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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과 포교하는 사부대중 Ⅰ
법보선원장 덕일 스님의 출가이야기 (1부)
글 제니 김 (본지 취재 기자)
올해4월 6일,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가든 그로브에 위치한 법보선원에서 선원장으로 취임한 덕일 스님을 취임식 그 다음날에 선원에서 만났다.
서울대생들이 불교 동아리 ‘선우회’(나중에 청정회로 개명)에서 함께 수행 공동체를 만들어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을 하다가 1996년 봄부터 1997년 겨울까지 두 명 세 명씩 함께 출가하여 한때 ‘서울대 졸업생 7명 출가’라는 제하에 큰 화제를 모았던 적이 있었다. 덕일 스님은 그들 중에 한 분이다: 일묵 스님(수학과 83학번, 96년 출가), 각전 스님( 정치학과 85학번, 97년 출가), 일운 스님(천문학과 87학번, 96년 출가), 종원 스님 (정치학과 87학번, 97년 출가), 명인 스님(경제학과 88학번, 96년 출가), 일창 스님 (화학공학과 91학번, 96년 출가), 그리고 덕일 스님 (계산통계학과 89학번, 96년 출가). 그 후에도 이 동아리에서 일민 스님 (동양사학과), 혜안 스님 (동양사학과), 일성 스님 (동양사학과), 향엄 스님 (체육교육학과) 등 많은 분들이 출가했다고 한다.
불교를 만나기 전까지의 여정
덕일 스님의 속명은 이성룡이다. 89학번으로 1994년 서울대 계산통계학과를 졸업하고, 1996년에는 경희대 한의학과까지 입학했다. 그에게는 공부에 남다른 열정이 있었지만 대학 입학은 그에게 결코 호락 호락하지 않았다. 물리학(Physics)이 막연히 마음에 들어 두 번 서울대 물리학과에 지원했지만 모두 실패를 하고 3수를 하여서 1989년 서울대 계산통계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입학했지만 바로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방위병 복무를 하였으며, 1990년 봄이 되어서야 비로소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입시 위주의 공부를 세번이나 하며 긴 입시 지옥을 헤쳐 오고 나서 자신보다 세 살 적은 학생들과 학교를 다니다 보니 아무래도 학교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또한 그는 엄한 아버지 아래에서 20년간 억눌려 집안에서만 자라오며 꼬여 있는 실타래 같이 왜곡된 자신의 마음과 사투를 벌이느라 더더욱 대학의 공부와 낭만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밍(계산학)과 이론 통계 (통계학) 어디에도 깊이 매료되지 못한 채, 방황을 하기 시작했다. 학교 공부 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마음 가는 대로 읽어 나갔다. 때로는 하숙집에 틀어박혀 있거나 때로는 학교 앞의 사회과학 서점들 ‘열린 글방’이나 ‘그날이 오면’에서 많은 책들을 폭넓게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특히 러시아 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 <지하생활자의 수기>, <죄와 벌>, <까라마조프 형제들> 등에서 뛰어난 인간 심리의 묘사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마음 속 어두운 것들이 그의 펜을 통해 햇볕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 그것은 구원과 같은 마음의 정화와 인간으로서 비약적인 성장을 가져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학교, 서점, 하숙집에서만 있는 것이 지겨우면, 때로는 아무 버스나 타고 모르는 곳에 가서 무작정 걸으면서 자신의 마음 속에 떠 오르는 시상을 수첩에 적어 두었고, 밤이 되면 하숙집에서 그 시상을 바탕으로 시를 쓰면서 자신의 마음을 탐구해 나갔다. 한 번은 [신춘문예]에 시를 응모하였는데, 당연하게도 떨어졌다고 한다. 아마도 그 당시 젊은 혈기의 거친 마음이 여과되지 못한 채 표현된 것 같다고 스님은 회상한다.
대학 첫 해에는 총연극회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연극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하며 그동안 탐구하지 못했던 인생 다방면에 걸친 경험도 쌓아 가게 된다. 그는 그가 연극부에 들어가게 된 인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연극부에는 대체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오는 것 같았어요. 한 부류는 끼가 많아 그것을 발산하려는 성향의 사람들이었고요. 또 다른 부류는 자신의 마음에 무언가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후자는 자신이 평생 가지고 있던 왜곡된 퍼소나를 벗어 던지고 새로운 인물을 탐구하고 그 인물에 가까워지는 것에서 해방감을 느끼는 부류인데, 저는 그 후자였던 것 같아요. 연기력요? 연기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어요. 연극부에서의 일상은 그냥 조명들고 무대 설치하는 일을 돕는 정도였어요.”
