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은 맑고 깨끗한 물을 담는 물병입니다. 원래 정병은 인도에서 수행하는 승려들이 여행할 때 들고 다니던 물병이다.
점차 부처 앞에 깨끗한 물을 담아 바치는 공양구로 사용되면서 쓰임새가 넓어졌고 , 우리나라에서는 관음신앙의 유행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에 나타나서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였다.
사찰뿐만이 아니라 민가나 기관에서도 물을 담는 용도로 사용되는등 그 쓰임새가 다양해졌다.
< 청자 연꽃 버드나무무늬 졍병 > 고려시대12-13세기. 높이 26.7
연꽃과 버드나무무늬가 앞뒤로 상감되어 있는 청자 정병니다. 몸통 어깨위에 물을 담는 부문을 부리처럼 별도로 만들어 붙인 전형적인 정병과 달리 간략하게 구멍만 뚫어 놓은것이 특징이다. 사용처나 사용목적이 달라 모양을 다르게 만든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한 용도와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정병, 물가 풍경무늬를 새기다
물가 풍경무늬는 가지를 늘어뜨린 버드나무나 부들, 갈대등 물가에서 자라는 식물들과 물 위를 헤엄치거나 날고 있는 오리, 기러기, 원앙 등 물새들을 소재로 하여 물가 풍경을 한폭의 그림처럼 묘사한것으로, 정병을 비롯한 불교 의식구에 많
이 사용되었다.
정병은 당시 고려시대 사람들을 불안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치유해주는 관음보살의 대표되는 상징을 결합하여
보여주고자 했으며 관음보살로부터 현실 고통을 치유 받고자 하는 그들의 염원을 병병에 고스란히 그려 담아낸것이다.
< 청동으로 만든정병 > 고려시대 높이 38.0
< 토기로 만들어진 정병 >
< 청동으로 만든 정병 ( 청동정병) >
고려시대 정병은 달걀모양의 몸통에 긴목위로 둥근 테가 놓이고, 그 위에 대롱처럼 긴 모양의 물을 따르는 첨대가 있으며 몸통 옆에는 물을 담는 부리 모양의 주입구가 있다.
전형적인 모양의 정병과 달리 몸통위에 구멍만 뚫려 있거나 주전자모양의 주구가 달린것도 있다.
<청동으로 만든 물가 풍경무늬 정병 > 고려시대12-13세기 . 높이 37.8
청동에 은입사기법으로 물가 풍경무늬를 새긴 정병이다. 정병의 몸통에는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휘날리는갈대, 떼 지어 나는물새, 노를 저어가는 배와 삿갓을 쓴 낚시꾼의 배 등이 새겨져 있다. 정병 몸통에 새겨진 무뉘는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어깨 부분의 여의무늬를 두고 병의 긴 목에는 잎 무늬를, 둥근 테위에는 연꽃을 정교하게 새겼다.
<청자 물가 풍경무늬 정병 > 도자기로 만든정병 보물 제344호 . 고려 12세기 높이 34
물가 풍경무늬를 새겨 만든 청자 정병이다. 금속제 정병의 경우 물가 ?경무늬를 음각으로 파서 은실을 박아 넣어 만드는데 , 이 정병은 무늬를 양각으로 새긴것이 특징니다. 갈대밭에서 노는 기러기 한쌍과 버드나무 아래에서 있는 원앙을 새겼는데 물가 풍경의 모습도 당시 유행하던 전형적인 그림과 달라 독특하다.
<청동으로 만든 물가 풍경무늬 정병 > 고려 12-13세기. 높이 37.8
고려시대 공예의 정수를 보여주는 청동 은입사 물가 풍경무늬 정병은 한폭의 그림으로서 높은 에술성을 보여준다.
이 정병은 물을 따르는 부분이 몸통 아랫부분에서 길게 올라오는 모양으로 달려 있는점이 특징이다.
전형적인 정병은 윗부분 긴 대롱으로 물을 따르고 몸통에 달린 귀때로 물을 담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정병은 윗부분의 긴 대롱이 넓고 아랫부분의 주구가 주자(注子)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정병과 반대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자 연꽃 모란무늬 참외 모양 정병 > 고려 12세기, 높이 35.5
참외 모양의 몸통을 가진 청자 정병이다. 고려시대 특수한 모양의 청자 중에는 참외모양을 가진 주자나 병이 있는데, 정병는 그 예가 많지 않으며 희귀하다.
참외 모양으로 나뉜 선을 따라 연꽃무늬와 모란무늬가 번갈아 가며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음각 선으로 유리하게 표현된 꽃무늬가 정병의 화려함을 더해준다.
< 청자 꽃무늬 정병 > 고려 12-13세기
흑감 상감으로 몸통 앞뒤에 서로 다른 꽃무늬를 새긴 청자 정병이다. 몸통의 어깨 부분을 둘러 모란 넝쿨무늬가 정교하게 상감되어있으며 , 굽 부분과 목 위에있는 둥근 테 부분도 백 상감으로 무늬를 표현하고있다.
