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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두 얼굴] 시시한 논쟁 -버트런드 러셀(2)
재미있는 일은 러셀이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이론저 지식과 현실적 무지의 위험한 조합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곧잘 간파 - 그리고 개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1920년에 그는 볼셰비키가 지배하는 러시아를 방문했고, 5월 19일에는 레닌을 면담했다. 그는 레닌이 “이론의 화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러셀은 “나는 그가 대중을 경멸하는 지식인 귀족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썼다. 러셀은 그런 조합을 가진 인간이 어째서 현명한 통치자로는 부적격한지를 완벽할 정도로 잘 간팡했다. 그는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고 (레닌을) 만났다면 그가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고집불통인 교수라고 판단했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러셀은 레닌에 대한 묘사가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러셀 자신도 대중을 경멸했고, 때로는 불쌍히 여기는 지식인 귀족이었다.
게다가 러셀은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모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러셀은 레닌에게 투영된 자신의 특징들을 볼 수 없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가 보통 사람에게서 발견했을 때는 개탄해 마지않던 불합리한 감정이 행사하는 영향력에 자신도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세상의 질환 대부분은 온건한 논리와 이성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러셀의 일반적인 입장이었다. 남녀노소가 감정이 아니라 이성을 따른다면, 직관적인 논쟁 대신 논리적인 논쟁을 벌인다면, 그리고 극단적인 방식에 빠져드는 대신 온건한 해결책을 실행한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인간관계는 조화로워질 것이며 인류의 생활 여건은 꾸준히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수학자 러셀의 관점이었다. 논리학의 관점에서 정의할 수 없는 개념은 하나도 없고, 추론을 통한 응용으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하나도 없는 순수 수학적인 관점이다. 그는 인류가 겪는 문제들을 수학 방정식과 비슷하게 풀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간과 인내, 온화한 방법, 이성만 주어진다면 인류가 공적, 사적으로 겪는 대부분의 난점에 대한 해법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철학적 초연함으로 이러한 문제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무엇보다 러셀은 제대로 된 이성과 논리의 틀만 주어지면, 인류의 대다수는 점잖게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러셀의 삶 자체가 이런 주장이 불안정한 토대에 의존하고 있음을 거듭해서 보여 줬다. 중요한 국면에서 러셀의 관점과 행동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위기의 순간이면 논리는 허공속에 내동댕이쳐졌다. 러셀은 자신의 이익이 위협받는 곳에서도 점잖게 행동할 것이라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줄 수 없었다. 다른 약점들도 있었다. 인본주의적 이상주의를 설교할 때, 러셀은 진실을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시했다. 그렇지만 러셀은 궁지에 몰리면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의감이 치솟고 감정이 들끓을 때면, 정확성에 대한 러셀의 존경심은 무너져 버렸다. 특히, 이성과 논리를 열렬히 추구하는 사람들이 꼭 지켜야만 하는 일관성을 이워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전쟁과 평화라는 거창한 주제를 발전시킨 러셀의 견해를 따라가 보자. 러셀은 그 어떤 것보다도 많은 에너지를 이 주제에 쏟았다. 러셀은 전쟁을 불합리한 행동으로 구성된 극단적 패러다임으로 간주했다. 그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셀 수 없이 많은 국지전의 시대를 살았고, 그것들 모두를 혐오햇다. 그의 전쟁 혐오는 조금도 거짓되지 않은 것이었다. 러셀은 1894년에 로건 피어솔 스미스의 동생인 엘리스 휘툴과 결혼했다. 퀘이커 교도였던 그녀는 남편의 확고하고 (그가 보기에는) 논리적인 반전론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더욱 굳힌 상냥하고 종교적인 반전론자엿다. 1914년에 전쟁이 발발하자, 러셀은 전쟁을 전면 반대한다고 선언하고, 대서양 양안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자신의 자유와 경력을 위태롭게 만들면서까지 전력을 다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그런데 그를 감옥에까지 이끈 말들은 평화적이거나 합리적이거나 또는 온건한 사람의 견해는 아니었다. 평화주의를 옹호한 중요한 철학적 성명서로, 전쟁은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전쟁의 윤리학>(1915)은 상당히 논리적이다. 그런데 그 이후 러셀은 반전론을 주장하면서 전투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대단히 감정적인 표현들을 동원했다. 예를 들어 1915년에 조지 5세가 전시 동안 금주를 하겠다고 맹세했을 때, 러셀은 앨리스의 소망에 따라 행하고 있던 금주를 포기해 버렸다. 러셀은 왕의 행동동기가 “독일군 살해를 용이하게 만들려는 것이며, 반전론과 알코올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고 썼다. 미국에서 그는 미국의 국력을 평화를 집행하는 수단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그가 세계의 구세주로 간주한 윌슨 대통령에게 교전국들에 맞서 “인류를 보호할 임무를 떠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구세주의 정신에 젖어 윌슨에게 편지를 썼다. “저는 충심에서 우러난 확신을 갖고 유럽의 이름으로 만국을 위해 소리쳐야만 합니다. 대통령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시기를 유럽의 이름으로 호소합니다.”
