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험난한 왕권다툼에서 살아남는 지혜를 발휘하신 시조부군의 인생승리를 배웁시다.
시조부군의 시제를 공지하고 민성종친이 손수 시조묘역의 잡초를 제거하는 등 시조할아버님을 존경하시는 후손들로서 시조부군의 삶의 시기인 그 당시 고려왕조에 대하여 약간이나마 아시는 것도 시조 광봉 할아버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몇 자 적어봅니다.
고려는 초대 왕건이 서기914년에 즉위하고 34대 공양왕 1392년에 멸망함으로서 통치기간은 475년간이었다. 고려왕들은 이성계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 까지 역대 왕 34명중 절반 이상이(18명) 쫓겨났다. 조선은 두 차례의 정난과 반정으로 태조(이성계), 정종(이성계 장남), 단종, 연산군, 광해군 모두 4명이 왕위에서 쫓겨났다. 쫓겨난 왕을 비교하면 고려는 18명인데 조선은 5명이다. 고려가 그만큼 왕권이 불안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이유는 몽골족인 원나라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고 무신정권이 판을 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우리들의 시조이신 함풍부원군 이광봉祖가 생존하던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시대 고려의 왕권은 어떠했는가를 한번 살펴보자. 우선 고려왕조는 적자(장남)계승이 드물었다.
1대 왕건과 2혜종 3정종 4광종은 형제지간이고, 5경종과 6성종은 사촌지간이고, 7목종은 당숙인 8현종에게 양위하고, 9덕종, 10정종, 11문종도 형제지간이다. 그리고 12순종, 13선종, 14숙종도 형제지간이고, 18의종, 19명종, 20신종도 형제지간이고, 21희종과 22강종은 4촌지간이고, 28충혜왕과 29공민왕이 형제지간이고, 29충목왕과 30충정왕이 형제지간이었다. 이 왕권사이에 고려왕씨가 김씨왕조가 될 뻔한 사건과(천추태후와 김치양사이의 아들을 왕위에 옹립하려던 사건) 이씨왕조가 될 뻔한 사건(17대 인종이 왕위를 외할아버지 이자겸에게 양위하겠다고 선포한 사건)이 있었다.
광봉 할아버지가 탄생하실 때 임금인 고려 23대 고종(高宗1213~1259))은 한편으로는 무신통치를 끝낸 임금이면서 동시에 고려를 몽골의 보호국으로 전락시킨 임금이기도 하다. 특히 그를 이어 즉위한 원종(元宗1259~1274))은 원나라 황제의 딸들을 맞아들임으로써 고려를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사위나라)으로 전락시킨 장본인이다. 원나라를 모시기 시작한 첫 번째 임금이라 원종(元宗)이라 했을 것이다.
이후 충(忠)자 돌림 임금들이 들어서게 된다. 15년을 재위한 원종에 이어 원나라 황제의 딸 홀도로게리미실(제국대장공주)과 혼인한 25대 충렬왕(忠烈王1274~1308))은 질투심 강한 왕비를 제외하면 누구도 두려워할 게 없었기 때문에 34년간 무탈하게 왕위를 지킬 수 있었다. 한 차례 파란을 겪기는 했다.
충렬왕 23년(1297년)에 충렬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원나라에 머물던 세자 익지례보화(훗날의 충선왕)가 귀국해 어머니를 위한 피의 복수를 벌인다. 심지어 아버지가 총애하던 무비를 비롯해 수십명의 아버지 측근들을 제거해 버렸다. 세자는 '원나라 황제의 외손자'라는 자부심으로 황제의 사위에 불과한 아버지(충렬왕)를 무참히 짓밟은 패륜아였다. 이듬해에는 8개월 동안이긴 하지만 아버지를 내몰고 왕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308년 충렬왕이 죽자 세자였던 충선왕은 아버지 충열왕 생존시에 충렬왕을 내몰고 8개월 동안 왕위를 하고 물러나 있던 자로서, 아버지인 충렬왕 사망하자 '또다시'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올라 가장 먼저 한 일이 무비를 죽인 뒤 아버지를 위로 한다며 들여보냈던 과부 출신의 숙창원비 김씨를 자기 부인으로 삼은 것이었다. '황제의 외손'인 26대 충선왕(忠宣王)은 부인인 보탑실련(계국대장공주)도 외면하고 야속진이라는 평범한 몽골(혹은 여진) 여인과의 사이에서 난 둘째 아들에게 왕위를 넘긴다. 그가 1313년 왕위에 오른 27대 충숙왕(忠肅王1313~1330)이다.
그런데 충숙왕은 아버지인 충선왕이 죽고 즉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재위기간(5년) 내내 원나라에 머물던 충선왕이 귀국종용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들 충숙왕에게 선위한 것이기 때문에 고려의 권력은 여전히 충선왕에게 있었다. 충선왕은 고려 사람이 아니라 원나라 사람이었다. 훗날 충선왕은 원나라 황실의 권력관계 변화로 티베트로 유배를 가는 고초를 겪는다. 이때 이광봉, 권한공, 최성지 등이 호종했다.
한편 충숙왕은 재위 3년째인 1316년 쿠빌라이의 손자 야선첩목아의 딸 복국장공주와 혼인함으로써 황실과의 유대를 강화해 나름의 권력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미 충숙왕에게는 부인이 있었다. 이미 충선왕에게 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낸 홍규의 다른 딸이 그의 부인이었다. 충선왕 충숙왕 부자는 부자지간이면서 동서(同壻)지간이기도 했다.
덕비(德妃)로 책봉된 홍씨와 충숙왕 사이에서 28대 충혜왕(忠惠王)과 31대 공민왕(恭愍王) 형제가 태어난다. 충숙왕과 충혜왕 부자는 치열한 암투로 각각 두 번씩 왕위를 오르내려 복위(復位)라는 말을 낳게 한다. 충숙왕(1313~1330년) 충혜왕(1330~1332년) 충숙왕 복위(1332~1339년) 충혜왕 복위(1339~1344년).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눠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이어 충혜왕의 두 아들 29대 충목왕과 30대 충정왕으로 잠시 내려갔던 왕위는 1351년 31대 공민왕으로 이어지게 된다. 조선의 이성계나 이방원도 모두 공민왕 때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를 내치고 형 정종을 내치고 조선 3대왕위에 오른다. 이 모두가 고려에서 내려온 왕권 다툼의 현실을 학습한 윤리적 패륜이었다.
고려왕권 다툼이 반복되는 험난한 시기에 살아남는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고난을 이기고 벽상벼슬(정1품)까지 오르신 우리시조 할아버님의 인생승리는 지금의 후손들도 본 받아야 할 인생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