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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 3. 8(화)
■이석영(李石榮)
이석영(李石榮,1855년 ~1934년 2월 16일 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1855년에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1835~1907)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나이 31세(1885년)가 되던해 영의정을 지낸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년 8월 12일 ~ 1888년 9월 5일)에게 양자로 입적 되었다.
그후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한 해가 저물어가던 1910년 12월 30일 새벽, 생가(生家)의 형제 건영(李健榮, 1853 ~ 1940)· 석영(石榮)· 철영(哲榮,1863~1925)· 회영(會榮,1867~1932)· 시영(始榮,1868. 12. 03~1953. 04. 19)· 서제(庶第) 호영(護榮,1875~1933)의 여섯 형제는 집안의 재산을 전부 처분한 거금을 챙겨 가족 40여명과 함께 비밀리에 중국으로 망명한 뒤, 경학사· 신흥무관학교의 창설 운영자금으로 헌신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 자금 등으로 재산을 다 쓴 이후 이석영은 중국 각지를 홀로 떠돌아다녔다. 1934년 중국 상하이에서 8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석영의 장남인 이규준(李圭駿,1899 ~ 1927)도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며, 일제의 밀정인 김달하 등을 암살하고 한커우(漢口)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29세의 나이로 암살당해 사망하였다.
▲이건영(李健榮) 선생 초상화 | ▲이석영(李石榮) 선생 초상화 | ▲이철영(李哲榮) 선생 초상화 |
▲이회영(李會榮) 선생 초상화 | ▲이시영(李始榮) 선생 초상화 | ▲이호영(李護榮) 선생 초상화 |
■이석영의 서울·평택·남양주 땅, 독립운동의 자양분
이석영·이시영, 학문에 힘써 대과 급제 후 관직 시작
이석영, 유학자이면서도 합리적이고 유연한 성품의 선비 적손 끊긴 이유원,
이유승의 둘째 이석영을 양자로 품어 서울·평택·남양주 저택과 전답 등 재산 이석영에게 상속 평택 가곡1리 일대 5만여 평 전답은 제주 고씨에게 방매 급하게 재산 방매, 40만 원(당시 화폐 기준) 가량으로 독립운동 자금 활용
남달랐던 이유승의 여섯 아들 조선 말기 우찬성을 지낸 이유승의 저택은 서울 중구 저동에 있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명동성당 앞 로얄호텔과 YWCA회관 일대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모두 여섯 아들이 있었다.
여섯 아들 가운데 둘째 석영과 다섯째 시영은 심지가 곧고 학문에 뛰어났으며, 넷째 회영은 세상을 보는 안목과 실천력이 남달랐다.
때는 바야흐로 개항기, 제국주의 침략 앞에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 결단과 변화를 요구하는 시기였다.
이들 6형제들은 가치관과 세계관은 달랐지만, 민족적 위기상황에서 각자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했다.
6형제 중 이석영(1855~1934)과 이시영(1869~1953)은 학문에 힘을써 대과에 급제한 뒤 관로에 들었다.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명부인 <문과방목>에는 이석영의 대과급제를 고종 22년(1885년)으로, 이시영은 고종 28년(1891년)으로 기록했다. 이석영은 31세였고 이시영은 23세의 이른 나이였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두 사람의 관로는 순탄했다.
어쩌면 승승장구했다고 해야 옳다.
이석영은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급인 승정원 좌부승지와 우승지를 거쳐 종2품 호조참판에 올랐으며, 이시영도 약관의 나이에 동부승지를 거쳐 을사늑약 이듬해 평안도 관찰사를 제수 받았고, 대한제국에서 외부교섭국장, 한성재판소 수반판사 등 요직을 지냈다.
역사기록에는 이석영과 관련된 내용이 많지 않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록에도 불구하고 이석영의 학문과 풍모를 짐작할만한 기록은 여러 곳에 있다. <사정일기>에는 “정언(정6품)으로 있는 이석영이 찾아와 반나절동안 경전의 의미를 토론하고 갔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그들이 읽은 경전은 맹자와 중용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유교적 소양이 출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08년 동생 이회영이 아들과 조카 5명의 머리를 깎아 신식학교에 입학시키며, 이석영의 아들 규준도 입학을 권했던 일이 있었다.
이석영은 처음에는 펄쩍 뛰며 꾸짖었지만 근대교육의 필요성을 듣고는 순순히 따랐고, 주변에도 입학을 권유했다고 한다. 위의 사례는 이석영이 완고한 유학자의 틀을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합리적이었고 유연했던 선비였음을 말해준다.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여사의 <서간도 시종기>에는 “1913년 10월 20일 이석영이 마적들에게 납치되었지만, 중국인들이 선생을 만주왕으로 지극히 존경하여 다음 날 풀려났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인들이 만주왕으로 존경했다는 내용에서 그가 재력 뿐 아니라 나눔에 넉넉했던 온후한 인품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석영의 인품은 상하이의 한국국민당에서 발행한 <한민>이라는 신문 기사에도 엿보인다.
