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10 - 일본의 조정이 둘로 나뉘어 내란으로 들어간 남북조 시대!
(1) 조큐의 난(承久の乱)
조큐의 난(承久の乱)은 1221년 교토 조정의 고토바 상황이 천황(일왕)의 정치를 부활시키려고
동쪽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에 대한 토벌군을 일으켰다가 패배한 병란(兵亂)을 말합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執權) 은 호조 요시토키(北条義時) 였는데 무가정권(武家政權) 인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으로, 상황(上皇) 을 중심으로 한 교토(京都) 의 구게정권(公家政權) 과 이두정치(二頭政治) 였으니
일본의 서쪽 지방은 아직도 천황(일왕) 편이 많았으니 고토바상황은 여러 구니(國)에 궐기를 호소합니다.
1) 천황(일왕)군 교토 슈고 습격 : 5월 15일 천황(일왕)의 호소에 궐기한 후지와라 히데야스
는 800명 병력으로 가마쿠라 막부의 출장소인 교토 슈고 이가 마쓰스에를 습격했고
이 소식이 멀리 도쿄 입구 가마쿠라에 전해지자 가마쿠라에서는 무사들이 크게 동요합니다.
그러자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미망인 호조 마사코는 가마쿠라 무사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신
우대장(요리토모)의 은혜는 산 보다도 높고 바다 보다도 깊습니다. 히데야스를 죽여서 돌아가신 3대
쇼군의 유적을 지켜주십시오“ 라고 읍소해 요시토키를 중심으로 고케닌들을 집결시키는데 성공합니다.
2) 막부군과 천황(일왕)군 전투 : 막부군이 소수로 출진해 도중에 19만(?) 으로 불어나자 가마쿠라
무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싯켄을 타도할 것이라고 여겼던 고토바 상황은 당황하는 가운데도
군대를 파견하는데... 후지와라노 히데야스를 총대장으로 하는 17,500여 기를 미노(美濃)에
보내니.... 이들은 미노와 오와리(尾張 나고야) 의 경계인 오와리(尾張) 강에 분산해서 포진합니다.
6월 5일 가마쿠라 막부측 다케다 노부미쓰의 도산도군 5만명은 오이에도(大井戶渡)에 진을 치고 있던
오우치(大内惟信)의 교토(일왕)측 무사 2천명을 격파하자 후지와라 히데야스와 미우라 다네요시는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해 우지(宇治) · 세타(瀨田)에서 교토를 지키기로 하고 재빨리 퇴각을 결정합니다.
6월 6일 야스토키와 도키후사가 이끄는 막부군 주력인 도카이도군 10만명이 오와리강을
건너 스노마타에 진(陣)을 쳤고, 외곽에서 야마다 시게타다 등이 구이세(杭瀨) 강에서
분전했으나 교토(일왕)측은 완전히 무너져 대패하였으며..... 호조 도모토키가 이끄는
호쿠리쿠도 4만명도 교토군을 격파하고 가가(加賀)에 난입해 교토 진격을 눈 앞에 둡니다.
3) 교토 사수 전투 : 미노와 오와리에서의 패전 소식에 교토측은 동요했고 도성 안은 대혼란에 빠지자
고토바 상황은 직접 무장하고 히에이(比叡)산에 올라가 승병(僧兵)들과 협력하고자 했지만, 상황이
내렸던 억제책에 불만을 품었던 히에이산은 거절했고 교토측은 남은 전병력을 모아 우지·세타에
진을 치고 우지강에서 막부군을 방어하기로 결정하니 구게들도 다이쇼군(大將軍) 으로써 참진합니다.
6월 13일, 막부군이 공격해 오자 교토군은 우지강 다리를 부수고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활을 쏘며 결사적
으로 항전하니 막부군은 호우로 불어난 물 때문에 강을 건너지 못했지만 다음날 14일 장애를 무릅쓰고
적들이 지키고 있는 앞에서 강을 건넜으니 많은 익사자를 내가며 적진을 돌파하는데 성공한 막부군의
공격 앞에 교토측은 패주했고 막부군은 교토측 구게, 무사들의 저택에 불을 지르고 약탈과 폭행을 합니다.
