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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倉村 오두막 원문보기 글쓴이: 倉村
일본인이 본 '일본이란 나라'
외국인이 본 '한국이란 나라'
일본인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 1962~ )가 쓴「日本이란 나라」(日本という國)라는 소책자에서 일본인이 본 일본의 실체를 요약하여 소개한다. (오소운).
1. 후꾸자와 유끼지와 일본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 제독이 밀러드 필모어 미국 대통령의 개국 요구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 이에 도꾸가와 막부(幕府)는, 1854년 미ㆍ일화친조약에 이어서 1858년(철종, 哲宗 9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ㆍ러시아ㆍ네덜란드ㆍ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이른바 명치유신이 시작되어,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구문명을 받아들였다. 이 때 일본의 국책사업을 사상적으로 주도한 사람이 일본 돈 만엔짜리에 사진이 들어있는 후꾸자와 유끼지(福澤諭吉,1835~1901)다.
그의 저서《學問의 勸?》은 명치유신의 핵심사상이 되었다.
가. 정치와 교육개혁
일본은 300년간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쳐 도꾸가와막부(德川幕府) 말(末), 명치유신이 일어났다. 막부가 일본을 다스리던 시절은 사무라이들이 마구 살생을 하는 시대였다. 명치때까지 일본인들은 성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하였는데, 막부에서 우민(愚民)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교육받은 백성은 다스리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명치유신은 유신파와 막부파로 갈려 엄청난 전쟁 끝에 막부가 무너지고, 각지를 분할하여 다스리던 다이묘(大名) 사무라이 귀족들이 다 몰락하여 혼란의 극을 이루었다. 이런 때 후꾸자와는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내지 않고 사람아래 사람을 내지 않았다”라는 인용구로 모든 국민의 평등을 외치며 전국민 교육을 하자는 주장을 하였고 명치정부는 이를 국책으로 정하여 전국민의무교육을 시작했다.
무지한 백성들은 모두 들고 일어났다. 좁은 땅, 그것도 박토인 일본에서 농삿일과 집안일에 아이들의 일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학교라니…. 사방에서 데모가 일어났으나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마침내 성공적으로 교육개혁을 이루었다.
나. 탈아입구(脫亞入歐) 정책
19세기는 서구(西歐) 열방들이 식민지 확장에 눈이 벌개 미대륙으로 아프리카를 침략 영토를 삼고는 아시아국가에 눈독을 들이던 시절이었다. 후꾸자와는 서구 열방이 일본을 쳐 식민지로 만들기 전에 교육을 통하여 국민을 깨우쳐주되, 천황을 신으로 모시고 죽기까지 충성하는 착한 신민(臣民), 용감한 시민으로 만든 다음, 서구 열방이 쳐들어오기 전에 일본이 아시아를 떠나 서구 대열에 들어가, 곧 탈아입구(脫亞入歐)하여 아시아를 제패(制覇)하자고 주장하였다. 후꾸자와는《學問의 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나라는 이웃나라의 개명(開明)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부흥시켜야 할 여유가 없다. 차라리 아시아의 대열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같이하며, 중국이나 조선을 접(接)하는 방식도 이웃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봐주지 말고 그야말로 서양인들이 이들에게 하는 방식대로 식민지를 삼아야 한다…. 하루라도 빨리 일본 국민에게 문명을 널리 퍼뜨려 <침략받는 나라>에서 <침략하는 나라>가 되자어야 한다.”
그리고는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일본대학교육의 시초)을 열었다.
외래어 표기도 영어를 따르면 미국이 있어 탈아입구 원칙에 벗어나니까, 독일어 네덜란드어 등을 써서 영어와 차별화를 하였다. 그 보기를 들면;
까제(거즈), 알레르기(앨러지),
에네르기(에너지), 솔리스트(솔로이스트),
쓰봉(jupon), 베테랑(veteran)….등 이루 셀 수 없다.