우리 박물관에는 12세기쯤 만들어졌을 것이라 생각하는 청동정병 2점과 청자정병 1점이 전시되어 있다. 정병은 병甁의 한 종류로 주로 액체나 반액체를 담을 때 사용하는 그릇인데, 생김새가 매우 독특하다. 둥그런 몸체 옆으로는 물을 따르도록 만든 귀때와 덮개가 있고, 몸체 위로는 가늘고 긴 목이 솟아오르다 밖으로 퍼져 원반 모양의 매듭을 만들고 있으며, 그 위로 대롱처럼 생긴 첨대가 길게 솟아있다. 이런 구조가 전형적인 정병의 모습이다.
범어로 쿤디카kundika[군지軍持 ? 군치가軍雉迦]라 부르는 정병은 병 또는 조병?甁이라 번역되었고, 다른 이름으로 수병水甁, 감로병甘露甁 또는 보병寶甁이라고도 한다. 정병은 본래 인도에서 승려가 여행할 때 가지고 다니던 물병에서 유래한 것으로, 차츰 공양구供養具로 그 쓰임의 폭이 넓어지고 동시에 구제자의 상징이자 자비심을 표현하는 지물持物로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 특히 불교회화나 조각에서 관세음보살이 지니고 다니는 지물로 표현하는데, 이는 정병에 담겨 있는 감로수로 모든 중생들의 목마름과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상징한다.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정병은, 송宋 휘종徽宗의 국신사國信使로 파견된 서긍徐兢이 고려 인종 1년(1123)에 엮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하 『고려도경高麗圖經』) 을 통해 그 당시의 형태나 쓰임새를 자세히 알 수 있다. 『고려도경』 권31 <기명器皿> 편을 보면, “정병은 긴 목에 불룩한 배 모양인데, 곁에는 물을 따를 수 있는 주둥이가 하나 있다. 정병의 가운데에 두 마디가 있는데, 또한 줄을 맬 수 있는 고리 역할을 한다. 뚜껑의 목 중간에는 턱이 있고, 턱 위에는 다시 작은 목이 있어 비녀나 붓의 형상을 띤다. 귀인貴人과 국관國官, 관사觀寺(도관과 사찰)와 민가民舍에서 모두 사용하는데, 물만을 담을 수 있을 뿐이다. 높이는 1자 2치이고, 배의 지름은 4치이며, 용량은 3되이다. [淨甁之狀 長頸脩腹 旁有一流 中爲兩節 仍有??. 蓋頸中閒 有隔. 隔之上 復有小頸 象簪筆形. 貴人國官 觀寺民舍 皆用之 惟可貯水. 高一尺二寸 腹徑四寸 量容三升.]”라고 하였다.
또 정병과 관련한 기록 가운데 당대唐代의 불교 제반 상황과 승원僧院에서의 생활 등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대당남해기귀내법전大唐南海寄歸內法傳』 (이하 『남해기귀내법전』)이 있다. 『남해기귀내법전』은 당나라 승려 의정義淨이 지은 책으로, 이 책의 권 제일 수유이병水有二甁 조를 보면 병의 형태를 묘사한 기록을 볼 수 있다.
뚜껑은 모름지기 주둥이에 연결시키고 꼭대기에 돌대를 세우되 높이는 두 손가락쯤으로 한다. 그 위에 조그만 구멍을 통하게 하여 동저銅箸와 같이 한다. 마시는 물은 그 속에 담아 방변傍邊에 따로 동그란 구멍을 뚫어 옹구擁口로 부터 올라가게 한다. 세운 높이는 두 손가락쯤으로서 구멍은 동전 크기와 같게 한다. 2~3되는 들어가게 해야 할 것이며 이보다 작으면 쓸데가 없을 것이다. [蓋?連口 頂出尖臺 可高兩指. 上通小穴 ?如銅箸. 飮水令上 此中傍邊 則別開圓孔 擁口令上. 竪高兩指 孔如錢許. 添水宜於此處 可水二三升 小成夭用.]
『남해기귀내법전』에 기록된 병의 모습은 『고려도경』에서 설명하는 정병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 『남해기귀내법전』이 당나라 때에 지어진 점을 고려해 볼 때, 정병의 형태는 고려시대 보다 이른 7~8세기에 이미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려도경』을 통해 고려시대에 정병은 귀인에서 서민, 민간에서 사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물은 그 쓰임에 따라 이름이 붙여지기 마련인데, 정병은 ‘정淨’과 ‘병甁’ 자字가 합쳐진 복합어複合語로 ‘깨끗한 물을 담는 병’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맥락과 더불어 『남해기귀내법전』이 불교와 승원에서의 생활에 중점을 둔 사료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정병은 단순한 그릇으로서의 의미보다 공양구로서의 의미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청동정병 2점과 청자정병 1점은 『고려도경』과 『남해기귀내법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모습과 매우 흡사하며, 모두 12세기 전후에 만들어졌을 것이라 추정한다. 각 정병의 특징을 살펴보면, [그림 2]의 정병은 표면에 푸른 녹이 피었지만, 유물 상태는 비교적 온전한 편이다. 정병은 일반적으로 12세기에 들어서야 귀때 덮개가 만들어지는데, 이 정병은 귀때에 덮개를 연결하는 고리가 없는 것으로 보아 12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림 3]의 정병은 [그림 2]의 정병과 비교했을 때, 전체적인 크기나 첨대, 목, 몸체, 굽, 귀때 등 그 형태가 매우 비슷하다. 표면을 보면 녹이 핀 정도가 심하고 군데군데 부식된 흔적도 보인다. 첨대와 목 부분 사이의 둥근 테 부분을 보면 다른 정병들 보다 도톰한 것이 특징이다. 귀때 옆에는 연결고리가 있어 덮개와 귀때를 고정시켜주는데, 보통 실로 연결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 이 정병 귀때에 부착된 연결고리에는 실 대신 못으로 고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후대에 연결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청자는 일반적으로 비색을 띄지만 [그림 4]의 청자정병은 제작 당시 가마에 불을 땔 때 열이 골고루 미치지 않아 부분적으로 갈색을 띈다. [그림1], [그림2]와 비교해 볼 때, 크기는 작지만 전반적으로 청동정병의 모습과 비슷하다. 귀때에 덮개를 연결하는 고리는 온전히 남아 있지만 현재 덮개는 없다.
