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과 내 어릴 적(6) - 군사를 일으키다 큰 검은 갓을 쓰시고 동저고리 바람으로 일을 보고 계셨다. 방문 앞에 놓인 수철 화로의 약탕관에서 김이 나고 끓고 있는데 독삼탕 냄새가 났다. 선생이 잡수시는 것이라고 한다. 방 내외에는 여러 제자들이 옹위하고 있다.
그 중에도 가장 친근하게 모시는 이는 손응구(孫應九), 김연국(金演局), 박인호(朴寅浩) 같은 이들인데, 손응구는 장차 해월 선생의 후계자로 대도주가 될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로서 깨끗한 청년이었고, 김은 연기가 사십은 되어 보이는데 순실한 농부와 같았다. 이 두 사람은 다 해월 선생의 사위라고 들었다. 손씨는 유식해 보이고 '천을천수(天乙天水)'라고 쓴 부적을 보건대 글시 재주도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 일행이 해월 선생 앞에 있을 때에 놀라운 보고가 들어왔다.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전봉준(全琫準)이가 벌써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또 후보(後報)가 들어왔다. 어떤 고을 원이 도유 - 동학도를 닦는 선비 - 의 전가족을 잡아 가두고 가산을 강탈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를 들으신 선생은 진노하는 낯빛을 띠고 순 경상도 사투리로,
"호랑이가 몰려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우지"
하시니 선생의 이 말씀이 곧 동원령이었다. 각지에서 와서 대령하던 대접주(大接主)들이 물끓듯 살기를 띠고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각각 제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싸우자는 것이었다.
우리 황해도에서 온 일행도 각각 접주라는 첩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두건 속에 '해월인(海月印)이라고 전자로 새긴 인이 찍혀 있었다. 선생께 하직하는 절을 하고 물러나와 잠시 속리산을 구경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어섰다.
벌서 곳곳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이고 평복에 칼 찬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되어 있었다. 광혜원(廣惠院) 장거리에 오니 만 명이나 됨직한 동학군이 진을 치고 행인을 검사하고 있었다. 가관인 것은 평시에 동학당을 학대하던 양반들을 잡아다가 길가에 앉히고 짚신을 삼기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증거를 보이고 무사히 통과하였다. 부근 촌락에서 밥을 짐으로 지어 가지고 도소(都所), 이를테면 사령부로 날라오는 것을 무수히 길에서 만났다. 논에서 벼를 베던 농민들이 동학군이 물밀 듯 모여드는 것을 보고 낫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도 보았다. 서울에 이르러 경군 - 서울 군사 - 이 삼남(三南)을 향하여서 행군하는 것과 만났다. 9월에 해주에 돌아왔다.
황해도 동학당들도 들먹들먹하고 있었다. 첫째로는 양반과 관리의 압박으로 도인들의 생활이 불안하였고, 둘째로는 삼남 -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 으로부터 향응하라는 경통이 빗발치듯 왔다. 그래서 15접주를 위시하여 여러 두목들이 회의한 결과 거사하기로 작정하고 제1회 총소집의 위치를 해주 죽천장(竹川場)으로 정하고 각처 도인에게 경통을 발하였다.
나는 팔봉산 밑에 산다고 하여서 접 이름을 팔봉이라고 짓고 푸른 갑사에 '팔봉도소(八峰都所)'라고 크게 쓴 기를 만들고 표어로는 '척양척왜(斥洋斥倭)' 넉 자를 써서 높이 달았다. 그리고는 서울서 토벌하러 내려올 경군과 왜병과 싸우기 위하여 연비 중에서 총기를 가진 이를 모아서 군대를 편제하기로 하였다.
나는 본시 산협장생이요, 또 상놈인 까닭에 산포수 연비가 많아서 다 모아본즉 총을 가진 군사가 7백 명이나 되어 무력으로는 누구의 접보다도 나았다. 인근 부호의 집에 간직하였던 야간의 호신용 무기도 모아 들였다.
