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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19장 우리 하나님이 통치하시도다
19장의 중심점은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6) 한,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 회복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기 위해서는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7) 한, “어린 양의 혼인”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어린 양의 신부가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창세기 1-2장으로 인도해줍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천지 만물이 창조되었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의 대상으로 사람을 지우시되, 아담과 하와를 짝지어(혼인)주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건설되었던 것입니다. “통치”란 인격적인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주관하시나 인간은 통치하십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함으로 파괴되었던 것이 어린 양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재결합(혼인)이 됨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서는 이 지점에서 처음으로 “할렐루야”가 비로소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와 또 다른 잔치가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건설을 대적하던 자들이 멸망을 당함으로 벌어지게 된 육식조(肉食鳥)들의 잔치(19)인데 본문은 이를 대조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는 “구원”이요, 또 다른 잔치는 “멸망”인 것입니다.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10) 어린 양의 혼인잔치
둘째 단원(11-16) 백마를 탄자와 군대
셋째 단원(17-21)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잡힘
첫째 단원(1-10) 어린양의 혼인잔치
① 바벨론에 대한 심판이 종료되자, 19장에서 최우선적으로 울려 퍼진 것이 “할렐루야”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할렐루야가 처음 등장하는 곳이 이 지점에서인데 모두 네 번이나 발하여지고 있습니다.
㉠ 첫째로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1상) 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이 누구들인가? 이어지는 말씀으로 볼 때 천군 천사들로 여겨집니다.
이들은 두 번 “할렐루야”를 외치는데 첫 번은,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1) 하고, 하나님의 구원행사를 찬양하고, 두 번째는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2) 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또다시 변증하면서, 두 번째로 “할렐루야”(3) 합니다.
㉡ 다음은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4) 하고, 화답하며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자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5) 하십니다.
㉢ 세 번째로,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룃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6) 하는 “통치”가 등장합니다.
② “통치(統治)하시도다” 하는 말씀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하는 것과, “할렐루야”의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것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할렐루야”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시편 104편인데,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하면서, “할렐루야”(104:35)가 발하여집니다.
유대인들은 시편에 수록된 15편의 할렐루야 시편을 유월절과, 초막절에 낭독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성취를 본문에서 대하게 됩니다.
㉠ “유월절”이란,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1)한 “구원하심”이며,
㉡ 초막절이란 광야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6) 한, “통치하심”으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할렐루야”는 하나님의 “통치”(統治)하심에 돌리는 찬양인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통치”라는 주제가 너무나 귀하고 중요하기에 좀 더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이점에서 하나님의 주관하심과 “통치”를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주관하시는 “천지의 대주재자”(행 4:24)이십니다. 그런데 통치는 인격체와 결부되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최초의 통치 영역은 에덴 낙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 하와가 이를 거부함으로 통치가 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홍수심판 때의 통치 영역은 방주 안뿐입니다. 출애굽 당시는 어린 양의 피가 뿌려진 대문 안이 통치영역이었습니다. 구약시대는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세워주신 메시아언약 안이 통치영역이었는데 그들이 이를 배신하고 우상을 숭배하자 하나님께서는,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렘 11:9) 하시면서, “나는 네 대적이라”(렘 21:13)는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중요한 점은 현대교회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느냐 하는 점이 문제인 것입니다.
④ 이런 구속사의 맥락으로 볼 때 바벨론을 심판하신 후에,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6)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이 되었다는 점을 나타내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치하시도다”는 선언이 무엇으로 이어지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7) 한, 어린 양의 “혼인”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첫째는 성경의 마지막 책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혼인”이라는 이미지를 도입하고 있는 것은 첫 창조에 대한 회복이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이루어진 혼인(아담과 하와, 하나님과 백성 간)이 3장에서 파괴당하게 되었는데, 이 연합이 회복되게 되었음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점이 이사야서에도 나타나는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하면서,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결혼한 여자)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사 62:3-4) 한 예언이 본문에서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2:19-20) 하신 약속의 성취인 것입니다. 고멜과 같은 음녀인 우리에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장가든다” 하심이 어떻게 가능해진단 말인가?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즉 공의와 사랑으로 장가들겠다 하시는데 주님께서 담당하신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⑤ 8절에는 신부의 단장이 나타나는데,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합니다. 통찰력이 요구되는 대목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사와 인간의 책임이 함께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칭의가 분명합니다. 칭의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설 수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에 속한 성화를 가리키는 것도 분명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결코 모순되는 말이 아닙니다. 나 같은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하여졌는가를 진정 알고 믿는 자라면 그 의의 옷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의로운 삶을 살려고 사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만 세마포는,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다”고, 수동적(受動的)으로 입혀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점을 이사야 선지자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고 말씀합니다.
