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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敎主制(衆議制)에 對한 葛藤으로 因한 紛糾와 合同(5-5)
5. 17에 삼원장(三院長) 선발에 대한 이견(異見)이 생겨 합의를 못 보게 되자 연원회를 개최해놓고 중앙 교직의 직제에 대한 합의에 노력하였으나 끝내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5. 23. 오전 10시 30분에 최준모가 이군오에게 웃으면서 답하였다. 이에 이군오는 사무실과 집기(什器)를 분배하자고 하여 최준모가 양방(兩方)에서 위원 3인씩을 정하여 하자고 하여 합의를 보았다. 각 파측 즉 총부측(구파)과 상대방(彼側/신파)에서 선정(選定)한 6명이 합의하여 사무실은 중앙으로 반분(半分)하여 동편은 총부에서 서편은 피측에서 사용키로 하고 집기는 무엇이고 반분하고 채무(債務)는 5. 19로 한하고 결산하여 반 분씩 부담하고 평양과 함흥출장소에 있는 금전(金錢)은 비용을 제한 금액을 반분하기로 하고 구파는 신용구의 작년 하반기와 금년 하반기까지의 기도미대(祈禱米代)는 상납하기로 하였다. 5. 26에 양방 위원이 모여서 사무실과 집기를 조사하여 반 분씩 배분하고 구파는 천도교총부(天道敎總部) 그대로 하고 피측은 천도교본부(天道敎本部)라고 간판을 걸다./분란(紛亂/分裂)의 구체적 내용과 과정에 대하여는 PP.140-144. 참조. 7월에 총부에서 청년운동으로 보국당(輔國黨)을 창당하여 7. 7.에 건당선언(建黨宣言)을 하였다. 건당선언과 성명서의 전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PP.144-146. 참조.
/구파측 기록 『천도교 정통연원 약사』 P.229. 에서 참조.
/구파측 기록 『천도교 정통연원 약사』 PP. 229.-230.에서 참조.
/구파측 기록 『천도교 정통연원 약사』 PP. 229.-230. 에서 부분 발췌하여 요약기술.
/구파기록『東學 天道敎略史』 P.146.에서. 1.10 총부에서 우이동(牛耳洞) 봉황각(鳳凰閣)에서 연성기도회(煉性祈禱會/1.11.-1.末日. 21日間) 개최. 21명 참가. 4.2. 정기대회를 개최하고 총부임원을 개선하였다. 8.14. 구파측 청년 數十人이 반도숙청단(反徒肅淸團)을 조직하여 신파측 천도교본부란 산판을 철거하는 한편 간부 일동을 교회로부터 축출(逐出)하였던바 기중(其中) 임문호(林文虎)와 이우영(李宇榮)외 4,5인이 미군정관(美軍政官) 3,4인을 대동(帶同)하고 미군세력하(美軍勢力下)에 떨어진 간판을 다시 달게 되다. 9.1.에 천도교(天道敎) 반도숙청위원회(反徒肅淸委員會)의 이름으로 숙청단의 성명서를 발포(發布)하다. 성명서 원문은 PP.147-148.참조./구파측 기록에서는 9월 1일 자로 천도교 반동숙청위원회(反動肅淸委員會)의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포하였다. 구파측에서는 이 숙청단의 성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이 숙청단의 단원들이 남한의 구파 청년들이 아니고 대부분의 숙청위원들이 서북청년으로서 북한에서 신파들이 구파교인들을 설득하려다가 듣지 않으므로 남한과 연락하는 반동분자들로 몰아 위협하여 견디다 못해 월남한 교인들이었다. 그들은 남한에서도 신파들의 만행을 보고 숙청하려 했던 것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천도교 정통연원 약사』 PP. 235.-238.에서 참조.