최고 회의에서 작정한 전략으로는 우선 황해도의 수부인 해주성을 빼앗아 탐관오리와 왜놈을 다 잡아 죽이기로 하고 팔봉 접주 김창수로 선봉장을 삼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병서에 소양이 있고 또 내 부대에 산포수가 많은 것도 이유이겠지만 자기네가 앞장을 서서 총알받이가 되기 싫은 것이 아마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쾌히 선봉이 되기를 허락하고 다른 부대더러 뒤에 따라오라 하고 나는 '선봉(先鋒)'이라고 쓴 사령기를 들고 말을 타고 선두에 서서 해주성을 향하여 전진하여서 해주성 서문 밖 선녀산에 진을 치고 총공격령이 내리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총지휘부에서 총공격령이 내리고 작전 계획은 선봉장인 나에게 일임한다는 명령이 왔다. 나는 이렇게 계획을 세워서 본부에 아뢰고 곧 작전을 개시하였다. 지금 성내에 아직 경군은 도착하지 아니하고 오합지중(烏合之衆)으로 된 수성군(守城軍) 2백 명과 왜병 일곱 명이 있을 뿐이니 선발대로 하여금 먼저 남문을 엄습케 하여 수성군의 힘을 그리로 끌게 한 후에 나는 서문을 깨뜨릴 터인즉 총소(總所) - 도소에 대한 말이니 총사령부라는 뜻 -에서 형세를 보아서 허약한 편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총소에서는 내 계획을 채용하여 한 부대를 남문으로 향하여 행진케 하였다.
이때에 수명의 왜병이 성 위에 올라 대여섯 방이나 시험 사격을 하는 바람에 남문으로 향하던 선발대는 도망하기를 시작하였다. 왜병은 이것을 보고 돌아와서 달아나는 무리에게 총을 연발하였다. 나는 이에 전군을 지휘하여서 서문을 향하여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돌연 총소에서 퇴각하라는 명령이 내리고 우리 선봉대는 머리도 돌리기 전에 뒤에 따르던 군사가 산으로 들로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한 군사를 붙들어 퇴각하는 까닭을 물으니 남문 밖에 도유 서너 명이 총에 맞아 죽은 까닭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니 선봉대만 혼자 머물 수도 없어서 비교적 질서있게 퇴각하여 해주에서 서쪽으로 80리 되는 회학동(回鶴東) 곽감역(郭監役) 댁에 유진하기로 하였다. 무장한 군사는 축이 안 나고 거의 전부 따라와 있는 것이 대견하였다.
나는 이번의 실패에 분개하여서 잘 훈련된 군대를 만들기에 힘을 다하기로 하였다. 동학 도유거나 아니거나 간에 장교의 경험이 있는 자는 비사후폐(秘事厚幣)로 초빙하여다가 군사를 훈련하는 교관으로 삼았다. 총쏘기는 말할 것도 없고 행보하는 법이며 체조며 온갖 조련을 다하였다. 좋은 군대를 만드는 것이 싸움에 이기는 비결이라고 믿은 것이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 둘이 내게 면회를 청하였다. 구월산 밑에 사는 정덕현(鄭德鉉), 우종서(禹鍾瑞)라는 사람들이었다. 찾아온 까닭을 물었더니 그 대답이 놀라웠다. 동학군이란 한 놈도 쓸 것이 없는데 들은즉 그대가 좀 낫단 말을 듣고 한 번 보러 왔다는 것이다. 옆에 있던 내 부하들이 두 사람의 말이 심히 불공함을 분개하였다. 나는 도리어 부하를 책망하여 밖으로 내어보내고 나서 이상한 손님과 셋이서 마주앉았다.
우리집과 내 어릴 적(7) - 동학 접주 이름을 버리다 나는 공손히 두 사람을 향하여 '선생'이라고 존칭하고, 이처럼 찾아와 주셨으니 무슨 좋은 계책을 가르쳐 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런즉 정씨가 더욱 교만한 태도로 말하기를, 비록 계책을 말하기로니 네가 알아듣기나 할까, 실행할 자격이 없으리라고 비웃은 뒤에, 더욱 호기 있는 어성으로, 동학 접주나 하는 자들은 어줍지 않게 호기가 충천하여 선비를 초개(草芥)와 같이 보니 너도 그런 사람이 아니냐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더욱 공손한 태도로,
"이 접주는 다른 접주와 다를는지 선생께서 한 번 가르쳐 보신 뒤에야 알 것이 아닙니까?"