왜정 때 공부한 70세 이상 노인들은 아직도 이렇게들 많이 쓰고 있다.
명치정부는 후꾸자와의 주장대로 따라,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 그 기세를 몰아 러일전쟁을 하여 승리의 전쟁배상금으로 교육을 부흥시키고 군비를 확장하여 마침내 조선을 강제 합방(合邦)하기에 이른 것이다.
다. 영원히 이땅에서 살려고 계획
침략에 맛을 들인 일본은 아시아 전체를 제패하고 지진이 많고 태풍이 심한 섬나라를 떠나 한반도를 자기네 땅으로 하고 조선인들은 만주로 이민을 시킬 계획을 착착 잔행하였다.
먼저 총독부 건물을 일본 국회의사당 모양으로 지었는데 날 일(日)자로 짓고,
서울 시청 건물을 일본 동경 도청 건물 모양으로 지었는데 근본 본(本)자 로 지어,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북악산은 큰 大자, 총독무는 날 日자, 시청 건물은 근본 本자 합쳐서 [大日本]이라, 서울 복판에 새겨 놓았다. 서울역 건물은 동경역 건물, 조선은행 건물은 동경은행 건물 모양으로 지어, 동경 사람이 서울에 오면 동경 기분이 나게 만들었다. 그 뿐 아니다.
옛 경성대학 건물은 일본 동경대학 건물과 같게 지었고, 대학 정문도 동경대학 정문 같이 빨간 문(아까몽, あかもん, 赤門)으로 하였고, 창경궁은 일본의 동물원을 본 따 동물원으로 만들고 거기다 일본 국화인 사꾸라를 수만 그루 심었다.
왜 이랬을까? 일본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이루어 중국까지 점령하면, 지네들의 수도를 서울로 옮기고, 자기네가 지진이 없는 우리 땅에 와서 살고, 우리는 일본 섬나라로 이민시키려는 장기 계획이었던 것이다.
왜놈들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라.
“계획은 인간이 세우지만, 결정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잠언 16:1)
왜놈들은 입만 열면 죠센징은 미개한 자들,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할 자들, 더러운 죠센징, 후데이센징 하면서 얕보고, 한반도 지도를 가르칠 때 “일본이 무서워 서쪽을 향해 달아나는 토끼모양”이라고 가르쳐, 나도 귀가 따갑게 그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러나 아니다! 한반도 지형은 대륙을 향해 포효(咆哮)하는 호랑이 모양이다. 남궁억 선생은 이를 그림으로 표현했고, 다음과 같은 노래로 가르쳤다.
북편에 백두산과 두만강으로
남편에 제주도 한라산
동편에 강원도 울릉도로
서편에 황해도 장산곶까지
우리우리 조선의 아름다움을
맹호(猛虎)로 표시하니 13도로다
2. 외국인이 본 한국이란 나라
아래 글은 장성훈 저 <사무라이 정신은 없다>(북마크 냄, 2011.06)에서 <외국인이 본 한국인> 항목글을 첨삭(添削)하여 만든 글이다.
가. 세계 최고의 단결력
미국은 다민족사회다. 미국에 사는 교포들을 만나면 이렇게 불평을 한다.
“일본인과 중국인들은 잘 뭉치는데, 우리는 매일 싸움을 한다.”
그러나 일본계나 중국계 사람들의 말은 정 반대다.
“한국인들은 우리들이 단결해 산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내부적으로 엄청 싸운다. 우리가 보기엔 한국인이 똘똘 뭉쳐 산다. 그들은 커뮤니티를 만들어 미국 정부와 대항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커뮤니티 형성도 어렵다. 저마다 제가 대표가 되겠다고 난리를 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인 이렇게 말한다.
