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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될 수 있는 한 조중동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동안 배너를 붙이고 달린 사진을 올렸습니다.
저희들과 함께 하실 분께서는 리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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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6일- 중앙일보
이번 대회때에는 연습은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마라톤에 필요한 준비물만 많이
마련했습니다.
전날에는 두려웠습니다. 걸을 때마다 오른쪽 무릎에 무리가 가 전날에는 관악산엘
낮은 코스로 산행을 했습니다. 자신이 없었습니다.
역시 힘이 들었습니다.
04:50분
최악의 기록입니다.
들어오자마자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디냐고?
"살아서 돌아왔다고......"
04:11 인천일보
04:26 조선일보
04:18 동아일보
04:5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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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동아일보
유서
If I were died,
1. 아내,찬빈이와 찬영이에게 미안합니다,
2. 보험금 및 상속분은 찬빈이와 찬영이가 미성년자인 관계로
이경자의 단독소유로 하기 바랍니다.
3. 찬빈엄마는 보험금만으로 살기에는 힘드니
고향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지분을 확보하시기 바랍니다.
(싸우지 말고 슬기롭게 잘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4. 보험금 수령후 다음과 같이 지급하세요.(반드시 배분)
1) 금주회 : 3백만원 010-4818-3863(남관수)
2) 죽우회 : 3백만원 011-9881-8654(한여옥)
3) 금삼회 : 2백만원 016-366-6568(공도연)
4) 세중회 : 1백만원 김철수계장님
5) 어머니와 누나 1, 동생 1에게 각각 1천만원씩 지급한다.
6) 누나 5 및 동생 2에게 허필두 삶에 대한 기여분으로
5백만원씩 지급한다.
7) 참여연대와 민주노동당에 각 2백만원씩 기부하시기 바랍니다.
민노당 지지자는 아니지만 좌파정당이 이 땅에서 제 목소리를
내야하기 때문입니다.
제 통장(928-078932-02-001계좌에서 매달 출금되는
금주회,죽우회,금삼회,가족모임의 자동이체는 해지하십시오.
4-1. 제가 맡은 금주회,죽우회,금삼회,세중회의 총무역할은
위와 같이 배분하면 마무리 됩니다.
(우리은행 계좌조회후 모임회비 잔액과는 별도로 지급할 사항임)
5. 찬빈이 엄마는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혼자 살기 힘들면
재혼을 하기 바랍니다, 돈좀 챙겨서(주1).
6. 제 시신을 카톨릭대학교에 의학해부용으로 기증하고
기증이 가능한 장기는 다 떼어주고, 매장하지 말고
화장을 하여 내촌 강가에 뿌려주기 바랍니다.
아이들이 커서 아빠가 보고 싶을 때 굳이 산에 가지 않더라도
한강에만 와도 애비의 무덤이 되기 때문입니다.
7. 가입한 보험(928-078932-02-001에서 자동이체)
우체국 상해보험 1건(허필두)
삼성생명 1건(종신),1건(건강)(허필두)
우체국 2건 허찬빈 몫
우체국 2건 허찬영 몫
현대해상화재 허찬영 몫
우체국 이경자 몫의 상해보험
8. 닷컴통장 : 우리은행 7건
금주회
죽우회
금삼회
세중회
월급통장
제일은행수당통장
http://www.wooribank.com
ID :
Pw :
우리은행(제일은행은 카드와 통장비밀번호만)의
인터넷뱅킹번호, 아이디와 비밀번호, 공인인증서비밀번호,통장비밀번호
(인증서와 보안카드는 제 마라톤배낭의 주머니에 비닐로 싸여있을 것임)
국민은행 주택부금(3년만기인데,매달 130,000원씩)
제일은행 허찬영 비과세저축(7년짜리,매달100,000원)
지방재정공제회(허찬영 대학입학자금,매달100,000원)
농협통장(관리비통장 매달 150,000원 자동이체)
<재산등록서류를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9. 시디와 책(서울,고향):허찬빈과 허찬영
10. 책상위 아래 및 <신도리코 3200>프린터기 아래의 책은
남관수 주사님(010-4818-3863)이 단독으로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11. 찬빈이 엄마는 우리사회에서 고통받는 사회적인 약자나
소수자들을 위해 매달 얼마씩 기부금을 내기 바랍니다.
