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양동천(岳陽洞天)의 보석, 평사리(平沙里) 최참판댁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문(文)은 무(武)보다 강하다... 영어(英語)라는 다른 나라말을 처음 배울 때, 관용구로서 밑줄 새카맣게 쳐가며 외웠던 말이다. 적절한 비유가 될 지 모르지만, 한 여류작가가 쓴 한 편의 소설이 현실로 되어, 마을을 하나 낳은데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소설속 인물들이 현실로 되살아나,소설의 내용이 현재 진행형이 되어 이곳을 찾는 이들과 서로 교감(交感)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土地)"의 배경이 된,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가 그곳이다.
▲ 악양 "무딤이들"과 섬진강
▲ 드라마"토지" 촬영장세트, 물레방앗간
옛날 선인(仙人)들은 지리산을 학(鶴)에 비유했다. 지리산의 북쪽 면은 백학(白鶴)에 비유했고, 남쪽 면은 청학(靑鶴)에 비유했다. 북은 백학이요, 남은 청학이다. 칠언절구로 표현하면 '남비청학악양면'(南飛靑鶴岳陽面), '북래백학산내면' (北來白鶴山內面)이다. '남쪽으로 날아간 청학은 악양면으로 갔고, 북으로 온 백학은 산내면에 앉았도다.'
곳은 북쪽의 산내면과 남쪽의 악양면이라고 한다. 산내면에는 10여년 전부터 귀농학교와 대안학교가 세워져서외지의 젊은 사람들이 100여명 가량 들어와 살고 있다. 이들이 낳은 자식들이 커서 벌써 학교에 들어갔다. 이번에 족구대회 할 때 족구 팀이 무려 13곳이나 될 정도로 젊은 사람들이 많다. 산내면은 진지하게 공부하는 분위기이다. 단전호흡파, 백수들이 토착 농민들과 어울려 산다. 10년 전에는 승려들만 해도 300여명 가량 들어와 살고 있었는데지금은 많이 철수했고, 외지의 낭인과(浪人科)들이 들어와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악양면 앞에는 섬진강이 흐른다. 맑은 섬진강 물에는 투망질만 하면 은어도 많고, 먹을 고기도 많다. 뒷산인 지리산에는 온갖 약초가 많다. 두 집 건너 한 집은 차(茶)를 가꿀 정도로 차 밭도 많다. 부지런만 하면 굶어 죽지 않는 동네가 악양이다. 악양 골짜기에는 수백만 평의 너른 들판이 있어서 농사도 많았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악양은 이상향을 찾아 전국을 떠돌았던 비결파들이 마지막으로 회향(回向)하던 곳이었다. '산남강북'(山南江北)으로 이루어진 지역은 양기(陽氣)가 뭉친 명당으로 꼽혔는데, 악양이 이런 형세이다. 이런 지형을 동천(洞天)이라 부른다. 그래서 악양동천(岳陽洞天)이다. 최근 경기가 좋지 않으니까 외지의 젊은 사람들이 지리산의 악양면으로 많이 들어오고 있는 중이다. 가보니까 동네가 활기를 띠고 있다. 6인조 '동네밴드'까지 결성될 정도이다. 과연 지리산은 명산이다. (조선일보 조용헌살롱)
▲ 물레방앗간
▲ 드라마"토지" 촬영장세트
요즈음은 어떤지 모르지만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고문(古文)이란 수업을 받았었다. 많은 옛글들을 배웠겠지만 제목정도라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중의 하나가 두보의 등악양루(登岳陽樓)다. 이곳 악양이란 명칭도 중국의 악양과 닮았다하여 지어진 것이라 하니, 이 참에 두보의 詩를 꺼내어 상기해본다.
登岳陽樓(등악양루), 악양루에 올라/ 두보(杜甫)
▲ 최참판댁
▲ 행랑채와 외양간 외양간의 소는 밀랍으로 만든 것이다.
▲ 별채
▲ 별채의 누마루
▲ 안채와 사랑채 문
▲ 사당의 담장
▲ 풍경(風磬)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선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시(‘현대문학’2008년 4월호) -
▲ 최참판댁 사랑채
이곳에서 참판역할을 하시는 덕망높은 세 분이 번갈아가며 안내도 해주시고 가훈도 써 주시는 모양이다. 날 저물기 전에 출발하리란 조급함 때문에 나혼자 돌아다니며 덤벙덤벙 사진찍기에 바쁘다보니, 그분들이 설명 해주시는 자세한 내용들을 듣지 못했다.찍은 사진을 확대해서 보면 가능하리란 생각에, 최참판댁 사랑채의 주련을 전체적으로 찍었으나 정확히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사실, 이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솔직히 나는 주련을 읽어보지도 않고 두보의 등악양루가 적혔을 것이란 좁은 편견을 가지고 서둘러 돌아왔었다.
