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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타격대 3조로 활동
증언자 : 염동유(남)
생년월일 : 1957. 7. 20(당시 나이 23세)
직 업 : 다방 주방장(현재 보일러 설비공)
조사일시 : 1989. 6
개 요
5월 20일부터 차량시위를 하고 22일부터는 도청에 들어가 무기회수, 시체를 지키는 일을 했다. 24일 기동순찰대에 편성되어 지원동에서 외곽경비를 보다가 26일 기동타격대 3조에 배치받고 백운동에서 외곽경비를 섰다. 27일 새벽 도청에서 체포되어 1981년 4월 석방됐다.
살기에 바빠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는 화순군 도곡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다섯 마지기의 논농사로 많은 식구들이 살아가기엔 무척 어려웠다. 중학교는 들어갔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중간에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14세 때 광주로 나와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양장점에서 일하다가 중국집 식당에서 음식을 배달하는 일을 했다. 식당에서는 우동 위에 계란 흰자를 끼얹었는데 나는 다방마다 돌아다니며 계란 흰자를 사러 다녔다. 그러던 차에 대인동 국화다방에서 주방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중국집 배달소년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좀더 좋은 조건이라면 지방도 마다하지 않았다. 해남, 장흥 등지까지 가서 다방 주방장으로 일했다. 돈을 벌면 으레 시골집에 갖다주었다.
나는 항쟁 이전에는 먹고살기에만 급급해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1980년 5월에는 서방에 있는 삼화다실에서 숙식을 하면서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5월 18, 19일쯤 다방에 손님들이 와 공수들이 광주시내에 투입되어 시민과 학생들을 무참히 때린다는 얘기를 했으나 나는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었다.
5월 20일 오후 주인이 다방문을 닫으라고 해서 다방문을 닫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건너편에 있는 양지다방에서 일하고 있는 선배에게 찾아갔다. 선배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막 나오는데, 공수들이 3인 1조가 되어 사람들을 방망이로 두들겨팼다. 나는 순간적인 일에 놀라 기겁을 하고 뒤로 넘어져 다방 안으로 푹푹 기어들어갔다. 다방 안에 있으니 우당탕 하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밖이 어느 정도 조용해지자 나가봤다. 다방 현관의 유리창과 다방 옆의 고기점의 진열장이 모두 깨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다방 손님들의 말을 믿게 되었고 공수들이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때린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시위에 참가하게 되었다.
잠시 후 나이 드신 어른들을 앞에 세우고 그 부근에 있던 시민들이 공용터미널 광장에 있는 40여 명의 공수들을 향해 철수를 요구하며 항의를 했다. 그러자 공수들이 처음에는 물러서지 않다가 계속해서 항의를 하자 광주역 쪽으로 철수했다. 그들이 물러나자 그곳에 모여 있던 시민, 학생들은 걸어서 도청으로 향했다. 도청앞에서는 많은 시위대가 도청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공수들과 투석전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도 보도블럭을 깨서 공수들에게 던졌다. 그러자 공수들은 계속해서 최루탄을 쏘아댔다. 밤 늦게 까지 공수들과 싸우다가 삼화다실로 돌아왔다.
다방에서 혼자 잠을 자려는데, 공수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몹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문을 꼭꼭 걸어잠궜는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베개 속에 식칼을 숨겨놓고 잠을 잤다.
무기를 회수하고 시체를 지키고
5월 21일 아침 일찍 일어나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시골집인 화순 도곡으로 갔다. 괜히 어머님이 보고 싶어서였다. 어머님은 모내기를 하시면서 광주에 난리가 났으니 절대 가지 말라고 했다. 나는 남의 집에서 일을 하니까 가봐야 된다며 점심때가 못돼서 광주로 돌아왔다.
시외버스를 타고 공용터미널로 가는데 시민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그리고 전에는 별로 볼 수 없었던 시위 차가 많이 돌아다녔다. 나는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서 내려 삼화다실로 걸어가 다방에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서방 삼거리에서 지나가는 봉고차를 타고 도청으로 향했다.
금남로에서 내려 도청 앞의 전남매일신문사 앞으로 갔다. 전남매일신문사 앞에 막 서 있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옆을 보니 청년이 어깨 관통상을 입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사람을 병원으로 데려갔다. 나는 총소리가 계속해서 들리자 몸을 피했다. 방금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청년의 모습이 계속 지워지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공수들을 내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광주고속버스를 타고 광주시내 일대를 돌아다녔다. 얼굴도 모르는 전두환이 물러가라고 외치고 김대중 씨를 석방하라고 소리높이 외쳤다. 가끔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나는 항상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누군가가 준 태극기를 머리에 두르고 또 대형 태극기를 창밖으로 흔들었다. 그러면 시민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환영해 주었고 거리거리마다 주먹밥, 음료수, 빵 등을 올려주었다. 일신방직 앞에서는 그 공장에 다니는 아가씨들 7, 8명이 차에 타기도 했다. 그날 저녁은 그렇게 차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하룻밤을 보냈다.