찬빈이와 찬영이 몫으로 각각 매달 5,000원씩 지출되는
참여연대후원금을 계속 내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이 18세까지.
제 후원금은 해지하십시오.
12. http://cafe.daum.net/traumwelt
<한 아나키스트의 세상살이>카페는 찬빈이와 찬영이에게 양도합니다.
13. 재산등록서류는 우측책꽃이 아래에서 세번째
<신법률학대사전> 사이에 있습니다.
14. 마지막으로 제가 인간적으로 싫어했거나 미워했던 분들에게
저의 화해의 뜻을 전합니다.
위 내용은 공증을 해두어야 유언장의 효력을 발생하나 아내 이경자는 별 무리없이
그대로 따라 주기 바랍니다.
2006. 3. 12. 새벽 허필두
(주1) 수령가능액(보험증서는 컴퓨터 아래의 파일과 사무실책상 맨 아래에 있습니다)
1)종신보험 : 1억2천 + 변액분
2) 마라톤조직위에서 나오는 돈 : 5천~1억
3) 우체국상해보험 : 5천만원
4) 구청에서 선택적복지부분 농협중앙회 사망보험금 :5천만원
4) 퇴직금(38백만원)
5) 사는아파트
6) 빚 : 우리은행 4천만원 (연금대출15,000,000원
생활안정자금 각 5,000,000원 2건
생활안정자금 15,000,000원 1건(2006.3.13.
우리은행 계좌로 입급예정)
서울시상조회 5,000,000원(30개월 균등상환)
제일은행 15,000,000원
anarchist 찬빈이 엄마는 일반대중교통사고로 죽으면 최고 6억까지 나오는 BC카드사의 월16,100원짜리 10년간 소멸성 보험에 가입(2005.11.11.)했으니 이것도 챙기면 됩니다. 수령가능액 5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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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조선일보
송00수 님께,
송선생을 만나 마라톤을 한 지 어언 만 4년이 다 되어갑니다.
어쩌다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마라톤은 중독을 가져온다는 말이 이젠 맞는 듯합니다.
어쩌면 달리다 죽을 줄도 모르는데
제대로 연습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무모하게 촛불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아무런 대책도 없이
춘천으로 떠납니다.
그건 오만함과 열심히 노력한 달림이들에 대한 모욕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설령 이게 마지막일지라도 춘천에서
저 제상으로 가면 제 자신에게는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자기의 존재이유를 알 게 해준 그 현장에서 죽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물론 남은 가족들에게는 누가 되겠지만.
재수가 없으면 너무 빨리 가신 고 한상범 님의 뒤를 이을지도 모르겠지요.
그렇지만 이번 춘천마라톤 대회는 유난히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1977년 고향에서 벗어나 춘천에 처음으로 와 초등학교를 마치고,
사춘기 때에는 희망을 곧 이어 좌절을,
이십대에는 절망을 준 도시였습니다.
밥벌이로 그곳을 떠난 지 16여 년이 지났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곳에서의 추억이 정겹게 느껴지지만은 않습니다.
그건 10대,이십대의 시간을 좀더 치열하게 살아가지 못했고
늪에 빠져 허우적거림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 것입니다.
지나는 거리마다 지난날의 추억이 묻어나오겠지요.
굳이 유쾌했던 기억만을 담지 않고 지나간 세월의 회한을 되짚어가면서,
의암호를 거슬러 춘천댐을 지나 처음 출발했던 운동장으로 돌아오겠지요.
잘 해낼지 자신이 없습니다. 이번이 8번째 풀코스완주에 도전하는데
이게 마지막이 되지는 않겠지요.