이 세 점의 유물을 보면서 궁금했던 것은 정병을 만든 재료가 다른데, 왜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있는가 였다. 보통 물체는 쓰임새가 같더라도 재료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진다. 혹 재료의 한계를 극복해서 기물을 만들더라도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세 정병의 경우는 그 반대인데, 왜 그런 것일까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답은 『망월불교대사전望月佛敎大事典』에서 찾을 수 있었다. 『망월불교대사전』을 보면 정병에 대해, “병은 정병과 촉병觸甁 두 가지 종류가 있어서 정병 물로는 깨끗한 손을 씻고, 촉병 물로는 더러운 손을 씻는다. 정병은 도자기로 만들고 촉병은 금속으로 만든 것이 쓰인다.” 라는 기록이 있다. 『남해기귀내법전』에도 이와 비슷한 설명이 있는데, “무릇 물은 정淨과 촉觸으로 나누는데 병은 2개이다. 정병은 와자瓦瓷 또는 도제陶製를 쓰고 촉병은 동철銅鐵을 겸하게 한다.” 라고 하였다. 이 두 기록을 보면 정병을 만든 재료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부르고, 용도가 각각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두 병의 형태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앞서 『남해기귀내법전』에 병의 모양을 설명한 기록을 참고하면 정병과 촉병의 생김새는 흡사할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12세기에 만들어진 정병을 살펴보면, 적어도 당나라 때에는 정병을 재료와 쓰임새에 따라 구별하여 사용한 듯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병과 촉병의 구분이 모호해져 이름은 정병으로, 쓰임새는 공양구에서 다양한 계층이 사용하는 그릇으로 바뀐 것이라 생각한다.
공예는 당대의 문화와 사회상을 반영하는 그릇이다. 정병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공예품 가운데 하나로 당시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공양구였다. 비록 이 세 점의 정병과 몇몇의 기록으로 그 당시 문화상과 정병의 변화에 대해서 명확히 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청동 ? 청자정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다른 정병에 비해 장식도 없고, 유물의 형태도 완전한 것도 아니어서 소소해 보일지 모르다. 하지만 찬찬히 보면 그 속에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 흔적이 보이고, 더불어 고도의 기술적 역량이 발휘된 점을 알 수 있다.
범어(梵語) 군디카(Kundika)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음역(音譯)하여 군지(軍持) 또는 군치가(?雉迦)라 하고, 수병(水甁)이라고도 한다.
즉, 물을 담는 병으로, 물 가운데서도 가장 깨끗한 물을 넣는 병을 이른다.
정병에 넣는 정수(淨水)는 또한 중생들의 고통과 목마름을 해소해 주는 감로수(甘露水)와도 서로 통하여, 감로병 또는 보병(寶甁)이라고도 일컫는다.
정병은 본래 깨끗한 물을 담는 수병으로서 승려의 필수품인 18물(物)의 하나이던 것이, 차츰 부처님 앞에 정수를 바치는 공양구(供養具)로서 그 용도의 폭이 넓어지게 되었다.
불교의 정병은 인도에서 발생하여 불교와 함께 우리에게 전래된 것으로, 부처님 앞에 물공양으로 바치는 불기(佛器)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보살의 지물(持物)로서 구제자(救濟者)를 나타내는 하나의 방편이자 자비심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정병과 불·보살과의 관계는 왕자요 구제자요, 길상(吉祥)과 풍요를 부여하는 자로서의 이미지가 서로 복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관세음보살이 들고 있는 정병이다. 이 정병에는 감로수가 들어 있어 감로병이라고도 하는데, 관세음보살은 이 감로수로써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갈증을 해소해 준다.
정병은 관세음보살 이외에 미륵보살이나 제석천(帝釋天)·범천(梵天) 등도 들고 있다.
정병의 재료는 토기나 금·은 등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주로 청동과 도자기가 애용되어 왔다.
