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천년 상림 연리목
칠 년 가뭄에는 살아도 석 달 장마에는 못 산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칠 년 가뭄에 비 내리지 않을 때 없고, 석 달 장마에 해 안 뜨는 날 없다는 말도 있다. 칠 년 가뭄이건, 석 달 장마이건, 하늘이 무너져도 살 수 있으니 어떻거나 질긴 목숨이라는 말이다.
옛 제왕의 덕목 중 하나가 치산치수이다. 농본시대이기도 했지만,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으니, 어떻게든 먹고 사는 것의 첫 번째는 산과 물을 다스리는 일이었다. 특히 우리나라는 산지와 하천이 가파르고 길이가 짧다. 비가 오면 상류 지역의 흙과 돌이 수해에 미치는 큰 원인이 된다.
함양의 대관림은 원시림이 아니다. 지금부터 1,100년 전 고을을 관통하는 위천에 둑을 쌓고 심은 우리나라의 첫 인공림이다. 둑을 따라 13만㎡의 평지에 120여 종 2만여 그루 낙엽활엽수가 사는데, 지금은 상림과 하림공원으로 부른다.
관에서 쌓아 대관림이라 했던 이 상림과 하림은 신라말의 학자 최치원의 치적이기도 하다.
경문왕 8년(868), 12살의 최치원은 영암 구림의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갔다. 아버지 견일은 ‘10년 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격려했고, 최치원은 유학 7년만인 874년 18세 때 예부시랑 배찬이 주관한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885년 29세에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많은 글을 썼으니, 황소의 난 때 쓴 ‘토황소격문’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최치원이 귀국하자 헌강왕은 그를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에 임명하였고 이어서 890년의 대산군(전북 태인)에 이어 천령군(경남 함양), 부성군(충남 서산) 등지의 태수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문란한 정치에 실망한 최치원은 895년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 그때의 기록이 해인사의 한 공양탑에 있으니 ‘당토의 병(兵), 흉(凶) 두 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고, 동쪽 신라로 옮겨와 굶어 죽고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다.’가 그것이다. 최치원이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가 쓴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에 의하면 908년 말까지 생존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고려 왕건에게 보낸 ‘계림은 시드는 누런 잎이고, 개경의 곡령은 푸른 솔’이라는 편지글이 있어, 새로운 나라 고려가 일어남을 미리 내다보았음도 알 수 있다.
최치원이 함양 백성들과 함께 조성한 이곳 상림에는 뱀이나 개미가 없다고 한다. 그 까닭은 최치원의 지극한 효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이곳 함양에 있을 때다. 최치원은 홀어머니께 아침저녁은 물론 외출하거나 돌아와서도 반드시 문안을 올렸다. 어느 날, 어머니가 혼자 상림에 산책을 나갔다가 뱀을 보고 놀랐다. 이 말을 듣고 최치원은 숲으로 달려가 ‘상림의 모든 해충은 없어져라. 다시는 이 숲에 들지 마라’고 외쳤다. 그 후로 모든 해충이 사라졌으니, 최치원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과 땅, 미물까지도 감동했음이다.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이 달리 생긴 게 아닐 것이다.
또, 대관림에 나무를 심을 때 쓰던 최치원의 금호미를 나뭇가지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니 이곳 상림을 찾게 되면 그 금호미를 꼭 찾아볼 일이다. 단 마음씨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 최치원이 마음씨 착한 사람의 눈에만 보이도록 해놨기 때문이다.
또, 여기 상림 들머리에 개서어나무와 느티나무의 연리목이 있다. 연리목은 예부터 상서로운 나무로 여겨왔으니, 한 번쯤 이곳 상림의 연리목 앞에서 누군가와 손을 꼭 잡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