22일 아침 도청으로 들어갔다. 수위실 옆에서는 언제 총이 나왔는지도 모르는데 무기를 회수하고 있었다. 나는 광주시민이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같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5, 6명의 청년들과 함께 무기를 회수하는 일을 시작했다. 주로 개인이 총을 들고 왔고 무기회수반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차를 타고 다니면서 무기를 회수해 왔다. 무기가 들어오면 먼저 실탄이 장전돼 있는지 확인하고 총알이 들어 있으면 총알을 뺀 후 수위실 옆 바닥에 차곡차곡 쌓아뒀다. 밤늦게까지 무기회수하는 일을 도왔다. 약 3백-4백 자루의 총과 수백 발의 실탄이 회수됐다. 총의 종류는 카빈과 M1뿐이었다.
밤이 되자 도청 뒤에 있는 도경찰국 1층 사무실로 갔다. 그곳에는 여러 명의 청년이 있었다. 그 사무실에는 TV와 침대, 그리고 수십 벌의 경찰복이 있었다. 우리는 경찰복을 모두 입었다. 그때 전화를 하려는데 전화가 도청이 되었는지 잡음이 많았고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샜다.
5월 23일은 서너 명의 청년들과 함께 시체를 지키는 일을 했다. 민원봉사실과 도청 본관 사이의 길에서 시체를 지켰다. 약 30구 정도의 시체가 있었는데 거의 가슴, 목, 다리에 총을 맞은 남자들의 시체가 많았다. 시체는 얇은 베니어판으로 만든 관에 뚜껑만 열어두었다. 시체의 가족들이 나타나지 않아 염은 하지 않은 채 향을 피웠으나 시체 냣는 냄새가 매우 고약했다. 그래서 마스크를 쓸 수밖에 없었다. 시체 옆에서 소주를 먹었고 또 누군가 가져다주어 안주 삼아 배를 먹었다. 밥은 입에 댈 수가 없었다. 시체를 지킬 때 김종배 씨가 다녀가기도 했다.
23일 밤을 시체 옆에서 지내고 그 다음날 오전까지 시체를 지켰다. 내가 시체를 지키는 동안 시체의 가족들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기동순찰대 활동
24일 오후 도청내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동순찰대를 모집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시체를 지키는 일이 지겹기도 하고 또 남자라면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기동순찰대를 모집하는 도청 현관 앞으로 갔다. 그곳에는 약 50- 60여 명의 젊은 청년들이 모였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젊은 사람이 지휘를 했다.
순찰대 역할은 계엄군의 동태파악과 불순분자를 색출하는 일이었다. 화순, 담양, 나주 방면으로 나가는 외곽지역을 순찰하기로 해 각 지역을 나눴다. 그리고 순찰대원에게 카빈 총과 실탄 3클립을 나눠주었다.
나는 화순이 집이었기 때문에 지원동 쪽에 배치되어 약 2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미니버스를 타고 숭의실고 앞으로 갔다. 미스버스는 철판과 타이어를 이용해 방탄장치를 해뒀다. 그때 화순 너릿재 밑에서 사람들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쪽으로 갔다. 1번버스 종점의 오른편에 있는 산에서 몇 명의 시민군이 리어커에 5, 6구의 시체를 싣고 오고 있었다. 누군가 연락을 했는지 병원의 구급차가 왔다. 그 구급차는 시체를 여러 번에 걸쳐 병원으로 옮겨실었다. 지원동에 있던 우리 기동순찰대원은 시체를 직접 보거나 운반하지 않고 외곽경비를 했다. 숭의실고 앞까지 순찰을 하고 지원동에 계엄군이 진주했으므로 학동 석천다리 밑의 하천에서 경비를 섰다. 우리는 다리를 사이에 놓고 양쪽에 몇십 명이 화순 쪽을 바라보고 총부리를 겨눴다.
밤이 되었을 때 어느 쪽이 먼저 총을 쐈는지 알 수 없으나 격전이 시작되었다. 나는 서울에 있을 때 사격장에서 배운 솜씨로 열심히 방향을 잡고 총질을 했다. 계엄군의 총은 연발로 나가는 것이었고, 우리들 총은 화력이 약해 단발로 나갔다. 어느 쪽에서 사격을 중지했는지 모르지만 총성이 멈췄다. 약 1시간 이상 격전이 있었으나 우리 편에서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그날 밤에 우리들은 다시 도청에 들어와 잠을 잤다.