특히 불교를 숭앙하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부터는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불전공양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불가결의 불구로서 대량으로 조성되었으며, 양식적인 측면에서도 고려의 독창성을 아주 잘 보여 주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진 정병의 형태는 주둥이부분[注口部]·목부분[頸部]·몸체부분[胴體部]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을 다시 분류하면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긴 목에 나팔모양의 주둥이가 달려 있고 타원형의 몸체에 굽이 달려 있는 모양이다.
둘째는 긴 목에 테두리가 둘러져 있고 불룩 나온 배 위에 기다랗고 뾰족한 끝이 나와 있으며, 몸체의 넓은 어깨에는 주둥이가 나와 있는 형태로서 여기에는 뚜껑까지 갖추어져 있다.
첫째 형태의 대표적인 예로는 경주 불국사 부근에서 출토된 청동병(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이 알려져 있으며,
둘째 형태의 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 국보 제92호)을 대표로 들 수 있다.
문양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가장 특색 있고 독자적인 무늬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도자기와 청동제 정병에 공통적으로 포류수금문과 유로수금문(柳蘆水禽文) 등을 중심으로 한 연판문(蓮瓣文)·여의두문(如意頭文)·당초문(唐草文)·운문(雲文)·뇌문(雷文) 등의 여러 가지 문양이 각 부에 따라 장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각 부 중에서도 몸체에는 버드나무·갈대·부들·연 등 수생초(水生草)와 함께 오리·기러기·원앙 등 물가 생활에 관련이 깊은 소재를 배치함으로써 생동감 있고 조용한 물가 풍경을 주로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청동제의 정병에서 새롭게 보이는 은입사기법은 밀랍주조법(蜜蠟鑄造法)과 함께 청동기 전래 이후 급속하게 발전한 고려시대의 우수하였던 금속공예의 한 단면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의장적(意匠的)인 측면이나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을 뿐만 아니라 조형성(造形性) 또한 뛰어난 정병은 매우 존귀하게 취급되어 온 물병으로, 종교적인 특수목적을 띠고 주로 사찰에서 사용되었다
정병(淨甁)은 맑고 깨끗한 물을 담는 그릇으로 물 가운데서도 가장 깨끗한 물인 감로수를 담는 병을 말한다. 물을 담는 그릇이라하여 '수병(水甁)'이라고도 한다. 감로수는 중생들의 고통스러움이나 목마름을 없애주는 물이다. 관음보살이나 미륵보살, 제석천 등도 이런 병을 들고 있다.
정병은 부처님께 올릴 깨끗한 물이나 감로수를 담는 병이다. 정병은 <법화경>에 의하면 원래 승려가 반드시 지녀야할 18물 중의 하나였던 것이 점차 불전에 바치는 깨끗한 물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범어 군디카(Kundika)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음역하녀 군지(軍持) 또는 군치가(裙稚迦)라 하고 수병(水甁)이라고도 한다. 즉 물을 담는 병으로 물 가운데서도 가장 깨끗한 물을 넣는 병이다.
정병에 넣는 맑은 물 정수(淨水) 또한 중생들의 고통과 목마름을 해소해주는 감로수(甘露水)와도 서로 통하여 감로병(甘露甁) 또는 보병(寶甁)이라고도 일컫는다.
정병은 본래 깨끗한 눌을 담는 수별으로서 승려의 필수품인 18물의 하나이던 것이 차츰 부처님앞에 정수를 바치는 공양구로 그 용도의 폭이 넓어졌다.
불교의 정병은 인도에서 발생하여 불교와 함께 우리에게 전래된 것으로 부처님 앞에 물공양으로 바치는 불기(佛器)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보살이 가지는 것으로 구제자를 나타내는 하나의 방편이자 자비심을 표현하는 지물(持物) 구실을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정병과 불보살과의 관계는 왕자요 구제자요 길상과 풍요를 부여하는 자로서의 이미지가 서로 복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잘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관세음보살이 들고 있는 정병이다. 관세음보살은 감로수로써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갈증을 해소해준다. 정병은 관세음보살 이외에 미륵보살이나 제석천.범천 등도 들고 있다.
정병의 재료는 토기나 금,은 등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주로 청동과 도자기가 애용되어 왔으며 큭히 불교를 숭앙하던 고려시대에 와서는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불전공양에서는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불구로서 대량으로 조성되어 양식적인 측면에서 고려의 독창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우리나라 정병의 형태는 크게 두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긴목에 나팔모양의 주둥이가 달리고 타원형 동체에 굽이 달린 모양이며, 다른 하나는 긴 목에 테두리가 둘러져 있고 불룩 나온 배위에 기다할고 뾰족한 끝이 나와 있으며 동체는 어깨가 넓은 편인데 어깨에는 주둥이가 나와 있고 여기에 뚜껑이 있는 모양이다.
전자는 경주 불국사 인근 출토 청동병이 유명하며, 후자는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 등이 유명하다. 특히 은입사정병은 날씬한 모양과 치밀한 무늬로 보아 당대의 걸작에 속한다고 하겠다.
불전에 물공양으로 바치는 불기로서 정병과 불보살이 가지는 지물로서의 정병은 매우 많이 만들어졌고 또한 관정(灌頂)의식에서나 스님의 필수품인 18물의 하나로 쓰였다.