4) 천황(일왕)의 대응 : 패주한 교토측 무사인 후지와라 히데야스와 미우라 타네요시, 야마다
시게타다는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자 고쇼(어소, 궁궐)로 달려갔으나...... 상황은 문을
굳게 닫고 그들을 돌려보내니 "겁쟁이 주군에게 속았다!" 며 문을 치면서 분개했다고 합니다.
5) 도지에서 저항 : 고토바 상황은 막부군에게 사자를 보내 "이번 난은 모신(謀臣)이 기획한 것" 이라며
요시토키 추토의 선지를 취소하고 대신에 후지와라노 히데야스등을 잡아들일 것을 명하는 선지를
내리니 상황에게 버림받은 교토측 무사들은 도지(東寺)에서 버티면서 저항했지만, 미우라 요시무라
의 공격에 후지와라 히데야스나 야마다 시게타다는 패주하고 미우라 다네요시는 분전 끝에 자결합니다.
6) 전후처리 : 7월 고토바 상황은 동해(일본해) 오키(隠岐) 섬에 유배되었으며 고토바 상황의 황자 로쿠조
노미야·레이제이노미야도 다지마(但馬), 비젠(備前)으로 유배되었고 어린 천황(일왕)도 폐위되어 구조
폐제(九条廢帝)라 불리게 되었으며 고호리카와(後堀河) 천황(일왕)이 즉위하고 친막부파로써 고토바
상황에 구속되었던 사이온지 기미쓰네가 내대신(內大臣)에 임명돼 막부의 의향을 받아 조정을 주도합니다.
고토바 상황의 막대한 장원은 몰수되어 이쿠스케 법친왕에게 물려주었으나... 그 지배권은
막부가 장악했으며 상황측의 '구교로서 싸움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지명된 이치조
노부요시등 구교들은 가마쿠라로 압송되던 길에 처형되고 근신들도 각지에 유배되었으며
고토 모토키요등 막부 고케닌들 까지 포함된 교토측 무사가 다수 숙청되고 추방 되었습니다.
(2)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
1) 막부의 현황 : 미나모토씨의 장군직은 3대로 혈통이 끊어지고 이후 후지와라씨나 황족을 장군으로
세웠으나 허수아비로, 실권은 처가인 호죠씨가 “싯켄(執權 집권)” 이 되어 행사하였는데....
그러나 막부의 부하인 무사들이 우두머리인 총령에서 벗어나려고 하면서 지휘계통이 흔들리게 됩니다.
더욱 빈부 격차가 심해져서 토지를 매도하는 등 생활고에 시달리는 무사들이 작당을 하여 무력을 행사
하고 약탈을 저지르면서 “악당” 이라고 불리니 사회 질서가 어지럽혀지는 사태도 발생하게 됩니다.
2) 몽골과 고려군의 침략 (문영의 전쟁과 홍안의 전쟁) : 가마쿠라 막부 8대 싯켄(執權) 인 호조
도키무네 시절인.... 1274년 10월 3일 3만 3천의 몽골~고려 연합군이 900척의 대선단으로
일본 규슈를 침략하였고 1281년 5월 3일 몽고, 한인(중국북부), 고려병 4만에 군선 1천척
동로군과 남송(중국남부)군 10만에 군선 3천 5백척 강남군 두 부대가 역시 규슈를 침략했습니다.
고려인 선원들이 배를 몰고 고려군을 앞잡이이자 길잡이로 내세운 대함대는 고려 합포(마산) 를
출발해 대마도, 이키섬을 함락한 후에 시가섬을 점령하고는 규슈에 상륙했는데, 1차 침입시는
일본군이 패했으나 마침 태풍이 불어 고려와 몽고군 선박들이 침몰했고... 2차 침입도 왜군이
작은 배로 연합군 함대를 공격하던중 역시 태풍이 불어 연합군은 막심한 손해를 입고 철수합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침략군을 싸워서 격퇴한 것은 좋으나 전쟁에서는 이겼다고 말할수 있지만
그렇다고 적국의 영토를 점령한 것도 아니고 또 몽골군과 고려군으로부터 노획한
전리품 중에 금은등 돈 될만한 것도 전혀 없으니 쓸만한 물자를 획득한게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군사들은 전국에서 자비로 무장해서 참전했으니 죽거나 다친 사람도 많은지라
당연히 보상을 요구합니다만 막부는 손에 넣은게 없는지라 빠듯한 막부 재정
에서 저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지불할수 없으니 빚을 내서 무장을 갖추어
출진한 전국의 무장들은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고 막부에 대해 크게 불만을 가집니다.
