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로 갈라진 사회, 둘로 갈라진 소금
석유와 달리 소금은 무한자원이다. 소금광산, 소금호수, 소금강 등 오래 전에 바다였던 땅에서 가늠하기 어려운 양이 묻혀 있고, 또 지구 표면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바다에서 구할 수 있다. 산업혁명이 시작되자 소금의 전매제도는 사라졌다. 값싼 염화나트륨이 무한정으로 보급된 것이다. 화학혁명으로 소금은 식탁보다는 공장에서 더 많이 쓰이게 됐다. 세계 소금 소비량의 80% 이상이 산업용이다.
가을 햇살도 볕이라고 소금이 온다. 전남 목포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신의도 염전에서는 10월 중순에도 소금을 내고 있었다. 올 봄까지만 해도 30kg 한 포대에 7천원 하던 소금값이 여름이 지나면서는 5천원까지 내렸다. 가을소금은 쓴 맛이 나기 때문에 여름소금보다 값이 떨어진다. 30kg에 3천원이다. 소금생산량도 여름에 비해 2/3밖에 되지 않아 차라리 손을 놀리는 게 낫다고 푸념하면서도 볕 좋은 날이면 홀린 듯 염전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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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금을 내는 일은 중노동이다. 하늘과 땅, 햇볕과 바람에 운명을 맡긴 지라, 천일염전의 일은 원시시대의 노동과 다를 게 없다. 결정지 바닥에 모인 소금결정을 한 중년여성이 모으고 있다. <정기훈/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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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도의 면적은 33.20평방킬로미터. 염전은 5.47평방킬로미터로 섬 전체면적의 1/6을 차지한다. 작은 섬에 넓은 염전이 생기게 된 것은 자연적 조건에 섬사람들의 억척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농사도 되지 않고 고기도 잡히지 않아 하루 세 끼 먹기 어려웠다”는 신의도 사람들은 천일염전에 눈을 뜨게 됐다. 이웃 비금도의 주민 두 명이 평양 귀성염전에서 기술을 배워 갯벌을 막아 소금 생산에 성공한 것이다. 1948년, 신의도 주민들은 20~30명씩 조합을 만들어 상태도와 하태도로 나뉘어져 있던 섬을 잇는 제방을 쌓아 염전을 만들었다. 지게로 돌을 지어 나르고 삽으로 흙을 퍼다 바다를 메웠다.
1907년 인천 주안염전에서 일본인 기술자에 의해 천일염전이 개발된 이래 군자, 소래 등 천일염전은 대부분 국영이었다. 큰 염전들은 황해도와 평안도에 있었다. 1942년 염 전매령이 시행됐고 해방 직후에도 개인에게는 제염허가권을 주지 않았지만, 분단으로 소금 수급이 어려워지자 정부는 염전 개발권을 민간에게 개방했다. 신의도 염전을 비롯한 서남해안 지역의 염전은 대부분 이때 만들어졌다.
제방공사와 염전축조에 품을 댄 조합원들은 1정8반(1정은 염전의 최소단위로 3000평), 쌀이나 돈을 댄 조합원들은 많게는 5정까지 염전을 소유하게 됐다. 화염가마터를 갖고 있던 4명의 염주들이 돈을 댔다. 화염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소금생산방식으로, 갯벌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염도를 높인 뒤 가마에 끓여 소금을 얻는다. 이 역시 땅을 가진 이들만이 운영할 수 있었다. 신의도 주민들은 갯벌을 메울 수 있는 곳이면 다 제방을 쌓아 염전을 개간했다. 현재 신의도의 제방은 19개, 그 아래는 대부분이 염전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품보다 돈을 내 제방공사와 염전개간을 했고 낸 돈만큼 염전을 나누어 가졌다. 소금농사는 재미가 좋았다. 1962년 전매법이 폐지되기 전까지 소금 수매하는 날이면 염주들은 현금을 소금포대에 담아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소금으로 부를 늘려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맨손으로 만들었던 염전 1정8반을 팔아야 했던 이들도 있었다.