또한 성화(聖化)의 옷이기도 합니다. 이는 14:4절에서 “이 사람들은 여자(음녀, 17:1)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한, 신앙의 “정절”(14:4)을 지킨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순결이 먼저가 아니라,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다”는 칭의가 먼저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는 의미는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⑥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9상) 합니다. 그렇다면 신부는 누구고, 청함을 받은 자는 누구란 말인가? 신부와 청함을 받은 자란 동일한 성도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구분을 지어서 말씀하고 있는가? 신부라고 하면 오직 “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풍기게 되지만, 청함을 받은 자는 많을수록 경사라는 차이 때문입니다. 형제는 신부이면서 동시에 청함을 받은 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고도 감격스러운 것은 신랑을 가리켜 “어린 양”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형제는 “어린 양”하고 결혼하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여기쯤 와서는 주님을 “신랑”이나 다른 호칭으로 부를 만도 한대, 요한은 계속 “어린 양”을 놓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벧전 1:18-19) 되었음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계시록을 상고하면서 다른데 한눈을 팔 것입니까?
⑦ “기록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9) 합니다. 계시록에서는 중요한 대목에 이를 때마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21:5) 하십니다. 이런 뜻입니다. 만일 이 말씀을 지켜주시지 않는 다면 “기록 된 말씀”을 증거로 제시하여 책임을 추궁해도 좋다는 그런 뜻이 함의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너무나 감격해서 그랬을까요?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10상)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22:9절에서도 되풀이 되는데 그러자,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10), 즉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기록함은 자신을 견책하려는 의도에서라기보다는 “천사 숭배”(골 2:18)와 같은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교회를 경계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또한 말씀을 “대언하는 자들”을 겸손케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⑧ 중요한 변화를 한 가지 말씀드려야만 하겠습니다. 그것은 계시록에 “생물”이라는 말이 20번, “장로”라는 말이 10번 정도 등장하는데, 19:4절에서 “24장로와 네 생물이, 아멘 할렐루야”를 돌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계시록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어린 양의 혼인 기약”, 즉 신부가 등장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준비”(7)되었는데도, “24장로와 네 생물”이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월권행위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24장로와 네 생물이 누구들이며, 무엇이냐 하는 문제로 고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22:3-4) 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상징적인 존재로 보아 족한 것입니다.
둘째 단원(11-16) 백마를 탄 자와 군대
①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11) 합니다. 그러면 백마를 타고 등장하는 이분이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 눈이 불꽃같고”(12, 1:14, 2:18),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15, 1:16) 등의 묘사와, 그 이름을 “하나님의 말씀이라(13),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16)고 말씀하는 것으로 볼 때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14) 합니다. 그러면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란 누군가? 이는 천사로 보기 보다는 17:14절에서,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한 성도들로 보아야만 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땅에서 올라온”, 즉 땅에 속한 군사요, 성도들은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하늘의 군대”인 것입니다.
② 그런데 학자들은 이 장면을 계시록에서 주님의 재림하시는 장면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계시록의 구조와 기록목적을 도외시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계시록의 기록목적을 요약을 한다면, 1장에서 일곱 별을 잡으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으로 나타나신 주님은, 2-3장에서 일곱 교회에게 “이겨라, 이겨라” 하고 격려하시고, 4-19장까지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는 전사들을 진두지휘하시다가, 20-22장에서는 원수들에게는 보응(報應)을, 이기는 자들에게는 보상(報償)이 주어지는 것이 계시록의 구조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계시록은 “내가 본 천국”이나, 주님의 재림 장면을 보여주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투하는 교회에 주신 병법인 것입니다. 요한은 1:7절에서 주님은 백마가 아닌,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하면서, 싸우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고 증언했습니다.
어찌하여 “애곡하리라” 하는가?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살후 1:7-9) 되기 때문입니다.
③ 그런데 19:11절에서는, “백마를 타고” 등장하셔서,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고, “싸우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더욱이나 7절에서는,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다”고 말씀하고는, 등장하는 주님은 신랑의 모습이 아닌 “피 뿌린 옷을 입고(13),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는”(15) 야전군 사령관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보여주시는 의도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점에서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입고 있는 “군복”(軍服)과 어린 양의 아내가 입고 있는 “예복”(禮服)(8)을 대조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똑같이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형제는 “세마포”를 입고 싸우는 군대를 본 적이 있습니까? “어린 양의 혼인 잔치”(7-9)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 문맥인가를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14) 한, “하늘 군대”와 연결되어있는 문맥인 것입니다.