/구파기록 『東學 天道敎略史』 P.148.에서. 1948. 4 .4.일에 신파계열이 제 4세 법통(第四世法統)을 시인(是認)하고 무조건 합동을 요청함으로 총부(구파)측에서는 차(此)에 응(應)하여 합동대회를 개최하고 중앙총부 임원들을 개선(改選)하였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구파기록 『東學 天道敎略史』 P.149.에서. 1952.4.3.에 피란 중에 한강(漢江) 도강(渡江)이 불능(不能)하여 부득이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언주면내(彦州面內) 곡리(谷里) 김정은(金正恩)의 집에서 춘암상사 환원기도식을 봉행(奉行)하였다. 4.4.에 김정은의 집에서 전국대회를 6.25사변이후 처음으로 개최하고 임원을 개선하였다. 4.5.에 천일기념 예식(禮式)도 경기도 광주 김정은의 집에서 거행하였다.
/구파기록 『東學 天道敎略史』 P.164.에서. 1965년 1. 27. 구파의 핵심 지도교역자인 장로(長老) 한순회(韓順會/1885-1965)가 환원하여 구파의 구심점(求心點/핵심적인 인물)이 이종해(李鍾海/1904-?)가 중심적인 지도교역자가 되었다. 4. 5. 천일기념을 마치고 구파교인 150여 인이 이종해 가에서 집합하여 천도교 중앙총부 수습위원회를 조직하고 동 위원을 선출하니, 이종해, 황생주, 송순영(宋淳永), 최병제, 안기술(安奇述), 정운채, 배효준(裵孝俊) 안종택(安鍾澤), 구광조(具光祖), 주병준(朱炳俊), 나태화(羅泰華), 최중렬(崔重烈), 고문해(高文海) 등 13인이오 이 중에서 위원장을 선출하니 이종해가 당선되었다. 다음으로 년월성미를 그간 지방교구에 유치(留置)하였으나 종금(從今)이후로는 한 곳으로 집중할 필요가 있으니 우선 진체구좌를 수습위원회 명의로 주소는 이종해 사가(私家)로 할 것을 토의결정하였다. 이유는 중앙총부 주소로 하면 중간에 낙실(落失)할 우려가 있으니 이와같이 결정하였다더라. 4. 6.에 전국대회도 구파에서는 1인도 불참리에 개최되었다. 7. 27.에 작년 7. 1일자로 대회무효소송 제기한 것은 원고는 3개월 이상 성미(誠米) 불납(不納/납부하지 않음으로)으로 교인자격을 상실하였다 하여 각하함으로 고등법원에 항고를 제출하였다. 8. 14. 한순회가에서 구파교인 백여 인이 집합하여 그간 교회 상황에 대하여 토의한 바 있었다. 시(時)에 수습위원장은 사정에 의하여 사의(辭意)를 표명하였으나 그 자리에서 수리(受理)치 아니하였다. 11월 1일부터 21일간 어육주초를 금하고 특별기도를 봉행하였고 12. 24. 인일기념식을 마치고 고(故) 한순회 가에 경향(京鄕) 교인 약 80여 인이 집합하여 교회수습대책을 좌와 같이 토의 결정하였다.
一. 종금이후로 중앙에서 여하한 전국대회가 개최된다하더라도 무조건 소집통지가 오기 전에는 그들의 말하는바 성미를 납입하여 교인자격을 얻은 후 대회에 참석하라 함을 거절할 것.
二. 년월성미(年月誠米)는 일개(一個) 소(所/場所)에 상납키로 할 것.
三. 위원장은 사의(辭意)를 표명하였으나 내년 4월 천일기념시 까지 계속해줄 것 등이다./구파기록『東學 天道敎略史 附 叢書』는 P.165.로 대미(大尾)을 장식(粧飾)하였다.
