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 축제 (Indian Festival)
어메리컨 인디언 축제를 참가했습니다.
아메리카 토착민(-土着民, 영어: Indigenous peoples of the Americas 네이티브
아메리칸)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지칭합니다. 흔히 ‘인디언’이라고도 하나
이는 영어의 ‘American Indian’에서 온 말로, 엄밀하게는 미국내 아메리카 원주민만을
지칭할 때도 있습니다. 언어권에 따라 앵글로 아메리카의 토착민은 인디언,
라틴 아메리카의 토착민은 인디오라 부르기도 합니다.
인디언의 호칭은 원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토착민을 인도인으로
오인한 것으로부터 나왔다는 설이 존재하며, 또한 인디언의 아름답고 자연친화적인
삶의 방식을 보고 신의 품속(In + Dios(스페인어))란 이름으로 지었다는 설도 존재합니다.
때때로 경멸의 의미를 지니는 까닭에 영어권에서는 'Native American'이라
호칭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유력한 가설에 의하면 이들은 수천년 전에 지금의 시베리아 지역에서 베링 해협을
건너 이주한 것으로 생각되는 집단이 아메리카 대륙 각지에 퍼진 후의 후손이라 하며,
이후 지속적으로 동대륙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아왔습니다. 다른 가설에서는 아프리카 및
오세아니아 지역에서 이주해온 집단의 혼입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북미 대륙에서는 지역의 특성에 따라 물소를 주식으로 하여 이동하는 각 부족이나
평지에서 정착생활을 하는 부족 등이 독립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중남미 지역의 일부 -
현재의 멕시코와 중남미 각지- 에서 고대 그리스·로마,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
버금가는 독자적인 고대 문명을 꽃피웠습니다. 미지의 불가사의로 알려져있는
마야, 잉카, 아스텍 문명들이 그것들입니다. 유럽인 도래 이전의 아메리카대륙의
총 인구는 대략 2천~3천만명으로 추산됩니다.
인디언 토산품 파는곳에서
인종학적으로 이들은 몽골반점의 존재등에 미루어 타 인종과 비교하여 몽골인과
유사한 형질을 많이 지녔다고 알려져 있으나, 오랫동안 타 대륙과 접촉없이
독자적인 발전을 이뤄왔기 때문에, 그에 따른 차이도 많다. 일부 문명을 제외하면
소단위 부족을 중심으로 고립적, 독자적 생활을 꾸려왔기 때문에, 타대륙의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던 점은 유럽인 도래이후 인구급감의 주요소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백인식민자들에 의한 노동력착취대상으로서의 이들의 취약성은 이후 노예제를
통한 아프리카인의 강제이주를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의 쇄도와 식민화이후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학살과 노예화, 전염병 등에
의해 그 수가 급감하였고, 특히 카리브 해, 칠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미국 일부 지역
등에서는 사실상 전멸하였습니다. 특히 유럽에서 몰고온 홍역과 천연두 등은
치명적이었는데, 본격적으로 유럽의 침략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래하기 전에
이미 천연두가 남북아메리카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어 학자에 따라 적게는 2/3 많게는
90%의 치사율을 보였다고 가정합니다.
이들이 이런 높은 치사율을 보인 원인으로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이 오랫동안
다른 대륙과 접촉을 하지 않아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유전적 동일성을 보였다는 점,
유럽대륙에서 사람들과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면역력을 높인 말, 돼지같은 동물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에 대한 면역력이 잘 갖춰지지 못했던 점,
유럽에 흑사병이 퍼졌을 때처럼 사람들이 병을 치유한다는 이유로 한 곳에 모여
있었다는 점 등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이에 더불어 유럽인들의 침입은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쇠퇴를 가속시켰습니다.
북미지역의 아메리카토착민들은 미국 정부가 지정한 척박한 보호구역에 1830년 이후
강제 이주당한 비극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현재도 인디언들은 대부분 교육과 취업에서의
어려움과 이로 인한 빈곤을 겪고 있습니다. 중남미 지역에서는 소수백인의 지배하에
사회적 불평등과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분이 인디언 부족의 추장입니다. 지금은 현대사회에 살지만...지금 미국은
인디언보호구역을 만들어 그들에게 정부에서 보조하거나 그곳에 카지노 운영권을
주어 카지노를 운영하게 하지만 실질적으로 미국 유럽인들이 카지노를 운영하며
인디언들에게 이름을 빌려서 인디언들은 술과 마약에 찌들어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인디언들의 축제가 시작됩니다.
이 추장의 문신이 특이합니다. 각지역마다 인디어부족이 있습니다.
북아메리카에는 나바호족(Navajo/Navaho) 네즈퍼스족(Nez Perce) 누트카족(Nootka)
라코타족(Lakota) 모하비족(Mohave) 모호크족(Mohawk) 모히칸족(Mahican/Mohican)
샤이엔족(Cheyenne) 세네카족(Seneca) 세미놀족(Seminole) 쇼쇼니족(Shoshone)
수족(Sioux) 아베나키족(Abenaki) 아시니보인족(Assiniboin) 아파치족(Apache)
와이언도트족(Wyandot) 이로쿼이족(Iroquois) 주니족(Zuni) 체로키족(Cherokee)
촉토족(Choctaw) 카이오와족(Kiowa) 카이유스족(Cayuse) 코만치족(Comanche)
휴런족(Huron)이 있었습니다.