“저 애기들이 없으면 염전이 안돼”
전관식(65)씨는 부모로부터 염전을 물려받지 않았다. 그의 부친은 1정8반의 염전을 갖고 있었지만 3남2녀를 키우느라 모두 처분했다. 막내였던 전관식씨는 어린 시절부터 육지로 나가 유랑생활을 하다 군대를 다녀온 뒤 1970년 고향에서 영진염업사 염전관리인으로 정착했다. 목포의 사업가 세 명이 신의도 염전 60정을 공동으로 사들여 주민들에게 소작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소작인들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다. 1970년대 염전관리인은 염주 못지않은 위치였다. 1979년 정부에서 기계염(정제염)공장을 설립하기 전 소금은 천일염뿐이었다. 서로 염전 일을 하려 했다. 일꾼들이 늘어나자 염주들은 식당, 여관, 다방까지 운영했다. 지금은 사라진 직업인 염전관리가 당시 신의도에서는 최첨단(?) 전문직이었다. 염전관리인으로 일을 하는 동안 1정8반의 염전을 마련하고, 1980년대 초 목포의 염주들이 인력난에 부딪혀 염전을 내놓자 관식씨는 염전 3정을 사들였다. 이때 염전을 소작하던 신의도 사람들 역시 염전을 살 수 있었다. 이 무렵 소금값은 60kg 한 포대에 1만원 했다. 염전 4정8반을 소유하게 된 관식씨는 5년 동안 소금농사를 지었다. 종자돈을 마련한 관식씨네는 1987년 목포로 나가 금은방을 운영했다. 현재 신의도 주민은 1,877명, 염주는 239명이다. 수십년 동안 남의 염전에서 일을 하며 억척을 부린 덕에 관식씨도 염주가 됐지만, 옛날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프고 힘든 과거는 보존되기 힘든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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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금이 바닷물과 태양의 결정라면, 신의도의 천일염전은 주민들의 피와 눈물과 땀의 결정이었다. 신의도의 소금은 염화나트륨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의 산물이다. 늦은 가을 어느날, 신의도의 염전 위로 해가 떠오르고 있다. <정기훈/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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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 햇볕과 바람에 운명을 맡긴 염전의 일은 원시시대의 노동에 가깝다. “어느 해 정월인갑다. 눈이 퍽퍽 겁나게 날리는데 요떼기 하나 뒤집어쓰고 수평 맞춘다고 장화도 없이 맨발로 꾹꾹 눌러 주는데….” 염전의 증발지인 난치나 누테의 바닥을 갈아엎어 주어야 소금맛이 좋아진다고 해마다 겨울이면 염전에 나가 바닥을 갈아엎고 말리고 다지는 작업을 했다.
오늘도 염전에서 일을 하고 왔다는 예순아홉살 강경희씨는 기억만으로도 징글맞다는 표정이다. 이제 이 작업은 일할 사람이 없어 3년에 1번 정도 한다.
지금은 양수기를 이용하지만, 50년 전 신의도에 처음 염전이 생겼을 때만 해도 바가지로 가둬놓은 바닷물을 증발지로 올렸으니, 그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정지의 바닥 역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생산량과 노동량에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갯벌에 옹기조각이 깔렸다 그 다음에는 타일, 지금의 검은색 고무장판에 이르렀다. 결정지 바닥이 평평하고 미끄러우면 소금을 모아내기 쉬워 두 사람이 하던 일의 양을 한 사람이 할 수 있다. 고무장판이 검은색인 이유는 햇볕을 많이 흡수해 소금 생산량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결정지에 소금이 쌓이면 이전에는 광주리에 퍼담아 소금창고로 실어냈지만 지금은 바퀴 달린 수레를 이용한다. 최근에는 염전 사이로 난 좁은 길에 레일을 깔아 자동열차를 도입한 염전도 있다. 소금창고에서 소금을 포대에 담아 실어내는 일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곳은 섬이다. 60kg 소금 포대를 이고 지고 해서 선착장으로 날랐다. 1992년 페리호가 섬에 들어오면서 소금 포대는 트럭에 실려 바로 배로 오른다. 맨손으로 쌓아올린 제방은 비만 내리면 틈이 갈라져 물이 샜다. 1970년대 정부에서 제방보강사업을 지원해주기 전에는, 주민들은 날만 궂으면 가마니를 들고 염전으로 달렸다. 제방 바로 옆 염전은 공동염전으로 주민들이 돌아가며 소금농사를 지었는데, 아예 염전에 움막을 짓고 산 적도 있다.