■ 구파기록 중에 정사(正史)라 할 수 있는 『東學 天道敎略史 附 叢書』는, 포덕 131(1990)년 4월 4일에 龍潭淵源 編者로 간행된 인쇄본으로 국판 326페이지로 된 춘암상사를 중심으로 기술된 구파기록으로, 필자가 신구파의 기록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느낀 것은, 통합된 교단의 발전보다는 구파의 수장(首長)인 박인호(朴寅浩)를 제 4세 교주로 추앙하려는 미명(美名)아래 매우 편향(偏向)되어 있는 구파만의 교단사(포덕1-포덕102/1860-1961년)라 할 수 있다. 이 교단사의 머리말에서 구파의 교단사의 기술내용들의 자료의 수집과 정리과정에 대하여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신파의 『天道敎創建史』의 마지막 기술연대 이후의 기록은, 구파 입장에서의 매우 편향적(偏向的)이고 독선적(獨善的)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 약사 326페이지 중, PP,1-165.까지는 교단사이고. PP,166-326.까지는 신성사님의 법설을 수록하고 있다. 수록의 순서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天道敎經典』과 『天道敎創建史』 『天道敎百年略史 上卷』그리고 『천도교약사』와는 많이 다르다. 『東學 天道敎略史 附 叢書』의 목차(目次)를 보면, 第一編 天統, 第二編 地統, 第三編 人統, 第四編 道統, 第五編은 無題로 되어있다. 이 고단사에서, 天, 地, 人統은 수운대신사, 해월신사, 의암상사를 의미하고 춘암상사에 관련된 기술은 도통(道統)이라고 구분하여 기술하였고, 신성사님의 법설은 第一編 水雲大神師, 第二編 海月神師法訓, 第三編 義庵聖師法訓, 第四編 春庵上師法訓이라고 하여 법설(法說)을 법훈(法訓)으로 기술하고 있다./目次 參照.
그리고 양해를 구할 것은, 구파기록인 『東學 天道敎略史 附 叢書』 기술전후의 구파의 교단사라 할 수 있는 다음 자료를 사용하여 참조하였다. 는 것이다.
『天道敎 精神史』 天道敎京忠全淵源. 1981.
『천도교 정통연원 약사/天道敎 正統淵源 略史』 천도교 정통연원회. 1992.
『東學 天道敎略史 附 叢書』의 기술이 포덕 102(1961)년으로 마쳤으므로 이후의 상당기간 동안 구파의 활동을 알 수 없다가 위의 두 권의 책의 기술에 따라 포덕 115(1974)년부터 포덕 132(1991)년 말까지의 활동 내역을 알 수가 있었다.
포덕 102(1961)년 말부터 구파기록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어 구파의 신앙과 활동상황을 상고(詳考)할 것이 없어 구파계열의 활동상황을 알 수는 없었으나 1960년을 전후하여 신파계열(최 린 계열)이라 구파에서 공격하는 현재의 천도교중앙총부와의 갈등으로 소송 건이 있었을 때 원고측이었던 구파게열의 제소자(提訴者)들이 교인의 의무인 연월성(年月誠)을 납부한 사실이 없어 교인의 자격이 없으므로 소송의 결격사유가 되어 패소(敗訴)한 일이 있었다. 1960년대 전후까지 구파계열의 연월성을 총부에 납부하지 않고 구파가 따로 관리하고 있었다. 이 패소사건으로 인하여 상당수의 교인들이 개별적으로 중앙총부에 연월성을 납부하거나 연원조직과 지방교구를 만들어 납부한 경향이 많아져 수년이 지나자 구파계열의 지도자들 중에는 중앙총부의 원주직에 선임되어 교단의 중심인물로 교단 발전에 기여한 원로들도 있었다. 1960년대를 전후하여 구파의 중심인물들이 다수 환원하게 되었고 마지막까지 구파계열의 중심인물로 교인들을 이끌어 왔던 한순회(韓順會), 이종해(李鍾海) 마저 환원하게 되자 퇴행(退行)을 자초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포덕 110(1970)년대 초까지 유명무실하게 된 구파계열의 교인들은 재가교인(在家敎人)들이 되어 일부 중견교역자 중심으로 모여 신앙생활을 계속하다가, 춘암상사 앞에서 입도했고 해암(海菴)이란 도호를 직접 받았으며 화암(化菴) 최준모(崔俊模)의 지도를 받았던 박상익(朴相益)이 중심이 되어, 포덕 115(1974)년 8월 5일 새벽꿈에 춘암상사의 현몽(現夢)의 말씀을 듣고 통일운동을 시작함으로써 구파의 조직정비가 이루어졌다./ 이상 1960년대의 구파계열에 관한 기술은, 필자가 천도교중앙총부의 직원으로 신구파의 갈등수습에 심부름꾼으로 관여한 적이 있고 교화관서를 거쳐 신인간 주간과 무임소 종무위원으로 근무하였기 때문에 그때의 신구파의 정황의 대략을 기술한 것이다./박상익의 내력에 대한 것은, 구파측 기록 『천도교 정통연원 약사』 PP. 244.-246.에서 참조.