그렇지만 가야만 하는 게 제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년에는 좀 열심히 연습을 하여 부담없이 달릴 수 있으면 더 좋겠지요.
2006. 10. 28. 떠나기 전날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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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동아
2007년 3월 18일 동아마라톤대회를 마치며(글은 아직 쓰지 못함)
번호 : 38 글쓴이 : anarchist
조회 : 2 스크랩 : 0 날짜 : 2007.03.19 01:19
anarchist 07.03.18 05:04
[1]
이번에는 유서를 쓸 여유가 없어 간단하게
anarchist 07.03.17 22:08 어제 밤 잠을 설친데다가 오늘 낮에도 낮잠을 자지 못해 졸음이 쏟아집니다. 저녁에는 아이들 다음주에 먹일, 장조림과 두부 들기름에 굽기, 당근과 양파넣어 새우볶기, 내일 아이들이 즐겨 먹을 쇠고기 불고기를 해 아내에게 맛을 보라 했더니 맛있다고 합니다. 이젠 땅에서 나는 모든 고기를 금하기로 했습니다. 국물조차도.....그 일이 끝나자마자 약국에 들러 바셀린을 사고, 튿어진 주머니가 여러개 달린 울트라바지를 수선하러 갔는데 그걸 꿰맬 재봉틀이 없다고.....집에 와 내일 잠실에서 술자리를 할 음식을 챙기는데 아내가 또 뭐라 그럽니다. "당신 이번에도 또 그런 짓 하냐고" 업무나 가정일을 이렇게 열정을 갖고 했다면....... |
2007.3.17. 아침 7시
사무실에 나와 더불어숲마라톤클럽> 동마에서 모이는 곳 안내입니다 를
카페에 올렸습니다.
2007.3.17. 오후 4시
원조홍어집,시흥두부,떡집에서 마라톤대회후 먹을 거리를 샀습니다.
아내가 또 뭐가 그럽니다.
2007.3.18. 아침
04:35 일어남
05:41 집을 나섬
05:53 150번 버스탔음
종로구청에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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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중앙일보
무사히 잘 달려습니다. 처음으로 3시간 40분대로 들어왔습니다.
연습을 거의 하지 않은 것 치고는 성과가 좋았습니다.
30km넘으면서 연습량 부족을 절감했습니다.
한번도 걷지 않고 뛰었으나 속도가........
이제 미련한 짓은 그만 해야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11월 10일에는 여의도에서 하프,
11월 18일에는 100km 역시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달리겠지요,다시는 않하겠다고 하면서.
2003년 마라톤을 처음으로 시작하고 나서
2004년 3월 인천일보마라톤 대회 4시간 11분
2004년 10월 조선일보마라톤대회 4시간 26분
2005년 3월 동아마라톤대회 4시간 18분
2005년 11월 중앙일보마라톤대회 4시간 55분
2006년 3월 동아일보마라톤대회 4시간 11분
2006년 8월 혹서기대회 5시간 47분
2006년 10월 조선일보마라톤대회 4시간 17분
2007년 3월 동아일보마라톤대회 3시간 50분
2007년 8월 혹서기대회 4시간 5?분
2007년 10월 63km 연습주 6시간 20분
2007년 11월 중앙일보마라톤대회 3시간 42분
2007.11.5.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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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동아
20080315-동아마라톤 준비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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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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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동아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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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shall overcome some day
Oh 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 day
Oh 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 day
We are not afraid today
Oh 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 day
We shall overcome some day
Oh 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 day
우리 승리하리 그 날에
오, 참 맘으로, 나는 믿네
우리 승리하리라
손에 손을 잡고 그 날에
오, 참 맘으로 나는 믿네
우리 승리하리라
두려움이 없네 그 날에
오, 참 맘으로 나는 믿네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 그 날에
오, 참 맘으로 나는 믿네
우리 평화지키리라
그녀가 차용한 이러한 포크(Folk) 음악들은 동시대 사람들(Folk)에 의해 불려진 시대의 정서와 삶의 애환, 꿈과 이상이 생생히 담긴 지극히 인간적인 노래들이다. 그녀에게 있어 음악이란 삶의 순수한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그릇이며 개인은 물론 집단 의식의 총체적 표출을 가능케 하는 이상적인 도구였다. 때문에 그녀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한 투쟁의 장을 가장 인간적인 향취가 물신 풍기는 포크 음악을 통해 펼쳐보일 수 있었다.