“남들은 우리가 단결해 있다고 말하지만, 유대교를 믿는 우리는 분파가 너무 많다. 2천 년 동안 유대교는 세계 각 나라에서 수많은 분파가 생겨「영원히 단결할 수 없는」민족이 되어 버렸다. 유럽계 유대인과 미국계 유대인은 대체로 검소한 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본토에 살던 본토계 유대인과 아랍계 유대인은 실속도 없이 사치하고 낭비를 한다. 참을성도 없고 양보심도 없다. 이렇게 때문에 같은 유대인들끼리도 서로 믿지 못하고 거래를 꺼린다.”
중동 아랍 사람들은 집안끼리만 결혼하기 때문에 집안끼리만 단합되고 다른 집안과는 사사건건 으르렁거린다.
인도 사람들은 30여개나 되는 다종족 사람들이기 때문에 국내 회의를 할 때에도 10여개의 방언으로 통역을 해야 한다. 종족간의 경쟁의식 때문인지 지나친 과시와 사치가 심하다. 결혼 잔치만 하더라도 사나흘을 하는데 멀리 사는 정부 고관들을 비행기 표를 사 보내 초청할 정도로 자기 과시가 심하다.
대부분의 중국 사람들은 우리가 차이나타운의 예를 들며 단결을 잘한다고 부러워하면 그 반대란다.
“중국 ‘속담에 사람 셋이 모이면 두 개의 그룹이 생긴다’ 할 정도로 중국인은 분파를 만든다. 중국의 명배우 성룡(成龍)은 공개석상에서 자기 민족을 이렇게 비판했다.
‘중국인들은 항상 통제가 필요하다. 자유를 많이 주면 홍콩이나 대만처럼 혼란에 빠질 염려가 있다.’
나. 한국식 사금융(私金融) <계>
장성훈씨는 특별히 브라질 한인이민들의 정착 스토리를 구체적으로 적었다.
1960년대 브라질 이민 제1세대들은 여비를 절약하느라고 비행기로 하루면 갈 길을 배를 타고 한달 넘게 항해를 하여 산토스 항에 내렸다. 10시간 이상 버스나 트럭을 타고 찾아간 땅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다. 그들은 너무나 기가 막혀 서로 부등켜안고 엉엉 울었다. 농업이민은 말뿐이고 집은 물론 전기도 장비도 없이 무슨 수로 농사를 짓는가. 고국으로 갈 여비도 없고….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도시로 나아가 가장 방값이 싼 사창굴 동네에 자리를 잡고 가지고 간 재봉틀로 옷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였다. 이를 악물고 몇 해 일을 하여 오렌지 거리에 옷가게를 냈다. 말이 안 통하니까 교민들끼리 뭉쳐 열심히 장사하여 직물공장을 인수하여 옷을 만들어 팔게 되었는데, 물가가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브라질에서 모은 돈을 가지고 있거나 은행에 저축하면 화폐가치가 떨어져 휴지조각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모두 딸라로 바꾸어 보관하였다. 한인들끼리「딸라계」를 만들어 목돈을 만들고, 새로 이민 오는 사람들에게 저리로 주어 살길을 열어주고 하여 20년 후인 80년대에는 브라질에서 소득 랭킹 상류에 들어가 잘 사는 한인들이 되었다 한다.
대학교수 봉급만으로는 살 수가 없는 어느 브라질 교수는, 원자재 수출 오퍼상을 하는데, 시회학자인 그 교수는 한인들에 대해 이렇게 솔직히 말했다.
“20여년 전 한인들이 올 때 보니까 꼭 거지떼 같았지요. 한 달 이상 배에서 시달려 초라하기 그지없었는데, 불과 20여년이 지난 오늘, 그들은 수많은 종족 가운데 가장 잘 사는 민족이 되었어요. 내가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그들의 사금융(私金融)제돕니다. 엄청난 인플레로 브라질 돈의 가치가 시간마다 떨어지니까, 그들은 돈이 생기는 순간 딸라로 바꿔요. 그 돈으로 한국어로<계>라는 사금융에 투자를 하여 목돈을 만드는데…. 정말 기발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가 나왔을까요? 끈기와 근면한 국민성으로 온 가족이 주야로 일해 즉시 딸라로 바꿔 <계>에 투자하니 어느 나라 사람이 이를 따라 가겠습니까? 상상도 못하지요. 새로 이민자가 오면 <계>를 조직하여 돕는 한국 사람들은 꼭 마피아 조직과 같은 무서운 집단입니다.”