중앙아메리카에는 마야족(Mayans) 나후아족(Nahuas) 아즈텍족(Aztecs)
사포텍족(Zapotecs) 믹스텍족(Mixtec) 토토낙족(Totonac) 타라스코족(Tarascan)
푸레페차족(P'urhépecha/Purépecha) 키체족(Quiché/K'iche') 카치켈족(Kaqchikel)
맘족(Mam) 케치족(Q'eqchi) 카리브족(Carib)이 있었습니다.
남아메리카에는 케추아족(잉카족)(Quechuas/Incas) 과라니족(Guarani) 투피족(Tupi)
(Timoto-cuicas)이 있었습니다.
인디언 후예 자녀들입니다. 귀엽고 예쁜 처녀 인디언 후예를 보니 포카 혼타스가
생각납니다. 포카혼타스(Pocahontas, 1595년경 - 1617년 3월 21일)는 영국인 존 롤프와
결혼한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런던으로 건너가 유명인사가 된 여성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영국 정착민들 사이의 평화 관계를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포우하탄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 추장 와훈수나콕의 딸로, 그녀의 아버지는
지금의 버지니아 주인 미국 동부 지역의 알곤킨 어족부족들의 연합체를 지배하고 있는
부족장이었습니다. 포카혼타스의 원래 이름은 마토아카(Matoaka 또는 Matoika,
작은 눈의 깃털)로, 포카혼타스라는 이름은 포우하탄이 그녀가 어렸을 때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에 지어준 별명입니다(포우하탄 언어로 '작은 장난꾸러기').
이 사람은 부인이 인디언 후예라고 해서 자기도 복장을 입고 왔다고 합니다.
1613년 포카혼타스는 영국-인디언 분쟁을 겪는 동안 영국인들에 포로로 잡혔고,
몸값을 치뤘습니다. 그녀가 잡혀있는 동안,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는
구약성서 창세기의 '리브가'에서 따온 레베카(Rebecca)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습니다.
종족에게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그녀는 잔류를 선택했습니다. 1614년 그녀는
담배 농장주였던 존 롤프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결혼 후에는 남편의 성을 따라
레베카 롤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615년 1월 아들 토머스 롤프를 출산하였습니다.
1616년 롤프 가족은 런던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포카혼타스는 제임스타운 정착촌에
대한 투자를 늘리기 위한 전략으로 문명화된 미개인의 사례로서 잉글랜드 사교계에
소개되었습니다. 그녀는 유명 인사가 되었고, 환대를 받으며 화이트홀 궁전의
가면무도회에도 참석하였습니다. 1617년 롤프 가족은 다시 버지니아로 귀향하는
배를 탔지만, 포카혼타스는 그레이브젠드에서 원인미상의 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녀는 그레이브젠드 교회에 매장되었지만, 이후 화재로 인해 그녀의 정확한 매장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많은 지명과 랜드마크 그리고 상품이 포카혼타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낭만적 상상을 자극하였고, 예술과 문학 그리고 영화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특히 디즈니 애니매션 영화 "포카혼타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 부부로부터 태어난 아들 토머스를 통해 ?운 후손들이
배출되었으며, 버지니아 제일가문에는 대통령 영부인이 되었던 에디스 윌슨과
낸시 레이건 그리고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 등의 유명 인사도 배출되었습니다.
티피(tepee)는 아메리카 인디언이 사용한 거주용 텐트입니다. 원추형으로 배열한 장소
위에 물소 가죽을 덮어 만듭니다. 텐트는 땅바닥에 나무 말뚝을 박아 고정하며,
정면에 나무핀으로 닫아둔 틈이 출입문 구실을 합니다.
티피는 라코타어에서 온 말이다. 라코타어로 티피는 ‘주거’(house)를 의미하며,
거주하다라는 동사 티(thí)에서 온 말이었다.
1607년 4월, 영국의 개척자들은 버지니아에 도착하여 거류지를 세우기 시작한다.
포카혼타스는 당시 12세에서 14세의 어린 소녀였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포우하탄 부족
연합의 대추장이었습니다. 개척자들을 통솔하는 자 중의 한 명인 존 스미스는
당시에 포우하탄의 사냥꾼들에게 잡혀서 포우하탄 연방의 추장이 있는 마을인
웨로워코모코로 가게 됩니다. 스미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사형을 당하기 위해
바위에 눕혀졌습니다.
곧이어 추장이 곤봉으로 그의 머리를 내려치려 하자, 포카혼타스가 스미스에게 뛰어들어
그를 감쌌습니다. "내가 사형에 처할 때,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맞을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내 목숨을 살렸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하였고
나는 제임스타운으로 안전하게 호송될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사건으로 인해
다른 사람과 영국인 개척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됩니다.
존 스미스의 사건은 그가 남긴 글만이 유일한 기록으로, 1860년대부터 그 신빙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이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의문은 제임스가 일찍이
버지니아에 대한 두 개의 책이 출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1616년에 앤 여왕에게 포카혼타스를 왕족으로 대우 해줄 것을 탄원하는 편지에서
포카혼타스와의 인연이 처음으로 언급된 점을 이유로 들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간 격차는 스미스가 유명세가 있던 포카혼타스와 자신과의 연관성을
높이기 위해 사건을 과장하였거나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최근의 책에서 J.A.O. Lemay는 스미스의 초기 기록이 처음에는 지리적이고
민족적인 내용이였다는 것과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만 머무르지 않은 것을 언급하며
그때까지는 그 사건을 담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인디언 아줌마와 함께
이 사람은 인디언 후예가 아니라 인디언 축제때 참석한 유럽사람인데 복장을
유럽의 선원복장을 하여서 같이 찍었습니다.