3) 천황(일왕)가의 분열 : 천황(일왕)가가 형인 지묘원통(持明院統) 의 고후카쿠사 상황
과 동생인 다이카쿠사(대각사 大覺寺) 계통의 가메야마왕이 권력다툼을 벌이게 되자
이 분란을 보다 못한 막부의 조정으로 양 계통에서 교대로 천황(일왕)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이카쿠사(대각사) 계통의 96대 고다이고 천황(일왕)은 의욕이 강하여 인재를 등용
하고 정치를 일신하여 그 옛날 천황의 친정체제를 꿈꾸게 되었으니... 하여 교토의
막부측 기관인 “로쿠하라탐제”를 기습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천황(일왕)파가 몰살됩니다.
이후 고다이고 천황(일왕)은 자기 아들 모리나가 친왕을 황태자로 세우려고 했으나
막부 측에서는 지묘원통의 가즈히토를 세우게 되니..... 이에 모리나가 친왕은
세상을 버리고 에이산산으로 들어가 불문에 귀의하고 천태종의 주지가 됩니다.
그후 고다이고 천황(일왕)의 2번째 가마쿠라 막부 타도가 또다시 실패로 돌아가자 고다이고왕
은 나라 지방의 가사기산으로 달아나서 항거하게 되니.... 이 무렵 악당이라고도 불리던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천황(일왕)군에 가담했으니 오늘날 일본에서 충신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천황(일왕)파는 숫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막부 측의 대공세를 장기간 저지하게 됨으로써
교토 성이 함락되기는 했으나.... 다행히 천황(일왕)이 탈출하는 시간을 벌게되지만
이후 계속되는 막부군의 공격으로 천황(일왕)은 동해(일본해)의 오키섬으로 유배가게 됩니다.
4) 가마쿠라 막부의 최후 : 고다이고왕의 아들 모리나가 친왕은 요시노산에서 승병을 끌어들이고 예전
의 용장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나라에서 아카사카성을 재탈환하니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천황(일왕)파는 1333년 4월에 오오사카의 천왕사 까지 진출하여 막부군을 격파하니 전국에서 막부
타도의 불길이 오르게 되었으며 이에 고다이고 천황(일왕)은 오키섬에서 탈출하여 교토로
향하니 셋쓰의 천황(일왕)파 아카마쓰의 군대가 로쿠하라탐제 와 싸우면서 교토로 밀고들어 갑니다.
동쪽 간토의 가마쿠라 막부로 부터 파견된 진압군 대장 아시카가 다카우지(족리존씨 足利尊氏) 가 교토에
도착해 천황파에 가담하는 군세가 많은 것을 보고 변심해 막부를 배반하니 가마쿠라 막부는 고립됩니다.
한편 동쪽의 고즈케(동경 북쪽) 에서는 닛타 요시사다가 거병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가마쿠라막부를 함락시키니 가마쿠라의 호죠씨는 자결하고 막부는 최후를 맞았으며
규슈의 구주탐제 또한 이때 함락되니 일본 천하는 고다이고 천황(일왕) 에게로 돌아옵니다.
5) 건무의 신정 : 고다이고 천황(일왕)은 참신한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쇄신 에 노력하였으니 마침
중국에서 새롭게 들어온 송학(宋學) 인 주자학 의 영향도 있고 해서 특정 가문에서 관직을
세습하던 관례를 깨고 1323년 하급 유자 관료였던 히노 도시모토를 조정의 요직에 발탁합니다.
또 고다이고 천황(일왕)은 친정체제를 정립하기 위해 체제를 혁신하고 이번 정변에
공이 큰 자를 포상하였는데, 그러나 토지 문제에 있어서 황실, 귀족및 신사
에는 후하고 무사들에게는 박하게 분배하자 이에 무사들이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 참에 가마쿠라 막부가 내린 무사들의 군사 행정기관인 슈교(守護 수호) 마저 없애고 싶을
정도였으니..... 결국에는 모리나가 친왕의 군대와 아시카가씨의 군대가 충돌하니 패배하여
흩어졌던 가마쿠라의 호죠씨의 세력도 이 틈에 궐기하여 일본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3) 아시카가씨의 집권
1335년 구 가마쿠라 막부의 호죠씨의 아들 도키유키가 시나노(나가노현) 에서 봉기하여 가마쿠라
를 함락시키니 모리나가 친왕이 죽게되는데... 이때 교토 조정의 나리나가 친왕을 무시하고
아시카가씨가 멋대로 동쪽으로 진격해 가마쿠라를 탈환하니 천황군과의 싸움은 불가피하게 됩니다.
