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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27일 경주 남산 답사 여정을 간략하게 적은 것입니다.
이후부터는 모두 반말체를 사용하니 유의하기 바랍니다.
* 4월 26일 토요일에 학교도서관에서 잠깐 공부를 하고 이것저것 하다가 밤 21:30분경에 수원역까지 오게 되었다.
수원역 맞이방에서 '무인시대(武人時代)'를 보고 역전 부근 번화가에서 저녁을 먹은 다음 매표소로 가서 예약한
열차표를 구입하는데, 역무원이 "청도에서 열차사고나서 50분정도 지연 될것 같은데 괜찮겠는가?"라고 물어본다.
그래서 나는 "괜찮다"라고 말을 하니 표위에 지연승낙이라 쓰인 도장을 쾅 찍고 건네주는군..
청도에서 무슨 열차사고가 났길래.. 열차도 이제 무서워서 못타고 다니겠군..
그 사고에 대해 역무원에게 물어보니 잘 모른다고 그런다.
0시에 표확인을 받고 타는 곳으로 나갔다.
이번에 타는 열차는 서울역을 23:30분에 출발하여 동대구,경주,울산을 경유 부산에 부전역까지 가는 무궁화호
열차이다. 동대구역까지는 11800원..!
이 열차는 타고 경주까지 가도 되겠지만 시간문제,돈문제 때문에 동대구까지만 가게 되었다.
0:03분이 되자 열차가 수원역내로 진입..
열차에 올라 지정석으로 가니 옆 창가좌석에 어느 넘이 팔자좋게 자고 있었다.
열차가 출발하면서 나는 피곤을 이기지 못해 잠을 청했다.
밤에는 자는 것이 최고다..
열차는 청도역 사고에도 불구하고(내가 탄 열차는 청도로 가지 않는다) 동대구역(東大邱驛)에 3:36분 제시각에
도착하였다.
지연을 한 30분정도 할것을 기대했는데 정시에 도착하는 바람에 잠도 덜 자고 아쉽군..
동대구역사로 나와서 세수좀 하고 시간을 때우니 새벽 4시..
동대구역 밖 대구시내는 어둠에 잠겨있었다.
나는 아침을 먹을겸해서 동대구역 옆에 홍익회식당으로 가서 냄비우동을 먹었다.
심야열차로 동대구역에 오게되면 꼭 여기서 우동을 먹는다. 가격은 2500원인데 그런데로 먹을만하다.
이집 우동을 6번정도 먹은 것 같은데.. 작년 7월에 경주답사에 가면서 히메님과 같이 먹은 이후 근 9개월만이다.
우동을 먹고 역내에서 이리저리 시간을 때우다가 개표구로 나가니 한때의 군인들이 배낭을 메고 포항방면 열차
타는곳으로 나간다. 아마 포항의 해병대로 가는 군인같다. 그들의 표정을 보니 많이 졸리운 표정같았다.
5:10분이 되자 포항방면 열차타는 곳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표를 구입하지 않고 무임승차를 했다. ㅋㅋㅋ
돈이 없어서 그런것이니 양지하기 바란다.
나는 뒤에서 2번째 칸에 탔는데 그 뒤칸에 그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 얼핏보니 군인1명이 베낭을 들고 벌을 받고
있었다. 저런.. 열차안에서도 얼차려같은 벌을 주다니.. 쩝 고달픈 인생이로다..
5:15분이 되자 동대구발 포항행 통일호 열차는 동대구역을 출발한다.
이 열차는 근 9개월만에 타본다.. 요즘 영 탈일이 없으니..
열차안은 승객이 거의 없다. 나는 앞좌석을 내쪽으로 향하게 돌려서 발을 쭉 뻗고 잠을 청했으나 잠이 오질
않는다.
영천역을 지나서부터 나는 가방을 베게삼아 누워서 잠을 청했다.