그녀의 음악에서 기교적인 면은 찾아볼 수 없다.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의 반주에 실리는 하이톤의 소프라노 보컬은 지극히 단조롭지만 동시에 따스한 영적 에너지로 충만한 기운을 가득 내뿜는다. 이것은 바로 그녀 음악의 가장 큰 매력이자 힘이다. 그녀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그 영혼의 울림에 동화되며 그 안에서 스며나오는 강한 메시지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국내에서 존 바에즈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The River In The Pines'나 'Donna Donna', 'Mary Hamilton' 등의 전통 발라드에서 60년대 저항운동의 찬가 'We Shall Overcome', 그리고 'Poor Wayfaring Stranger'와 'Diamonds & Rust' 등에 이르는 수많은 명곡들에서 얻을 수 있는 강한 친화력과 포근히 가슴을 감싸오는 매력은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가족들이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로 이사함에 따라 그녀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몇 년간을 보내야 했고,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생활했다. 캘리포니아의 팔로 알토에서 보낸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합창단에서 노래를 했으며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58년 MIT에서 강의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가족은 메사추세츠주로 이사를 하는데, 그녀가 아버지를 따라가서 보았던 보스톤의 한 커피하우스에서의 포크 공연은 결국 그녀를 포크 뮤지션의 길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보스턴과 케임브리지 지역은 우디 거스리와 피트 시거, 오데타 등에 의해 새로운 부흥을 이루게 된 포크 음악의 중심지였고, 보스턴 대학에 입학하여 희곡을 공부하던 그녀는 전공 수업보다는 그곳의 포크 뮤직 씬에 강한 관심을 보이며 지역의 커피하우스와 클럽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공연 기획자인 알버트 그로스만의 눈에 띈 그녀는 시카고의 유명한 포크 클럽인 게이트 오브 혼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2주간의 그 공연은 그녀의 생에 있어 중요한 기회 중 하나였다. 그녀의 재능을 눈여겨보았던 포크 싱어 밥 깁슨이 같은 해 7월 11일 개최된 제 1회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그녀를 자신의 백업보컬로 세운 것이다.
존 바에즈의 예정되지 않았던 출연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그녀의 재능은 쉽사리 눈에 띄었다. 결국 그녀는 이듬해인 60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정식으로 참여하였고, 포크/블루스 전문 레이블인 뱅가드와 12년간의 계약을 맺는다.
이 계약기간 동안 그녀는 여덟 장의 골드 앨범과 한 장의 골드 싱글을 기록하며 60년대의 포크 씬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그녀의 동생인 미미 바에즈(Mimi Baez) 역시 이후 남편인 리처드 파리냐와 함께 듀엣 미미 앤 리처드 파리냐를 결성하여 활동하며 인기를 얻었다).
61년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한 바에즈는 곧 첫 전국 콘서트 투어에 들어갔는데, 그녀는 이 콘서트를 통해 반 인종차별주의와 흑인의 공민권을 위한 정책을 주장했다. 이 투어는 62년 10월 [In Concert]라는 타이틀로 발매되어 앨범 차트 10위를 기록한다. 이 앨범은 이듬해 그래미 어워즈에서 '베스트 포크 레코딩' 앨범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하였다. 62년 11월 23일자 [타임]지의 커버스토리에 실린 그녀는 이미 사회적으로 커다란 관심을 받는 인물이었다.