1)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천황군 전투 : 1336년 1월 아시카가 다카우지(족리존씨
足利尊氏) 씨는 천황(일왕)군의 3면의 포위를 뚫고 교토로 입성하니 고다이고
천황(일왕) 은 재빨리 에이산산으로 피신하여 사카모토에 행재소를 차리게 됩니다.
이때 멀리 일본 동북지방인 오슈에서 남진한 천황(일왕)군의 기타바타케씨가 가마쿠라
를 점령하고 서진하여 치열한 싸움 끝에 교토를 탈환하니 아시카가 다카우지씨
는 서쪽 끝 규슈로 도망하여 다자이후(대재부) 를 근거지로 삼아 목숨을 부지합니다.
2) 아시카가씨 북조를 세우다 : 규슈에서 아시카가씨는 쇼니씨와 오토모씨 등의 지원
을 받아 군대를 모아 4월에 다자이후(대재부)를 출발하니 7월에는 미나도가와강
의 대전투에서 천황(일왕)군에 승리하여 교토를 재탈환하였는데 교토를
장악한 아시카가씨는 지묘원계통의 천황을 세우니 이가 고메이 천황(일왕) 입니다.
고다이고 천황(일왕)은 거울과 칼에 곡옥 등 천황의 3종의 신기를 뺏기고 가산원에 유폐되었으며
아시카가씨는 건무식목 17개조 헌법을 발표하고, 참의에서 권대납언으로 승진하여 정이대장군
이 되어 집사와 문주소를 세우니 이것으로 아시카가 막부(훗날 무로마치 막부)가 성립된 것입니다.
(4) 남북조의 대립
1) 남조의 항쟁 : 1336년 12월 고다이고 천황(일왕)이 가산원을 탈출하여 나라현 남쪽에 요시노산으로
들어가 정권을 세우니 이를 남조라 하는데, 비록 세력은 약하나 유교적인 면에서 보자면 명분에서
앞서니 남야마토 지방의 시골 무사와 일부 사카이 상인의 비밀스런 후원을 받아서 명맥을 유지합니다.
전쟁은 지방에서도 벌어졌으니 동해(일본해) 후쿠이혀ᅟᅣᆫ 남부 쓰루가 敦賀(돈하) 에 가네가사키성
金ケ崎城跡 (금게기성적) 은 북,서,남 3방향은 바다로 둘러싸이고 동쪽은 연접한 천통산성과
이어지니 난공불락의 성으로 북조 고묘왕(光明天皇) 때 남조 고다이고왕(後醍醐天皇) 의 아들인
존양친왕이 농성하고 있었는데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 足利尊氏(족리존씨)군이 공격해 옵니다.
1337년에 아시카가 막부 주력군이 총공격을 개시하니 남조군의 대장 義貞(의정)은 탈출해 성은 함락
되었고 고다이고왕(천황)의 아들인 존양친왕과 義貞(의정)의 아들은 자결 했으나 다음해 義貞
(의정)은 군사를 모아 이 성을 공격해 탈환했으니 에치고(越前 월전, 후쿠이현)는 남조의 승세가
두드러졌으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가네가사키성은 아시카가(무로마치) 막부군 수중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멀리 동북쪽 오슈지방 무쓰 까지 도망친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는 요시노의 남조 조정의
명을 받자 노리나가 친왕등과 10만의 군사를 모아 가마쿠라를 함락하고 교토에
육박하였으나.... 다음해에 이즈미에서 아시카가 막부측 모로나오씨와 호소카와군에 무너집니다.
고즈케에서 거병해 가마쿠라 막부를 함락시켰던 닛타 요시사다도 북륙지방에서 아시카가
막부군에 패배해 장열히 전사하여 남조군이 몰락하는데..... 아버지인 치카후사
는 히타치 지방의 전쟁에서는 패배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신황정통기” 를 집필 합니다.
