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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岩二十八景)
여헌 장현광은 임진왜란 이후 1596년 43세경부터 정유재란기에 입암에 머물렀다.
그 뒤 이곳의 경치와 학문여건을 사랑하여 정자를 짓고 문하를 모아 학문을 강토하고
저술하였으며 다양한 출처를 거쳐 1637년 84세에 이곳에서 별세하였다.
입암 28경은 여헌 장현광 자신의 시편 '立巖十三詠'에서 부터 노래되기 시작했으며,
입암서원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것들이 다 빼어난 경치를 지니고 있고
그 이름도 이름 지은이의 학문적 태도와 풍류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그 뒤 노계 박인로의'입암' 이하 29수의 연시조에서 입암 28경에 대한 경치와 절경을
노래하기도 했다.
입암 28경의 분포는 죽장면 소재지 남쪽 세이담으로 부터 입암리 일원과
동쪽 산지령에 이르기까지 입암서원을 중심으로 반경2km 이내에 걸쳐있다
탁입암(託立岩)
입암 또는 탁입암이라고 부르며 입암 28경이 입암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며
입암리의 지명도 여기에 근거하여 정해졌다고 한다
죽장면 소재지에서 상옥쪽으로 300여m 가다보면 도로변 좌측 마을이 솔안마을인데
마을앞에 20여m 높이의 입암이 우뚝서있고 우측에 일제당이 보이며
일제당과 입암 사이에 계구대가 있고, 일제당 뒷편에 기예암이 있다.
기예암(起豫岩)
기예암은 일제당 뒷편 바위 언덕으로 바위틈사이에서 자란 나무들이 고풍스러움을
더해 주며 계구대와 연접해 있고 그 명칭은 논어에서 유래하였다고 하고
여헌 선생은 기예암이라 불렀다고 하며
기예암 옆에 물멱정이란 우물이 있었다고 전하나
만활당 옆에 오래된 우물이 물멱정이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이 많다.
피세대(避世台)
구인봉의 동쪽면은 절벽으로 되어 있고 절벽 아래로 소를 이루며 물이 흐른다
이곳을 입암서원쪽에서 보면 절벽의 하단부에 평평하게
방처럼 패인 곳이 있는데 이곳을 피세대라 하는데
여헌은 '後負危崖 前臨險流 又爲九인 之所蔽擁 幽閑深寂 漠然與外人若不相接
(후부위애 전임험류 우위구인 지소패옹 유한심적 막연여외 인약불상접)이라 하면서
초옥 수간을 지을 수 있겠는데
다만 높지 않아서 물이 불으면 잠기므로 짓지 못하겠다고 함
초은동(招隱洞)
招隱洞은 尋眞洞과 함께 입암이십팔경의 초입에 해당한다.
죽장면 일광리(광천마을)를 지나 멀리 죽장장터가 보일 즈음에
왼쪽으로 속칭 까치소, 부엉드미 사이의 골짜기,
즉 도덕골이란 곳이 招隱洞이며
그 다음 골짜기가 尋眞洞이다. 여헌은
'洞在下口者 名以招隱 憐夫迷溺於宦海而莫之返者也 洞在溪上者
名以尋眞 思夫抱眞肥遯者而不得見也'라고 명명한 이유를 밝혔다.
골짜기가 좁고 한적하며 깊이 들어가면 양편에 약간의
밭들이 있고 민가도 있었던 곳이다.
경심대(鏡心台)
탁입암의 정면에 펼쳐진 암반을 '경심대'라고 하며
냇물이 많을 때는 대부분 물에 잠기며, 가운데 수어연을 감싸고 있다.