그는 대학 삼학년 때에 선우회라는 불교 수행 동아리에 나가면서 평생의 도반들을 만났다. 그곳에서 불교의 깊이에 심취하게 되었고, 따라서 스님의 방황은 차츰 사라지게 되었고 연극부에 나가는 것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매일 같이 아침 7시에 모여서 백팔배와 참선을 하고 경전을 독송하고 토론을 한 후에 각자 헤어져 자신들의 학교 공부를 하였고 점심 시간에 다시 모여 함께 조용히 점심을 먹고 잠시 법담을 나눈 뒤에 헤어졌는데, 스님은 이때의 생활이 마치 출가 승려의 생활과 비슷했다고 회상한다. 이렇게 4-5년 함께 한 아마추어 수행자 생활은 자연스럽게 그들이 전문 수행자의 길을 찾게 하였고, 그 결과 십여 명이나 되는 많은 동아리 출신 학생들이 졸업하자 마자 인연 따라 출가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출가
그는 서울대 계산통계학과를 졸업하고 또다시 수학능력 시험을 쳐서 1996년에 경희대 한의과에 들어갔다. 그 길은 당시 그가 불교 수행에 심취하여 전문수행자가 되고 싶었지만 부모님에게 큰 상처를 주며 출가하기까지는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내린 절충안이었다고 스님은 회상한다. 당시 ‘동의보감’ ‘허준’ 등 한의학 소재의 TV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는데, 그는 한의사가 되면 수행의 길을 병행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다고 한다. 한의사되는 것이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어서 큰 욕심을 가지지 않으면 시간 여유도 있어 전문 불교 수행자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한의대에 들어가서 반은 수행자, 반은 한의대생으로 생활을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그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의학은 생명을 다루는 공부라 이것 하나만 해도 평생을 바쳐야 할 학문인데, 이것을 마치 수행이라는 본업을 위한 부업 정도로 여긴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또 거만했던가를 깨닫게 되었죠.” 그에게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 점점 가까워졌고, 그는 둘 중에 전문 수행자가 되기로 굳은 결심을 한다.
그는 홀로 봉암사 등 여러 선방에 가서 출가의 길을 모색했고, 때마침 당시 청정회 도반이었던 조용언 (명인 스님)도 같은 시기에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경제학과 학사, 석사를 마치고 학교에서 촉망 받는 인재였는데, 출가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만나서 함께 스승을 찾아 많은 절들을 찾아 다녔다. 그와 제일 처음 찾아간 곳은 송광사 불일암이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조용언과 같은 담양 출신 선배이자 법정 스님 상좌인 덕현스님을 만나게 되어 밤새 대화를 했다. 덕현 스님의 말을 들으니, 법정스님 밑에서 출가하려고 3년 행자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그곳에서 출가하려면 형평성에 맞게 오랜 기간 행자 생활을 해야 된다고 했다. 그들은 6개월이면 계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다른 곳으로부터 듣고 있었던 중이라, 다음날 불일암에서 나와 다른 절을 찾아 다녔다.
자애로운 스승을 만나다.
그들은 이후에도 많은 절들을 찾아 다녔고 그러다 인연이 되어 김천 수도암에 가게 되었다. 그곳은 전국 10대 선방 중에 하나로 알려진 곳으로 여러 큰 스님들이 출가를 하시고 수행하신 유서 깊은 도량이었다. 그들은 수행도량의 청정함, 수도암의 엄격한 수행 가풍이 마음에 들어 그곳에서 출가를 하였다. “당시에 30여명의 수좌 스님들이 정진 중이었는데, 어떤 스님은 하루 한끼 드시며, 18시간 씩 좌선을 3년 동안 하시는 분도 계셔서 큰 신심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주지셨던 원인 (圓印)스님의 여법한 법문은 출가 절을 찾아 떠돌던 그들이 그곳에서 마음을 쉴 수 있도록 해 주셨다. 그 때 원인스님은 태백산 토굴에서 가행 정진을 하러 들어가실 계획이었는데, 두 사람을 보고 상좌로 거두어 주었다. 원인스님께서는 수행자로서 올곧게 수행에만 전념하시는 모습이 그들의 성향과도 잘 맞았다. 두 사람은 출가하여 몇 개월 후에 같이 수계를 하였고 같은 사형사제간이자 평생 가장 가까운 도반이 되었다.