2) 남조의 위기 : 이후 고다이고왕(천황) 은 요시노산 에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닛타 요시사다 등 남조의 주력 무장들이 잇달아 전사 하고 무쓰로
향하던 노리요시 친왕의 배가 폭풍우를 만나서 되돌아오는등 남조세력은 급속히 쇠퇴했습니다.
고다이고왕은 1339년 노리요시 친왕에게 양위 하고 ‘조적토멸 · 교토탈회 (조정의 적 다카우지를 멸하고
교토를 탈환할 것)’의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52세였는데.... 저작들 외에도 ‘이화집’
과‘신엽화가집’ 에 일본 고유의 시가인 와카가 몇수 전하는데 그의 능은 나라 남부 요시노 에 있습니다.
고다이고 천황(일왕)이 파란만장했던 시절 한많은 생을 마치고 어린 고무라카미가 즉위하니
중신 치카후사 와 충신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아들인 구스노키 마사쓰라의 보좌를 받게 됩니다.
구스노키 마사쓰라는 그 아버지의 아들 답게 22세의 나이로 가와치 등에서 아시카가 막부군
에 연전연승하여 희망의 불길을 높이게 되지만 그러나 병력의 열세가 워낙 크다 보니......
마침내 전사하고 이때 고무라카미왕은 불길속에서 탈출하여 남쪽 깊은 산속으로 도망칩니다
3) 아시카가씨의 내분 : 아시카가 다카우지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와 다카우지 중신 모로나오씨가
반목하게 됨으로써 서로가 한번씩 상대방을 제압하여 궁지에 몰면서 내분에 휩싸이게 됩니다.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형인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군대를 격파하니 다카우지는 자기 중신들을 불문
에 귀의시킴으로써 화해하지만.... 다시 내전상태로 바뀌니 다카우지가 동생을 토벌하러 관동
으로 출전한 틈을 타서 남조군이 평화조약을 어기고 교토를 점령하여 남조조정을 차리게 됩니다.
그러나 오미(비와호수)까지 달아났던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가 다시 교토를 탈환함으로써 남조 조정은 또 다시 요시노산으로 도망치게
되니... 이후 정국을 장악한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는 2대 쇼군(장군)에 취임하게 됩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2대 쇼군은 반제법을 발표하여 황실과 귀족및 신사의 장원에서도 군량미를 징수
하니 무사들의 위세가 높아지고 북조 천황(일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며 이 반제법으로 인해
지방 슈고(수호)들의 권력이 강대해져서 마침내는 영주로, 또 다시 조그만 왕국 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5) 남북조의 통일
1)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전국 제패 :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아들 요시미쓰는 10세
의 어린 나이로 3대 쇼군(장군)이 되니 이에 요리유키가 쇼군(장군)을 보좌하는
관령이 되어 검약을 실천하는 외에 평정중을 통해 중론을 모아 인심을 수습
하지만 시기를 받아 엣츄의 슈고다이묘(수호대명) 시바씨등에게 밀려나게 됩니다.
마침내 1378년 요시미쓰가 21세가 될 무렵에는 남조는 쇠퇴하고 교토의 무로마치에는 훌륭한 저택
이 들어서게 되니 쇼군은 수호대명들을 대동하고 6년에 걸쳐 전국을 유람한 결과 막부의 안전
을 위해 미노, 오와리, 이세의 수호인 도키씨와 전국 66개국중 다지마등 11개국을 차지해
기세를 떨쳤던 야마나씨등 강력한 대명들을 타도하니...... 비로소 일본에 평화가 찾아들게 됩니다.
2) 남조의 멸망 : 1368년 남조의 고무라카미 천황(일왕)이 죽은후 남조의 구스노키 마사노리(마사시게
의 셋째 아들)가 귀순하여 가와치(오사카)를 점령하니 조정은 요시노산 깊숙이 도망하기에 이릅니다.
1392년 아시카가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는 요시노의 남조 고카메야마왕(천황) 이 북조
고코마쓰왕에게 천황 지위를 양보 하는 대신 남조측의 황자를 황태자 로 삼는다는 조건을
제시하니 남조의 일왕(천황)은 승낙하고 교토로 귀환해 북조에 신기(神器)를 넘기고 퇴위합니다.
