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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사고팔고,4중대,대성산,컴,여행 스크랩 문경 관음리석조반가사유상
monica 추천 0 조회 90 14.01.05 13:28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문경 관음리석조반가사유상(觀音里石造半跏思惟像)

문경시 문화재자료 제350호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산 60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계립령(하늘재) 못미쳐 관음1리 동네 안 밭 언저리에 있는 반가사유상이다.

문막경로당을 조금 지나 좁은 시멘트포장 농로를 따라 과수원 사이를 오르면 오른쪽 넓은 터에 보호철책 속에 서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계립령 아래 문막마을에 관음원이 있었다는 기록과 불상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조각들, 서쪽 200m 쯤 떨어진 곳에 있었던 5층석탑(현재 갈평리 갈평보건지소 내에 있는 갈평리오층석탑 임) 등으로 보아 이 주변을 관음사 옛 절터로 추정하지만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

 

 

 

 

 

평평한 바위에 높은 돋을 새김(부조)으로  반가사유상이 새겨져 있는데 암석은 높이 약 2.1m, 넓이 약 1.1m, 두께 43㎝의 화강석이며, 뒤는 아무런 조각이 없이 편평한 자연석이다.

반가사유상은 높이가 1.9m,  너미가 85㎝, 머리 높이 48㎝, 어깨 폭 67㎝, 좌대 높이는 73㎝이며 머리의 둘레에는 지름 약 86㎝의 두광(頭光)이 있다.

불상은 마멸이 심하나 대체의 형태는 알아 볼 수 있다.

 

머리에는 삼면화관(三面花冠)을 썼으며, 얼굴은 원만하며 미소가 보인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구부러져 턱을 받치고 있으며 왼손으로는 왼쪽 무릎 위에 올린 오른발을 잡고 있다. 몸에 비해 오른팔이 너무 짧고 무릎 이하는 불분명하며, 왼쪽다리는 생략되어 있다. 사유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선으로 구분되어 있을 뿐이다. 광배(光背)는 일부 떨어져 나간 것 같으며, 5개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지만 세부묘사는 잘 보이지 않는다.

형태는 반가의 상을 하고 있으나 삼국시대의 반가상에 비하면 조형이 둔하다. 상체나 두 팔이 다른 반가사유상에 비해 몹씨 비대하며 지체(肢體)의 균형이 불안전하다.

 

전체적으로 풍화가 심해 세부 표현을 제대로 알 수 없고 조각수법도 뒤떨어지며 조성연대는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반가상의 앞면

 

반가상의 뒷면

 

어느 날 반가사유상이 넘어지면서 오른쪽 발부분이 깨어졌는데 그 이후부터 마을에 장질부사가 퍼져 번지기 시작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석상을 다시 일으켜 세웠더니 장질부사가 사라졌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관음사지로 추정되는 곳에 있었던 갈평리오층석탑

 

반가상이 있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약 200m 지점에 오층석탑의 있었다.

문화재 밀반출이 심하고 도굴이 성행하던 일제시절인 1936년경 관음리  이장 이광호(李光鎬)가 이 탑을 매각하여 일부는 벌써 서울로 이동된 것을 갈평동민이 찾아왔다. 그리고 가장 안전하고 다시 도난당할 우려가 없다고 생각한 주제소(駐在所) 구내에 복원하였다.

일제시 주제소였던 자리가 현재 문경읍 갈평출장소와 갈평보건지소가 있는 곳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담장  옆에 옮겨 세운 갈평리오층석탑이 있다.

 

 

반가사유상이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은 삼국시기에서 통일신라 시기이나 갈평리오층탑은 고려시대 조성된 탑이여서 관음사는 오랫동안 존속하였으며 옛부터 계립령을 넘나들던 백성들이 무사안녕을 기원하였던 기도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옛사진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반가사유상이라는 명칭은 두 가지 특징에 기인한다.

첫째는 그 자세가 둥근 의자에 걸터앉아 발 하나(오른쪽)를 올려서 다른 쪽 다리 무릎 위에 얹고 있다.

둘째는 오른손을 들어 손끝을 턱에 댐으로써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첫째 특징을 '반가(半跏)'라하고 둘째는 '사유(思惟)'라 불러 반가사유양식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흔히 반가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삼국시대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뒤 뜸해진 반가사유상은 흙, 나무, 금속, 돌 등으로 조성이 되었는데, 흙으로 만든 것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며 나무로 조성된 것은 일본 광륭사(廣隆寺) 목조 반가사유상이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삼국의 반가사유상은 금속과 돌로 만든 것만 남아있는데 돌로 만든 석조 반가사유상은 그 예가 많지 않다.

 

 

경주 송화산 출토 석조반가사유상 신라 7세기 1.6m 경주국립박물관

 


봉화 북지리 출토 석조반가사유상 신라 7세기 높이 1.75m 경북대박물관

통일신라기에 만들어져 삼국시대의 상보다 대형의 석조 사유상으로

 하반신만 남았으나 동양에서 가장 큰 반가상이다

 

 

남아 있는 석조 반가사유상 중에서 환조로 된것은 상은 경주 송화산에서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 미술실에 전시되어 있는 경주 송화산석조반가사유상, 경북 봉화 북지리에서 발견되어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봉화석조반가사유상이 있으나 둘 다 상반신이 사라지고 없다.

 

 

서산 마애삼존불 좌협시 7세기 백제 충남서산

  1956년 서산에서 발견되었으며  백제의 반가사유상으로서는 최대의 작품이다.

일부 손상은 있으나 대좌와 광배를 갖추었고 제작이래 자기 위치를 지켜온 것이어서

백제의 불교조각을 대변하는 상이기도 하다

 

 

단석산 신선사 마애반가사유상 신라 7세기 8.2m 경주 건천읍

단석산 마애군의 반가상은 이곳이 김유신(金庾信)의 연무(練武)과정에 등장하고 있어

당시 미륵신앙과 화랑(花郞)과의 연관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다른 불입상들이 왼손을 들어 주존으로 있는 반가상 쪽을 향하고 있어 특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통일신라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마애불로 암벽에 새겨져 있는 반가사유상으로는  서산 마애삼존불의 좌협시불과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반가사유상이 있다.

그리고 바위에 고부조로 조성된 것은 이 관음리 반가사유상이 유일하다.

 

 

위에서 열거한 석조반가사유상은 모두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직후까지 곧 6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서 조성된 것들로서 이 후는 조성된 예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아마 반가사유상 대신 입상이나 좌상의 미륵보살이 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찾아가는 길

 

 

 

갈평리 오층석탑에서 석조반가사유상으로 가는 길에 관음리석조입불상이 있다.  

    도로변 우측에 안내판이 있으며 개울 건너 산등성이에 석조입불상의 전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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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1.10 20:55

    첫댓글 당포http://try24.blog.me/90184320218

  • 14.01.10 21:11

    http://cafe.daum.net/chuhle/34J8/240 갈평어디 용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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