정병은 맑고 깨끗한 물을 담는 물병입니다. 원래 정병은 인도에서 수행하는 승려들이 여행할 때 들고 다니던 물병이다.
점차 부처 앞에 깨끗한 물을 담아 바치는 공양구로 사용되면서 쓰임새가 넓어졌고 , 우리나라에서는 관음신앙의 유행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에 나타나서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였다.
사찰뿐만이 아니라 민가나 기관에서도 물을 담는 용도로 사용되는등 그 쓰임새가 다양해졌다.
< 청자 연꽃 버드나무무늬 졍병 > 고려시대12-13세기. 높이 26.7
연꽃과 버드나무무늬가 앞뒤로 상감되어 있는 청자 정병니다. 몸통 어깨위에 물을 담는 부문을 부리처럼 별도로 만들어 붙인 전형적인 정병과 달리 간략하게 구멍만 뚫어 놓은것이 특징이다. 사용처나 사용목적이 달라 모양을 다르게 만든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한 용도와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정병, 물가 풍경무늬를 새기다
물가 풍경무늬는 가지를 늘어뜨린 버드나무나 부들, 갈대등 물가에서 자라는 식물들과 물 위를 헤엄치거나 날고 있는 오리, 기러기, 원앙 등 물새들을 소재로 하여 물가 풍경을 한폭의 그림처럼 묘사한것으로, 정병을 비롯한 불교 의식구에 많
이 사용되었다.
정병은 당시 고려시대 사람들을 불안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치유해주는 관음보살의 대표되는 상징을 결합하여
보여주고자 했으며 관음보살로부터 현실 고통을 치유 받고자 하는 그들의 염원을 병병에 고스란히 그려 담아낸것이다.
< 청동으로 만든정병 > 고려시대 높이 38.0
< 토기로 만들어진 정병 >
< 청동으로 만든 정병 ( 청동정병) >
고려시대 정병은 달걀모양의 몸통에 긴목위로 둥근 테가 놓이고, 그 위에 대롱처럼 긴 모양의 물을 따르는 첨대가 있으며 몸통 옆에는 물을 담는 부리 모양의 주입구가 있다.
전형적인 모양의 정병과 달리 몸통위에 구멍만 뚫려 있거나 주전자모양의 주구가 달린것도 있다.
<청동으로 만든 물가 풍경무늬 정병 > 고려시대12-13세기 . 높이 37.8
청동에 은입사기법으로 물가 풍경무늬를 새긴 정병이다. 정병의 몸통에는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휘날리는갈대, 떼 지어 나는물새, 노를 저어가는 배와 삿갓을 쓴 낚시꾼의 배 등이 새겨져 있다. 정병 몸통에 새겨진 무뉘는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어깨 부분의 여의무늬를 두고 병의 긴 목에는 잎 무늬를, 둥근 테위에는 연꽃을 정교하게 새겼다.
<청자 물가 풍경무늬 정병 > 도자기로 만든정병 보물 제344호 . 고려 12세기 높이 34
물가 풍경무늬를 새겨 만든 청자 정병이다. 금속제 정병의 경우 물가 ?경무늬를 음각으로 파서 은실을 박아 넣어 만드는데 , 이 정병은 무늬를 양각으로 새긴것이 특징니다. 갈대밭에서 노는 기러기 한쌍과 버드나무 아래에서 있는 원앙을 새겼는데 물가 풍경의 모습도 당시 유행하던 전형적인 그림과 달라 독특하다.
<청동으로 만든 물가 풍경무늬 정병 > 고려 12-13세기. 높이 37.8
고려시대 공예의 정수를 보여주는 청동 은입사 물가 풍경무늬 정병은 한폭의 그림으로서 높은 에술성을 보여준다.
이 정병은 물을 따르는 부분이 몸통 아랫부분에서 길게 올라오는 모양으로 달려 있는점이 특징이다.
전형적인 정병은 윗부분 긴 대롱으로 물을 따르고 몸통에 달린 귀때로 물을 담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정병은 윗부분의 긴 대롱이 넓고 아랫부분의 주구가 주자(注子)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정병과 반대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자 연꽃 모란무늬 참외 모양 정병 > 고려 12세기, 높이 35.5
참외 모양의 몸통을 가진 청자 정병이다. 고려시대 특수한 모양의 청자 중에는 참외모양을 가진 주자나 병이 있는데, 정병는 그 예가 많지 않으며 희귀하다.
참외 모양으로 나뉜 선을 따라 연꽃무늬와 모란무늬가 번갈아 가며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음각 선으로 유리하게 표현된 꽃무늬가 정병의 화려함을 더해준다.
< 청자 꽃무늬 정병 > 고려 12-13세기
흑감 상감으로 몸통 앞뒤에 서로 다른 꽃무늬를 새긴 청자 정병이다. 몸통의 어깨 부분을 둘러 모란 넝쿨무늬가 정교하게 상감되어있으며 , 굽 부분과 목 위에있는 둥근 테 부분도 백 상감으로 무늬를 표현하고있다.