염전 3정에 최소한 2명의 일꾼이 필요하다. 예전에는 5명이 했다. 신의도를 비롯한 서남해안 섬의 염전에서는 염부를 직업소개소를 통해 구한다. 소개비는 100만원 정도다. 직업소개소는 대체로 역에서 노숙하는 이들을 소개한다. 이들이 염전에서 일을 하고 받는 돈은 한 달에 30만원에서 100만원이다. 일을 하러 온 이들 가운데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게 되는지, 임금을 얼마나 받게 되는지 모르고 들어 온 이들도 꽤 있다. 대체로 넋나간 표정의 염부들에게 일부 염주들은 일을 시키고 돈을 주지도 않기도 하고, 일을 그만두고 나가겠다는 이에게 강제로 일을 시키고, 심지어는 동네에 나가 사고친다는 이유로 두 달 동안 밤마다 개줄로 묶어둔 염주도 있었다. 이러한 사례들이 언론에 보도가 되면서 서남해안 지역의 면사무소와 파출소는 염주들에게 특별히 교육을 시키는 등 관리감독에 신경을 쓰고 있다. 인권이라기보다는, 어느 염주의 말처럼 “저 애기들이 없으면 염전이 안 되기” 때문에 조심을 하는 것이다.
염부로 살아서는 희망이 없다. 신의도의 한 염주는 18년 전에 염전 2정3반을 2,400만원 주고 샀다. 현재 염전 1정8반은 1억3천만원. 6배가 올랐다. 1988년 당시 노동자의 23%가 월 임금 50만원을 받았다. 지금 염부들이 받는 임금을 평균 60만원으로 보았을 때, 아무리 일을 해도 염전을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아무도 염부가 되려 하지 않는다. 요즘 염주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프랑스의 게랑드 염전에는 염부가 없다. 염전에서 일을 하겠다는 사람들에게는 1년 가량의 교육과정을 밟게 하고, 이를 수료한 이들에게 적은 규모의 염전을 맡긴다. 처음에는 생산한 소금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정부의 지원금이 주어진다. 경력이 쌓이면 운영하는 염전의 면적을 넓힐 수 있다. 염전을 소유하지 않았더라도 염전에서 일을 하는 동안은 자신이 생산하는 소금은 자신의 것이 된다. 총생산량이 1만5천톤밖에 되지 않고, 엄청나게 비싼 값에 팔고 있어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가을소금을 내는 날, 신의도의 한 염부가 자신을 고용한 염전이 아니라 다른 염전에 가서 품을 내고 과자 몇 봉지를 받아 들고는 비척비척 걸어간다. 가을소금이 염주들에게 덤이 아닌 것처럼, 남의 염전 일 해주는 게 서비스는 아닐진대. 도시에서 이미 상처투성이로 만신창이가 돼 신의도로 온 염부들의 얼굴에 맺힌 소금땀이 더 아리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서 정하섭의 아버지는 농지개혁법을 피해 멀쩡한 논에 짠물을 끌어대는 육시럴 맞은 짓거리를 하다 소작인들 낫에 찍혀 죽지만, 실은 술도가 정 사장이 선견지명이 있었다. 소금농사는 논농사의 배 이상이다. 논 3ha에서 80Kg짜리 3백 가마, 염전 3ha에서 소금 30kg 1만 가마가 나온다. 쌀값은 한 가마에 17만원, 소금값이 좋았던 2003년의 경우 소금값은 한 가마 1만원이었다. 염주들은 염부들에게 인건비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다지만 전기료를 비롯한 시설유지비용이 1년에 5백만원이니, 소금농사가 쌀농사보다 얼마나 실한지 알 수 있다.