하였다. 그들은 둘이 다 니보다 십년장은 될 것 같았다.
그제야 정씨가 흔연히 내 손을 잡으며 계책을 말하였다. 그것은 이러하였다.
(1) 군기를 정숙히 하되 비록 병졸을 대하더라도 하대하지 아니하고 경어를 쓸 것.
(2) 인심을 얻을 것이니 동학군이 총을 가지고 민가로 다니며 집곡이니 집전이니 하고 강도적 행위를 하는 것을 엄금할 것.
(3) 초현(招賢)이니 어진 이를 구하는 글을 돌려 널리 좋은 사람을 모을 것.
(4) 전군을 구월산에 모으고 훈련할 것.
(5) 재령, 신천 두 고을에 왜(倭)가 사서 쌓아 둔 쌀 2천 석을 몰수하여 구월산 패엽사(貝葉寺)에 쌓아 두고 군량으로 쓸 것.
나는 곧 이 계획을 실시하기로 하고 즉시 전군을 집합장에 모아 정씨를 모주(謀主), 우씨를 종사(從事)라고 공포하고 전군을 지휘하여 두 사람에게 최경례(最敬禮)를 시켰다. 그러고는 구월산으로 진을 옮길 준비를 하던 차에 어떤 날 밤에 신천 청계동 안 진사(安 進士)로부터 밀사가 왔다. 안 진사의 이름은 태훈(泰勳)이니 그의 맏아들 중근(重根)은 나중에 이등박문을 죽인 안중근이다. 그는 글 잘하고 글 잘 쓰기로 이름이 서울에까지 떨치고 또 지략도 있어 당시 조정의 대관들까지도 그를 무섭게 대우하였다.
동학당이 일어나매 안 진사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인 청계동 자택에 의려소(義旅所)를 두고 그의 자제들로 하여금 모두 의병이 되게 하고 포수 3백 명을 모집하여서 벌써 신천 지경 안에 있는 동학당을 토벌하기에 많은 성공을 하여서 각 접이 다 이를 두려워하고 경계하던 터이었다.
나는 정 모주로 하여금 이 밀사를 만나게 하였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나의 본진이 있는 회학동과 안 진사의 청계동이 불과 20리 거리이니 만일 내가 무모하게 청계동을 치려다가 패하면 내 생명과 명성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러하면 좋은 인잴ㄹ 하나 잃어버리게 될 것인즉 안 진사가 나를 위하는 호의로 이 밀사를 보냈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곧 나는 참모 회의를 열어서 의논한 결과 저편에서 나를 치지 아니하면 나도 저편을 치지 아니할 것, 피차에 어려운 지경에 빠질 경우에는 서로 도울 것이라는 밀약이 성립되었다.
예정대로 나의 군사는 구월산으로 집결하였다. 재령, 신천에 있던 쌀도 패엽사로 옮겨왔다. 한 섬을 져 오면 서 말을 준다고 하였더니 당일로 다 옮겨졌다. 날마다 군사 훈련도 여행(勵行)하였다. 또 인근 각동에 훈령하여 동학당이라고 자칭하고 민간에 행패하는 자를 적발하여서 엄벌하였더니 며칠이 안 지나서 질서가 회복되고 백성이 안도하였다.
또 초현문을 발표하여 널리 인재도 수탐하였다. 송종호(宋宗鎬), 허곤(許坤) 같은 유식한 사람을 얻었다. 패엽사에는 하은당(荷隱堂)이라는 도승이 있어서 수백 명 남녀 승도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나는 가끔 그의 법설을 들었다.
이러는 동안에 경군과 왜병이 해주를 점령하고 옹진, 강령 등지를 평정하고 학령을 넘어온다는 기별이 들렸다. 그들의 목표가 구월산일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화근은 경군이나 왜병에 있지 아니하고 나와 같은 동학당인 이동엽(李東燁)의 군사에 있었다.