■ 『천도교 정통연원 약사』 PP. 350-376.에서 사진으로 된 열 세장 반의 각종 기사를 참조할 수 있는데, 소화 13(포덕 79/1938)년 5월 1일자 매일신문의 ‘天道敎舊派一部의 不穩陰謀事件全貌’란 기사부터 포덕 132(1991)년 12월 일자 천도교정통연원 대표 해암 박상익의 명의로, 『宗敎新聞』 1995년 12월 5일(수요일/제 955호)자 신문에 게재된 ‘後天開闢宣言書’까지에서 천도교정통연원의 대내외 활동을 1974년부터 1991년까지 18년간의 각종 신문에 게재된 각종 기사와 광고를 통하여 활동의 의미와 주장 그리고 실행의 전부를 알 수 있다. 보다 구체적인 사업의 활동내용은 天道敎京忠全淵源이 布德 122(1981)年에 刊行한『天道敎精神史』에 기술되어 있다.
포덕 116(1975)년 구파계열의 박상익(朴商益)은 교회를 부활시켜 통일운동을 하려면 입교식의 제도부터 고치도록 해서 법통을 바로잡아 연원의 정통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이 일을 함께 추진할 수 있는 김인선(金仁善)이 필요하였다. 박상익이 김인선을 협력자로 정하게 된 것은, 김인선이 어느 날 강서를 받는 광경을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보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박상익은 화성군 송산면 사강리에 사는 김인선을 찾아가 “신비(神祕) 공개니 오늘 새벽에 받은 강서를 내 놓아라”고 하니 통일운동을 하라는 강서를 받았다고 하면서 같이 하자고 해서 두 사람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통일운동을 같이 하기로 굳은 약속을 하고 포덕 115(1974)년 8월 14일 지일기념식을 기하여 박상익과 김인선은 이종해(李鍾海), 한정기(韓正琦), 황생주(黃生周) 등 세 장로를 만나 “통일 선언을 만천하에 선포하자”고 제의하고 천사님의 감응을 받기 위하여 먼저 1주일간 연성을 하자고 하여 대성리에 있는 이종해의 별장에서 10인(박상익, 김인선외 8인)이 제 1회 연성(포덕 115(1974)년 9월 11일부터 17일까지)을 하였다. (『天道敎精神史』 PP.54-60.에 의하면 제 1회 연성 이후 제 13회(포덕 120(1979)년 12월 27일-포덕 121(1980)년 1월 16일)까지 이어진 것으로 200명 가까이 이 연성에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박상익과 김인선은 통일선언을 용담연원회의 공의(公議)로 선포하겠다는 의사를 위 세분 장로에게 수차례 진정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자 동년 12월 23일에 노량진 수도원에서 개최된 전체교인 간담회에서 이 안건을 제출하여 의논한 결과 먼저 통일운동에 힘쓸 것을 다짐하는 내용을 공포(公布)하고 통일선언을 선포하되 먼저 21일간의 연성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포덕 116(1975)년 1월 5일 동아일보가 광고탄압으로 곤란을 겪을 때 용담연원회를 대표해서 외 2인이 동아일보사를 찾아가 성금 3만원을 전달하고 다시 광고료 5만원을 내어 1월 7일자 동아일보에 천도교용담연원회 명의로 “만천하(滿天下)에 고(告)한다”라는 제목으로 게재하였다. 최병제가 직접 문안을 작성한 “만천하(滿天下)에 고(告)한다.”는 선언문의 전문은 /구파측 기록 『천도교 정통연원 약사』 PP. 247.-248.에서 참조.
포덕 116(1975)년 2월 14일 박상익과 김인선은 다음과 같은 요강(要綱) 3 장(章) 제사하면서 통일을 선언하자고 제의하였다.
一. 인내천주의와 사인여천윤리를 실현하기 위하여 교정일치(敎政一致)로 나간다.
一. 인내천주의와 사인여천윤리로 남북통일을 하기 위하여 범국민회의(汎國民會議)를 구성한다.