이로써 1336년 부터 1392년까지 60년 가까운 남북조 분열은 끝나고 일본은 통일되었으나
남조측 황자를 황태자로 삼는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으며...... 북조로 이어진
천황(일왕)들도 정치적 실권이라고는 없는데다가 막부로 부터 참기 힘든 냉대를
견뎌야 했지만 천황위 자체는 오랜 전통으로 신성한 것이라 1945년까지 후대로 이어집니다.
(6) 대륙의 정세와 왜구
가마쿠라 막부의 실권자인 집권 호죠씨가 몰락하고 아시카가씨가 집권하던 무렵에
대륙에서는 몽골족의 원나라가 몰락하고 명나라가 등장하였는데..... 왜구는
쓰시마, 이키, 5도섬과 규슈 서북 농경지가 부족한 지방에서 저국의 중앙정권
이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중국과 조선의 해안지방을 노략질 하던 무리를 말합니다.
1) 왜구 : 적게는 2~3척에서 많으면 100여척, 심지어는 500척의 대선단을 꾸려 배와 창고를
약탈하고 사람을 유괴하였는데 그러다가도 무역이 허락되면 다시 평범한 무역선으로
변하기도 하였으며, 몽고와 고려 연합군의 두차례 일본 침략후 그 보복를 하려는듯 더욱
극심해져서 심지어는 예성강과 임진강에 상륙하여 고려 수도 개성을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왜구는 신라시대에도 수십차례나 침범해 399년에 수도 서라벌이 포위되자 내물왕이 광개토대왕에 노객이
되겠다며 구원을 빌 정도로 피해가 컸으니 고구려 5만 대군의 남진으로 패해 달아났고, 660년 백제 멸망
후 3만 2천 왜군 구원군이 당나라 수군의 화공으로 패해 물러간후에는 일본이 중앙집권화에 성공해 지방
을 통제하게 되면서 없어졌으나....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극성을 부리니 해안가에는 사람이 살수 없었습니다.
1274년 10월 3일 고려군을 앞잡이로 해서 3만 3천 몽골~고려 연합군 900척이 규슈를 침략하였고, 1281년
5월 3일 몽골-고려-한인 14만 대군의 2차 침략도 격퇴했으나 가마쿠라 막부는 빚을 내서 자비로 참전한
지방 무사들에게 보상을 하지 못하니 무사들의 불만으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자 다시 왜구가
크게 일어난 것인데 저들은 두번에 걸쳐 일본을 침략한 몽골의 앞잡이 고려에 복수를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2) 공민왕과 우왕 시대 : 공민왕(1352~1374) 때는 경상, 전라도는 물론이고 함경도와 평안도에 까지
출몰하며 황해도에 상륙해 개경을 노리니 개경에 계엄령이 내려지고 수도를 한양이나 철원등 내륙
으로 천도 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는데... 20년간 무려 100회 가 넘는 침입으로 고려는 쑥대밭이 됩니다.
우왕(1375~1385) 때를 보면 10년간 왜구 침략 횟수는 무려 370회 나 달했으니 강화가 함락되고
수도 개경이 왜구에게 위협 당했으며 고려 강산은 산산히 찢어져 피로 얼룩지니 강진의
고려청자 생산지도 사라지는데... 해안 지방은 사람의 자취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무인지경
으로 변해 황폐화 되는... 공민왕과 우왕 시대 34년간 왜구는 무려 470회가 넘게 침략한 것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왜구가 저리 대규모로 고려를 침범해 약탈한 것은 일개 지방 세력으로 볼수는 없으니
1392년에 망하게 되는 요시노의 남조 조정이 교토의 북조 조정과 56년간 전쟁을 치루면서
그에 소요되는 천문학적인 전쟁 빙요을 조달하기 위해 남조가 일부 군대를 고려로 보냈다고 봅니다.
3) 박위의 대마도 정벌 : 1388년 5월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최영을 죽이고 우왕을 폐하는 중에
왜구는 양광, 전라, 교주도에 침입해 살육을 자행하자 1389년 2월 박위는 전함 100척으로
대마도를 급습해서는 정박중인 배 300척을 태우고 가옥을 불지르자 도민들은 산속으로 도망칩니다.
박위는 왜구를 죽이거나 포로 등의 전과는 없이 조선인 포로 100인만 구해 귀환하니 1223년 고종
부터 1389년 까지 166년 동안 700여차례의 왜구의 침략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한번 반격한 것이니 고려는 군자지국, 선비의 나라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 이었기 때문일까요?