이동엽은 구월산 부근 일대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잡은 접주로서 그의 부하는 나의 본진 가까이까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함부로 하였다. 우리 군에서는 사정없이 그들을 체포하여 처벌하였기 때문에 피차간에 반목이 깊어진 데다가 우리 군사들 중에 군율에 의한 형벌을 받고 앙심을 품은 자와 노략질을 마음대로 하고 싶은 자들이 이동엽의 군대로 달아나는 일이 날로 늘었다.
이리하여 이동엽의 세력은 날로 커지고 내 세력은 날로 줄었다. 이에 나는 최고 회의를 열고 의논한 결과 나는 동학 접주인 칭호를 버리기로 하고 군대를 허곤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이는 나의 병권을 빼앗으려 함이 아니오, 나를 살려내고자 하는 계책이었다. 이에 허곤은 송종호로 하여금 평양에 있는 장호민(張好民)에게 보내는 소개 편지를 가지고 평양으로 떠나게 하였으니 이것은 황주 병사의 양해를 얻어서 일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함이었다.
이때는 내 나이가 열 아홉, 갑오년(甲午年) 섣달이었다. 나는 몸에 열이 나고 두통이 심하여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하은당 대사는 나를 그의 사처인 조실에 혼자 있게 하고 몸소 병구완을 하였다. 수일 만에 내 병이 홍역인 것이 판명되어서 하은당은,
"홍역도 못한 대장이로군"
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홍역을 다스린 경험이 있는 늙은 승수자(承受者) 한 분을 가려 내 조리를 맡게 하였다.
이렇게 병석에 누워 있노라니 하루는 이동엽이 전군을 이끌고 패엽사로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있고 뒤이어 어지러이 총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절 경내에는 양군의 육박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원래 사기가 저상한 데다가 장수를 잃은 나의 군사들은 불의의 습격을 받아서 일패도지(一敗塗地)하고 나의 본진은 적의 제압한 바 되고 말았다. 나의 군사들은 보기에도 흉하게 도망하여 흩어지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이동엽의 호령이 들렸다.
"김 접주에게 손을 대는 자는 사형(死刑)에 처한다. 영장 이종선(領將 李鍾善) 이놈만 잡아 죽여라."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불을 차고 마루 끝에 뛰어 나가서,
"이종선은 내 명령을 받아서 무슨 일이나 한 사람이니 만일 이종선이가 죽을 죄를 지었거든 나를 죽여라!"
하고 외쳤다.
이동엽이 부하에게 명하여서 나를 꼭 껴안아서 수족을 놀리지 못하게 하고 이종선만을 끌고 나가더니 이윽고 동구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이동엽의 부하는 다 물러가고 말았다.
이종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동구로 달려 내려갔다. 과연 그는 총을 맞아 쓰러지고 그의 몸에 입은 옷은 아직도 불에 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안고 통곡하다가 내 저고리를 벗어 그의 머리를 싸주었다. 이 저고리는 내가 남의 웃사람이 되었다 하여 어머니께서 지어 보내주신 평생 처음 입어보는 명주 저고리였다. 동민들은 백설 위에서 내가 벌거벗고 통곡하고 앉았는 것을 보고 의복을 가져다가 입혀 주었다. 나는 동민들을 지휘하여 이종선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우리 집과 내 어릴 적(8) - 청계동 안 진사의 집으로 이종선은 함경도 정평 사람으로서 장사차로 황해도에 와서 살던 사람이다. 총사냥을 잘하고 비록 무식하나 사람을 거느리는 재주가 있으므로 내가 그를 화포령장(火砲領將)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종선을 매장한 나는 패엽사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부상동 정덕현 집으로 갔다. 내게서 그 동안 지낸 일을 들은 정씨는 태연한 태도로,
"이제 형은 할 일 다한 사람이니 편안히 쉬고서 유람이나 떠나자"
하고 내가 이종선의 원수 갚을 말까지도 눌러 버리고 말았다. 이동엽이가 패엽사를 친 것은 제 손으로 저를 친 것과 마찬가지다, 경군과 왜병이 이동엽을 치기를 재촉한 것이라고 하던 정씨의 말이 그대로 맞아서 정씨와 내가 몽금포 근처에 숨어 있는 동안에 이동엽을 잡혀가서 사형을 당하였다. 구월산의 내 군사와 이동엽의 군사가 소탕되니 황해도의 동학당은 전멸이 된 셈이었다.