一. 인내천주의와 사인여천윤리로 세계를 통일하기 위하여 새로운 국제연합기구(國際聯合機構)를 우리나라에 둔다.
이 제의를 토의하는 과정에서 선언의 시기가 맞느냐 안 맞느냐하는 것과 오늘날과 같은 사회환경에서 할 수 있겠느냐 에 대해서 찬반양론이 있었으나 비록 여건은 어려운 환경이지만 통일선언서를 작성하여 3월 10일 대신사님의 순도일에 선포하기로 결의하여 그 안에 제 3회 연성을 하고 연성을 한 사람들 중에서 49인을 선정하여 각자 1만 원의 성금을 내어 동아일보 1면에 5단 광고를 내기로 결정하고, 선언식을 의암성사님 묘소 앞에서 하기로 하였다. 4원 4일에 노량진 수도원에서 논의한 대로 선언서에 서명한 49인 전원이 제 4회 연성(7회에 나누어 함)을 마치고 6월 1일 오후 5시에 노량진 수도원에서 49인 회의를 소집하여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종교통일선언서를 선포하기로 네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결의하였다.
첫째. 한국종교협의회를 통하여 종교협의회 명의로 할 것.
둘째. 동학계통을 통하여 전동학계종단 명의로 할 것.
셋째. 천도교 중앙총부를 통하여 전체 천도교 교인 명의로 할 것.
넷째. 이상 세 가지 방법이 한 가지도 안 통하면 용담연원회단독 명의로도 좋으니 하자는 결론이었다./통일선언서 원문은 /구파측 기록 『천도교 정통연원 약사』 PP. 251-256.과 종교통일선언서는 PP. 258-261. 에서 참조.
제 5회 연성을 마치고 12월 23일에 노량진 수도원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때에 천도교중앙총부에서 12월 21일 신덕순 감사원장이 교령이하 몇 분을 징계한다는 선언을 발표하자 최덕신 교령이 감사원을 해체한다고 비상선언을 하여 내분이 일어나 분규가 표면화되었다. 이 분규에 대하여 논의를 하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다음해 2월 20일에 노량진 수도원에 다시 모여 ‘천도교 통일을 제언한다.’ 라는 제목으로 전국 교인들에게 최병제가 문안을 작성하여 배포하기로 하였다. 이 전문은 /구파측 기록 『천도교 정통연원약사』 PP. 262-266.에서 참조 /구파측 기록 『천도교 정통연원약사』 PP. 246.-266. 에서 부분 발췌하여 요약 기술함.
■ 『천도교약사』는 총 574페이지로 된 교단사로서 단행본으로 포덕 147(2006)년에 천도교중앙총부 교서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하였다. 『천도교약사』는 이 중 동학시대를 PP.21-114.로 1824년부터 1900년까지의 교단사를 축약(縮約)하여 기술하고 있어 동학시대를 이해하는데 매우 취약(脆弱)하다고 할 수 있다. P.115.부터 P.543.까지는 조금 더 상세하게 보완했다면, 『天道敎百年略史』하권(下卷)이라 해도 무방(無妨/아무런 문제가 없다.-오암)하다고 할 수 있는데 굳이 『천도교약사』라 하여 출간한 이유를 필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 교단사를 간행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 이 책의 편집후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중앙총부는 포덕 122년에 『天道敎百年略史』 상권(上卷)을 발행했다. 그 후 교인들이 기대했던 하권(下卷)이 간행되지 못하여 천도교 현도(顯道) 이후의 교사(敎史)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던 중 포덕 142(2001)년 4월 2일에 개최된 제 30차 전국대의원대회에서 김 철(金 哲) 교령이 선출되었고 이 해 8월 7일 교서편찬위원회가 새로 구성되었다. -중략- 그리고 교서편찬위원회는 9월 9일에 제 2차 편찬위원회를 개최하여 『천도교약사』(假題)를 간행하기로 결의하고 이에 따른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중략- 또한 간담회(제 8차 편찬위원회-오암) 에서는 앞으로 천도교 교사를 총체적으로 간행하는데 대한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중략- 그리고 교사 표제명칭에 대해서 그동안 편찬위원들 각자가 생각했던 의견을 수렴한 끝에 『천도교약사』로 결정하였다. -중략- 또 한 가지 부언할 것은 본서가 포덕 116(1975)년까지의 교사를 기술하기로 하였다는 것은 앞서 밝혔거니와 그 중 천도교 현도까지의 교사는 상당부분 간추려 축약 서술하였음을 밝힌다. 