‘해동천자(海東天子)’, 즉 중국의 천자와 대등한 동방의 천자라고 불렀으며, 중국의 사신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의 사신과 마찬가지로 사대(事大)의 예가 아닌 보통 ‘손님의 예’로 맞이했다. 이렇게 자기중심의 자주적 천하관을 지녔기에 고려는 동방 일각에서 세계를 향한 선진해양강국답게 중세의 지평선 위에 우뚝 설 수 있었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역사의 교훈이다.
3. 황제국 고려
고려가 황제국이라고 하면 많은 이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하지만 고려가 황제국 체제를 수립했다는 것은 여러 사서와 유물등이 입증한다.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4대 광종은 '광덕(光德)', '준풍'등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또 고려 사람들은 송악(개경)을 황도(皇都) · 황성(皇城)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의 역사책인 안정복 선생의『동사강목』에는, 고려 역사를 설명하면서 "왕건은 불의로써 나라를 얻고는 외람되이 천자(天子)라 칭한 부류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고려태조 왕건이 건국하면서부터 스스로를 '황제'로 일컬었음을 알려 준다고 할 수 있다.
『고려사』와『고려사절요』, 그리고 조선시대 쓰여진 여러 역사책들에 고려 임금을 '왕'이라 표현했기에 고려가 왕국이었다고 알고 있다. 『고려사』에는 고려 '왕'이 스스로를 '짐(朕)'이라고 부르고 있다. '짐(朕)'은 제국에서 황제가 스스로를 일컫는 말이고, 이론상 황제가 '임명'한 '제후'인 왕이 쓸 수 없는 말이다. 만약 고려 임금이 '제후'일 뿐이었다면 스스로를 '짐(朕)'이라고 일컬을 수 있었을까?
『고려사』는 주자학을 '국교'로 삼고 한족에 저자세를 취한 조선시대에 조선 사대부들이 적은 역사책이니만큼, 고려가 칭제건원(: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쓰는 일. 즉 제국임을 나타내는 일)한 사실을 적었을까?
고려가 황제국이었다는 증거는 또 있다. 다름 아닌 고려시대 관료체제가 바로 그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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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성(省) 중서성(中書省)·문하성(門下省)·상서성(尙書省)
6부(部) 이부(吏部)·호부(戶部)·예부(禮部)·병부(兵部)·형부(刑部)·공부(工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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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들 부서(황실에 딸린 부서)의 이름이 중요한가 하면, " '성(省)'과 '부(部)'자는 천자국에서 쓰던 것으로 제후국은 함부로 쓸 수 없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중국의 '신하'임을 자처했던 조선시대에는(물론 형식상이지만) '부(部)'라는 말을 '외람되이' 쓸 수 없다고 하여 고려의 6부(部)와 같은 역할을 맡은 부서를 '조(曹)'라고 고쳐 불렀다. 이부·호부·예부·병부·형부·공부를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로 바꾼 것이 그것이다. 또 '성(省)'자는 발해시대에도 '3성(省) 6부(部)'제 라는 이름으로 발해의 행정체제에도 쓰인바 있다.
게다가 고려 임금들이 명령을 내릴 때 사용한 용어로, '조서(詔書)'·'제서(制書)'·'칙서(勅書)'가 있다. 이들 용어는 천자국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용어로 제후국 왕은 쓸 수 없다. 제후국에서는 이들 대신 '교서'를 사용했다.
고려 문인이었던 이규보의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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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천하가 일가(一家 : 한 집안)되니 천자(天子)의 성스러우심이라.'
- 서기 1209년(단기 3542년, 고려 고종 5년), 이규보가 지은 연등회 의식을 축하하는 시(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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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는 고려의 연등회를 축하하면서 이 시를 지었다. 즉 이 시는 연등회를 열게 지시한 고려 임금을 '천자(天子)'라고 부르고 있고, 연등회에서 고려라는 이름으로 "온 천하가 한 집안이 되니" 이는 (고려) 천자의 성스러움 덕분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만약 고려가 제후국이었고 고려 임금이 단지 '왕'이었다면 일개 문인이고 고려의 녹을 먹는 관리였던 이규보가 '감히' 고려 임금을 '천자'라고 부를 수 없으며 고려의 깃발 아래 '온 천하가 일가(一家) 되니'라고 읊을 수도 없다.
『제왕운기』를 쓴 이승휴는 책을 쓰면서 예전에 금(金)나라가 고려에게 보낸 조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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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大金)황제가 고려국 황제(皇帝)에게 글을 보낸다.'(大金皇帝奇書于高麗國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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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스스로를 일컬은 기록이 아니라 금(金)나라가 고려에 보낸 금(金) 황제의 조서에 이렇게 적혀 있다. 고려가 스스로를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라고 했고, 이를 대외적으로도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교산리에는 마애약사상(바위 벽에 약사여래불이 새겨져 있다)이 있는데, 그 옆에는 27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고려 경종의 만수무강을 비는 것이다. 그 금석문에는 '황제만세원(皇帝萬歲願 : 황제께서 만세토록 - 오래오래 - 사시길 빕니다. 라는 뜻)'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고려의 경종을 황제라고 불렀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고려시대 송악의 궁궐에 딸려 있던 원구단(圓丘壇: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 에서 고려 황제가 제천(祭天 : 하늘에 제사지냄)도 '물적 증거'의 하나이다. 동아시아 질서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권한은 천자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고려는 황제국이었다. 적어도 고려는 황제국 체제를 지향하고 있었다. 이는 고려의 자주성을 돋볼 수 있다. 고려는 신라처럼 외세를 끌여들이기 보다는 자체의 힘으로 민족통일을 이룩한 겨레사적 측면에서 보면 우리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이다.