전쟁을 싫어했을지 모르는 러셀도 완력을 사랑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의 반전론에는 공격적이고 심지어는 호전적이기까지 한 요소들이 있었다. 최초의 선전 포고가 있은 후에 그는 이렇게 썼다. “지난 몇 주 동안, 애스퀴스나 그레이를 우연히 만났다면 나는 살인 충돌을 억누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한참 후에 실제로 애스퀴스를 우연히 만났다. 러셀은 가싱턴 영지의 수영장에서 홀닥 벗은 채로 물에서 나온 애스퀴스 수상이 수영장 기슭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지만 러셀의 분노는 이때쯤에는 차갑게 식은 상태였다. 그는 살인을 하는 대신, 애스퀴스가 정통했던 플라톤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내가 모셨던 위대한 편집자 킹즐리 마틴은 러셀을 잘 알았다. 그는 자신이 만난 사람 중 걸핏하면 싸우기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반전론자였다고 말하면서, 러셀을 예로 들었다. 러셀의 제자 T. S. 엘리엇도 같은 얘기를 했다. “(러셀은) 어떤 이유로든 살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러셀이 주먹질을 선호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어떤 면에서는 총체적 해법이 있다고 믿은 절대론자였다. 그는 세계에 항구적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강력한 정치가가 물리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견해를 종종 드러냈다.
러셀이 이런 생각을 처음 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무렵으로, 당시 그는 미국이 우세한 무력을 활용해서 무장 해제를 관철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다양한 인종들이 뒤섞여 있고 국가적 전통이라 할 것이 상대적으로 없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 임무를 완수하는 데 특히 적합하다.” 그런데 미국이 핵무기를 독점하던 1945-1949년에 그의 주장은 더욱 강해졌다. 훗날 러셀이 이 시기 동안 그가 가졌던 관점을 부인하고 호도하고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기 때문에, 이때의 주장들을 자세히, 그리고 시간순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러셀의 전기를 쓴 로널드 클라크가 입증했듯, 러셀은 러시아를 상대로 한 예방적 전쟁을 몇 년에 걸처 한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주장햇다. 좌파 인사 대부분과 달리 러셀은 소련 정권에 결코 포섭되지 않았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항상 철저히 거부했다.
