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26일 수요일
『아이를 위한 돈의 감각』 베스 코블리너 지음 / 이주만 옮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빨리빨리
“대한민국 국민을 쿠팡의 노예로 길들이고 있다. 쿠팡의 빨리빨리, 대한민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우리 아빠를 죽였다.”
쿠팡 택배 노동자 고(故) 정슬기 님의 자녀가 쓴 편지를 보고 나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쿠팡 멤버십 탈퇴 버튼을 누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쿠팡을 이용하며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싶은 순간들이 있기도 했지만 내가 누리는 편리함에 비하면 찰나였기에 금세 잊었고 다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아빠를 잃은 초등학교 5학년 아이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문제를 모른 척 넘어갈 수 없었다.
나는 쿠팡을 애용했다. 똑같은 물건을 마트에 직접 가서 사고 집에까지 가지고 오는 시간과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더 싸게 빠르게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매력이었다. 처음에는 당장 필요한 물건을 급하게 사야 할 때만 쿠팡을 이용했다. 무게가 있거나 한꺼번에 많은 양을 사야 할 때도 쿠팡을 이용하는 것이 편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바로 집 앞에 있는 편의점이나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는 마트에서 살 수 있는 것도,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도 모두 쿠팡에서 샀다. 아이들과 문구점에 가거나 장을 보러 마트에 가는 일은 눈에 띄게 줄었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물건을 검색하고 스크롤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가격을 비교하느라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는 시간이 늘 뿐이었다. 젤리, 초콜릿, 과자 등 아이들 간식거리, 학습 준비물, 장난감, 책, 옷, 신발, 칫솔, 프라이팬 심지어 책꽂이 선반에 필요한 작은 볼트 하나, 세면대 배관 부품인 고무 패킹까지도 쿠팡에서 샀다. 쿠팡에는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이르면 당일 저녁이면 현관문 앞에 짠 도착한 상품은 그렇게 당연해지기 시작했다. 멤버십 요금을 월 2,900원에서 4,990원으로, 7,890원으로 인상할 때 한 번씩 ‘이런 식으로 길들이나. 안 되겠네. 그만 써야겠다.’ 했지만 ‘이번 달까지만. 어차피 이번 달 요금은 결제했으니 딱 이번 달까지만….’ 하면서 이용했다. 무료 배송, 무료 배달, 무료 OTT, 무료 반품까지 늘어나는 혜택에 오히려 쿠팡이츠, 쿠팡플레이까지 이용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쿠팡에 길들었다.
어떤 날은 상자가 뜯어지기도 하고, 포장이 영 엉성하기도 하고, 아무렇게나 내던져 놓고 돌아선 듯한 상품을 보며 ‘이게 뭐야. 너무하네.’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이렇게 많이 또 자주 시킨 나도 너무하기는 마찬가지네.’ 싶었고, 로켓배송, 새벽배송 시차를 두고 하루에도 두어 번씩 우리집을 다녀갔을 택배 기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상상하며 괜스레 민망함을 느끼기도 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을까?’ 조금만 생각하면 엄청난 노동 강도가 전제되는 일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잠자리에 들고 하루가 마무리되는 밤 10시 언저리, 몇 번의 터치로 당장 내일 필요하지도 않은 상품을 골라 사고 다음 날 아침 7시에 물건을 받기까지 나는 포근한 이불 속에서 아무 걱정 없이 쿨쿨 잔다. 그러는 동안 고강도 야간노동은 쉼 없이 진행된다. 혹시나 시간 안에 물건이 도착하지 못해 받게 될 불이익을 걱정하며 “로켓배송의 연료가 되어 개처럼 뛰고 있는” 택배 노동자가 존재한다. 열악한 노동 조건을 알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쿠팡에 취업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를 쿠팡은, 나는 잘도 이용한다. 또 한 번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 일하다 죽는다.”(『지금은 없는 시민』, 149쪽)
임상혁 녹색병원 원장(직업환경의학전문의)은 <쿠팡 심야 노동의 위험성과 공적 규제 방안 마련 토론회>에서 ‘연속적이며 고정적인 야간노동’은 육체적으로 강도가 높고 정신적으로는 긴장이 많은 업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노동은 너무 위험해서 어느 나라에서도 시행하지 않기 때문에 연속적이며 고정적인 야간노동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논문은 찾아볼 수도 없다고 밝혔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빨리빨리는 몸을 갈아 넣는 듯한 노동을 통해 대한민국에서 가능한 것이 되었고, 우리에게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오늘 주문한 물건을 내일 내 손에 쥐는 일이 언제부터 우리에게 당연했을까. 우리는 왜 이토록 빨리 살아가고 있는 걸까. 얼마나 더 빨라지려고 하는 걸까 두렵기도 하다. 빨라지고 편해지면서 놓치고 잃게 되는 것이 인권, 기다림, 자족, 그리고 사람이라면 더욱 두렵다.
스마트폰에서 쿠팡 앱을 지운 이후, 나는 습관처럼 물건을 검색하고 사들이는 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졌다. 확실히 덜 산다. 물건을 사고 들고 옮기는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크기를 내 몸으로 짐작한다. 수고로움을 느낀다. 온라인에서 물건을 아예 안 사는 것도 아니기에 이따금 내일이면 당장 내가 산 물건을 받아볼 수 있는 쿠팡이 그립기도 하다. 속도와 편리함을 따지자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뭐 그렇게까지 빨리 받아야 할 물건이 얼마나 될까. 내가 누리는 편리함이 누군가의 생명을, 단란한 가정의 일상을 앗아갈 수도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너무 익숙해져서 안 쓰면 엄청 불편하고 손해 보는 일일 줄 알았는데, 막상 안 쓰니 꼭 그렇지만도 않더라.
첫댓글 <아이들을 위한 돈의 감각>을 읽고 글을 쓰다 끝내지 못하고,
<고통 구경하는 사회>를 읽을 때 쓰고 싶었는데 쓰지 못했던 '쿠팡'에 대한 이야기를 썼어요.
오, 좋아요. 빨리빨리 속도를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생산성&효율-> 효율이야말로 자본주의 원리니까요. 돈의 감각과 통하는 듯!
물론 이 책에선 돈에 대해 전향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하지만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