잠에서 깨보니 어느덧 경주역.. 해는 이미 중천에 뜬 상태였다.
나는 너무 피곤한지라 포항까지 가서 다시 올까 생각도 했으나 그냥 경주역(慶州驛)에서 내렸다. (7:10)
경주역으로 나와서 세수를 절라게 하여 정신을 차린 다음 역전광장에 서 있는 황오동(皇吾洞)3층석탑을 찾아갔다.
이 석탑은 작년 6월에 울산 서생지역을 가는 도중 경주역에 잠깐 들려서 관람한 후기신라시대 석탑이다.
석탑의 건재한 모습을 확인한 다음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모임장소인 박물관까지 버스를 탈까 하다가 그냥 걸어가기로 하고 무작정 걸었다.
경주역에서 박물관까지는 도보로 아무리 길게 잡아도 20분 이내이다.
시간도 많고 해서 걷기도 한 것이다.
걷는도중 팔우정(八友亭) 부근에서 보도 블럭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통행하는데 약간 불편을 겪었음..
가는 도중 황오동고분군을 보았다. 역시 주인을 알수 없는 의문의 무덤들..
그 고분은 자신이 누구의 묘인지도 모른 채 오늘도 주무시고 있었다.
저 고분의 주인을 알려면 아마 타임머신을 타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이다.
신라의 고분치고 그 주인이 누구인지 속시원하게 밝혀준 고분이 있는가?
한옥거리를 지나니 시골풍경이 펼쳐진다. 가까이에 반월성이 보이고, 건너편에 임해전(臨海殿)과 안압지(雁鴨池)
가 보인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지라 나는 반월성으로 들어갔다.
반월성(半月城)은 지금까지 3번 들어가봤다.
반월성(사적16호)은 전형적인 토성으로 신라황궁이 있던 곳으로 전해지나 정확하지 않다.
반월성 서쪽에는 남산으로 진입하는 입구인 월정교의 터가 남아있다.
반월성내로 진입하여 석빙고(石氷庫)가 있는 쪽으로 갔다.
이 석빙고는 보물66호로 조선 영조 때 만든 조선시대 냉장고이다. 지금이야 얼음이 흔해빠졌지만 그 당시에는
얼음이 매우 귀했다. 얼음을 몰래 슬쩍하거나 얼음창고에 무단 침입할 경우 무조건 사형에 처했다.
서울의 얼음창고인 서빙고(西氷庫)에서는 조선시대의 어느 여름날.. 더위를 이기지 못해 지친 어느 부근 백성이
서빙고에 몰래 들어가서 얼음을 베게삼아 휴식을 취하다가 서빙고 관리인에게 들키고 결국 처형된 일이 있었다.
그만큼 얼음은 귀했고, 국가에서도 특별품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나는 석빙고 왼편 언덕에 자리를 잡고 책을 꺼내 공부를 했다.
그 다음날은 4월28일에 시험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지금까지 생각해보니 다음날에 시험이 있음에도 경주까지 와서 이짓거리를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 보였다.
시험공부가 중한 마당에 왜 경주까지 오게되었을까? 경주는 수십번을 와서 마치 우리옆동네에 온 기분이 드는 곳인데
왜 또 왔을까? 라는 생각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의문이다.
경주남산에 구미가 당겨 여기까지 왔는지? 참.. 한심할 뿐이다.
반월성내에서 공부좀 하다가 8:30분에 성을 나와 모임장소인 박물관주차장으로 갔다.
주차장에는 푸른뫼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직 다 안온 것이다.
9시가 되자 하나둘 오기 시작한다. 부산지역에서 온 무소유누님과 돌코,석양님,씽비게님등과 울산에서 온 새털구름
등과 대구에서 온 몽상가와 그의 미국인 교수등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느정도 모이자 차를 타고 내남면 용장리로 이동하였다.
이동하는 도중 최치원과 관련된 상서장을 보았다. 진행방향으로 도로 왼쪽에 있는데, 아는이가 없을 것이다.