이러다보니 1997년 소금수입자유화가 되면서 시작된 정부와 대한염업조합의 폐전정책에도 버티고 있는 염전들이 있다. 정부는 간장, 된장, 김치 등 전통 발효식품의 수요에 대한 최소한의 기반을 남겨둘 계획 아래, 최소안정생산규모를 대략 염전 2,000ha, 생산량 15만톤으로 보고 폐전을 유도했다. 1996년 12월 천일염전 총 가동면적은 6,610ha로 4,334ha를 폐전시킬 목표였으나 2004년까지 2,334ha만 지원금을 받고 폐전했다. 특히 신의도, 비금도 등 신안군의 염전은 1996년에는 3,046ha, 현재 2,416ha로 630ha밖에 폐전시키지 않았는데, 이는 이 지역 염전의 규모가 적어 채산성이 줄어들어도 버틸 수 있는 데다 경인과 중부지역보다 땅값이 낮기 때문이다. 서남해안 염전업체의 평균 면적은 3.01ha이고, 전국 평균은 3.58h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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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기훈/매일노동뉴스 사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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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전정책에도 천일염전을 사수하고 있는 신의도 염주들도 한결같이 주장한다. “우리가 배운 게 있나? 나이 들어서 다른 일을 하겠나? 우리한테 소금은 생존이다.” 소금 말고 다른 일을 해서 먹고 살 수 있도록 염전을 새우양식장이나 농지로 전환하는 길을 열어 놓았는데, 본인들의 말처럼 바닷물 퍼다 소금 만들 줄만 알던 이들에게 새로운 일은 모험이다.
신의도에서 3정6반의 염전을 갖고 있던 홍정기(42)씨는 젊은 사람이 염전에 매달려 살 수 만은 없다 싶어 새우양식장으로 바꾸는 모험을 감행했는데, 첫해는 본전치기, 둘째해는 새우가 병에 걸려 다 죽는 바람에 사료값만 날렸다. 새우양식장 절반은 남겨 두고 나머지는 다시 염전으로 만들었다. 소금은 재료값이 들지 않는다.
아무려나 신의도의 염주들에게 염전은 생명이지만, 도시의 소비자들에게 소금은 더 이상 생명이 아니다. 염전을 폐전하든 천일염 생산이 줄든 상관할 바 아닌 것이다. 1907년 생긴 우리나라 최초의 염전인 주안염전이 1969년 한국수출 제5공단과 6공단으로 변신한 뒤 서해안의 염전들은 공단이 되고, 아파트단지가 되고, 골프장이 됐다. 우리나라 소금의 수요는 2003년 기준 연간 320만t으로 이 가운데 식용소금이 17.4%, 나머지 82.6%는 공업용이다. 먹는 소금 중 일반가정용 소금은 연 21만톤, 식품공업용 소금은 34만톤이다. 2003년 생산된 천일염은 27만톤으로 식용소금 55만톤의 수요에 미치지 못하지만 무한정 쏟아지는 수입염이 있다. 연간 25만톤 규모의 기계염 공장은 1만톤 정도밖에 생산하지 않는다. 공업용 소금은 1980년대부터 호주, 중국 등지에서 수입한다.
소금이라고 하면 천일염이 유일하던 ‘화려한 시절’은 갔지만 생산자들은 한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중국산 수입염이 국산 천일염으로 둔갑을 해 신뢰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소비자들은 여전히 중국산 천일염보다는 국산 천일염을 선호한다. 김치나 젓갈 등 전통 발효식품에는 천일염이 들어가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198g에 9천7백원 하는 게랑드 소금
중국산 호주산 수입염의 경우 염도가 95%대에 육박하지만 천일염은 85%대로 식용에 적당하다. 갯벌소금이라 미네랄이 많다는 것도 장점이다. 최근 들어 천일염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품질로 따지면 경쟁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개가 갸웃거려질 것이다. 흙 묻은 소금이 대접받는다는 게다. 고급소금으로 유명한 프랑스 게랑드 염전의 소금은 우리나라 천일염전과 생산방식이 같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결정지의 바닥인데, 게랑드 염전은 결정지의 바닥이 갯벌 그 자체로 함초(염분을 머금은 바닷풀)도 뽑지 않고 그대로 놔두고 있다. 갯벌 바닥에서 바로 거둬들이기 때문에 약간의 흙이 포함돼 있다고 해서 회색 소금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흠이 아니라 명품의 기준이 됐다. 게랑드 염전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고, 가격도 세계최고다. 그동안 우리 천일염이 갯벌에서 깨끗한 소금을 걷기 위해 짜낸 온갖 지혜들이 무색해진다. 서울의 한 백화점에서 게랑드 염전에서 나오는 소금을 살 수 있는데 가격은 보통이 198g에 9,700원, 꽃소금은 170g에 1,4000원이다. 이 무게라면 우리 천일염은 200원인 셈이다. 그러니 염주들이 환장할 밖에.