다음날(25일) 낮에 시민들이 교도소 쪽으로 총을 들고 갔다는 정보가 있었다. 그들의 총을 회수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도청의 1층에 있던 순찰대원들 10여 명이 차 뒤쪽에 총을 세워놓고 군용 트럭을 타고 갔다. 두암동 검문소를 지날 즈음 갑자기 20여 명의 계엄군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차를 포위하고 우리에게 손을 들라고 했다. 우리는 무조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우리를 포승줄로 차에 묶었다. 그리고 차 뒤에 세워뒀던 총과 우리가 입고 있던 군복을 모두 빼았았다. 다행히 모두들 군복 안에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물었다.
"왜 이곳을 지나는 거냐?"
"아니, 시민들이 이쪽으로 총을 가지고 갔다 해서 그들의 총을 회수하려고 이쪽으로 온 것입니다."
"그게 사실이냐?"
"정 믿지 못하겠다면 도청 상황실로 연락을 해보십시오."
"먼저 이쪽을 지나던 녀석들은 총부리를 앞으로 겨누고 갔기 때문에 모두 우리들에 의해 죽었다. 너희들은 다행히 총을 뒤에 세워 앞에서 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살려둔 거야."
그들은 우리를 30분쯤 묶어두더니 상황실과 연락을 했는지 우리를 풀어주었다. 그때 아세아자동차 직원 2명이 우리가 탔던 군용 트럭을 가지러 왔다. 아세아자동차 직원이 운전을 하고 서방 삼거리까지 갔다. 그들은 우리를 서방 삼거리에 내려두고 군용 트럭을 가지고 가버렸다. 우리들은 할 수 없이 걸어서 도청으로 들어왔다.
기동타격대 3조에 배치되어
26일 정오쯤 도청에 들어왔는데 기동타격대를 모집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기동순찰대의 일이 제대로 되지 못하자 다시 타격대를 모집하는 것 같았다. 도청 2층에 있는 사무실로 갔다. 벌써 열댓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윤석루, 이재호, 김종배 씨가 있었다. 기동순찰대였던 청년들이 기동타격대에 많이 들어왔다. 최종적으로 약 50여 명의 청년이 모이자 윤석루, 이재호 씨의 지휘 아래 조를 편성했다. 우리는 계엄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치안의 임무를 맡았다. 1개조에 약 4, 5명씩 6조까지 편성됐고 7조는 보급조를 맡았다. 나는 3조에 편성됐다. 3조에는 5명의 타격대원이 있었는데, 정광호 씨를 제외하고 조장이나 다른 조원들의 이름은 몰랐다. 조를 편성한 후 조장을 뽑았다. 조장은 자진한 경우도 있었고 주위에서 추천하기도 했다. 우리는 각 조마다 군용 지프차 한 대, 무전기 한 대를 지급받았고 개인당 총과 실탄 3클립을 지급받았다. 무전기는 도경에 있던 것이었다. 나는 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탄만 지급받았다. 그 외 도경에 있던 군복, 경찰 혁대, 수갑 등을 지급받았다.
우리는 조를 짠 후 시외곽지역으로 편성을 했다. 산수동 오거리, 동운동, 광천동, 공용터미널 쪽 등 주요 거리에 경계를 폈다. 우리 조는 백운동 로터리를 기점으로 전남대병원까지 경계를 서기로 했다. 우리는 배치를 받고 바로 백운동 로터리로 출동했다. 막 가자마자 오토바이를 탄 사람이 전봇대에 부딪혀 사고가 나 있었다. 가보니 청년이 약간 술에 취해 있었다. 우리는 그를 차에 싣고 전대병원 응급실로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골목골목으로 차를 타고 다니면서 경비를 섰다. 조장이 무전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도청 안의 기동타격대실과 계속 교전을 했다. 주로 어디에 무슨 일이 발생했다고 해서 그쪽으로 출동하면 이미 다른 조가 왔다 가버린 상태였다. 우리 구역에서는 27일 새벽 1시까지 별다른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
도청 앞에서 경비를 서다가 계엄군의 투항하라는 소리에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정보가 있어 27일 새벽 1시경 도청으로 들어왔다. 도청 정문 앞에 차를 세워두고 정문 앞에서 경비를 섰다. 그때는 시멘트로 만든 화분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방패막을 삼았다. 나와 정광호 씨는 함께 있었고, 다른 대원 3명은 옆에서 경비를 섰다. 정문 밖에 경비를 선 대원은 우리뿐이었다.
새벽 3시쯤 되었을 때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계엄군이 쳐들어온 것이었다. 그러나 계엄군들이 도청 정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뒤쪽으로 들어왔다. 도청 쪽에서 총알이 날아와 방패막으로 삼고 있던 화분에 맞았다. 화분이 시멘트라 돌가루가 내 얼굴로 튀어 얼굴에서 피가 났다. 나는 순간 흥분하여 도청 정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 악을 썼다.
"어디 대고 총질이냐? 모두 다 죽인다!"