가족관계
부산시 동구 수정산 수정동에서 태어난 덕일스님은 3대 독자로, 누님 한 분과 여동생이 있다. 부모님은 특별히 종교적인 분들은 아니었지만, 굳이 말하자면 불교 쪽에 가까운 사고 방식과 생활 방식을 가졌다고 한다. 부모님은 모두 생존해 계시며, 아버님은 40대 후반에 조그만 화랑을 개업하셨는데, 여든이 가까운 현재에도 계속 화랑을 운영하시고 있다.
부모님과의 인연
조사 어록에서 가족과의 연을 매정하게 끊고 출가하던 장면에 경도되어 그렇게 출가했지만 덕일 스님의 마음 속에는 늘 부모님에 대한 걱정과 죄책감이 있었다고 했다. 그것은 서슬 퍼런 수도암의 수행 가풍에 눌려져 있었지만 늘 마음 한 켠에 존재하며 걱정과 불안을 일으켰다고 한다. 스님은 그 당시를 회상했다: “부모님의 반대가 불 보듯 뻔한지라, ‘한의학 연구를 위해 입산한다’는 짧은 편지 하나만 남기고는 기습적으로 출가하여 행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4년간 범어사 강원에 다니는 기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합해서 10여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다가 나중에야 연락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후에 빨리어 경전이 유행하면서 율장에서 부처님께서 “부모님이 아프시면 결제 중에라도 산문을 나서서 부모님을 탁발 봉양하라”는 조목을 읽고, 그들을 거의 사지로 몰아 넣었던 자신의 출가 방식에 뉘우치며 스님은 부모님과 재회를 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는 가끔씩 전화 연락을 드리며 안부를 여쭙는다고 스님은 담담하게 말했다.
김천 수도산 수도암은 어떤 곳?
경상북도 김천시 해발 1,327m의 수도산 (일명 불영산 또는 불흥산)의 약 1000m 고지에 자리한 수도암은 청정 수행 도량으로 전국10대 도량으로 손꼽힌다.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859)한 이 수도암은 여러 설화들이 전해 오고 있다.
1. 풍수지리에 눈 밝으신 도선국사께서 이 자리를 찾은 후에 너무 기뻐서 7일간 춤을 추었다는 곳
2. 석조비로자나불에 얽힌 설화
3. 16나한전의 영험
4. 대적광전 앞에서 바라다 보이는 연꽃 모양의 가야산의 봉우리
5. 수많은 대선사와 큰 스님들이 수행처로 삼으신 곳 등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수행 사찰이다.
석조비로자나불상은 국보 제307호, 9세기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다. 왼손 검지를 오른손이 감싸고 있는 수인을 하고 있다. 이 불상과 칡넝쿨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또한 16나한전에 얽힌 설화 한 스님이 공양미를 지고 힘들게 산을 올라 오는데, 어떤 동자가 나타나 번쩍 들더니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스님이 암자에 올라와 보니, 이 공양미는 보이는데, 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16나한을 살펴 보니, 한 존자의 어깨에 지푸라기가 묻어 있었다.
이 수도암에서 수행정진을 한 선지식들을 살펴보면, 성철스님이 잠시 기거하신 조사전이 있고, 1969년에 이 암자를 중창하신 법전 대종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선원을 개설한 경허스님을 비롯, 한암, 보문스님, 동산, 금오, 전강, 구산스님이 수행 정진했고 몇 년전 입적하신 송광사 보성스님이 출가한 곳이기도 하다 (무여스님TV). 현재 이 수도암은 조계종 직지사의 말사 청암사 부속 암자이다.
스리랑카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
2007년경 당시의 한국 불교계에서는 빨리어 경전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서양에서 공부한 많은 분들이 쓴 초기경전에 관한 책들은 스리랑카의 불자출판협회(Buddhist Publication Society-BPS)에서 영문으로 발행되고 있었는데, 이 책들은 활성스님의 역경사업 발원으로 한국에 설립한 ‘고요한 소리’(1987년)에서 ‘보리수 잎’ 시리즈와 ‘법륜 시리즈’로 번역 출판되어 부처님의 원음을 듣기 원하는 수행자와 불자들을 위한 소중한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었다.(calmvoice.org).