장성훈씨는 오렌지 거리에서 의류상을 하는 유대인의 말도 전한다.
“온 가족이 밤을 새우며 일을 하는 한국인을 우리 유대인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미국 사람 말대로 오리엔탈 쥬(Oriental Jew)입니다.”
다. 최고로 머리좋은 한인학생들
이민 온 아이들의 학교 성적은 모두 최상위권에 들어 있어서 아이들에게
“공부하기 힘들지 않느냐?” 하고 물어보았더니 아이들 대답은 이랬다. “하나도 안 어려워요. 우리가 한국에서 중학교 때 다 배운 걸 여기서는 고등학교에서 가르쳐요.”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ETW라는 단체가 2010년 캘리포니아 표준학력고사 내용을 분석ㆍ발표한 자료를 보면 한국 학생들의 두뇌가 우수함이 입증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의 학력고사에서 수학 점수를 보면;
우수ㆍ최우수:한인ㆍ화교=93%, 백인=78%
다음은 일본ㆍ베트남계=91%, 89%
이러한 결과를 놓고 매스컴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라. 【필자의 주장】
이유가 어디 있는가? 서양과 동양의 계수(計數) 방법의 차이 때문이다.
서양은 천 단위로 올라간다.
Thousand×Thousand=Million
Million×Thousand=Brillion
Brillion×Thousand=Trillion
Trillion×Thousand=Quadrillion….
이것을 주산으로 숫자를 읽어주면 너무나 길어서 우리 것과 큰 차가 난다.
그러나 동양은 만 단위로 올라간다. 한 글자씩으로 단십백천만 그 이후는 만의 만 배가 억(億), 억의 만 배가 조(兆), 조의 만 배가 경(京), 경의 만 배가 해(垓)
자(?)×만=양(壤), 양×만=구(溝),
구(溝)×만=간(澗), 간×만=정(正),
정(正)×만=재(載), 재×만=극(極)….”
만억조경? 해자양구? 간정재극? 네 자리씩 올라가니까 동그라미 숫자 알기가 쉽다.“국어사전에서 ‘대수(大數)’를 찾아보면 나오는데 사전에 나온 대수의 끝수는 ‘무량수(無量數)’인데 10의 68 제곱이다.
동양인은 이런 수 개념이기 때문에 서양인보다 계산이 빠를 수밖에 없다.
마. 놀라운 한국의 성장발전
미국 UCLA한국학연구소 소장 존 던컨 (John B. Duncan, 1945~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40년 동안 바라본 한국, 자부심 가져도 좋은 나라다.”
그는 한국에서 대학을 다녔고, 한국인과 결혼했고, 한국말이 완벽하고, 지금도 한국을 수시로 오가는 외국인이다.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배치돼, 한국과 사랑에 빠진 이후 40여 년. 그는 끊임없이 한국과 한국인을 관찰해왔다. 그에게 40년 전과 지금의 한국은 어떻게 다를까. 뭐가 변했을까. 그게 듣고 싶어 던컨 교수를 만났다. 인터뷰는 2010년 9일 서울시내 한 호텔 커피숍에서 이뤄졌다.
▶UCLA 대학의 한국학연구소 규모는 얼마나 됩니까.