15분 정도를 달려 용장리에 도착. 여기서 계곡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서 어느 공터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온다.
여기서부터 남산 서부지역의 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용장리와 계곡은 2년전에 와본적이 있다. 이렇게 다시오게 되다니 감회가 새롭다.
주차장에서 개울을 건너 산행을 시작했다.
용장리계곡은 상수원보호구역이라 물이 졀라 깨끗했다.
올라가는 도중 몽가의 미국인교수와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 잘 안통한다.
그 사람은 한국말은 어느정도 알아듣는데 대화능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쩝..
경상도 사투리를 경상도사람보다도 잘하는 로버트할리처럼 화끈하게 한국어 공부하면 좋을텐데.. 아쉽다..
계곡을 올라가는 도중 나는 선녀탕이 있다고 말을 하였다.
그러자 무소유누님과 새털구름이 마치 자신이 선녀가 된 착각을 했는지 좋아한다. 꿈에서 깨어나라...~~
솔직히 선녀탕은 남산에 없다.
계속 올라가다가 왼쪽 산길로 접어드니 목이 없이 몸통만 있는 석불좌상(石佛坐像)이 나를 맞이한다.
좌석아래에는 대좌가 있다. 이 석불의 목은 어디로 갔을까? 그런 아무도 모른다.
조선시대 억불정책이 시행되면서 양반들이나 민중들이 석불의 목을 베어서 어디에 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른다. 오직 석불만 알 뿐이다. 그러나 석불은 입이 없어서 말을 못한다.
억불정책으로 애궂은 불상들이 수난을 당한것 조선초기부터이다. 그러다가 임란,병자란이 끝난이후 더 심해진것으로
보인다. 이 내용은 한국미술사 교수에게 질문을 통해 얻은 답변이다.
교수님의 답변에 의하면 불상들의 수난은 조선뿐만 아니라 고려무신정권 때부터 몽고가 설치던 시기까지 상당했다고 한다.
불교사원들이 토지겸병으로 잔뜩 배를 불리고 백성들을 괴롭히니 무신정권기에 여기저기서 백성들이 들고일어나서
민란을 일으키면서 절을 공격하여 홧김에 불상같은 것을 손상시켰다는 것이다.
참고로 조선시대 때 경주에 불상 30여기가 파손되어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버려져 방치되어 오다가 근래에 발견
된 적이 있었다.
불상을 우물에 버리다니..
이 목없는 불상은 남산에 여러개 있다.
불상의 목을 잘라가고 병에 좋다고 해서 코부분 갉아먹고.. 참 대단한 민중들이다..
목없는 석불을 보고 다시 계곡으로 나와 용장사로 올라갔다.
등산로의 처음부분은 별로 험하지 않다가 점점 들어갈수록 난이도가 약간씩 높아진다.
일행들 모두 올라가기 힘들어서 지친모습이 많이 목격되었다.
그렇게 올라가다가 대나무들이 서 있는 용장사터에 이르게 되었다.
용장사(茸長寺)도 신라시대 절로 현재 석축과 터만 남아있다.
이 절은 신라때 유가종을 만든 대현조사(大賢)가 머물던 절로 알려져 있다. 대현선사는 신라 경덕왕 때 한참
가뭄이 들어 물이 없자 조화를 부려 궁궐내의 우물의 물을 가득채웠다는 신이한 능력의 인물이다. 물론 조화를
부려 우물에 물을 채운 것은 구라이다.
그리고 예전 부여답사기(3월22일)에서 언급했던 매월당 김시습이 기거한 곳이다. 이곳에 초당을 짓고 금오신화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을 쓴 곳이다. 김시습에 대해서는 부여답사기에 무량사부분(3월22일 부여답사기 참조)에
자세히 나온다. (그러나 읽는 사람은 없을것 같다)
절 뒤쪽 산자락에 이 절의 유물인 3층석탑과 마애불이 있다.
