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의 경제력
콘스탄티노플은 종교와 정치 뿐 아니라 경제의 중심이기도 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수세기 동안 서유럽이 원하는 상품을 공급했는데, 오로지 이 도시에서만 가능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서유럽 무역의 점진적인 부활을 촉진시켰던 상품들을 얻기 위한 매개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무역의 부활에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서유럽의 도시가 나타났던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중심도로에 있는 아케이드의 위쪽은 보행자 전용이었다. 그러나 아케이드의 아래쪽과, 도시의 다른 지역이나 골든혼 건너편의 페라에 위치한 아케이드와 홀들은 도소매상점으로 미어터질 정도였다. 방문객들의 묘사에서 이런 상점들은 교회, 성물, 궁전, 성벽, 기념비를 비롯한 경이로운 것들보다 덜 두드러지지만 그렇다고 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동로마 제국의 전성기에 콘스탄티노플은 세계에서 가장 큰 사치품 쇼핑센터였으며, 대부분은 내부의 공장에서 생산되었다. 황금은 카프카스와 우랄 산맥, 상아는 아프리카, 진주는 페르시아 만과 실론, 보석은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 생사는 중국과 동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들, 아마포는 펠로폰네소스, 무명은 소아시아에서 들어왔다. 도시의 각 구역은 각기 특정 물품 생산을 특화시켰으며, 중앙 정부는 사치품을 가공하는 작업장들을 주의 깊게 통제했다. 콘스탄티노플은 거의 모든 종류의 보석 장신구를 생산했다. 왕관과 왕홀, 보석이 박힌 십자가, 성물함, 장식된 지팡이, 황금과 법랑으로 된 책표지, 상자, 컵, 나팔, 상아로 된 세폭화, 은 줄무늬로 장식된 크리스털 술잔과 성배, 청동으로 도금한 문, 채색된 필사본과 성화, 무늬를 넣은 아마포와 무명, 금으로 만든 천과 콘스탄티노플에서 특히 유명했던 비단을 비롯해 의복, 관복, 예복, 커튼을 위한 온갖 종류의 직물들, 특히 그중에서도 자주색 비단은 왕실 작업장에서 제작되었으며 왕실에서 사용하거나 선물할 때만 쓰일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제국의 비단 제조는 552년부터 활발해졌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적국인 페르시아로부터의 비단 수입을 내켜 하지 않았고, 이에 수도사들은 황제에게 비단 제조의 비밀을 알아냈다고 말했다. 그들은 기독교 이단 분파의 일원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추방당해 중국으로부터 비단을 들여오는 육지 무역로에 위치한 페르시아 제국의 한 속주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중국은 몇 백 년 동안이나 비단을 제조하고 수출해 왔지만, 그 제조 방법에 대한 지식을 매우 철저하게 비밀로 지켰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서 비단 염색과 직조는 자리 잡힌 산업이었고, 황제는 541년 황실 비단 공방들에게 독점권을 허용하며 보호해 주었지만, 원재료인 생사(生絲)는 수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장거리 비단 무역의 중개인인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그는 수도사들에게 페르시아를 거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리고 비단을 제조하는 비법을 알아온다면 후한 보상을 약속했다.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의 말에 따르면, 수도사들은 중국으로 돌아가 누에고치를 약간 구해 그것들을 속이 빈 대나무 지팡이에 숨기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는 먼 여정 길에 죽지 않도록 똥 속에 묻어 가져왔다. 이 누에고치가 부화해 누에나방이 되면서 비단 제조 비법은 더 이상 비밀일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