수어연(數漁淵)
탁입암의 정면에 펼처진 암반이 경심대인데 경심대 가운데에
바위가 패어서 늘 물이 고이는 곳으로 수심이 항상 1m 이상을
유지할 정도로 깊고 맑으며
물고기가 노는 것을 구경하며 셀 수 있다하여 수어연이라 명명했다고 함
계구대(戒懼台)
입암과 기예암 사이에 있는 절벽이 계구대이며
계구는 중용의 戒愼乎其所不睹(계신호기소불도)
恐懼乎其所不聞(공구호기소불문)에서 나온 말로
도를 떠나지 않도록 敬畏하여
마음에 천리본연의 상태를 유지해야 함을 함축한 말이다
토월봉(吐月峯)
입암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산봉우리를 가리킨 것으로
솔안마을 뒷산줄기가 서원 뒤쪽으로 흘러 서원의 동편에 이룬 둥근 봉우리인데
교훈적 가탁 없이 서정적으로 사물을 파악하여 붙인 이름이라 함
상두석(象斗石)
일제당 앞뜰의 하천가에 작은 바위들이 북두칠성과 같이 놓였다하여
그 일곱 개의 바위를 상두석이라 함
답태교(踏苔橋)
계구대나 일제당에서 탁입암의 앞쪽으로 돌아 나오려면
몇 개의 작은 바위를 돌다리처럼 밟아야 된다고 하여 답태교라 함
세이담(洗耳潭)
초은동 입구의 자호천에 속칭 '까치소'란 소가 있는데
물이 맑고 깊어 이를 세이담이라고 명명하지 않았겠나 생각한다
화리대(畵裡台)
입암 장터에서 69번 지방도를 따라 입암까지의 하천주변이 야연림 자리이다 .
이 야연림 자리를 따라 서원을 향해 오다가 솔안마을 들어가는 響玉橋 못가서
북쪽 산에 붙여 선 바위가 畵裏臺이다.
그 모양이 특이한 것은 아니어서 기문에서도
'雖不能自奇 而諸嶺諸峯諸巖諸石凡一眼所收得者
惚難狀 依依畵中 似非眞面 이라고 하였다.
경운야(耕雲野)
지금의 죽장면사무소 뒤로 자리 잡은 마을이 입암 큰마을 평지동이다.
이 마을에는 주로 東峯 權克立의 후손인 안동권씨들이 世居하고 있는데,
현재의 마을자리와 거기서 탁입암쪽 들이 耕雲野이다.
입암에서 바라보면 隔塵嶺이 이 들 뒤로 내려오면서 바깥세상을 가로막고 있고,
입암 아래로 흘러 가던 佳士川은 이 들 앞으로 사라진다.
여헌은 기문에서 각별한 관심으로 이 명명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였다.
정운령(停雲嶺)
戒懼臺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마주치는 것이 九인峯이며,
구인봉에서 남쪽으로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수석봉:해발820.5m)가 停雲嶺으로
초은동의 뒷산 정상이다.
함휘령(含輝嶺)
정운령의 동쪽으로 더 멀리 보이는 높은 봉우리가 含輝嶺이며,
기문은 '每見白雲停聚於其頂 或如冠巾之戴首 或如橫帶之在腰
有或崖壑掩藏盡者 有或峯巒露出半者'하다고 하여 꼭 어느 지점이라기보다
그 일대를 가리킨 것으로 보이며, 봉화봉(해발610m)주변을 가리킨다고 한다.
산지령(産芝嶺)
'立巖記'는 産芝嶺의 위치에 대해 다만
'吐月峯之東 有嶺深秀 半藏半露 蒼然蔚然 樵夫採客 鮮或跡焉者'라고만 하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골짜기나 봉우리의 위치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현지의 고로들은 욕학담의 뒷산 골짜기와 봉우리를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다.
토월봉의 동쪽이라 했지만 함휘령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산지령의 산이 서쪽으로 가서 함휘령을 이루었다고 했고,
산지령 설명에서 반은 감추이고 반은 드러났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도
역시 욕학담 뒷산이 옳을 것으로 보인다.
명명을 설명하면서 商山四皓의 紫芝歌 고사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있는 것도
구체적 경물보다 관념적으로 그 일대를 가리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채약동(採藥洞)
서원에서 마주 보이는 가까운 봉우리가 九인峯이고
구인봉 뒤로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含輝嶺인데 지도상으로 해발 610미터의 烽火峯이다.
이 함휘령에서 입암 방향으로 흘러내리는 골짜기를 採藥洞이라 했다.
