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이니 나이 서른이었고 여의도 증권회사에서 근무를 하던 시절이었다.
그 전 해에는 성수대교가 붕괴되어 한국의 안전불감증이 전 세계에 토픽감이 되었던 시절,
그때 일본과 한국의 경제력 격차는 대단했었다. 차이를 좁히지 못할 것 같았던 시절,
일본 Kobe의 지진의 보도를 보며, 젊음 때문에 배운 바 역사의 공분이 남아 있던 시절,
구겨진 고베의 고가도로를 보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소함도 느꼈다.
16년이 지났고, 세상 일이 바램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번에는 더 큰 지진이 일본에서 일어 났고 상대적으로 견고한 판구조 위에 살고 있는 나는
불안한 맨틀 위에 살았던 일본인의 고통을 다시 TV를 통해서 본다.
TV를 통해 보도되는 검은 쓰나미(津波)가 민가를 덮치는 사진을 보고 가슴이 아려 온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역사의 아픔은 머리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지만,
저들 역시 아비와 어미, 딸과 아들을 가진 사람이다.
한국, 서울에서 만나는 일본 사람들, 한류라는 유행에 일본에서 한국에 까지 날아와 춘천으로 남이섬으로,
연예인이 잘 다니는 미용실로, 등산로로 오르내리던, 고구려 대장간 마을에서 마주치는 그 일본인들은
3.1절 만세운동을 하던 학생들과 어린 유관순을 잡아가두고 매질하던 그 당사자들이 아니다.
面從腹背한다고 하지만, 같은 동포인 우리나라 사람은 그렇지 아니한가?
경제력의 격차가 줄고,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 된 한국인이 외국에서 벌이는 일들이 다 Fair하기만 한 것인가?
이제 아버지가 되고 사람이 약하디 약한 존재임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주식시장과 금융업의 언저리에 머무르며, 때로는 남의 고통이 나에게 이익으로 돌아 오는 이치를 안다.
이익을 거두는 데 누구보다 빨라야 하고, 그러기 위해 노력하지만,
최소한, 겉으로 드러내어 고소함을 표현할 만큼 마음이 굳세지는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