절터에서 빵좀 얻어먹고 뒤쪽길을 통해 용장사의 석불좌상과 대좌, 마애불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3단으로 되있는 대좌(臺座)위에 목이 없는 석불이 앉아있었다. 대좌의 모습은 큰데 그 위에 앉아있는 석불은 작다.
이 석불과 대좌는 보물 187호이다.
석불의 오른쪽 바위면에는 마애불(磨崖佛) 하나가 남쪽을 보고 있었다.
이 마애불의 조성연대는 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나 정확치 않다. 마애불 옆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마멸이 심해 알아보기 힘들다. 그 명문중에 '태평(太平)'이란 연호가 나온다고 하는데 태평이란 연호는 거란의
성종이 쓰던 연호이다. 그밖에 중원왕조의 여러 왕이 써먹었지만 모두 5세기 이전에 쓰였다.
거란의 성종은 고려시대때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세운 강조의 변(1009년)을 구실삼아 고려를 공격한 왕이다.
이때 강조의 고려군은 초반에 잘 싸우다가 막판에 크게 깨져서 결국 강조는 거란군에게 잡혀 죽는다.
그 기세를 몰아 거란패거리들은 개경(개성)을 점령하였으나 현종은 수행원 몇만 데리고 나주땅으로 몽진하였다.
이것이 거란의 제2차 고려공격이다. 거란의 성종은 먹을거 하나 못건지고 줄행랑을 치다가 양규에게 크게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도망간다.
마애불은 보존상태가 아주 좋다. 여래불 뒤에는 2줄의 광배가 눈에 띈다.
이 마애불은 보물913호..
그다음 뒤쪽 봉우리에 있는 3층석탑으로 올라갔다. 아래에서 3층석탑을 바라보면 대개 웅장해 보인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보면 별로이다.
이 석탑은 보물186호로 전망이 좋은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이 탑은 후기신라시대 탑으로 10년전에 복원한 것으로 기단은 1단이다. 그러나 바위부분도 기단으로 친다면 2단이
된다. 그러나 이건 보는 사람 나름이다. 바위까지 기단부로 친다는 건 약간의 억지가 있을듯 싶다.
마치 형식없이 자유롭게 만들어진 고려시대 석탑들(화순 운주사의 석탑들의 모습은 엽기적이다, 몽고의 영향을 받은
경복궁소재 경천사지 10층석탑도 그렇다)처럼 지정된 양식을 깨고 1단으로 쌓은 모양이다. 아니면 위에 말처럼 바위를 1단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이 탑에는 예전에 사리함이 나와다고 하는데 사리는 이미 도굴된 상태라고 한다. 아쉽군..
3층석탑이 있는 바위에서 건너편 봉우리들이 훤하게 보인다. 경치하나는 졀라게 좋다..
석탑을 보고 뒷쪽으로 오르니 황량한 산자락이 나온다. 이 산자락은 2년전에 왔을때도 그랬다.
예전에 여기서 산불이 나서 홀라랑 탔기 때문이다. 지금은 나무가 그런데로 자라주어 흉한 부분은 별로 없지만
아직도 산불의 아픔은 남아있었다.
남산 정상부분으로 가다가 남쪽으로 가는 제법 넓은 산길로 들어서서 걸어가다가 어느 봉우리에서 점심을 먹었다.
여기서 김밥,밥,물,딸기등을 먹었다. 아 배부르군..
역시 산에서 먹는 밥은 맛있다.
여기서 여러사람들이 싸온 김밥을 정신없이 먹었는데, 맛은 대체로 비슷했다.
몽상가가 빨간사과를 꺼내면서 먹을사람 없냐고 그러자 내가 먹겠다고 자청하고, 그 사과를 받아 3동강내서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점심을 먹고 한참동안 쉬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능선을 타는 도중 산길 오른편(진행방향 기준)에 불상이 앉던 대좌가 나온다.