한시를 전문 번역 인용한 시조에서 보듯이 구체적으로 승경을 지적한 것은 아니며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골짜기를 함휘령의 의미와 조화하여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조월탄(釣月灘)
31번 국도상에 입암1교와 입암2교를 가설하면서 합류대를 깨고 조월탄을 매워
지금은 흔적도 없으나 입압1. 2교 사이의 산자락이 하천과 접하는 부분에 합류대가
있었으며 그 아랫쪽 죽장초등학교 뒷편쯤에 조월탄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구인봉(九인峯)
계구대에서 정남 방향으로 내 건너편에 선 봉우리가 구인봉이다
송내교를 건너기 직전 오른쪽으로 붙은 산인데 동쪽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立巖記에서 '峯在溪之南 立巖在溪之北 若相拱揖者然'이라 하여
입암과 서로 읍하는 형상이라 했다.
욕학담(浴鶴潭)
입암서원에서 상옥 쪽으로 600여m 올라 가다보면
물이 맑고 암벽이 절경을 이루는 곳이 있는데 여기를 욕학담이라 하는데
학소, 학담, 학소대등으로 부르고 있으며,
옛날에 욕학담 옆에 낙문사란 절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소로잠(小魯岑)
입암이 있는 솔안마을의 서쪽 달바위산 산등성이는
마을 뒤로 경사를 이루면서 높이 솟아 있다.
이것을 여헌은
공자의 登東山而 小魯 登泰山而小天下 고사에 의하여 소로잠이라 불렀다
물멱정(勿冪井)>
立巖記에는 기여암 옆에 우물이 있어서 勿冪井이라 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기여암에서 좀 떨어진 萬活堂 동북쪽에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물막정이라 부르니, 혹 여헌이 명명한 물멱정인지도 알 수 없다.
심진동(尋眞洞)
심진동과 초은동은 죽장면 소재지에 이르기 전 자호천에 절경을 이루고 있는
속칭 까치소에서 일광리의 개일이 심진동이고 도덕골이 초은동이라 칭한 것으로 보인다
야연림(惹烟林)
입암장터 입암1교에서 서원쪽을 향하여 佳士川을 따라 걸으면그 길이 惹煙林터이다.
명명 당시에는 이 냇가를 따라 전아한 숲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숲을 전혀 볼 수 없고 69번 지방도로가 숲이 있던 자리에 닦여 있다
상암대(尙巖台)
욕학담의 100여m 하류에 '자래소'란 곳이 있는데
이곳 계곡을 가로지르는 암반을 상암대라 함
향옥교(響玉橋)
입암의 50m 하류에 지방도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세월교가 있는 부분이
향옥교 자리로 바위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고 아직도 큰 바위들이 아름답다
합류대(合流臺)
탁입암 쪽에서 흐르는 가사천과 월평리 쪽에서 흐르는 자호천이 합류하여
영천댐으로 흘러들게 되어 있는데 합류하는 지점에 큰 바위가 있어
이를 합류대라 하였으나 31번 국도상에 입압1교와 입암2교가 가설되면서 없어졌음
격진령(隔塵嶺)
함휘령의 서쪽으로 마을을 향해 낮아지는 봉우리가 隔塵嶺인데
지금의 죽장초등학교 앞산 능선입니다.
-자료출처-죽장향우회
죽장 입암 답사자 박 창 원(청하중 교장선생님)
입암28경, 조선 시가문학의 산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이상향으로 친다. 포항에서 가장 산 좋고 물 좋은 곳은 죽장이다. 그 중에서도 입암서원 주변이다. 입암서원 일대는 단순히 명승지 차원을 넘어 조선 중기 이후 명사들이 이 곳을 찾아 학문과 문학을 꽃피운 유서 깊은 곳이다.
입암리는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들어온 동봉(東峰) 권극립(權克立, 1558-1611)이 솔안마을[松內洞]에 정착하면서 개척한 마을이다. 후에 그의 증손자대에 와서 아래쪽에 큰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이 때 개간한 들을 경운야(耕雲野)라 했다. 지금도 주민의 태반이 안동권씨인데 포항의 대표적인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이런 연유로 해서 유교적 전통이 강하며, 고색창연한 고택이 상당수 남아 있다.