④ 여기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의도를 깨닫게 되는데,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된 그의 아내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함께 싸워야 하는 군대라는 점입니다. 여기에 19장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마포를 입고 있는 이들은 하나님 나라 군대들(14)이면서, 동시에 세마포를 입고 있는 그의 아내(8)들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점을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롬 8:17)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19장을 통한 도전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와 함께 전쟁에도 참여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하늘의 군대들이 입고 있는 “세마포”에 대해서 한 말씀 부언을 해야만 하겠습니다. 이 “세마포”를 성화로 여긴다면 군복으로는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적탄을 막아줄 갑옷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위에서 난,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주를 따를 군사는 한 사람도 없게 될 것이요, 이를 성화로 여긴다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스가랴 3장에 등장하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모습처럼 더러운 옷을 입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마포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한 칭의로 보아야만 안전합니다. 이 하늘 군대들은, 17:14절에서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과 동일한 전사들이요,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들을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12:11) 한 전사, 바로 형제입니다.
1:16절과, 2:1절에서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라 하심을 상기하십시오. 그 주님은 계시록 내내 십자가 군병들 사이에 계시면서, 그들을 오른 손에 붙잡으시고, 선봉에서 싸우시는 야전군사령관이시라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⑤ 이점이 왜 중요하냐 하면 19장의 구조와 의도를 바르게 파악을 해야만 다음 장에서 언급하는 천년왕국(20장)에 대해서도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백마”(白馬)는 승전(勝戰)한 장수가 타고 입성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을 “백마와 탄 자”로 묘사하고 있는 의도는 주님의 <재림>을 말씀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군대들과 함께 싸우시는 대장(大將)이라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점이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다”(13)는 것과, 그를 따르는 자들을 “천사”라 하지 않고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라고 말씀하면서 그들도 “백마를 타고 따르더라”(14)고 말씀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재림하시는 주님이 “피 뿌린 옷”을 입고 오시겠습니까?
⑥ 그렇다면 이런 물음이 제기됩니다. 계시록에서 주님은 언제 어디서 재림하시는가?
㉠ 6:16-17절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한, 이 장면도 재림의 날로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 또한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아마겟돈으로) 모으더라”(16:14) 한, 이 “큰 날”도 바로 “그 날”이요,
㉢ 또한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19:6-7) 한 “기약이 이르렀다”는 날도 주님의 재림의 기약(期約)으로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감히 말씀드립니다만, 계시록에는 주님의 재림하시는 장면은 없고 다만 전사들의 대장으로 등장하실 뿐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점을 구속사라는 넓은 지평으로 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출애굽 당시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서는 바로의 군사들이 추격해 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모세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고 격려합니다.
모세는 죽기 전에 행한 설교인 신명기에서,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라”(신 1:30) 하면서,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며 여호수아는 네 앞에서 건너갈지라”(신 31:3)고 격려합니다.
여호수아도 고별 설교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수 31:3) 하면서,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수 31:10)고 격려합니다.
⑦ 본문에서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하면서,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19-20) 하는 장면은 주님의 재림의 장면이 아니라 전사들과 함께 싸워주시는 주님이시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재림에 관하여는 첫 장에서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1:7) 말씀하고, 마지막 장에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22:12) 하고, 약속으로 주어질 뿐입니다. 만일 주님의 재림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면 보다 더 장엄하고 영광스럽게 묘사했을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느냐 하면 계시록이 주님의 재림 직전의 어느 짧은 기간에 되어 질 일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줍니다.
그렇다면 계시록의 기록목적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유다서의 기록목적이, “성도에게 단 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 1:3)에 있음 같이, 계시록도 전투하는 교회에게 “힘써 싸우라, 이기는 자는, 이기는 자는” 하고 격려하시기 위해서 기록이 된 것입니다.
셋째 단원(17-21)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잡힘
①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17-18) 합니다.
그러면 육시조의 잔치 상이 된다는 이 시신들은 누구들인가?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킨다”(19) 한, 사탄 진영의 군사들입니다. 이는 에스겔 39장의 반영인데,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과의 전쟁에서 죽은 자들을 “내가 너를 각종 사나운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 먹게 하리니”(겔 39:4) 합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20:7-8) 한, 동일한 전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전쟁은,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18:2) 한 18장에서 다 끝난 줄로 알고 있는데, 또 전쟁을 일으킨다니, 도대체 계시록에서는 누구와, 무엇을 위한, 몇 번의 전쟁이 벌어지는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이점에 명백하지 않으면 혼란을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② 구속사의 전반에 있어서 전쟁은 크게 세 방면으로 전개됩니다.
㉠ 첫째는 그리스도와 사탄 간에 벌어지는 대표자 간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 대한 예표가 모세와 바로와의 싸움인데, 모세는 그리스도의 예표요, 바로는 사탄의 대리자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셔서,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8:1) 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하십니다. 바로는 완강히 대항하다가 유월절 양의 피로 결정타를 맞게 되는데 주님께서도 유월절 어린 양으로,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5:9) 합니다. 우리는 이 싸움을 12장에서 본 바입니다.