왜냐하면 포덕 122년에 간행된 『天道敎百年略史』의 상권에 현도 이전 교사는 극히 일부 오류가 있더라도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 중략- 이번에 필자가 본서를 기술하면서 곤혹스럽게 느껴졌던 것은 필요한 부분에 전거(典據)를 표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처음에 정해진 간행원칙에 따른 불가피한 일이었다. -중략- 이유가 여하튼 우리 근대사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천도교의 근 150년의 역사가 여태껏 집대성되지 못했다는 것은 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괴감(自愧感/스스로가 한 언행에 대해 매우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 –오암)을을 금치 못한다. 뿐만 아니라 정규 교육기관이 없는 교단에서 백과사전마저 없으니 더 할 말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본서의 간행이 앞으로 동학 천도교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세밀하게 기술되어 총체적으로 집대성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PP.569-574. 라고 참담(慘憺)한 심정을 토로(吐露)하고 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포덕 162(2021)년 오늘, 이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변화의 기미도 보이지이 않는다.
1976(포덕 117)년. 7월 4일 천도교별관 소강당에서 구파계열의 황해, 경기, 충청, 전라도의 연원관내 교인들이 모여서, 우리교회는 중심력을 잃었으니 현 교회의 정신적 구심점을 구축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원주직대표회의를 해탈(解脫)하고 한 연원으로 귀일(歸一)하여 역사적 정통성에 입각한 정신적 기초를 확립하는 것만이 현 교회를 정상화하는 방법이라는 생각 끝에 논의하여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였다.
一. 천도교용담연원회는 천도교중앙총부 용담연원으로 출발하기로 했으며
二. 황해, 경기, 충청, 전라도 관내 교인들은 피아(彼我)의 연원관계를 초월하여 한 연원집단으로 조직하기로 하였으며
三. 새 연원록 작성은 금년 8월 지일기념 때까지 완성하기로 하였으며
四. 용담연원지도위원으로 丁奎熙, 朴商益, 金仁善, 崔東安, 姜大華 5인이 피선(被選)되고 대표로 정규희를 선출하였다. 12월 23일 제 8회 연성을 마치고 용담연원과 부안수도원 연원관내 및 韓 燦 管內 등, 교인 300여 명이 천도교별관 소강당에서 모여 단일 연원으로 출발하는 誓天式을 가졌다. 서천문 전문 내용은 /구파측 기록 『천도교 정통연원약사』 PP. 27.1-272.에서 참조.
이때 중앙총부는 최덕신 명의로 회의를 소집하고 두 기관을 모두 해체하고 김명진(金明軫)으로 수습위원장으로 하여 양쪽의 안배로 수습위원을 조직하여 사무를 담당하기로 하고 12월 27일 임시대회를 열어 李宇英을 새 교령으로 선출했다./구파측 기록 『천도교 정통연원 약사』PP. 266.-272. 에서 부분 발췌하여 요약 기술함.
1978(포덕 119) 11월 7일 80여 명이 예산교구에 모여 춘암상사가 두목들에게 심법을 전수한 그 방법대로 심법을 전수해야 한다고 박상익이 그 당시의 심법전수의 의의와 전수과정을 설명하였다. 상사님이 이미 환원하신 지금, 우리는 스승님 영전에 심법을 전수받는 의식을 거행하되 그 방법은 전교인 없이 직접 스승님 앞에서 입교하는 것이니 이제 다시 입교식을 하자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대신사님께서 신사님께, 신사님께서 성사님께, 성사님께서 상사님께 전해주신 종문심법을 우리는 춘암상사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의미이다. 라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 모인 80여 명이 모두 다 직접 입교식을 마치자 김영신(金永信)이 우리 모두가 5세라고 했다./구파측 기록 『천도교 정통연원약사』 PP. 288-289.에서 부분 발췌하여 요약 기술함.