조선 중엽 이후 입암에는 저명한 문사와 필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 인조 때의 대학자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은 탁립암(卓立岩), 기예암(起豫岩), 피세대(避世台), 초은동(招隱洞), 경심대(鏡心台), 계구대(戒懼台), 수어연(數漁淵), 토월봉(吐月峯), 상두석(象斗石), 답태교(踏苔橋), 세이담(洗耳潭), 화리대(畵裡台), 경운야(耕雲野), 정운령(停雲嶺), 함휘령(含輝嶺), 산지령(産芝嶺), 채약동(採藥洞), 조월탄(釣月灘), 구인봉(九인峯), 욕학담(浴鶴潭), 소로잠(小魯岑), 물멱정(勿冪井), 심진동(尋眞洞), 야연림(惹烟林), 상암대(尙巖台), 향옥교(響玉橋), 합류대(合流臺), 격진령(隔塵嶺) 등 28곳의 승경을 '입암28경'이라 명명하고, 이를 노래한 다양한 시문을 남겼다.
이처럼 거유(巨儒) 장현광을 비롯한 지방의 명망 있는 유학자, 선생을 따라 이곳에 와 명작을 남긴 당대 최고의 문장가 박인로(朴仁老) 등 쟁쟁한 학자들의 정신이 배어 있는 입암서원은, 그러나 조선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1868)에 의해 강당이 훼철되었으며, 1907년 산남의진(山南義陣) 입암전투로 묘우(墓宇)가 불탔다. 6.25전쟁 때는 이 지역이 치열한 격전지가 되다보니 부상자를 치료하는 야전병원 노릇을 하기도 했다.
현재 경내에는 특이한 양식의 팔작지붕인 강당과 묘우가 있는데, 묘우에는 1633년 김응조(金應祖)가 그린 선생의 영정과 철쭉나무 지팡이, 길이 185cm나 되는 마상도(馬上刀)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입암28경이 문학의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592년에 쓴 여헌의 시 <입암십삼영(立巖十三詠)>에서부터다. 여헌은 입암에 들어온 뒤 입암의 풍경을 즐기면서, 각 사물에 대한 이름을 짓고 설명과 감상을 덧붙였는데, 이렇게 명명한 경물들에 대해 다양한 형식의 글로 입암을 노래했다. 그의 산문작품에는 <입암기(立巖記)>와 <입암정사기(立巖精舍記)> 등이 있다.
<입암29곡>의 29수 가운데 입암과 관련된 것이 10수이며, 이 연시조에 등장하는 경치는 28경 가운데 19종이고, 28경 이외에 <정사(精舍)>가 한 수이다. 노계는 이 고장에 머물던 여헌과의 교분이 각별하여 69세의 선생을 찾아 죽장에 왔다가 입암의 풍광에 취하여 지은 것이 <입암29곡>이다.
無情히 선는 바회 有情하야 보이나다
最靈한 吾人도 直立不倚 어렵거늘
만고에 곳게 선 저 얼구리 고칠 적이 업나다.
<입암29곡> 중 첫 번째 시조인 이 작품은 입암28경 중 제1경인 탁립암(卓立巖)을 노래한 시다. 탁립암은 입암리 솔안마을[松內洞] 입구 개울가에 서 있는 거대한 바위다. 입암(立巖)은 이 지역 지명의 근원이며 모든 경치의 중심이다. 위치도 이십팔경의 한가운데 있으며, 크기와 빼어남이 독특하여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탁립암은 입암의 특별함을 강조한 명칭이다.
노계는 <입암29곡> 연시조의 10수를 동원하여 이 입암을 노래하였다. 그러면서 “만고애 곳게 선 저 얼구리 고칠적이 없다”라든가, “나도 이 바회면 대장부가노라”라는 표현에서는 입암의 직립불의(直立不倚)함에 대한 찬양을 보여주었다. 또한 노계는 바위에게 묻고 바위가 답하는 형식의 시조를 통해 바위의 교훈적 장점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다. 이러한 노계의 태도는 입암을 단순히 바위로 파악하지 않고 성리학적 가치관의 상징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입암서원 앞 개울가에 2001년에 세운 노계 박인로의 시비가 있다.