㉡ 둘째로, “예수의 증거를 가진(성도들) 자들”(12:11, 17)과, 사탄의 하수인들인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13:1, 11)간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두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박해(13:7)와, 미혹(13:14)으로 공격을 해오면, “인내로 믿음을 지키는”(13:10, 14:12) 방어적인 싸움과, 둘째는 적극적으로,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12:11) 한, 순교를 당하면서 복음을 증언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나가는 공격적인 싸움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싸움은 성도들이 싸워야 할 싸움인데, 이 싸움은 주님의 승천하심으로부터 다시 오시기까지 전 기간에 걸쳐서 싸워야하고 승리해야 할 전쟁인 것입니다. 이점에서 명심해야 할 점은 성도들의 싸움은 주님께서 대표자 간의 싸움에서 승리해 놓으신 싸움을 싸우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 셋째는 최후로 사탄을 정복하는 전쟁인데 이는 주님의 재림으로 성취하게 되는 최후심판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 110:1) 한 원수 사탄을 발등상시키는 일입니다.
이처럼 계시록에 등장하는 여러 번의 전쟁은 세 방면의 범주에 들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 두 번째 싸움, 즉 “예수의 증거를 가진(성도들) 자들”(12:11, 17)과, 사탄의 하수인들인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13:1, 11)간의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남은 것은 주님의 재림하심으로 시행하게 될 최후심판 뿐입니다. 이점에 확고하지 않으면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③ 이런 맥락에서 지금까지 여러 번 등장한 전쟁에 대한 정리(整理)가 필요하게 되는데, 이는 모두가 두 번째 유형에 속하는, 즉 사탄의 하수인들과 그리스도의 증인들 간의 싸움인 것입니다. 이점에서 유념할 점은 그 배후에서 “용과, 어린 양”이 함께 싸워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재림하실 때까지 싸워야 할 동일한 싸움을 강조하려는 주제에 따라 표현을 달리해서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6장의 전쟁과 19장의 전쟁을 대조해 보면 먼저 16:13절에서 “용, 짐승, 거짓 선지자”가 등장하여, “세 영이,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16) 합니다. 그런데 이들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바벨론”이 마지막 재앙인 “일곱째 대접심판”에 의하여 멸망하게 되고, 그러자 성전에서 큰 음성으로 “되었다”(17) 하고 심판이 끝났음을 선언합니다.
그런데 19:20절에서도, “짐승이 잡히고,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다”고 말씀함을 볼 때 이것이 동일한 전쟁에 대한 반복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일 별개의 사건이라고 말한다면 “보좌로부터 되었다”(16:17) 하신 것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 되고 맙니다.
④ 그렇다면 “되었다”고 선언한 이후에 전개되고 있는 17-20장의 내용은 무엇인가? “바벨론, 짐승과 거짓 선지자, 용”의 멸망을 좀 더 확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 17-18장에서는 “바벨론”의 멸망을 확대해서 보여주고 있고,
㉡ 19:11-21절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에 대한 심판의 상론이고,
㉢ 마지막으로 20:7-10절에서는 우두머리인 “용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의 멸망을 최종적으로 말씀합니다.
⑤ 이점에서 명백히 해두어야 할 점이 있는데 영적 전쟁이란 성부 하나님과 사탄 간의 싸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손상을 입히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허용작정 중에 이루어지는 싸움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벗어난 체 일어나는 일이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⑥ 또 명심해야 할 점은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사탄 간의 싸움도 12장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오시기 때문에 가능하여진다는 점입니다. 이는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 하신 원 복음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로부터 재림하시기까지의 전 기간에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들 속에 성령으로 내주(內住)하셔서 이 싸움을 계속 싸우고 계신다(엡 2:17)는 각성(覺醒)이 필요합니다.
⑦ 그러므로 영화로우신 몸으로 재림하시는 주님께서 짐승이나 거짓 선지자들(사람들)과 싸우신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그것은 심판(審判)입니다. 6:15-17절에서,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면서 절규하는 장면을 상기하시 바랍니다.
이 말씀은 본문 19:18절의,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는 진술과 상통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전 천년설”, 즉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천년 동안 왕 노릇하시다가 천년이 찬 후에 또 다시 “곡과 마곡”(20:7-8)과의 전쟁을 벌인다는 주장은 주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전사들이여, “선을 행하다가 피곤하고 낙심”이 되십니까? “보라 백마와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11) 하신 장면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형제도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는”(14) 전사라는 점을 명심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전쟁은 “잠시” 동안이지만 어린 양의 아내로서의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