물론 대좌의 주인인 불상은 다른데로 놀러갔는지 없다. 자연재해로 밑으로 굴러떨어졌는지. 힘이 장사인 사람들이
와서 들고 갔는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만약 그 석불이 남아있었다면 그 모습이 웅장했을 것이다. 능선에서 아랫쪽을
근엄하게 바라보는 석불의 모습이 가히 상상이 간다.
대좌를 지나 한참 가니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산길로 내려가니 최근에 복원한 3층 모전석탑이 나온다.
이 석탑의 안내판은 없고, 그냥 석탑만 멍청히 서 있다.
석탑 주변에 묘가 있다.
이 석탑이 있던 곳도 예전에 절이 있었는데 왜 절이 있던 곳에 묘들이 딱 들어선 것일까?
그건 남산에 세워진 대부분의 절자리가 명당자리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 명당자리는 산세와 지세를 보는 풍수지리와 관련이 깊다.
풍수지리사상은 신라말기 도선국사가 당나라에서 들여온 사상인데 고려 예종 때는 풍수지리서적을 정리하여
'해동비록(海東秘錄)'이란 책을 만들기도 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시대로 들어서면서 풍수지리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사대부들은 명당에 목숨을 걸 정도로
명당자리를 집요하게 찾기 시작한다. 명당자리를 놓고 사대부들이 서로 치고박고 싸우는 산송문제가 거의 사회문제가
될 정도였다.
사대부가 이러니 조선황실은 과연 어땠을까? 조선황실은 사대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았다.
조선왕실은 사대부들보다 더 명당에 대한 집착이 강했는데, 조선 왕이 붕어(崩御, 왕이 죽는것)를 하면 조정에서는 한양도성을 기준으로 사방
100리 이내에 명당자리를 찾는다. 그래서 몇군데를 찾아내면 그중에서 제일 괜찮은
자리에 능을 쓰게 되는데 그 자리 대부분은 이미 사대부들이 묘를 쓴 상태였다.
그러나 그런것 방해물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사대부의 조상묘가 있는 곳이라도 그것이 능자리로 결정되면 바로
그 묘를 뒤엎어버리고 왕릉 조성공사에 들어간 것이다.
성리학에 찌든 사대부들은 자신의 조상묘가 파헤진것에 너무 어이없고 분통해하지만 어쩔수 없다. 왕릉을 쓰겠다는데
어쩌겠다는 것인가? 괜히 갈구다가 잘못하면 집안이 몰살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현재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인 영릉(英陵)은 원래 서울 내곡동에 있는 헌인릉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좋지 않은지라 주변의 명당자리를 물색한 결과 현재의 영릉자리가 발견된다.
그러나 그 영릉자리에는 여주이씨의 시조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왕실에서는 그 자리를 왕릉자리로
정하고 바로 여주이씨의 시조묘를 갈아엎었다. 그런 다음 그곳에 세종대왕 내외를 모셨다.
남의 시조묘까지 갈아엎어 왕릉을 쓸 정도로 조선왕실의 명당사랑은 대단했던 것이다.
이런 왕실의 명당밝힘증으로 피해가 속출하고 여론이 안좋자. 왕릉을 기존의 왕릉 부근에 쓰는 형식이 나타나면서
동9릉(경기도 구리시), 서3릉(경기도 고양시), 서5릉(경기도 고양시)같은 거대한 왕릉군(群)들이 형성된다.
이 절터에 남아있는 모전석탑(模塼石塔)은 돌을 벽돌같은 크기로 다듬어서 쌓은 석탑이다.
그런데 이 모전이란 용어는 일본 사학계에서 쓰는 용어를 그대로 쓴 것이다. 이 모전 외에도 '호족(豪族)', '민족
(民族)' '문화(文化)'등의 용어도 쪽발이 애들이 먼저 만들어서 사용한 것을 그대로 도입한 것이다.