그렇게 악을 쓰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담배를 3분의 2쯤 피우는데 본격적으로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청 안에서는 계엄군이 계속해서 투항을 종용했다. 나는 조금 전의 기세는 사라져버리고 다만 M16의 연발로 나가는 총소리에 기가 질려 있었다. 나와 정광호 씨는 군복 상의를 벗어 길바닥에 던지고 가지고 있던 카빈 총 역시 길바닥에 던졌다. 군복 하의와 경찰 혁대, 수갑, 기동타격대증은 미처 버리지 못했다. 총소리가 뜸했다가 다시 연발로 들리곤 했다. 총소리가 뜸해지자 우리는 손을 들고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도청 안 분수대쪽에서는 계엄군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옆의 다른 기동타격대원은 쳐다볼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상무대에서도 석방 후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도청 안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엎드려 있었다. 우리 역시 그들처럼 몸을 엎드렸다. 계엄군들은 사람들 위로 밟고 다녔으며 조금이라도 고개를 들면 사정없이 군화발로 찼다. 그들은 위압적으로 악을 쓰며 사람들을 짓이겼다.
유치한 조사
아침 7시쯤 해가 떴을 때 우리는 군용 버스에 태워졌다. 그들은 우리 손에 수갑을 채웠다. 두 명씩 왼손을 묶었으므로 피해도 같이 피해야 하고 움직일 때도 같은 방향과 속도로 움직여야했다. 그때의 흉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우리가 끌려간 곳은 상무대 연병장이었다. 연병장에서 수갑을 풀고 손을 뒤로 한 채 머리를 박는 기합을 받았다. 그리고 앞줄부터 간단한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군복 바지를 입고 있었고 바지 호주머니에 기동타격대증이 있었기 때문에 기동타격대였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들은 책상 위에 손을 올리게 한 후 장작개비로 손가락을 때렸다. 손톱이 빠지고 손가락이 마비되었다. 그날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두들겨맞다가 오후에 영창 안으로 들어갔다.
영창 안으로 들어간 후부터 본격적인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조사도 하기 전에 한바탕 때리고 난 후 조사를 했다. 조사내용은 매우 유치했다.
"너, 가시내들 몇 명이나 겁탈했어?"
"김대중에게서 돈을 얼마 받았냐?"
"사람을 몇 명 죽이고 도둑질은 얼마나 했냐?"
이것들을 부인하면 장작개비로 온몸을 내려쳤다. 그리고 다리 사이에 몽둥이를 끼워넣고 양쪽에서 밟았다. 그러면 다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는데도 그들은 엄살부린다고 했다.
자술서를 수십 번 썼다.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하여 쓰니까 그들은 내 등에 빨간 매직으로 '순악질'이라고 썼다. 기동순찰대 활동은 전혀 얘기하지 않고 이미 드러난 기동타격대 활동만 대충 얘기했다. 수없이 구타당하고 버티는 과정에서 수사는 일단락되고 재판을 받기 시작했다. 상무대에서 기동타격대, 학생, 교수들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1심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받는 도중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4사 하층에 수감되었는데 박남선 씨와 함께 있었다. 다시 재판을 받아 고등법원에서는 3년형을 선고받았다. 교도소에서 교도관들이 학생들을 끌어다가 잠을 재우지 않는 등 여러 가지로 괴롭히자 우리는 3일동안 단식을 했다. 그 결과 면회가 허용되고 영치금이 접수되는 등 수감자들의 처우가 약간 개선됐다. 그러다가 1981년 4월 3일 석방됐다.
석방 후 웬지 광주가 싫어졌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갔다. 몸은 아팠지만 쉴 수만은 없어 서울에서 동생들과 자취를 하면서 소방설비 일을 했다. 그러다가 가정 주택의 보일러를 놔주는 일을 했다. 1985년도에 결혼을 하고 그 다음해에 광주로 내려왔다. 광주에서 가게를 차려놓고 보일러일을 했으나 이제는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으므로 가게를 치워버리고 전화를 받고 일을 하러 다닌다. 상무대에서 다리를 많이 다쳐 지금도 다리를 주물러야 하고 높은 계단은 오르내리기가 불편하다.
5·18을 겪은 후 많은 의식의 변화가 생겼다. 그 이전에는 너무나 정치에 무관심했고 또 그만큼 몰랐으나 이제는 정치가 어떤 것인지 대강은 알 수 있게 되었다. 학생들이 데모하면 항상 관심있게 바라보고 또 동참한다. 5·18때 미국이 우리를 도우러 온다고 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들은 자국의 잇속을 차리기 위해 우리나라를 이용하고 우리 국민을 속인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다. 우리는 미국이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은 우리나라에 하등 있을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가 살길은 미국과 군부독재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조사정리 신봉화) [5.18연구소]
첫댓글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