후에 각묵 스님과 대림 스님이 세운 ‘초기 불전 연구원’ 등에서 번역한 빨리어 경전들이 젊은 스님들과 불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10여년간 수행에 매진해 왔던 덕일 스님은 2007년경 간농양으로 쓰러져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었는데 그 일을 계기로 지금껏 자신이 걸어 온 수행의 길을 되돌아 보며, 그간 부처님 가르침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열정만 불살라 왔다는 것을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빨리어 경전을 보기 시작했고, 이후 병에서 회복하여 부처님의 원음을 이해하고자 고전어를 배울 수 있는 스리랑카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고도 캔디에 있는 뻬라데니야 대학 교수님들을 통해, 빨리어를 포함한 고대 인도어 방언들 (쁘라끄리트)과 표준어(산스끄리트)를 배웠다. 인도 유럽 어족들은 명사 뒤의 격변화와 시제가 뚜렷해서 빨리어 경전들이 한역 경전들에 비해서 그 구체성이 더 부각되는 것 같았다.
그는 수행자의 길을 걷는 와중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학문의 즐거움을 스리랑카에 있으면서 다시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돌아 보면 그는 고등학교 다닐 때에 일요일까지도 학교에 나가 홀로 공부를 하였는데, 빈교실에 들어가 책상을 붙여서 넓은 책상을 만들어 책가방 안에 있는 책들을 모조리 펴고 공부하며, 공부한 내용을 칠판 앞에서 강의하는 식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때로는 교실에서 마치 학생들이 질문하는 것들을 대답해 주듯이, 그 장면을 그려가면서 공부하였는데, 스리랑카에서 공부하며 그 때 불씨가 다시 살아 났다고 회상한다. 아마도 고등학교때의 그런 경험이 학승으로서 덕일 스님의 구도의 길의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미국 유학을 하게 된 동기는
스리랑카에서 서양학자들의 글을 접하면서 학문적인 시각에 영향을 받아 덕일스님은 서양에서 공부를 이어가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저의 뿌리는 한국전통 불교(대승불교)에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불교 전통들을 접하면서 저는 불교 전통을 역사적인 맥락 속에 이해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는 그런 바램을 가지고 미국 대학원에서 요구하는GRE(Graduate Record Examinations)와 TOEFL (Test of English as a Foreign Language)을 준비했다.
캔디에서 콜롬보까지 기차로 한나절 달려서 시험을 치고 오는 힘든 여정을 하기도 했다. 다행이 그는 2013년 버지니아 대학 석사 과정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종교 역사를 공부했는데, 불교 뿐 아니라 타 종교들을 역사적인 맥락 속에 이해가고, 타 학문 영역인, 인류학, 종교이론, 심리학과 연계해서 공부하였다. 그 과정에서 불교가 어떻게 당시의 브라만교, 자이나교, 사명외도 등과 경쟁하면서 종단으로 제도화되어 갔는지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스승의 보살핌,
교계 어른 스님들과 종단의 후원
“미국 버지니아 대학(University of Virginia)의 석사과정 입학 허가서가 날아 왔을 때 (2013 봄), 은사 스님(원인 큰스님)께서는 당시 영주 대승사에 계셨는데, 사중에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모아서 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셨습니다.” 그는 은사스님에게서 부처님의 말씀대로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고 사심없이 수행자로서 여법하게 사는 모범을 어깨 너머로 배웠다고 한다. 범어사에서 덕일 스님에게 경을 가르치셨던 덕민 큰 스님의 추천으로 안국 선원 선원장이신 수불 큰스님도 그의 석사 과정에서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 당시 종단에서 시작한 유학 장학금을 5년간 받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시의 적절하게 그의 미국 유학을 지원하게 되었다. “이 모든 분들이 제가 미국에서 학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신 분입니다. 학업 중
이라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한국에 방문하면 제일 먼저 찾아 뵙고 인사 드리는 분들입니다.”라고 스님은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박사 과정을 선택하게 된
동기 및 연구분야
스님은 “당시 한국 불교를 가르치던 로버트 버스웰 교수님께서 저를 적극 천거해 주셔서 제가 그곳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지도 교수님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스님은 박사학위 논문으로 3세기 지겸 스님이 한역한 의족경(義足經 T198)을 선택했다. 이 경전은 빨리어 경전 중에 숫따니빠따(Sutta Nipāta)의 제 4품인 ‘여덟 게송으로 된 품 (Aṭṭhakavagga)’과 비교되는 경전으로 불교 초기에 교단이 정립되지 못한 때의 다양한 불교의 모습을 담고 있어서 불교 교단의 발전 과정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문헌학적인 자료라고 스님은 이야기 한다.