<한민>은 이석영의 죽음을 두고 “수많은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운영에 쏟아 부어 나중에 곤궁하게 되었지만 일말의 후회나 원성의 개식이 없고, 태연하여 장자의 풍이다”라고 보도해 신념에 충실했던 사대부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다.
이석영은 넷째 동생 이회영을 신뢰했다.
이회영은 젊어서 양명학을 접했고 성품이 호방했으며 신문물에 유연했다.
1895년 을미사변을 목도하고는 크게 분노했으며, 1896년 독립신문을 읽고 사상적 변화를 겪었다.
명성황후 시해로 전국이 끓어오를 때는 의병을 일으킬 자금마련을 위해 황해도에 인삼밭을 운영하다 실패하기도 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는 관직에 있었던, 이상설과 동생 이시영을 통해 조약무효를 위해 노력했고, 을사늑약 뒤로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신민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고종을 설득하여 이상설의 헤이그 특사 파견을 주도했다.
근대교육에 힘쓰고 부친이 사망한 뒤 집안의 노복들을 풀어줬으며, 상동교회에서 이은숙 여사와 신식 결혼을 했던 일련의 태도는 그의 의식수준이 어디에 이르렀는지 보여준다. 1909년 봄 신민회의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결의가 있은 뒤 직접 만주 연해주 일대를 둘러보고 형제들을 설득한 것도 이회영이었다.
이석영이 동생의 근대사상을 충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지만, 서간도 망명 계획에 찬성하고 전 재산을 내놓았던 것은, 이 같은 동생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석영은, 이유원의 양자로 재산을 상속받았다.
귤산 이유원(1814~1888)은 이세필의 둘째 아들인 이정좌의 후손이다.
그의 가계는 조부 이석규와 부친 이계조도 판서를 지냈을 만큼 유력가문이었다.
25세의 젊은 나이에 대과에 급제했으며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병조참의, 의주부윤, 함경도 관찰사, 도승지를 거쳐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좌의정에 오를 만큼 관로도 순탄했다.
또 청나라에 사신으로 오가며 사무역私貿易을 하여 억만금의 재산을 일궜으며, 이 돈으로 흥선대원군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는 한편 남양주 일대에 엄청난 전답을 마련하여 한양 3대 갑부, 경기도 5대 부자, 전국 10대 부자로 손꼽혔다.
한때 흥선대원군과의 갈등으로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고종이 친정親政하며 영의정에 올랐고, 개항 후 열강에 대한 문호개방과 제물포조약체결, 각종 편찬사업에도 앞장섰다. 가문과 학문, 문예적 재능, 관직과 경제력에서 남부러울 것 없었던 이유원에게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않는 아픔이 있었다.
그에게는 정실부인에게서 난 큰아들 수영(1858~1880)과 두 딸, 그리고 측실에게서 난 아들 호영과 표영이 있었다. 큰아들은 어려서부터 학문이 출중하여 17세 어린나이에 대과에 합격했고 불과 23세에 지금의 차관보급인 정3품 이조참의에 올랐다.
전도양양했던 이수영은 1880년 후사를 두지 못하고, 그만 23세로 요절했다.
적손이 끊기면 형제들이나 가까운 친척 중에서 양자를 들이는 것이 당시의 법도였다.
아들을 잃은 이유원이 눈독을 들인 인물은 다름 아닌 이유승의 둘째 석영이었다.
하지만 이유승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당시 이석영의 나이는 양자로 들기에 너무 늦은 31세였고, 이유승으로서도 공부 잘하고 품성이 온후한 아들인 이석영을 내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원은 고종에게 ‘이석영을 후사로 세우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승정원일기> 고종 22년(1880년) 1월 10일의 기사에는
“신이 타고난 명이 박하여 자주 상을 당해 제사를 맡길 자식조차 없이 어느덧 죽음을 눈앞에 둔 80의 노인이 되었으니”라는 애처로운 상소가 등장한다.
결국 고종의 중재로 이유원은 이석영을 양자로 품을 수 있었다.
<가오고략>에 따르면 이석영이 양자로 들어간 시기는 1880년 1월이다.
그리고 양자로 들어간 그해 8월에 대과에 합격했다.
이유원으로서는 횡재를 한 셈이다.
이유원은 이석영을 양자로 맞으며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선대 이세필의 예론(禮論)에 따라 양자(養子)라고 할지라도 나이순으로 서열을 정하겠다는 약속이다.
가통과 재산 상속 문제가 걸린 서열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이유원은 입으로 했던 약속을 입증이라도 하듯 자신이 저술한 <가오고략>에 조부 이석규로부터 후대에 이르는 가계도를 첨부했다. 가계도에는 이수영보다 8살이 더 많았던 이석영이 장자(長子)로 가통을 잇고 있었고, 둘째 이수영 아래로는 측실의 자손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로서 이석영은 향후 서울 저동의 저택과 남양주의 저택과 전답, 이정좌로부터 상속되어온 평택시 진위면 가곡리의 전답을 모두 소유하게 되었다. 이유원의 별서가 있었던 천마산 동남쪽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의 본래 지명은 ‘임하려’다.