우리 박물관에는 12세기쯤 만들어졌을 것이라 생각하는 청동정병 2점과 청자정병 1점이 전시되어 있다. 정병은 병甁의 한 종류로 주로 액체나 반액체를 담을 때 사용하는 그릇인데, 생김새가 매우 독특하다. 둥그런 몸체 옆으로는 물을 따르도록 만든 귀때와 덮개가 있고, 몸체 위로는 가늘고 긴 목이 솟아오르다 밖으로 퍼져 원반 모양의 매듭을 만들고 있으며, 그 위로 대롱처럼 생긴 첨대가 길게 솟아있다. 이런 구조가 전형적인 정병의 모습이다.
범어로 쿤디카kundika[군지軍持 ? 군치가軍雉迦]라 부르는 정병은 병 또는 조병?甁이라 번역되었고, 다른 이름으로 수병水甁, 감로병甘露甁 또는 보병寶甁이라고도 한다. 정병은 본래 인도에서 승려가 여행할 때 가지고 다니던 물병에서 유래한 것으로, 차츰 공양구供養具로 그 쓰임의 폭이 넓어지고 동시에 구제자의 상징이자 자비심을 표현하는 지물持物로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 특히 불교회화나 조각에서 관세음보살이 지니고 다니는 지물로 표현하는데, 이는 정병에 담겨 있는 감로수로 모든 중생들의 목마름과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상징한다.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정병은, 송宋 휘종徽宗의 국신사國信使로 파견된 서긍徐兢이 고려 인종 1년(1123)에 엮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하 『고려도경高麗圖經』) 을 통해 그 당시의 형태나 쓰임새를 자세히 알 수 있다. 『고려도경』 권31 <기명器皿> 편을 보면, “정병은 긴 목에 불룩한 배 모양인데, 곁에는 물을 따를 수 있는 주둥이가 하나 있다. 정병의 가운데에 두 마디가 있는데, 또한 줄을 맬 수 있는 고리 역할을 한다. 뚜껑의 목 중간에는 턱이 있고, 턱 위에는 다시 작은 목이 있어 비녀나 붓의 형상을 띤다. 귀인貴人과 국관國官, 관사觀寺(도관과 사찰)와 민가民舍에서 모두 사용하는데, 물만을 담을 수 있을 뿐이다. 높이는 1자 2치이고, 배의 지름은 4치이며, 용량은 3되이다. [淨甁之狀 長頸脩腹 旁有一流 中爲兩節 仍有??. 蓋頸中閒 有隔. 隔之上 復有小頸 象簪筆形. 貴人國官 觀寺民舍 皆用之 惟可貯水. 高一尺二寸 腹徑四寸 量容三升.]”라고 하였다.
또 정병과 관련한 기록 가운데 당대唐代의 불교 제반 상황과 승원僧院에서의 생활 등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대당남해기귀내법전大唐南海寄歸內法傳』 (이하 『남해기귀내법전』)이 있다. 『남해기귀내법전』은 당나라 승려 의정義淨이 지은 책으로, 이 책의 권 제일 수유이병水有二甁 조를 보면 병의 형태를 묘사한 기록을 볼 수 있다.
뚜껑은 모름지기 주둥이에 연결시키고 꼭대기에 돌대를 세우되 높이는 두 손가락쯤으로 한다. 그 위에 조그만 구멍을 통하게 하여 동저銅箸와 같이 한다. 마시는 물은 그 속에 담아 방변傍邊에 따로 동그란 구멍을 뚫어 옹구擁口로 부터 올라가게 한다. 세운 높이는 두 손가락쯤으로서 구멍은 동전 크기와 같게 한다. 2~3되는 들어가게 해야 할 것이며 이보다 작으면 쓸데가 없을 것이다. [蓋?連口 頂出尖臺 可高兩指. 上通小穴 ?如銅箸. 飮水令上 此中傍邊 則別開圓孔 擁口令上. 竪高兩指 孔如錢許. 添水宜於此處 可水二三升 小成夭用.]
『남해기귀내법전』에 기록된 병의 모습은 『고려도경』에서 설명하는 정병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 『남해기귀내법전』이 당나라 때에 지어진 점을 고려해 볼 때, 정병의 형태는 고려시대 보다 이른 7~8세기에 이미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려도경』을 통해 고려시대에 정병은 귀인에서 서민, 민간에서 사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물은 그 쓰임에 따라 이름이 붙여지기 마련인데, 정병은 ‘정淨’과 ‘병甁’ 자字가 합쳐진 복합어複合語로 ‘깨끗한 물을 담는 병’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맥락과 더불어 『남해기귀내법전』이 불교와 승원에서의 생활에 중점을 둔 사료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정병은 단순한 그릇으로서의 의미보다 공양구로서의 의미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청동정병 2점과 청자정병 1점은 『고려도경』과 『남해기귀내법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모습과 매우 흡사하며, 모두 12세기 전후에 만들어졌을 것이라 추정한다. 각 정병의 특징을 살펴보면, [그림 2]의 정병은 표면에 푸른 녹이 피었지만, 유물 상태는 비교적 온전한 편이다. 정병은 일반적으로 12세기에 들어서야 귀때 덮개가 만들어지는데, 이 정병은 귀때에 덮개를 연결하는 고리가 없는 것으로 보아 12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림 3]의 정병은 [그림 2]의 정병과 비교했을 때, 전체적인 크기나 첨대, 목, 몸체, 굽, 귀때 등 그 형태가 매우 비슷하다. 표면을 보면 녹이 핀 정도가 심하고 군데군데 부식된 흔적도 보인다. 첨대와 목 부분 사이의 둥근 테 부분을 보면 다른 정병들 보다 도톰한 것이 특징이다. 귀때 옆에는 연결고리가 있어 덮개와 귀때를 고정시켜주는데, 보통 실로 연결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 이 정병 귀때에 부착된 연결고리에는 실 대신 못으로 고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후대에 연결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청자는 일반적으로 비색을 띄지만 [그림 4]의 청자정병은 제작 당시 가마에 불을 땔 때 열이 골고루 미치지 않아 부분적으로 갈색을 띈다. [그림1], [그림2]와 비교해 볼 때, 크기는 작지만 전반적으로 청동정병의 모습과 비슷하다. 귀때에 덮개를 연결하는 고리는 온전히 남아 있지만 현재 덮개는 없다.