1920년 러시아 방문을 기술한 책 <볼셰비키주의의 실제와 이론>(1920)은 레닌과 레닌의 행적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는 스탈린을 괴물로 여겼고, 강제 집단 농장화, 대기근, 숙청과 수용소 등 서방측에 전해진 파편적 이야기들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이런 모든 점에서, 그는 진보적 인텔리겐치아로서는 꽤나 전형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또한 1944-1945년에 소련이 동유럽의 대부분으로 통치권을 확장햇을 때 만족감을 표명한 지식인들과도 길을 달리했다. 러셀이 보기에 이것은 서양 문명의 대재앙이었다. 그는 1945년 1월 15일에 “나는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소련 정부를 증오한다”고 썼다. 그는 협박이나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소련의 팽창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1945년 9월 1일자 편지에서 그는 강력히 주장했다. “스탈린은 세계의 독재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히틀러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미국이 일본을 상대로 최초의 핵무기를 터뜨렸을 때, 그는 미국이 고집 센 러시아를 제압하기 위해 신무기를 활용해서 세계의 평화와 무장 해제를 강요해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는 이것을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하늘이 내린 기회로 봤다. 러셀은 1945년 8월 18일에 글래스고에서 발간된 노동계 저널 <포워드>와 10월 2일자 <맨체스터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자신의 전략을 처음으로 제시햇다. 10월 20일자 <캐벌케이드>에도 같은 주제를 좀 더 발전시킨 글이 실렸다. “인류의 마지막 기회”라는 제목의 이 글에는 “전쟁을 일으킬 명분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심장한 표현이 들어 있다.
러셀은 이후 5년 동안 이와 유사한 주장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그는 <논쟁> 1946년 7월/8월 호, <연방제국> 1948년 1월/2월 호, <신연방> 1948년 1월 호에 실린 1947년 12월 3일 로열 엠파이어 소사이어티를 상대로 한 좌담 정리 기사, 1947년 12월 9일에 제국 국방대학에서 한 강연. <19세기와 이후> 1949년 1월 호에 실린 1948년 11월에 웨스트민스터 학교에서 열린 학생 회의에 관한 기사, <월드 호라이즌> 1950년 3월 호에 실린 기고문 등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주장을 반복했다. 그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로열 엠파이어 소사이어티 좌담회에서 그는 연합 -나토에 대한 예시다- 을 하면 러시아에 강요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나는 러시아가 마지못해 강요에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연합이 조만간 결성될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러시아가 그에 따르지 않는다면, 세계는 그 결과 뒤따르는 전쟁에서 살아남고, 세계가 필요로 하는 단일 정부가 출범할 수도 있습니다.” 다음은 그가 1948년 5월에 미국의 군축 문제 전무가 월터 마르세유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 쓴 내용이다. “러시아가 서유럽을 침공한다면, 나중에 러시아를 물리치더라도 그로 인한 파괴는 회복할 수 없는 수준이 될 것입니다. 교육받은 인구 전체가 북동 시베리아나 백해 연안의 노동 수용소로 보내질 것이고, 사람들 대부분은 그곳에서 고생하다 죽어갈 것이며, 생존자들은 짐승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만약 핵폭탄을 사용한다면 러시아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오선 서유럽에 떨어뜨려야만 할 것입니다. 러시아인들은 핵폭탄이 없으면서도 영국의 모든 대도시를 파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종국에는 미국이 승리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서유럽을 침략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다면, 서유럽의 문명은 몇 세기 동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런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쟁을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를 섬멸하고, 세계정부를 창설해야 합니다.” 러셀은 서둘러야 한다고 계속 강조했다. “조만간 러시아인들은 핵폭탄을 갖게 될 것이다. 핵폭탄이 잇으면 그들은 더욱 무리한 제안을 할 것이다. 만사를 최대한 기민하게 서둘러 해치워야만 한다.” 러시아가 핵폭탄 실험을 했을 때도 러셀은 서방 측이 수소 폭탄을 개발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였다. “나는 현제의 세계 정세에서 핵전쟁 억제 협정만이 능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쌍방이 각각 다른 편이 협정을 위반하리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그는 “빨갱이보다는 죽음이 낫다”는 주장을 가장 비타협적인 형태로 전개햇했다. “다음 전쟁이 발발한다면, 그 전쟁은 지금까지 인류에게 닥친 재앙 중에서 가장 끔찍한 재앙이 될 것이다. 그것보다 큰 재앙은 딱 한 가지인데, 그것은 크렘린의 권력이 세계 전역으로 확장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