9년 후인 1398년 1월 대마도 사절이 조하에 참예한후 예물을 바치고 쌀과 콩을 받아 갔으니
도주 소(宗貞茂) 등이 보낸 자들인데 부산포와 내이포 에 한해 출입하도록 하고 행장을
소지한 선박에 한해 기항하도록 해서 염포(울산) 와 가배량(통영) 에도 왜관 을 설치합니다.
4)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 하지만 왜구의 침입은 계속되어 태종때는 60여회나 되었는데 1419년
5월 5일 왜선 39척이 명나라에 가던중 비인현(충남 서천) 을 침입하고 해주를 노략질하며
황해도절제사 이사검의 병선 5척이 왜구에게 포위되자 태종은 회의후 대마도 정벌 을 결정합니다.
이종무 를 3군도체찰사로 임명해 경상· 전라· 충청 3도 병선 227척에 1만 7천 병력 으로
65일치 식량을 준비해 1419년 6월 20일 대마도 에 도착하여 왜군 114명을 참수 하고
21명을 포로 로 잡았으며 1,900호의 가옥을 불태우고 129척의 선박을 노획해 불태웁니다.
2만에 가까운 압도적인 무력을 투입했음에도 왜구를 사살하거나 섬을 점령하는 등 뚜렷한 전과
는 없었으며, 오히려 절제사 박실이 산속으로 진격했다가 도중에 복병을 만나 장수와
군사 180명이 전사하자 당황한 조선군은 더 큰 희생을 줄이기 위해 더는 반격하지 못하고
황급히 철수고는 왜구를 다 소탕했다는 허위 보고로 상을 받지만 후일 들통나 서훈은 취소됩니다.
그러나 철군한날 왜구가 재침하므로 조정에서 다시 정벌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대마도에 군대를 주둔
할 형편(전쟁 비용을 감당할수 없었는데다가 계속 주둔하면 일본 중앙의 군대와 진짜 전쟁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이 되지 않아 중지하였는데 1421년 4월 대마도주가 통상을 허락해 주도록 애원해 옵니다.
조선 조정은 대마도주 소 사타모리와 타협했으니 왜구를 평화적 내왕자로 바꾸어서 요구를
받아들여 웅천(진해)의 내이포,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를 개방하여 쌀과 콩을 하사
함으로써 겨우 진정될수 있었는데 이후 3포왜란이 일어나고 임진왜란으로 무위로 돌아갑니다.
5) 울릉도에 공도령(空島令) : 울릉도는 신라 이사부가 사자와 호랑이 형상을 만들어 섬에 풀어놓게
하겠다고 위협해 울릉도를 점령하니 우산국은 신라땅이 되었지만 고려시대 전기에는 함경도에
거주하던 여진족들이 강원도 동해안과 일본 서부해안에 심지어는 대마도와 규슈를 약탈하는
해적질(刀伊 도이) 을 하는 가운데..... 울릉도에서 재정비와 휴식을 취하니 사람이 살수 없었습니다.
함경도의 여진족들이 1018년에 울릉도에서 무자비한 약탈로 궤멸적인 타격을 받은후, 1022년
에는 몇 안되는 우릉성주와 아들 부어잉다랑등 주민들이 모두 고려로 귀부하니 우산국은
완전히 멸망 했고..... 고려 후기가 되면 왜구가 700여차례나 한반도를 약탈하니 섬과
해안지대는 사람이 살지 못하고 황폐화되는지라 울릉도 역시 사람이 거주할수 없었습니다.
이에 조선 태종은 울릉도에 왜구를 방비할수 없는지라 공도령(空島令)을 내리고 쇄환 정책을 펼쳐 주민을
육지로 강제로 옮겼으며 세종대왕 때도 거듭해 공도령을 내리고 3년에 한번 순시선을 보내 몰래 거주한
사람들을 잡아와 징벌하는데, 저들은 공도령 국법을 어긴 죄인으로 육지에서 몰래 섬으로 도망쳤으며
나라에 조세를 내지않으며, 부역을 회피했고 병역이나 군포 또한 내지않으니 국법으로 다스린 것입니다.