이 세 점의 유물을 보면서 궁금했던 것은 정병을 만든 재료가 다른데, 왜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있는가 였다. 보통 물체는 쓰임새가 같더라도 재료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진다. 혹 재료의 한계를 극복해서 기물을 만들더라도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세 정병의 경우는 그 반대인데, 왜 그런 것일까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답은 『망월불교대사전望月佛敎大事典』에서 찾을 수 있었다. 『망월불교대사전』을 보면 정병에 대해, “병은 정병과 촉병觸甁 두 가지 종류가 있어서 정병 물로는 깨끗한 손을 씻고, 촉병 물로는 더러운 손을 씻는다. 정병은 도자기로 만들고 촉병은 금속으로 만든 것이 쓰인다.” 라는 기록이 있다. 『남해기귀내법전』에도 이와 비슷한 설명이 있는데, “무릇 물은 정淨과 촉觸으로 나누는데 병은 2개이다. 정병은 와자瓦瓷 또는 도제陶製를 쓰고 촉병은 동철銅鐵을 겸하게 한다.” 라고 하였다. 이 두 기록을 보면 정병을 만든 재료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부르고, 용도가 각각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두 병의 형태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앞서 『남해기귀내법전』에 병의 모양을 설명한 기록을 참고하면 정병과 촉병의 생김새는 흡사할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12세기에 만들어진 정병을 살펴보면, 적어도 당나라 때에는 정병을 재료와 쓰임새에 따라 구별하여 사용한 듯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병과 촉병의 구분이 모호해져 이름은 정병으로, 쓰임새는 공양구에서 다양한 계층이 사용하는 그릇으로 바뀐 것이라 생각한다.
공예는 당대의 문화와 사회상을 반영하는 그릇이다. 정병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공예품 가운데 하나로 당시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공양구였다. 비록 이 세 점의 정병과 몇몇의 기록으로 그 당시 문화상과 정병의 변화에 대해서 명확히 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청동 ? 청자정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다른 정병에 비해 장식도 없고, 유물의 형태도 완전한 것도 아니어서 소소해 보일지 모르다. 하지만 찬찬히 보면 그 속에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 흔적이 보이고, 더불어 고도의 기술적 역량이 발휘된 점을 알 수 있다.
범어(梵語) 군디카(Kundika)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음역(音譯)하여 군지(軍持) 또는 군치가(?雉迦)라 하고, 수병(水甁)이라고도 한다.
즉, 물을 담는 병으로, 물 가운데서도 가장 깨끗한 물을 넣는 병을 이른다.
정병에 넣는 정수(淨水)는 또한 중생들의 고통과 목마름을 해소해 주는 감로수(甘露水)와도 서로 통하여, 감로병 또는 보병(寶甁)이라고도 일컫는다.
정병은 본래 깨끗한 물을 담는 수병으로서 승려의 필수품인 18물(物)의 하나이던 것이, 차츰 부처님 앞에 정수를 바치는 공양구(供養具)로서 그 용도의 폭이 넓어지게 되었다.
불교의 정병은 인도에서 발생하여 불교와 함께 우리에게 전래된 것으로, 부처님 앞에 물공양으로 바치는 불기(佛器)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보살의 지물(持物)로서 구제자(救濟者)를 나타내는 하나의 방편이자 자비심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정병과 불·보살과의 관계는 왕자요 구제자요, 길상(吉祥)과 풍요를 부여하는 자로서의 이미지가 서로 복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관세음보살이 들고 있는 정병이다. 이 정병에는 감로수가 들어 있어 감로병이라고도 하는데, 관세음보살은 이 감로수로써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갈증을 해소해 준다.
정병은 관세음보살 이외에 미륵보살이나 제석천(帝釋天)·범천(梵天) 등도 들고 있다.
정병의 재료는 토기나 금·은 등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주로 청동과 도자기가 애용되어 왔다.
