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이들의 하느님(마르코 12,27)
박병규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부유한 귀족 계층이었고, 성전과 대사제직의 권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 권력과 협력하며 특권을 지키는 데 익숙하였기에, 신앙의 열정보다 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고, 오직 모세오경, 곧 토라만을 하느님의 계시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은 진리를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부활이라는 빛을 꺼뜨리려는 시험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신명기의 결혼 규정을 꺼내 듭니다(25,5-6 참조). 죽은 뒤에도 이 세상의 질서가 그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가정 위에서, 부활을 모순으로 몰아가려 합니다. 질문은 논리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 속에는 믿음을 조롱하려는 차가운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무지無知도 있다)
이러한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부활은 그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새롭게 보여 주시는 존재의 방식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 땅의 삶을 되풀이하며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토라에서 증거를 찾으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탈출 3,6.15–16; 4,5)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오래전에 죽은 이들의 이름을 당신의 이름 안에 품고 계신다면, 그들은 사라진 존재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이름=존재)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신 이들의 이름을 잊지 않으시고, 죽음조차도 우리를 향한 그분의 기억과 사랑을 끊어 내지 못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손을 끝까지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그 손을 놓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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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
송영진 신부님>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라는 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하느님 앞에서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죽은 이들의 이름을 하느님께서 '품고 계신다'는 뜻도 아니고, '기억하신다'는 뜻도 아니고, 그들이 ‘실제로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만일에 부활이 없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즉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살리지 못하신다면, 그러면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닌 것이고, 전지전능하지 않다면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안 믿는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발췌:송영진 신부님 묵상-
첫댓글 송영진 신부님은 위 박병규 신부님의 '이름을 품고 있다'라는 영적 정신적 강조에 '실제적' 해석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권능의 하느님'이시기도 하기에 공감가는 이해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름=존재'와 동일합니다.
어쨋거나 유한한 인간은 지금 여기에서 무한하신 하느님의 존재도 하느님의 능력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또한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고 그분은 하느님이시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