울릉도가 빈 섬이 되자 1407년 대마도주 종정무 는 평도전(平道全)을 보내 무릉도(울릉도)에 왜인
들이 이주 하기를 청원합니다. “종정무가 무릉도에 부락을 거느리고 가서 살고자 하므로 이를
허락한다면 일본 국왕이 반인(叛人)을 불러 들였다 하여 틈이 생기지 않을까” 하니, 남재(南在)
가 대답하길 “왜인의 풍속은 반(叛) 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따릅니다.” 해서 허락하지 않습니다.
200년이 지난 광해군 1614년에 대마도는 울릉도 이주 2차 청원을 하는데 “비변사에서 아뢰기
를 울릉도에 왜노의 왕래를 금지하라는 뜻으로 예조의 서계 가운데 사리에 근거하여 회유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마도의 왜인이 아직도 울릉도에 와서 살고 싶다고 또 서계 를 보내
었으니 놀랍습니다. 본도가 우리나라에 소속 되었음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는데, 방물을 거두기도 하고 도민을 조사 정리하기도 한 전고(典故) 가 명확히 있습니다.”
삼척 영장과 월송 만호가 서로 교대로 3년만에 가던 순시선은 중간에 가지 못하는 해가 많아지다가 점차
유명무실해져 중종 이후에는 끊어졌으며 오랜 세월이 흐른후, 1882년 40월 30일에 이규원을 울릉도에
보낸 불법 거주한 조선인 50명과 왜인 120명을 적발하자 고종은 공도정책을 포기하고 1883년 4월부터
두 차례에 걸쳐 전리도와 경상도인 16호 54명을 울릉도에 이주 시키니 오늘날 울릉도민의 조상들 입니다.
6) 에도 도쿠가와 막부 쇄국정책 : 1600년 지방의 전투까지 합쳐 동서 30만 대군이 싸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해 1603년에 출범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는 규슈 5도와 이키섬
및 대마도 까지 장악해 지방을 통제했으며 군사력을 억제하기 위해 왜구 등을 엄격하게 단속합니다.
조선은 일본과 국교를 재개해 부산포 왜관을 설치하고 쌀과 콩을 주며 일본인들이 부산에 거주하면서 통상
하도록 허락했으며, 12차례 통신사가 방일하는데 일본은 500명에 가까운 통신사를 접대하기 위해 2년치
예산을 쓰는등 극진히 환대하니 우호분위기가 이어지며 1603년부터 1875년까지 270여년간 선린우호가
이어지니 이웃나라는 예외없이 철천지 원수라 100년 평화가 드문 세계사에서 유일한 평화 사례인가 합니다.
또한 대마도까지 장악한 도쿠가와 막부는 천주교를 금지하고 쇄국정책을 실시하니....
나가사키 데지마에 네델란드 상인이 거주해 일본과 유럽(중국) 무역을 허락하고,
일본인은 외국에 나가는 자는 사형에 처했으며 동남아 일본인 타운에 거주하던
상인들의 귀국조차 금지하니 일본인들이 외국 출입을 못하게 된지라 왜구는 사라집니다.
고려와 조선 뿐만 아니라 대륙의 명나라도 왜구 때문에 곤욕을 치루었으니 왜구가
침범하면 명나라 상인이나 해적들도 왜구에 가담하여 절강성등이 큰 피해를
입었는데, 어떤 때는 중국인들이 왜구의 90% 에 달했으며 무역의 이익을 탐한
아시카가 막부의 쇼군 요시미쓰가 명나라에 조공하면서 한 때 왜구가 줄었습니다.
하지만 요시미쓰이 아들 아시카가 요시모치 쇼군은 자존심 때문인지 명나라에 조공
을 거절함으로써 통제를 하지 않자 왜구는 다시 기세를 부리게 되는데....
1553년 왜구가 중국 절강성에 상륙하여 멀리 안휘성을 짓밟고 남경에
육박한후 무석과 소주 등지를 유린하니 80일간 중국 천지를 뒤흔들었던 것입니다!!!
이후 왜구의 화를 견디다 못한 명나라와 금전적 이익을 노린 아시카가 막부가 타협하여 조공무역을
부활하고서야 마침내 왜구는 잦아들게 되었는데.... 일본에서 수출된 상품은 검, 창, 부채, 병풍및
칠기류와 유황, 동이고 중국에서 수입 품목은 동전, 생사, 비단, 서화, 골동품 및 약재등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