한가지 더 부언하자면 고려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만큼 뛰어난 기술강국이었다는 점이다. 위에 제시한 고려의 국가상은 고려라는 국가의 일부분일 것이다. 아직까지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고려...
우리는 그러한 고려를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첫댓글 저도 고려가 군사적 강국이였다는 점에서 공감합니다 고려는 우리역사상 가장많은 군대로 정벌활동을 했으니...
고려는 군사강국임에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송나라에서 고려의 수도 개경에 사신을 보낼 떄 주화선 (중국역사상 딱 두 번 만든 배)을 파견했을 만큼 송나라 에게 고려는 대단히 중요한 외교국이었습니다. 또한 고려의 수도 개경은 송나라 사신인 서긍이 표현한 것 처럼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했으며 특히 회정전은 그야말로 으뜸이었다 라고 써 놨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황제국을 대외에 천명했으며 회정전으로 들어가는 관문은 5개였으며(5개는 황제국만 가능함) 개경에는 곳곳에 사찰과 두 집 건너 한 채씩 2층 집이 있을 만큼 고려의 개경은 대단한 곳이었습니다.
이런 고려가 망하고 고려의 하이테크놀로지 군사력을 그대로 이어받은 조선은 그 기술을 제대로 발전 시키지도 못하고 제대로 운영하지도 못해서 16세기 임진왜란 때 그야말로 오합지졸로 변해버렸습니다. 조선이 고려의 하이테크놀로지 군사력을 발전시키고 국방을 튼튼히 했다면 역사적 비극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려가 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왔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지도 참 궁금합니다.
기본적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여기서 후삼국에 이어 고려시대로까지 상무정신이 이어지죠.. 문제는 이놈의 유교, 특히 성리학이라는 놈이 이 상무정신과 상극으로 부딪치는 꼴이 되다 보니, 성리학 받들어 무(武)를 억제하는 여러가지 정치 시스템이 확립되면서 우리 민족 전통의 상무정신마저 희석시킨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조선 시대 군사력을 보면 참 여러가지 발전할 만한 퍼텐셜은 많은데도 정작 윗분들의 정치 코드 때문에 저 정도밖에 발전을 못 시키나 싶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나라에게 있어서 주전선은 송나라의 전선이 아닌가요? 즉 주력군을 송전선에 배치했기 때문에 고려를 칠때는 비주력군이 더 많았던것이 아닐까요? 그냥 저의 추측이지만요. 또한 조선초기 태종과 세종, 세조등은 국방강화에 힘을 썼으며, 소위 신진사대부들 역시도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과 그의측근들을 보면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의 모든시스템이 붕괴되기 시작한것은 역시나 사림의 등장과 중종반정이 아닐까요? 막강 왕권의 추락과 첫번째 개혁시기를 놓친점... 그뒤 조선은 완전히 몽상가, 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게 됩니다. 정치는 정치가 해야하는것이죠. 학자가 하는것이 아니죠.
그뒤 겨우 버티고 있던 조선의 시스템에 마지막 일격을 가한 임진왜란.... 인조반정과 두번째 개혁시기를 놓친점.......시스템이 서서히 복구되고, 왕권도 어느정도 강화가 되고, 실학을 기본으로 하는 실학파들의 등장과 정조의 마지막개혁... 그러나 이것도 실패로 조선은 3번의 개혁시기를 전부다 날려버렸습니다. 그후 얼마안되서 서양에선 프랑스 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되죠... 쩝... 몽상가와 학자가 다스린 조선엔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안일어날 수 있었던 전쟁이었지만 몽상가들과 학자들때문에 일어나고 말죠.