일본 애들이 쓰는 거라고 해서 굳이 명칭을 바꿀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쩝
모전석탑을 둘러보고 다시 능선으로 나왔다.
능선 동쪽에는 남산동이 보인다. 멀리 토함산(吐含山)도 한눈에 보이고, 서쪽에는 경부고속도로와 남산의 봉우리
들이 보인다.
능선을 타다가 용장리 방면으로 내려가는 길로 진입하여 한참을 내려가니 목이 없는 석불좌상 하나가 우리를
맞이한다. 이 석불은 침식곡이란 계곡이 있다하여 침식곡석불좌상이라고 한다. 석불의 목은 오래전에 없어졌으며
대좌와 석불의 몸뚱이만 남아있는데 석불 복원을 대충대충 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이고 있어 아쉬움을 준다.
석불은 가사(袈裟)를 입고 있는데 가슴부분이 약간 튀어나왔다.
이 석불의 조성시기는 신라말기인 8~9세기로 보이며 대좌의 아랫쪽인 하대석에는 연꽃무늬가 눈에 띈다.
이 석불은 경북지방유형문화재 112호..
침식곡 석불을 둘러보고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내려가니 등산로 오른쪽의 계곡이 보이면서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올라가는 길을 택해서 다시
올라가기 시작한다. 에구 힘들어라..
그 길을 한참 올라가니 백운암이란 암자가 나온다. 그 암자 아랫쪽에는 옛날 절터의 흔적인 석축이 남아있다.
여기서 그동안 흘린 땀을 씻어내고, 물도 졀라게 먹고, 물통을 물을 가득담았다.
백운암에서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오른쪽으로 야트막한 언덕을 내려오니 절터와 절이 하나 보인다.
그 절터는 천룡사(天龍寺)터이고, 그 터 위에 새로운 천룡사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데 가건물식으로 지어져있다.
이 절터 중앙에는 하늘높이 솟아 있는 3층석탑이 절터를 지키고 있다.
이 천룡사는 남산의 정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이다.
이 절의 창건연대는 모른다. 단 삼국유사의 이 절에 대해 몇 구절 나와있는데, 신라말기에 당나라 사신이
신라에 놀러오면서 천룡사에 대해 언급하기를 '천룡사가 망하면 신라도 풍지박산난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 당나라 사신의 말처럼 되었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고려시대에서 몇번 중건을 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완전
문을 닫고 말았다.
천룡사 부지에는 보물 1188호로 지정된 3층석탑과 석등의 받침돌, 석조, 멧돌 등이 남아 있는데,
멧돌은 절의 남쪽 산자락의 처박혀 있다.
그외에는 3층석탑 주변에 널려 있으며, 석조는 멧돌로 가는 방향에 놓여져 있다.
천룡사의 오랜역사를 말해주는 3층석탑은 근래에 복원한지라 탑신부 부분을 제외하고는 옛 멋이 별로 들지가
않는다. 그나마 탑신부 부분에서 옛 숨결이 느껴 질 뿐이다. 하긴 무너진 상태로 주무시고 있던 석탑을
복원했으니 어쩔수 없을 것이다.
참고로 천룡사는 열반골에서 전해내려오는 어느 미녀가 속세를
떠난 전설과 관련이 있는데,
그 미녀는 신라시대 주요 고관의 딸로, 너무 이쁜지라 왕경(王京, 서라벌)의 왠만한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그런것을 모두 버리고 속세를 떠나기로 하고 먹물 옷으로 갈아입구 남산으로 들어갔다.
남산으로 들어서니 그녀의 향기를 맡고 온갖 짐승들이 그녀를 보기위해 주변에서 껄떡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여자는 그런것을 모두 무시하고 오직 석가를 위해 남산을 올랐고 드디어 어느 노파의 안내로
이곳 천룡사에 와서 보살이 되엇다고 하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온다.