1979(포덕 120년). 4월 8일에 인천교구 교당의 낙성식을 했고 5월 19일에 남해에 인내천 새 문화탑을 건립하였으며, 9월 29일에 의암성사의 생가가 지방문화재로 등록이 되었고 9월 30일에는 경주시 황성공원애서 해월신사의 동상 제막식이 있다. 10월 15일에 13명의 천도교 청년들이 1개월간의 교육을 종학원에서 받아 수료하였다 /『敎史, 國史, 世界史 年代表』 P.50에서 참조.
2월 12일부터 제 11회 연성을 시작하였다. 박상익은 이 자리에서 교회가 동귀일체(同歸一體)하려면은 정묘(1927)년 8월 14일에 춘암상사가 80여 명의 두목을 불러 놓으시고 ‘종금(從今)이후로는 종문의 심법을 어떠한 한 개인에게 전수하지 못할 것이니 나는 나의 심법을 오만 년 영원히 천도교인에게 일반적으로 나의 심법을 전해준다.’ 하시면서 그 자리에 모였던 80여 명에게 심법을 전해주었다. /구파측 기록 『천도교 정통연원약사』 P.288. 에서 참조하면서 춘암상사가 두목들에게 심법을 전수해준 것과 같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스승님의 심법을 전수받도록 해야 하며 그 의식을 네 분 스승님 앞에서 직접 입교식을 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5월 15일에 화성군의 김인선의 집에 용담연원 교역자들이 모여서 통일추진문제를 논의하였는데 박상익의 제안으로 핵심체(核心體)를 구성하자는 안이 나와 핵심체의 구성방법은 특정인물을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연성과 일상수도를 통해서 자성적(自成的)으로 천의(天意)에 의해서 핵심인물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지일기념전에 핵심인물을 양성하는 일환책(一環策)으로 우이동 봉황각에서 7월 24일부터 21일간 제 12회 특졀연성을 실시하였다. 에 참가자 55명의 명단은/구파측 기록 『천도교 정통연원약사』 P.284. 에서 참조.
1986(포덕 125)년 4월 20일 수원교구 교인들이 모여 박상익을 장로로 추대하여 지도를 받자고 하는 논의가 전년도에 합의를 보지 못한 것을 다기 논의하여 장로로 추대하여 지도를 받도록 합의하였다. 그래서 4월 29일에 경충전의 각 교구장들의 추대서를 제출하여 해암 박상익을 자문으로 모셔 현 중앙총부의 연원제도에서 빠저 나와 교구중심제로 운영할 것을 결의하고 동귀일체 추진에 활기를 띠고 동귀일체 활동을 시작하였다. 11월 29일부터 7일간의 동귀일체를 다짐하는 특별연성을 하였고 12월 24일 김건영(金建泳)이 작성한‘천도교 및 동학계 모든 동덕에게 고한다.’라는 동귀일체의 핵심을 밝히는 글을 발표했다. 이 전문은 /구파측 기록 『천도교 정통연원 약사』PP. 291-292.에서 참조./구파측 기록 『천도교 정통연원약사』 PP. 290.-292.에서 부분 발췌하여 요약 기술함.
1987(포덕 126)년 1월 18일 해암장의 명에 의하여 김건영이 작성한 동귀일체선언서를 도일기념식에 참석한 교인들에게 배포하고 1월 28일에 주간종교에 이 전문을 게재하였다./구파측 기록 『천도교 정통연원약사』 PP. 292-295.에서 참조.