몽금포 근동에서 석 달을 숨어 있다가 나는 정씨와 작반(作伴)하여 텃골에 부모를 찾아뵈옵고 정씨의 의견을 좇아 청계동 안 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하기로 하였다. 나는 패군지장으로 일찍 적군이던 안 진사의 밑에 들어가 포로의 대우를 받을 것을 불쾌히 생각하였으나 정씨는 안 진사의 위인이 그렇지 아니하여 심히 인재를 사랑한다는 말과 전에 안 진사가 밀사를 보낸 것도 이런 경우를 당하면 자기에게 오라는 듯이라고 역설하므로 나는 그 말대로 한 것이었다.
텃골 본향에서 부모님을 뵈온 이튿날 정씨와 나는 곧 천봉산(千峰山)을 넘어 청계동에 다다랐다. 청계동은 사면이 험준하고 수려한 봉란으로 에워 있고 동네에는 띄엄띄엄 40, 50호의 인가가 있으며, 동구 앞으로 한 줄기 개울이 흐르고 그곳 바위 위에는 '청계동천(淸溪洞天)'이라는 안 진사의 자필 각자가 있었다. 동구를 막는 듯이 작은 봉우리 하나가 있는데 그 위에는 '포대'가 있고 길어귀에 파수병이 있어서 우리를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명함을 드리고 얼마 있노라니 의려장(義旅長)의 허가가 있다 하여 한 군사가 우리를 안내하여 의려소인 안 진사 댁으로 갔다. 문전에는 연당이 있고, 그 가운데는 작은 정자가 있는데 이것은 안 진사 6 형제가 평일에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곳이라고 한다. 대청 벽상에는 의려소 석 자를 횡액으로 써 붙였다. 안 진사는 우리를 정청에 영접하여 수인사를 한 후에 제일 첫 말이,
"김 석사가 패엽사에서 위험을 면하신 줄을 알았으나 그 후 사람을 놓아서 수탐하여도 계신 곳을 몰라서 우려하였더니 오늘 이처럼 찾아주시니 감사하외다"
하시고 다시,
"들으니 구경(俱慶) 하라 하시던데 양위 분은 안접하실 곳이 있으시오?"
하고 내 부모에 관한 것을 물으신다.
내가 별로 안접하실 곳이 없는 뜻을 말하였더니 안 진사는 즉시로 오일선(吳日善)에게 총 멘 군사 30명을 맡기며,
"오늘 안으로 텃골로 가서 김 석사 양위를 뫼셔 오되, 근동에 있는 우마를 징벌하여 그 댁 가산 전부를 반이해 오렷다"
하고 영을 내렸다. 이리하여 우리 집이 청계동에 우접하게 되니 내가 스무 살 되던 을미년 2월 일이었다.
내가 청계동에 머문 것은 불과 4,5 삭이지마는 이 동안은 내게는 심히 중요한 시기였다. 그것은 첫째로는 내가 안 진사과 같은 큰 인격에 접한 것이요, 둘째로는 고 산림(高山林)과 같은 의기 있는 학자의 훈도를 받게 된 것이었다.
안 진사는 해주 부중에 10여 대나 살아오던 구가의 자제였다. 그 조부 인수(仁壽)가 진해 현감을 지내고는 세상이 차차 어지러워짐을 보고 세상에서 숨을 뜻을 두어 많은 재산을 가난한 일가에게 나누어 주고 약 3백 석 추수하는 재산을 가지고 청계동으로 들어오니 이는 그곳이 산천이 수려함과 족히 피난처가 될 만한 것을 취함이었다. 이때는 장손인 중근이 두 살 적이었다.