천룡사에서 3층석탑과 구석에 처박혀있는 멧돌을 보고 다시 북쪽으로 길을 잡고 이동하기 시작..
고개를 넘어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가니 관음사(觀音寺)가 나온다. 이 절도 옛 절터에 세워진 절 같은데..
절 뒤에는 곰바위인가 뭔가 하는 바위가 있는데 전혀 안닮은것 같군..
관음사를 둘러보고 부지런히 내려가니 오전 10시 경에 차를 주차시키고 등산을 시작했던 그 곳에 이르렀다.
오전 10시경에 출발한 남산 산행은 오후 5시가 넘어서 모두 종료되었다. 산행시간은 무려 7시간..
남산의 서남부 지역을 여기저기 휘젓고 다닌 셈이다. 7시간에 걸친 산행으로 다리가 좀 아프군..
어쨌든 이번 무지막지한 남산 산행은 이렇게 막을 내리고.. 나는 예설라님 차에 탑승하여 경주역으로 갔다.
중간에 풀꽃님이 터미널에서 하차해서 동대구로 이동했다.
경주역에서 몽상가와 만나서 같이 통일호를 타고 동대구방면으로 가고자했으나 만나지를 못했다.
새털에게 전화를 때려봤으나 내 핸폰이 밥안준다고 갈구는 바람에 연락은 실패했다.
경주역에 도착하니 18:08분, 2분뒤인 18:10분에 동대구행 통일호가 출발한다.
그래서 서둘러서 동대구까지 통일호 표를 구입 (운임은 무려 1900원이다.)
졀라게 뛰어서 포항발 동대구행 cdc통일호 열차에 탑승했다.
그런데 열차안세 승객들이 졀라 많다. 좌석은 다 찬 상태이고, 입석도 상당하다..
에구 다리 아파 죽겠는데, 어떻게 서서 가나.. 막막하군...
열차에 오르자 혹시 몽가일행이 있을까 해서 열차 전량을 수색했으나 찾지 못했다.
그 다음날인 월요일에 안 사실이지만. 나와 몽가 일행은 같은 열차에 타고 있었다. 그런데도 못찾았다.
유구무언이군..
18:10분이 되자 열차는 승객을 무지막지하게 싣고 경주역을 출발한다. 피곤해 죽겠는데 자리는 안나오는군..
경주를 출발하여 건천,아화를 건너뛰어 영천역에 정차, 금호를 건너뛰어 하양역에 정차, 청천,반야월,동촌을
건너뛰어 마지막역인 동대구역에 19:23분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1:20분동안 서서 온 것이다.
지방에서 통일호를 입석으로 가기는 처음이다.
아픈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동대구역사로 가서 예약한 열차표를 구입하고 부근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20:06분에 부산발 서울행 무궁화호 열차에 탑승했다. 운임은 무려 13600원이다.
열차안에 승객은 졀라 많았으나 나는 좌석이 있는지라 편하게 앉아갔다.
신발을 벗고 다리를 뻗으며 자고 있는데 앞에 앉은 여자가 발좀 치워달라고 그런다. 허걱~
하루종일 남산에서 헤매서 그런지 냄새가 좀 나는 모양이다. 나는 할 수 없이 발을 아래쪽 발받침개로 옮겼다.
하긴 하루종일 운동화신고 뺑이 쳤으니.. 냄새가 날만도 하다. ㅋㅋㅋ
어쨌든 신탄진역까지 정신없이 자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잠이 오질 않는다.
뜬눈으로 결국 서울역까지 오게 되었는데, 서울역 못미쳐에서 신호대기라 하여 10분 이상 정차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하여 나의 컴백홈 시간을 지연시켰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0:20분.. 무려 15분이나 지연했다.
역사를 나와서 염천교 못미쳐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초조하게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휴일이라 그런지 버스가 잘 오질 않는다.
0:40분이 되자 서울시내버스 55번(서울역-구리시수택동)이 온다. 이 차의 서울역 막차시간은 새벽 1:10분 경이다.