“한국 문학ㆍ역사ㆍ미술사ㆍ지리학ㆍ인류학ㆍ음악ㆍ종교학ㆍ언어학 등 다양한 영역을 교수 11명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부 강의를 듣는 학생이 2000~2500명 정도입니다. 저는 ‘한국 문명사 개설’이란 강의를 하는데 정원 120명이 꽉 찹니다. 제가 20년 전 UCLA에서 처음 강의할 때는 수강생이 거의 한국계 미국인이었죠. 그런데 올해 수강생 120명 중 50여 명만 한국계 미국인이고 나머지 70여 명은 비한국계 학생이에요.”
▶1960년대에 주한미군으로 근무하다 한국에 매력을 느껴서 한국학을 전공한 걸로 아는데, 뭐가 그리 매력적이던가요.
“대학을 다니다 학비를 벌려고 입대했어요. 1966년 9월에 한국에 와서 1968년 12월까지 문산의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했는데 한국에는 서양에 없는 게 있었어요. <의리>하고 <정(情)> 같은 것…. 한국이 좋아서 제대 직전에 고려대 사학과에 편입학 상담을 했죠. 한국말이 짧다고 떨어졌어요. 귀국했다 다시 돌아와 1년간 어학연수를 하고 찾아가니까 그땐 허락 하더라고요.”
▶40년 전 한국과 지금은 차이가 많겠죠.
“시골은 거의 다 초가집이었어요. 전기가 들어가는 마을도 별로 없고요. 대부분 고무신 신고 다녔고. 물론 서울은 꽤 큰 도시였죠. 70년도에 인구가 540여만 명이었으니까요. 택시하고 버스도 있고. 상수도가 들어가는 집들도 꽤 있었지만 하수도 시설은 별로 없었어요. 그때와 비교하면 서울은 완전히 국제수준의 대도시가 됐지요.”
▶이런 급격한 변화의 사례가 또 있을까요.
“영국이 300년, 미국이 100년, 일본이 60년 걸린 걸 한국은 30년 사이에 이룬 거예요.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런 변화를 소화해낸 것도 놀라운 일이죠. 늘 시끄럽고 문제가 많은 게 사실이지만 전반적으로 한국은 잘 했다고 봐야 해요. 경제성장뿐만이 아닙니다. 민주화를 쟁취해 냈고, 교육 분야도 많은 성장이 있었습니다. 60년대엔 대부분 초등학교만 졸업했죠. 중학교 진학률이 50%가 안 됐어요. 지금은 거의 100%가 고교까지 가고, 대학 진학률도 80%가 넘지 않습니까? 한국은 경제·정치·교육·문화적인 면에서 굉장히 큰 변화를 일으킨 나라거든요.”
▶밖에서 보기에 한국 민주주의는 어떻습니까.
“제가 한국에 있을 때 3선 개헌, 군인들의 고려대 난입사건 등이 있었어요. 지금 그런 일은 상상할 수 없죠. 민주주의가 아주 뿌리박혔다고 생각해요. 시민단체 같은 건 미국보다 한국이 더 발전해 있어요. 한국이 미국보다 더 민주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도 있어요.”
▶조선 당쟁부터 시작해 최근의 좌우 대립까지, 한국인에겐 ‘분열의 DNA’가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역사학자로서 어떻게 보세요.
“아이고, 일본 학자들이 주장한 식민지사관이 아직도 살아남았군요. 그래요. 조선시대 당쟁은 심했죠. 동ㆍ서로 갈렸다가, 남인ㆍ북인 갈리고, 노론ㆍ소론에 대북ㆍ소북까지, 한없이 그랬잖아요. 그래서 일본이 조선 사람들은 스스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한다고 얘기했죠. 하지만 전(前)근대적인 중앙집권 관료 국가들은 어디나 다 당쟁이 심했습니다. 한국이 특별한 게 아니거든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라고요?“
제가 고려대 졸업하고 하와이대에서 석사를 했는데요, 거기도 다민족 사회잖아요. 거기서 한국 사람들이 ‘일본은 저렇게 잘 뭉치는데 우린 뭐냐’고 해요. 한데 일본계 미국인들한테 물어보면 ‘우리는 안으로 분열이 굉장히 심하다. 잘 뭉치는 건 중국인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인한테 물어보면 ‘우리끼린 만날 싸운다. 잘 뭉치는 건 백인이다. 그러니까 하와이 인구에서 25%밖에 안 되는데 다 장악하고 있지 않느냐’라고 해요. 백인한테 물어보면 뭐라는 줄 아세요? ‘저 동양에서 온 놈들 조심해라. 지들끼리 잘 뭉친다’ 이럽니다.”
