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사 텐 아시아의 가희라고도 불리며 1월 29일 탄생 70주년을 맞는 테레사 텐.「つぐない」이나「愛人」등의 히트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42세에 급서했다. 데뷔와 좌절, 그리고 부활에 대해 「일본의 아버지」라고 칭해지는 舟木稔씨나, 관련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 홍콩 무대에서 테레사 텐을 봤을 때 美空ひばり의 소녀시대 무대를 방불케 하는 느낌이었어요. 노래를 잘하고 꽃이 있다. 이 사람이 소문난 테레사 텐인가 하고 감탄했어요.] 테레사 텐의 「일본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후나키 미노루씨는 이렇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후나키 씨는 일본 폴리돌에서 제작관리부장 일을 하고 있었다.당시 폴리돌는 아시아 가수들을 일본에 초빙해 데뷔시킨다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그래서 겨냥한 것이 대만 출신 테레사 텐 덩리쥔 鄧麗君이었다. [콘서트에서는 1번을 중국어로, 2번을 일본어로 불렀습니다.객석에는 일본 손님도 많았으니까요.] 후나키 씨는 홍콩 폴리돌을 통해 접촉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홍콩에 체류한 지 열흘쯤 지난 어느 날 테레사의 어머니가 연락을 해 와 은밀히 만나고 싶다고 말한다. 후나키 씨는 통역을 동반해 어머니와 테레사를 만났다.그러자 의외로 쉽게 협상이 진행됐다. 이제 정식 계약을 기다리기만 하고 홍콩을 떠났다. 그러나 귀국하자마자 상대방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그 이야기는 없던 일로 하고 싶다고 한다. [아니, 아니, 그건 아니잖아요.놀랍네요.] 테레사는 홍콩에 살면서 어머니를 창구 삼아 연예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대만에 살고 있었다.그의 아버지는 [딸이 홍콩, 동남아시아의 대스타이며 충분한 수입도 얻고 있다.이제 와서 일본에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후나키 씨는 아버지를 만나러 대만에 가서 설득에 힘썼다. [꼭 성공시키겠습니다!"] 후나키(舟木) 씨는 아버지와 몇 번인가 이야기를 나누고 술도 주고받았다.덕분에 아버지와 친해져 마침내 [딸을 부탁한다]라고 되었다. 떳떳하게 일본 폴리돌은 테레사 텐과 계약을 맺게 된다.1973년 6월의 일이었다.
일본 데뷔 전년인 1973년에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도 일본을 방문하여 ,함께 교토를 여행하였다. 일본에서 데뷔하기 전년, 후나키 씨는 일본의 당시 음악제 무대를 보여주고 싶다고 어머니와 테레사를 불렀다.그래서 일본 가수가 상을 받는 시상식을 현장에서 보여줬다. [화려한 장면에 감동한 테레사는 <나도 저 무대에 설 거야!>라고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렇게 선언했습니다.]
후나키씨는 테레사의 심지의 세기를 느꼈다.
다음해 74년, 전 폴리돌 사원의 筒美京平의 작곡에 의한 「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로 떠들썩하게 데뷔했다.그러나 매출은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후나키 씨는 당황했다. [아버지에게 맡겨달라고 큰소리를 쳤기에,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조바심을 냈어요. 어쨌든 신인상을 받아야 해. 그러기 위해 7월까지 한 곡을 더 발표하기로 했다. 현장 음악 디렉터는 팝송 풍의 것이 아니라 엔카를 부르게 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담당에서 내려오겠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럼, 맡기겠다고 했어요.현장의 말을 믿었어요.] 거기서 레코딩한 악곡 「空港」로 제16회 일본 레코드 대상 신인상을 획득한 것이다. [이제 아버지를 체면치레했다고 안심했어요.신인상은 일생에 한 번뿐이니까요.] 영업 활동은 渡辺프로덕션에 의뢰하고 있었다.테레사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여러 방면에서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