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젊은시절 군중속의 고독이라는 말처럼 인간이 느끼는 고독에 대해 수필형식으로 쓴 글이다
산보를 하면서 화장터에서 나는 인간의 재를 태운 검은 연기를 보면서 '시간은 영원하고 인간은 그 영원의 바닷가에서 소꿉놀이만 하다 사라진다면 거기에 무슨 시종이 있으며 성패가 있고, 행과 고가 있겠는가' 생각을 한다 본래가 무한 속에 유한이란 있을 수없는 법이며 시간과 영원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 화장터의 사라지는 생명, 육체들을 남의 것으로 보았고 객관적인 사실로 돌렸다.그러나 그것이 나의 현실이라 생각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렇게 쓰여지는 작가의 놀라운 통찰력은 우리들을 사념의 뿌리로 돌아게 하고 사고하게 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의 향수 고향에서의 서정적인 묘사로 우리들을 인간본연의 고향으로 눈을 돌리게 만든다 '생의 애착보다 생의 완성욕, 죽음의 공포보다 현실의 주체아로 설때 비로소 하나의 자아실존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신촌 화장터이 죽음을 무시하고 죽음의 허무를 박차고 생의 줄을 타고 떠났다 안심과 소망과 기대가 있었따. 그 화장터가 멀어질수록 마음의 만족이 찿아왔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또 하나의 화장터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도 비존재에의 가능성, 생의 공허가 있을 뿐이다. 결국 내 생은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앞으로 가려면 공허 위에 매달려 있는 줄이기에 불안하고 뒤로 돌아서려면 마찬가지의 공허가 있다. 그대로 머물러 있자니 아래로 떨어질까 두려워진다. 오히려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사색에 잠겨 앞뒤도 모른 채 살아 왔다는 것 앞을 보지도 않고 생각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내 산책과 같은 생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가지 않는가 . 그러면서 정치를 떠들고 예술을 논하고 학문을 주장하고 돈을 벌고 삶을 즐기고 더군다나 생을 연구한다. 그러는 사이에 인생의 산책은 목적지가 아닌 종점에 도달하고야 마는 것이다. 여기에 20세기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은 먼 옛날 석가세존이 젊을 때 했던 생각의 한 갈래에 지나지 못하며, 나사렛 목수였던 예수가 가리키는 손끝은 세상 사람들이 부정하지 못하고 바라보는 이유가 성립되는 것이 아닐까 .
저자는 독서에 대한 가이드 역할도 한다
처음 읽게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토에프 스키의 죄와벌 까라마죠프의 형제들 , 죽음의 집의 기록 ,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빅토르위고의 레미제라블,카뮈의 이방인 스트린드베리의 치인의 고백등 입센 앙드레 지드 토마스 하디 니체 토마스 만등 많은 등 19시기 후반의 사상가를 언급하고 감동을 받은 것을 이야기 한다 독일의 관념론을 칸트나 헤겔을 이야기 하고 키에르케고르 마르크스 공트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의 18시게 사상가를 언급한다
그는 여기서 독서가 물론 삶의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삶을 윤택하게 하여 행복을 찿는 수단이자, 학문과 문화를 창조하여 새로운 생의 의의를 발견하게 하는 가장 좋은 도구임은 부정할 수 없다고 한다 신체가 음식물을 취하여 삶을 보전하듯이 사람의 마음은 독서를 통하여 성장하며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고 설파한다.
이책의 백미라고 할수 있는 마지막 장에 가서는 고독이라는 병에대해 언급을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성 깊숙이 숨겨져 있는 병이라는 것이다.그래서 키에르 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육체적 피곤을 친구들과의 잡담에 서 풀고 정신적 권태를 독서나 사색으로 채우는 사람도도 고독감을 나타내는 현상이라고 한다. 요사이 많은 사람이 사교와 교제를 위한 생핫와 집회에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러나 지나친 편중은 우리의 정신생활에 공허를 가져오기 쉽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생리적 고독이 아닌 인간의 실존적 고독은 무한 또는 영원을 바라보는 데서 오는 고독이다
자아를 영원이나 무앞에 세워 놓고 시간이나 유한으로 자각할때 뼈저리게 스며드는 고독인 것이다 니체나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린다면 고독은, 우리가 온 곳도 무, 가는 곳도 무,머물 곳도 무인 것을 느끼는 자아 속에 깊이 깃들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간성 깊숙이 뿌리를 ㄷ고 있느 ㄴ고독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 허무로 향하는 자아의 고독, 무에 삼켜지고마는 자아를 붙들어 ㅂ려고 허덕이는 서글픈 운명을 지닌 자아의 고독을 누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 이 불치의 병을 누가 치료한일이 있었는가 ? 고독의 반대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 가장 깊은 고독을 느끼는 법이며 얻을 수 없는 사랑을 품은 이가 누구보다고 고독해지는 법이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인간을 통하여 고독을 잊을 수 있으며 미를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미를 통해 고독을 해소할 수 있다.그러나 실존적인 고독을 느끼는 사람은 영원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영원을 얻을 수 없는 한 언제나 고독 속에 도 살아야 한다. 누구도 알 수 없는 ,아무도 표현할 수 없는 고독 속에 잠겨 살아야 한다.
그는 이러한 고독보다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요청할지도 모른다.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수 없는 법이다. 영원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히 고독해지기는 하나 그 사랑하는 영원 때문에 죽을 수는 없다. 이렇게 본다면 영원에의 고독은 죽을 수도 없는 고독일지도 모른다.
왜 이러한 영원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 아무도 모를 일이다. 오직 지혜롭고 참된 인간이 영원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면 누가 이 영원의 사랑을 받는 사람인가? 역시 아무도 모른다. 비록 내 옆에 자리를 같이하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고독의 병에서 고침은 받은 사람은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는 사람뿐이기 때문이다.그리고 하나님에게서 영원을 받아 누리는 사람은 입을 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