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12월 31일, 을축년 마지막 날의 동아일보 2면은 어수선하다. 양조기 폭발로 여섯 명이 죽었다는 기사, 권총 강도단, 철창에서 새해를 맞는 구류자 백삼 명. 그 소란한 활자들 틈에 손바닥만 한 기사가 하나 끼어 있다.
제목이 '대종교에 서광' 이다.
내용은 담백하다. 시내 계동 101번지의 대종교가 경제 형편 탓에 그토록 중요한 경전들을 여태 발행하지 못하다가, 허다한 파란 끝에 창립된 대종교진흥회의 활동으로 마침내 네 가지를 찍는다는 것.
삼일신고, 신리대전, 신사기, 회삼경.
이틀 전인 12월 29일부터 견지동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인쇄에 들어갔고, 형편이 닿는 대로 신단실기와 종리문답, 가집도 내겠다고 했다.
여기까지라면 그저 한 교단의 출판 소식이다. 그런데 기사 한가운데 이상한 구절이 박혀 있다.
진흥회가 "각 방면에 흩어져 있는 이백여만 명의 교도를 대표하여" 진흥책을 강구한다는 대목이다.
이백만.
공교롭게도 바로 그해 10월 1일, 조선총독부는 이 땅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인구조사를 했다. 간이국세조사가 집계한 조선 인구는 1,902만여 명. 기사의 숫자를 곧이곧대로 받으면 조선 사람 열에 하나가 대종교인이라는 얘기가 된다. 믿을 수 있는 숫자인가.
통계로 읽으면 무너진다. 당연하다. 애초에 이 종교는 세어질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1915년 8월 조선총독부령 제83호로 발포된 포교규칙은 종교 전반, 특히 기독교를 묶으려던 통제 장치였지만, 제1조에서 종교의 이름을 신도(神道)와 불교와 기독교 셋으로 한정했다.
대종교는 그 명단에 들지 못했다. 종교가 아닌 것으로 규정된 교단은 학무국이 아니라 경무국, 그러니까 경찰의 관리 대상이 됐다.
어떤 법이든 일반 조항보다 무서운 것은 명단이다. 누구를 넣고 누구를 뺄지 정하는 그 선택에서 총독부는 단군을 받드는 종교를 뺐고, 그 순간부터 이 교단은 교당을 열 수도, 교적부에 신자를 올릴 수도 없게 됐다.
이듬해 나철이 구월산 삼성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거둔 것이 이 법령의 첫 번째 결과였다면, 교세가 어떤 장부에서도 사라진 것은 두 번째 결과였다.
국경 밖이라고 사정이 낫지 않았다. 만주는 총독부의 법이 직접 닿는 땅은 아니었으나, 1920년 경신참변의 총칼이 간도 한인사회의 교당과 학교를 태웠고, 1925년 6월에 맺어진 미쓰야협정은 봉천 군벌의 손을 빌려 감시망을 완성했다.
국내에서는 법이 세는 것을 막았고, 만주에서는 화염과 협정이 세는 것을 막았다. 그러니 관헌과 학계 문서에 남은 숫자가 초라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25년 무렵 북간도 연길·화룡·왕청 세 현에서 확인되는 대종교 신자는 2,100여 명.
이 숫자가 얼마나 허망한 셈법인지는 다른 숫자 하나를 옆에 놓아 보면 드러난다.
불과 5년 전인 1920년, 바로 그 왕청현 서대파에 본영을 두었던 북로군정서는 간부와 병사를 합쳐 1,600여 명을 헤아렸다.
총재는 대종교 지도자 서일, 총사령관은 김좌진. 이 종교가 낳은 군대였다.
그런데 군대는 허공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본영 곁에 사관연성소를 세워 한 해에 298명의 사관을 길러내고, 모연국과 탁지국을 두어 군자금을 거두고, 병참을 대고 이들을 내보내려면, 병력의 몇 곱절에 달하는 공동체가 뒤에 서 있어야 한다.
그로부터 5년 뒤 관헌의 장부에 잡힌 신자 수가, 그 군대 하나의 병력과 엇비슷하다. 물론 그 5년 사이에 경신참변이 있었고 자유시참변이 있었으며 서일 자신이 순국했으니, 교세가 실제로 크게 꺾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그래서 이 대비는 이중의 증언이 된다.