그는 “이 경전이 게송 하나하나가 수수께끼처럼 어렵고, 그 내용이 너무 방대해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스님은 서두르지 않고 연구를 즐기며 꾸준히 정진하여 결국 박사학위 9년 차에 총 648페이지 272,000자 규모의 방대한 연구 성과를 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의족경의 주석 완역본을 내놓으며 이 논문이 앞으로 많은 학자들이 이 경을 연구하는데 밑거름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학계에서 스님의 논문이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어서, 출판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많고 아마도 강의 교과서로 채택될 가능성이 큽니다”라고 말한다. 스님은 이 경이 영문으로 먼저 출판되고 그 후에 한글 본으로도 출간하여 한국 독자들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어려웠던 점
지난9년간의 박사과정 연구 기간 동안의 어려움에 대하여, 덕일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양에서 소개되지 않은 한국불교의 한 측면을 서양에 소개하면 좀더 빨리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지만, 저는 오히려 먼 길을 걷더라도 제 영혼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주제, 즉 ‘초기 불교 교단이 발전하는 과정’을 연구를 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은 어렵더라도 그 만큼 새로운 힘이 계속 생기는 것 같아요.” 라며 위기감이 들 때 어떻게 극복 했는지에 대해서, “인내를 요구하는 시간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몇 달 동안 제 논지를 한 두 문단도 밖에 못 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고 자신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최대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체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공부가 안될 때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8마일을 뛰기도 하고 턱걸이와 팔굽혀 펴기의 숫자도 늘려가며 언젠가 연구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질 때를 대비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다른 스님들과
다른 길을 선택하신 이유는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대부분 한국으로 되돌아가거나 대학에서 강의 하는 길을 택하는데, 덕일 스님은 그 길이 아닌 미국의 한국인 선원을 택했다. 그 이유에 대해, 스님은 “한국의 대학에서 후학을 지도해보자는 제의가 있었지만, 저는 미주 한인 교포들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미국에 남기로 했습니다.” 엘에이의 김소연 보살님은 2018년부터 경제적 어려움없이 공부하는데 장학금으로 후원해 주었고 법보선원 신도님들은 한 달에 한번 스님이 정기적으로 법문을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스님이 오랜 기간 외국에서 자취 생활을 하면서도 스님으로서의 정체성이 흐트러지지 않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인연이 이어져 스님이 졸업할 즈음 (2023년 겨울)에 김소연 보살님의 주도로 비영리 종교 단체인 법보선원을 인수하여 스님이 연구와 포교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었다.
스님은 이어서 “지금까지 승려생활 13년, 해외에서 15년을 떠돌아 다녔기에 이제는 안정된 환경에서 머물며 저술 활동에 매진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습니다.” 스님은 학교에 머물 경우, 속인들 사이에 지내며 세속화가 불가피한데, 그렇게 되면 글을 쓰고 싶은 마지막 여정이 이루어 질 것 같지 않았다. 솔직히 5년후면 세속 나이 60이 되는데, 수업, 학교행사, 학생지도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책을 쓸 수 있는 시간을 내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고 말했다. 종교 역사에 대한 학문적인 글 외에도 그가 평생 고민해 왔던 부처님의 원음, 역사적인 맥락 속에 불교를 읽어야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깨달음 등을 주제로 일반 독자들을 위한 글도 쓰고 싶다고 스님은 이야기 했다. 그는 이렇게 좋은 책, 영상 등으로 독자들과 소통하는 것을 미국에서 자신의 마지막 긴 여정이라고 말을 맺었다.
법보선원의 비젼
첫째, 종교이론, 종교사, 불교역사를 보았을 때, 기도나 제사만 지내는 절은 이제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본다. 젊은 사람들 특히 미국화된 교포 2세들과 영어로 소통을 하고, 미국에 맞는 새로운 불교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본다.
둘째, 논문, 책, 글쓰기를 통해 학문을 꽃피우고 종교, 역사, 철학을 종합하여 의미있는 문자와 영상포교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셋째, 심리학과 불교 토론장이나 실생활에 유용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구상 중에 있다. 그렇다고 문화센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일시 : 2024년 4월 7일
장소 : 법보선원, OC
* 논문에 관한 대화가 계속 진행되었으나, 내용이 방대하여 차후 2차 인터뷰를 약속하고, 1차 인터뷰를 마치었다. -논문 관련 특별 취재는 다음호에 계속
법회: 매달 두번째 일요일 오전 11시
연락처: 전화 (714-583-8349)
주소: 12732 Gilbert St. Garden Grove, CA 92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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