산남의진(山南義陣) 발상지
산남의진이란 영천 자양면 출신의 정용기에 의해 처음 결성된 후 흥해 출신의 최세윤으로 이어지면서 포항, 즉 옛 영일군 일대를 중심으로 거센 항쟁의 횃불을 들었던 구한말 제2단계 의병 운동을 대표하는 의병 조직이다. 산남(山南)이라 함은 문경새재 즉, 조령 이남의 영남 지방을 이르고, 의진(義陣)이라 함은 '의병 진영'을 줄여 일컫는 말이다.
1905년 굴욕적인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기개 있는 선비와 우국지사들은 분하고 억울함을 참지 못하여 다투어 의병을 조직하고 더러는 자결하기도 하는 시국상황이 전개되던 무렵에 당시 시찰사 정환직이 고종 황제로부터 "경이 화천지수를 아는가?(華泉之水知呼朕望)"라는 밀지(密旨)를 받게 되었다. 이는 제나라 환공(桓公)을 적의 추격에서 탈출시킨 봉추부의 고사로서,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는 데 힘써 달라는 황제의 간곡한 당부가 담겨있는 것이었다.
이에 정환직은 사직한 후 아들 정용기와 함께 논의한 끝에, 아버지 정환직은 서울에서 군사를 모집, 가산을 정리하여 각종 무기를 마련하고, 특히 인천의 중국 상인들을 통하여 신식무기를 몰래 들여와 이를 석 달 후까지 강릉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리고 아들 정용기는 고향인 영천에서 의병을 규합, 강릉으로 북상하되, 대구, 대전을 거치게 되면 반드시 왜병들의 강한 저항이 있을 것이므로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기로 하고, 도중에 이미 세력을 크게 떨치고 있는 영덕의 신돌석 의진과도 합세하기로 했다.
이런 작전 계획들을 수립한 후 정용기는 즉시 영천으로 내려와 평소에 뜻을 같이 하던 친구인 이한구, 정순기 등과 함께 인근 각처의 선비와 유림들에게 격문을 보내 의병을 규합하니, 순식간에 3천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 무렵이 바로 광무 10년(1906) 2월이었는데, 대장에는 정용기가 추대되고, 군호를 산남의진으로 칭했다.
1907년 8월 영덕군 달산면 팔각산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들과 산남의진은 격전이 벌어졌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사흘간 계속하다가 일단 후퇴한 산남의진은 장기전에 대비하여 겨울 채비를 한 후 9월 10일까지 재집결토록 하였다.
영천시 자양면 검단리 본가에 머물러 있던 정환직이 이튿날 비보를 접하고 입암의 격전지로 달려가 시체들을 수습한 후 의진을 재결성하여 그해 9월 27일 정환직이 2대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 해 10월에는 곳곳에서 일본군의 주둔지를 급습해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니, 포항지역의 모든 일본군과 일본인들이 산남의진을 크게 두려워했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사정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부족한 군량미에 날씨마저 추워진데다 산남의진의 기세에 놀란 일군이 병력을 증강시켜 더는 지탱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에 정환직 대장은 일단 의진을 해산하고 때를 기다리기로 결정한 뒤 적의 형세를 살피기 위해 두 명의 부하와 함께 청하에 잠입하였다. 하지만 내연산 깊숙한 뿔밭에서 정환직은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영천 감옥에 수감된 지 얼마 안 되어 두 부하와 함께 총살을 당하였다.
최세윤 대장은 전체 의병을 4개 대대로 편성하고 게릴라 전술을 감행하여 흥해, 영양, 진보, 안동 등에서 크고 작은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이 무렵에 와서 포항지역이 산남의진의 주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하지만 1908년 7월, 옛 장기 내남면(현 경주시 양북면)에서 최세윤 대장이 체포된다. 최세윤 대장은 대구로 압송되어 3년에 걸친 고문과 회유를 견뎌내고, 1911년 11월 10년형을 언도받는다. 이후 최세윤 대장은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8년간의 옥고를 겪다가 1916년 8월 9일, 11일간의 단식 끝에 순국했다.
최세윤 대장을 잃으면서 산남의진은 구심력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이 땅에서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 자주 독립 국가를 이루겠다는 성스러운 뜻을 품은 지 4년여 만인 1909년, 그 의로운 횃불을 민족의 가슴 속에 밝혀 놓은 채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위 자료는 『포항문학』32호(포항문인협회, 2009) <포항 속의 포항-죽장>에서 발췌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