하나는 총칼이 실제로 지운 것의 크기이고, 다른 하나는 남은 것조차 장부가 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군대를 일으켰던 공동체의 등록부가 군대 하나 크기로 접혀 있다면, 문제는 공동체가 아니라 등록부다.
교단 스스로의 기록은 만주와 노령 일대의 교도를 30만으로 헤아렸다.
2,100과 30만과 200만.
세 숫자의 아득한 간격을 놓고 어느 하나를 '진짜'로 고르려는 시도는 부질없다. 등록이 금지된 신앙의 크기는 애초에 등록부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간격 자체가 증언이다. 확인되는 최소치와 헤아려진 최대치 사이의 저 공백이, 법령과 총칼이 정확히 무엇을 지웠는지를 보여준다.
분명한 것만 추리면 이렇다.
1925년 만주의 조선인은 53만을 넘었다. 그 사회의 정신적 중심에 대종교가 있었다.
무오독립선언의 서명자들,
북로군정서의 장병들,
청산리에서 싸운 사람들의 상당수가 이 교문(敎門)에 적을 두었다.
국내에서 숨조차 쉴 수 없게 된 종교가 국경 너머에서 독립운동의 척추가 된 것은 교단의 자랑이기 이전에, 일제 관헌이 이 교단을 끝까지 경찰의 눈으로 감시하며 남긴 문서들이 거꾸로 증명하는 사실이다.
그러니 사고실험을 하나 해볼 수는 있다. 만약 이 종교가 한반도 안에서 합법이었다면, 1,902만 조선인 가운데 몇이 단군 앞에 섰을까.
숫자로 답할 길은 없다. 반사실의 역사에 통계를 들이대는 것은 사학이 아니라 소설이다.
다만 방향은 말할 수 있다. 공인 종교의 명단에서 하필 이 종교를 빼고 경찰의 소관으로 넘긴 선택 자체가, 적어도 그 물음의 답을 총독부가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다. 금지의 강도는 두려움의 크기를 비추는 거울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1925년 세밑의 이 작은 기사가 예사롭지 않다. .
미쓰야협정으로 만주의 무장투쟁이 숨통을 조이던 바로 그해 겨울, 서울 한복판 인쇄소에서 이 교단은 활자를 골랐다.
나철이 지은 신리대전과 서일이 지은 회삼경을, 경전이라는 가장 오래된 형식의 저항을 조판한 것이다. 총을 들었던 총재의 책이 활자가 되어 돌아오는 데 꼭 5년이 걸린 셈이다.
박은식은 '한국통사' 첫머리에 썼다. 나라는 형(形)이고 역사는 신(神)이니, 신이 보존되어 멸하지 않으면 형은 부활할 때가 있으리라고.
그리고 국교(國敎)와 국사(國史)는 국혼(國魂)에 속하는 것이어서 나라의 형체가 죽는다고 함께 죽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1925년 12월의 대종교인들은 이 문장을 인쇄기로 실천하고 있었다.
이백만이 과장이었느냐고 다시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그것은 통계가 아니라 선언이었다.
세어질 수 없게 만들어진 사람들이 스스로를 세어 보인 숫자, 지워진 교적부 대신 신문 지면에 남긴 자기 증명이었다고.
그리고 그 선언은 아주 근거 없는 것도 아니었다. 고려 말 이후 문헌 속에 잠들어 있던 '홍익인간'이라는 말을 근대의 언어로 깨워 낸 것이 바로 이 단군민족주의의 흐름이었고, 광복 후 조선교육심의회는 그 말을 새 나라의 교육이념으로 채택했으며, 1949년 12월 31일 제정된 교육법 제1조에 그대로 새겨 넣었다.
그 법이 만들어지던 시기의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은 훗날 대종교 총전교에 오르는 사람이었다. 교육법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뒤에도 그 첫 문장은 살아남아, 오늘의 교육기본법 제2조는 여전히 이렇게 시작한다.
"교육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아래."
이 나라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날 계동의 200만 속에 헤아려지고 있는 셈이다.
을축년 마지막 날의 기자는 제목에 '서광(曙光)'이라는 말을 골랐다.
새벽빛은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단어다. 그 어둠이 얼마나 길지 그는 몰랐겠지만, 단어 하나는 정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