▶전 세계적으로 쇠퇴하는 민족주의가 왜 한국에서만 강해지고 있을까요?
“유럽도 70~80년 전에는 지금의 동북아와 비슷한 상황이었어요. 프랑스와 독일이 굉장히 안 좋았죠. 전쟁도 하고. 그래도 유럽은 영국ㆍ프랑스ㆍ독일의 경제 규모가 비슷했죠. 한데 동북아는 안 그래요. 중국이 너무 커버렸어요. 균형이 안 잡히는 체제거든요. 한국 입장에선 민족주의를 완전히 없애기엔 시기상조입니다. 주변 강대국 속에서 통일을 이뤄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민족주의적인 정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폐쇄적인 게 아니라 ‘열린 민족주의’로 나아가야 하죠.”
▶한국에선 법치가 안 된다고 하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많이 나아졌습니다. 옛날에는 진짜 힘으로, 노골적으로 그랬지요. 권력기관의 부정부패도 일상 속에서 늘 겪었어요. 경찰도 그렇고, 구청만 가도 그랬고요. 한국은 옛날보다는 법을 존중하는 나라가 됐다고 봐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까.
“그럼요. 제가 중남미 학자들과 네트워크가 있는데요 멕시코ㆍ브라질ㆍ칠레ㆍ아르헨티나, 이런 나라들 가보면 한국에 대한 관심이 지대합니다. 어떻게 해야 한국처럼 경제성장도 하고 민주화도 하느냐는 거죠. 동남아 쪽에서도 한국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고요. 중국도 사실은 한국을 하나의 모델로 삼고 있다는 지적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주]:동남아, 중국도 새마을운동을 배우고 있다.
▶일부 학자는 한국의 역사를 자학적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제 청산도 못했고, 농지개혁도 실패했고 기득권층만의 역사라면서.
“저도 옛날엔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사실인데요, 이젠 아니라고 봅니다.”
<출처 : 중앙일보(대담=김종혁 문화스포츠에디터)>
3. 시련을 이기는 한국민족
가. IMF 때 ‘금모으기 운동’
IMF(국제통화기금) 사태가 몰아닥친 1997년 말 검찰과 새마을부녀회 등 일부 기관에서 간헐적으로 이뤄지던 금모으기 운동은 새해 들어 1월 5일 주택은행, KBS, 대우가「나라사랑 금모으기」캠페인을 시작하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 캠페인은 1월 15일 참가자가 100만명을 넘어섰고, 모인 금도 무려 80여톤(214만돈쭝)이 넘었다.
금모으기도 경쟁이 붙어 농협ㆍ106개 시민단체ㆍMBCㆍ삼성물산이 12일부터, 외환은행과 현대가 10일부터, 국민은행ㆍSBSㆍLG상사가 13일부터 각각 비슷한 행사를 시작했다. 현재까지 모은 금의 총량은 100t훨씬 웃돈다. 이같은 열기에 외국언론들도 놀랄 정도다. 재벌그룹 회장서부터 종교인, 연예인, 스포츠맨, 고사리손의 초등학생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두 참여했다. (출처 당시 언론보도).
