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의 일이다. 필자에게 자신이 감정에 매우 충실한 사람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 모든 판단 기준은 감정이었다. - 지금 돌이켜보면, 그 사람이 말한 “감정”이란 자신의 욕구 혹은 욕망이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여겨지지만, 아무튼 - 당시 필자는 그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납득할 만한 합리적 이성적 판단만 신뢰할 만하며, 감정이란 늘 변하는 것이라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여겼기 때문이다. 감정보다 합리적 이성을 우위에 두었던 근대 이래, 많은 사람들은 필자처럼 공적 영역에서 감정 개입의 배제를 미덕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오로지 이성적이기만 한 판단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은 바람직한가? 이성/감정의 이분법적 위계를 깨뜨리는 포스트모던적 문제제기의 지점에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주인공 박차오름 초임판사(고아라 분)가 있다.
# 현실과 판타지 사이
<미스 함무라비>는 원작과 드라마 각본을 모두 현직 부장판사 문유석이 썼다는 점에서 화제가 되었다. 때때로 박차오름 판사가 조직의 특수성과 법관으로서의 기본 원칙, 상관의 지침을 어기면서까지 하는 행동들이 지나쳐 보일 때도 있고, 신파적 요소나 감정적 여성(박 판사) 대 이성적 남성(임바른 판사, 김명수 분)의 설정이 아쉽기도 하지만, 여전히 <미스 함무라비>를 반짝거리게 하는 요소들이 있다.
기존의 장르물들이 살인사건이나 거대 권력비리 등 우리네 삶과 조금은 동떨어진 이야기를 풀어갈 때, 현직 판사 출신의 작가가 쓴 작품답게 <미스 함무라비>의 법정씬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이웃 간의 갈등, 식당 주인과 손님 간의 시비, 형제 간의 재산 분쟁, 의료소송 등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소소한 민사소송 사건들을 다루면서 그에 연관된 서민들의 디테일한 삶의 애환들을 그려낸다. 출연하는 등장인물들도 어느 하나 소외시키지 않는다. 현실의 법원을 옮겨놓은 양, 실무관, 참여관, 경위 등 법원에서 판사들 못지 않게 바쁘게 움직이는 이들을 세심하게 언급하면서, 모두가 살아숨쉬는 한 인격이고 존재이며, 함께 손발을 맞추고 마음을 합할 때에만 하나의 사회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음을 살며시 전해준다. 그뿐 아니다. 기존의 법정 드라마가 정의구현 과정에서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서사에 집중한다면, 이 드라마는 공정한 재판을 위한 법조인의 고뇌에 우리를 초청한다. 진정한 정의란 무엇이며, 정의로운 판결이란 어떤 것인가와 같은 고뇌들 말이다. 여기에 작가의 의도가 배어 있다. “소박하게나마 각자 자기가 선 자리에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서 “누구나 실제로 겪을 수 있는 ‘진짜’ 사건들과 그걸 다루는 사람들의 ‘진짜’ 고민을 담고자 했다.”(문유석 판사의 인터뷰 중)
# 팔이 어디로 굽어 있는가
출근 첫날, 박차오름 판사가 지하철 성추행범을 잡는 장면이 SNS에 퍼지면서 ‘미스 함무라비’라는 별명을 얻는다.(여기서 ‘미스’라는 표현은 젊은 여성이 결코 ‘함무라비’가 될 수 없는 현실의 유리천장을 의미한다.) 의료사고로 아들을 잃고 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눈물 흘리며 듣고 항소를 도와준다. 부장판사의 과도한 업무로 유산을 한 선배 검사를 위해 전체판사회의를 소집하게도 한다. 그 과정에서 늘 생채기가 나지만 박 판사는 꿋꿋하게 다시 ‘약자를 향해 팔을 굽힌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의 편을 드는 게 아니라 그게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언제라도 드라마 속 피고인의 자리에 자신이 설 수 있기에 시청자들은 박 판사가 드라마에서 공감과 연민으로 사회적 약자를 대할 때, 마치 내가 어려움에 처한 그 사람이 된 양 위로를 받는다. 목소리를 내거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 울분을 토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용기를 얻는다. 어떤 상황과 사안에서도 중립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판사의 원칙과 소신이 ‘자신의 안위와 비호세력을 위하여 굽어져 있는’ 한국의 현실, 그런 일부 법조인들이 장구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낙심하여 주저앉았다가도 정의로운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다시 가지고 일어서게 한다. 감정의 힘이다. 법전과 판례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판사 사람’이 문서 너머 살아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서사를 면밀히 들을 때, 공감과 연민의 팔은 정의의 편으로 차츰 ‘굽어진다.’ 마사 누스바움이 “감정도 신념의 복합체로서 공적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한 말이 바르게 작동하는 시점이다. 이때 약자와 관련된 감정의 자리에 혐오와 수치가 들어설 곳은 없다.
우리는 놀라운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은혜를 받으면서도, 예수님을 바라보느라 예수님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을 놓칠 때가 왕왕 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왔노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죄에 대한 심판이나 판단이 아니라 치유와 구원이 필요했던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복음이 진정 복된 소식으로서 의미가 있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생명에 대하여 연민과 공감의 자세로 대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 임마누엘, 정의(율법)를 완성하는 사랑
드라마 초반, 박차오름 판사와 임바른 판사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면모는 두 사람이 갖고 있는 상징물로 드러난다. 임바른 판사가 고야의 그림 “산 이시드로의 순례 행렬”을 벽에 걸고 눈을 가린 채 양날 검과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 ‘디케’를 책상 위에 두었다면, 박차오름 판사는 부둥켜 춤을 추고 있는 이중섭의 그림 “가족”을 벽에 붙이고 힘든 사람들을 돕는 천 개의 손과 눈을 가졌다는 ‘천수관음’을 곁에 둔다. 임 판사가 인간들의 어리석음과 탐욕을 경계하며 냉정하게 사건을 바라보는 이성/정의/냉정/현실/개인주의를 함의한다면, 박 판사는 사람에 애정을 가지고 모두의 사정을 헤아리려는 감정/사랑/열정/이상/공동체주의를 대변한다. 정반대 지점에 놓여있는 두 사람은 드라마가 전개되는 가운데 사사건건 충돌하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게 된다. 서로 닮아가며 성장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보다 훨씬 전에 양극단을 아우르신 분이 계시다는 걸 알고 있다. 바로 예수님이다.
기독교에서 정의와 사랑은 분리되지 않는다. 몰트만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그분의 이름은 정의”라 하였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신 ‘사람’ 예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며,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하나님’(마 5:17)이다. 2천 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셨고, 같이 웃으셨고, 같이 마음 아파하며 눈물 흘리신 분이다. 사람들로부터 돌의 심판을 받을 한 여인을 안타까이 여기시며 자유롭게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의 팔은 어디로 굽어야 하겠는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곧 동해보복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고대 바빌론 함무라비 왕의 법이 보복으로서의 정의를 말했다면,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 <미스 함무라비>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연민과 공감, 약자를 향한 사랑으로서의 정의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땅 가운데 진정한 정의를 펼쳐야 한다는 책임적 과제를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안겨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