3월 15일 서울에서 이위경(李偉卿/후에 중앙총부 감사원장을 역임)이 동도회원을 이끌고 수원 권선교구를 찾아와 박상익 해암장을 찾아뵈오니 이위경에게 동귀일체 추진의 대표로 참여하라 하였다. 3월 30일 이위경이 대표로 100여 명이 서명하여 동귀일체 선언서를 중앙총부에 건의하고 7월 14일에는 161명이 서명한 건의서를 제출하자 교헌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하여 감사규정 제 2항 1,2,3을 위반하였음으로 교헌 59조에 의해 이위경 대표를 정권 2년에 처분하였다. 9월 8일 감사원 처분이 부당하다고 하여 불복하고 10월 30일부터 7일간 우이동 봉황각에서 특별연성을 하고 해암장의 말씀으로 스승님의 전통을 바로잡는 연원정통선언서(淵源正統宣言書)를 가까운 시일 안에 발표하겠다. 는 뜻에 따라 모두 찬성하여 12월 9일자 주간종교에 게재하였다. 이 전문은 /구파측 기록 『천도교 정통연원 약사』PP. 299-302.에서 참조. /구파측 기록 『천도교 정통연원약사』 PP. 292.-302.에서 부분 발췌하여 요약 기술함.
1990(포덕 131)년. 4월 12일 원주 송골에 해월신사추모비 건립. 4월 20일 종학대학원 학칙 개정. 5월 5일 종학대학원 현판식 거행. 7월 25일 홍장화의 『천도교 교리와 사상』간행. 8월 25일 홍장화의 『천도교운동사』 간행. 8월 15일 춘암상사 건국훈장 추서. 9월 16일 천도교 미술인회 발족. 12월 1일. 천도교 인권도덕 실천회 창립. 12월 20일 복호동에 해월신사의 내칙, 내수도문 반포100주년 기념비 건립./『敎史, 國史, 世界史 年代表』 PP.53-54.에서 참조.
6월 12일, 청년회, 아시아종교인 평화회의 주관 한일청년교류회에 참가하였다./청년회 연보에서
3월 1일 박상익은 3.1절을 기하여 기념식을 마친 후에 정통연원은 수원 권선교구로 모이라 했다. ‘이제 정통연원을 결성하고 강서(降書)에 따라 정통연원의 임원을 발표하여 취임식을 마친 후 총회를 열어 이 자리에서 논의하여 결의된 조직과 기구운영에 대하여 발표하였고 6월 13일 수원 권선교구에서 첫 임원월례회의를 열어 교화방안을 논의하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9월 16일 오후 2시에 시흥교구에서 이영노가 제출한 정통연원 기본 교화방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정통연원 기본 교화방안은/구파측 기록 『천도교 정통연원약사』 PP. 333-334.에서 참조.
12월 8일 정통출판사를 등록을 신고하였다. 포덕 133(1992) 5월 3일 시흥교구에서 제 3차 정기총회를 열어 사업경과보고서와 결산보고를 원안대로 통과 시키고 6월 21일 시흥교구에서 정헌(규약)을 통과시키고 임원을 선출하는 것으로 천도교정통연원의 역사는 마감을 하고 있다.
천도교 정통연원은 천도교중앙총부와 정부 그리고 종교협의회 등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원만한 관계를 맺어 함께 정통연원이 하고자 했던 사업들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려고 많은 애를 썼지만, 종래(從來)는 좋은 관계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20년에 가까운 구파의 노력은 박상익의 남북통일 염원이라는 환상적인 꿈에서 출발하여 허망한 꿈으로 끝났다 할 수 있다. 박상익과 김인선 최병제, 김건영, 이위경, 이영노 등의 인내천주의와 사인여천의 사상으로 동학 천도교의 국교화(國敎化), 남북통일, 세계통일, 교단통일의 노력은 그 시간과 노력과 참여 교인들의 꿈이, 결과적으로는 허망(虛妄/어이없는)하게도 모두 다 긴 여름날에 한바탕의 꿈이었던 것이었다./구파측 기록 『천도교 정통연원약사』 PP. 331.-349.에서 부분 발췌하여 요약 기술함. 이로써 『천도교 정통연원 약사』의 기술은 끝이 났다.
■ 이후의 기록은 필자가 천도교정통연원의 사업과 활동에 관련된 자료를 발견하지 못하여 기술하지 못하였다. 필자가 포덕 146(2005)년 초에 동귀일체 친목회의 이위경(李偉卿) 회장님으로부터, 구파계열에서 그간 소장하고 있던 모든 자료들을 인수받은 것 중에서 더 이상의 기술할 만한 자료가 없었다.
無敎主制(衆議制)에 對한 葛藤으로 因한 紛糾와 合同(5-5) 大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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