그 때 정성훈씨는 유럽에 있었다. 벨기에의 칼튼호텔 로비에서 아침을 곁들인 커피를 한 잔 하면서 손님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호텔 로비에 설치되어 있는 TV에 CNN뉴스가 한국 사람들의 금 모으기 운동을 소개하고 있었다. 옷을 잘 차려 입은 어느 중년 부인이 자신이 끼고 있던 커다란 금 반지를 내놓으면서 돈도 받지 않고 그냥 주고 가는 모습에 CNN 리포터가 이렇게 멘트를 하고 있었다.
“많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던 금을 정부에 판매하면서 일부는 돈도 받지 않고 기부를 합니다.”
안면 있는 프랑스계 호텔 매니저가 필자에게 말했다.
“한국인들은 대단하다. 만일 저런 일이 프랑스에서 벌어지면 어떤 프랑스인도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국가를 위하여 금을 내놓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 날 영국으로 가는데 비행기 옆 자리에 나이 지긋한 초로(初老)의 영국인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한국이 그 치열한 한국전쟁에서 불과 50년 만에 그런 발전을 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소. 그러나 이제 금 모으기 운동을 하는 것을 보며 ‘저런 민족이니까 해냈지!’ 하는 생각이 듣니다. 세계 어떤 나라 국민이 저만큼 나라를 사랑하겠습니까?”
나. '태안만 기름띠 제거운동‘
2007년 12월, 충남 태안만 일대에서 사상 최악의 원유유출 사고가 발생했다. 해안가는 온통 기름 범벅이 됐고 관광객들의 발길도 뚝 끊겼다. 평생을 바다만 바라보고 살아온 태안 주민들에겐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재앙이었다. 그러나 그런 절망 속에 서서히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 수만 명씩 전국에서 몰려드는 자원봉사자들의 온정으로 기름띠를 걷어내며 서서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사고 이후 태안 해안 가에는 다섯 살 꼬마부대로부터 7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바다와 해안을 구하려는 행렬이 이어져 어민들과 아픔을 함께 했다.
처음 2~3주에는 거의 매일같이 일만 명 안팎의 자원봉사자가 태안을 찾았고, 이후 학교가 방학을 맞이하면서 학생들의 발길이 더해져 자원봉사자는 급격히 늘어났다. 흥청망청 하기 쉬운 연말ㆍ송년모임 대신 태안에서 봉사를 하겠다며 전국 각지에서 온 온정의 손길이 계속 이어졌다. 방제작업 지원을 위해 온 외국의 전문가들은 충남 해안가를 수놓은 방재복 차림의 인간띠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한국 국민이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고 있다! 원더풀….”
이 이름없는 자원봉사자들 중에 유달리 필자의 관심을 끄는 자원봉사자가 있었다. 일생에 한 번 뿐인 신혼영행을 태안에서 방제작업으로 대신한 신혼부부가 있었던 것이다.
다. 미국 ‘카타리나 재앙’ 때 한국인들의 애국애족
2005년 8월에는 허리케인 카타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스 주를 강타하며 13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카타리나는 허리케인 역사상 최대 규모의 피해를 남겼다. 보험정보연구소에 따르면 허리케인 카타리나로 미국 경제가 부담한 비용은 451억 1천만 달러에 달했다. 약 40만 명이 직업을 잃었고 그 해 하반기 경제성장률은 약 1%포인트 가량 위축됐으며 석유 생산이 심각한 차질을 빚었다.
하지만 허리케인 카타리나는 발생 후 두 달간 뉴욕 증시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다. 아래 내용은 지역 교포 신문에 보도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 멕시코만에서 발생한 허리케인 카타리나가 미 남부의 도시 뉴올리언스를 강타하고 미시시피강을 막고 있던 제방이 터지면서 시 전체가 잠기는 엄청난 홍수사태가 발생했다. 많은 수재민이 생기자 시에서는 미식 축구장 ‘아스트라 돔’에 임시 대피소를 마련하고 수재민을 수용했다.