55번을 타고 썰렁한 남대문시장,종로를 지나 종로6가에서 하차 (0:50분)
건너편에 도봉구,의정부,양주군 방면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버스정류장에는 수십명의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서울좌석버스 902번(종로5가-양주군 덕정리)이
오자 그 수십명이 우루루 몰려가서 탄다.
나도 902번을 타도 되지만 좌석탈 돈이 없어서? 시내버스 13-3번(종로5가-양주군 덕정리)을 타기로 했다.
새벽 1시가 되자 서울시내버스 13-3번(종로5가-양주군덕정리)이 왔다. 와 승객들 졀라 많군..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이버스의 종로5가 막차시간은 새벽 1:50분경이다.
종로6가를 출발하여 대학로,삼선교,돈암동,미아3거리,수유리에서 엄청난 승객들이 탄다.
창밖 거리는 어둠에 쌓여 썰렁하지만 버스내는 수십명의 사람들로 시장바닥을 이루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1:35분에 도봉동에 도착... 집에 오니 새벽 1:40분...
* 이로써 경주 여행은 막을 내린다.
* 위에 내용중 용장사 부분과 태평이란 연호는 관련 책을 참조해서 썼으며, 남산 불상의 수난관련 부분은
한국미술사 교수의
자문을 얻어 쓴 것이다. 그 외에는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썼음을 밝혀둔다.
* 그리고 일부 회원들은 내가 필기안하고 질문같은 것도 안하고 딴짓한다고 해서 답사에 문외한이다, 무식한
놈이다 등등으로 치부하는 경향들이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아주 큰 오산이다. 무식한 넘이 저렇게 쓸 수 있단
말인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다.
* 답사 다음날에 있던 시험은 다행히 답사 전에 공부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출제가 되서 망치는 것은 면했다.
아마 남산의 있는 수십기의 석불들의 가호(加護)가 아닐련지? 공부안한 부분도 많은데, 그 부분에서 나왔으면
시험은 완전 조졌을 것이다.
* 그리고 아래의 뜨지 않는 사진은 양쪽 너비의 조정을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니 양지 바란다.
첫댓글 저기여...항상 가을사랑님 답사기를 읽을때면 궁금했는데요,일일이 시각을 메모하시나여?(분까지....) 한번도 메모하는 모습은 못본것같은데,,,^^답사기 잘 읽었구요...참 특이한(?) 청년이구나...그런 생각했었어요... 몇번의 만남과 님의 글을 읽으면서...여하튼 답사기 잘 읽고있습니다.*^^*
어쩜 비상한 기억력이 부럽군요.열심히 메모해도 기억을 못하는 평범한 사람에게 비법 한수 가르켜주시고요 뒤에글은 없어도 님의 실력을 인정할텐데하는 생각이네요 다른 답사후기가 기다려집니다.
재미있네예. 님이 저처럼 좀 어뚱한 구석이 있는것 같았는데...쉽게 읽을 수 있도록 시간의 흐름에 따른 기행문 형식이네예. 출처까지 정확히 밝혀주었으면 더 재미있고 신빙성이 있을것 같은데.다음 답사때는 꼭 술한잔 합시다.
잘 읽고 갑니다. 같이 못한것이 너무 아쉽군요..
가을사랑은 메모는 안하던데.. 그 기억력은 대단한거 같음... 작년에 옥천에서 영동가는 버스이름과 번호를 물어보는데 당최 알수가 있어야지.. 나도 기억력 향상을 위해 열심히 정진해야지..ㅋㅋㅋㅋ
히메님 ㅁ ㅔ ㄹ ㅗ ㅇ.. 배경음악은 '신라의달밤'입니다.
저는 기억력이 나빠서리 악필이라도 써놔야지 안심이 됩니다. 비록 나중에 내 글씨도 잘 못알아보지만서도..헤헤 악필교정 또 다녀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