저는 고려와의 전쟁때는 2선급군대가 더 많았을거라는 추모왕님의견에 찬성하지 못하겠습니다 1차전때는 추모왕님의 의견이 맞는지도 모르지만 2차전에는 요의 황제 성종이 친정한 전쟁이었습니다 황제가 친정하는군대가 2선급군대라고 볼순없죠 3차전에 투입된 10만도 여진족이나 한족군같은 2선3선급부대가 아닌 거란족으로 구성된 요의 최정예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전 귀주에서 강감찬에게 요군의 중추역활을 하던 10만대군이 전멸당하고 나서 요군의 군사력은 급속히 약해졌다고 봅니다
뭐 비주력군 이야기는 그냥 저의 추측에 불과하죠^^;;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니 신단수님의 말씀이 맞는것 같습니다. 귀주대첩도 책에는 쉽게 써있지만 천천히 보면 상당히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귀주회전을 보면 밀리밀리는 전투를 전개하죠. 그러다가 후방에서 도성을 수비하던 부사령관이 군대를 이끌고 오면서 전쟁향방은 끝나니깐요. 계속해서 힘들게 개경까지 진격했다가 사기가 떨어진 후에 퇴각하면서 강감찬 장군과 맞선 요나라 군대는 상당히 선전을 했으며, 치열한 전투를 행하였습니다. 후방에 있던 군대가 오지 않았다면 전투의 향방은 알 수 없었겠죠.^^ 물런 그 후방군대도 강장군님의 계산에 있었겠찌만요^^;;
음.. 이 글 쓰는 분께서는 송나라의 군사력을 너무 무시하거나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계신 것 같군요. 송대 운용되던 정규병력은 120만에 달하고 이 시대에 전근대 중국 군사과학 기술이 사실상 완성되는 전성시기였습니다. 그리고 병력 운용에 필요한 철강 생산능력은 산업혁명 초기 영국의 철강생산량과 맞먹는 수준입니다. 수치를 따지고 보면 요나라도 상대가 안됩니다만 송이 항상 깨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고려는 대체로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병력에 의존하는 대신 송의 군 병력은 주로 도시 부랑자나 하층민에 대한 복지 정책과 연계되어 군사력 운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군 병력의 전문화가 되지 못했고 그 때문에 덩치는 크지만 재정만 많이 잡아먹는 허약한 군대가 되었던 겁니다.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각종 군사 무기의 개발과 활용이 급속도로 일어났던 거구요. 그래서 요가 유목 기마대와 한족 병사로 구성된 80만 대군을 보유하고도 끝내 송을 멸하지 못한 것은 고려나 서하의 견제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송이 가진 군사력 또한 그렇게 약하지 않아ㄸ나는 반증이기 되기도 합니다. 송대에 개발되거나 개량된 무기에는 화약무기 종류(화포, 화창)와 노포(신비궁, 제갈노)가 개발되었는데 주로 유목 기마대를 상대하기 위한 용도였습니다.
그리고 고려가 거란에게 강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실은 지형지물에 의존한 결과라고 봐야합니다. 거란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왔을 때 개경 근처까지 함락 당하고도 멸하지 않은 것은 지형지물을 이용한 홍화진에 주둔한 고려군이 거란군의 보급로를 차단한게 주효한 결과였고 이후 전쟁에서도 요는 고려군보다 소수의 병력으로 고려를 침공하여 북변을 유린했습니다.(소손녕 때의 80만 대군은 대체로 허구로 보는 학자가 많으며, 소배압의 경우 강감찬은 10만 거란군을 20만 대군으로 포위 격파했음) 따라서 고려의 군사력을 일방적으로 송보다 더 강한 군사국가였다라고 보는 건 오히려 사실을 호도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할때 군사가 100만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걸로 압니다만.. 30만이 아니고 말입니다.
심계의한님의 말씀은 좀 잘못된것 같습니다...비록 고려에서는 무과가 없었지만 그것은 고려인들 스스로가 평소에 무예수련을 즐겨한 숭무사상이 강한 나라였기때문입니다...강감찬이나 윤관같은 분들을 보아도 어린시절부터 문과 무에 다 뛰어난 분들이었고 전쟁에 참여했던 문관들도 대부분 문무를 겸비한 인물들이었습니다...게다가 고려는 조선에 비해 신분이동이 자유로운 나라였습니다...천민출신의 이의민같은 이는 그 능력만으로 장군이 되었으니까요...이러한 사회분위기와 대외개방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던 고려는 군사강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임란당시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의병항쟁의 지도자들은 유생이 많았고 그분들은 모두 문무를 겸비한 분들이었습니다... 조선초기는 이러한 고려의 정신을 이어받아 문무가 고루 발전하였지만 점점 문치주의로 변질되어간 것입니다...
고려가 문치주의 국가...? 사병들을 이끌던 귀족 호족들의 군사 지휘력이나.. 그런 귀족출신인 고려의 정치가들은 모두 문무를 소화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전쟁을 문관이 소화했다고 이를 조선시대와 동일시 여겨서 이해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고려시대 문관들은 모두가 뛰어난 사령관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천재적 정치가인 정도전만 하더라도 전선에서 여진족 때려잡던 분이십니다. 문무를 결합해서 여겼으나 중국의 제도를 상당히 받아들였던 덕분에 문무의 구분이 없어졌음에도 무신들이 따로 존재했던 기이한 형태의 고려 제도 덕분에 무신정권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조선이 초기부터 군사력이 약
했던 나라였다고 여기진 않습니다만.. 고려를 문치지향국가였다고 여기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글 자체에 대한 제 개인적 소견은 송나라의 국력을 군사력에 한정짓는다면.. 군사편제에 중대한 문제점이 존재했던 송나라가 좋은 국력이라고 받아들이긴 힘들 수도 있겠습니다만.. 송나라의 실질적인 국력은 고려보다 훨씬 뛰어났던게 당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