안 진사는 과거를 하려고 서울 김종한(金宗漢)의 문객이 되어 다년 유경(留京)하다가 진사가 되고는 벼슬할 뜻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형제 여섯 사람이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고 뜻 있는 벗을 사귀이기로 낙을 삼고 있었다. 안씨 6 형제가 다 문장 재사(文章才士)라 할 만하지마는 그 중에서도 셋째인 안 진사가 눈에 정기가 있어 사람을 누르는 힘이 있고, 기상이 뇌락(磊落)하여 비록 조정의 대관이라도 그와 면대하면 자연 경외(敬畏)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내가 보기에는 그는 퍽 소탈하여서 비록 무식한 하류들에게까지도 조금도 교만한 빛이 없이 친절하고 정녕하여서 상류나 하류나 다 그에게 호감을 가졌었다. 얼굴이 매우 청수하나 술이 과하여 코 끝이 붉은 것이 흠이었다. 그는 율을 잘하여서 당시에도 그의 시가 많이 전송되었고, 내게도 그가 득의의 작을 흥 있게 읊어주는 일이 있었다. 그는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를 자필로 써서 벽장문에 붙이고 취흥이 나면 소리를 높여서 그것을 낭독하였다.
그 때에 안 진사의 맏아들 중근은 열 세 살로서 상투를 짜고 있었는데 머리를 자주 수건으로 질끈 동이고 돔방총이라는 짧은 총을 메고 날마다 사냥을 일삼고 있어 보기에도 영기가 발발하고 청계동 군사들 중에 사격술이 제일이어서 짐승이나 새나 그가 겨눈 것은 놓치는 일이 없기로 유명하였다.
그의 계부 태건과 함께 언제나 함께 사냥을 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잡아오는 노루와 고라니로는 군사들을 먹이고 또 진사 6 형제의 주연의 안주를 삼았다. 진사의 둘째 아들 정근(定根)과 셋째 공근(恭根)은 다 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인 도련님들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진사는 이 두 아들에게 대하여서는 글을 아니 읽는다고 걱정도 하였으나 중근에 대하여서는 아무 간섭도 아니하는 모양이었다.
고 산림의 이름은 능선(能善)인데 그는 해주 서문 밖 비동에 세거하던 사람으로서 중암 조중교(重菴 趙重敎)의 문인이요, 의암 유인석(柳麟錫)과 동문으로서 해서에서는 행검으로 굴지되는 학자였다. 이도 안 진사의 초청으로 이 청계동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내가 고 산림을 처음 대한 것은 안 진사의 사랑에서여니와 그는 날더러 자기의 사랑방에 놀러 오라는 말을 하므로 나는 크게 감복하여서 이튿날 그의 집에 찾아갔다. 선생은 늙으신 낯에 기쁨을 띠시고 친절하게 나를 영접하시고 아드님 원명(元明)을 불러 나와 상면케 하였다. 원명은 나이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데 자품은 명민한 듯하나 크고 넓음이 그 부친의 뒤를 이을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원명에게는 15, 16세나 된 맏딸이 있었다.
우리 집과 내 어릴 적(9) - 특별한 만남 고 선생이 거처하시는 사랑은 작은 방 하나인데 사람들의 좌우명과 선생 자신의 심득 같은 것을 둘러 붙였으며, 선생은 가만히 꿇어앉아서 마음을 잡는 공부를 하시며 간간이 '손무자' '삼략' 같은 병서도 읽으셨다.
고 선생은 날더러, 내가 매일 안 진사 집 사랑에 가서 놀더라도 정신 수양에는 효과가 적을 듯하니 매일 선생의 사랑에 와서 같이 세상사도 말하고 학문도 토론함이 어떠냐고 하였다. 나는 이러한 대 선생이 내게 대하여 이처럼 특별한 지우(知遇)를 주시는 것을 눈물겹게 황송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나는 좋은 마음 가진 사람이 되려던 소원을 말씀드리고 모든 것을 고 선생의 지도에 맡긴다는 성의를 표하였다.
과거에 낙심하고 관상에 낙심하고 동학에 실패한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리를 가지게 되었었다. 나 같은 것도 고 선생과 같으신 큰 학자의 지도로 한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있을까? 스스로 의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런 말씀을 아뢰었더니 고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저를 알기도 쉬운 일이 아니어든 하물며 남의 일을 어찌 알랴. 그러므로 내가 그대의 장래를 판단할 힘은 없으나 내가 한 가지 그대에게 확실히 말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성현을 목표로 하고 성현의 자취를 밟으라는 것이다. 이렇게 힘써 가노라면 성현의 지경에 달하는 자도 있고 못 미치는 자도 있거니와 이왕 그대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될 뜻을 가졌으니 몇 번 길을 잘못 들더라도 본심만 변치 말고 고치고 또 고치고 나아가고 또 나아가면 목적지에 달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괴로워하지 말고 행하기만 힘 쓰라."