그 곳은 말이 ‘대피소’지 실제는 생지옥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약 25,000명의 인원을 이미 지붕 일부가 날아가버린 축구장에 수용하다보니, 음식도 부족하고 화장실도 부족하고, 그러다 보니 여기 저기 싸움이 일어나고, 절도도 생기고, 심지어 강간사태도 벌어졌다는 것이다. 여기 머물러 있는 이재민 대부분은 흑인들이지만, 베트남과 중국, 태국 등 아시아계와 백인도 적지 않게 섞여 있고, 일본계도 있었다고 공무원은 집계했다.
그러나 한국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시 공무원들 뿐 아니라 이재민에게 “한국인을 보았느냐?” 물어도 한결같이 못 보았다고 했다 한다.
뉴올리언스 인근에는 여기 말고도 여러 개의 수용시설이 있었는데 그 중 어느 곳에서도 한국인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뉴올리언스 시에는 약 3,000여명의 한국인이 살았다는데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모두들 동포들의 교회와 가정에서 그들을 받아 돌보고 있었던 것이다! 뉴올리언스와 이웃한 배턴루지 시의 한인침례교회에는 뉴올리언스에서 피난 온 교민 100여 명이 묵고 있었고, 배턴루지 한인회는 아예 4명씩 조를 짜서 돌아가면서 재난을 당한 이웃 뉴올리언스 동포들에게 매 끼니 식사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교회 뿐 아니라 배턴루지 시의 교민들은 자기 집을 난민들의 대피소로 제공하고 맘대로 음식을 해 먹으라 하였다는 것이다.
김성대 한인회 회장은 카타리나 수재민 누구나 와서 머물라며 자기 집을 개방했고, 앨터스 거리에 있는 이유식씨 집에는 수재민 3가족이 머물렀고, 조인갑ㆍ최영섭씨 집에는 2가족씩, 문옥채ㆍ박종문씨 집에도 한 가족씩 받아들여 숙식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미혼자인 황유환씨는 카타리나 재해가 나자 아예 자기 아파트 열쇠를 찾아온 수재민 4가족들에게 넘겨주고, 자기는 친구 집에 가서 머물렀다는 것이다.
배턴루지 교민들뿐만 아니라 인근 도시인 휴스턴, 애틀랜타 등지의 교민회와 교회들도 집과 교회를 수재민들에게 개방하여 동포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축구장 난민처소에 한국인들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교민들은 수재민돕기 성금모집에 나서서 미국 사회를 더 놀라게 하였다. 휴스턴 한인회(회장 강경준)는 닷새 동안 가두모금을 하여 6,500불을 거두어 라면과 김치와 생필품들을 사서 전달했고, 댈러스와 포트워스ㆍ오스틴ㆍ샌안토니오ㆍ버몬트ㆍ로스앤젤레스 등 미국 각지의 한인회도 성금 모으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identity)을 제대로 찾지 못하던 교포 2세 한승호씨는 한국인이 자랑스럽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코리안은 시시콜콜 다투어도 어려움이 있으면 진심으로 돕는 것 같아 정말 기쁘다.”
이를 본 미국인들은 이렇게 칭찬하며 부러워하였다. “다른 어떤 나라 어떤 민족도 코리안 같이 이렇게 이웃을 돕지는 못할 것입니다.”
[필자 추기]
라. 다재 다능한 한민족의 재능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도전의식과 꾸준함을 주셨다. 음악에 바이올린ㆍ첼로ㆍ피아노ㆍ지휘 정트리오 등 세계적 인재가 났고, 체육계에는 축구에 손흥민, 야구에 유현진, 골프 빙상 등등 수많은 우리 아들 딸들이 세계를 주름잡고 있다.
새마을운동은 세계에서 수입해가고, 한국은 이제 “도움받던 나라”에서 “도움주는 나라”로 올라섰다. 서울시민 투표에서 보여준 보수층의 결집은 서울시장 보선과, 서울 교육감 보선에서 더 힘을 얻을 것이고, 향후 총선과 대선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保佑하사 우리나라 萬歲”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