63년 5월 17일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에서 개최된 제 1회 몬터레이 포크 페스티벌과 7월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그녀는 밥 딜런과 함께 출연했다. 피트 시거, 미시시피 존 허트, 잭 엘리엇, 이안 앤 실비아, 탐 팩스턴, 필 오크스 등 당대를 대표하는 많은 포크 뮤지션들이 참여한 이때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실황은 [Newport Broadside]와 [The Evening Concert Vol. 1]으로 발매가 되는데, 이 앨범들은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이 함께 등장하는 유일한 작품으로 기록된다.
같은 해 8월, 워싱턴에서 있었던 흑인 공민권을 위한 데모 행진에서 그녀는 25만의 청중 앞에서 'We Shall Overcome'을 불렀고, 이 곡은 곧 싱글로 발매되어 미국 차트 90위와 65년 영국 차트 26위에 올랐다.
당시 미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을 위한 군비 증강의 일환으로 높은 세금을 거두고 있었는데, 수입의 60%를 원천징수 세금으로 빼앗기게 된 존 바에즈가 거기에 불복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이에 저항하는 시위는 물론, 텍사스에서 있었던 반인종차별주의 시위에 참여한다.
그 외에도 그녀는 존슨 대통령에게 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촉구하고 흑인 공민권을 위한 자선 콘서트에 참여하는 등 저항의식을 가진 실천가와 영혼의 음악을 들려주는 포크 뮤지션으로서의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완전한 어쿠스틱 앨범으로서는 마지막이 될, 그리고 영국 차트 3위에 오름으로써 영국에서의 최대 히트작인 된 [Joan Baez 5]가 발매되었고, 그녀의 애창곡 66곡과 에릭 폰 슈미트의 삽화가 곁들여진 베스트 셀러 [The Joan Baez Songbook]이 출간되었다. 앨범에 수록된 필 오크스의 곡 'There But For Fortune'은 대중적인 히트를 기록했고, 65년의 그래미 어워즈에서 '베스트 포크 레코딩'에 노미네이트 된다.
65년 봄 바에즈와 딜런의 연인 관계는 끝을 맞이했고, 5월에는 미국 밖에서 행해진 최초의 큰 공연인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의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런던에 머무르는 동안 그녀는 도노반과 함께 베트남전 반대 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되는 [Farewell, Angelina]가 발표되었다.
67년 일본 공연에서는 그녀의 정치적 발언이 의도적으로 오역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통역자는 그녀의 정치적 언급을 오역하도록 CIA 요원으로부터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철회하였고 CIA 측은 이 일과의 연관을 부인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예정되었던 워싱턴시 컨스티튜션 홀에서의 공연을 열 수 없었다. 그녀의 극렬한 반전운동 경력 탓이었다. 독립전쟁 참가자의 자손들 모임인 '미국애국부인회'에서 그녀의 공연 허가를 거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존 바에즈는 30,000여 명의 청중이 모인 워싱턴 기념비 앞에서 무료 콘서트를 개최함으로써 멋지게 응수했다.
7월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참여한 그녀는 이어 8월에 새로운 앨범 [Joan]을 발표한다. 10월에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군 입소대 입구를 점거한 혐의로 체포되어 10일간의 형을 받기도 했다.
69년, 데이빗 해리스가 징병 기피로 3년형을 선고받았고 그는 20개월을 복역해야만 했다. 존은 감옥에 있는 남편에게 바치는 [David's Album]을 발표하여 차트 36위에 올렸고, 8월에 있었던 역사적인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71년에는 그녀와 데이빗이 함께 쓴 책 [Coming Out]이 출간되었으며 사운드트랙 앨범 [Carry It On]이 발매된다. 10월 그녀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그리스의 저항운동을 위한 콘서트를 열었는데, 거기에는 그리스의 유명한 영화감독인 쥘 다생과 그의 아내이자 그리스 최고의 여배우인 멜리나 메르쿠리가 참여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사운드트랙 앨범 [Sacco And Vanzetti]는 존과 이탈리아의 유명한 영화음악가인 엔니오 모리코네가 함께 작곡한 작품이었다. 이후 뱅가드 레이블에서의 마지막 앨범인 [Blessed Are..]가 발매되었고, 밴드(Band)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싱글 '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이 차트 3위에 오르며 밀리언셀러를 기록한다. 72년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최고의 여성 보컬리스트로 노미네이트 되었다.