전라남도와 신안군, 목포대학교 등에서는 게랑드 염전과 똑같은 갯벌염전인 우리 천일염을 고부가가치 사업으로 키우기 위해 다각도로 검토를 하고 있다. 맛이나 미네랄 함량 등 성분을 보아도 우리 천일염이 모자람이 없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다. 그러나 아직은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을 책정하고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은 없다. 현행법상 천일염은 식품이 아니라 광물이다. 이 와중에 중국산 천일염이 국산 천일염의 포대로 갈아입는가 하면, 아예 중국산 수입염을 염전에 뿌려 국산인지 중국산인지 모를 소금까지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다. 악덕업자들은 공업용에 쓰이는 소금을 천일염이라고 속여 파는 엽기행각을 벌여 국민 식생활을 위협하기도 한다.
신의도 염전은 3대를 맞고 있다. 관식씨의 둘째아들은 지난해 염전 일을 하겠다며 섬으로 왔다. 목포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아들은 카드빚까지 안게 되자 제 발로 염전을 하겠다며 돌아왔다. 도회지가 좋은 젊은 나이지만, 돈 없이 도시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여름 동안 고생이야 되지만 겨울에 여유있게 지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 겨울에는 스키를 타러 다녔다. 관식씨는 아들도 염전으로 뛰어든 참이라, 내년초에 있을 대한염업조합장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다. 천일염이 이대로 가서는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천일염을 탈수 세척해 깨끗한 소금을 파는 것도 좋고, 게랑드 소금처럼 갯벌에서 그대로 생산해 흙 묻은 소금을 파는 것도 괜찮지만. 중요한 것은 제 값을 받고 파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합장에 당선이 된다면 민간 자본을 유치해서라도 천일염 생산량을 전량 확보해서 조합에서 판매해서 소금을 안정화시키겠다는 것이다. 관식씨의 생각대로 된다면 국산 천일염을 원하는 소비자들은 생산자가 부르는 게 값이 되는 소금을 사야 된다. 그렇다면 현대판 소금의 전매제도가 부활할 것인가. 2세대인 아버지와 달리 관식씨의 아들과 젊은 염주들은 완전자동화된 무인염전을 생각하며 꿈같은 계획을 세운다.
잉여가치는 문명을 낳았고, 문명은 다시 잉여가치를 키웠으며, 그것은 불평등을 불렀다. 문명의 시대는, 생식(生食)의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정착생활을 하게 된 인간은 그 몸이 자연을 거스른 대가로 그 이전과는 달리 많은 것들을 준비하고 쌓아놓아야 했다. 비축은 권력의 배경이자 수단이다.
소금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었지만, 어느 곳에는 있고 어느 곳에는 없었다. 이리하여 소금은 권력이 됐지만, 시간이 흘러 산업혁명의 바람이 불어오자 소금은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값싼 염화나트륨의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구매력의 반란이 시작됐다.
소금 섭취는 필수지만, 돈이 많다고 소금을 많이 먹는 게 아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좋은 소금을 찾는다. 수십 가지의 소금을 용도별로 가려 쓰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소금이 필수품이 아니라 기호품이 됐다. 이것이 세상의 흐름이다.
신의도 염주들은 세상의 흐름에 맞추기 위해 검은색 고무장판을 걷어내고, 함초도 뽑지 않고 내버려 둘 생각을 갖고 있다. 50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옛날 피와 땀, 눈물로 염전을 만들었듯이 또 억척을 부려 염전을 지킬 각오를 다지고 있다. 그러나 이 각오는 그 옛날의 그것이 아니다. 더 많은 돈을 쫒는 염주들의 각오는 더 많은 돈을 더 오래 갖고 싶은 이들의 욕망과 맞닿아 있다. 이미 소금은 부패를 막는 그 무엇이 아니다. 사회가 둘로 갈라지자 소금 역시 둘로 갈라질 채비를 하고 있다. 염전이 귀해졌다. 곧 소금은 기름이 될 것이다.
-11월호(06-11-15)기사임. 필자:박미경-
[* 출처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