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 13년(서기전 6년)에 따르면, 백제가 국경을 정하였는데, 북쪽으로 패하(浿河), 동쪽으로 주양(走壤), 남쪽으로 웅천(熊川), 서쪽으로 대해(大海)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한 패하(浿河), 주양(走壤), 웅천(熊川), 대해(大海) 등이 고지도에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중국 23사와 『삼국사기』에 편집되어 있는 지리지들이 모두 뜯어고쳐져 있다.
그러니 고지도가 있었겠지만, 모두 폐기되고 오히려 지명들의 위치가 변이된 지도들만 남아있다.
혹자는 역사란 것이 승자의 기록이어서 승자의 입맛에 맞는 소리만 적어놨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대체로 맞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서(史書)는 왕(王)이나 장수(將帥)가 쓰는 게 아니고 사관(史官)이 쓰는 것이다. 전쟁을 하거나 왕위를 찬탈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운 사람은 자신이 왕(王)이 되어야만 하는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서 사서에 온갖 미사어구를 넣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새로 나라를 건국하자마자 전대(前代)의 역사책을 쓰는 것도 아니고, 사관(史官)은 편엽하거나 사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 균형있게 역사의 흐름을 기록하려는 사명감과 가치관을 갖춤으로써 비로서 사관(史官)의 직무(職務)에 임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아무나 역사책을 쓰는 게 아닐 것이다.
아무튼 역사왜곡의 행태를 두 가지 경우로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하나는 승자가 패자의 잘못을 부각시키고 승자의 구미에 맞게 기록하는 것이다. 둘째, 과거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 기록을 전부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첫째의 경우만 생각하고 둘째 경우를 고려하지 못하면, 그대로 왜곡된 역사에 홀랑 함몰해 버리고 말 것이다. 기껏해야 누가 옳았는지, 누가 잘못한 것인지를 따지거나, 기록이 올바른 것인지, 틀린 것인지를 따지는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두번 째의 경우, 과거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 역사 기록들을 어느 싯점에서 몽땅 바꿔치기했는지 여부를 우선적으로 밝힐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나름 아래와 같이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① 일제가 바꿔치기 했다.
② 청이 바꿔치기 했다.
③ 명이 바꿔치기 했다.
①, ②, ③ 중에서 어느 것인지 파악하려면, 우선 각 사서의 지리지들을 모두 통찰하고 주요 역사적인 지명들의 전체적인 배치관계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본 연구원의 연구결과, ③번 이다.
즉, 명초 조선초에 조선이 하북성, 산동성, 하남성, 안휘성, 강소성 등의 땅을 명(明)에 몽땅 빼았기고 한양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명(明)이 비로서 빈 땅에 지명들을 변이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간 백제의 주요 지명들을 추적한 결과, 백제 초기 강역은 [그림 1]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근거: 『백제 900년간의 비밀 관미와 고평』, 김진경 지음, 어드북스, 2015. 4. 29)
[그림 1] 백제 초기 강역
이어서 『삼국사기』백제본기 동성왕 10년(488년)에 따르면, 북위가 침공하였으나 백제가 북위를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북위와 백제간의 전쟁에 관하여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상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그 당시 남북조 시대 『남제서』동남이열전에 따르면, 490년에 동성왕이 광양(廣陽) 태수였던 고달(高達)을 대방(帶方) 태수로, 조선(朝鮮) 태수였던 양무(楊茂)를 광릉(廣陵) 태수로, 회매(會邁)를 청하(淸河) 태수로 임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기한 광양(廣陽)·대방(帶方)·조선(朝鮮)·광릉(廣陵)·청하(淸河) 등의 지명들이 고지도(古地圖)에 말끔하게 표기되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그간 지리지들을 통독하고 찾아낸 지명들의 위치를 토대로 백제 중기 강역은 [그림 2]와 같이 추정할 수 있었다.[그림 2] 백제 중기 강역
그런데 『삼국사기』백제본기 성왕 31년(553년)에 따르면, 신라가 백제 동북 변경을 빼았아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즉, 신라가 백제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국원소경(國原小京)과 북한산주(北漢山州)를 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삼국사기』백제본기 위덕왕 원년(554년)에 따르면,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웅천성(熊川城)을 침공하였다가 패하고 돌아갔다. 즉, 웅천성을 백제 도읍지였던 웅진성으로 추정할 수 있으므로, 고구려가 이미 한수 이북 지역을 빼았은 것으로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삼국사기』백제본기 의자왕 2년(642년)에 따르면, 백제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 아래(下)를 침공하여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또 장군 윤충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즉, 그 당시 백제의 강역을 [그림 3]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그림 3] 백제의 말기 강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