이로부터 나는 매일 고 선생 사랑에 갔다. 선생은 내게 고금의 위인을 비평하여 주고 당신의 연구하여 깨달은 바를 가르쳐 주고 화서아언(華西雅言)이며, '주자백선(朱子百選)'에서 긴요한 절구를 보여 주셨다.
선생이 특히 역설하시는 바는 의리에 관해서였다. 비록 뛰어난 재능이 있더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그 재능이 도리어 화단이 된다고 하셨다.
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치는 방법을 취하지 아니하고 내 정신과 재질을 보셔서 뚫어진 곳은 깁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구전심수(口傳心授)의 첩경을 택하심이었다. 선생은 내게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보셨음인지, 아무리 밝히 보고 잘 판단하였더라도 실행할 과단력이 없으면 다 쓸데 없단 말씀을 하시고,
'나무가지를 잡아도 발에는 힘주지 않고 언덕에 매달려도 손에 힘주지 않는 것이 장부이다 (得樹樊枝不足奇 懸崖撒手丈夫兒)'
라는 글귀를 힘있게 설명하셨다.
가끔 안 진사가 고 선생을 찾아오셔서 두 분이 고금의 일을 강론하심을 옆에서 듣는 것은 참으로 비할 데 없이 취미 있는 일이었다.
나는 가끔 고 선생 댁에서 놀다가 저녁밥을 선생과 같이 먹고 밤이 깊고 인적이 고요할 때까지 국사를 논하는 일이 있었다.
고 선생은 이런 말씀도 하셨다. 예로부터 천하에 흥하여 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고 망해 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도 갸륵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어느 나라 국민이 의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그와 달라서 백성이 여러 패로 갈려서 한 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 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외국에는 아첨하고 제 동포와는 싸워서 망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다.
이제 왜의 세력이 전국에 충만하여 궐내에까지 침입하여서 대신도 저의 마음대로 내고 들이게 되었으니 우리 나라가 제2 왜국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고에 망하지 아니한 나라가 없고 천하에 죽지 아니한 사람이 있던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일건사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선생은 비감한 낯으로 나를 보시고 나는 비분을 못 이겨서 울었다.
망하는 우리 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는가 하는 내 물음에 대하여서는 선생은 청국과 서로 맺는 것이 좋다 하시고 그 이유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청국이 갑오년 싸움에 진 원수를 반드시 갚으려 할 것이니 우리 중에서 상당한 사람이 그 나라에 가서 그 국정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교의를 맺어 두었다가 후일에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 두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선생의 이 말씀에 감동하여 청국으로 갈 마음이 일어났다. 그러나 나와 같이 어린 것이 하나 가기로 무슨 일이 되랴 하는 뜻을 말씀드린즉 선생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책망하시고 누구나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혼자만이라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니 저마다 남이 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저마다 제 일을 하면 자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라, 어떤 사람은 정계에, 또 어떤 사람은 학계나 상계에, 이처럼 제가 합당한 방면으로 활동하여서 그 결과가 모이면 큰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 나는 청국으로 갈 결심을 하고 그 뜻을 고 선생께 아뢰었다. 선생은 크게 기뻐하셔서 내가 떠난 뒤에는 내 부모까지도 염려 말라 하셨다.
나는 의리로 보아 이 뜻을 안 진사에게 통함이 옳을까 하였으나 고 선생은 이에 반대하였다.
안 진사가 천주학(天主學)을 믿을 의향이 있는 모양인데 만일 그렇다면 이는 양이(洋夷 ; 서양 오랑캐)를 의뢰하려 함이니 대의에 어그러지는 일인즉 지금 이런 큰 일을 의논할 수 없다. 그러나 안 진사는 확실히 인재니 내가 청국을 유력한 뒤에 좋은 일이 있을 때에 서로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아니하니 이번에는 말없이 떠나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이나 고 선생의 지시대로 하기로 결심하고 먼길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우리 집과 내 어릴 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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