72년 5월 A&M에서의 첫 앨범 [Come From The Shadows]는 미국 차트 48위에 오른다. 앨범에서 커트된 싱글 'In The Quiet Morning'은 그녀의 동생 미미 파리냐의 작품으로 재니스 조플린에게 바치는 곡이었다. 이 곡은 차트 69위를 기록한다.
74년 스페인어로 부른 앨범 [Gracias A La Vida]가 발매되었다. 앨범 발매 후 그녀는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 이스라엘, 레바논, 튜지니아, 아르헨티나 등을 포함한 세계 투어에 들어간다. A&M 시절의 최고작인 [Diamond & Rust]는 72년 4월에 발매되었다.
76년 말, 그녀의 자작곡으로만 이루어진 최초의 앨범 [Gulf Winds]가 발매되었고 밥 딜런과의 두 번째 투어를 시작한다. 이듬해의 스페인 투어 도중 그녀는 40년간의 군부독재의 종말을 코앞에 둔 독재자 프란치스코 프랑코의 금지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TV 생방송에 출연하여 'No Nos Moveran(We Shall Not Be Moved)'를 불러 화제가 되었다.
79년, 그녀의 자작곡과 직접 그린 스케치들이 담긴 책 [The Songbook And Then I Wrote...]가 출간되었다. 같은 해 [Honest Lullaby]가 발매되었고, 그녀는 샌프란시스코만 지역 음악 시상식에서 78년 최고의 여성 보컬리스트로 선정되었다. 그해 그녀는 인권기구인 인본주의 국제인권위원회를 설립하고 이후 13년 동안 회장직을 맡아 활동한다.
위원회의 첫 번째 행동은 미국 내 다섯 개의 메이저 신문에 베트남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권탄압의 내용을 규탄하는 내용의 글을 게재하는 것이었다. 이 위원회와 KRON-TV,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신문은 캄보디아 긴급 구조 기금을 결성하여 100만 달러 이상의 기금을 모았다.
바에즈는 80년 정치적 행동과 음악의 보편성으로 앤티오크 대학과 루트거스 대학에서 명예인문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같은 해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파리 노트르담 사원 앞에서 무료 콘서트를 개최하였고, 그레이트풀 데드와의 작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 작업들은 발매되지 않았다.
81년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5주간의 콘서트와 인권 실태조사 여행 도중 그녀는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아야 했고 죽음의 위협까지 받았다. 이때의 투어는 이듬해에 [There But For Fortune: Joan Baez In Latin America]라는 영화로 TV에 방영되었다.
핵무기 사용 중지 시위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 속에서도 그녀는 밥 딜런과의 LA 공연과 폴 사이먼과의 보스턴 공연, 잭슨 브라운과의 워싱턴 공연 등에 참가하였다.
그녀는 또한 프랑스에서의 투어 중 콩코르드 광장에서 파리의 비폭력주의에 바치는 무료 콘서트를 개최하여 12만 명의 군중을 모았고, 프랑스 최고의 영예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수상하였다. 이듬해에는 우디 거스리에 대한 다큐멘터리 필름인 [Hard Travellin''에 출연하였고 사운드트랙을 위한 노래를 불렀다.
85년, 그녀는 자신이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던 클럽 47의 25주년 콘서트에 참여하여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을 한다. 이후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 등의 투어를 마친 뒤 69년 이래 처음으로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출연한다.
존 바에즈는 아메리칸 포크계의 전설로서, 저항정신을 지닌 모범적인 실천가로서, 그리고 끊이지 않는 창의력과 삶에 대한 열정의 소유자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다. 2007. 2. 22(글 출처 : TONIBOX.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