하동군청에 전화를 하니 몇번 건너서 연결해준 담당부서의 직원이, 참판역할을 하시는 분의 연락처를 친절히 안내해준다. 사정을 알리고 주련에 인용한 글을 여쭈니 유호인(兪好仁)의 詩를 적은 것이라 한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내게 연락처를 굳이 물으시며, 우편으로 보내주시겠다는 것을 이 정도 알면 되었다 하였 으나 한사코 청(請)듣기를 원하신다. 주련이나 한시에 관심을 가진 이가 기특하신 모양이다..... 그분은 정○○ 참판이시다. 어제의 일이니 아직 편지는 도착하지 않았지만 그분의 자상함과 친절한 배려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어렵사리 자료를 찾았으나 어떤 부분은 누락이 되어있어 일부 보완을 하였다.
▲ 최참판댁 사랑채의 주련
악양동천(岳陽洞天)/유호인(兪好仁)
一?歸心天盡頭(일국귀심천진두) 한가닥 돌아가고 싶은 마음 하늘에 닿았는데 岳陽無處不淸幽(악양무처불청유) 악양은 곳곳이 맑고 깊구나. 杜谷林塘春日遠(두곡임당춘일원) 두견새 우는 숲 언덕은 봄 기운에 멀고 輞川煙雨暮山浮(망천연우모산부) 섬진강 안개 속에 저문 산이 떴구나 雲泉歷歷編供興(운천역역편공흥) 구름은 뚜렷이 흥취를 돋우나 軒冕悠悠惹起愁(헌면유유야기수) 초헌의 사부(士夫)는 넌지시 수심이 이네. 經筵每被?三接(경연매피최삼접) 글 자리에서 자꾸만 재촉 받으니 睾負亭前月滿舟(고부정전월만주) 정자에 엎힌 달이 배에 가득하더라.
▲ 사랑채의 누마루
유호인(兪好仁)은 조선조 초기 성종때의 문신으로, 학덕이 높은 관료이며, 이름난 문장가였다. 고령유씨(高靈兪氏)의 대표적 인물이다. 자는 극기(克己), 호는 임계(林溪)또는 뇌계라 했다.("뇌"의 한자는 삼수변에 우레 뇌(雷)를 합한 글자다)
그는 유명한 사림파 김종직의 문하에서 배워, 30세에 문과의 벼슬길에 오른 뒤, 곧 그의 총민함이 들어나 학문연구에만 몰두하도록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뽑히는 특혜를 받은 뒤, 거창현감이 되어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본래 글을 좋아하는 성종임금이 유호인을 매우 총애하니, 시문과 문장, 글씨에 모두 능한 그를 두고 사람들이 당대의 3절(三絶)이라 칭송하였다. 그런 그가 악양을 들러 남긴 시가 악양동천(岳陽洞天)이다. 장수의 창계서원(蒼溪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되었다.
▲ 누마루에서 바라본 악양들과 섬진강
▲ 사랑채 내부(사진속 웃는 분이 이곳 참판님...)
▲ 선(線)이 만들어 내는 정교한 공간구획의 美
▲ 유려(流麗)한 처마 선(線)
▲ 사랑채에서 본 행랑채
물론 이곳은 옛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은 아니다. 관광사업의 일환으로 최근에 지어져 문화재적 가치는 평가받지 못하는 가옥들이지만, 사대부의 품격과 위상을 고려한 건축물임에는 틀림없다. 낮게 축조한 굴뚝은 이곳에서 멀지않은 구례 "운조루"의『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낮은 굴뚝의 배려"가 묻어나고 있다.
관람을 마치고 돌아서는 길에, 양 옆으로 즐비한 상점 한 곳에서 곶감 포장하는 모습을 보고 들어갔다. 대봉감이다...크기도 크기지만 한 번 맛보라며 건네주는 곶감의 단맛에 혀 끝이 황홀하다.
기후가 온화하고 토질이 비옥하며 충분한 일조량으로 생산된 악양골 대봉감은 감칠나는 맛과 색깔, 모양이 아름다워 옛날 임금님의 진상품으로 이름난 전통과일 정부품질인증을 획득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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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쓸쓸히 채워져 있고 따뜻이 비워진 숲 원문보기 글쓴이: 들이끼속의 烏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