특히 불교를 숭앙하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부터는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불전공양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불가결의 불구로서 대량으로 조성되었으며, 양식적인 측면에서도 고려의 독창성을 아주 잘 보여 주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진 정병의 형태는 주둥이부분[注口部]·목부분[頸部]·몸체부분[胴體部]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을 다시 분류하면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긴 목에 나팔모양의 주둥이가 달려 있고 타원형의 몸체에 굽이 달려 있는 모양이다.
둘째는 긴 목에 테두리가 둘러져 있고 불룩 나온 배 위에 기다랗고 뾰족한 끝이 나와 있으며, 몸체의 넓은 어깨에는 주둥이가 나와 있는 형태로서 여기에는 뚜껑까지 갖추어져 있다.
첫째 형태의 대표적인 예로는 경주 불국사 부근에서 출토된 청동병(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이 알려져 있으며,
둘째 형태의 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 국보 제92호)을 대표로 들 수 있다.
문양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가장 특색 있고 독자적인 무늬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도자기와 청동제 정병에 공통적으로 포류수금문과 유로수금문(柳蘆水禽文) 등을 중심으로 한 연판문(蓮瓣文)·여의두문(如意頭文)·당초문(唐草文)·운문(雲文)·뇌문(雷文) 등의 여러 가지 문양이 각 부에 따라 장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각 부 중에서도 몸체에는 버드나무·갈대·부들·연 등 수생초(水生草)와 함께 오리·기러기·원앙 등 물가 생활에 관련이 깊은 소재를 배치함으로써 생동감 있고 조용한 물가 풍경을 주로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청동제의 정병에서 새롭게 보이는 은입사기법은 밀랍주조법(蜜蠟鑄造法)과 함께 청동기 전래 이후 급속하게 발전한 고려시대의 우수하였던 금속공예의 한 단면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의장적(意匠的)인 측면이나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을 뿐만 아니라 조형성(造形性) 또한 뛰어난 정병은 매우 존귀하게 취급되어 온 물병으로, 종교적인 특수목적을 띠고 주로 사찰에서 사용되었다
정병(淨甁)은 맑고 깨끗한 물을 담는 그릇으로 물 가운데서도 가장 깨끗한 물인 감로수를 담는 병을 말한다. 물을 담는 그릇이라하여 '수병(水甁)'이라고도 한다. 감로수는 중생들의 고통스러움이나 목마름을 없애주는 물이다. 관음보살이나 미륵보살, 제석천 등도 이런 병을 들고 있다.
정병은 부처님께 올릴 깨끗한 물이나 감로수를 담는 병이다. 정병은 <법화경>에 의하면 원래 승려가 반드시 지녀야할 18물 중의 하나였던 것이 점차 불전에 바치는 깨끗한 물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범어 군디카(Kundika)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음역하녀 군지(軍持) 또는 군치가(裙稚迦)라 하고 수병(水甁)이라고도 한다. 즉 물을 담는 병으로 물 가운데서도 가장 깨끗한 물을 넣는 병이다.
정병에 넣는 맑은 물 정수(淨水) 또한 중생들의 고통과 목마름을 해소해주는 감로수(甘露水)와도 서로 통하여 감로병(甘露甁) 또는 보병(寶甁)이라고도 일컫는다.
정병은 본래 깨끗한 눌을 담는 수별으로서 승려의 필수품인 18물의 하나이던 것이 차츰 부처님앞에 정수를 바치는 공양구로 그 용도의 폭이 넓어졌다.
불교의 정병은 인도에서 발생하여 불교와 함께 우리에게 전래된 것으로 부처님 앞에 물공양으로 바치는 불기(佛器)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보살이 가지는 것으로 구제자를 나타내는 하나의 방편이자 자비심을 표현하는 지물(持物) 구실을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정병과 불보살과의 관계는 왕자요 구제자요 길상과 풍요를 부여하는 자로서의 이미지가 서로 복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잘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관세음보살이 들고 있는 정병이다. 관세음보살은 감로수로써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갈증을 해소해준다. 정병은 관세음보살 이외에 미륵보살이나 제석천.범천 등도 들고 있다.
정병의 재료는 토기나 금,은 등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주로 청동과 도자기가 애용되어 왔으며 큭히 불교를 숭앙하던 고려시대에 와서는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불전공양에서는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불구로서 대량으로 조성되어 양식적인 측면에서 고려의 독창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우리나라 정병의 형태는 크게 두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긴목에 나팔모양의 주둥이가 달리고 타원형 동체에 굽이 달린 모양이며, 다른 하나는 긴 목에 테두리가 둘러져 있고 불룩 나온 배위에 기다할고 뾰족한 끝이 나와 있으며 동체는 어깨가 넓은 편인데 어깨에는 주둥이가 나와 있고 여기에 뚜껑이 있는 모양이다.
전자는 경주 불국사 인근 출토 청동병이 유명하며, 후자는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 등이 유명하다. 특히 은입사정병은 날씬한 모양과 치밀한 무늬로 보아 당대의 걸작에 속한다고 하겠다.
불전에 물공양으로 바치는 불기로서 정병과 불보살이 가지는 지물로서의 정병은 매우 많이 만들어졌고 또한 관정(灌頂)의식에서나 스님의 필수품인 18물의 하나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