이 마을에는 조선 중기부터 전주 이씨들이 세거하고 있었고, 1871년 이유원이 <가오고략>을 지을 때도 천마산 임하려에서 탈고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임하려가 ‘가곡리’로 바뀐 것은 가오실 대감으로 불렸던 이유원이 거주하면서부터다.
그러면 이유원은 왜 가오실 대감으로 불렸을까? 해답은 이유원의 고향인 평택시 진위면 가곡리 가오실(가야실, 개실)에 있다. 이곳 가곡리에는 지금도 경주이씨 재실이 있고, 이정좌의 묘와 이유원의 부친 이계조의 묘가 있다.
이석영, 억만금 재산 독립운동에 바쳐
이석영, 이회영 형제들이 억만금 재산을 처분하여, 식솔들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했다고 해서, 형제들의 사상과 가치관이 동일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회영이나 이시영은 상동교회와 신민회와 밀접하여 기독교적 세계관과 공화주의를 수용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이석영의 사상전환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그는 망명 당시까지 여전히 유학자였고 복벽주의적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석영이 사상적 차이를 강조했거나 논했다는 기록은 없다.
목표는 달랐지만 “삼한갑족으로 누렸던 부귀영화를 국권회복에 내놓아야 한다”는 이회영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과, “일제를 타도하고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대의(大義) 앞에 굳이 사상적 차이를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석영, 이회영을 비롯한 6형제가 독립운동에 바친 재산은 정확히 가늠할 수 없다.
정확히 얼마 만큼인지 알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누구는 현재의 시세대로 다른 이는 당시 가격대로 산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이석영이 조선에서 열손가락 안에 드는 큰 부자였고 그 재산들이 모두 독립운동에 투여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덕일은 이석영이 매각한 재산이 40만 원쯤 될 거라고 말했다.
당시 쌀 한섬에 3원이었고 천일은행을 비롯한 3개 민족은행의 총 자본금이 32만 5천원에 불과했으므로 실로 어마어마한 돈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진다면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 이석영의 재산 가치를 충분히 밝혔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경주이씨 가문에서는 500만원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왕현종은 광무양안을 활용하여 이석영의 남양주 재산만, 최대 90만평(6000석) 이상이고 임야가 161만평이라고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이석영의 독립운동 자금문제에서 지금껏 우리가 관심 갖지 않았던 점이 있다.
연구자들은 대부분 8000여 평에 달했던 서울 명동의 저택과 이유원에게서 상속된 남양주의 전답과 임야에만 주목했는데 이 과정에서 평택지역의 재산이 누락되었다.
당시 평택지역에는 두 종류의 재산이 있었다.
하나는 진위면 봉남3리 일대의 종중재산이고, 다른 하나는 진위면 가곡1리 일대의 이정좌 계열 재산이다.
진위면 동천리와 마산리, 동막마을에도 재산이 있었지만, 그것은 백사공파보다는 상서공파의 재산으로 분류된다.
과거 봉남3리 일대는 이세필의 장남 이태좌의 소유였다. 이태좌의 재산은 종손인 이건영에게로 상속되었으며
이정좌의 후손들이 일군 가곡1리 일대 전답은 이유원에게 상속되었다.
가문에 전해오기로 이건영은 만주로 망명하기 전 봉남3리 일대의 전답과 임야는 종중재산이므로 매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 일대의 임야와 전답은 거의 대부분 경주이씨 소유로 남았다. 하지만 가곡1리는 달랐다.
남양주 전답과 함께 진위면 가곡1리 이유원의 재산을 상속받은 이석영은 이 일대 5만여 평의 전답을 모두 같은 마을 제주 고씨에게 방매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필자가 진위면 가곡1리를 답사하며 들은 바로는 고씨들은 “1910년경 경주 이씨가 갑자기 몰락하여 모든 재산을 고씨가 매입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남양주 재산 방매에 대한 가곡마을 주민들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주민들은 “가곡대감의 아들이 악질 친일파였는데, 방탕하여 모든 재산을 날렸다”고 기억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석영, 이회영 형제들의 만주 망명은 이회영, 이시영의 선각자적 생각과 이석영의 재력이 결합되면서 이뤄진 결과였다.
망명 초기 경주이씨 일가를 비롯해서 독립운동가들의 정착과 생활비, 신흥무관학교 부지 매입과 운영비를 제공한 것도 이석영이었다. 결과 조선 10대 거부의 재산은 몇 년이 못가 눈 녹듯 사라졌고, 1918년경부터는 일제로부터 ‘용의조선인’으로 낙인찍혀 감시를 받았으며, 인생 후반기를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며 만주와 중국 일대를 떠돌다. 이역 땅에서 눈을 감았다.
출처 : 평택시사신문 기획취재단(국내·중국 상하이팀)
글 / 김해규 평택지역문화연구소장
사진 / 박성복 평택시사신문 사장
진행 / 임봄 평택시사신문 취재부장
조사 / 황수근 평택문화원 학예연구사
디자인 / 김은정 디자인팀장
캘리그래피 / 정아름 작가
후원 /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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